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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묵상글 들 ( 연중 제32주일. -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단지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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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단지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가난한 과부의 작은 봉헌이
부자들의 큰 봉헌보다 크다고 칭찬하시며
크고 작음의 다른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말씀에 저를 비춰보면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만약 누가 제가 지금 하는 사업에 성금을 내실 때
부자의 성금과 과부의 성금 중에서 누구의 성금을 제가 더 반기고
누구의 성금에 제가 더 고마워할지 생각하면 부끄럽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분의 작은 성금을 더 고마워하겠지만
반기는 것은 부자의 큰 성금일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이의 작지만 큰 성금이 더 큰 사랑이고 봉헌이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성금을 더 고마워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저의 사업을 생각하면 큰 도움이 필요하고
그래서 부자의 크지만 작은 성금을 반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사랑의 사람이고 사랑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사랑을 기준으로 상대하지만
제가 욕심의 사람이고 필요와 욕심을 채우는 것이 급선무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내 필요와 욕심을 기준으로 상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필요한 것이 있고 욕심이 있는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필요한 것이 없을 정도로 자족하시고 사랑의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때는 사랑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아가면서 사랑 말고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랑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결핍과 욕심이 있으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봉헌한 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서 으스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비슷한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바로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인데 여기서 바리사이는
자기가 세리와 같지 않고 의롭고 십일조도 잘 낸다고 뻐기지요.
사람 앞에서 뻐기는 것으로 부족하여 하느님께도 뻐깁니다.
그런데 으스대고 뻐기는 것은 다 사랑과 상관이 없지요.
마치 군사 퍼레이드하듯 사람들 앞에서 퍼레이드하는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퍼레이드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하느님 앞에서도 퍼레이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봉헌을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고 반기시겠습니까?
이런 과시적인 봉헌은 큰 성금을 좋아하는 저도 역겨워하니
하느님은 더더욱 반기지 않으시고 역겨워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런 봉헌에 하느님께서 상을 내리실까요?
아무리 큰 액수일지라도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상은 오늘 엘리야에게 밀가루 단지를 박박 긁고
기름병을 탈탈 털어 빵을 만들어준 과부와 같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겸손과 사랑의 단지는 채워주시지만
과시와 욕심의 단지는 비워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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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터키 에페소 기도의 집
오늘은 연중 제 3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면서 봉헌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는가를 먼저 성서적 배경을 통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홀어미가 된(바룩 4,12-16)는 불행의 전형적인 표상입니다(이사 47,9). 과부의 옷차림은(창세 38,14; 유딧 10,3) 두가지 슬픔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재혼을 하지 않는 자식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과 보호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아나 이방인처럼 과부는 법을 통해 특별한 보호를 받았습니다(탈출 22,20-23; 신명 14,28-29; 24,17-22).
초대교회에서는 매일 예배에서 과부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조달해주고 있었음을 사도행전은 전해줍니다(사도 6,1). 만일 과부들이 의지할 친척이 없어 홀로 지낼 경우 초대공동체는 신앙의 사명감을 갖고 참된 신앙심으로 과부들을 도와주었습니다(사도 9,36-39).
이런한 배경위에 과부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기에 신앙공동체로부터 영적, 물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더욱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도 컸다고 볼 수있습니다. 그러기에 과부는 진정으로 마음에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우러나왔고 십일조의 규정을 넘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과부의 헌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헌금의 의미를 겸허히 성찰케 합니다. 헌금은 보통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일체의 물적예물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예식중에 봉헌하는 돈입니다. 이 봉헌금은 교회의 봉직자, 각종 단체들의 활동, 교회의 관리와 운영, 신앙교육, 가난하고 헐벗고 물질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한 자선사업 등에 씌여집니다.
봉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있습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마태 6,21)는 주님의 말씀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재물이나 시간 봉헌을 통해 참된 봉헌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한히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참된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올 때 아까워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헌금을 봉헌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위에서 우리가 교회에 바치는 교무금이나 헌금은 단순히 교회 유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의 결과로 나오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신앙행위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무금이나 헌금은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는 고귀하고 귀중한 삶의 결실의 선물이며 거저 받은 은총에 대해 감사하는 거룩한 의무이며 사랑의 행위입니다.
물, 공기, 온갖종류의 과일과 곡식 등은 우리가 거저 받은 직접 피부로 느끼는 무상의 선물입니다. 이보다 더 큰 그분의 무상의 선물은 감사와 기쁨과 행복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살도록 해 주시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을 깊이 인식하고 체험한 사람만이 복음에 나오는 과부처럼 받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모든 것을 그분께 온전히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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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연중 32 주일입니다.
평신도 주일인 오늘 <말씀전례>는 나눔과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야의 초기 행적을 들려줍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아합 왕은 시돈 지방의 이방인 여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우상숭배를 전념시켰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3년간 가뭄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명에 따라 북쪽에 위치한 시돈지방의 사렙다로 갔고, 거기서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물 한 모금과 먹을 것을 청합니다.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한 끼니 분량의 밀가루와 기름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데, 그는 과부에게 음식을 만들어 우선 자기에게 달라고 청했습니다. 사실 엘리야는 과부의 마지막 음식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곧 목숨을 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과부는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분부에 따랐고, 그 결과 예언자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으며, 과부 또한 엘리야의 말씀을 굳게 믿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나눔(봉헌)은 음식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성체의 신비입니다. 그러기에, 이방인 과부의 이 믿음과 결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원뜻; 던지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원뜻; 생명),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마치 <제1 독서>의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 <제2 독서>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대사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 가난한 과부의 마음은 헌금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곧 타인을 위하여 내놓은 마음,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렙톤 두 닢”은 비록 액수로는 작지만, ‘자신 전부를 담은 사랑의 크기’인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주군이신 그분,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그 ‘단 돈 두 닢’은 곧 마음의 순수한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됩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일이나 큰돈을 봉헌한다 해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적은 돈을 봉헌한다 해도 사랑의 마음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는가? 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 마음을 얻는 길입니다. 이는 요한 까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의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 1).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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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부분은 전부보다 클 수 없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오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의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 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당신부를 하면서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기억되는 선물이 있습니다. 한 어르신으로부터 받은 네 잎 클로버입니다.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물질적인 선물은 할 수 없지만 이것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제 마음입니다." 하셨습니다.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 잎 클로버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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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땅에서 하늘을 쳐다보다
⒈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서 살아가는 인간은 땅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이기 때문이고, 하늘과 땅의 열매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태초에 얻은 깨달음으로서, 이를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三才思想)이라 합니다. 단군은 이를 후손들에게 알려주고자 삼원태극으로 우리 민족의 문양을 삼았고, 조선 임금 세종은 이를 바탕으로 한글 모음을 만들어 전해주었습니다.
