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kis Theodorakis : Zorba's Dance (Zorba The Greek, 1964)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조르바의 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주제곡) - 헝가리 국립교향악단 /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지휘 Hungarian State Orchestra & Choir / Mikis Theodorakis, Cond. ※ 여기 맨아래에 영화 마지막에 춤추는 장면의 동영상 있음 "이 베개 속에 뭐가 채워져 있냐구요? 뭐긴요... 내가 지금까지 데리고 잤던 여자들의 음모(陰毛)가 가득 들어있죠."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잘라 버렸어요."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 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확대경으로 보면 물 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한데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 버리고 그냥 물을 마시겠소?"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이 영화의 원작소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의 어록이다. 조르바는 이처럼 시골뜨기 출신의 거칠고 무식한 막노동자, 꼴통, 변태, 럭비공이었다. 요즘 세상같으면, 아마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삼청교육대에 열번은 끌려갔을 정도의 인물. 그는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자유로움'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항상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에게서 부러워했던 것이 바로 조르바의 그런 엽기적인 모습들에서 거침없이 드러나 보이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였고, 그의 자유로움 앞에서 '머리는 무겁지만 다리는 여윈 사람'들은 마냥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관학교에 다니던 친구 하나가 그 시절 지가 조금 궁지에 몰렸다 싶으면 18번 처럼 내뱉던 말이 있다. "얌마들아, 군인은 무식해야 해. 군인이 머릿속에 든게 많으면 어케 전쟁터에서 물불 안가리고 싸우겠냐?" 통찰과 번민으로 바라보는 흐릿한 세상 보다는, 조르바 처럼 본능적,즉물적,야성적으로 삶에 뛰어들어 몸으로 부딪히고 깨우쳐 가는 세상이 훨씬 더 명쾌하고, 또한 생물학적으로도 실제 인간사회의 모습에 훨씬 근접한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군바리 친구의 말마따나 전쟁터 같은 이 자본주의 세상에 살아남자면, 조르바의 전투력은 현실적으로 더욱 절실한 것이 아닐까? 이래 저래 나는 조르바도 부럽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부럽고, 또 이 곡을 쓴 미키스 데오도라키스도 조르바 못잖은 범국가적인 꼴통이면서도 '페드라'의 영화음악이나 '기차는 8시에 떠나고'도 작곡했다니깐 그도 역시 부럽고... 뭐니뭐니 해도 안소니 퀸이 가장 부럽다. 나이 여든이 넘어서도 아들을 낳아가면서 마누라를 입이나 돈보다는 몸으로 사랑했던, -건강 성생활 100세- 그 노익장의 실천이 부럽단 말이다. 이 영화와 관계되는 사람들이 몽땅 다 부러워지는 이 노털. 앞으로도 역시 조르바처럼 신명나는 몸짓으로 볼꽃처럼 뜨겁고 자유로운 영혼을 내뿜는 춤사위 한 번 춰보지 못할 것 같은, 매우 절망적인 느낌이다. 그저 법과 권위, 전통, 관습같은 덕목을 존중하면서 앞으로도 가정과 사회,국가에 충성하고 나아가 지구와 인류가 요구하는 모범시민으로 고분고분, 그저 무난하고 소박한 행복을 겨워하며 살아야 한다. 책을 엄청 많이 읽었던 누군가가 그랬다. 자신이 만난 작가 중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는 헤르만 헤세와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였노라고. 그 두 작가는 불교적 해탈을 바라는 염원과 함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였고, 또 그런 심오한 작품들을 써냈노라고. 결국 이 노털은, 가끔씩 내 안에서 흐느끼는 진정한 자유의 울음소리에 스스로를 경계하는 재갈을 물린채, 혼탁한 영혼을 담고서 그저 조르바의 춤이나 부러워하면서, 사는 흉네만 겨우 낼 따름인 '왜소한 H2O 주머니'일 수 밖에..... 이하 글쓴이 : 작가, 임정진 조르바, 원시적인 에너지의 행복덩어리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 보기 / 책으로 여는 세상 2006 가을호 게재) 원 제 Vios Kai Politeia Tou Alexi Zobra Zorba The Greek(Alexis Zorbas) 1964년 제작 각본 감독 Michael Cacoyannis (마이클 카코야니스) 주연: Anthony Quinn / Alan Bates 음악: Mikis Theodorakis 142분, 흑백 1. 산투리를 켜는 광부 만나기 희랍인 조르바. 또는 그리스인 조르바. 아마도 두 가지 제목의 소설을 발견하시리라. 어찌 해석되었든 조르바는 원칙적으로 자유인 조르바다. 그는 그리스 인만으로 살기에는 너무 통이 큰 사내였다. 이 멋진 사내를 여러분께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런 흥분상태가 영화 소개 컬럼을 쓰는 좋은 자세가 아니란 걸 알고 있으나 부디 용서하시라. 누군가를 심하게 사랑하면 이성을 유지하기 참으로 어렵지 않은가. 소설을 읽고나서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도 1964년산 흑백영화라면 선뜻 보게 되지 않는데 이 영화는 꼭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서 보았다. 세상이 좋아져서 아무리 오래된 영화라도 척척 찾아 볼 수 있다니 일찍 죽은 이들은 참으로 불쌍도 하다. (우리 외할머니 자주 하시던 대사인데 이제 내가 쓰게 되었다. 아, 세월의 무정한 힘이여.) 누군가 영화를 보는 것 보다 소설을 읽는 게 더 힘든 이유는 소설은 그냥 맘 턱 놓고 읽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읽어야 하는 거라서 그렇다고 했단다. 