< 에세이 > My Way 산책
( 이 글은 2011. 5. 고교 졸업 50주년 기념문집에 일부 삭제하여 게재된 에세이의
무삭제 원문입니다 )
이 길 성
나의 길, 나만의 길
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올드 팝 최고의 명곡 My Way ( 나의 길 )는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게 하는 그 곡조 만큼이나 내면적 깊이 있는 가사 때문에 우리를 감동시
키고 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아는대로, 노래속의 주인공 “나”는 우리처럼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나의 인생길 ( My Way )이 성공적 이었음을 회고하며 인생 성공보다는 사나이로서 내 방식대로 소신에 찬 나만의 길 ( I did it my way )을 걸어 왔음을 확신을 가지고 친구에
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았네 ( I've lived a life that's full )
나는 다양한 인생의 경험을 하였지 ( I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
후회되는 일도 조금은 있으나 ( Regrets, I've had a few )
해야 할 일은 다 했고 끝까지 해 냈었지 ( 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
과욕을 부리다가도 과감히 포기하기도 했고 (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I ate it up and spit it out )
사랑도 했고 웃고 울기도 했지 ( I've loved , I've laughed and cried )
실컷 가져도 보고 잃을 만큼 잃어도 보았지 (I've had my fill, my share of losing)
그러나 이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 소신대로 나만의 길을 살아 왔다는 것이라네
(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
남자로서 자기자신을 잃지 않고, ( If not himself, then he has not )
용기있고 당당하게, ( I face it all and I stood tall )
부끄럽지 않게, ( I did all that …not in a shy way )
비굴하지 않게, (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
회피않고 떳떳하게 (I took the blows ) 살아 왔다네
말하자면 성공했지만 성공을 위해 불의 같은 것과 타협하지 않고 사나이의 긍지로 자긍심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시속어로 말하면 “ 당신 멋져 ” (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 의 사나이의 길을 살아 왔다는 것이다.
번역, 그 마이웨이
나는 이처럼 곡조와 함께 가사가 너무나 좋은 마이웨이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동문들 앞에서 노래 부를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동문들의 추천으로 어쩔수 없이 동창회 모임에서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마이웨이를 부를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지역모임 노래 경연대회 광화문모임 대표로서, 다음 번은 개그맨 김학래가 사회를 본 동창회 회갑잔치에서 였다. 같은 노래를 두 번 부른다는 것이 나에게 조차 식상하는 일이기는 했으나 회갑잔치 성격상 마이웨이가 가장 적당할 것으로 생각되어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동창 회갑연에서 갑자기 내가 노래 주자로 지명되었을 때는 자격지심(自激之心)이
들어 노래부르기 전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나는 회갑잔치에서 마이웨이를 부를 자격은 없다. 그러나 나의 인생길이 여러분 만큼
성공적이지는 못 할지라도 여러분과 같이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게 나만의 길을 걸어 왔기
에 오늘 여러분의 자랑스런 인생길(Your Way)을 대신하여 축가로 My Way를 부르겠 “ 노 라고.
팝송 마이웨이와의 인연이 이렇다 보니 어디서 이 노래라도 나오면 좀 더 깊은 애정과 관
심을 갖고 노래를 경청할 수 밖에 없었다.
작년 (2010년)말 KBS 송년 열린음악회 마지막 순서로는 가수 조영남이 나와서 그의 특유한 창법인 마이웨이식으로 음정에 변화를 주어가며 마이웨이를 열창하고 있었다.
TV화면 밑으로는 영어가사와 함께 나란히 번역가사가 친절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눈을 의심할 정도로 중요한 핵심내용의 가사가 내 생각에 너무나 오역되어 지나가고 있지 않는가.
번역가사중 문제가 여러군데 되나 적어도 주제내용인 두가지 결정적인 오역에 대하여는
이 노래에 대한 애착심도 있지만 전 국민에게 방영되는 국영방송의 성격상 그냥 간과하고
넘어 갈 수 만은 없었다. 이런 사정이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점으로 가서 권위있는 노래책에 나와 있는 번역을 확인하기로 했다.
대형서점에서 제일 권위있고 베스트셀러라는 팝송노래책 ( 김기덕 (MBC국장,겸임교수)
의 한국민이 좋아하는 팝송 베스트 100 )을 추천받아 해당 번역부터 시작해서 다른 번역
까지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 생각으로는 이 책도 여기저기 엉망진창이 아닌가.
두가지 주제내용 중 첫 번째인 마이웨이 마지막 5절의 원어 가사와 그 번역부터
보기로 하자.
For what is a man, what has he got ?
If not himself, then he has not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and did it my way
살아 가는 이유가 무엇이며 가진 것이 무슨 소용일까
스스로 올곧게 서 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진실을 말하고 사는게 중요한 거야
그래야 진정한 남자라 할 수 있지
내 삶이 보여 주고 있듯 난 당당히 살았고
나만의 길을 걸어 왔어 ( 열린음악회 )
노래가사의 번역은 시어 (詩語) 라는 특수 성격상 직역이든 의역이든 대칭번역이 안 되더라도 의미의 전달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역이라도 정당한 이유없이 가사내용의 의미와 순서에 변형을 가져 온다면 이는 이미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고 황당무계라는 비판을 면치 못 할 것이다.
