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쓰는 시조 이야기
김문억
인테넷에서 만나는 일반 독자들로부터 시조에 관한 질문이 가끔 들어온다. 시조가 무엇이냐 시조창 하고 어찌 다르냐. 시조를 쓰는 방법이 무엇이냐 같은 것들이다.
오래 전에 쓴 글을 꺼내 본다. 내 사이트(김문억시인학교daum)에 저장되어 있는 글로 오래 전에 쓴 글이다. 시조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습작기에 들어가 있는 분들을 기준으로 해서 옮겨 본다. 가능하면 필자의 체험에서 얻은 이야기로 정리 되어 있어서 내용은 길지만 읽기는 쉽고 편하다.
시조문학에 대한 개괄적인 개념과 함께 구체적인 시조 짓기에 대해서 올려 보기로 한다.
---------------------------------------------------------
시조 이야기
-머리말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민요라든가 가사가 있습니다.그런 것이 발전해 내려오면서 그 민족성을 형성하고 있는 詩歌 라는 전통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 민요를 보면 각 나라마다 그 가락이 다르거니와 크게 보면 대륙 간의 공통점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아시아는 아시아대로 리듬 장단에 맞는 흥겨운 가락이 있고 유럽은 유럽대로 아프리카는 또 아프리카대로 슬프거나 빠른 리듬의 춤사위나 민속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하루 이틀에 걸쳐 누가 작곡한 것이 아니고 지역마다 환경에 따른 오랜 세월 속에 닦아져 내려온 전통의 소산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라마다 갖고 있는 전통문학 역시 그 나라의 민족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웃 나라만 보더라도 일본은 그 나라의 축소 지향문화가 낳은 단가(短歌)라고 하는 아주 짧은 국민시가 있으며 중국은 대륙다운 기질의 장중하면서도 글자 수가 딱 맞아 떨어지는 오언(五言)시니 칠언(七言)시니 하는 민족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시조가 바로 그 것입니다. 3장이 갖는 문장의 리듬을 늘렸다가 줄였다가 조였다가 풀었다 하는 가락이 우리 민족의 특성이 잘 나타내는 특유의 민족시 인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 간에 전통 문학은 우연히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서 닦이면서 정제된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 필연의 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오랜 옛 사람들의 생활에서부터 찾을 수 있겠지요 지금도 우리는 혼자서 일을 한다거나 한 잔 술에 기분이 거나해지면 흥얼흥얼 노래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흥입니다. 그런 흥은 가족끼리 놀이를 한다거나 집단으로 농사일을 한다거나 부족끼리 싸움을 한다거나 간에 항상 생활 속에 이미 깊이 배어 있었겠지요. 그런 흥얼거림은 어떠한 일정한 리듬의 반복을 가져왔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노래가 되고 시가를 형성했겠지요. 나라마다 먹고 입는 것에서부터 생활 관습이 모두 다를진대 그런 바탕에서 자생된 민족마다의 시가 역시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게 마련이지요.
시조 역시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전통 시 라면 그 유래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연구된 바에 의하면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찾는 이가 있지만 앞서 말 한대로 문자로 전해지는 것 이 전부터도 그런 가락의 반복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그 흥얼거림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소모는 소리. 김매는 소리. 모내기 하는 소리 곡식을 타작하는 소리 웃음소리 한숨 소리 다듬이질 소리 통곡 소리 상여 나가는 소리 등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시조의 가락 속에는 민족혼이 배어 있는 것이며 민족의 내재율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문학으로서의 민족시인 시조의 자랑거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위상을 놓고 얘기할 때에도 정형이라고 하는 장르상의 특성이 갖는 편리라든가 불편함 같은 기능적인 것 이전에 이런 문제가 먼저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나라의 민족시는 그 민족의 리듬 가락이요 춤사위 이면서 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민족정신의 본류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정서의 바탕 입니다. 때문에 나라마다 자기네 민족시가 으뜸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나라의 현실은 말로는 전통문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민족시인 시조를 보는 시각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안타까움이 더 큽니다. 시조는 어느 나라 시가 보다 구성이 훌륭하며 자유로운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입니다. 때문에 시조는 한 줄을 ‘행’ 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章) 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시조는 우리말에서 자생된 문학이기 때문에 우리의 말맛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큰 그릇 입니다.
1. 時調란 무엇인가
의미적으로 보는 시조는 우리말에 매우 합당한 한국적인 고유 예술 문학 양식이다. 형식적으로 3장이라는 정형이 자리 잡히기까지는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고려시대의 별곡을 거치면서 우리 말맛에 잘 어울리는 모양으로 갖추어져 내려왔다. 그것은 우리말의 언어 풍습과 홀 수 문화라는 바탕에 근거 할 수도 있다. 3 장이라는 몸체는 다시 6 구라고 하는 체위를 갖추고 있으며 그 6 구는 또 12 마디의 낱말인(語節)잔뼈로 엮어졌으니 밖으로 보이는 형식은 간단하되 안으로 엮어진 시적인 내용의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시조가 안고 있는 한국적 의미는 결국 한국문학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한국문학의 서정성, 정한과 정탄이 되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이어 내려왔다. 그것은 짜여진 틀 안에서 적절한 말의 리듬을 더하고 빼면서 맛볼 수 있는 흥겨운 우리가락 율조를 느낄 수 있는 문학 장르라는 특성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말에서 자생된 우리 문학이라는 생태적인 숙명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시조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우리말이 갖는 말맛의 다양함은 시조 짓기에 있어 대단한 흥미를 유발 시키고 발전시켰으며 훈민정음의 탄생은 한국문학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시조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것은 한문문학의 완고한 틀 속에서 벗어나와 한국문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시조는 우리말 관계와는 떼어 놓을 수 없는 한국문학의 始組라 하겠다.
2.시조의 명칭에 관하여
역사 문헌상으로 보아 시조 명칭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때는 영조 때 로서 申光洙의 石北集에서
一般時調排長短—일반시조배장단
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즉 시조의 창에 길고 짧음이 있다는 표현이다. 당대의 최고 가객인 李世春 이라는 사람이 관서지방에서 시조창을 크게 이름 내고 있을 때다
이같이 문헌상으로 시조 라고 하는 명칭이 처음 오른 이 후 정조 때에 내려와서 李學逵의 문집 落下生稿 에
誰憐花月夜 수련화월야
時調正悽悽 시조정처처
라는 싯귀를 남기면서
時調亦名時節歌 –지조역명시절가
라는 註 를 달아놓고 있다
그 다음 철종 때에 이르러 柳晩恭 이 歲時風謠에서
時節短歌音調蕩—시조단가음조탕
風吟月白 唱三章—풍음월백 창삼장
이라 하였다. 역시 註解 에서 俗歌曰時節歌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문헌으로 볼 때 시조는 세속적으로 시절단가, 시절가 로 통해 왔으며 특히 唱三章 이라고 하는 노래 곡조의 특징까지 밝힌 유만공의 기록은 시조를 더욱 구체화 시킨 기록으로 평가된다. 즉
時節短歌音調----時節歌調----時調 로 줄여졌다는 근거가 된다
*참고문헌: 우리가락, 시조(한국 청소년 연맹 刊)
그 이 후에도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시조에 관한 명칭은 개인의 학문적 고집이나 또는 시조를 신명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의 개개인 연구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분분한 학설들은 궁극적으로 時調 라는 명칭을 뿌리 내리게 하고 있다. 전통이란 오랜 역사를 갖고 갈무리 되는 것이지 결코 누구의 개개인 주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時調 라고 하는 때시時 는 고시조에서 왕왕 사계절의 순환에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기 일쑤였지만 고시조를 면밀히 살펴보면 계절에서 느끼는 것만 시조로 쓴 것이 아니고 당대의 역사적인 애환을 담은 글이 상당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칫 시절 이라고 하는 때가 마치 시조는 음풍농월이나 읊는 노랫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해를 일으키기 쉽지만 실지 작품을 살펴보면 시사적인 의식을 갖고 쓴 소위 지금으로 말하면 참여 시라든가 저항 시 같은 작품도 찾아 볼 수 있다. 위태로운 국난을 당한다든지 아니면 삶의 애환에서 나온, 진한 작품성을 갖고 있는 시조는 얼마든지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임금 앞에 충간을 고하는 사육신의 소름끼치는 시조도 있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때시時 자를 쓰는 것이 글시 詩 자를 쓰는 것 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시조라고 하는 명칭은 창으로 불러져 내려오다가 한글이 창제 되면서 시조창은 그대로 국악으로 남아서 전통가락으로 맥을 유지하고 있고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시조 작품은 문학으로 갈래지어 시조문학으로 명칭 되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오늘의 시조문학이 같은 詩이면서 시조라는 명칭으로 인해서 그 동안에 겪어 온 고충은 너무 큰 것이었다. 알다시피 시조창은 그 가락이 매우 늘어지면서 길고도 길다. 그것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향유하며 즐기던 창으로서의 가락이다. 45자쯤 되는 시조 한 수면 기방에 들어 지필묵을 들라하고 기녀들과 밤 늦도록 질탕하게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오늘의 현대시조가 잘 못 인식되고 부족한 교육으로 인하여 자꾸만 옛날 시조창의 선입견을 갖고 시조문학을 대하니까 고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공부를 제대로 한 학자들은 빼 놓고.--
필자가 문단에 나오던 80년대 까지만 해도 매우 심했지만 그런 사정을 알고 시조 전문지가 생겨나면서 지금은 많이 완화되고 있다.
3.옛시조의 관점
시조는 처음에 詩가 아니고 歌 였다.