어찌 되었든 조르바에 있어서도 영화보는 게 훨씬 쉬운데 영화는 142분이면 다 보는데 책은 무척 두껍다. 속독을 하면 모를까 도저히 142분 안에 다 읽지 못한다. 장문의 글을 읽는데 익숙치 않은 현대인 (모니터에 한 바닥 뜨는 것 이상의 긴 글은 눈에도 머리에도 안 들어오는 게 설마 나 뿐만은 아니리라.)에게는 조금 버거운 책두께이다. 어쩌면....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어보라 권하는 나는, 조르바의 진정한 팬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르바같으면 당장 책을 집어던지고 포도주와 빵을 먹으며 노래부르고 춤추라 일렀을 것이다. 조르바는 책에 중독된 인간들을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에게 축복있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도 원작과 똑같지 않으므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원작을 읽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왜냐면 원작소설에는 영화에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조르바의 매력이 더 속속들이 쓰여져 있고 사업이 실패한 뒤의 이야기도 나와있고 부분부분 약간 다른 전개가 일어나 또 다른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돌고래를 보고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조르바의 매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매력에 한번 중독되면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사람을 조르바와 비교하게 되고 자주 혀를 끌끌 차게 되는 증세가 나타나기 쉬우니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란다. 조르바가 지금 살아있다면 당장 교주가 되어도 좋을 듯하다. 아마 단번에 한국에서만도 5만 명쯤의 신도는 쉽게 모일 것이다. 물론 조르바가 이토록 매력적인 것은 작가의 힘이겠지만 조르바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자료를 보니 조금 위안이 된다. 작가 혼자서 저런 인물을 창조해내었다면 그는 너무 많은 신의 은총을 받은 것이므로 다른 작가들에게 더 큰 시샘을 받았을 것이다. 조르바를 영원히 살게 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20세기의 오딧세우스라고 칭해지는데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 크레타 섬 출신인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나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이 말은 작가가 미리 써 둔 자신의 묘비명이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 조르바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런 절대 자유는 늘 우리가 맘으로 갈구하는 것이었으나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 2. 당신은 너무 많이 생각하는군 영화의 첫 장면은 비 오는 여객선이 보이는 항구 장면이다. 바실은 반은 영국인 반은 그리스인인데 책이 한가득 든 가방들이 비를 맞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다가 스프를 잘 끓일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조르바를 만난다. 조르바는 다짜고짜 바실에게 말한다. “난 당신이 좋소...날 데려가요.” 조르바가 내내 보스라고 부르게 된 보스같지 않은 보스, 바실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놓은 광산을 다시 일으켜볼 생각을 갖고 크레타섬을 찾아가는 길이었고 광부 경험이 있는 조르바는 환상의 커플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조르바는 보스가 문제가 많은 인간임을 간파한다. “대체 무슨 생각이 그리 많소?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눈 질끈 감고 해버리는 거요. 당신이 갖고 있는 책은 몽땅 쌓아놓고 불이나 질러버리쇼. 그러면 누가 알겠소? 당신이 바보를 면하게 될지.” 무엇보다도 조르바가 보스를 가엾게 생각하는 것은 보스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한 점이다. 조르바는 원시인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그는 현악기인 산투리의 영혼을 존중할줄 아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영화는 두 개의 축을 끼고 전진한다. 탄광 사업과 사랑 사업. 조르바는 갈탄광을 책임지고 운영하게 되는데 갱목이 자꾸 무너지는 사고가 나자 수도원 소유의 숲에서 나무를 베어 케이블로 운반하는 계획을 세운다. 탄광일이 끝나면 조르바는 사랑에 열을 올린다. 여관을 경영하는 카바레 가수 출신의 오르탕스 부인을 부불리나라고 부르면서 그녀에게 사랑을 내줄 줄 아는 너그러운 사내이기도 하고 참한 과부가 혼자 자는 밤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보스를 밀어보내주려 애쓰기도 하고 케이블을 사러 도시로 나가서는 젊디젊은 술집처녀 롤라와 사랑하느라 머리를 검게 물들이기도 한다. 한편 보스는 수없이 망설인 끝에 조르바의 조언대로 과부의 집을 가게 된다. 조르바는 그토록 많은 연애사건을 엮어내고도 뒷탈이 없었건만 보스가 사랑했던 과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돌에 맞다가 결국 칼에 찔려 공개적으로 살해된다. 그녀를 사랑했던 동네 총각이 물에 빠져 자살한 것이 그녀를 공개살해한 이유였다. 그 소동 속에서 보스는 나약하게 뒤에 서서 조르바를 불러오라 하지만 천하의 조르바도 동네 사람들의 집단 광기를 당해내지는 못한다. 부불리나는 병에 걸리는데 조르바는 그녀에게 결혼식에 베일로 쓸 20미터짜리 공단을 주문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부황을 떠주며 간호하지만 4개국의 해군제독을 애인으로 거느렸던 화려한 과거를 뒤로 하고 그녀는 결국 쓸쓸히 죽어버린다. 