⒉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이러한 사색이 안개처럼 아스라이 뿌옇다가 드디어 역사 속에 선명하게 드러난 때가 2백여 년 전인 18세기 말 무렵이었습니다. 새 하늘이신 예수님,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가 평신도 선비들의 자발적이고 지성적인 노력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1779~1784).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요 기적”이라고 불리우는(조광) 이 일은 사실 천지인 삼재사상의 맥락에서 보자면, 천지인의 관계가 삼위일체 도리로 밝혀지고 인간의 기준이자 모범이신 예수님의 삶이 그리스도 신앙 진리가 밝혀진 것이기 때문에, 정신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세계 인류역사에서도, 가톨릭 교회사 안에서도 유례가 없는 오묘한 섭리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⒊ 이를 두고, ‘천지개벽’(天地開闢)에 관한 전통적인 사색을 넘어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남긴 저술을 통해 ‘후천개벽’(後天開闢)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최제우는 중국 청나라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편승하여 저질렀던 행태(태평천국의 난, 1854~1864)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동학을 창시했습니다(1860). 유불선 등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의 맥을 계승하되 서학에서 얻는 후천개벽의 깨달음을 더하면서도 서학에 맞서 민족의 뿌리를 상기시키려는 의미로 동학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전봉준이 정약용이 지은 <경세유표>를 교과서로 삼아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일(1894)도 18세기 말부터 이 땅의 선각자들이 들여온 신앙 진리의 여파(餘波)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가 18~19세기에 조선 사회에 만연했던 모순과 불의에 분개하여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일어난 평신도 정신 혁명이었고, 땅에 두 발을 딛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본 그래서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였습니다.
⒋ 이런 업적을 알아본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2012년에 세계 정신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여유당 전서의 저자인 정약용이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은 선각자 이벽이었는데, 이승훈을 통해 세례를 받은 이벽과 천진암 강학회 선비들은 천주교 교리를 완벽히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도 성사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중박해를 받아 이벽이 세상을 떠나자 그 선비들은 이벽을 본받아 자체적으로 성사를 거행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이를 바탕삼아 선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1786~1790). 주로 선비들을 비롯한 중인들까지 무려 1천여 명의 입교자를 갖춘 교회로 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발적인 성사조직이 신생교회를 성장시키고 엄청난 선교적 위력을 발휘한 일은, 그 십여 년 전에 이 땅의 평신도들의 지성적 위대함을 보여준 것 이상으로 이 땅에서 평신도들의 자발적 조직력을 보여준 일입니다.
⒌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저력을 입증한 이 위대한 역사적 업적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교우촌을 세워 백 년의 박해를 이겨냈다든지 이 바탕 위에서 기록상으로만 해도 2천 명이 넘은 순교자를 배출했다든지 또 그에 멈추지 않고 그 후의 또 다른 백 년 동안 순교자 신심을 함양하여 순교 정신을 우리 교회의 핵심으로 삼아온 것 모두가 다른 나라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귀한 전통입니다.
⒍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 세기 전에 시작한 교회 쇄신의 여정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프란치스코 현 교황이 역점을 두고 있는 노력은 「신앙 감각」(2016)과 「공동합의성」(2018) 문헌에 집약되어 있는데, 이 노력 역시 그 초점은 평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이를 도우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의 평신도들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그 1% 미만인 성직자, 수도자들이 99%의 평신도가 깨어나도록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합심하여 남녘 겨레에게 빛이 되고자 노력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면 북녘의 겨레와도 손에 손 잡고 아리랑 노래를 부르는 민족 복음화의 날도 머지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 깨달음의 새벽이 열리던 때, 구도적 지성과 자발적 성사생활과 창의적 교우촌과 용감한 가치 실현의 순교노력으로 빛나는 전통을 세워준 평신도 선조들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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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키엣 대주교님.
코로나 19 대유행을 겪으면서 자신의 위험을 뒤로한 채 현장에서 헌신하고 있는 의로운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 군인과 경찰, 구급대원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봉쇄된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의약품과 식품들을 나눠주고 식료품점 주인은 자신의 물건들을 무료로 나누어주었습니다. 농부들은 채소와 쌀을 노상에 놔두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껏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의로운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도 여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나눠 줄 것까지도 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웃의 고통과 아픔보다 자신이 챙길 이익만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매일 국수만 먹다 맛있는 야채와 밥을 보고 기뻐하던 부인이 며칠 지나자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도 없는 밥을 매일 똑 같이 먹어야한다니 뭘 먹으면 맛있는지 모르겠어요.” 남편이 말하길 “아마 세상에서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뇌물일거야”
오늘 복음에서는 지위 성분이 다른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높은 직위에 존경받는 사람들이지만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 조차 자신의 부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만과 이익에 눈 먼 그들에게 이웃의 아픔을 공감할 눈과 귀가 없습니다.
비록 힘도 돈도 없는 가난한 과부지만 그녀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넓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겸손한 자테로 성전에 들어가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부유한 율법학자들은 많은 것 중에 몇 닢을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넣었습니다. 관대한 사랑이란 동정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내가 많아서가 아니라 나도 부족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내어 주는 사랑을 알 때 가치있는 삶이 됩니다. 돈의 크기보다 마음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계산을 하지 않고 진심으로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정말 소중합니다.
돈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위험 부담보다 투자 효과가 큰 것이 가치있는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가장 현명한 투자는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사는 데는 돈의 크기와 상관없이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사람들은 헌금함에 돈을 넣기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이미 얼마를 꺼낼까 결정을 합니다. 이 정도면 될까? 다른 사람이 보면 창피하지 않을까? 등등 그러나 그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내는 돈은 없어지지 않고 하늘나라에 투자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공을 위해 시간과 돈과 열정을 투자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며 행복과 절망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 투자는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헌금함에 돈을 넣을때도 주저합니다.
