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출발점은? - 언제나 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곧잘 놓치곤 한다.
열심히 타던 자전거에서 내린 지 3년이 되었다. 마침 건강도 약간 나빠져 일거에 회복할 수 있을 만한 뭔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렇듯 다시 자전거에 오르기 위한 외부적인 조건이 갖춰진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터닝포인트를 찾기 위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내면의 열정을 끌어낼 만한, 기획이 있는 장거리 라이딩이 가장 적합하겠다는 것이 고민 끝에 찾아낸 결론이었다. 2009년 여름, 나의 해안도로 일주라이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나름대로 몇가지 원칙을 세워보았다.
1. 무리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일정으로 다니기.(그날의 라이딩 종료 시점을 미리 확정하지 않으며 여행의 우연성과 의외성을 즐길 수 있게)
2. 최소한의 비용으로 다니기.
3. 우리 나라에서 자전거로 다닐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식을 이용해 보기.(숙박과 이동 측면에서)
4. 최대한 해안도로를 이용하되 탄력성 있게.(재미 있고 의미 있는 코스라면, 또는 경우에 따라 해안도로를 벗어날 수도 있다.)
5. 섬이라 하더라도 다리로 연결만 되어 있으면 섬 일주하기.(제주도 포함, 약간 예외적이긴 하지만 울릉도에서 마침표 찍기)
6. 지도 없이 다니기.
7. 누구나 여행할 수 있는 방식과 일정으로 다니기.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일정에 떠밀린 적 없고 부상 없이 마칠 수 있었다는 점에서 1번 원칙은 지켜졌다고 생각하며, 9회 24일에 걸친 장기 라이딩이었지만 100만원 이내의 경비(932,000원)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 2번도 지켰으며, 모텔, 여관, 민박, 찜질방, 텐트, 비박, 선상숙박, 친구집 등 여행에서 이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숙박 형태를 이용했고, 직행버스, 고속버스, 일반버스, 기차, 택시, 배, 비행기 등 자전거와 함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동 수단을 이용해 보았다는 점에서 3번도 지켜낼 수 있었다. 4번 항목은 때로는 의도한 대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지켜졌으며, 5번 항목 섬 일주는 울릉도 마침표를 미완으로 남겨둔 상황이다. 6번 항목은 서해 해안도로에서 헤매다 내륙 깊숙이 들어가버리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포기했으며, 7번 항목은 누구나 완주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다님으로써 지킬 수 있었다.
지금부터 사진과 함께, 지나온 여정을 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나의 변변치 못한 기억이 여행기를 얼마나 뒷받침해 줄 지는 의문이지만...
여행을 떠나기 위한 장비 챙기기.
1. 속도계를 구입해서 달았다.(5.5만원)
2. 자전거 캐리어와 자전거 가방을 구입했다.(12만원)
3. 1.75 슬릭타이어를 장착했다.(대관령 힐 클라이밍 대회에서 썼던 타이어)
1번과 2번 항목에 들어간 비용은 여행 전체 경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비록 작은 가방이었지만 그때 그때 변용을 해가며 이용한 결과 충분히 제 구실을 해 주었다.
우리집 앞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동대구역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역무원이 1미터 50 규정을 들어 승차를 저지했다. 바퀴를 분리하고 들이밀어 보려다 '에구, 시작부터 그럴 필요가 있겠나' 싶어 그냥 돌아나왔다. 덕분에 약간의 비는 맞아야 했다. 결국 9시 40분에 대구 용계역에서 시외직행버스를 타고 포항으로 출발했다. 세찬 빗줄기가 퍼붓다가 포항에 도착할 때쯤에는 차츰 잦아들었다. 시작부터 비를 맞는 걸 보니 이번 여행도 비 꽤나 맞겠구나 싶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해 완도 구간에서 큰 태풍 하나를 만나게 된다.
포항터미널에서 전 직장 동료선생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나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지라 포항에서 시작하게 되면 꼭 나오시겠다던 약속을 지키셨다. 이후 칠포해수욕장까지 같이 동행하다 집으로 돌아가셨다.
도로원표가 가리키는 속초 340km에 새삼 설렌다.
테트라 포트에 부서지는 파도가 제법 세차다. 비 그친 뒤의 풍경. 저 멀리 보이는 연봉의 실루엣은 영일만을 품은 호미곶이다.
그간 자전거를 타지 않아 피부색이 제법 뽀얗다.
칠포해수욕장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식사 후 선생님과 작별했다.(1시 30분). 비빔밥과 맥주는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동료선생님이 사 주셨는데 지금은 명예퇴직을 하고 짬짬이 자전거를 타며 지내신다.
해맞이 공원도 지나고...
오후 6시 23분. 저녁식사와 숙소 확정이 늦어질 듯해서 새참 하나 해치웠다.