그녀가 숨을 거두기도 전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온다. 가족도 없는 외국인이 죽으면 재산을 국가가 가져간다면서 가난한 우리가 갖는게 더 낫다고 그녀의 옷장을 뒤지고 살림살이를 다 가져가 막상 그녀가 죽고나자 침대에 누운 그녀와 앵무새가 든 새장뿐인 빈 방이 보인다. 긴 검은 옷으로도 아름다움을 다 가리지 못했던 젊은 과부 역시 비참하게 칼에 찔려 죽었으므로 여배우들에게는 가혹한 영화였다. 그 당시 크레타 섬의 문화가 진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다. 요즘도 일부 문화권에서는 딸이나 여동생이 집안의 체면을 깍는 행동을 하게되면 집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결단력을 보여주기도 하므로 집단이 그렇게 여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문화가 아주 비현실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크레타 섬에서 과부로 살기는 너무도 힘든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조르바가 의욕적으로 설치했던 목재운반 케이블 준공식 날, 높은 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나무들은 가속도가 붙어 흉기로 돌변해 돌진해온다. 그 속도와 무게를 허술한 나무 받침대들이 견디어내지 못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받침대들은 결국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조르바와 보스는 해변에서 함께 춤을 춘다. 보스는 드디어 자유를 느낀다. 3. 안소니 퀸, 그가 또 다시 그립다 소설을 읽을 때는 우리는 나름대로 주인공 모습이나 배경 등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니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영화에서의 영상이 내 머릿 속에 깊이 박혀 조르바는 곧 안소니 퀸이 보여준 바로 그 모습이었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진정 조르바였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시간이 좀 지나자 이성이 약간 돌아오고나니 안소니 퀸이 내게 그런 착각을 여러 번 일으켰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노틀담의 꼽추>에서는 진짜 콰지모도였다. 누가 이 200퍼센트 참인 명제를 거부하랴. <25시>에서 그는 루마니아의 농부 요한 모리츠였다. 요한 모리츠가 아닌 안소니 퀸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산체스의 아이들>에서는 헤수스였으며 <사막의 라이언>에서는 베드윈족의 지도자 요마르 무스타르였다. 딱 그 인물이었다. 더도 덜도 아니었다. <길 La Strada>에서는 불쌍한 젤소미나를 농락하는 차력사 잠파노였다. 안소니 퀸이 잠파노였고 잠파노가 안소니 퀸이었다. 조르바처럼 춤추고 조르바처럼 여인을 사랑하고 조르바처럼 현란한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하며 조르바처럼 탄광일을 하는 연기를 안소니 퀸 아닌 그 누가 또 하랴. 말년에는 그림을 그리던 안소니 퀸은 이제 더 이상 누구로 변할 일이 없는 천국으로 갔지만, 또 다시 그가 그립다. 진정한 배우가 우리에게 주었던 기쁨을 무엇으로 측량하랴.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하는 것은 음악이 아닐까. 무성영화시대에도 음악은 빠지지 않고 들어있었다. 음악을 뺀 영화 조르바 또한 상상하기 힘들다.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Mikis Theodorakis)는 "페드라 Phaedra(죽어도 좋아)"와 "Never on Sunday(일요일은 참으세요) 1960" "Zorba the Greek(희랍인 조르바)1964"의 등의 영화음악과 제국주의와 억압에 함께 항거했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작곡한 "To treno fevgi stis okto (기차는 8시에 떠나고)로 한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음악을 만들었다. 만일 오늘 자신에 대해 실망한 일이 있다면 조르바의 말을 선물로 드리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소. 오직 나 자신을 믿을 뿐이오. 내가 남보다 잘나서 믿는 게 아니오. 다만, 내가 아는 것 중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나뿐이기 때문이오. " - 끝-
Hungarian State Orchestra & Choir / Mikis Theodorakis, Cond. ※ 여기 맨아래에 영화 마지막에 춤추는 장면의 동영상 있음 "이 베개 속에 뭐가 채워져 있냐구요? 뭐긴요... 내가 지금까지 데리고 잤던 여자들의 음모(陰毛)가 가득 들어있죠."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잘라 버렸어요."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 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확대경으로 보면 물 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한데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 버리고 그냥 물을 마시겠소?"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이 영화의 원작소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의 어록이다. 조르바는 이처럼 시골뜨기 출신의 거칠고 무식한 막노동자, 꼴통, 변태, 럭비공이었다. 요즘 세상같으면, 아마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삼청교육대에 열번은 끌려갔을 정도의 인물. 그는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자유로움'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항상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에게서 부러워했던 것이 바로 조르바의 그런 엽기적인 모습들에서 거침없이 드러나 보이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였고, 그의 자유로움 앞에서 '머리는 무겁지만 다리는 여윈 사람'들은 마냥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관학교에 다니던 친구 하나가 그 시절 지가 조금 궁지에 몰렸다 싶으면 18번 처럼 내뱉던 말이 있다. "얌마들아, 군인은 무식해야 해. 