가곡이든 창이든 간에 부르는 노래일 따름이고 달리 노랫말인 시가 따로 창작 되진 않았던 것이다. 時節歌調 란 그 시절을 노래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신시조가 활발하게 창작되던 1900 년 이 후 부터는 창으로 부르기 위한 고시조가 새로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글이 창제 되면서 한문 문화권에서 완전히 해방된 우리 문학의 꽃으로 신 시조라는 이름으로 읽는 시조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고시조는 음악으로서의 지속일 뿐이며 마침내 신문, 잡지 , 단행본 등의 발행이 일반화 되면서 시조라고 하는 문학의 갈래로 읽는 시조가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렇게 고시조는 어쩔 수 없이 노래 속에서 이중적인 의미로 이어져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자생된 전통 이란 것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문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생활의 관습에서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는 노래가 나오게 되었고 노랫말이 전수 되면서 문자가 생긴 이 후 확고한 문학의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 역사의 공통점일 것이다. 서양의 경우도 르네상스 이전 까지는 노래와 시가 잘 구분되어지지 않았으며 서정 민요 라고 하는 어중간한 용어를 사용했었다. 소위 상징주의 이 후부터 노래와 시가 구분되었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인쇄술이 발달하는 근대 및 현대에 이르러서 시문학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렇듯 모든 운문 문학의 뿌리는 노래와 춤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시가 필수적으로 안고 있는 음악성과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시란 따지고 보면 신명이나 흥에서 나오는 노래인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좋은 시는 노래 말로 옮겨지고 있으며 유행가사 한 소절도 어쭙잖은 시 보다 훌륭한 겨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듯이 내재율의 리듬이 잘 살아있는 운문을 율문 이라고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근대 및 현대의 인쇄 문화가 끌어안게 된 우리말과 우리글의 방향은 이미 시조 속에 면면히 흘러 내려 온 것이며 일부 보수성의 지식인 사회가 한문 문화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민중들은 주체적으로 한글 신 시조를 창작해 왔던 것이다. 이는 바로 민족의 주체성을 충분히 이어 내려왔다는 자부심을 갖어도 좋은 것이며 시조만의 독자성을 자랑할 만한 일이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형식면에서도 일관성 있는 몸체를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4.옛 시조의 흐름
고시조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고구려의 을파소, 백제의 성 충 등이 꼽히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고 고려 시대의 시조 역시 재검토 되어야 하지만 대체적으로 십 여 수는 인정해도 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창업 사이에 이조년. 이존오. 최영. 이색. 이방원. 정몽주 등의 시조가 전해 오고 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고려의 충신들이 옛 날을 회고한 시조가 있고 새 시대를 송축, 찬양하는 시조가 나타나다가 마침내 훈민정음이 창제 되면서 한문으로 기록 되던 문화가 한글 시대를 맞게 되고 유교 사상이나 서정적인 시조,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일편단심의 님을 향한 애절한 시조가 거듭 나오게 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 고려국의 멸망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위하는 충신으로서의 절개가 등골이 오싹 하도록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유명한 시조 한가락이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逢萊山 제일봉에 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이 滿乾坤 할제 獨也靑靑 하리라.
-성삼문-
죽음을 앞에 두고 한 점 티끌도 허용 할 수 없는 얼음장 같이 차갑고도 고고한 선비의 기개가 구절마다 하얗게 서려있는 만고충신의 유언장이다.
옛 시조는 연산군 때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약 1백 년 기간을 발전 기간으로 잡을 수 있다. 외침이 없는 때였지만 사대부들간의 세도 다툼이 심할 때여서 당쟁이 시작 되었으며 은둔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관조의 시조와 음풍농월로 유유자적 하고자 했다. 특기할만한 일은 기녀들의 수준 높은 시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서경덕. 조식. 정철. 박인로. 황진이. 매창. 홍랑.등 60 여명이 시조를 발표했다.
深山에 밤이 드니 북풍이 더욱 차다
玉樓高處에도 이 바람 부는게요
간밤에 치우신가 北斗 비켜 바래노라.
-박인노-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는 임의 정이
綠水 흘러간들 靑山이야 변할손가
綠水도 靑山 못 잊어 울어 녀어 가는고.
-황진이-
임진왜란 이 후부터 숙종 까지 또 1 백 년 동안은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 구조가 달라지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던 사대부들의 신분 체제가 흔들리면서 평민들이 눈을 뜨기 시작 했으며 문학의 흐름도 평민의식이 주제화 되어 뛰어난 작가가 배출되는 시조문학의 전성기를 이룬다. 사대부들은 물론 아래로는 평민과 기녀들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시조를 짓는 부흥을 이루었다. 윤선도를 비롯한 양사언. 김장생. 남구만. 송시열. 등 7십여 명의 작가 군과 많은 무명씨의 작품이 쏟아졌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윤선도-
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
숙종 이 후 개화기까지 약 2 백년 까지는 시조가 제자리에 있는 듯 했지만 이때야말로 시조가 장시 화 되고 확대되는 시기였다. 문집이 나오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문집이 대부분 이 때에 간행된 것들이다. 조선의 문예 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 정조 시대에 실학사상이 태동함으로써 민중들은 새로운 시의 눈을 뜨게 되었고 기존의 질서에서 보다 과감한 표현을 했으며 장시 화하기 시작했다. 김천택의 청구영언이나 김수장의 해동가요 역시 이때에 나왔다
글도 병 된 일 많고 칼도 험한 일 있세
이 두 일 마다 하여 이 몸이 편차 하면
聖主의 지극한 은덕을 어이 갚자 하리오
-김수장-
風塵에 억매이어 떨치고 못 갈지라도
江上一夢을 꾸운지 오래더니
聖恩을 다 갚은 후는 *浩然長歸 하리라.
-김천택-
* 호연장귀: 이 세상을 떠나는 것.
5.현대시조의 흐름
현대시조의 흐름은 고시조 시대를 벗어나는 신 시조와 혁신시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화기 라고 하는 근대화의 촉진은 문학에서도 함께 받아들여지며 인쇄술의 발달로 그 진폭은 매우 큰 것이었다. 신 시조 역시 이런 사회적 변혁에 따라 방향 전환을 하므로 고시조 시대를 고하게 되고 唱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읽는 문학 장르로서의 신 시조 시대를 맞는다
작품으로는 19 세기 초 남궁억의 작품을 들 수 있겠는데 그 내용이 나라의 주체성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확고한 자리 잡기 라는 데서 새로운 문학사상을 볼 수 있었다.
뒤를 이은 시조들이 대한매일신보 . 청춘. 소년 등의 신문 잡지에 실려졌다.. 안창호. 신채호. 최남선 등이 주요 작가로 등장한다.
갑오경장 이 후로 나오는 개화기의 모든 노래들은 저항과 계몽 위주로 출현한 것이었으나 침략 세력이나 추종자들을 규탄하는 시조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제 침략으로 시조는 잠시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시조의 부흥 운동으로 가람 이병기나 노산 이은상으로 이어지는 현대 시조 시대를 맞는다. 결국 시조 부흥 운동은 잘못된 운동 이었다는 지적을 받게 되는데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계곡/이병기
맑은 시내 따라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볕을 받아
가는 잎 은바늘처럼 어지러이 반짝인다
청기와 두어 장을 법당에 이어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오고
흥으로 나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폭포소리 듣다 귀를 막아도 보다
돌을 베개삼아 모래에 누어도 보고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보다
도약(跳躍)
박경용
1
설경(雪景) 한 폭 치려니 백지장이 곧 눈벌이라
붓방아만 찧다가 하릴없이 점 하나 찍다
우련한 미명(未明)을 깨쳐 태어난 한 마리 사슴!
날랜 귀 쭝그리고 사위(四圍)를 둘러본다.
조신(操身)하게 찍히우는 숫 눈길의 첫 발자국.
향방을 가늠했나보다, 걸음새가 당당하다.
쇤 껍질의 빈 낱말에 씨가 드는 아픔이여.
깃을 치는 빛무리 속, 갓 돋은 새 태양을
음전한 뿔 위에 걸고 솟구쳐 닫는 내 사슴!
2
내 손에서 태어난 도약(跳躍)의 숫사슴이
십장생(十長生) 제 식구들을 거두어 사라진 뒤
백지장 빈 눈벌 위에 윙윙대는 한떼 소리.
가만히 귀녀기니 눈 내리는 소리다.
거듭 열리는 해원(海原)에 쌓이는 눈의 소리.
그 틈에 끼어들 양으로 점 하나를 찍는다.
눈 쌓이는 바다에 둥두렷한 부랑(浮浪)의 섬
단조로운 해조음(海潮音)에 소리를 메기면서
해돋이 내 본향(本鄕)으로 노(櫓) 저어가는 바윗섬.
가람의 경우 시조를 혁신 시키자면서 작품과 함께 당대의 이론가로 이름을 떨친 현대 시조의 개척자 라고 할 수 있는 시조단의 큰 별이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작품을 계속 내 놓았으며 작품 또한 이 전 것과는 전연 다른 새로운 감각으로 정감 넘치는 것들이었다. 이를 이어서 조운 또한 빛나는 시조를 남겨 혁신 시대의 면모를 보다 뚜렷하게 했다. 이 무렵부터 가람 선생이 제창한 시조를 혁신 시키자면서 단수 연작을 쓰기 시작하는 큰 변화가 생겨났다. 고시조는 거의 다 단수로만 전해지고 있는 반면에 단시조를 두 수 또는 세 수 네수 까지도 이어서 쓰는 경우가 생겨난 것이다. 문학에서도 사상논쟁이 치열하던 때였고 카프 계열에서도 시조는 고루하고 발전의 저해요인이 된다고 타박했기 때문에 이에 맞서 시조혁신 운동이 벌어졌고 당시의 시조 단에서는 어쩔 수 없는 방어수단으로 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단 수 연작 쓰기는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시조문학의 일반적인 작법으로 계속 전수되고 있다.
어머니 얼굴/조운
주름진 어머니 얼굴
매보다 아픈 생각
밤도
낮도 길고
하고도 한한 날에
그래도 이 생각 아니면
어이 보냈을거나.