남자이기 위해서 무엇을 가졌나요
자기자신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 한 것입니다
약자들의 하는 말이 아닌
진정한 자신들의 느낌을 말하면서
전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제뜻대로 살았다고 전해 질 것입니다 ( 팝송베스트 )
한 분야에 수십년 종사한 전문가가 아무런 논리도 없이 뒤죽박죽으로 이 정도 번역할
수 밖에 없는지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날 보고 번역해 보라고 하면 완벽하게 시적 표현을 할 자신은 없으므로 주저되지만, 적어도 원어에 충실하고 논리정연하게 의미가 통하도록 대칭적 번역을 하고 싶다.
무엇 때문에 남자인가, 남자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남자가 자기자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지
남자란 자기가 진정으로 느낀 것을 솔직히 말하고
무릎 꿇는 자의 비굴한 소리를 하지 않으니까 말이네
내 경력은 보여 준다네, 내가 인생의 주먹을 맞아 가면서 내 소신대로 나만의 길을 걸어 왔다는 것을 ( 필자 )
이제는 두 번째 주제 내용인 4절로 가는데 그 중 앞뒤는 빼고 간결하게 해당 가사만 보기로 하자.
And now, as tears subside, I find it all so amusing
To think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슬픔이 가고 나니 모두가 즐거운 추억이지
살아 온 날을 떠 올리며 자랑스럽게 말할테야 ( 열린음악회 )
이제 눈물이 가신 뒤에 보니 모두 즐거운 추억인걸 알았습니다
제가 했던 모든 일을 생각하면서 부끄러워 하지 않는 투로 말해도
되겠죠 (팝송베스트 )
후반부 번역이 문제인데 두 경우 모두 “자랑스럽게” 든 “부끄워 하지 않게” 든 ‘말하겠다“고 했는데 이해가 되는가. 이는 원래 본문에 연결해야 할 수식어로 모두 둘 다 삽입구를 수식하고 있으니 말이 통할 리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내가 수정해야 할 차례여서 번역은 하겠지만 이것은 기초에 관한 문제 같다.
이제 눈물이 가라앉은 뒤에 보니 그 모든 것이 즐거운 추억이라는 걸 알았다네
감히 말하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게 내가 그 모든 것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말일세 ( 필자 )
인생을 결코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소신에 찬 나만의 길은 이 노래의 핵심의 하나인데 이를 왜곡하고 있으니 천부당 만부당하지 않은가.
내친 김에 팝송베스트의 다른 팝송 번역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지적하고 싶지만, 이 글의
주제의 범위에서 벗어 나므로 여기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올드 팝 명곡 중에서만 한 두가지 더 첨언하고 넘어 가기로 한다.
먼저, 비틀즈의 Yesterday, 1절과 3절에 걸쳐 나오는 Oh! I believe in yesterday 의
대귀(對句)로 나오는데 내가 보기에 팝송가사 번역중 혼란이 가장 극심한 귀절이다.
Oh! yesterday came suddenly
오! 문득 지난날이 떠 오릅니다 ( 팝송베스트 )
오! 지난 날이 갑짜기 왔으면 좋겠어요 ( 필자 )
이 가사의 앞의 가사에서 “갑짜기” 어두운 그림자가 닥 쳐 왔다고 하는데 ( Suddenly …there's a shadow hanging over me ) 이 “갑짜기”를 반복 사용하는 기법으로 보고
또한 I wish 가 생략된 가정법 과거로 보아 이같이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다음으로, 죤 덴버가 작곡하고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노래한 Perhaps Love,
그 클라이막스인 마지막 소절로서, 이는 내 생각으로는 세상의 모든 열정적인 사랑의
찬가중 상대방을 가장 감동시킬 최상의 표현이지만, 불완전한 번역으로는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도 있는 귀절이다.
If I should live forever and all my dreams come true,
my memories of love will be of you
내가 영원히 살게 되어 꿈이 이루어 진다면
내 사랑의 추억은 당신일 것입니다 ( 팝송베스트 )
내가 영원히 살게 되고 내 모든 꿈들이 이루어 진다 해도
내 사랑의 추억들은 오직 당신에 대한 것 뿐 일것입니다 ( 필자 )
조건문으로 번역한 내용만 보고 원어의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있다면 이는 고단수의
추리력의 소유자일 수 밖에 없다. if 를 even if 라는 소위 양보문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한 가지 고정관념대로 사용하여 원어 의미를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토퍼슨 작곡의 For The Good Times, 헤어진 연인과 하루밤을 보내
면서 끝나버린 사랑을 슬퍼하며 그 옛날 서로 좋았던 시절을 생각해서 한번만이라도 사랑하는 척만이라도 해달라는 애절한 멜로디와 가사가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다.
for the good times
그 좋은 시절을 위하여 ( 팝송베스트 미수록 )
그 좋았던 시절을 생각해서 ( 필자 )
가수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처럼 단순하고 멋 있는 이 은유적 표현에 시비를 거는
완벽주의자도 없겠지만 사실 이때의 for는 문맥상 considering ( 고려하여 ) 이라는 뜻일
것이다.
외국 문학작품이나 기타 저작물은 전문가들이 번역하고 관심도 높지만, 적어도 팝송은 성격상 전문가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아직 외국어에 익숙치 않은 어린 청소년세대들이 팝송의 주 애호층인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사회적 공기인 방송매체나 출판물에서 만이라도 팝송번역을 사소하다고 경시하지 말고 좀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접근하여 경솔한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종교의 길, 무종교의 길
우리 인생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행복 ( 幸福 )이고 그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두 가지 큰 길은 아마도 성공 ( 成功 )과 건강 ( 健康 )일 것이다.
