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동곡에 임어하셔서 형렬에게 하명하시기를 "태인에 가서 신경원과 최내경을 데리고 다시 백암리 최창조의 집에 가서 '일찍이 준비하여 둔 옷 한 벌을 세 사람이 한 가지씩 나누어 입고, 밤에 인적이 그쳤을 때 그 집 정문 밖에 땅을 파고 그 앞에 청수 한 그릇과 화로를 놓으라. 그리고 깨끗한 그릇에 호주(胡酒)와 문어와 돼지고기를 담고, 그 위를 두부로 덮어 그 구덩이 속에 넣으라. 다시 한 사람은 돼지고기 전을 들어 청수와 화로를 넘기고, 한 사람은 받아서 구덩이 속에 넣은 다음, 흙으로 덮으라.'라고 자세히 일러 주고 빨리 돌아오라." 하시니라. 형렬이 명을 받들고 일일이 지휘한 다음, 빨리 집으로 돌아오니 밤은 깊은데 뇌전이 크게 일어나며 소나기가 쏟아지니라. 상제님께서 하문하시기를 "이때쯤 일을 행하겠느냐?" 하시므로 "행할 때가 꼭 되었나이다." 하니 "변산과 같은 큰 불덩이가 나타나 구르면 온 세계가 재가 될 것이므로 이제 매화(埋火)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8
4월에 공신의 집 벽에 정의도(情誼圖)를 그려 붙이시니 다음 장과 같으니라.
19
동곡에 행재하실 때 백남신의 돈 천 냥을 가져오셔서 김준상의 집 방 한 칸을 수리하시고 약방을 차리시니라. 이때 공우에게 고부에 가서 장판을 사오게 하셔서 깔으시며 밀씀하시기를 "이는 고부 선인포전(仙人布氈)의 기운을 씀이니라." 하시니라. 그리고 목수 이경문(李京文)을 부르셔서 오동목판으로 약장(藥欌)과 궤(櫃)를 짜게 하시며, 장광척촌(長廣尺寸)과 짜는 방법을 일일이 가르치시고 기한을 정하시며 엄수하게 명하시니라. 목수가 기한에 마치지 못하매 목재를 한곳에 모아 놓고 그 앞에 꿇어앉게 하신 다음, 기한 넘겼음을 꾸짖으시며 봉서(封書)를 주어 소지하게 하시니 문득 뇌전이 일어나므로 목수가 몸을 떨며 땀을 흘리니라. 다시 명하셔서 속히 짜게 하셨으나, 목수가 수전증(手顫症)이 나서 한 달이 넘은 후에야 마치므로 말씀하시기를 "약장과 궤에 번개가 들어야 하리니, 너는 몸을 깨끗이 씻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청수 한 그릇을 약장과 궤 앞에 놓고 성심으로 절하라." 하시므로 목수가 하명하신 대로 하매 문득 맑은 하늘에 번개가 크게 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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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장과 궤를 약방에 들여놓으신 다음, 갑칠을 명하셔서 날마다 이른 아침에 방을 깨끗이 쓸게 하시며 문을 닫아 사람의 출입을 금하시고, 21일이 지난 후에 비로소 방에 드시며 통감 · 서전 · 주역 각 한 질과 철연자(鐵硏子) · 삭도 등 모든 약방기구를 장만하여 두시고, "주역은 개벽할 때 쓸 글이니 주역을 보면 내 일을 알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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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무극진경이다.
이 곳에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경전읽기> 를 하기 위함이다. 읽을 경전은 전경만을 고집한다. 우당께서 <전경>을 50번에서 100번은 읽으라 하셨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성사께서는 연원을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경> 은 잘 읽혀지지 않는 경전이라는데 있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글을 쓰다보면 자연스레 <경전읽기> 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 대부분은 전경구절부터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을 쓰려면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 저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 와중에 다른 경전들도 찾아본다. 찾아보는 이유는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단지 그 뿐이다.
전경에 도주님 행적이 너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태극진경을 참조한다. 때로는 태극진경의 내용을 근거로 글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무극진경은 글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비교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1) "주역은 개벽할 때 쓸 글이니 주역을 보면 내 일을 알리라."