군인이 머릿속에 든게 많으면 어케 전쟁터에서 물불 안가리고 싸우겠냐?" 통찰과 번민으로 바라보는 흐릿한 세상 보다는, 조르바 처럼 본능적,즉물적,야성적으로 삶에 뛰어들어 몸으로 부딪히고 깨우쳐 가는 세상이 훨씬 더 명쾌하고, 또한 생물학적으로도 실제 인간사회의 모습에 훨씬 근접한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군바리 친구의 말마따나 전쟁터 같은 이 자본주의 세상에 살아남자면, 조르바의 전투력은 현실적으로 더욱 절실한 것이 아닐까? 이래 저래 나는 조르바도 부럽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부럽고, 또 이 곡을 쓴 미키스 데오도라키스도 조르바 못잖은 범국가적인 꼴통이면서도 '페드라'의 영화음악이나 '기차는 8시에 떠나고'도 작곡했다니깐 그도 역시 부럽고... 뭐니뭐니 해도 안소니 퀸이 가장 부럽다. 나이 여든이 넘어서도 아들을 낳아가면서 마누라를 입이나 돈보다는 몸으로 사랑했던, -건강 성생활 100세- 그 노익장의 실천이 부럽단 말이다. 이 영화와 관계되는 사람들이 몽땅 다 부러워지는 이 노털. 앞으로도 역시 조르바처럼 신명나는 몸짓으로 볼꽃처럼 뜨겁고 자유로운 영혼을 내뿜는 춤사위 한 번 춰보지 못할 것 같은, 매우 절망적인 느낌이다. 그저 법과 권위, 전통, 관습같은 덕목을 존중하면서 앞으로도 가정과 사회,국가에 충성하고 나아가 지구와 인류가 요구하는 모범시민으로 고분고분, 그저 무난하고 소박한 행복을 겨워하며 살아야 한다. 책을 엄청 많이 읽었던 누군가가 그랬다. 자신이 만난 작가 중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는 헤르만 헤세와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였노라고. 그 두 작가는 불교적 해탈을 바라는 염원과 함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였고, 또 그런 심오한 작품들을 써냈노라고. 결국 이 노털은, 가끔씩 내 안에서 흐느끼는 진정한 자유의 울음소리에 스스로를 경계하는 재갈을 물린채, 혼탁한 영혼을 담고서 그저 조르바의 춤이나 부러워하면서, 사는 흉네만 겨우 낼 따름인 '왜소한 H2O 주머니'일 수 밖에..... 이하 글쓴이 : 작가, 임정진 조르바, 원시적인 에너지의 행복덩어리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 보기 / 책으로 여는 세상 2006 가을호 게재) 원 제 Vios Kai Politeia Tou Alexi Zobra Zorba The Greek(Alexis Zorbas) 1964년 제작 각본 감독 Michael Cacoyannis (마이클 카코야니스) 주연: Anthony Quinn / Alan Bates 음악: Mikis Theodorakis 142분, 흑백 1. 산투리를 켜는 광부 만나기 희랍인 조르바. 또는 그리스인 조르바. 아마도 두 가지 제목의 소설을 발견하시리라. 어찌 해석되었든 조르바는 원칙적으로 자유인 조르바다. 그는 그리스 인만으로 살기에는 너무 통이 큰 사내였다. 이 멋진 사내를 여러분께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런 흥분상태가 영화 소개 컬럼을 쓰는 좋은 자세가 아니란 걸 알고 있으나 부디 용서하시라. 누군가를 심하게 사랑하면 이성을 유지하기 참으로 어렵지 않은가. 소설을 읽고나서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도 1964년산 흑백영화라면 선뜻 보게 되지 않는데 이 영화는 꼭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서 보았다. 세상이 좋아져서 아무리 오래된 영화라도 척척 찾아 볼 수 있다니 일찍 죽은 이들은 참으로 불쌍도 하다. (우리 외할머니 자주 하시던 대사인데 이제 내가 쓰게 되었다. 아, 세월의 무정한 힘이여.) 누군가 영화를 보는 것 보다 소설을 읽는 게 더 힘든 이유는 소설은 그냥 맘 턱 놓고 읽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읽어야 하는 거라서 그렇다고 했단다. 어찌 되었든 조르바에 있어서도 영화보는 게 훨씬 쉬운데 영화는 142분이면 다 보는데 책은 무척 두껍다. 속독을 하면 모를까 도저히 142분 안에 다 읽지 못한다. 장문의 글을 읽는데 익숙치 않은 현대인 (모니터에 한 바닥 뜨는 것 이상의 긴 글은 눈에도 머리에도 안 들어오는 게 설마 나 뿐만은 아니리라.)에게는 조금 버거운 책두께이다. 어쩌면....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어보라 권하는 나는, 조르바의 진정한 팬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르바같으면 당장 책을 집어던지고 포도주와 빵을 먹으며 노래부르고 춤추라 일렀을 것이다. 조르바는 책에 중독된 인간들을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에게 축복있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도 원작과 똑같지 않으므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원작을 읽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왜냐면 원작소설에는 영화에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조르바의 매력이 더 속속들이 쓰여져 있고 사업이 실패한 뒤의 이야기도 나와있고 부분부분 약간 다른 전개가 일어나 또 다른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돌고래를 보고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조르바의 매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매력에 한번 중독되면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사람을 조르바와 비교하게 되고 자주 혀를 끌끌 차게 되는 증세가 나타나기 쉬우니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란다. 조르바가 지금 살아있다면 당장 교주가 되어도 좋을 듯하다. 아마 단번에 한국에서만도 5만 명쯤의 신도는 쉽게 모일 것이다. 물론 조르바가 이토록 매력적인 것은 작가의 힘이겠지만 조르바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자료를 보니 조금 위안이 된다. 