팝송 마이웨이가 우리의 인생길을 노래하지만 건강을 제외하고 성공만 노래한다고 이상할 것은 없다. 인생에서 건강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이 노래의 주제가 그 동안 걸어온 인생
길의 성공과 성취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팝송 마이웨이는 종교 ( 宗敎 )도 거론하지 않는다. 종교는 인생에 있어서 현세 ( 現世 )의 삶의 행복, 성공, 건강뿐 아니라 죽음이후 내세 ( 來世 )까지도 대상으로 하며
이성(理性)의 세계가 아닌 영성(靈性)의 세계가 지배하므로 각자의 극단적인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진정한 마이웨이 (나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길에 들어서서 인생의 종점을 향해 달려 가는 우리들에겐 얼마남지
않은 인생길에서 현세의 행복, 성공, 건강도 절실하고 중요하지만, 내세문제도 더욱 절실
한 관심사다.
현세의 삶이 끝나고 곧 들이 닥치는 죽음, 그 죽음 이후에는 어떤 길이 있는 것일까.
죽음이후에도 다시 인생길이 계속 된다면 그것이 내세요 영생이다. 종교는 대체로 우주
만물을 섭리하는 신이나 신과 같은 궁극적 실재와 내세의 영원한 삶,영생(永生)을 인정한다.
그래서 죽음은 영생으로 가는 내세의 시작일 뿐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종교의 길을
갈 것이고 죽음으로 인생길은 완전히 끝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무종교의 길에 설 것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나의 인생관,종교관에 따라 엄숙하게 결정해야 할 나만의 마이웨
이다. 그 선택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정당성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 종교의
정당성 그 교리와 내세관 혹은 무종교의 정당성을 가지고 어느 길이든 선택해야 한다.
세계 3대 종교로는 세계 60억 인구의 3분의 1 이 믿는 기독교 (천주교 6분의 1, 개신교
17분의 1 ), 5분의 1이 믿는 이슬람교 와 신자수로는 16분의 1로 힌두교,유교 다음이지만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은 불교를 들고 있고, 무종교인은 8분의 1을 차지한다.
한국의 경우는 기독교가 3분의 1(개신교 5분의 1, 천주교 9분의 1), 불교가 4분의 1이고
무종교가 2분의 1로 세계 비율보다 높은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자 이제 이 길들의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잠시나마 3대 종교의 길 그리고 무종교의 길로 산책을 떠나기로 하자.
■ 불교 ( 佛敎 )
먼저 갈길은 가장 긴 2,500년의 역사를 갖는 불교다.
불교는 6년간의 수행으로 35세 때 우주와 인생의 영원하고 보편타당한 최고의 진리라는
깨달음 을 얻으신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종교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은 신의 존재와 우주 세상창조를 부정하는 무신
론으로서 어떤 절대자를 통한 구원이나 은총같은 것이 아니라 수행정진을 통해서 진리의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참된 완성의 삶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최고의 이치라는 깨달음( Enlightenment, 覺 )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첫째, 그 핵심은 우주와 인생의 가장 큰 원리로 드는 “어떤 것에 말미암아 (緣) 생긴다 (起)”는 의미의 연기법( 緣起法 )인 것 같다.
연기법은 세상 만물은 끝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영원 불변한 실체는 없지만 일정한 법칙
즉 인과(因果)의 법칙과 인연(因緣)의 법칙에 따르고 만물은 서로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이 법칙에 띠라 추구한 끝에 고(苦 )의 근원을 밝혀내고 이를 멸함으로써 인생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기본적인 사상인 삼법인(三法印)과 실천원리로서의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가 있다.
三法印이란 3가지 진리라는 뜻으로 諸行無常, 諸法無我 (세상만물은 인과 인연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므로 독자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 一切皆苦 의 기본원리를 말한다.
四聖諦란 4개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4단계의 실천원리를 말한다.
첫단계인 苦聖諦는 인생은 生老病死만 아니라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등 八苦처럼
모두 苦라는 것이다.
다음 集聖諦는 苦의 원인은 無明과 함께 渴愛라는 집착으로 인한 번뇌망상 때문인데
이중 三毒이라 불리우는 貪(탐욕), 瞋(성냄), 癡(어리석음)는 독약과 같다는 것이고 ,
다음 滅聖諦는 苦의 원인을 滅하면 涅槃, 解脫의 경지에 이르고 輪廻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道聖諦는 苦를 滅하려면 中道의 길인 八正道를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八正道는 正見, 正思, 正語, 正業( 올바른 행위), 正命(올바른 직업), 正精進, 正念,
正定(올바른 자기몰입)이라는 여덟가지 구체적인 실천방법이다.
불교의 내세관 ( 來世觀 )은 내세와 영생을 인정하는 점에서 타종교와 같으나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인간 스스로 구원하고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력신앙인
점에서 타력신앙인 기독교와 다르다.
첫째, 일차적으로는 인도의 전통 신앙인 윤회( 輪廻) 사상에 따라 모든 생명체는 자신
의 업(業)에 의해 끊임없이 생사를 거듭하며 선업을 지으면 내세에 상층계급이나 천상이
라는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을 지으면 하층계급, 짐승이나 지옥처럼 나쁜 과보를
받는다.