高地가 바로 저긴데/이은상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례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등켜 한고 가야만 하는 겨례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가람과 함께 당대에 시조 작가로 큰 획을 그었던 노산 이은상은 타고난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독특한 서정으로 천의무봉하게 작품을 빚어내는 달관을 보여 주었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그의 눈길만 닿으면 시조라는 가락으로 술술 나오는 듯이 뛰어난 작가였다.
이들로 하여금 단시조를 중심으로 연시조가 나오고 신시조 시대를 이어받은 현대시조의 기틀이 튼튼해졌다. 특히 가람에의해 배출된 이호우. 장응두. 김상옥 중심의 체계가 그대로 내려 오면서 이영도의 서정이 가해지고 이태극이 출현하여 시조 이론이 다시 한 번 정립 되었다.
사변이라는 민족상쟁의 혼란기를 격으면서 시조는 현대문학 이라는 이론에 따르면서도 전통문학 이라는 이중적 고민을 갖고 창작 되었으며 정완영. 박재삼. 장순하. 최승범. 송선영. 박경용. 이근배. 김제현 . 서벌. 박재두 등에 의해 기금까지 수많은 실험 정신으로 폭넓은 현대시조를 창작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이라고 하는 정형시로서의 틀과 함께 현대 시 라고 하는 이중적 문제를 어떻게 잘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가 함께 포함된다.
지금도 수많은 후학들이 시조 창작을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게 엄연히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문학으로 독특한 우리만의 틀을 갖고 있는 정형율의 좋은 시조를 혹자는 아예 모르거나 혹자는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구분도 어렵고 혹자는 아무리 후하게 맞춰봐도 시조의 틀이 없는 것을 시조 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대충 그야말로 수박 꼭지 만져보는 식으로 시조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더듬어 보았다. 다분히 처음 시조를 접하는 사람 위주로 집필 되었다. 보다 시조에 대한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에는 시조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갖고 기술 해 보기로 한다.
-------------------------------------------------------
시조, 어떻게 쓸 것인가
단시조 짓기
우리가 흔히 대하는 3장 6구 형식의 단시조를 평시조 라고도 하는데 이는 창에서 유래된 용어다. 창에서 유래된 명칭이라도 어차피 시조에서 부르던 명칭이기 때문에 같이 써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단시조다 장시조다 하는 명칭은 시조의 길이에 따라서 붙은 형식의 이름이고 평시조다 사설시조다 하는 명칭은 내용까지 포함되는 이름 같아서 듣는 어감도 더 멋스럽다.
이미 다 알고 있듯이 단시조 형식은 3장으로 되어있다. 시에서는 한 줄을 한 행 이라고 하지만 시조에서는 장章이라고 칭한다. 여기서의 장의 개념은 시에서의 행과는 좀 그 무게를 달리한다. 장의 사전적 해석으로는 책을 크게 구분하는 단위로 되었다. 유추 해석한다면 시조에서의 한 장은 책에서의 여러 페이지 또는 한 단락 분량에 상당하는 내용과 무게만큼 버금가는 것으로 그 만큼 압축된 문장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와 같은 하나의 장 역시 말로써 이어지는 것이니 모든 시가 그렇듯 말 잇기와 말 매듭짓기일진대 말은 시의 재료이면서 수단의 전부라고 하겠다. 따라서 좋은 글을 쓰고자 하면 말 선택의 원리와 말의 조직, 이음새 등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말은 대체로 주어에 서술어가 따라 붙으면(태산이 높다하되) 한 小節(소절)의 말 구절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단위가 둘 쯤 합쳐지면 시조 형식상으로 따져서 한 장이 형성된다.(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모든 시의 출발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벌써 두 마디의 말이 결합되면 가락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조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문학 어느 장르나 그런 음악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본율격의 한국어 리듬이 가락과 함께 뜻이 따르게 되는데 한국어의 기본 율격이 4,4 조 라고 하는 도움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말은 4 음절을 한 번 반복하고 다시 이를 한 번 반복하여 모두 16 음절을 이룬 것이 제일 큰 단위가 된다. 이른바, 4.4. 조의 한국어 기본 율격이 이루어진다. 3.3 조니 7.5 조니 하는 것들은 실상4.4 조의 변형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유시는 4.4 조의 기본 율격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는 시의 운율이다. 즉 자유시의 배경에는 4.4 조 가락이 느껴지고 있다. 격앙된 산문에서도 그것이 느껴진다.
-이상섭(문학비평 용어사전. )
덧붙여 비유한다면 시조는 다만 3장 6구의 형식적 장르라는 것뿐이다.
이런 형식으로 한 장 씩 두 장이 이어지면 시조의 초,중 장이 형성된다.
나비야 靑山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듣자니 시끄럽고/조용하면 궁금하다
없으면 찾게 되고/있으면 안 보이고
여기서 우리가 귀가 따갑도록 들은 자수율은 이제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인용한 시처럼 4.4 조가 기본 율 이라는 것 뿐 , 한 두 글자의 가감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기본치의 대접을 받는 것이 우리말의 리듬이다. 그런데 그 가감이라는 것을 아무렇게나 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필연적인 경우면서 또한 억지스럽지 않은 경우다. 그렇게 다지고 본다면 반드시 3 4 3 4 가 못 되는 경우는 옛시조에서도 있고 현대시조에서도 얼마든지 있다.
어져 내일이야(2 4) 그릴 줄을 모르던가(4 4)
이시랴 하더면(3 3) 가랴마는 제 구태여(4 4)
보내고 그리는 정은(3 5) 나도 몰라 하노라(4 3)
사랑하는 님을 붙잡아 두지 못 하고 그냥 보내고 나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 하는 황진이의 유명한 이별 노래다.
지금 우리가 시조 한 수를 쓰는 단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시조를 쓸 때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은 작품을 쓸 때는 전체 설계에 대한 밑그림부터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한 소절 한 소절이 합하여 결국은 한 편의 시가 되지만 내가 지금 쓰는 한 편의 시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시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전제를 두고 시 창작을 하다가 보면 시조형식의 틀이라는 것이 그리 생각보다 답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위에서 인용된 작품을 보자.
‘어저 내일이야’(아, 내가 저지른 일이야) 는 기본 율 7자가 못 되는 6자에 불과하다. 그 대신 다음 둘째 구에서는
‘그릴줄을 모르던가’ 하고 8자로 한 자 더 늘여 놓았다. 이렇듯이 시조에서는 앞 구 보다는 받쳐주는 뒤 구가 조금 더 긴 것이 오히려 기본 율 7보다 훨씬 더 음악적 이듬이 살아난다. 특히 시조문학은 음악적 리듬 감각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어저 내일이야/ 그릴줄을 모르던가
여기서 또 한 가지 놓치면 안 될 부분이 있다. 젤 앞에 나오는 ‘어저’ 라는 감탄사다. 아! 라고 하는 감탄사를 옛날 식 감탄사로 어저를 도입했는데 글자 수로 따지면 2자 밖에 안 되지만 소리로 읽어 보면 어저~하고 저를 길게 빼게 되니까 2 박이 된다. 그러므로 해서 어저는 글자 수로는 2자지만 소리로 읊조리면 어저~ 가 되는 3박이 된다. 즉 3의 숫자와 같다는 뜻이 된다. 글자로는 ‘아리랑’이지만 리듬으로는 ‘아~리랑’이 되는 것과 같다. 글자 수는 2지만 소리의 파장은 3이 된다. 이를 우리는 음의 길이, 음보라고 부르고 있다. 때문에 시조 쓰기에서는 글자 수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글자 수에 구속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시조가 우리말에서 재생된 민족시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고시조에서는 시조창이라는 노랫말을 전제로 통용되었지만 현대시조에서도 이렇게 우리말을 마음껏 다루는 솜씨는 배워서 창작되어야 한다. 이렇게 숨어있는 속뜻을 모르고 그냥 글자 수를 맞추면서 시조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호두 알을 깨뜨려서 고소한 속 것을 꺼내 먹을 줄 모르는 무모한 일이다.
이런 음악적 감각은 하나의 장에서만 그치는 것이 또한 아니다
첫 장이 길게 늘어졌다면 다음에 오는 중장에서 말 놀림이 확 줄거나 첫 장에서 짧아졌다면 중장에서 조금 더 길이를 늘려 주므로 해서 장과 장끼리의 관계까지 잘 조응이 되는 유기적 리듬관계를 유지하므로 해서 시조문학의 본 맛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떠타 나라에 큰 공을 누가 먼저 세우리오.