울진 후포도 지나기로 했다.(오후 7시 10분)
날이 어두워온다.(오후 8시 10분)
울진 기성에 도착했다.(오후 8시 30분) 저 멀리 반가운 파출소 불빛이 보인다.--이후로도 해안도로 일주 여행을 하면서 부족한 물은 언제나 파출소에서 채웠다. 필요한 정보도 덤으로 얻으며...-- 파출소에 들러 물도 채우고 민박할 수 있는 마을을 수소문했다.
파출소 순경의 안내를 받아 민박 할머니 집에 도착.(오후 8시 50분) 할머니께 식당을 수소문해 보았는데 지금 이 근처에는 문을 열고 있는 식당이 없다시며 식은밥이라도 괜찮다면 내가 먹던 밥이라도 내주마 하셨다. 이렇게 할머니가 식사를 내 주셨고, 나는 이왕 밥숟가락 놓은 거 다음날 아침도 부탁드렸다. 할머니는 선선히 응해주셨고 다음날 아침도 이곳에서 해결했다. 7월 말이라 무척이나 더운 날씨였지만 민박집은 할머니 말씀대로 추울 정도였다. 식사로 내 주신 건 도루묵찌개였는데 정말 할머니의 손맛이 가득한 일품요리였다. 할머니는 여름 생선으로는 도루묵찌개만한게 없다시며 도루묵 예찬론을 펴 놓으셨는데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정말 여름 생선으로는 도루묵찌개만한 게 없다. 다음날 떠나기 전, 밥값은 필요 없다시며 굳이 숙박비 2만원만 달라시는 걸 받은 정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3만원을 드렸다. 6남매를 다 번듯하게 키우시고 이젠 손주들이 찾아오는 재미로 사신다는 할머니. 언제까지나 건강하시길...
1일 - 포항 -> 기성(울진) - 민박
거리 = 126.39
순수 라이딩 시간 = 6:44
누계 거리 = 163.8(37km은 출발 전 시험운행)
해안도로 일주 여행 포항 고성 구간의 첫날은 이렇게 끝났다.
캐리어 위 작은 노란병은 감기약병에 담은 체인 오일이다. 비 맞은 체인에 오일도 쳐 주며 출발 준비에 나섰다.(오전 5시 40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오전 7시)
저 바다 멀리서부터 동이 터 온다.
시골 할머니들의 모습은 언제나 정겹다. 모든 분들이 다 우리 할머니 같다. 물론 옛날에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아름다운 길이었다.
대게의 고장 답다.
울진 국도변에 있는 도화(道花) 동산에 들러 잠시 쉬었다.
임원항 횟집 거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회 비빔밥이 이렇게 나왔다.(오후 1시 20분)
아름다운 장호항 해안선이 내려다뵈는 언덕 정자에서 오토바이로 전국 여행을 하고 있는 학생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해안도로 일주 여정도 무르익어 가고 뽀얗던 내 다리도 빨갛게 익어간다.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은 삼척 팰리스 호텔. 이곳이 영화 '외출'의 촬영지였음을 홍보하고 있었다.
동해시로 접어들었다. 칼국수 집에 들러 장칼국수를 시켰다. 술을 좋아하시는 강원도 출신 남편분이 제일 좋아하시는 음식이란다. 강원도 지역 음식인데 칼국수에 고추장을 풀었다.(오후 6시 20분)
오후 7시 10분. 동해에 있는 화정원 찜질방에서 짐을 풀었다.
그런데 세상이 참 좁다. 이곳에서 군대에서 같이 근무한 분을 만났다. 일찍 자고 싶은데 기어이 나를 불러내서 대게를 사 주었다.(사진 왼쪽) 여행기를 정리하다 다시 보게되는 사진이 더 반갑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애가 핸드폰 번호를 절반 정도 지워버리는 바람에 연락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엊그제 화정원에 전화해 보았으나 이제 근무하지 않아서 연락처를 알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이분은 군대 생활도 무척 재미있게 했다.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말년에 포상휴가를 갔는데 복귀일에 복귀하지 않았다.
중대장이 직접 집으로 전화했다.
"최병장, 왜 복귀 안 해?"
"예, 이곳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차가 안 다닙니다."
"야!!!"
어쨌거나 최병장은 그렇게 하루 늦게 부대에 복귀했다. 부대 복귀 이후 최병장은 일주일인가 이주일인가 연병장 완전군장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참고로 그때는 아직 우리 나라에 첫눈 소식도 들리지 않은 초겨울이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것말고도 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어쨌거나 다시 한번 만나 꼭 사례를 해야 할 사람인데......
2일 - 기성 -> 동해시 - 화정원찜질방
거리 = 133.42
순수 라이딩 시간 = 8:20
누계 거리 = 297.3
동해 둘쨋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아침 일찍 롯데리아에 들러 햄버거 하나를 사서 다시 떠난다. 배 고플 때 그자리에서 바로 아침 식사를 하려고.(오전 7시 10분)
강릉 헌화로로 접어들었다. 소끄는 노인과 수로부인의 이야기가 얽힌...
