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물음은 무었이었을까? 적어도 한국에선 사회주의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었을까? 반세기동안 극단적 반공주의의 망령에 휘둘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레드 콤플렉스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정통성 없는 군부세력에게 시민들이 동의와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 이다. 공포심에 기반한 철권통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남한에 영구적 공포감을 조장할 대상을 악마화하고 대중들의 반발도 무마시킬수 있는 내외부적 딜레마를 해소하는데 ‘반공주의’는 효용성이 높은 도구였다. 일반인 들이 상점의 간판이나 현수막을 제작 할 때 조차 빨간색을 기피했다는 속설은 당대의 시대적 광기를 짐작케 한다. 지금도 국보법의 칼날이 서슬 시퍼렇게 살아있는 2006년의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때 그시절의 광기에 우리또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영 꺼림칙 하다. 허나 세계사에서 인간들을 전쟁의 광기로 내몬 치명적인 동기는 종교였다. 종교사적 혼란의 중심엔 언제나 기독교가 있었고, 그 저변엔 JEJUS를 신으로 볼 것인지 인간으로 볼것인지란 물음이 또아리를 틀고있었다. 엄밀히 말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대립되는 지점, 그 지점에서 인간들은 피를 흘렸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부시정권의 ‘이슬람 테러세력들 과의 성전‘이란 망언을 듣고 있잖는가?
원작에 충실한 연출
소설 ‘다빈치 코드’는 전형적인 헐리웃 블록버스터물로 원작이 구성되기 이전에 영화제작용 으로 서술되었다. 사실을 꼬고 또 꼬아 진실을 꼭꼭 숨기는 독자 기만능력과 극단까지 몰고가는 스릴러의 비장미가 아쉽지만 잠못이루는 밤에 해치우기엔 무리가 없을듯하다. 조금은 뻔한 내러티브나 스릴러 성에 대한 박한 평만 뺀다면 매력적인 요소를 꽤나 찾을수 있을것도 같다. 무엇보다 작가의 학자적 성향이 그것이다. 댄 브라운은 꽤나 부지런한 작가인것 같다. 그의 종교학과 기호학의 해박한 지식이 스토리에 대한 몰입을 수월하게 도운다. 철저히 fact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결국 허망하고 무용한 상상력 이란걸 알지만 그의 성배추적에 큰 반발없이 동참하게 되는것이다.
책을 안보고 영화를 접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만큼 원작에 충실한 연출이다. 전체적인 내러티브 전개 연출은 감독의 전작 ‘뷰티풀 마인드’를 능가하는 듯하다. 전통적인 예술작품을 선호하는 칸느 영화제에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자체가 ‘다빈치 코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사회적 파급력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계속되는 논쟁, 허구인가 사실인가?
문학이란 장르 자체에 정을 붙이지 못한 내가 스릴러 물에 손을 댄 까닭은 시끄러워서다. 책이 시판 될 때부터 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매체와 만나는 작자들마다 한마디씩 하곤했다. ‘한번 읽어봐라’는 재미추구형 부터 ‘기독교가 반발할만 하다’는 기독교 옹호론과 ‘기호학 재밌겠는걸’ 하며 기호학, 미학의 세계로 잠수탄 이들까지.
영화상영을 법적 공방으로 까지 몰고간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주요 쟁점은 이야기가 기독교적 근간과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이다. 이야기의 주요 기둥이 되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설은 충격을 넘어 경악 할 만 하다. 하지만 경악에서 그쳐야지 픽션에 분노의 행동을 표출하는 것은 또 다른 충격을 몰고오는 것이다. 팩션(faction), 모두 알고있듯 역사적 파편들을 픽션이란 연결고리로 꿰어 맞춘 새로운 장르일 뿐이다. 작가의 신선한 상상력에 찬사를 보내주면 되는 것이다. 유치하게 ‘다빈치 코드, 진실을 찾아서’ 라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필요성? 전혀없다. 이미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으로 편입된 정치판이란 놀이공간에서 대중들이 발휘하는 창의적 놀이인 ’패러디‘를 음모로 몰고가는 유머라곤 찾아볼수 없는 어떤당의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건 왜일까?
기독교의 참 뜻은 보편적 인류애의 실천
기존의 어드벤쳐물이나 블록버스터용 오락영화에서 오랫동안 상업적 아이콘으로 다뤄진 ‘성배‘는 동굴이나 성전 지하에 감춰진 보물이기 일쑤였다. 다빈치 코드는 그것이 사람이고, 여성이란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서두에 등장하는 랭던교수의 강의에서도 알수있듯 기호에 대해 대중들이 가지는 상징적 무의식의 다양성을 지적하고, 장면의 곳곳에서 역사에 의해 규정당한 이교도라는 정의를 되묻는다. 이같이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코드들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나타난 ‘비주류’란 입체적 영상과 마주하게 된다.
저자의 손을 떠난 텍스트의 주제의식은 철저히 수용자인 독자의 몫으로 넘겨진다는 롤랑 바르트가 지적한 ‘저자의 죽음’의 개념에 동의한다면, 다빈치 코드의 뛰어난 상상력은 서양사에서 억압되고 마녀사냥당한 이교도를 통해 사회적 이교도들을 수면위로 드러낸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작가의 주제의식은 가부장적 경향성에 매몰된 주류 기독교에 의해 타살된 이교도, 즉 사회적 타자들의 정체성을 재발견 하는 것이다.
이들은 여성, 장애자, 왼손잡이, 이슬람, 흑인,,, 이들은 권력 중심화된 질서에 희생된 사회적 타자들이다. 종교를 비롯한 모든 지배담론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폭력에 노출되고 주변화된 사회적 타자는 이교도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안의 이웃이다.
첫댓글약간 반골기질이 있는 저는 베스트셀러 책은 일부러 피하는 편입니다. 책을 읽지 않고 봐서 그런지 지루하지 않았고, 영화적인 완성도로 보면 제한된 시간에 많은 사실을 표현하려고 충분히 노력했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싶어요. 책은 책이고 영화는 영화겠지요. 마지막 장면.... 작위적이긴 했어요.
첫댓글 약간 반골기질이 있는 저는 베스트셀러 책은 일부러 피하는 편입니다. 책을 읽지 않고 봐서 그런지 지루하지 않았고, 영화적인 완성도로 보면 제한된 시간에 많은 사실을 표현하려고 충분히 노력했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싶어요. 책은 책이고 영화는 영화겠지요. 마지막 장면.... 작위적이긴 했어요.
공감합니다. 진실과 허구를 떠나서 기독교의 참뜻... 다시한번 생각할 계기가 되었음하는데 다들 시비가림에 얽매임이 서글픕니다.
종교때문에 일어난게 전쟁이 아니다. 잘 살펴보라. 종교가 아니라 인간에 욕심과 권력이 종교를 이용한 거다. 기독교는 이용대상이지 종교가 원인이 되서 전쟁이 일어난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