둘째, 궁극적으로는 윤회에서 벗어나 아무런 걸림이나 장애가 없이 자유자재하고
삼독이 완전히 제거된 고요하고 평안한 경지인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에 이르러
극락에서 영생한다.
불교에서도 기도 (祈禱 )는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처럼 살아계시다는 절대자에게 드리는 기도라면 그 섭리에 따라
강복이나 은총이 베풀어 질 수 있겠지만, 2500여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대자
대비에 의한 가피 (加被 )(기독교에서의 축복, 은헤, 은총과 같은 의미 )를 베풀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나는 가져 왔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지성인 불자들은 진정한 불교에서의 기도는 기독교에서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원적 기복적 기도와 달리 기도자 스스로의 내성적 반성이며 다짐
이고 자기자신의 마음을 닦는 작업일 뿐이라고 무신론에 맞게 지성적으로 변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에 일면 수긍하면서도 절대자에 대한 기도의 성질이 종교에
따라 다를 수는 없을 것으로 보고 이를 내 나름대로 다른 각도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는 태국처럼 소승(小乘) (작은 수레에 소수 선택 받은 자만 태우고 간다는 뜻)불교가 아니라 대승(大乘) (큰 수레에 모든 중생을 태우고 간다는 뜻) 불교다.
대승불교에서는 실존의 석가모니 부처이외에 경전에 나오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같은 가공적인 부처를 신으로 인정하는 유신론적 입장이므로 결국 가피가 가능하게
되어 기복적 기도가 가능하게 되는 것 아닌가 생각 하기 때문이다.
■ 이슬람교 ( 回敎 )
다음 갈길은 1,400년 역사의 이슬람교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적자(이삭)의 이복형인 서자 (이스마엘)의 후손
인 마호메트가 창설한 종교로 기독교와는 같은 조상을 갖고 있다.
이슬람교의 교리는 六信五行이라고 불리우는 6가지 종교적 신앙과 5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한다.
六信이란 알라신, 천사들, 경전들, 예언자들, 내세, 예정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五行이란
신앙고백, 기도, 희사, 금식, 순례의 의무적 행위를 말한다.
알라는 아랍어로 신이라는 의미로 고유명사가 아니고 본래는 기독교의 신과 같은 유일신
이다. 그러나 예언자중 위대한 6명으로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호메트를 들고
이중 마호메트가 가장 위대한 마지막 예언자라고 하고, 예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성을 부인하고 단지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슬람교의 내세관 ( 來世觀 )은 다른 종교와 같이 내세와 영생을 인정하나 기독교와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기독교와 달리 원죄라는 것이 없으므로 신과 인간 사이에 메시아가
필요없다고 한다.
첫째, 현세를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이 땅에 내려 왔고 그 후손들은
신이 위탁한 임무를 마치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 위해 죽음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비교적 없다.
둘째, 알라신에게 경배하는 삶을 영위하면 사후 천국에서 영생한다.
■ 기독교 ( 基督敎 )
다음 길은 2,000년 전 탄생한 세계 최대종교인 기독교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주만물과 함께 창조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BC 4년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시작된 종교다.
기독교의 정통교리 (正統敎理) 를 핵심적으로 요약한다면 무엇일까.
첫째, 하나님의 우주만물의 창조 (創造) 와 섭리 (攝理)다.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여 태초에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
셨으며 , 이를 세상 끝날까지 보존하고 역사하고 지배하고 계신다. 창조시기는
성경의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하면 약 6,000년전으로, 약 130억년 전부터 우주와
생명체가 우연히 시작하여 진화했다는 진화론은 단호히 배격된다.
둘째,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代贖) 과 구원 (救援)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 고난을
당하심으로 불순종으로 인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셨다. 인간은 예수그리스
도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고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셋째, 예수그리스도의 재림 (再臨) 과 최후심판 (最後審判)이다.
사후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종말에 재림하시는데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
만 재림직전에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재림후엔 죽은자는 부활해서 산자와 함께 모두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되고 그 결과 천국과 지옥의 영원한 처소로 나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삶의 실천원리로는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
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 고 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
장 큰 계명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의 내세관 ( 來世觀 )은 타 종교와 같이 내세와 영생을 인정하나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는 구원될 수 없고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타력신앙인 점이 불교와
다르다.
첫째, 인간은 소멸하는 육체와 불멸하는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어 인간은 사후에 육신
은 흙으로 돌아가 썩지만 영혼은 불멸하여 신자의 영혼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에서 고통당한다 (전12:7). (그러나 성경에 명시적 귀절은 없다고
본다.)
둘째,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세상종말시에 마지막 심판을 받고 신자는 하나님과 함께 영생한다.
기독교 교리중 대속교리 (代贖敎理 )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근본교리가 압축되어 있어서 예배시 주기도문과 함께 신앙고백
으로 쓰이는 사도신경속에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대속
교리가 핵심교리라면 사도신경에 포함시켜 신자들이 항상 신앙고백 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과 의심을 나는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은사이신 이 시대의 대표지성 이어령( 李御寧 )선생님은 작년(2010년)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 하심으로써 많은 무신론자 지성인들을 충격에 빠뜨리셨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서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비판해 온 냉철한 대표적 지성인이
었기에 그의 신 앞의 참회와 굴복은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분을 이성과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떠나게 만들었을까.