위의 작품을 한 번 보고 가자
두 편 다 기본 율을 파격하고 있지만 그것이 억지스럽거나 고의적인 것이 아니고 가슴에 품고 있는 시심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작가의 뜻이 가슴에 닿는다. 시조의 기본 율은 조금 파격이 되었지만 어느 한 곳이고 리듬 상으로 어색한 곳이 없이 완벽한 시조 한 수다. 새삼 다시 숫자 표기를 해 보지 않아도 이제는 어느 곳이 줄고 늘어났는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조금만 더 유의를 해 본다면 왜 숫자가 줄고 늘어날 수가 있는지를 얼른 알 수가 있는데 앞에 표기되는 명사(주어)를 받쳐주는 형용사(서술어)에 따라붙은 부사를 더 하다가 보니 파격이 생기는 것이다. ‘불고’와 ‘찬데’가 그렇다
가령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서 초장을 이렇게 썼다고 쳐 보자
삭풍은 나무 끝에 명월은 찬 눈 속에
만리 변방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라고 쓴다면 읽는 맛이 어떻게 다를 것인가를 독자의 판단은 자명할 것이다. 뜻 전달이야 되겠지만 장과 장끼리의 조응관계로 이루어지는 시조의 음악적 아름다음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더구나 북방을 지키고 서 있는 김종서 장군의 늠름한 기개는 사뭇 매가리가 떨어지고 만다. 조정에서 당쟁이나 일삼고 있는 썩은 문부들을 한없이 유린하고 있는 무부의 질타를 느낀다. 역시 초장에서 길게 늘어뜨린 문장을 중장에서는 조금 더 줄여 주므로 해서 다시 종장에서 한고비 구비치는 문장으로 갈무리 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본다면 작품 전체 곳곳에서 파격은 항상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경우는 구체적으로 어느 경우냐
내가 표출하고자 하는 작품의 뜻을 온전하게 잘 표현하고자 할 떼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 범위는 바로 소리를 내서 읽어 보았을 때에 기본율의 형식에서 리듬이 벗어나지 않았을 경우를 말 한다. 아무리 파격이 이루어지더라도 시조문학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적 리듬은 맞추어 져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소리를 내서 읽어 보면 기본이 안 되는 글은 잘 안 읽혀진다. 그것이 바로 음수와 더불어 따라 붙어야 하는 음보(음의 박자 길이)가 맞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소리를 내서 읽어 보면 매우 아슬아슬하게 시조의 기본 율 안에 들어있다. 한두 글자만 더 했어도 자유시가 되거나 엇시조 형식으로 넘어 갈 뻔 했다.
아래의 임제 시조 첫 장을 보면 처음 시작이 2 5로 시작되는데 합치면 기본 글자 7자다. 그 맛이 또 상큼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첫 두 글자가ㅊ자로 시작되기 때문에 음향이 주는 맛 또한 무시 못 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듯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뇨
잔 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설워 하노라.
이렇게 초, 중장이 완성되면 종장 처리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기승전결의 구조적 매듭을 짓는 것이 종장이라고 하겠다. 초. 중장에서 반복적으로 이끌어온 리듬이 종장에 와서는 3, 5 4 .3 이라고 하는 자수로 반전 시키고 있다. 이를 백수 선생님은 옛날에 물레로 실을 뽑을 적에 어깨춤에서 한 번 뽑아 올린 실을 번쩍 들었다가 놓는 격이라고 했다. 흐르는 시냇물이 휘돌아 치는 부분에 오면 물소리도 요란해 지고 구비치는 힘이 있듯이 말이다. 종장은 그렇게 3.5 라고 하는 꿈틀거림으로 결론을 지어 앉혔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불문율로 지금껏 내려온 것은 어떤 경우든 종장 첫 구 3만큼은 숫자의 가감을 두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3 이라고 하는 숫자는 철저히 지켜 내려왔다. 대부분의 옛시조가 그렇게 지켜 내려왔다. 이런 지킴을 우리는 관습 미학의 초점으로 보면서 시조 구조의 구심점 이라고 생각했다. 배꼽 같은 생명체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단수 시조 한 편을 숫자로 표기해 보면
3,4,3,4
3.4.3.4.
3.5.4.3
이라는 그림이 나온다.
3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는 다음에 나오는 ‘홀수문화’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단시조의 기본 형식을 이루는 틀이며 옛 시조로부터 그렇게 이어 내려왔다.
또 한가지 더 질문이 많이 들어오는 부분이 종장 둘 째 구다. 즉 작품을 마무리를 하는 결구로서 기본율은 4.3 또는 44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안정감이 있다. 마치 뜀틀 선수가 뜀틀을 넘기 위해서 달려오는 부분이 초장 중장으로 친다면 뜀틀을 넘는 부분을 종장으로 생각 해 보자. 구름판을 두 발로 탁 차고 오르는 부분을 3으로 보고 공중회전을5로 본다면 마무리하는 착지를 4 3으로 볼 수 있다. 믿음직한 안정감이다. 만약에 착지가 제대로 안되고 3 4. 또는 3 5 정도로 흔들린다면 뒤틀리는 리듬으로 점수를 까먹게 된다.
그러나 작품을 쓰다가 보면 글자 수의 조율을 놓고 고민하게 되는 때가 있다. 기본 글자 수에 맞춰서 쓰다가 보면 표현하고자 했던 부분이 잘려나가게 되어 아쉽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작품성을 살리고 싶어 파격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앞에서 음보을 이야기를 하면서 앞 구와 뒤 구의 조응관계를 말한 적이 있다. 종장 마무리 부분에서 그런 고민에 빠지는 경우 앞 구가 3- 6 또는 3-7 정도로 길게 빼 주는 경우가 발생하면 마무리가 되는 둘 째 구에서도 이에 상응하여 5-4 정도의 음수로 대응 시켜서 마무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시조가 있었고 전통문학으로 오늘까지 내려온 문학의 가치성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 형식으로 오늘의 시문학으로서 과연 아무 문제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이야기 하기로 한다.
중시조(中時調) 짓기
단시조가 갖춘 기본 3장에서 초장이나 중장에서 어느 장이든 한 음절 내지 두 음절 정도가 벗어나는 형식이다. 그러나, 벗어나기는 하되 어느 정도로 벗어났느냐 하는 문제는 학설에 따라서 분분하지만 계속 이야기 거리로 끌고 가는 사설 가락이 아니라면 하나의 구(句) 정도 길이로 약간 늘어난 형식을 말한다. 옛 시조의 두 작품을 보기로 하자.
藥山東臺(약산동대)여즈러진 바위 틈에 왜철쭉 같은 저 내 님이
내 길에 덜 밉거든 남인들 지내 보랴
새 많고 쥐 꼬인 동산에 오조 간 듯하여라(가)
천세를 누리소서 만세를 누리소서
무쇠 기둥에 꽃 피어 얼음 열어 따들이도록 누리소서
그 밖에 억만세 외에 또 만세를 누리소서(나)
가의 작품은 초장이 늘어난 것이고 나의 작품은 중장이 늘어난 경우다
가의 경우는
여즈러진 바위 틈에 왜철쭉 같은 내 님아
해도 될 법인데 약산동대 라고 하는 한어절이 더 붙었다
아니면 바꾸어서
약산동대 여즈러진 왜 철쭉 같은 내 님아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바위 틈에
가 더 붙으므로 해서 낱말 하나가 더 붙었다
반면에 보기 글 나의 예를 보면
중장을 길게 썼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기본 율격인 초장처럼 쓸 수도 있지만 4 음보쯤 더 늘어나 있다.
이런 표현을 중 시조 라고 하며 창법 표현으로는 엇시조 라고 한다.
그러면 이런 중시조는 어느 경우에 왜 쓰게 되었을까.
나의 경험으로는 역시 신명 나는 붓 끝이 춤을 추고 북을 치는 조화로 밖에 볼 수가 없다. 예문으로 든 위의 엇시조를 보면 평시조로 마무리 해도 크게 모자랄 것도 아니지만 ‘저 내님이’ ‘누리소서’ 가 각각 한 호흡 더 늘어났다는 것은 신명과 흥을 어쩌지 못하고 참지 못한 탓이다. 뿐만 아니라 초장의 ‘만세를 누리소서’를 중장에 와서도 ‘따들이도록 누리소서’ 하고 반복하여 강조하는 뜻이 포함된다. 역시 신명의 탓이다.
시 창작은 신명이다. 신명이 없이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없거니와 시조 창작은 더욱 그렇다. 어느 장르 보다 가락이라고 하는 음악적 율조를 몰아 말(言)타기를 해가는 특이한 표현법인 시조를 쓰다 보면 거미줄처럼 줄줄줄 말(詩語)을 이어가는 시상이 떠 오르는 경우가 있어 중시조 내지는 사설시조가 탄생한 것으로 본다.
결국 그것은 3장 6구의 틀로는 시적 사상을 다 담기에 갑갑했던 것이며 사설 내지는 판소리 사설로 갈 수 있는 시조 형식의 확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한 편 당시에는 연작 이라는 것이 없이 단시조를 쓰던 때였으며 3 장 6 구 라고 하는 짧은 형식 안에 시상을 모두 넣다 보니 그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것이었으며 그런 한계 즉 형식 이라는 틀 안에서 용출하는 가락을 멈추지 못했으니 중시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말하거니와 중시조는 역시 멋들어진 가락의 소산이며 단시조의 기본 율을 이탈 하지마는 4,4 음보의 반복 리듬이라는 시조 기본 율조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겠다. 단시조 짓기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엇시조에서도 장과 장끼리 밀당을 잘 하여 리듬을 살리는 것이 좋다.
시조든 자유시든 처음 시를 쓰는 사람에게 판소리 사설을 읽으라고 계속 잔소리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즈음은 사설시조를 쓰는 경향이 생기면서 엇시조라고 명칭지을 수 있는 작품은 잘 안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長時調(장시조)짓기
단시조를 기본으로 할 때 중시조 보다 더 길게 표현하는 방법을 장시조 즉 사설시조 라고 한다.
장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이 모두 길게 표현하는 방법도 있고 또는 두 장만 기본 율보다 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중장이 길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시가 그렇듯이 단시조는 그 뜻이 함축되어 있으면서도 상징성이 많지만 사설시조로 넘어가면 단시조 보다는 할 말을 다 풀어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산문화 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장시조의 특징은 표현의 방법에 있어 풍자나 해학으로 비유하는 기법이 많이 도입되었다. 창법으로는 사설시조 라고 한다. 나처럼 수다스런 입을 갖은 사람에게 매우 적당한 장르다.
창(窓) 내고저 창을 내고저 이내 가슴에 창 내고저
고모장지 세(細) 살장지 가로다지 여다지에 암돌저귀 수돌저귀 크나 큰 장도리로 똑딱 박아
잇다감 하 답답할 제 여다져나 볼가 하노라
이 경우는 3 장이 모두 기본율을 파격하면서도 중장만 길게 늘여주고 있다.