하늘 나라는 돈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에 대한 가치를 그들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어 주는 것, 나눔의 크기에 의해 판단합니다. 나눔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다시 이웃과 나누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주님, 저희가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늘 나라에서의 부의 가치를 진실로 이해하는 지혜와 믿음의 성장으로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봉헌금을 낼 때 마음은 어떴습니까?
2. 봉헌금과 제물을 바칠 때 갖추어야 하는 마음과 태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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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듀크 대학교 교수 새러 가이더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폭넓게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재밌는 친구, 공을 잘 던지는 사람, 케첩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다양한 존재인지 생각하는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창의성이 향상되었음을 이 작업을 통해 분명히 보여줍니다.
창의성 향상은 아이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 치매에 관한 관심들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치매로 가족들의 어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치매 예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늘 사고하며 뇌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뇌 세포를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서 새러 가이더 교수의 ‘자신이 누군지 폭넓게 생각’하게 하는 방법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뇌 건강을 위해, 함께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특히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합니까?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다양한 모습 모두를 사랑해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 사랑의 이유를 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랑받을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지금을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 세와 십일조 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금고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헌금이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이는 조금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부자는 드러내는 봉헌을 위해 많이 넣었던 것이고, 가난한 이는 상황이 어려워서 조금만 넣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드러내기 위한 봉헌이기에 하느님께 바치기보다는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이는 노동자 하루 품값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보잘것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적은 액수라 할지라도 봉헌하는 마음 자체가 사랑받을 이유였습니다. 세상의 눈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모습이지만,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이 됩니다.
남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헌금하는 부자가 많은 돈을 내는 마음 그리고 가진 것을 몽땅 털어서 하느님께 바치는 가난한 이의 마음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헌금을 기쁘게 받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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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우리가 애정을 느끼는 대상으로부터 비롯된다(바뤼흐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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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어!!
큰형님이 결혼한 뒤, 다른 가족들과 형네 집에 놀러 갔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함께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져 오는 것입니다. 화장실을 얼른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웠습니다. 형 집에는 마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과 마당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지요? 지금의 이야기는 1980년 초반의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아파트에 처음 가본 것이었고, 실내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화장실은 야외의 마당 구석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형님께 물어서 들어간 화장실이었지만, 이곳 역시 낯설었습니다. 우물 같은 것이 화장실 변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화장실에 욕조와 세면대도 함께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2021년에 실내에 화장실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라며 화를 내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일까요? 이해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이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요?
빠른 판단보다는 주님의 판단을 곰곰이 새기면서 기다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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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이야기합니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평신도들에 의해서 교회가 시작되었고, 발전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학문으로서 교리와 교회를 공부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한 학자들은 1784년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서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평신도들로 시작된 한국교회의 역사입니다. 학자들은 가성직 제도를 만들어서 교회를 운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성직자의 파견을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하였습니다. 북경의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였고, 한국교회는 비로서 사제가 성사를 집전하는 제도적인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첫 순교와 더불어 100년간의 긴 박해가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탄생한 자랑스러운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지내면서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와 스힐러 벡스의 ‘교회 직무론’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로핑크는 ‘대조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계명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드러나는 세상을 꿈꾸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난한 이, 굶주린 이, 병든 이들이 교회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한 공동체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스힐러 벡스는 교회의 직무는 신분과 계급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성사이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핑크와 스힐러 벡스의 책은 신학생이었던 저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었습니다. 마치 소피아 성당의 벽을 채웠던 이슬람의 문양을 벗겨내면 그 안에 교회의 성화가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의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대조사회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도를 바꾸고, 거시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정성과 사랑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과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미망인입니다. 남편이 없기 때문에 가정도 돌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다면 과부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과부들의 삶이었습니다. 성서는 오늘 두 명의 과부가 모두 힘들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두 과부 모두 마지막 남은 것들을 이웃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서 봉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렙다의 과부는 엘리야를 위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마지막 남은 동전을 봉헌하였습니다. 시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여준 과부의 용기와 사랑의 실천은 그 뒤에 과부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올바른 가치기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따를 것인가 또는 나의 욕망을 희생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 안에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택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비록 올바른 가치 기준을 내 안에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동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평소 나의 기준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 충동에 의해 하게 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남을 위해서 우리의 재능을 제공하려는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많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결국 실패하고 말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가치기준을 확립하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 한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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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聖人의 삶
- 지상에서 천국天國을 -
천국의 한자를 찾았더니 다음과 같이 세 뜻의 설명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뜻은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성인의 삶이 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다가 죽은후에 갈 수 있다는 영혼이 영원히 축복받은 나라.
2.하느님이 지배하는 은총과 축복의 나라.
3.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곳이나 상황.
천국의 반대인 지옥地獄도 찾아봤습니다.
1.중생이 지은 죄업으로 죽어서 간다고 하는 지하의 세계.
2.큰 죄인으로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원히 벌을 받는다는 곳.
3.못견딜만큼 괴롭고 참담한 형편이나 환경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교통지옥, 입시지옥).
적고 보니 천국도 지옥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희망도 절망도, 생명도 죽음도 선택이듯 천국도 지옥도 성인도 죄인도 선택입니다. 성인의 삶을 선택하여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면 성인입니다.
한마디로 오늘 지금 여기서 구원자 주님을 선택하여 살면 그대로 천국에서의 성인의 삶입니다. 잘 선택할 수 있음은 또한 은총임을 깨달으니 선택의 은총입니다. 때로 산책중 즐겁게 부르는 화답송 시편 셋도 생각납니다.
1.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2.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3.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며칠전 어느 자매님이 고백성사후 눈물 지은후 환한 얼굴, 환한 눈빛의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살며시 안아드리며 “고백성사 받음을 축하드립니다.” 드린 축하인사도 생각납니다. 어제도 몇 년전의 체험이 있었고 이 또한 저에겐 평범한 일상에서의 천국신비체험입니다.
