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상>에서 가져온 몇년 전 글입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합니다. 하기사 고민하지 않으면 썪는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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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반 지성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 근원은 미국 선교사들의 경건주의적 선교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경건주의는 지성을 회의하며 내면적 신앙에 강조를 두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경건주의는 신앙의 개인성과 내면성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일 수 있지만 신앙의 안목을 좁히고 관심을 협소화시킴으로써 신앙을 탈역사화, 탈사회화 시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경건주의적, 반 지성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의문을 품거나 설교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각을 강조합니다. 성경사전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만 헤아려 보았더니 ‘기도’가 약 260여 구절, ‘생각’이라는 말이 조금 더 많았습니다. 성경이 기도하라는 말만 많이 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각하라’는 말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생각하라고도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도 마땅하지만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생각하면, 의문을 품으면, 좋은 신자가 아닐뿐더러 심지어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천박하고 피상적인 이유는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고 봅니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불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나는 발도 없고 팔도 없고 머리도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나는 오직 신음하면서 추구하는 자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라’는 300여 곳의 말씀 가운데 여섯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 12:24). 마태복음에는 까마귀를 백합화라고 바꾸어 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먹고 입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낮 까마귀까지, 백합화까지 관심을 갖고 기르시는 하나님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갈2:10).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낮은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편 (bias to the poor)을 드시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부자 되는 것에 대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경향성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항상, 무엇을 하든지 가난한 자를 먼저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어린아이는 생각하는 것이 어립니다. 생각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어린아이 생각을 버리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예레미야 6:19). 이스라엘의 역사는 심판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고 거역했을 때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는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것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불순종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에 망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깊이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다섯째,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시73:16). 시인은 의인이 망하고 고난을 받는데 오히려 악인이 흥하는 것을 보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를 신정론(神正論)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악인이 이 땅에서 흥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를 알기 위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의문을 품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아니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어려운 문제들을 주의 깊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 나라 백성의 피상성을 대신하여 우리 성도들이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피상성으로 뒤덮여있는 이 땅에 깊은 생각을 할 줄 알도록 우리들이 앞장섭시다.
여섯째,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육신’이란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말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욕망과 이기심에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영을 좇는 자입니다. 영의 일은 혈과 육에서 벗어나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나라의 것들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속한 자들로서 생각하며 기도하며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나이다”(시 92:5).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사 55:8).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깊이 생각하신 것처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을 보여 줍니다.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시 94:8).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생각하는 자’가 되라고 여러 곳에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말은 30~40년 전 출판된 우리나라 선각자 중 한 사람인 함석헌 선생님의 책 제목에서 빌려왔습니다. 우리 백성이 살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이 책에서 ‘우리의 역사적 숙제는 이 한 점에 도달한다.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야 참된 자신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본 결점은 위대한 종교가 없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 백 가지 가난이 있지만 가난 중에서 심한 가난은 생각의 가난이다’라고 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천박한 기독교인, 피상적 성도에 머물러야 합니까. 우리 모두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성숙한 데로, 깊은 데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이 나라와 이 교회를 살리는 대안 세력이 됩시다.
박철수 목사(분당두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