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21~30절/순종과 하나님 임재
1. 논쟁의 중심,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에는 네 개의 질문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8장은 이 질문들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어디서 오셨는가? 입니다(23, 26, 29). 둘째는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가? 입니다(21~22, 28). 셋째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누구인가? 입니다(26~27, 38, 54~55).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 입니다(23~26, 38, 54~55). 이러한 질문들을 둘러싼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논쟁의 당사자인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각각의 질문을 토대로 정반대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을 보면,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아래서 난 사람들입니다(23).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였지만, 유대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위/아래의 구분이나 세상에 속하였는가? 속하지 않았는가의 구분은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영/육의 이원론적 구분은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타락한 도덕질서를 가지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세상은 주님께서 그 행사를 악하다고 증거 하심으로 주님을 미워하는 세상입니다(7:7). 두 번째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그들은 갈 수 없습니다(21). 유대인들이 아들을 거절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가서 환영을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고 나면 천국 보좌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죄 가운데서 죽음으로써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21, 24). 나중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만, 이것은 전혀 경우가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본문에서 하신 말씀을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다시 한 번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3에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그리고 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근심이 가득해서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들은 그곳에 지금이나 나중에나 올 수 없다고 즉, 그들은 죄 가운데서 죽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런 논쟁의 결과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음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8:59). 세 번째 질문은 어떻습니까? “네 아버지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아버지는 마귀입니다(26~27, 41~44, 54~55).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인 줄 깨닫지 못하더라(27).”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주님께서는 이 논쟁이 가열되면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선언하십니다(44).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결국 결정적으로 다른 대답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이 처음 세 개의 문제에서 주님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에서 서있기 때문입니다.2. 자기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21, 24)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이 논쟁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시고 바리새인들을 몰아가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십니다(21). 이 말은 예수님을 찾는다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를 기다리고 찾고 있지만, 결국 주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24절에서 재차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것은 단순한 반복만은 아닙니다. 21절과 24절의 말씀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습니다. 21절에서는 죄가 단수로 쓰였지만, 24절에는 복수로 쓰인 것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21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하신 것이고, 24절에서는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를 제일 먼저 언급하신 것입니다.
모든 죄들은 바로 불신의 죄를 뿌리로 해서 파생되는 것들일 뿐입니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강도질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해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런 잘못된 행위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는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모든 종교 행위와 노력들은 자기 의를 쌓아가는 것 밖에는 되지 않고 결국 죄? 불신의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24절 하반절에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셨을 때,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이란 말입니다(24). 이 말은 지난번에도 잠깐 설명 드렸듯이 영어로 표기하면 ‘I am’이란 말입니다. ‘I am’은 그 뒤에 설명하는 어떤 단어가 와야 완성되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표현하신 이 말을 많은 신학자들은 주님의 신성에 대한 선언이라고 이해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드러내신 표현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아담과 하와에게 계명을 주셨으며,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자기의 죄? 불신의 죄 가운데서 영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류는 모두가 바로 이런 자리에 처해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출구가 없는 한, 그들은 자기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 그 출구는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3. 인간의 무지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낼 수 있다(22).우리가 계속해서 보는 바이지만, 요한복음에는 바리새인 혹은 유대인들의 영적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22절에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시니까? “그가 자결하려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22).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헬라인들을 가르치러 가시는가? 하고 오해했습니다(7:35).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지금 주님이 자결하려는가? 라고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살만큼 악하고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자기 목숨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행위인 자살이야말로 죄악 중에서 가장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일 예수님이 자살을 하게 된다면, 자기들은 그가 가는 곳으로 따라갈 수 없다고 희롱하는 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기묘한 것은 이들의 무지와 오해가 빚어낸 말이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들어냈다는 점입니다.
만일 이들의 지혜와 이해가 하나님의 진리를 들어내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자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으심은 완전한 타살이라고만 할 수 없는 특별한 죽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주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지, 누가 주님의 목숨을 빼앗을 능력이 있어서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물론 자결이 아니지만,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복종하신 주님 자신의 주도적인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주도권은 총독 빌라도나 헤롯이나 대제사장이나 관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에 대한 주도권은 오직 주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4. 출구: 십자가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최고의 계시입니다(28).주님께서는 이런 오해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8절에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 여기서 ‘든다’는 표현은 생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실 것에 대한 말씀이고 동시에 천상의 보좌로 올리실 것에 대한 암시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 것을 요구하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그인 줄 알고’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의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면, 그 십자가로 인하여 예수님이 누구인지?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다면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왜 보내심을 받으셨는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는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증명된 것을 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인 됨의 존재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신 것을 깨닫고 느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의인들이 되었음을 배웁니다. 십자가를 떠나서 주님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따랐지만, 결국 그들의 영적인 무지가 벗겨지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부어졌을 때였습니다. 모든 인간의 영적 무지가 벗겨지는 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십자가로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영적 무지는 벗겨지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영적 진리들을 드디어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최고의 계시입니다.요한복음이 강조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요한복음을 썼노라고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20:31). 지금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서 있는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들 앞에 계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대로,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것, 이것 밖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출구입니다.5. 순종과 하나님의 임재는 비례한다(29).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출구를 통해서 나온 사람이 얻게 되는 삶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 바리새인들을 대하실 때 보여주시는 담대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의 비결이 바로 이 한 구절에 담겨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할 만큼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느끼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에 가까이 온 모든 사람에게는 이런 열망이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늘 경험하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얼마나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말로만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 그리고 어떤 불이익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조금의 위축됨도 없이, 조금의 비겁함도 없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지향하고 바라는 바도 우리 자신들이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되며, 이런 그리스도인들로 채워진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이 세상 속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력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부나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영향력은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소위 교세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늘 보여주시는 그런 담대함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변함없이 항상 인식되고 감지되고 경험되는 임재였습니다. 그런 임재를 주님은 어떻게 그토록 철저하게 항상 감각하고 사실 수 있었습니까? 여기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29절에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100% 그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바쳐져 있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주신 것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판단은 아버지의 판단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만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기쁘신 뜻에 대한 주님의 완전하고도 자의식적인 순종은 직접적으로 변함없고 항상 있는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 감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순종과 하나님의 임재 감각은 비례합니다. 여러분의 과거 신앙생활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언제 여러분은 가장 충만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사셨습니까?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왜 그때 그렇게 놀랍게 하나님의 임재를 감각하고 누리실 수 있으셨습니까? 순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순종하려는 열망이 충만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라는 삶의 열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임재도, 동행하심도 느끼지 못하고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느끼고 사셨던 때는 언제입니까? 그 때 여러분은 자기의 뜻을 좇아,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사셨을 것입니다. 자기추구의 결과는 공허함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네가 나의 임재와 동행을 놀랍게 경험하고 감각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그들에게 ‘원하느냐’고 물으셨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언제나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대답이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임재와 동행을 충만하게 느끼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라는 것이라면, 그것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런 일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오늘 주님의 경고를 들어야 하는 위험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을 나름대로 찾다가 여러분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주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성경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순종하는 자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믿는 자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놀랍게 느끼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행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