집무실 문을 여는 순간 한눈에 들어 온 단풍 곱게 물든 별세계 같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문이 열릴 때, 주님이 계신 천국의 아름다운 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 했습니다. 바로 지상에서 살면서도 하느님 계신 하늘에 희망을 두고 살 때 지상천국의 삶을 사는 성인이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신 하늘입니다. 다음 히브리서의 고백이 고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한 번이자 절대적인 효력을 지닌 희생제사를 보여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혜로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희망을 현재화, 활성화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두 번이 아니라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끊임없이 임재臨在하시는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과 함께 살 때 지상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겠고, 그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가난한 과부입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드리고 싶은 두편의 헌시獻詩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새롭게 느껴지는 옛 자작시입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주님은 은총의 선물같은 시詩를 통해 희망과 기쁨, 위안과 평화를 주셨음을 지금에서야 소스라치게 깨닫습니다. 참 고맙고 신비롭게 생각되는 것이 힘든 때일수록 기억에 생생한 시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방에 있는/TV, 그림, 사진 등/대부분이 군더더기/쓸데없는 짐
이보다 더 좋은/임 만드신/창문밖 하늘 풍경
살아 계신 하느님 그림/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방 하나만 있어도/부러울 것 없겠네!”-2005. 봄
“별들이 땅을 덮었다/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 나뭇인들/하늘 향한 사모의 정 깊어져/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온 땅을 덮었다/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황홀한 기쁨/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2005. 가을
그러니 역설적으로 가난한 과부는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살지만 눈길을 지상넘어 천상에 두고 계셨음을 봅니다. 주님의 눈길도 늘 그를 향했고 과부의 눈길 또한 주님을 향했음을 봅니다. 이점에서는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사렙타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를 통해 사렙타 과부를 찾아 살려 주신 주님은 오늘 성전에서 생활비 전부를 헌금궤에 넣는 가난한 과부를 예의銳意 주시注視하십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의 모범을 보여 주는 가난한 과부요 그녀의 영성을 본받고 싶습니다. 마침 어제 카톨릭 신문은 신임 서울대교장에 임명된 정순택 대주교님에 대한 기사로 가득했습니다.
깊은 영성, 온유, 겸손, 친절, 경청을 대주교님의 특징으로 꼽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영성이자 평신도 영성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셋으로 요약되는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남다른 위대한 성덕의 모습입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는 부자들과는 판이한 모습입니다.
정말 하느님 눈에는 누가 훌륭한 사람인지, 누가 성인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위장이나 가면이 통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지혜를 겸비한 노수녀님과 공감하며 나눈 대화도 생각납니다. ‘나이들어 죽음에 가까워지는 노년에 들면 모두가 평준화된다, 죽음 앞에서는 완전 평등해진다’라는 것입니다. 재물도, 지위도, 학위도, 학식도, 젊음도, 힘도 점차 사라지고 남는 것은 진선미, 신망애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인지, 참으로 진실하고 성실한 믿음의 착하고 어진 사람인지 하나만 남는 다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단 사람 하나뿐임을 깨닫는 것이 공동체 생활의 은총입니다. 살다보면 박사학위도 덮여져 가고 사람앞에서는 참 하잘 것 없어 보입니다.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사랑과 섬김, 온유와 겸손, 진실과 성실의 생활 박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영성의 최고봉에 도달한 평신도 성인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허영의 거품이 걷힌 완전히 본질적 깊이의 참행복한 삶을 산 성녀, 가난한 과부의 삶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사람들로부터의 허영의 이탈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일희일비하다 보면 결코 내적평화는 없습니다.
겉옷을 입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윗자리를 탐하며,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는 외적인간을 상징하는 율법학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내적인간의 성녀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겉모습에 치중하다 자신을 잃는 어리석은 율법학자와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 나를 살았던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둘째, 재물로부터의 탐욕의 이탈입니다.
무욕의 지혜요, 무욕의 부자입니다. 최소한도의 필요로 충분한자가 정말 부자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 많아도 끝없는 탐욕에 목마른 자라면 영원히 빈자일뿐입니다. 복음의 부자들의 헌금하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가난한 과부입니다. 하느님께 전적 위탁의 믿음이 있었기에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 밖으로는 가난해도 하느님 한분을 모심만으로 행복한 부자였던, 내적부요의 성녀 가난한 과부입니다.
셋째, 지위로부터의 명예욕의 이탈입니다.
지위에 따라 변질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듭니다. 그렇게 좋던 사람이 자리에 오르니 변합니다. 변질이 아니라 숨어있던 본질이 드러난 것인지 모릅니다. 이런 자리에 관계 없이, 어떤 자리에 있던지 한결같은 진실하고 겸허한 모습이라면 얼마나 멋있고 매력적이겠는지요!
가난한 과부, 지위와 자리가 전무한 참 초라한 모습이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자연스럽고 당당합니다. 참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늘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과 눈맞춤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더도 덜도 아닌 나일뿐입니다. 어떤 가면도 통하지 못합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 앞에 떳떳하면 삽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보아주지 않아도 하느님만 알아주면, 보아주면 행복합니다.
가난한 과부는 온갖 가면들이 필요없던 성녀였습니다. 참으로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고, 재물로부터 자유롭고, 지위로부터 자유로웠던 참 아름답고 평화롭고 진실했던 행복한 영혼의 성녀였습니다.
이런 가난한 과부와 비교할 때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많은 돈을 헌금하던 부자들은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요! 밝게 빛나는 영혼의 가난한 과부와 빛을 잃어 어둬진 영혼의 율벅학자들과 부자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으로 이탈의 초연한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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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봉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예수님께서 성전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당시에는 헌금함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로 헌금의 액수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에게 주목하십니다. 부유한 이들이 당당히 큰돈을 넣는 와중에 차례가 된 그녀가 보잘것없는 가치의 렙톤 두 닢을 조심히 넣었습니다. 초라한 과부 차림새의 행색으로 단박에 그녀의 처지를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시선으로 봉헌을 바라보시는지 알려 주시려는 겁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하느님의 셈법은 세상의 그것과 아예 다른 방식입니다. 세상은 산술적으로 큰 금액에 열광하지만, 하느님은 그 정도의 돈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부자들의 상태를 모르시지 않으니까요. 하느님은 액수나 수량이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들 눈에 그 가난한 과부는 무모하리만치 어리석을 겁니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액수지만 그녀에게는 없으면 굶을지도 모르는 전 재산이니까요. 그런데 하느님의 눈에는 그녀가 매우 지혜롭습니다. 현재와 앞날을 동시에 주님 발 앞에 펼쳐놓았으니 하느님께서 움직이시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셈이니까요.