작가 혼자서 저런 인물을 창조해내었다면 그는 너무 많은 신의 은총을 받은 것이므로 다른 작가들에게 더 큰 시샘을 받았을 것이다. 조르바를 영원히 살게 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20세기의 오딧세우스라고 칭해지는데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 크레타 섬 출신인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나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이 말은 작가가 미리 써 둔 자신의 묘비명이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 조르바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런 절대 자유는 늘 우리가 맘으로 갈구하는 것이었으나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 2. 당신은 너무 많이 생각하는군 영화의 첫 장면은 비 오는 여객선이 보이는 항구 장면이다. 바실은 반은 영국인 반은 그리스인인데 책이 한가득 든 가방들이 비를 맞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다가 스프를 잘 끓일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조르바를 만난다. 조르바는 다짜고짜 바실에게 말한다. “난 당신이 좋소...날 데려가요.” 조르바가 내내 보스라고 부르게 된 보스같지 않은 보스, 바실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놓은 광산을 다시 일으켜볼 생각을 갖고 크레타섬을 찾아가는 길이었고 광부 경험이 있는 조르바는 환상의 커플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조르바는 보스가 문제가 많은 인간임을 간파한다. “대체 무슨 생각이 그리 많소?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눈 질끈 감고 해버리는 거요. 당신이 갖고 있는 책은 몽땅 쌓아놓고 불이나 질러버리쇼. 그러면 누가 알겠소? 당신이 바보를 면하게 될지.” 무엇보다도 조르바가 보스를 가엾게 생각하는 것은 보스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한 점이다. 조르바는 원시인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그는 현악기인 산투리의 영혼을 존중할줄 아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영화는 두 개의 축을 끼고 전진한다. 탄광 사업과 사랑 사업. 조르바는 갈탄광을 책임지고 운영하게 되는데 갱목이 자꾸 무너지는 사고가 나자 수도원 소유의 숲에서 나무를 베어 케이블로 운반하는 계획을 세운다. 탄광일이 끝나면 조르바는 사랑에 열을 올린다. 여관을 경영하는 카바레 가수 출신의 오르탕스 부인을 부불리나라고 부르면서 그녀에게 사랑을 내줄 줄 아는 너그러운 사내이기도 하고 참한 과부가 혼자 자는 밤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보스를 밀어보내주려 애쓰기도 하고 케이블을 사러 도시로 나가서는 젊디젊은 술집처녀 롤라와 사랑하느라 머리를 검게 물들이기도 한다. 한편 보스는 수없이 망설인 끝에 조르바의 조언대로 과부의 집을 가게 된다. 조르바는 그토록 많은 연애사건을 엮어내고도 뒷탈이 없었건만 보스가 사랑했던 과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돌에 맞다가 결국 칼에 찔려 공개적으로 살해된다. 그녀를 사랑했던 동네 총각이 물에 빠져 자살한 것이 그녀를 공개살해한 이유였다. 그 소동 속에서 보스는 나약하게 뒤에 서서 조르바를 불러오라 하지만 천하의 조르바도 동네 사람들의 집단 광기를 당해내지는 못한다. 부불리나는 병에 걸리는데 조르바는 그녀에게 결혼식에 베일로 쓸 20미터짜리 공단을 주문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부황을 떠주며 간호하지만 4개국의 해군제독을 애인으로 거느렸던 화려한 과거를 뒤로 하고 그녀는 결국 쓸쓸히 죽어버린다. 그녀가 숨을 거두기도 전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온다. 가족도 없는 외국인이 죽으면 재산을 국가가 가져간다면서 가난한 우리가 갖는게 더 낫다고 그녀의 옷장을 뒤지고 살림살이를 다 가져가 막상 그녀가 죽고나자 침대에 누운 그녀와 앵무새가 든 새장뿐인 빈 방이 보인다. 긴 검은 옷으로도 아름다움을 다 가리지 못했던 젊은 과부 역시 비참하게 칼에 찔려 죽었으므로 여배우들에게는 가혹한 영화였다. 그 당시 크레타 섬의 문화가 진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다. 요즘도 일부 문화권에서는 딸이나 여동생이 집안의 체면을 깍는 행동을 하게되면 집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결단력을 보여주기도 하므로 집단이 그렇게 여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문화가 아주 비현실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크레타 섬에서 과부로 살기는 너무도 힘든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조르바가 의욕적으로 설치했던 목재운반 케이블 준공식 날, 높은 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나무들은 가속도가 붙어 흉기로 돌변해 돌진해온다. 그 속도와 무게를 허술한 나무 받침대들이 견디어내지 못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받침대들은 결국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조르바와 보스는 해변에서 함께 춤을 춘다. 보스는 드디어 자유를 느낀다. 3. 안소니 퀸, 그가 또 다시 그립다 소설을 읽을 때는 우리는 나름대로 주인공 모습이나 배경 등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니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영화에서의 영상이 내 머릿 속에 깊이 박혀 조르바는 곧 안소니 퀸이 보여준 바로 그 모습이었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진정 조르바였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시간이 좀 지나자 이성이 약간 돌아오고나니 안소니 퀸이 내게 그런 착각을 여러 번 일으켰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노틀담의 꼽추>에서는 진짜 콰지모도였다. 