이 내용은 <전경>에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셨을 개연성은 높다고 생각한다. 현무경에 소개되어 있는 10권의 책자 중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공사 내용 중 대부분에 易의 단어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2) 사거리
행록 5장 6절
기유년 二월 九일에 김 자현을 데리고 김제 내주평(金堤內主坪) 정 남기의 집에 이르시니라. 그곳에서 상제 가라사대 “이 길은 나의 마지막 길이니 처족을 찾아보리라.” 상제께서 등불을 밝히고 새벽까지 여러 집을 다니시고 이튿날 새벽에 수각리(水閣里) 임 상옥(林相玉)의 집에 가시니라. 이곳에서 글을 쓰고 그 종이를 가늘게 잘라 잇고 집의 뒷담에서 앞대문까지 펼치시니 그 종이 길이와 대문까지의 거리가 꼭 맞는도다. 이 공사를 보시고 상제께서 그 동리에서 사는 김 문거(金文巨)에게 가셨다가 다시 만경 삼거리(萬頃三巨里) 주막집에 쉬고 계시는 데 한 중이 앞을 지나가는지라. 상제께서 그 중을 불러 돈 세 푼을 주시는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자현에게 이르시기를 “오늘 오후에 백홍(白虹)이 관일(貫日)하리니 내가 잊을지라도 네가 꼭 살펴보도록 하라” 하시더니 오후에 그렇게 되었도다. 그리고 다음날에 형렬이 전주로 동행하니라. 이에 앞서 상제께서 “오늘 너희가 다투면 내가 죽으리라” 이르셨도다.
행록 1장 4절 이 시루산 동쪽 들에 객망리(客望里)가 있고 그 산 남쪽으로 뻗은 등(燈)판재 너머로 연촌(硯村)ㆍ강동(講洞)ㆍ배장골(拜將谷)ㆍ시목동(柿木洞)ㆍ유왕골(留王谷)ㆍ필동(筆洞) 등이 있으며 그 앞들이 기름들(油野)이오. 그리고 이 들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가 뻗친 앞들에 덕천 사거리(德川四巨里) 마을이 있고 여기서 이평(梨坪)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으면 부정리(扶鼎里)가 있고 그 옆 골짜기가 쪽박골이로다.
행록 1장 30절 상제께서 정읍으로부터 진펄이나 논이나 가리지 않고 질러오셨도다. 이것을 보고 류 연회(柳然會)란 동리 사람이 “길을 버려두고 그렇게 오시나이까”라고 말하니 상제께서 “나는 일을 하느라고 바쁘건만” 하시며 그대로 가시니라. 이 일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 그가 측량기사가 되어 신작로를 측정하게 되었는데 그 측량이 바로 상제께서 함부로 걸어가신 선이 되니라. 지금 덕천(德川) 사거리에서 정읍을 잇는 신작로가 바로 그 길이로다.
예시 52절 또 어느 날 상제께서 종이에 철도선을 그리고 북쪽에 점을 찍어 정읍(井邑)이라 쓰고, 남쪽에 찍은 점을 사거리라 쓰고, 가운데에 점을 찍으려다가 몇 번이나 망설이시더니 대흥리로 떠나실 때에 그 점을 치시고 “이 점이 되는 때에 세상일이 다 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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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에는 1거리와 2거리는 없고, 3거리는 행록 5장 6절에 萬頃三巨里 가 소개되어 있고, 4거리는 德川四巨里 가 행록의 1장4절과 1장30절에 소개되어 있고, 아무런 명칭이 없는 4거리는 예시52절에 소개되어 있다.
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다. 달리 표현하면 5거리도 없고, 6거리 등 그 이상의 거리도 없다는 뜻이다. 1거리와 2거리는 당연히 없다.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리는 3거리부터 만들어진다. 이후의 거리는 만들 수는 있으나 4거리로 끝을 장식했다. 만들려고 한다면 5거리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만들지 않았다...만들지 않은 이유는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자로 이야기하면 自然 이 된다.
하지만 소개하지 않은 네거리도 있다.