제1독서는 엘리야과 사렙타 마을 과부의 일화를 전합니다.
"먼저 당신을 위해 ...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해"(1열왕 17,13)
기근이 들어 모두가 굶는 때였지요. 이스라엘을 떠난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에서 마주친 과부에게 물과 음식을 청하자, 여인은 마지막 양식을 먹고 죽으려는 참이라고 솔직히 답합니다.
그런 절박한 처지의 여인에게 엘리야의 요구는 좀 무리하게 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은 모자가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니까요.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1열왕 17,15)
하지만 여인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이 비지 않을 거라는 엘리야의 말을 믿어서일 수도 있고, 피차 서로 굶는 처지에 조금이라도 내놓아 생명을 나누려는 연민 때문일 수도 있지요. 엘리야의 말을 들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앞으로 식량 걱정을 덜게 될 요긴한 선물을 받습니다. 소박하지만 생명을 나누었기에 생명을 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의 봉헌을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히브 9,26)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여느 사제들과 달리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영원한 제물로 바치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생명을 온전히 아버지 손에 넘겨드리심으로써 완전한 봉헌을 이루신 것이지요.
이처럼 완전한 봉헌의 수혜자는 우리 인류입니다. 아버지는 이 남김없는 봉헌의 대가로 세상과 화해를 이루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길을 다시 열어 주셨지요.
봉헌은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닙니다. 서원이나 서품, 입단 등의 특정한 기회뿐만 아니라 매일 매순간 봉헌을 갱신하도록 우리는 초대를 받고 있지요. 나는 어떤 마음으로 생명을 내주며 봉헌의 기쁨을 살아가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봉헌하는 벗님들과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여러분의 진실된 제물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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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위선적인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거짓과 가식으로 꾸며진 삶,
겉으로는 선함을 자랑하면서 진심을 숨기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도 어느 정도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장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좋게 보이려 노력합니다.
저 또한 위선적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보다
조금은 포장한 삶을 보여 주려 하였습니다.
신자들과 면담할 때에도 진심을 담아서
대화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사제로서 해 주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에 더 신경을 집중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비판하십니다.
율법 학자의 가식을, 부자의 위선적인 행동을 비판하시고,
그런 그들보다 가난하지만 진심을 다하는 과부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문득 ‘가난한 과부도 위선으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성격과 가르침을 알고 있는
과부였다면, 자신의 행동을 보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것을
미리 짐작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깝지만 자신의 모든 재산을
헌금함에 넣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지요.
쓸데없는 의심이고 그릇된 전제에서 나오는 상상임을
저 또한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위선’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묵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선은, 어쩌면 가식적인 행동이나 과시의 외적 표현보다는,
이기적인 의도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사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도, 이른바 꼼수를 부리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위선적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을 포장하기도 하고,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포장과 과시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본다면,
가난한 과부의 행동 같은 포장이나 과시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도 귀엽게 보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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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두 과부이다. 이 두 과부는 하느님 앞에 믿는 이들의 상징적 표상이 된다.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부(富)는 많든지 적든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보(富)이다. 즉 자비로움이 부이며,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항상 불행이요 가난이다.
우리는 사렙타 과부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 즉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물을 끊어버리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까지도 요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그 예언자를 믿는 마음이다. 이것으로 그녀는 애덕을 실천하였으며 그것으로 몇 배의 보상을 받는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다.
“나는 이 집 저 집 문전걸식을 하며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왕 중의 왕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고 ‘불행한 날들은 다 지나갔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의 자선을 기대하면서 먼지 속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동전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다. 그분의 시선이 나에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분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분은 즉시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거지에게 왕이 동냥하다니 될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얼떨결에 내 식량 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그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 되는 곡식 중에서 금으로 된 작은 곡식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R. 타골).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두 번째로 과부의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기에 아무런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심 없는 봉헌이었다는 것이다. 가난하였지만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다. 헌금 궤 앞에 계신 예수께서는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거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행위는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자세였다. 반면에 과부는 겨우 동전 한 닢 값어치인 렙톤 두 개를 바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신다. 생계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다 바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44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성을 요구하신다. 과부는 자기의 삶과 마음을 봉헌했고, 부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서 모아들인 것일지도 모르는 것의 부스러기를 바쳤을 따름이다.
히브리서에서 역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새로움에 대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매년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지만(히브 9,25),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어 죄를 이기신 후 천상의 성소로 들어가셨다(히브 9,26).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의 두 과부와 같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어 죄에 대한 승리를 드러내시는 분이 될 것이다. 두 과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 그리고 말없이 완전히 봉헌하신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274).
오늘 두 여인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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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4)
가톨릭의 빛깔은
십자가의 빛깔이며
평신도의 색깔은
촛불과 묵주의 색채입니다.
촛불과 묵주는
한낱 장식으로만
전락될 수 없습니다.
빛을 밝히고
힘을 주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으로
나가야합니다.
1. 평신도는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상 생활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신앙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이란 소중한 나와 너를
아끼며 사랑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같은 소중한 삶입니다.
착한 삶 착한 행동은
형제의
단점과 약점까지도
껴안아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와같이
실천이 중요합니다.
실천은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2.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자기성찰에서
출발합니다. 자기성찰은 자기정화입니다. 자기정화는 공동체를 살리는
생명의 참된 양식입니다.
함께 나누지 않고서는 또한
기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3. 첫마음으로 돌아가 첫마음을
되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힘차게 생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합니다.
생동하는 신앙인의
첫마음은 기도의 삶이며
봉헌의 삶입니다.
매일 기도속에서 감사의 의미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4. 하느님의 부르심인
소명에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소명은 희생과 인내로써 자라납니다.