마침 헌화로 옆 가파른 절벽엔 나리꽃 한송이가 절묘하게 피어 있었다.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던 그 노인이 꺾었던 꽃도 저 나리꽃이었을까?
해안도로를 따라오다 보니 정동진 역 뒤쪽으로 들어섰다. 남들은 다 안으로 입장하는데 나는 반대로 안에서 밖으로 나왔다. 덕분에 입장료 없는 공짜...
강릉에서 출발해서 동해시로 간다는 대학생 둘을 만났다. 젊음의 패기가 느껴진다. 우리도 저땐 저랬지.
정동진 역 앞 광장 정자에서 햄버거 아침 식사(오전 9시 35분)
앞으로도 이런 버스정류장 사진은 자주 나온다. 지역을 알 수 있게 해 주면서 지역마다 다른 디자인이 주는 재미도 있다. 나의 해안도로 일주 컬렉션.
주문진 항에 들러 과일도 좀 사고...(오후 12시 30분)
냉면으로 점심을...(오후 2시)
중간에 간식도 챙겨 먹고...(오후 4시 30분)
간성에 도착했다. 간성에 있는 현대장여관(목욕탕이 딸린)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간성읍내에서 내일 아침 일찍 나서게 되므로 이동 중에 먹을 아침 대용 빵과 우유를 조금 샀다.(오후 7시 25분). 뭘 바르는 걸 싫어하다보니 다리가 빨갛게 익었다. 사진에서 확인하긴 어렵지만 제법 큰 물집이 양다리에 다 잡힌 상태다. 제법 쓰라렸다.
여관으로 돌아와 이곳 현지인인 현대장여관 주인아저씨에게 저녁 식사를 할 식당을 수소문했다.
"혹시 이곳에서 이북식으로 하는 보신탕집이 어디 있지요?"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곧바로 근처에 있는 '오세요영양탕'집을 소개해 주었다.
오세요영양탕. 이름부터 친근한 집인데 강원도 특유의 친절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된장을 제법 풀어 넣은, 맑은 탕인데 지금까지 먹어 본 중에서 최고의 탕이었다. 다시 그집에 가고 싶다.
여관방 벽에 걸린 금강농협 달력을 보노라니 비로소 여기가 금강산 영역에 속한 강원도 지역에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3일 - 동해 -> 간성 - 현대여관
거리 = 147.8
순수 라이딩 시간 = 7:28
누계 거리 = 445
동해 삼일째 라이딩은 이렇게 지나갔다.
현대장 여관 아저씨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비 뿌리는 길에 다시 나섰다.(오전 6시 40분)
현대장 여관 아저씨. 비록 허름한 시골 여관에다 목욕탕을 운영하고 있지만 자부심만큼은 대단했다.
간성읍으로 들어오는 길에 아주 현대적이고 큰 찜질방이 하나 있었는데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그게 어찌된 연유냐고 넌지시 물었다.
"아이구, 그 집이 들어서는 바람에 제가 정말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결국 이겼잖아요." 이곳에서 젊어서부터 여관을 운영해 왔는데 그간 세번이나 경쟁자가 들어섰는데 그럴 때마다 아저씨는 지켜냈고 다른 집들은 문을 닫았단다.
거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간판 거포. 거진 사랑이 느껴졌다.
거진 포구. 지금껏 본 중에서 가장 싱싱한 느낌의 포구였다.
거진항으로 돌아온 배들이 풀어놓은 활어를 파는 곳에서 회 생각이 났다. 아주머니의 발 크기와 도다리 큰놈과 작은놈의 크기를 한번 비교해 보시라...
거진 백도를 거쳐...
화진포 김일성 별장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들어가진 않고 이곳 민통선에서 동해 해안도로 일주 여정을 마감했다.(오전 9시)
거진시외버스 터미널을 향해 돌아나오는 길. 황태국이 있는 늦은 아침을 먹었다.(오전 9시 40분)
마침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고향이 포항이라시며 무척 반가워하셨다.
거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오전 10시 50분)
4일 - 간성 -> 고성통일전망대 입구 - 거진시외버스터미널(포항 - 집으로)
거리 = 47
순수 라이딩 시간 = 2:41
누계 거리 = 492
4일 간의 전체 경비 : 18만원
사진 편집 동영상이 이어진다.
이제 다음 일정은 서해안이다.
첫댓글 대구에서 국어샘을 하고 있는 분인데 장거리 라이딩할때 좋은 참고자료 될 것 같아 퍼왔습니다.. 잼 있어요 함 보세요...
대단하시네요...ㅎ 한편으로는 부럽고요...
군대 간판에 린나이 광고도 있네요..ㅎㅎ
와 대단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