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수 시인>>
<<한영수 시인>>
* 1957년 전북 남원 출생.
* 2005년 최치원신인문학상을 수상
* 2010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 시집 ; 『케냐의 장미』, 『꽃의 좌표』,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피어도 되겠습니까』
*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을 수혜.
* 2005년 최치원신인문학상을 수상
<<한영수 시인>>
풍죽風竹/한영수
나무는 뒤로 밀리고 있다
능선과 능선의 능선에서
나뭇잎을 펼친다
가벼운 몸 전체는 무기 같은 날개다
앞으로 나가려는 걸까
날 수 있을까
나무는 무섭다
빈속이 떨고 있다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사소하게 넘어질 운명이다
폭풍인 동안 방향은 철거 된다
나무는 뒤꿈치를 든다
이마를 수그리고 바람에게 먹힌다
뜨겁게 뒤섞인다
바람의 내부가 된다
부서진 시간들의 손을 잡고
능선과 능선의 능선에서
바람의 외피를 채찍질하는 나무
습관/한영수
처음 보는 아침이야
가슴의 비늘을 세워본다
머리로 꼬리로 밀어본다
전진하기에 조금 긴 몸
요동치기에 조금 무거운 생각
들판을 가로지른다 개울을 헤엄쳐
그물망을 뚫고 저기
바람해변 솔밭에 내리는 기쁜 햇살까지
가고 간다 제자리 뛰기다
쫓아오는 바퀴에 순간
뭉개진 길이다
쫓겨보면 알지
오히려 안도하는 표정
황갈색 가로줄무늬를 지우며 납작
화석이 되어야 하는데
누룩뱀 한 마리
악착같이 꿈틀거려본다
끈이 풀렸는데도
기던 그대로
긴 아침을 기고 있다
처음 가는 곳은 언제나 멀지
구불텅구불텅 바닥에 엉겨 붙어
방금 바닥이 되어버린 것을 모른다
꽃의 좌표/한영수
어쩌다가 한 번 붉은 게 아니다
피기 시작하고 있지만
누구의 혀도 물들이지 않았지만
피가 소란해진다
어떤 봄에도 닿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여전한 이곳에 서서
어쩌다가 붉은 빛을 훔친 것이 아니다
바람마다 붉은 그림자 지는 것이 아니다
말을 여는 것처럼
말을 깨문다
망각을 흔들어 깨우는
불안처럼 불안에 연루된
부정처럼
붉은 것을 꺼집어내야 했고
조금 더 밀어내는
동백, 꽃 바깥에
놓인 꽃
극소량의 태양 속이다
조연/한영수
돌 하나가 날아왔다 무엇을 바로 보자는 걸까
왼손 안에 꼭 쥐어졌고 그만한 정도의 침묵이 심장을 눌렀다
처음에는 영화나 보자는 것이었다 장발장으로 오래 익숙한 이야기였다
조명이 밝아지고 해피엔딩에 안심해야 하는데
에포닌 생각이 생각을 키웠다 바리케이트 아래 핏물이 흐르고 갈 곳을 버린 노래가 주위를 맴돌았다
고흐보다는 동생 테오가 마리아보다는 부엌데기 마르다가 말하자면 진열대 뒷줄에서 시들어가는 시들의 무수한 시간이
돌무지처럼 서로를 괸 심장에
붉은 돌이 앉았다 말로는 다 못하겠다는 말을 들고
책에게 구걸하다/한영수
지하도 입구
걸인이 책을 읽는다
모자를 벗어 뒤집어놓고
점점 코를 박는다
책이 되어 책에게
구걸하고 앉았다
책은 뒤통수가 커다랗고
가리키는 것이 많고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해진 외투자락 모래 한 알에서
간밤의 사하라를 읽는다*
다음 문장은 무엇입니까?