그분은 “ 지성에서 영성으로 ” 라는 베스트셀러 저서를 통해 그 신앙의 계기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따님이 암과 실명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된 사건에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시고 있다.
민아의 문병을 갔던 하와이의 작은 교회에서 저는 처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딸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자녀로
살겠나이다“ 라고요.
딸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기적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기적은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셔도
언젠가는 누구나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진짜 기적은 단 하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술가적 기질과 초월적 영성의 기질이 있습니다. 과학은 설
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며,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적 현상은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신앙은 경험하는 것입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과 접속하면 신앙의 세계를 내려 받는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았습
니다. 그동안 예술가로서 저만의 우주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 그 우주를 걷었지요.
……지금까지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몇 십배 더 크고 귀한 창조주를 인정함
으로써 저의 예술적 지평은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
기 힘듭니다.…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
니다.……
그 계기가 어떤 것이든 절대로 신을 믿지 않을 것 같은 그분의 신 앞의 변신은 그분을
칭송하고 흠모했던 무신론자 지성인에게는 그 어떤 전도보다도 영성의 세계에서 신을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또 다른 계기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무신론 ( 無神論 )
이제 종교의 길을 벗어나서 무종교의 길을 따라가 보자.
여기서는 진화생물학과 천체물리학 두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명성이 높은 2인의 무신론 학자의 의견과 함께 2인의 유명 학자의 반론을 들어 볼 것이다.
먼저, 진화생물학 ( 進化生物學 ) 에서 본 무신론 입장이다.
옥스퍼드대 석좌교수인 리차드 도킨스 ( Richard Dawkins )는 1976년 첫 저서 The Selfish Gene (이기적 유전자 )이래 2010년 까지 모두 10권의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다. 그는 The God Delusion ( 만들어진 신, 신이라는 망상 ) 의 서문에서 누군가의 견해를 빌려 종교는 망상에 사로잡힌 정신장애 라고 비판하면서 공격적으로 출발하고 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 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 라고 한다
( When one person suffers from a delusion, it is called insanity.
When many people suffer from a delusion, it is called Religion.)
먼저 1986년, The Blind Watchmaker ( 눈먼시계공 ) 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어떻게
생명의 기원과 생명의 복잡성을 신의 설계없이 증명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첫째, 최초의 생명이 어떻게 생겨 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원시수프이론과 함께
무기광물질이론(the inorganic mineral theory)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둘째, 생물의 복잡성은 시계공 같은 신이라는 설계자가 창조한 것을 입증한다는 창조
론에 대해서는 생명의 복잡성을 설계한 시계공은 오랜 시간속에서의 누적적 자연선택
이며 이는 특정한 계획이 없는 눈먼 시계공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다음 2006년, The God Delusion ( 신이라는 망상 ) 에서는 진화론 입장에서 신의 부존재
를 논증하고 종교를 비판한다.
첫째,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이 고물야적장을 휩쓰는 태풍이 운좋게 보잉 747을 조립
해 낼 확률보다 크지 않다는 창조론자들의 비 개연성 ( improbability )논쟁에 대하여는
해답은 신의 설계(Design)도 자연의 우연(Chance)도 아니고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다.
자연선택이 누적적 과정(Cumulative Process)이고 점진적 단계(Gradual Degrees)로 진화
한다는 누적의 힘(the Power of Accumulation)을 창조론자는 이해 못하고 있고 현재까지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주와 지구가 생명에 우호적이고 친화적인 이유를 설계론으로 설명하나 진화론에서는
자연선택과 생명이 출현할 수 있는 행성이 10억개가 넘는다는 인본원리(Anthropic Principle)
로 설명할 수 있다.
둘째, 종교는 증거가 아닌 잘못된 신념에 근거하므로 신이라는 가설은 망상이다. 종교는
폭력,전쟁등 사악한 행위를 조장하고 초래한다.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칼 세이건, 스티븐 호킹은 모두 인격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다.
병원에서 환자에 대한 대규모 중보기도 실험을 한 결과 기도의 효험은 전혀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에 대하여 복음주의 신학자이며 옥스퍼드대 학장인 알리스터 맥그라스 (Alister McGrath)
는 Dawkins Delusion ? (도킨스의 망상 ) 에서 도킨스의 무신론이야 말로 악의적인 신에
대한 망상이라고 반론을 펼치고 있다.
( 맥그라스는 옥스퍼드대에서 분자생물학과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킨스가 유신론자에서 무신론자가 된 것과 반대로 무신론자였다가 유신론자가 된 정반대의 역정
으로 더욱 흥미를 야기한다.)
첫째, 과학은 그 한계 때문에 신이 없음을 증명할 수 없다.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초월적 질문인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은 종교와 형이상학에 맡겨
야 한다. 도킨스는 과학이 신에 대한 신앙을 파괴했다고 하나 중요한 점은 상당히 많은 과학자들이 신을 정말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1916년과 1997년 설문조사결과 신을 믿는 과학자는 40%수준이 유지되고 있다.
둘째, 종교적 폭력이 문제되나 종교만 폭력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자살 폭탄테러의 근
본적 동기는 도킨스가 보듯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도킨스는 종교는 악하고 해롭다고 하나 종교적 믿음과 참여가 인간의 행복과 장수에 긍정
적이라는 것은 무신론자조차 인정하고 있고 증거가 축적돠어 있다.