(참고)
행록 4장 20절 그 후 어느 날 공우가 정읍에 가서 상제를 모시고 와룡리(臥龍里) 네거리에 이르렀도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회룡리(回龍里)가 있고 이곳에 신 경수(申京洙)가 살고 서북쪽 교동에 황 응종(黃應鍾)이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네거리 복판에서 공우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시니 공우가 “저희 집으로 가시옵소서” 하고 청하니 상제께서 세 번이나 되물으시므로 공우도 세 번 한결같이 대답하니라. 그러나 상제께서 먼저 응종의 집에 들르셨다가 곧 공우를 데리시고 병욱의 집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병욱에게 돈 서돈을 청하시기에 그가 올리니 그것을 공우에게 간수하게 하시고 또 두 냥을 병욱으로부터 받아서 다시 그에게 그것을 갈무리하게 하신 후에 병욱의 아내를 불러 앞에 앉히고 “왜 그리하였느냐”고 세 번 되풀이 꾸짖고 외면하시면서 “죽을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혼자 말씀을 하시니라. 병욱이 상제께 공양할 술을 준비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나 먹을 술은 있으니 준비하지 말라” 이르시니라. 병욱의 장모가 상제께서 오신 것을 알고 술과 안주를 올리니 상제께서 그 술을 드셨도다.
응종의 집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새벽에 구릿골로 행차하셨도다. 가시는 도중에 공우에게 “사나이가 잘 되려고 하는데 아내가 방해하니 제 연분이 아니라. 신명들이 없애려는 것을 구하여 주었노라. 이제 병은 나았으나 이 뒤로 잉태는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과연 그 후부터 그 아내는 잉태하지 못하였도다.
교운 1장 13절 병욱은 서 원규의 약국이 서천교(西川橋) 네거리의 번화한 곳임을 몹시 걱정 근심하였으되 상제께서 나중에 찾아오셔서 병욱에게 근심 말라고 이르시니라. 상제께서 병욱을 데리시고 왕래하시면서 거리에서 병욱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니 그는 더욱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여러 사람을 이곳저곳에서 만났으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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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태를 못하는 네거리가 있고, 이상한 네거리도 있다. 이상한 네거리는 西川橋 네거리이다. 西川橋 네거리에서 모골이 송연한 이유는 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았다면 安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거리에 대하여는 전부 알아본 것 같다.
(3) 4거리
거리에는 德川四巨里 와 아무런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은 4거리가 있다. 이 4거리가 <易의 4거리>이다. 이 <易의 4거리> 가 理 의 4거리이다. 이 <易의 4거리> 에 점을 찍으면 <氣의 4거리> 로 바뀐다. <氣의 4거리> 가 德川四巨里 이다. 그러니 점을 찍을 때에 망설일 수 밖에 없다. 이 점을 찍으면 실제로 氣 가 움직이다. 理 를 기준으로 氣 가 움직이다. 실제상황이라는 의미다. 氣 만 움직이겠는가? 그에 따라 피(血)도 흘러가겠지.......
德川四巨里 의 德 에는 明 이 생략되어 있다. 川 에 밝은 달(明月) 이 뜨면 이런 川 을 明月萬川 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明月萬川 이전의 상태가 德川四巨里 가 된다.
(참고)
이제 德川四巨里 를 그림으로 구경하면 된다.
(4) 德川四巨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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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川四巨里 는 그림에서 <天地> 다음에 88 로 그려져 있다. 8과 8 사이에 十(사거리) 가 있다. 그러니까 사거리가 생략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8과 8이 그려지기 이전에 이미 사거리는 만들어져 있었다. 이 사거리는 다른 표현으로 하면 經緯 라고도 한다.
(참고)
daesoon.org/about/bible.search.php?gubun=2&sstr=경위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se6iCPanG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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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통찰할 숙제를 제시해주는 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十一月 初九日(십일월 초구일)의 初九는 星數로서 (옆의 별 문양 △와 함께) ‘이전이라는 初’와 ‘숫자인 九’인 星九, 즉 杜門洞 ‘星數’(두문동 성수)에 대비된 두목 박성구(‘成九’)를 말합니다.
또한, 만사신(萬死神)과 백복신(百伏神)은 대비된 것입니다.