행인1 걸음이 느려진다
동전 몇 개 모자 속에 떨어진다
행인 2 돌아본다
금방 지하에서 나왔는가
들어가기 직전인가
비명인가 가라앉는 돌덩이인가
눈으로는 읽을 수 없다
중간만 남아 실금이 많은 책은
손으로 두드려서
귀로 들을 수 있고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다금바리/한영수
한 마리 잡아 올리면 표정이 풀린다 두 마리 끌어올리면 인생은 네 박자~
십팔번 노래가 절로 나온다 어망을 푼 아내가 웃고 김 씨가 따라 웃는다 이만
하면 일당은 했네, 라면에 식은밥을 말다가 작은 놈으로 우럭 정도야 회쳐 아
내 입에도 넣어 주고 제 입에도 넣는
말하자면 다금바리는 천 번을 기운 그물코다 천 번의 바느질 자국이다 김
씨가 먹어 보지 못한 것, 바다에 미쳐 공부는 점점 싫어 바다에서 나이를 먹은
김 씨가 사십 년 배를 타면서도 그 속을 모르는 속, 어둡기 전에 거둬 올려야
하는 매일의 어망이다 조수 일을 대신하는 아내의 큰손이다
어둠상자/한영수
조용을 다해 흔들어 본다
모서리에 귀를 대 본다
어둠은 이미
무엇이고
이마 위에 얹혀 있다
돌아눕다가
하품을 하다가, 와락
기침이 터져 나올 때도
만지작거린다
몇 개의 명사와 형용사, 동사가 지나간다
사실은, 지나가게 둔다
어둠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다
안에 안이 있다
안의 안이 또 있는
옆얼굴이 셋
목소리도 일곱 꿈틀거린다
분수/한영수
너를 바라볼 수 있게 가슴을 두고
꽃이 열리듯
발을 들어 올린다 허리 높이로
어깨 높이로 머리 위로
너를 부르는
최초의 높이로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네가 있는 쪽으로
정점을 향해 가던 분수는 순간,
정지한다 온몸을 움직여
저를 저버린다
가지 않는 것 또한
가고 있는 것
비는 모를 거다
내리기만 하지
빗방울은 모를 거다
꼭 쥔 주먹은 매달릴 줄만 알지
그 하루 눈을 뜨고
솟구치며 쏟아져 내리는
눈물
완성하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 중간
저를 독재하는 짐승의 포효
은하를 그린다
제때에 얼굴을 돌리는 것
분수는 아는 거다
방/한영수
눈송이에 방을 들였지
떠오르고
떠오르다 잠이 들었네
구석으로 구석을
업고 업힌 방
철없이 겨울이 내렸어
방은 어디에 있나
구름의 눈동자에 묻어난다
반달이 반을 읽고
새가 돌아본다
깊은 오후
깊은 숨이 숨는 방
수소폭탄 서른 개의 폭발 에너지를 가진 손이
하나로는 만들 수 없는 눈송이
눈송이에 방을 들였네
새끼손톱만 했네
주춧돌은 없었지
손톱으로 긁어 파낸 바닥은 있었지
일 년에 두 번 정도 울어도 좋은 방
바람은 계산하지 말자
손을 모았지
눈송이, 세계를 떠다닌다
봄 가지 어디에도 주저앉지 않고
마리오네트/한영수
이것은 밀물이다
이것은 썰물이다
나는 발목이 바쁜 시녀
지금 묻어오는 달빛을 허락한다
어깨가 당겨지면
손마디를 푼다
팔꿈치를 조금 늘어뜨리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한다
개를 끌고 가다
목줄을 놓고
안쪽으로 돌아도
바깥으로 돌아도