소리 내서 읽어보면 반복되는 말 놀림으로 기기묘묘한 느낌으로 일반 시에서는 감히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가락이 울려온다. 누가 사설시조를 자유시라고 막말을 자꾸 하는가. 시문학 전체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사람들이 하는 실언이요 시조문학에 대한 큰 결례다.
초장에서는 창을 낸다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 무슨 창을 낸다는 것이냐, 그 이름들이 중장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초장의 말 놀림은 중장으로 넘어가기 전의 예령과도 같은 문장이다. 중장으로 가서 보면 ‘지’ 라고 하는 글자를 갖고 창에 대한 낱말들을 모두 모아서 사설을 만들고 있다.
‘고모장지 세(細) 살장지 가로다지 여다지에’
4음보 기본 율이 쿵짝거리면서 잘 어울리고 있다. 장도리로 그냥 박았다고 해도 될 터이지만 ‘똑딱 박아’ 라는 앙증맞은 표현을 하여 ‘똑딱’이라는 음향이 주는 효과를 십분 발휘하여 창문 만들기를 얼른 마쳤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우리 말 조타수 1급 면허 소지자가 쓴 빼어난 사설시조다.
사람이 몇 生이나 닦아야 물이되며 몇 겁이나 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水簾 眞珠潭 萬瀑洞 다 그만두고 구름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連珠八潭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 번 굴러 보느냐
유명한 조운의 구룡폭포다. 흔히 장시조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예문으로 제시 되는 작품이다.
초장은 흥을 못 이겨서 파격으로 길어졌다, 여기서 몇 음보가 길어졌다 는 의미는 논리상 대단치 않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사설 이라는 이름으로 장시조가 형성되는 것 자체가 초장도 좀 길게 빼 주게 되고 특히 중장은 할 말을 다 하는 본론의 위치가 된다. 대부분 지금껏 표현된 사설시조를 보면 거의가 다 중장이 길게 표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중장의 기능이 초장에서 놓은 상想을 펼쳐 확대하는 중심역할이기 떼문이다.
잠시 사설시조 낭송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종종 사설시조를 낭송하는 것을 보면 평시조와 비슷한 방법으로 낭송을 하는데 이는 조금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 사설시조 차체가 말이 가파른 시조다. 그냥 말이 많은 시조가 아니고 반복리듬으로 음악적 리듬이 더 팽배 해 있는 글이다. 때문에 낭송을 할 때 평시조 보다는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읽어 주어야 가락도 살아나고 듣는 맛도 좋다.
산자여 일어서라, 때가 되었다 나를 따르라
나는 왕이로소리다, 남양의 푸른 갈기를 세우고 신명을 앞세우고 가자 북으로 산 자는 모두 나를 따르라
피곤한 구릉마다 코를 땅에 박고 살아있는 목숨을 깨워 가자 우리 긴긴 겨울 허전하고 배고팠던 북으로 가자 산야에 쓰러졌던 진달래며 개나리 철쭉을 깨워 앞세우고 깃발을 휘날리며 고개고개 너머 가자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듯이 살아 있었다
이 경우는 초장과 종장은 기본 율을 지키고 중장만 길게 표현 되었다.하지만 앞의 고시조에서 맛보았던 가락의 박자 소리가 시원치 않다.
산문이나 운문이나 대체로 한 편의 글은 起承轉結(기승전결) 이라는 순서에 따라 글 맥이 이어지고 있다. 시조 역시 그런 순서에 따라 표현되고 있으며 장시조 역시 그런 맥락에서 표현 되므로 초장에서 발단된 시상을 중장에서 이어 전하므로 어느 정도 작품의 모양새가 형성된 상태에서 종장으로 결구를 삼는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장시조라고 하여 무조건 얼마든지 길게 써도 되느냐 하는 문제를 논한다면 그 또한 문제점이 될 수가 있다. 나의 문학 스승이었던 서벌 시인은 장시조에 있어 중장도 두 개의 句(구)로 구성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장시조의 중장이 한없이 길게 표현해야 할 경우가 발생한다면 장시조 역시 연작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초기 때 실험적으로 시도한 바 있다.
이야기가 이 쯤 되면 시조 인이 쓸 수 있는 것이 창작 판소리 사설 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제언 하고 싶다.
이쯤에서 필자의 시조집「김문억 사설시조」에 수록되어 있는 글 한 편을 옮겨 보기로 한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들이 중복되겠지만 습작을 하는 이들은 복습 차원에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이 글은 시조문학이 격고 있는 현재 이야기면서 시조문학 입문을 두고 있는 분들에게 던지는 숙제일 수도 있다.
참고문헌 : 우리 가락. 시조. (한국청소년 연맹 1982 비매품)
김문억 사설시조(2019 파루출판)
----------------------------------------------------------
시조문학 확장을 위한 새로운 탐색 1.
단수 시조를 쓰자
1. 홀수문화 속에서 탄생한 3장시조
우리는 흔히 시조 문학의 특장을 이야기 할 때 초 , 중 , 종장의 3장과 종장의 첫 어구가 3음절로 이루어지는 음보의 형식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왜 3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에 대하여 더 깊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시조 문학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우리의 전통문학은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고려의 별곡, 조선의 가사로 이어지면서 시조의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리말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시조 문학의 정형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속에는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당대의 시대적 요구도 있었겠지만 구태여 3이라고 하는 명시적이고 확고한 홀수가 필요했는지에 관한 논의는 적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전통 문화의 생활 관습이 전제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생활 관습으로 1, 3, 5, 7, 9의 홀수 문화가 있었다는 것과 홀수 중에서도 무엇보다 3이라고 하는 숫자가 밑받침 되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홀수는 우리 정신문화의 깊은 뿌리다. 거슬러 올라가면 까마득한 시절부터 조선의 혼에 묻혀 내려온 민족정신의 숫자이다. 일상생활의 관습에서 얻어진 지혜의 소산으로 홀수는 딱 맞아 떨어지는 짝수에 비해서 넉넉하고 여유롭다. 그 중에서도 특히 3을 선호하는 생활 관습은 예사롭지 않다. 나라의 큰 명절이 대부분 홀숫날이며 생활 곳곳에 뿌리 내린 3의 관습도 매우 다양하다. 사람이 죽으면 3일장 아니면 5일장을 치르며 장례 후에 삼우제가 있고 49제가 있다. 심지어 제물을 올려도 홀수로 올리지 짝수로는 차리지 않는다. 돌탑을 쌓아도 3, 5, 7, 9 홀수 층으로 올렸을 때에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애기를 낳고 금줄을 쳐도 세이레〔三七日〕동안 출입을 삼갔다. 홍익인간을 추구했던 환웅을 찾아온 곰과 호랑이 중 곰은 삼칠일을 견디면서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되었다. 三災가 있는가 하면 또 三才가 있다. 가까운 이웃을 일컬어 삼이웃이라는 좋은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거간질을 잘 하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 하면 뺨이 석 대다. 힘겨루기 판을 벌여도 삼판양승이거나 5판 3승제를 택하며 만세를 불러도 三唱까지 해야 속이 후련했다. 三冬이 있는가 하면 三伏이 있다. 무리를 일컬어 三三五五라 했고 빛과 색깔도 삼원색이 근원이다. 상고上古 시대에 우리나라 땅을 마련해 준 삼신三神이 있다 하여 생명신으로 섬긴다.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목적한 것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생활 속 곳곳에 숨어있다. 그만큼 하나 둘 셋은 출발의 디딤돌이요 구름판이다. 이렇듯 3이라는 숫자는 우리들 생활의 중심에서 하나의 축을 이루며 이어 내려왔다.
우리 민족은 왜 홀수를 선호하게 된 것일까? 음의 기운인 달을 기준으로 생활해 온 동양사상이 어쩌면 짝지어지는 것을 은연중에 터부시 하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즉 딱 맞아 떨어진다는 강박감을 거부했으리라. 아귀가 척척 맞아 떨어지기보다는 좀 더 후덕한 인성과 넉넉한 생활양식이 한민족의 정서다. 두엇, 서넛, 여남은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숫자이면서도 훨씬 더 넉넉해 보인다. 그 위에 한 개쯤 더 얹으면 더욱 좋고 한 개쯤 빠져도 부족하지 않아 아무 유감이 없는 말맛이다. 그러고 보면 3은 4보다 크고 9는 10보다 넉넉하다. 어쩌면 덤 문화도 예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부에서 아무리 정찰제를 권장해도 뿌리 깊은 덤 문화는 값을 깎고 실랑이 하는 중에 실거래 값이 매겨진다. 그런 습관은 비록 저울에 근을 달아서 시세대로 팔더라도 한 주먹 더 후하게 얹어 주어야만 서운치가 않지 그렇지 않으면 야박하다면서 고약한 인심 취급을 받았다.
고조선을 개국하기까지의 단군신화를 보더라도 홀수문화의 깊은 뿌리는 우리민족의 태생적인 것이었다. 홀수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3을 선호하는 우리 민족은 확실히 넉넉함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은 어쩌면 하늘을 섬기고 땅을 믿었던 인간의 근본정신 天 地 人의 우주 근본 원리를 숭배했던 사상에서 내려 받은 것이리라 여겨진다.