종교가 사라진다 해도 다른 사회적 인자 등장으로 인류의 분열이 끝나지는 않는다.
다음, 천체물리학 ( 天體物理學 ) 에서 본 무신론 입장이다.
물리학계는 지금까지 신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천체물리학자이며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인 스티븐 호킹 ( Stephen Hawking )은 베스트셀러인 2010년, The Grand Design ( 위대한 설계 ) 에서 우주와 생명을 신이 창조
한 것인가 자연법칙에 의해서 스스로 발생한 것인가에 대하여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충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창조론에 대하여 우주가 창조주의 뜻이 아니라 중력의 존재가 우주의 탄생인 빅뱅을
이끌어 무의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중력과 같은 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주는 제6장에서 기술한 방식으로 무로
부터 자기 자신을 창조할 수 있고 창조할 것이다. 자발적 창조야말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이유,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신에게 호소할 필요는 없다.
( Because there is a law like gravity, the universe can and will
create itself from nothing in the manner described in Chapter 6.
Spontaneous creation is the reason there is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why the universe exists, why we exist.
It is not necessary to invoke God to light the blue touch paper
and set the universe going. )
이에 대하여 옥스퍼드대에서 채플을 담당하는 수학과 교수 존 레녹스 (John Lennox)
는 저서 2011년, God and Stephen Hawking : Whose Design is it anyway ? ( 신과
스티븐 호킹 : 누구의 설계인가 ) 에서 “ 우주는 신의 존재없이 설명할 수 없다” 고 하며
호킹박사의 주장을 비판했다.
호킹박사는 “지구생명체가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 the explanation as
to how life on Earth came into being ) 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물리법칙 ( the law
of phisics, no the will of God)으로만 가능하고 빅뱅( the Big Bang )은 중력과 같은
법칙들의 필연적 결과 (the inevitable consequence of the laws such as gravity )“
라고 한다.
그러나 존 레녹스는 이에 대해 “ 물리법칙이란 일정한 환경에서 일어 나는 것에 대한
단순한 서술 일 뿐이다. 처음에 중력은 어떻게 존재하게 됐다는 말인가 ( How did
gravity exist in the first place ? ). 인간도 분자들의 무작위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 be nothing but a random collection of molecules ) 말인가 “ 라고 비판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별한 종교의 길, 무종교의 길은 우리 모두 이미 선택했거나 반드시 선택해야
할 마이웨이, 나만의 길이다. 그러나 소신있게 선택한 나만의 길 일지라도 머나먼 인생길의 여정에서는 비바람 거센 폭풍우라도 조우하거나 안내지도의 오류라도 발견하면
마이웨이의 수정을 고민하고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수 많은 학자,과학자,신학자,성직자들이 이 길의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유신론과 무신론 그리고 종교간 진리성을 놓고 논쟁하여 왔고 앞으로도 그 논쟁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의 선택은 진정한 마이웨이의 영역이라 우리 인생길이 끝날 때 까지는 승자도 패자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떤 역정을 통해서 어느 길을 마이웨이로 가고 있는가. 어떤 폭풍우를 만
났으며 어떤 오류를 안내지도에서 발견했는가.
종교, 그 마이웨이
■ 불신앙의 길
젊었을 때 나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때 교회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종교보다도 개신교가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마음 깊숙히 가까울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두가지 사유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첫째는 종교와 과학간의 좁힐 수 없는 괴리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영생의 문제였다. 나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어떻게 자연법칙에 어긋나게 부활해서 영생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인지 쉽게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자손을
통해 자손대대 영원한 생명을 이어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는 순리 같았고 영생은
단지 인간의 욕심과 소망이 만들어 낸 허상 같았다.
그 다음 문제가 지금 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이었다.
이미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의 과학적 지식은 창세기 우주 창조 이야기를 신화의 범주
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또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나 노아의 홍수 사건 등은 신은 아담의 범죄를 알 수
있었다는 그 전지 전능성 때문에 , 혹은 역사적 사실과의 상치성과 실현 불가능성 때문에
술좌석 젊은이들의 조롱대상이 되곤 했다.
둘째는 한 무신론 철학자 의 반 기독교적 에세이가 준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교 후레쉬맨 시절에 기독교 문헌 가운데 성경을 빼고는 제일 먼저 본격적으로 접한 것이 공교롭게도 그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버트란
드 러셀 (Bertrand Russel ) 의 Why I am not a Christian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 ) 이
라는 에세이였다. 이는 당시 대학 영어 교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먼저 유신론에 관한 5개의 주장에 대해 부당성을 논증하는데, 첫 번째 주장인 제 1
원인론 ( The First-cause Argument ) 에 관해서는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하나
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하나님
처럼 원인없이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할 것 “이라고 주장한다.
또 예수그리스도는 최선 최현의 사람 (the best and wisest of men )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그의 재림 임박 예언이 실현되지 않은 점, 영원한 형벌의 지옥을 믿고 있었다는
점, 무화과 나무가 제철이 아니라 열매가 없었는데 이를 저주해서 시들게 한 점 등을 거론
하며 지혜나 도덕적으로 석가나 소크라테스보다 못 하다고 비난한다.
끝으로 종교의 주요기반은 패배,죽음 같은 두려움 ( Fear )인데 과학과 지성은 이를 극복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신앙의 길
그러나 나는 30대에 접어 들자 과거에 가졌던 회의적 요소들을 완전히 청산할 수 없었음
에도 불구하고, 신에 귀의하기로 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결심하고 교회의 문을 두드
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가지 동기가 나를 그렇게 인도 했던 것 같다.