공주는 공주
시녀는 시녀
달빛 계단에
무릎이 꺾인다
주저앉을 때마다
주저 없이 일으켜 세워진다
나를 가둔 이는 등 뒤에 서 있다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는, 어쩌면
나를 닮은 모습으로 내가 만들어놓은 신
정해진 줄 위에서 나는 나를 겪어낸다
소녀와 노랑나비/한영수
아리랑
장독대
봉숭아
넙데기 할머니가 기억하는 모국어
열다섯이었다
비행장에서 일했다
헌병이 큰 칼 차고
끌어가기 전까진
착, 착, 착, 군화 소리
지금도 들려, 해방은
더 이상 일본 군인이 오지 않는 것
소녀가 앉아 운다
노랑나비 온다
날아가지 않는 나비
나비 나비……
나비를 나비라고 말할 줄도 모른다
피어도 되겠습니까-동백/한영수
충분히 불안합니다
순간 쏟아질 한 사발 피에
아름다움이 붐빕니다
빨강의 내부를 열고
들어가 더 완고한 빨강에서
베어 문 빛깔로
지배받지 않는
단어로
꽃 피어도 되겠습니까
겨울로 격리된
심장 한 덩이
변방을 두드려 댑니다
아우성치며 눈발이 때를 맞추는
이런 밤에
이런 밤에
꽃을 가진 겨울에 대하여
겨울을 가진 꽃에 대하여
한마디 넘쳐도 되겠습니까
왼손바닥엔 앙가라강이/한영수
이것만이 오늘일 리가 없어,
저녁쌀을 씻다가 왼손바닥 호수가 기슭을 친다 조그맣게 호수를 뚫는다
북북서로
타이가의 침엽 속으로
앙가라강이 흐른다 한 줄기 생각이 급류를 탄다
매일 끓는 찌개를 속이고 아홉이나 많은 접시를 배반하고
돌을 던져도 소용없어, 낙엽이 네 번 져도 돌아오지 않을 테야,
호수 깊숙이 고여 있는 나를 끌고
달아나는 강이여 한 발씩 멀리 국경을 넘는 나의 악녀여
영하 사십 도
많은 것이 많아진다 이별이 드넓어진다* 가고 있는 것만으로 얼지 않는
입술이 악녀의 씨를 뿌린다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전설로 얼굴을 꾸미고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한다 접었다 폈다 긴 밤을 늑대와 함께 달린다
여기가 로두스다/한영수
언제 저지르나 저질러 버리나
언제 살아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타타타 자신을 뛰어넘나
가로수 아래 풀잎을 기대고 방아깨비는
하나 남은 뒷다리
밤으로 숨어든다
불거진 겹눈이
최소한의 유배자처럼 웅크린다
없는 두 무릎을 굽혀 보다가
꽁지를 들어 보다가
언제 더듬이를 세우나
가야 할 곳으로
육차선 가득히 불빛은 달려가는데
언제 스스로를 안무하여
타타타 뛰어오르나
부싯돌을 부딪듯이 날개를 부딪쳐
초록 불빛을 일으키나
어둠이 발효시킨
몸보다 커다란 춤을 추나
외로워지는 사람들/한영수
저는 잘 있어요,
휴대폰을 닫고 누가 운다
광장엔 일요일이 있고
커피는 커피와 마주 앉아서
햇빛을 모은다
커피는 모르는
햇빛은 모르는
눈물은
누가 가진 일요일의 전부
기어 나오다 주저앉은 말
자전거가 지나간다
운동화가 뛰어간다
누구나 있어서
누구도 없는
광장은 울기에 무방한 곳
누가 누구인지 질문이 없는 곳
한 사람이 혼자 울어서
광장은 저녁놀 장소를 잃어 간다
인천/한영수
동네마다 버스정류장이 있다 사람들이 내리고 사람들이 탄다.