희생과 인내는 교회공동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 작지만
주님의 뜻이 사랑과 나눔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기쁘게 실천하는 평신도들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이 땅의 모든 평신도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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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위선에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또는 “너희는 율법학자들처럼 살지 마라.”,
또는 “너희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모든’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들이었던 것은 아니고, ‘나타나엘’처럼
예수님께서 ‘진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요한 1,47).
그러나 진실한 율법학자들의 수는 적었고,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라는 말씀은,
옷차림만으로 거룩한 척 하는 위선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아야 거룩해집니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교만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장터 같은 곳에서 일을 하다가 율법학자들과 마주치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인사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인사 받는 것을 즐기면서 자기들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훌륭한 인물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우쭐거렸습니다.
(율법학자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겉으로만 공손하게
인사하고, 속으로는 위선자들이라고 욕하거나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경우에 인사 받는 것을 즐기는 율법학자들도 위선자들이고,
겉으로만 공손하게 인사하는 사람들도 위선자들입니다.)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긴다는 말씀은,
위선자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교만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탐욕을 비판하는 말씀인데,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신 말씀보다 훨씬 더 강도가 센 말씀입니다.
당시에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상대로 율법 문제 등을 상담해 주고
아주 비싼 수수료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등쳐먹는 일’로, 즉 강도짓으로 보셨습니다.
(율법 문제 상담은 사실상 신앙상담과 같습니다.
신앙상담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에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척 연기하는 것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위선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이기 때문에
더 엄중한 심판과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1-44)”
이 이야기를 앞의 율법학자들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헌금함에 큰돈을 넣은 부자들을 율법학자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선자인 율법학자들이 부자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헌금함에 넣은 ‘큰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서 마련한 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돈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 자체가 위선입니다.
(남의 돈을 빼앗아서 헌금한다면 그것을 헌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헌금도 아니고, 또 하느님을 강도짓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짓이기 때문에 ‘신성모독죄’가 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하느냐?’도 중요하고,
‘돈을 어떻게 마련했느냐?’도 중요합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해서 마련한 돈을 헌금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 돈은 피해자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면
바치는 그것도 ‘선한 것’이어야 하고, 선한 마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를, 율법학자들 같은 기득권층 사람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과부의 마음속에는 기득권층 사람들에 대한
원망, 분노, 미움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그리고 기득권층 사람들은 부유하게 살고 힘없는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불공평한 현실에 대해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을 보면,
그는 단순하고 순수하고 선한 마음으로, 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어떤 특별한 지향 없이 ‘감사헌금’을 바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만 가득한 상태로 헌금을 했다면, 또 이기심과 욕심으로
헌금을 했다면,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야기에서는 ‘생활비를 모두 다 바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모두 다 바친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하느님을 사랑한, 그 사랑과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바치지 못하더라도
온 마음을 다 바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음은 있어도 현실이 그렇지 못해서, 가진 것을 다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내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많이 낸다고 과시하고 생색내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ㄱ).”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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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1열왕 17,10-16)는 엘리야를 극진히 맞이한 이방인 사렙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아합(기원전 874-853 재위)이라는 이스라엘의 못된 임금 때문에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17,1)이라고 엘리야는 예언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아합이 왕비로 맞아들인 이방인 이제벨의 광기에 시달린 나머지 하느님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그보다 더한 짓을 하여 그 이전의 어떤 이스라엘 임금보다 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분노를 돋우었습니다.”(16,33)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 바알과 주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면서(18,21) 하느님을 배신했고, 이들을 질책했던 엘리야가 이제벨과 하느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항하다가 주님의 명령으로(17,9) 시돈 지방의 사렙타 마을로 피해갔습니다. 이때 한 가난한 과부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오랜 기간 가뭄 탓에 사렙타 여인도 죽을 정도로 먹을 것이 없었음에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 엘리야의 간청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았고, 또 그가 믿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에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 분이시며, 억눌린 이들을 구하시고,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시며, 악인의 길을 꺾어 버리시는 분이심을(시편 146,6-7) 여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임금과는 달리 엘리야 예언자의 말에 순종한 이방인 사렙타의 여인에게 하느님께서는 비가 다시 오는 날(다시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게 될 때: 18,38-46)까지 그녀의 밀가루 단지가 비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복음(마르 12,38-44)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율법학자의 지혜를 칭찬하셨지만(12,28-34) “견디기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워놓고 자기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루카 11,4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던”(14,1) 것을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검은색의 긴 예복에 흰색 띠를 두르고 길거리에서 대중의 주의를 끌면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영예로운 자리(높은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늘 애쓰는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태도는 가관이었습니다(루카 14,7-10). 이들은 마음과 생각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12,30-31)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약자 보호법”(탈출 22,21-26)을 무시하고, 당시 사회에서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없었던 과부들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해준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많은 돈을 갈취했고,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자신의 열심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기도는 길게 했습니다(마태 6,5-6). 예수님께서는 이들이야말로, 이사야 예언자가 그랬듯이,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으며, 사람의 규정을 교리라고 가르치면서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는 위선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7,6-7). 이뿐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7,8)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가 될 것(10,31)이라고 저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성전의 헌금함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열세 가지의 목적에 따르는 헌금함이 있었는데, 얼마를 헌금하는지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보수하기 위한 헌금함에 최소한의 화폐단위인 렙톤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하루 생활비를, 아니 자신의 하루 삶을 다 내놓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헌금은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율법학자들에 대한 비난과 잠시 뒤에 맞이할 성전파괴(13장: 예수님의 죽음)와 더불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는 잘 보이려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며,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찾고,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기는 율법학자들과 이름 없는 가난한 과부의 성전을 아끼는 마음은 천지차이입니다. 