누가 이 200퍼센트 참인 명제를 거부하랴. <25시>에서 그는 루마니아의 농부 요한 모리츠였다. 요한 모리츠가 아닌 안소니 퀸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산체스의 아이들>에서는 헤수스였으며 <사막의 라이언>에서는 베드윈족의 지도자 요마르 무스타르였다. 딱 그 인물이었다. 더도 덜도 아니었다. <길 La Strada>에서는 불쌍한 젤소미나를 농락하는 차력사 잠파노였다. 안소니 퀸이 잠파노였고 잠파노가 안소니 퀸이었다. 조르바처럼 춤추고 조르바처럼 여인을 사랑하고 조르바처럼 현란한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하며 조르바처럼 탄광일을 하는 연기를 안소니 퀸 아닌 그 누가 또 하랴. 말년에는 그림을 그리던 안소니 퀸은 이제 더 이상 누구로 변할 일이 없는 천국으로 갔지만, 또 다시 그가 그립다. 진정한 배우가 우리에게 주었던 기쁨을 무엇으로 측량하랴.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하는 것은 음악이 아닐까. 무성영화시대에도 음악은 빠지지 않고 들어있었다. 음악을 뺀 영화 조르바 또한 상상하기 힘들다.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Mikis Theodorakis)는 "페드라 Phaedra(죽어도 좋아)"와 "Never on Sunday(일요일은 참으세요) 1960" "Zorba the Greek(희랍인 조르바)1964"의 등의 영화음악과 제국주의와 억압에 함께 항거했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작곡한 "To treno fevgi stis okto (기차는 8시에 떠나고)로 한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음악을 만들었다. 만일 오늘 자신에 대해 실망한 일이 있다면 조르바의 말을 선물로 드리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소. 오직 나 자신을 믿을 뿐이오. 내가 남보다 잘나서 믿는 게 아니오. 다만, 내가 아는 것 중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나뿐이기 때문이오. " - 끝-
"이 베개 속에 뭐가 채워져 있냐구요? 뭐긴요... 내가 지금까지 데리고 잤던 여자들의 음모(陰毛)가 가득 들어있죠."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잘라 버렸어요."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 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확대경으로 보면 물 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한데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 버리고 그냥 물을 마시겠소?"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이 영화의 원작소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의 어록이다. 조르바는 이처럼 시골뜨기 출신의 거칠고 무식한 막노동자, 꼴통, 변태, 럭비공이었다. 요즘 세상같으면, 아마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삼청교육대에 열번은 끌려갔을 정도의 인물. 그는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자유로움'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항상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에게서 부러워했던 것이 바로 조르바의 그런 엽기적인 모습들에서 거침없이 드러나 보이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였고, 그의 자유로움 앞에서 '머리는 무겁지만 다리는 여윈 사람'들은 마냥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관학교에 다니던 친구 하나가 그 시절 지가 조금 궁지에 몰렸다 싶으면 18번 처럼 내뱉던 말이 있다. "얌마들아, 군인은 무식해야 해. 군인이 머릿속에 든게 많으면 어케 전쟁터에서 물불 안가리고 싸우겠냐?" 통찰과 번민으로 바라보는 흐릿한 세상 보다는, 조르바 처럼 본능적,즉물적,야성적으로 삶에 뛰어들어 몸으로 부딪히고 깨우쳐 가는 세상이 훨씬 더 명쾌하고, 또한 생물학적으로도 실제 인간사회의 모습에 훨씬 근접한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군바리 친구의 말마따나 전쟁터 같은 이 자본주의 세상에 살아남자면, 조르바의 전투력은 현실적으로 더욱 절실한 것이 아닐까? 이래 저래 나는 조르바도 부럽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부럽고, 또 이 곡을 쓴 미키스 데오도라키스도 조르바 못잖은 범국가적인 꼴통이면서도 '페드라'의 영화음악이나 '기차는 8시에 떠나고'도 작곡했다니깐 그도 역시 부럽고... 뭐니뭐니 해도 안소니 퀸이 가장 부럽다. 나이 여든이 넘어서도 아들을 낳아가면서 마누라를 입이나 돈보다는 몸으로 사랑했던, -건강 성생활 100세- 그 노익장의 실천이 부럽단 말이다. 이 영화와 관계되는 사람들이 몽땅 다 부러워지는 이 노털. 앞으로도 역시 조르바처럼 신명나는 몸짓으로 볼꽃처럼 뜨겁고 자유로운 영혼을 내뿜는 춤사위 한 번 춰보지 못할 것 같은, 매우 절망적인 느낌이다. 그저 법과 권위, 전통, 관습같은 덕목을 존중하면서 앞으로도 가정과 사회,국가에 충성하고 나아가 지구와 인류가 요구하는 모범시민으로 고분고분, 그저 무난하고 소박한 행복을 겨워하며 살아야 한다. 책을 엄청 많이 읽었던 누군가가 그랬다. 자신이 만난 작가 중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는 헤르만 헤세와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였노라고. 그 두 작가는 불교적 해탈을 바라는 염원과 함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였고, 또 그런 심오한 작품들을 써냈노라고. 결국 이 노털은, 가끔씩 내 안에서 흐느끼는 진정한 자유의 울음소리에 스스로를 경계하는 재갈을 물린채, 혼탁한 영혼을 담고서 그저 조르바의 춤이나 부러워하면서, 사는 흉네만 겨우 낼 따름인 '왜소한 H2O 주머니'일 수 밖에.....