깐깐하면서도 후덕했던 조선의 선비문학으로 시작된 시조 문학의 3장 구조 역시 생성의 근거를 이런 문화의식 속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초장에서 펼치고 중장에서 넓혀 나간 확대를 종장으로 갈무리하는 형식 구조다. 종장 첫 구의 글자 수가 3을 넘으면 안 되는 확고한 이유도 시조 전체를 견고하게 받치고 있는 축의 무게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시조는 3장이어야 한다기보다는 3장이기 때문에 시조라고 할 만큼 시조문학에서 3이 갖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누가 딱히 정해 놓은 규범도 아니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물살에 대낀 조약돌 같이 자연스럽게 자리매김 된 홀수의 미학에서 시조 문학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양반 문학으로 시작되었든 서민 문학에서 치고 올라왔든 민족 고유의 뿌리 깊은 홀수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생된 장르라면 시조문학에서 가장 소중한 뼈대는 3장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펼치고 확대한 후에 종장에서 거두어 갈무리해주는 구조다. 이렇듯 장과 장끼리 연결하는 과정에서 높고 낮음의 말 놀림이 밀고 당기고 휘갑치면서 서로 유기적 관계로 조응한다. 한 줄의 글귀를 두고 자유시에서처럼 한 행이라 칭하지 않고 章이라고 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장마다 서로가 다르게 압축된 표현을 갖고 3장 구성이 전체적으로 완성될 때에 얻어지는 말의 맛과 가락이 비로소 한 편의 시조를 탄생시킨다. 반드시 열두 마디로 된 세 가닥 줄을 튕겼을 때 서로 부딪치면서 나오는 화음이야말로 시조를 탄생시키는 힘이다. 이것은 한두 줄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시조에서만 느끼는 유장한 가락이요 독특한 음악이다.
3장의 가락이 조응하면서 춤추고 있는 빼어난 시조 두 편만 보고 가자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김종서)
어저 내일이여 그릴 줄 모르는고
이시랴 하드면 가라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을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
소리 내서 읽어 보면 세 가닥 줄이 기-서-결로 이루어져 펼치고 뒤집으며 휘몰아 뿜어내는 특유의 정서와 그 정서가 주는 심미성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석 줄이 보기 좋거나 간단하고 편해서 정착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가 군말을 불허하는 분명하면서도 간결한 양반들의 문학으로 정착된 것이다. 종장의 첫 구가 3이어야 한다는 조건 역시 초장, 중장과 조응할 수 있는 축의 디딤돌로 확고하게 대못을 친 것이다.
2. 시조는 단수 짓기로 돌아가야 한다.
시조의 정수定數는 단수에 있고 단수가 갖는 뜻의 정수精髓도 촌철살인 하는 단수의 맛에 있다.
시조는 봉건적이고 고루한 문학이어서 발전적이지 못하다고 카프계열에서 시비를 걸어올 때 시조를 혁신시키자면서 내용적인 것과 동시에 형식마저 연작 쓰기를 권장했다. 혁명이었다. 당시로서는 시조 문학을 지키기 위한 치열하고 안타까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시조 문학은 문단 자체에서도 변방으로 밀리는 수모를 겪어왔다. 교과서에서는 고시조 위주의 자료가 수록되었고, 종합문예지에서는 마치 부록처럼 맨 뒤에 수록되는 서자 취급을 받았다. 서점에서는 시조집 판매를 외면하고 일반 독자들은 고시조와 시조창의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현대시조의 진수를 만날 기회가 적었다
신문학이 도입되어 사상적으로 맞서면서도,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시절에도 고전적이고 낭만적으로 유유자적하는 시조가 시대時代를 외면하고 시절時節만 노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연작을 쓰기보다는 내용의 혁신이 필요했던 때이다. 지금도 예측 불허의 다변화 시대에 들어와 있다. 자유시 역시 시대의 변천만큼이나 다양한 갈래의 표현으로 치닫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시의 형태를 해체하며 난해성의 문제까지 제기하고 있다. 시문학의 갈래 역시 시적 대상으로부터의 거리를 두고 초현실주의니 디지털리즘이니 하면서 전통적 규범을 건너뛰어 미래파시니 하이퍼시니 하면서 복잡해지던 때가 있었다. 읽는 재미와 감동 대신 분석하고 연구해야 하는 지경이다. 시문학의 현실이 이러한 때에 촌철살인 하는 단수 시조라면 시 독자를 오히려 시조 쪽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교과서 속의 고시조 교육은 암기가 쉬우나 현대시조로 넘어오면서 두 수, 세 수, 네 수로 길어지는 바람에 암기력을 떨어뜨린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시조 문학이 발전하려면 시조의 본령인 단수 짓기를 육성하고 보급하여 국민 누구나 짓고 읊을 수 있는 국민 시로 발전시켜야 한다. 가끔 심심치 않게 3행시 짓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아차! 저것을 시조 짓기 운동으로 발전시키면 너무 좋겠네! 하는 생각을 해 본다.
3. 3장 6구가 못 되면 시조가 아니다
요즈음 새삼스럽게 양장 시조라는 글이 시조 전문지에 올라오고 있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자유시에서 발표되고 있는 짧은 시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런 식이라면 종장 한 줄만 써 놓고 단장시조라고 할지도 모른다. 시조의 3장 구조라는 위대성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그냥 짧은 시를 쓰고 싶으면 쓸 일이지 구태여 시조라는 명칭을 차용할 필요가 있겠는가. 3장 6구가 안 되면 시조라고 할 수 없다.
위 글은 「시조 작가에게 던진 질문서」에 들어있는 필자의 글 중의 일부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 무심코 책(『정형시학.2012. 하반기호』)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양장시조는 물론이요 시조 작가들이 마침내 시조의 형식 중 종장만 흉내를 내 놓고 단장시조라는 참으로 해괴한 명칭을 붙여놓았다. 양장시조라고 칭한 글을 읽으면서 걱정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현대문학의 변천사에 영합되는 까닭을 여러 이유로 달고 있지만 어떤 치장으로라도 시조라고 하는 이름만큼은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시조 형식을 단순히 모양으로만 보았거나 시조 문학의 원형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시조 형식 중에서 두 장章 또는 한 장章 길이의 글이 나왔다면 이는 그냥 자유시일 뿐 시조 명칭을 붙여서는 안 될 것이며, 차라리 다른 장르의 이름을 붙인 뒤에 시조에서 본떴다고 한다면 혹시 모르겠다.
시조와 자유시의 경계는 3장 6구 12어절이라는 확고한 틀이 유지될 때만이 가능하다. 그런 경계가 허물어졌다면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이 이미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양장 시조와 단장 시조라고 이름 지어 놓은 글은 분명하게 자유시라는 상대적 장르의 조건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시조 문학 형식 구조를 이야기할 때 비교의 대상을 자유시로 택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같은 시라고 하면서도 ‘시조’라는 이름을 붙여 온 까닭은 처음부터 자유시와는 사뭇 다른 확고한 형식 구조를 근간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유시 역시 시조 문학이 주장하고 있는 음악적 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양장 또는 단장 같은 이름을 붙여 놓고 시조라고 한다면 시조 문학 자체의 문제를 넘어 자유시 작가들을 비롯한 한국문학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며 시조의 존재감이 깡그리 사라지는 전초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장이나 단장 같은 길이의 형식을 갖춘 시는 자유시에서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자유시에서 발표되고 있는 짧은 시는 자유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자유로운 문학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을 뿐 자유를 거부하고 자청해서 구속의 미학을 선호한 시조 문학이 관심 둘 문제가 아니다. 만약에 오늘의 시조 문학이 그런 문학사조를 따라가야 할 필연에 부딪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면 차라리 시조 문학 무용론이 훨씬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하이쿠 같은 일본의 정형시까지 논의되는 위험천만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시조 문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단수 쓰기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더 시급한 문제다. 그 동안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던 시조 문학의 부진은 연작 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수만 갖고도 자유시에서 발표하고 있는 짧은 시와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시 역시 얼마든지 4.4 음보라고 하는 우리말의 음악적 율 속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천동지할 만한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기로서니 단장單章의 한 줄을 두고 시조時調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시조가 왜 3장이어야 하는 까닭이 깡그리 무시당하는 일을 스스로 행하는 일은 고사해야 할 것이다.
시조 문학 확장을 위한 새로운 탐색 2
왜 사설시조인가
시조 쓰기에 있어 단수 쓰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필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개진되고 있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지속된 단수 연작 쓰기를 견제하는 말이 되며 실제로도 전보다 확연하게 단수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어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처음 시조가 탄생되던 때는 단수 한 편으로도 선비들은 정자에서 혹은 기방에서 기녀들과 하룻밤 어울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소리의 가락이 유장하고 풍류적이어서 시조창으로 부르자면 45자 내외로 족하던 때다. 그 후 시조를 혁신시키자면서 연작 쓰기를 제창하고부터 지금까지 시조 연작은 오래도록 시조 문학의 근간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신문학이 유입되고 현대문학으로 진행되면서 시조 문학은 신시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 때마다 민족시로서의 전통성을 들고 나와 그 정당성을 얻으려 하였다. 아무렴! 지금도 시조 자체가 민족시로서의 독특한 장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긴 역사를 끌고 내려온 우리 문학사의 보배 같은 장르요, 귀한 문화유산이다. 몰론 간결하게 압축된 미학적 단수일 경우를 말한다. 더불어 정형이 갖는 틀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융통성이 있다는 여유 또한 부정할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서점에는 시조집이 없고 신춘문예에는 시조 투고가 부족하다. 교과서에도 시조 등재가 잘 안 된다. 이는 그 만큼 시 독자들이 시조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시조 문학이 지금처럼 답보 상태인 까닭은 시조 연작 쓰기에 어떤 문제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는 시조인들이 당면한 현실 진단에 눈치를 보면서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조 예찬론이나 막연한 옹호론으로 무장한 대개의 시조작가들이 시조 쓰기를 연작 쓰기로 배우고 그렇게 쓰는 것을 답습해오면서 연작 쓰기의 문제점을 터놓고 공론화시켜 본 일이 없다. 현대시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견해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고시조와의 비교 내지는 현대성 제고라는 개괄적인 것이었을 뿐 시조형식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문제 삼아 터놓고 토론하는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둘째 시조는 과거의 시조에서 현대의 시조 문학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날과 같은 관행 속에서 어떻게 쓰면 시를 좋아하는 독자를 시조 문학으로 모셔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화두로 안고 40여 년 간 시조만을 써 오다가 최근 들어 비로소 시조 문학의 부진이 연작 시조가 주는 지루한 반복 리듬에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근자에는 발표된 시조의 작품성만 보더라도 지나치게 주관화 되고 산문화되면서 난해해지고 있는 자유시보다 독자들의 선호도를 충족시킬 가능성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시조는 여전히 뒷전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시조가 갖는 3장 6구의 음악적 특장은 민족시의 특허품이다. 성리학을 도입하고 유교사상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도학적 양반 문학에 딱 맞아 떨어졌다. 창작되는 한 수 시조를 소리꾼의 입에 올려 즐기던 가사歌辭 풍류 시절 얘기다. 유교를 신봉하던 사대부들이 즐겨 쓰던 낭만적이며 관념적이던 언어구사가 또한 그렇다 그러나 다양한 생활 관습과 자유 속으로 들어가 살고 있는 21세기 현대인들의 문화로는 틀 속의 자유마저 불편하다.