비록 작은 액수일지라도 하루 생활비를 모두 내놓은 여인(마르 12,30-31)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시겠다는(14,58)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렸었나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집착하는 나머지 사람이 짓지 않은 성전을 허물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2독서(히브 9,24-28)는 옛 계약 갱신을 위해 자신을 봉헌한 대사제를 말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기도의 집(예루살렘 성전)은 참 성소의 모조품이며, 자기 죄 때문에 옛 계약의 제사를 여러 번 바치던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인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단 한 번 바치심으로써 하늘에 바로 들어가는 새 계약의 제사를 봉헌하셨습니다. 율법에 따라 임명된 대사제가 계명을 선포하고 바친 제사는 여러 번 제물(동물의 피)을 바쳤지만(9,19), 하느님께서 세우신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봉헌하신 제사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하늘의 소명을 완수하려고 자신을 단 한 번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유일하고 유효한 용서와 구원의 제물을 마련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로마 8,3; 2코린 5,21). 구원의 제사를 완성하신 뒤에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에는 인간의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심판관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 심판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1코린 1,8). 옛 계약의 제사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허물어질 성전에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10,1)로 봉헌되었기(시편 50,8-13) 때문에 단 한 번만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새 계약의 제사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스스로 제단)에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스스로 제물)로 아낌없이 내놓으셨기(스스로 제관)에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고”(5,9) 영원한 가치와 효과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인 찬양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13,15).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기”(10,10)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아합 임금과 이제벨은 이스라엘 백성을 기근이라는 각박함과 고통으로 내몰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던 이방인, 사렙타 마을의 여인까지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알아본 사렙타의 여인은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고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내놓아 그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살려냈기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렙타 마을의 여인과 허물어질 성전의 유지보수(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하루 생활비(렙톤 두 닢)를 모두 봉헌한 과부의 이야기는 단 한 번 자기 목숨을 희생 제물로 바쳐 우리의 죄를 없애신 대사제에 관한 서론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묻는 결론입니다. 우리도 비록 예수님처럼 목숨을 내놓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을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질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유함이 솟구치는 혼신을 다함과 정성에 달려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쓸(돌려드릴) 수 있을 때 비록 똑같은 재물이나 같은 방식으로는 아닐지라도 하느님께서 듬뿍 채워주심을 가르칩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하느님과 이웃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위반하고 우상을 섬기던 아합과 이제벨은 선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온갖 대우를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율법학자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두 여인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은 다 내놓았습니다.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은 물론 희생이 없는 곳에는 기근보다 더 심각한 고통, 그리고 바리사이들이 받게 될 엄중한 단죄를 통한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돌보는 이들에게 자비로워야 하는 율법학자들은 전통과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사악함을 비난하시면서 율법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특별히 당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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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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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지난해 말 저희 수도원을 찾아오셨던 할머님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다들 싱글벙글한 얼굴이었습니다.
대표격되시는 할머님께서 뭔가를 슬쩍 제 손에 쥐어주시면서 어렵사리 이렇게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신분님, 요거이 너무 적어서 부끄러운디요,
우리 노인네들이 여그, 불쌍한 아그들 생각하면서 매월 쪼깨씩 십시일반으로 모은건디,
요긴하게 써주시요."
참으로 고맙고도 송구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 정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아하니 다들 넉넉한 분들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손자손녀들 용돈도 주셔야하고, 노인대학이나 계모임도 다니셔야 하고, 돈 쓰실 곳도 많을 텐데 말입니다.
일년 내내 아끼고 아껴 건네시는 그 '거금'을 도저히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할머님들, 그 예쁜 마음 제가 잘 접수했습니다.
받은 걸로 할 테니, 이 돈은 도로 집어 넣으시고 차나 한잔 하고 가시지요."
할머님들은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셨습니다.
천사 같은 할머님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정말 잘 살아야겠구나.
절대로 헛된 곳에 돈 쓰지 말아야겠구나.
이런 훌륭한 분들 마음을 늘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구나.'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윽고 부자들이 헌금을 하고자 도착합니다.
큰 액수를 헌금하기에 당당합니다.
헌금 담당 사제의 눈앞에 수표를 흔들어 보이면서 '큰 것 한 장이요' 외쳤습니다.
자랑스럽게 헌금함에 돈을 넣었습니다.
이어서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 시대에는 과부로 산다는 것은 최하위 계층의 삶을 산다고 보면 확실합니다.
과부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손을 벌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살길이 막막했던 과부였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헌금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신앙심이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평소에 헌금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하느님 앞에 무척이나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오랜만에 작은 돈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오고갔습니다.
'저 어린 것들, 그동안 용돈 한번 제대로 주지 못했는데,
이 돈을 아이들에게 용돈 쓰라고 줄까?
아니지, 오랜만에 고기라도 조금 사서 영양보충을 좀 할까?'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는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작은 돈, 그러나 과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큰 돈(동전 두 닢)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정성, 그의 삶 전체가 깃든 소중한 돈을 아주 정성껏,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러한 과부의 전적인 봉헌을 예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시며 극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가끔씩 봉헌행렬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자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입니다.
마치 적선이라도 하듯이 봉헌금을 툭 던져놓고 돌아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아주 경건한 얼굴로 정성껏 봉헌금을 바치는 분도 있습니다.
봉헌금 액수 역시 다양합니다.
봉헌금 정리하는 분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고액환 수표를 봉헌하시는 분 있는가 하면, 천주교가 1000주교인줄 아시는지, 아니면 천주교가 천원권의 고향인줄 아시는지 죽어도 천원짜리만 봉헌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어린양께서 배춧잎 좋아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꼬박꼬박 만원짜리를 봉헌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떼구르르' 소리가 다 들리는 동전을 봉헌하는 분도 계십니다.
봉헌금 액수가 커야 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봉헌금 액수가 살림 형편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집에 당장 먹을 양식이 없음에도 빌려서라도 봉헌금을 내려한다면 너무도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봉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정성입니다.
내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실 중에서 가장 값진 것, 내 인생, 내 젊음, 내 삶 전체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성의한 봉헌, 마지못한 봉헌, 습관적 봉헌, 의무감에 의한 봉헌이 아니라 자발적 봉헌, 잘 준비된 봉헌, 정성스런 봉헌, 사랑이 담긴 봉헌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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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봉헌 없는 기도: 뱀의 소굴로의 초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율법 학자들의 기도와 과부의 기도를 대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과부는 헌금함에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넣었습니다.
이 말은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많이 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율법 학자들은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타인의 가산마저 등쳐 먹는 자기를 키우기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가스라이팅 기도’라 하고 싶습니다.
가스라이팅은 본래 연극에서 유래한 말인데, 상대를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을 뜻합니다.