이하 글쓴이 : 작가, 임정진 조르바, 원시적인 에너지의 행복덩어리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 보기 / 책으로 여는 세상 2006 가을호 게재) 원 제 Vios Kai Politeia Tou Alexi Zobra Zorba The Greek(Alexis Zorbas) 1964년 제작 각본 감독 Michael Cacoyannis (마이클 카코야니스) 주연: Anthony Quinn / Alan Bates 음악: Mikis Theodorakis 142분, 흑백 1. 산투리를 켜는 광부 만나기 희랍인 조르바. 또는 그리스인 조르바. 아마도 두 가지 제목의 소설을 발견하시리라. 어찌 해석되었든 조르바는 원칙적으로 자유인 조르바다. 그는 그리스 인만으로 살기에는 너무 통이 큰 사내였다. 이 멋진 사내를 여러분께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런 흥분상태가 영화 소개 컬럼을 쓰는 좋은 자세가 아니란 걸 알고 있으나 부디 용서하시라. 누군가를 심하게 사랑하면 이성을 유지하기 참으로 어렵지 않은가. 소설을 읽고나서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도 1964년산 흑백영화라면 선뜻 보게 되지 않는데 이 영화는 꼭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서 보았다. 세상이 좋아져서 아무리 오래된 영화라도 척척 찾아 볼 수 있다니 일찍 죽은 이들은 참으로 불쌍도 하다. (우리 외할머니 자주 하시던 대사인데 이제 내가 쓰게 되었다. 아, 세월의 무정한 힘이여.) 누군가 영화를 보는 것 보다 소설을 읽는 게 더 힘든 이유는 소설은 그냥 맘 턱 놓고 읽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읽어야 하는 거라서 그렇다고 했단다. 어찌 되었든 조르바에 있어서도 영화보는 게 훨씬 쉬운데 영화는 142분이면 다 보는데 책은 무척 두껍다. 속독을 하면 모를까 도저히 142분 안에 다 읽지 못한다. 장문의 글을 읽는데 익숙치 않은 현대인 (모니터에 한 바닥 뜨는 것 이상의 긴 글은 눈에도 머리에도 안 들어오는 게 설마 나 뿐만은 아니리라.)에게는 조금 버거운 책두께이다. 어쩌면....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어보라 권하는 나는, 조르바의 진정한 팬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르바같으면 당장 책을 집어던지고 포도주와 빵을 먹으며 노래부르고 춤추라 일렀을 것이다. 조르바는 책에 중독된 인간들을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에게 축복있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도 원작과 똑같지 않으므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원작을 읽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왜냐면 원작소설에는 영화에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조르바의 매력이 더 속속들이 쓰여져 있고 사업이 실패한 뒤의 이야기도 나와있고 부분부분 약간 다른 전개가 일어나 또 다른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돌고래를 보고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조르바의 매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매력에 한번 중독되면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사람을 조르바와 비교하게 되고 자주 혀를 끌끌 차게 되는 증세가 나타나기 쉬우니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란다. 조르바가 지금 살아있다면 당장 교주가 되어도 좋을 듯하다. 아마 단번에 한국에서만도 5만 명쯤의 신도는 쉽게 모일 것이다. 물론 조르바가 이토록 매력적인 것은 작가의 힘이겠지만 조르바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자료를 보니 조금 위안이 된다. 작가 혼자서 저런 인물을 창조해내었다면 그는 너무 많은 신의 은총을 받은 것이므로 다른 작가들에게 더 큰 시샘을 받았을 것이다. 조르바를 영원히 살게 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20세기의 오딧세우스라고 칭해지는데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 크레타 섬 출신인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나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이 말은 작가가 미리 써 둔 자신의 묘비명이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 조르바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런 절대 자유는 늘 우리가 맘으로 갈구하는 것이었으나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 2. 당신은 너무 많이 생각하는군 영화의 첫 장면은 비 오는 여객선이 보이는 항구 장면이다. 바실은 반은 영국인 반은 그리스인인데 책이 한가득 든 가방들이 비를 맞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다가 스프를 잘 끓일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조르바를 만난다. 조르바는 다짜고짜 바실에게 말한다. “난 당신이 좋소...날 데려가요.” 조르바가 내내 보스라고 부르게 된 보스같지 않은 보스, 바실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놓은 광산을 다시 일으켜볼 생각을 갖고 크레타섬을 찾아가는 길이었고 광부 경험이 있는 조르바는 환상의 커플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조르바는 보스가 문제가 많은 인간임을 간파한다. “대체 무슨 생각이 그리 많소?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눈 질끈 감고 해버리는 거요. 당신이 갖고 있는 책은 몽땅 쌓아놓고 불이나 질러버리쇼. 그러면 누가 알겠소? 당신이 바보를 면하게 될지.” 무엇보다도 조르바가 보스를 가엾게 생각하는 것은 보스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한 점이다. 