문화는 역사와 더불어 변천하는 것을 생명으로 한다. 신라의 향가로부터 고려의 별곡, 조선의 가사 문학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는 정치적 사회적 변천과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역동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 시절,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음악성을 더 강조한 소리로서의 시조였지만 오늘날은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요구한다. 바로 현대 시조 문학現代時調文學이다. 간판마저 단순한 시조時調가 아니라 시조로서의 시문학詩文學적 특성을 요구하고 있다. 미디어 문학으로서 외연을 확장할 기회도 크다.
다양한 표기와 표현 방법을 요구하는 현대 독자들에게 지금과 같이 4.4조의 반복 리듬으로 이어지는 연작 쓰기는 호감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이는 작품성에 앞서 표기, 또는 표현에 관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만의 독특한 장르 문학이란 것만을 자랑하며 보존하고 싶다면 좋아하는 사람끼리 동호회로 뭉쳐 있어도 된다. 하지만 시조 문학은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문학으로서의 확고한 당위성과 현대문학으로의 숭고한 작품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1. 시조 연작의 반복 리듬은 시조 읽기를 지루하게 한다.
우리 가락 우리 말 맛도 단수였을 때의 느낌이지 3수 4수 5수 이상 반복되는 리듬은 읽기에 지루하다. 독자들이 시조를 외면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진단한다. 처음부터 시조만 써 오면서 필자가 체험한 결과다. 현대인의 감성은 반복되는 정형시의 가락을 선호하지 않는다. 작품성이 아무리 좋아도 같은 길이의 문장이 거듭되는 반복 리듬은 경음악을 듣는 것 같아 재미가 떨어진다. 시조는 3.4. 3.4 글자 수 맞추기가 아니라 7자의 기본 율에서 몇 자를 가감할 수 있는 융통성이 넉넉한 가락을 갖는다고 강조해 왔다. 때문에 음수율보다는 음보율을 더 강조하면서 무엇이고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이라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그 융통성도 어쩔 수 없이 정해진 3장 6구의 틀 안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단수의 묘미를 넘어 연작으로 거듭해서 표현하면 내용까지 느슨해지며 단조로워져 탄력을 잃는다. 특히 단수였을 때 종장이 갖는 율격의 특장이나 구비치는 반전의 가락은 가슴을 휘돌아 먹먹함으로 차오르기도 하는데 이것을 연작 쓰기로 반복하면 점점 싱거워진다. 자유시를 쓰는 작가에 비해 손해가 많다. 사실 자유시에도 음악적 리듬은 얼마든지 있다. 운문 창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을 비롯한 새로운 문학 패턴의 도입을 주저하지 않았던 같은 시대의 자유시들을 보자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와사등瓦斯燈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설야雪夜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울릉도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그날이 오면
모두 시조의 한 장章으로 놓아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말맛이 나는 4음보 율격이다. 우리 말맛에서 유발되는 음악적 요인은 우리 언어가 본디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것으로 한국문학의 어느 장르에서나 자연스럽게 만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2~3음절의 단어에 조사를 결합하면 대개가 3~4음절이 된다. 결코 시조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조 문학에서 강조하는 가락은 시조 쓰기를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다. 시조의 기본 율을 마음에 두고 소리 내서 읽어보면 내가 쓴 시조가 기본 율에 충실했는지 아닌지는 저절로 드러난다. 다만 시조는 3장 6구의 정형성을 가질 뿐이다. 시조 문학의 시대적 요구와 사명감으로 문학의 질을 혁신시키기 위한 시조 문학의 창작 기본을 교육시키기보다 전통을 앞세워 음악적 요소만 강조하는 동안 복고풍에 빠지거나 관념적인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자를 다 놓쳐버렸다.
2. 시조 연작은 통일감과 연속성 결여로 산만함을 느끼게 된다.
연작은 단수 짓기의 연속이다. 각 수首마다 3장이 갖는 기-서-결의 의미 구조가 종결된 후에 다시 둘째 수 셋째 수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연작 역시 각각의 수마다 시조로서의 짜임새가 튼튼한 완성품이어야 한다. 그렇게 기술된 여러 수가 한 편의 작품 속에서 통일된 주제로 묶여야 한다. 이것이 연작 시조의 기본 구조이면서 의미 구조다. 자유시에서 말하는 행이나 연의 구분하고는 아주 다르다. 그러다 보니 일반 독자들은 매 수에서 이야기의 편안한 연속성보다는 어떤 단절감을 느끼면서 감상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연속성을 갖는 자유시에 비해서 확연하게 불리한 부분이며 연작을 쓰므로 해서 시조 특유의 긴장미와 압축미마저 느슨해지게 된다.
우리 것을 보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한 세기가 다 되도록 이러한 연작 쓰기를 반복해 왔다. 그렇게 전수하고 전수받았으며, 한 번도 공론화되지 못한 채 배운 대로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시조 공모나 각종 시상에서 단수는 제외시키고 3수 이상의 연작만을 선에 넣고 있다. 시조를 통해 민족시의 긍지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겠지만 민족의 전통성이 시대에 맞는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 채 신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이야기 식으로 이어진 연작은 시조라고 보기 어렵다.
요즈음 발표되고 있는 연작 시조를 보면 겉모양만 시조일 뿐 시조 특유의 기본을 무시한 채 첫 수에서 시작된 내용을 이야기 식으로 둘째 수 셋째 수에 이어서 쓰고 있는 작품이 허다하다. 역량 있다는 정평을 듣거나 수상 경력이 많은 소문난 작가, 문단 일선에서 부지런히 활동하는 작가도 그렇다. 어떤 경우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쓴다고 한다. 시조를 몰라서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매이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거침없이 쓰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는 시조의 본질에 맞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다.
작품을 쓰다 보면 말을 아끼고 절제하여 지엄하고도 단단한 단수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그렇게 풀어서 이야기 식으로 씀으로써 작품성이 더 극대화 될 수 있는 경우도 생긴다. 시적 대상에 따라 표현의 다양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서술체 대화체까지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시조의 기본 틀까지 훼손시키면서 겉모양만 유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현대시조라고 할 수가 있을까? 오히려 진정한 시조 문학의 시비거리가 되면서 일반 독자들까지 헷갈리게 만든다. 이런 경우야말로 과감하게 사설시조 형식을 수용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가질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사설시조는 계속 외면당하고 있다. 이렇게 늘어놓는 연작 쓰기는 민요시나 풍월시와 같은 긴 글을 절제와 생략의 균제미로 탄생시켜 온 시조라고 하는 고유의 정형시를 오히려 시조문학 탄생되기 이전의 가사문학으로 되돌리는 난감한 경우가 되고 말 것이다.
4. 도식화된 3줄 표기법은 시각적으로 거부감을 갖는다.
시조문학의 3장과 세 줄(행)표기는 의미상 구분되어야 한다. 단수일 경우 3장을 세 줄로 표기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없지만 그것이 연작이 되어 3수 4수가 아홉 줄 또는 열두 줄로 똑 같은 간격을 두고 똑 같은 길이로 표기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 경우 독자는 읽기도 전에 시각적으로 모나고 규칙적이면서 획일화 된 모양에서 우선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도 무심해서인지 시조는 3장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천편일률적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사고 속에서 다양한 정보와 예술을 갈구하는 현대인들이 호감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연작에서 오는 부작용이 크다. 그런가 하면 근자에는 사설시조도 아니면서 이야기 식으로 쓴 연작 시조를 매 수首에 관계없이 계속 붙여서 표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초,중,종장을 한 줄로 이어서 쓰는 사람도 생기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가 위에서 지적한 불편함(거부감)을 이들도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차라리 그보다는 문장의 의미에 따라 맺고 풀어주는 형식이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가령, 시조 단수에 있어서 7줄 8줄로 표기되더라도 그 안에 시조로서의 3장의 구분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표기가 다양할 뿐 파격의 불합리는 없다. 줄 바꾸기는 작품의 의중을 표현하는 뜻도 같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연작의 세 줄 표기도 시조문학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는 불리한 조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낮선 여자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가상을 현실과 혼돈한다.
창밖은
막힌 하수구를 뚫는
공사 중 팻말
몽롱히 낮술에 취해
한 폭
춘화 그린다.
-최중태의 「개꿈―버스 안에서」-
개꿈은 그렇게 여러 갈래의 표기를 함으로써 의미상 분절이 되면서도 산만한 개꿈 같은 상상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행 배열도 단수일 경우 도드라지는 것이지 연작을 이런 식으로 분절하여 발표한다면 자칫 자유시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5. 사설시조 쓰기는 연작 시조의 좋은 대안이다.