첫째, 인간을 보살피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갈구였다.
나는 당시 꼭 성취할 것으로 확신했던 목표가 무산되어 자기 과신의 교만이 깨지자 전지
전능하시다는 절대자에게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신앙은 영혼이 잘 됨과 같이
(구원) 범사가 잘 되며 (만사형통) 강건하게 (건강) 된다는 순복음교회가 강조하는 소위
3박자 축복 신앙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었다. 그것은 사실 결코 바람직 하다고 볼 수
없는 기복신앙의 시작이었다.
나는 기독교가 영원한 진리라고 확신하고 유교 전통과 민간 신앙에 익숙하신 부모님께
전도했고, 당시 서울대 명예교수셨던 선친 ( 경기 16회, 형님 두분 51회 53회 )과 나중에 동숭교회 명예집사가 되신 선비(先妣)께서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의 간청을 선뜻 받아들여
주님을 영접하시게 되었다.
그후 나는 만혼 이였는데다 10년 가까이 아이가 없었고 거의 포기상태에 있었다. 그런
데 기적같이 건강한 외아들 (대원외고, 고대 경영대 거쳐 고대 로스쿨 재학) 을 얻게 되었다.
나는 아내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고 감사드렸다.
둘째, 헌신적이며 독실한 신앙인의 삶에 대한 흠모와 그 영향이었다.
청소년기부터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던 슈바이쳐박사는 존경대상 상순위였다. 또한
120여년전 열악했던 이땅에서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에 헌신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
러를 비롯한 많은 외국의 선교사들, 특히 선박 충돌 사고때 조선인 신자를 구출하려고
바다에 뛰어 들었다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삶은 감동적이었다.
또한 나는 영락교회 한경직목사님의 성자같은 삶의 역정을 너무나 흠모했다, 그분의 일생
은 사후에 집한채 땅한평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그야말로 요새 억대 연봉, 억대 외제차의
주인공 목사들과는 거리가 먼 신행일치의 삶이었다. 나는 이 위대한 지성인들이 신앙인이
되어 그토록 헌신 해야 했던 그 신앙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차원은 다르지만 미션계 학교를 나와 신앙이 독실한 아내 이권사의 신앙적 열정은 나의 부족한 신앙에 대한 보이지 않는 채찍이었다.
■ 공격받는 신앙
지금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과학과 종교학으로부터 집요한 공격과 비판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성경 창세기에서 6천년 전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천지창조를 했다는 창조론은 이제
진화론과 우주자생론에 의해 초토화 되고 있는 형편이다.
진화론 등에 의하면 약 130억년 내지 150억년 전에 빅뱅이라는 거대한 폭발로 우주가
탄생하고, 약 45억년 전 태양계에 지구가 형성되고, 약 36억년 전에 원시분자라 불리는
유기분자 덩어리가 생기고 우연히 자기복제의 기능을 가진 유전자로 발전하여 복제를
거듭하며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 2억년 전에 포유류가 등장하고 약 6천5백만년 전에 공룡이 멸망한 다음 ,
약 5백만년 전 영장류 무리중에서 원시인간이 출현하고, 1백만년 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현재의 인간종이 출현했다는 진화론적 사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론을 진화론에 맞게 수정하여 새로 등장한 것이 지적 설계론 (Intelligent
Design ) 인 것이다. 즉 신은 일반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법칙도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입장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신의 점진적창조로
조화되게 설명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이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오류로 보고 그 성서내용을 포기할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둘째, 기독교와 성경의 진리성에 관해 뿌리를 흔드는 종교 전문가의 기독교 연구서
2권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서 등장하며 우리의 전통적 사고들을 공격하고 있다.
첫책은 세계신비주의 권위자인 티모시 프리크 ( Timothy Freke )등의 공저 1999년,
The Jesus Mysteries (예수는 신화다 )이다. 이 책에서는 예수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실존인물이 아니고 그로부터 600년 전에 등장한 신인 ( 神人, Godman ) 들
(고대 에집트의 오시리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페르시아의 미트라스 등)의 유서
깊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짜깁기한 신화라고 주장하며 그 증거를 일일이 들고 있다.
그 신인들은 12월 25일 동정녀에게서 태어 났으며, 결혼식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
으며, 오병이어 같은 기적의 음식을 베풀었으며,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려냈
으며, 12 제자를 거느렸으며, 영성체 의식으로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었고,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사흘 만에 부활해서 사도들 앞에
났으며, 하늘로 올라가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제국을 강력히 통치하고 영원무궁할 수
있도록 기독교를 이용한 것 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인들은 유럽세계의 지배자로 꼼꼼하게 기록을 남겼는데 인간 예수에
관한 기록은 로마 문헌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 믿기 힘든 청천벽력 같은 주장은 나를 큰 충격속에 빠뜨렸고 나는 당연히 허무맹랑
한 소리로 일축했지만 아직도 의심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둘째책은 성서비평학자이며 채플힐 노스캐롤라이나대 종교학 교수인 바트 어만
( Bart Ehrman ) 의 2009년, Jesus, Interrupted ( 예수 왜곡의 역사 )다.