그리고 88은 환평리(環坪里) 정동조(鄭東朝)의 環입니다. 環은 https://cafe.daum.net/dankun/2s6E/98?svc=cafeapp 에 보면 금문으로 8입니다. (https://blog.naver.com/synup/221209426760 참조)
즉, 88은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이라는 천지와 고리(8)를 선후로 이루는 두 인물을 말해줍니다.
결국, 두문동성수도는 성사께서 팔팔구구(八八九九)로 소위 “72둔”과 “음양둔”을 풀어준 것입니다.
신농패(神農牌)는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는 신의 일을 대임하는 ‘신의 농사 자격증’인 일종의 인패(印牌) 즉 마패(馬牌)를 말하고, 유사표(有司標)는 집단을 관리하는 소임(所任)을 맡은 이에게 부여된 표식(標識)을 말합니다.
결국, 같은 농사 자격증이기는 하지만, 두문동의 경우처럼 현실에 드러나지 않는 신농패(神農牌)가 있고, 이것에 소위 신선 농장처럼 현실에 드러나게 되는 [사명을 맡았다는 표식인] 유사표(有司標)가 대비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11월 9일이 갑오년에 동학군이 패망한 날자라는 점 참고할만 합니다.
주역의 64괘, 강태공의 72둔, 천부경의 81자를 상징하는 팔팔구구(八八九九)는 “숨겨진 변화”와 “72둔”, “음양둔”을 말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무신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추측건데, 장군에 만족해야 했던 차경석처럼 박성구도 文臣이 아닌 武臣임을 나타낼 수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https://cafe.daum.net/thenewsilkroad/s7ZK/38?searchView=Y 를 참고해주세요.
알다시피 다들 태권도 관장 출신인 박성구의 주먹을 사실상 두려워했었습니다.
@담마 주우 무신일 무신년의 의미로 보이는 한자로 보입니다
정의도의 견해
증산상제님의 정의도는
도를 주장하는
도주님,도전박우당님,후인
인사(人事)와 관계된 그림
으로 보입니다
1)우측에 첫번째 그림에는
정의가 두개인데 초승달이 있으므로 무극,태극도를 말하는것이며 그림이 끊어 지지 않았고 도주님의 이치가 있는그림이며
2)왼쪽 상단의 정의가 하나 인데 태극도에 입도하시고 유명종통 계승하신
대순진리회를 창건하신
도전박우당님의 이치로 보입니다
3)하단의 정의는 두개인데
그림이 끊어져 있지 않고
섬과 바다가 보이고 4개 비점은 삼신과후인의 비점으로
보이고 두개의 정의는 막힘이 없고 이어져 있는그림이므로 박우당님
생전시 후인산조로 정해진
분을 뜻하는데 홀생홀유 의 뜻을 가진자가 三神진법을 행하므로 6개의 점을 찍어 三神을 설명하셨으며
후인이
이룬다는 것이 세군데 체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체크된곳을
자세히 보면 섬이 아니라
바다의 이치에 체크를 하셨네요!!^^
홀생홀유의 뜻을가진자가
누굴까요?
한문으로 홀생홀유라는
글자 보이시죠?
덕川 사거리
서川교 네거리
4번째 오시는분은 川 과
관계가 있나봅니다
우덕면 객망리~ 상제님 생전시~
덕川면 신월리~ 상제님 화천후~
정의도는 무신년 1908년4월20일 공사보신건데
정의(情誼) 하단 그림은 4번째
오시는분 이치를
섬과 바다로 표현 하셨는데
체크는 바다에 하셨네요~
홀생홀유(忽生忽有)로
4번째 오신분을 표현하신거고 삼각형 형상으로 점6개를 찍어
三神을 표현하신 거네요~
그런뜻이 있는 정의도
입니다
두문동성수,정의도는 상도에서는 도담,교화가
없었습니다
정의도는 표제내용으로 본다면 4번째 오신분들이
풀어서 후학들에게 일깨워
주셨어야 합니다
대순임원 전체가 해원두목이라 그이치를
못밝힌 겁니다
연원도통,진리도통 이라고
하셨는데~
진리는 이치 입니다
대순지침에도 이치에 대해서 박우당님께서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태극도임원들이 도전 박우당님을 왜 못따라
왔을까요? 유명종통까지
받으신 분인데~
명덕 관음 팔음 팔양 지기금지 원위대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