조르바는 원시인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그는 현악기인 산투리의 영혼을 존중할줄 아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영화는 두 개의 축을 끼고 전진한다. 탄광 사업과 사랑 사업. 조르바는 갈탄광을 책임지고 운영하게 되는데 갱목이 자꾸 무너지는 사고가 나자 수도원 소유의 숲에서 나무를 베어 케이블로 운반하는 계획을 세운다. 탄광일이 끝나면 조르바는 사랑에 열을 올린다. 여관을 경영하는 카바레 가수 출신의 오르탕스 부인을 부불리나라고 부르면서 그녀에게 사랑을 내줄 줄 아는 너그러운 사내이기도 하고 참한 과부가 혼자 자는 밤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보스를 밀어보내주려 애쓰기도 하고 케이블을 사러 도시로 나가서는 젊디젊은 술집처녀 롤라와 사랑하느라 머리를 검게 물들이기도 한다. 한편 보스는 수없이 망설인 끝에 조르바의 조언대로 과부의 집을 가게 된다. 조르바는 그토록 많은 연애사건을 엮어내고도 뒷탈이 없었건만 보스가 사랑했던 과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돌에 맞다가 결국 칼에 찔려 공개적으로 살해된다. 그녀를 사랑했던 동네 총각이 물에 빠져 자살한 것이 그녀를 공개살해한 이유였다. 그 소동 속에서 보스는 나약하게 뒤에 서서 조르바를 불러오라 하지만 천하의 조르바도 동네 사람들의 집단 광기를 당해내지는 못한다. 부불리나는 병에 걸리는데 조르바는 그녀에게 결혼식에 베일로 쓸 20미터짜리 공단을 주문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부황을 떠주며 간호하지만 4개국의 해군제독을 애인으로 거느렸던 화려한 과거를 뒤로 하고 그녀는 결국 쓸쓸히 죽어버린다. 그녀가 숨을 거두기도 전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온다. 가족도 없는 외국인이 죽으면 재산을 국가가 가져간다면서 가난한 우리가 갖는게 더 낫다고 그녀의 옷장을 뒤지고 살림살이를 다 가져가 막상 그녀가 죽고나자 침대에 누운 그녀와 앵무새가 든 새장뿐인 빈 방이 보인다. 긴 검은 옷으로도 아름다움을 다 가리지 못했던 젊은 과부 역시 비참하게 칼에 찔려 죽었으므로 여배우들에게는 가혹한 영화였다. 그 당시 크레타 섬의 문화가 진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다. 요즘도 일부 문화권에서는 딸이나 여동생이 집안의 체면을 깍는 행동을 하게되면 집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결단력을 보여주기도 하므로 집단이 그렇게 여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문화가 아주 비현실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크레타 섬에서 과부로 살기는 너무도 힘든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조르바가 의욕적으로 설치했던 목재운반 케이블 준공식 날, 높은 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나무들은 가속도가 붙어 흉기로 돌변해 돌진해온다. 그 속도와 무게를 허술한 나무 받침대들이 견디어내지 못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받침대들은 결국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조르바와 보스는 해변에서 함께 춤을 춘다. 보스는 드디어 자유를 느낀다. 3. 안소니 퀸, 그가 또 다시 그립다 소설을 읽을 때는 우리는 나름대로 주인공 모습이나 배경 등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니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영화에서의 영상이 내 머릿 속에 깊이 박혀 조르바는 곧 안소니 퀸이 보여준 바로 그 모습이었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진정 조르바였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시간이 좀 지나자 이성이 약간 돌아오고나니 안소니 퀸이 내게 그런 착각을 여러 번 일으켰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노틀담의 꼽추>에서는 진짜 콰지모도였다. 누가 이 200퍼센트 참인 명제를 거부하랴. <25시>에서 그는 루마니아의 농부 요한 모리츠였다. 요한 모리츠가 아닌 안소니 퀸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산체스의 아이들>에서는 헤수스였으며 <사막의 라이언>에서는 베드윈족의 지도자 요마르 무스타르였다. 딱 그 인물이었다. 더도 덜도 아니었다. <길 La Strada>에서는 불쌍한 젤소미나를 농락하는 차력사 잠파노였다. 안소니 퀸이 잠파노였고 잠파노가 안소니 퀸이었다. 조르바처럼 춤추고 조르바처럼 여인을 사랑하고 조르바처럼 현란한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하며 조르바처럼 탄광일을 하는 연기를 안소니 퀸 아닌 그 누가 또 하랴. 말년에는 그림을 그리던 안소니 퀸은 이제 더 이상 누구로 변할 일이 없는 천국으로 갔지만, 또 다시 그가 그립다. 진정한 배우가 우리에게 주었던 기쁨을 무엇으로 측량하랴.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하는 것은 음악이 아닐까. 무성영화시대에도 음악은 빠지지 않고 들어있었다. 음악을 뺀 영화 조르바 또한 상상하기 힘들다.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Mikis Theodorakis)는 "페드라 Phaedra(죽어도 좋아)"와 "Never on Sunday(일요일은 참으세요) 1960" "Zorba the Greek(희랍인 조르바)1964"의 등의 영화음악과 제국주의와 억압에 함께 항거했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작곡한 "To treno fevgi stis okto (기차는 8시에 떠나고)로 한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음악을 만들었다. 만일 오늘 자신에 대해 실망한 일이 있다면 조르바의 말을 선물로 드리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소. 오직 나 자신을 믿을 뿐이오. 내가 남보다 잘나서 믿는 게 아니오. 다만, 내가 아는 것 중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나뿐이기 때문이오. " - 끝-
첫댓글 오랜만에 듣습니다....고맙습니다.
첫댓글 오랜만에 듣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