이 책에서는 역사 비평적 관점에서 신학자와 목회자는 대부분 알고 있던 학계의 연구
결과지만 교회가 가르치지 않고 있는 성경의 모순을 파헤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 오류가 없는 책이 아니며, 성경은 원본이 남아 있
지 않고 대부분 수세기 지난후 내용이 변경되고 정전으로 인정받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수십년 동안 구전되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예수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훗날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고통받는 메시아상, 예수의 신성,
삼위일체, 천국과 지옥 같은 전통적 교리는 후대 기독교인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모순과 불일치는 마태와 누가복음, 마가와 요한복음, 마가와 누가복음,
마태와 요한복음 등 간에 세세한 점 뿐 아니라 중요한 점에서도 발견되며, 세상의
종말과 하늘나라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종말론적인 예언자인 예수가 4 복음중 요한복음
에서만 이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시기적으로 마지막인 요한복음을 쓸때 까지 하늘나라
가 도래하지 않자 이를 재해석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고쳐야할 신앙
그러면 나는 지금의 기독교 신앙에 만족 하고 있는가.
오늘날의 기독교 교회는 지나친 기복신앙 강조, 지나친 양적 성장 추구 등과 같은 문제도
있지만, 교리상 복음주의 교회가 취하고 있는 성경무오주의 고수와 종교다원주의 반대 라는 입장은 수정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성경무오주의 ( 聖經無誤主義 )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딤후3:16) 오류가 있을 수 없고, 성경의 한 부분이라도 오류를 인정한다면 다른 부분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오성은 오류가 나오기 전까지는
당위성으로서 이상적 주장이나, 오류가 판정된 경우에도 주장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창조론을 지적 설계론으로 바꾸어 주장하는 것도 이미 성경 창세기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 모순 불일치 내용이 적지 않다는 것은 성경의 역
사 비평적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 성경의 최종 기록자인 성경 저자는 역사적, 문화적 요인과 저자의 능력, 성격, 열정, 지식등 개인적 요인의 영향과 지배를 받으므로 고의
또는 과실로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무오주의의 수정은 자유주의 신학같은 거창한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여러 교리문제의 해결책으
로서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둘째, 종교다원주의 ( 宗敎多元主義 ) 는 절대적 종교는 없고 종교나 구원의 길이 하나
가 아니라 여럿이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그리스
도의 유일성과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성경 (행4:12)의 진리를 포기할 수 없을 것
이므로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965년 로마 카톨릭은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고 다른 종교나 타 문화권의
경건한 사람들은 사실상 가독교인 이므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며 기독교절대주의
( 基督敎絶對主義 )와 종교다원주의의 절충 입장인 포괄주의 (包括主義 )로 전환했다.
1992년에는 감리교신학대학장이 종교다원주의를 세계적 추세라고 주창하다가 출교 당
하는 안타까운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나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는 배타적인
기독교절대주의는 신앙의 영역일 뿐이라고 본다. 나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자는
역지사지 (易地思之)의 소박한 인도주의적 견지에서나 세계평화유지라는 합리적 견지에서
라도 모든 종교는 제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 아프가니스탄 선교지에서의 안타까운 순교나
몰지각한 사찰 땅밟기 만행은 재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평안하고 품위있는 임종을 위하여
이제 우리 인생은 팝송 마이웨이의 첫 가사 처럼 마지막이 가까워 져 인생의 종막
(終幕)에 섰다. (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종교의 길이나 무종교의 길에 들어서서, 그 동안 추구해 왔던
행복 그리고 성공과 건강을 향해 죽는 날 까지는 달려 가겠지만, 마지막 죽음의 장벽
앞에서는 그 것 보다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훼손 되지 않는 죽음을 기대한다.
본능적인 생존욕구로 인한 절규, 병으로 인한 고통, 지옥행을 두려워 하는 공포,
종교에 귀의 하지 않은 후회, 성공하지 못한 회한과 같은 어두운 그림자 없는 평안하고 품위있는 임종을 기원한다.
어떻게 하면 평안하고 품위있는 임종(臨終)을 맞이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이웨이로 선택한 종교의 길, 무종교의 길 그 어떤 길이든 간에 확고부동하고 참다운 진정(眞正)한 종교인 (신자)이나 무종교인 (비신자)이 될 때 가능하게 되지 않
을까.
진정한 종교인은 아마도 현세에서 신의 가호(은혜,가피)속에 일부라도 성공적이었음을 감사(感謝)하고 오직 천국이나 극락에서 보낼 내세 (來世)에서의 참다운 영생 (永生) 을 기원하면서 현세의 삶에 평안한 마음으로 품위를 잃지 않고 이별을 고할 것이다.
진정한 무종교인은 아마도 현세에서 자기능력과 성실로 일부라도 성공적이었음을 자부(自負)하고 자자손손을 통한 영생의 길을 순리로 받아 들이며 내세가 없어 모든 고통이 끝나는 참다운 영면 (永眠)을 기대하면서 현세의 삶을 평안한 마음으로 품위를 잃지 않고 하직 할 것이다.
결국, 진정한 종교인은 내세(천국,극락)가 있어서. 진정한 무종교인은 내세(지옥)가
없다는 것에 안심(安心)하고, 서로 어울려 더불어 살며 행복했던 이 세상의 마지막 종막이
서서히 내리고 그 무대를 영원히 떠나면서도 평안 (平安)하고 품위 (品位)있는 임종을 맞이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