벚꽃이 핀다 한 나무에서 어떤 꽃은 지고 있다
끄무레하니 날씨는 조용하다
그 사람도 조용했다 생명보험을 외판하면서 그날따라 콧물을 줄줄 흘렸다 어쩔 수 없이 가입했는데
만기도 되기 전에 죽었다 그 전에는 남동구 국회의원 출마를 했다 그 전에는 용접공이었고 미싱사와
결혼했고 그 전에는 자고났더니 자취집 지붕이 날아가버렸더라, 신림동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 전에
그 전에는 빗줄기가 굵어지면 먼저 하교하던 아이 요천 건너 산 밑에 살았다 징검돌이 잠기기 전에
건너야 했다
인천에는 또 중국집이 있다 짬뽕 한 그릇에 작은 전복을 올려준다 근대문학관 옆에 있다 퇴근이 늦은
사람들이 조용히 들어가서 저녁을 때운다
그리고 청라미용실이 있다 먼지 쌓인 창가의 제라늄이 붉고 거울 속에서 눈물이 하얀, 아침이면 바쁘게
묶던 긴머리를 자르고 어린 딸아이가 소리 없이 울던 곳도 인천이다
유르트/한영수
돌 같은 것은 던지지 말자
양에게도 풀에게도
무릎을 꿇었다
그때 우리가 봄이었을 때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세운 집
두 가슴과 그곳이 있었다
지붕 가운데는 뚫어
구름의 양털을 섞었던가
광장과 밀실이 넘나들었다
양들이 일없이
풀 뜯는 냄새를 풍기면
그러면 하루의 아침이 왔다
나는 일어나 감자와 당근을 채 썰어
만두를 빚었다 네가 한 끼분의 흰 젖을
두 손에 받아오는 동안
여름 다음에 오는 겨울은
생각하지 않았다
서른 개의 이름으로 구름을 부르는 곳
달리고 구르다가 짧게 기쁘고
눈물 긴 이야기는
바위에 그렸을라나
사글세 이만 원이었다
하나, 둘, 셋을 세고 나서
기차를 탔다
다리가 모자란 곤충이었을 때
그때 우리가 두리번거리는 틈새였을 때
무엇이 되지는 말자
하루에 한 번은 꼭 어두워졌다
바람은 사방에서 불고 최선을 다해
바람을 오독하던 둥지
*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언니의 사랑/한영수
조금 더 어려운 장소다
구월도 오후 세시
매미가 울고 있다
직벽이 선다
붉고 푸른 회오리
언니의 사랑은 이런 거다
손톱 하나 집어넣을 틈이 없는
매미 울음 곁에
두 발을 두고
언니의 계절을 두른다
구름이 피어난다
동남풍 아니어도
희고 아득한 높이
약속이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바이칼호수에서 시작했다
툰드라의 침엽을 기어
아홉 개의 겨울을 횡단하고 지금
언니의 사랑이 도착했다
겨우 숨 쉬는 입술을 모아
최후의 오줌을 짓이겨 울대를 세웠다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한영수
이것은 밀물이다
이것은 썰물이다
나는 발목이 바쁜 시녀
지금 묻어오는 달빛을 허락한다
어깨가 당겨지면
손마디를 푼다
팔꿈치를 조금 늘어뜨리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한다
개를 끌고 가다
목줄을 놓고
안쪽으로 돌아도
바깥으로 돌아도
공주는 공주
시녀는 시녀
달빛 계단에
무릎이 꺾인다
주저앉을 때마다
주저 없이 일으켜 세워진다
나를 가둔 이는 등 뒤에 서 있다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는, 어쩌면
나를 닮은 모습으로 내가 만들어 놓은 신
정해진 줄 위에서 나는 나를 겪어 낸다
슬픔을 모시러 간다/한영수
야윈 강에서 물고기를 올리고 머리를 감고 혼자 이를 닦던 그도
사원으로 갔다
신이 되어서 꽃만 먹는다
바람은 예사롭게 분다
씻겨서 안 보이는 얼굴로
슬픔을 모시러 간다
말없이 정지한 말을 타고
말꼬리에 파리 한 마리 같이 타고
배가 홀쭉한 말은 앞만 보고 걷는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뒷발질 한 번도 없이
옆은 어떤 모양인가요?