한글로 처음 엮었다는 시조집 청구영언에 사설시조를 일컬어 만행청류蔓橫淸類라는 이름을 붙여 별도로 표기하고 있다. 歌, 詩, 調, 謠 같은 좋은 이름을 두고도 만횡청류라고 지칭했던 것만 봐도 사설시조는 어지럽고 삐딱하게 옆으로 가는 시조라고 이단시하여 무리 중에 끼어넣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시대에 엮은 첫 시조집에 같이 엮어진 사설시조라면 그 역사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쩌면 단시조 쓰기 이전부터 워밍업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푸대접을 받아온 것이다.
매우 특이한 일은 작가미상으로 전해오는 그 내용들이 성애를 중심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성의 문제는 빠질 수 없는 근간이 되는 소재다. 당연히 시적 대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는 사대부들이 성에 대해서 드러내 놓고 자신의 이름을 올려 내놓기는 어려웠던 때다. 이것이 작가미상의 원인일 것이다. 풍자와 해학을 즐기던 선조들은 차명으로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사설시조는 사대부들에 의해 실제로 단시조와 같이 쓰이고 소통했을 것이며 반대로 서민층에서도 양반들의 허세를 비아냥거리는가 하면 지난至難한 삶의 문제를 담아내기도 했다.
사실 백성들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민요ㅡ령 도라지 타령이나 군밤타령ㅡ에는 가사에 그런 성에 관한 표현까지 과감하게 전해지며, 이름 없는 춘화가 돌아다니면서 성적 표현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반열에 들지 못한 서민들의 사설시조는 인쇄되지 못했다. 때문에 고시조의 내용은 주로 선비들의 생활에서 나온 것으로 대개가 고전적이고 관념적인 한계에 갇혀 있다. 성리학이 주축이 된 유교사상이 내려준 뿌리 탓이었다.
그 후 외세의 침략으로 억압당한 시대, 군사문화와 같은 암흑기를 거쳐 오면서도 저항하고 외칠 수 있는 표현방법으로 매우 적합한 사설시조가 제 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시조문학으로서는 매우 암울한 역사다. 그 동안에도 시조문학은 전통과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시의 특성만 내세우면서 단수연작쓰기로 일관해 왔다. 내용면으로 보아 이호우의‘바람벌’은 시대적 아픔을 탄식하고 항거한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마저도 진귀한 시대였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국가가 어려울 때는 단시조 연작으로 쓰느니 보다 사설시조로의 표현이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설시조 역시 시조 문학이 요구하는 4.4음보의 리듬으로 표현되면서 역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작시를 쓰는 사람이 어찌 간명하게 절제된 방법만을 선택하겠는가. 시는 흥에서 나오는 것이고 흥을 살리자면 소리와 함께 춤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광대의 기질로 확장되는 대하시조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필자는 80년대에 발표된 조주환의『사할린의 민들레』같은 좋은 연작의 큰 시조가 독자들의 흔연대접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소설에 닿을 만큼의 큰 역사적 사건들을 1,226수의 시조로 엮은 것은 시조에 대한 열정과 나라사랑의 큰 뜻이 담겼음에도 독자들의 가슴에 안기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소리의 민요 시조에서 문자화 되는 시조로, 문자화 된 시조가 오늘날에는 미디어시조로 활성화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문학의 마당은 넓어졌다. 보다 다양한 시조 마당이 되어야 한다.
6. 판소리 사설집은 시조가락으로 된 고전소설이다.
1812년 조선 말기(순조 12년)에 태어난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을 정리하고 확장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일을 돌이켜보면 시조 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너무나 가슴이 뛴다. 판소리 역시 우리 민족이 가진 독특한 문화다. 소리로서의 판소리가 그토록 장대한 소설적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데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판소리 사설은 어느 곳이고 펼쳐 읽어보면 4.4 음보로 된 시조 가락이다. 그 때까지도 시조 문학은 일부의 시객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사설시조를 접목하지 못하고 도외시해 왔던 것이다.
판소리 사설뿐 아니라 민요 쪽에서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아리랑 같은 타령조의 가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소리에 담아내는 일이 이어져 왔다. 그것이 구전이든 창작가사든 간에 시대의 변천에 충실했다는 증거로 보이는데 이는 민중들 속에서 나온 것이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풍자는 물론 해학 개그의 골계미가 이야기 속에 선명하게 담긴 신명나는 가락으로 서민층을 파고들은 사설시조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민중시 , 노동시, 참여시였고, 음악적으로는 발라드요 랩이었다. 소리꾼의 무대처럼 종합적이다. 서쪽에서 신시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우리말 토양에서 자생된 이야기가 생생하게 파닥이면서 어기찬 가락으로 넌출거리는 민중시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의 앙가주망 사설시조다. 민요나 무당굿거리가 그렇고 사당패놀이, 상두꾼소리, 농요 등 한민족의 언어 관습이 모두 사설이었다. 소설과 무대 재담과 개그 눈물과 웃음이 농익은 장르다. 속담이나 비유 같은 우리의 생활문화가 온 사방에 산재해 있는 이런 다양한 소리 문화를 시조문학으로 용해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사설 고시조가 난삽한 성이야기로 알려진 것은 유교 사회의 폐쇄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민중들의 저항 정신은 반상班常의 엄격한 계급 사회의 반작용으로 표출된 위대한 민중 정신의 등장이다. 우리말이 갖는 속뜻은 단순하지 않고 다양한 해학과 비유를 갖고 있으니 이러한 여건들과 말맛의 토양이 사설시조가 탄생할 수 있는 근거요 바탕이라고 본다.
사설에 시조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근거 역시 작품 전체가 단시조 형식과 같이 초장, 중장, 종장을 각각 분명하게 나누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자유시 운운하는 사람은 시조 문학을 알지 못하는 근거 없는 흠집내기요 사설시조로 인해서 단수 시조의 틀이 훼손될 염려가 있다는 걱정은 시조 문학의 기초를 크게 잘못 인식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사설시조는 마치 풍자나 해학 같은 골계미로 국한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이는 이미 조선시대에 나와 있는 작품을 근거로 하고 있을 뿐 다양한 현대에 살고 있는 지금은 모든 시적 대상을 수용하여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의 역량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시조 문학에 깊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 사설시조를 배타시하며 출판에서 제외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시조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런 인식은 재고되어야 한다. 다만 잘못 써진 사설시조로 인해서 시빗거리가 나올 수 있겠지만 비뚤어진 모내기를 두고 논두렁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3장이 갖는 사설시조의 구체적인 형식 구조와 길이의 문제 등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를 갖고 활발한 토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공신력을 갖는 단체에서 먼저 사설시조 백일장 사설시조 공모전 같은 행사가 확대 병행되고, 신춘문예를 비롯한 수상 작품 역시 단수 시조나 사설시조를 뽑아 올려서 시조 문학이 활성화되고 발전하는 변곡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 결과물로 사설시조 연작도 나올 수 있고 사설시조 서사시 또는 현대판 판소리사설까지 시조 작가로부터 나와야 시조 문학의 특성과 함께 위대성까지 말할 수 있다.
시조 문학이 그렇게 확대 발전되어 갈 때 비로소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독자층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7. 사설시조의 형식적 구조
사설시조 역시 단시조와 마찬가지로 3장 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사설시조의 형식 구조에 관해서 활발하게 논의된 경우는 적지만 고시조를 근거로 한다면 초장의 길이는 단시조의 길이와 같거나 두 음절 이상 늘어날 수도 있다.
대부분은 중장의 길이가 길다. 중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게 된다. 단시조에 있어서 중장에서 2구로 형식화되는 것과 같이 사설시조 중장 역시 2구로 나누어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길게 이어지는 중장 중간쯤에서 반전을 시도하는 표현 형식이다. 또한 사설시조라고 해서 4.4 음보로 계속되는 반복 리듬보다 중간에서 엇박자로 한 번쯤 리듬을 바꾸어주는 경우도 시도될 만하다. 사물패들이 한바탕 신나게 두들기다가 상쇠의 꽹과리 가락에 따라 멜로디를 바꾸어 보는 형식처럼 말이다. 그렇게 다양한 가락으로 새로운 면모를 시도하는 것은 좋지만 어디까지나 시조 문학이 안고 있는 기본 형식은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유시로 오해될 수 있다.
종장은 중장을 길게 끌어온 관계로 간결한 마무리를 보여야 한다. 단시조의 종장과 같이 3 5 4 3의 음수율 배열이 보통이지만 이 역시 기본 가락보다 넘칠 수 있다. 사설시조가 갖는 특권과 다양한 융통성이다. 그러나 모든 문장의 길이가 늘어날 때는 반드시 각 장이 담당하고 있는 필연적인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 가지 더 논의될 일은 사설시조라고 해서 지나친 장문長文이 된다면 이 또한 시조문학의 기본 취지와 멀어지면서 자유시로 오해되기 쉽다. 논의 대상으로 제기한다. 문장이 길어지는 중장 역시 평시조 쓰기와 마찬가지로 앞 구와 뒤 구를 구분하는 2구로 써야 한다는 것이 서벌 스승님의 이론이었다. 글자 수로 적당하게 나누기 보다는 내용적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무리 하는 글
시조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그 동안에 필자가 공부하고 경험한 글을 올려 보았지만 공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써야 할 글감이 없어서 시조를 못 쓰겠다는 답답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이 이미 다 썼다는 거다. 듣는 나도 답답하다. 세상 만물이 다 글감인데 글을 만들지 못 하는 눈이 청맹과니다. 남들이 아무리 먼저 썼더라도 내 글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모두 같을 수가 없는 것이고 객관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의 눈을 끌어 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개성이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깜깜이 개성 말고 아주 쉽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다른 사람의 작품과는 분별되는 별난 개성을 독자들은 기다기고 있다. 고로,
시는 아무나 쓸 수 있지만 좋은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시조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고 시조문학을 깊이 알게 되면 역시 시조 쓰기는 매력 있는 장르다.
[출처] 이야기로 쓰는 시조 이야기 / 김문억|작성자 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