눈을 뜨고 보니 옆이 가려져 있었을 거다
그랬을 거다 피가 새어 나왔는데 울지도 않았다
나는 나만 아는 생각에 앉아 파리는 파리만 아는 생각에 앉아
오늘은 계속될 것만 같고, 그러나
아주 가지는 않으려고 꽃을 들고
그래그래 졸면서 아니아니 깨면서
말은 생각보다 높구나,
무섭지 않으려고 잠깐 웃는다
사원에서 나는 슬픔의 뿌리에 닿고
슬픔의 열매가 궁금해지고
그러므로 바람 속으로
날아오른 파리처럼 말머리를 들이밀고
어둠상자/한영수
조용을 다해 흔들어본다
모서리에 귀를 대본다
어둠은
이미 무엇이고
이마 위에 얹혀 있다
돌아눕다가
등허리를 긁다가, 와락
기침이 터져 나올 때도
만지작거린다
몇 개의 명사와 형용사, 동사가 지나간다
사실은, 지나가게 둔다
어둠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다
무언지 알 수 없어
무엇이든 꺼낼 수 있다
어둠을 따라가면서
횡단하면서
오늘 밤에도
주어를 접고
오래된 사람/한영수
지금 묻어오는 달빛을 허락했다
네가 되는 경험을 했다
이것은 밀물이고
이것은 썰물이고
손바닥 위에 달을 굴렸다
게으름은 가장 큰 사치였다
기면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야행은 생존이었다
바닥을 숨 쉬는 강화의 과정이었다
민달팽이처럼 간신히 더듬이를 펴고
사라지려는 것인지 나타나려는 것인지
나타날 때까지
오늘은 끝나지 않았다
나무 뒤 같은 데
풀잎도 속잎 사이
뭐가 더 있을 것 같고
왼쪽으로 돌았다, 오른쪽으로 돌았다,
비밀을 만들었다
굴뚝새/한영수
우리가 동의하는 높이
굴뚝 위에 새는 있다
아니오
아니오
최소한으로 운다
물 한 모금 네 걸음에
굴뚝 한 바퀴
검고 가는 발목이다
단독자의 맨발이다
벌써 굴뚝의 일부가 되어있는 새
왜 정확하게 새가 아닌가
날개는 짧고
굴뚝은 계속된다
새 이야기를 이야기하다가
불뚝, 추운 높이
갇혔다
굴뚝 쪽으로 더 가버린 새
아니오
아니오
굴뚝이 돈다
울창한 굴뚝을 돈다
한 짝/한영수
나는 아닙니다
오후 4시를 붙들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목소리
구두 한 짝이 남았다
한번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지
끌려가며 순간, 돌아보던
문 저쪽의 햇빛
한 장을 담고 있다
쏟을 말이 더 있다는 걸까
검은 허리를 비스듬히 세웠다
밟고 밟힌 얼룩이 덧난다
비틀리고 할퀸 자국이 짓무른다
봄밤의 무도회가 어떻게 꽃밭이었는지
여름은 어떤 색깔의 열매로 익어갔는지
부풀리고 채색된 체험은
불러내지 말자
겨울 해는 짧다
가볍게 건드려도 무너질 것 같은
오후 4시의 구두 한 짝이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건너뛰고 옮겨다줄 그것
생각나지 않는 그것을 움켜쥐고 있다
시래기 두 뭉치/한영수
그러니까 후일담 같은
이것뿐이구나, 택시 타거라
넣어주면 뿌리치고 뿌리치면 넣어준
만원 한 장과 접혀진 천 원짜리 두 장의
무게, 핑 도는 짭조름한 무게
눈물을 꺼내 펼치면
불고 불어나서
여러 날 찬물에 담근 겨울 나물같이
한 솥 가득 차고 넘치는 무게
입도 늙는가 봐야,
맛을 잃은 친정엄마의 식탁 위
미숫가루 한 숟갈의 무게
곧 바스라지리라는 것과
목숨이 그리 쉬운가
까닭 없는 믿음의 무서운 무게
아슬아슬한 무게
말린 시래기 두 뭉치
비닐봉지에 받아 들고 온 저녁
불 켜진 외등처럼 빛난다
여든 여섯 채
처마 밑 그늘의 무게
태풍의 핵 같은
그러니까 비어있는 무게
소녀와 노랑나비/한영수
아리랑
장독대
봉숭아
넙데기 할머니가 기억하는 모국어
열다섯 이었다
비행장에서 일했다
헌병이 큰 칼 차고
끌어가기 전까진
착, 착, 착, 군화소리
지금도 들려, 해방은
더이상 일본 군인이 오지 않는 것
소녀가 앉아 운다
노랑나비 온다
날아가지 않는 나비
나비 나비....
나비를 나비라고 말할 줄도 모른다
밤새 자작나무를 탔다/한영수
시간은 있었디
달과 별이 움직이는 동안
바라보았다
뒤돌아보았다
손을 쥐었다
풀었다
말을 못하는
시간은 있었다
가슴이며 옆구리며 종아리로도 흰 빛
벙어리였다 나는
빈 종이
한 장이었다
극도로 넓은 범위
적에서 청으로
청에서 녹으로
일일이 거꾸로
모든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