관계의 기본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상대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면
이는 나와 펫(애완동물), 혹은 나와 물건의 관계가 됩니다. 상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상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나와 하느님 사이,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렇게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됨과 동시에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딸이 취직하여 자취할 때도 찾아와 온종일 눈물을 흘리며 신세타령을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딸이 엄마가 이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자 엄마의 폭언과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따위로 대해? 딸년이 돼서 엄마를 생각할 줄도 모르냐, 미친년아. 네가 그러고도 잘 될 것 같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를 하며 풀었습니다.
엄마를 피해 자취방을 몇 번이나 옮겼지만, 엄마는 며칠도 안 돼서 딸을 찾아냈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찾아내는 방법을 알아낸 후에야 더는 엄마가 못 찾게 방을 옮겼고 이젠 평화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에게 이렇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이 청년은 부모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자친구를 통해 받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존감이 너무 낮다 보니 엄마가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그러다 정말 자라며 사랑을 많이 받은 한 남자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톡에 바로 답장을 안 하면 갖은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직장까지 자신이 알아봐 준 곳으로 옮기라고 말하며 아예 집을 나와 자신과 동거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으면 마치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를 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남자도 자취방을 여러 번 옮겨보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했던 방식으로 며칠 만에 금방 남자친구를 찾아냈습니다.
남자친구의 권유로 최고야 원장을 찾아왔고 최 원장은 여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였습니다.
남자친구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1%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도 마지막 화해를 위해 여자 친구의 자취방에 들어가기로 하였는데 단, 조건이 두 개 있었습니다.
원래 다니던 직장에 다시 다니게 해 주는 것과 여자의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이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가면
건들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자유의 공간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친구가 자기의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남자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또 참지 못하고 싸우다 텐트를 부숴버렸습니다.
그토록 미운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것을 자신도 남자친구에게 그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고 여자는 조금씩 남자친구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습니다.
카톡을 1시간 동안 보지 않아도 참아내고 남자친구를 자기 집에 살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잘 되었을까요?
그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필요하여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이 자유롭게 머물 공간을 내가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의 욕구입니다. 교만이고 성욕이고 소유욕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버리기 쉬운 욕구가 있다면 소유욕입니다.
그 사람을 소유하지 않기 위해 아주 작은 자유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공간 안에서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분명 자신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텐트를 부숴버리면 그 사람은 내 안에 있어도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하거나 그걸 견디지 못하면 도망갑니다.
이렇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절대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이고 그 자유를 내어주는 것을
자기 봉헌이라 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은 과부의 가산을 등쳐 먹는 이들이었습니다.
소유욕을 버리지 않으려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욕구로 타인들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에게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거나 명예를 높여달라거나 자녀가 잘되는 것만을 청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머물 공간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주님에게 내 안에서 공간을 허락하는 첫 번째 시도가 소유욕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주님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그 공간을 얻으시기 위해 원하셨던 것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악과를 봉헌하는 곳에 주님께서 내려오시는데, 그 자리를 뱀의 것으로 내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이것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구약과 신약 내내 그것이 십일조로 굳어졌고 이젠 미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로 상징적으로 봉헌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보시는 것은 봉헌이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어느 정도 만들어주는 것인가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모든 가산을 봉헌하였기에 자기 뜻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욕구가 사라진 과부 안에 하느님은 한가득 당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십니다.
미사 때 우리는 어떠한 정신으로 봉헌을 해야 할까요?
바로 과부와 같이 “내 뜻을 봉헌하니 당신 뜻이 온통 나를 차지하소서.”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찬례 때 모실 성체가 머물 자리가 나에게 마련됩니다.
율법학자의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 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자유를 드리기 위해 내 욕구를 내어드리는 봉헌을 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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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하느님 백성은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됩니다.
성사를 집전하며 신앙을 인도하는 사제와
성사에 참여하며 세상을 성화하는 평신도는
각자의 역할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한 백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유혹에 빠집니다.
사제에게 쉽게 찾아오는 유혹은 이러합니다.
신자들 위에 있고 싶어 하는 유혹
권위가 아닌 권력을 누리고 싶은 유혹
대우받고 싶고 드러내고 싶은 유혹
반면 신자들에게 찾아오는 유혹은 이러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유혹
사제와 신앙적 관계가 아닌 인간적 관계를 맺고 싶은 유혹
그리고 세상이 아닌 공동체 내의 영향력에만 관심 같은 유혹
이러한 유혹이 찾아오면
우리 자신을 성화시키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본질을 잊고
그저 인간의 작은 욕심만 앞세우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닌 실천하는 신앙이고
권력과 계급이 아닌 봉사하고 선포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평신도 주일을 지내는 것은
성직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며
하느님 백성을 양성하도록 이끄는 것이며
평신도들은 세상을 향한 복음 선포에 힘쓰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복음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제와 평신도 모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각자가 가진 고유한 역할에 집중하며
인간적 유혹을 경계하며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을 실천하는
내 주변부터 시작하여 지역을 거룩하게 이끄는
그런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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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cpbc TV. 매일미사
평신도 주일 매일미사ㅣ최용진 레미지오 신부 집전
https://youtu.be/tIisExW8OtA 48:31
2021. 11. 7.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11월 7일 연중 제32주일 · 평신도 주일 매일미사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 (가톨릭평화방송 정책기획실장) 집전
강론 : 손병선 아우구스티노 회장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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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연중 제32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 32주일 제1독서(1열왕 17,10-16)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2~13)
고대 근동 사회에서 '과부'는 대부분 남편의 사망으로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위치에 있었다. 물론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는 죽은 자기 형제의 형수를 취하는 '수혼제'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사이에도 보편적으로 관습화된 것으로 여겨진다(창세38,6-11; 룻기1,11-13).
당시 사회적 약자인 과부들은 이같은 풍속을 통해 나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같은 보호는 죽은 형이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을 때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렙타 과부의 경우처럼(12절) 자식이 있는 경우는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더 망막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들에 대한 보호를 탈출기 22장 21-24절이나 신명기 14장 29절에 명문화할 만큼, 적극적인 책임을 그 주변의 이웃에게 부과하고 있지만, 이방인인 이 여인은 어떤 보호와 동정도 구할 여력이 없는 극한 절망에 처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 예언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도록 하셨다.
더욱이 그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가 그토록 혐오하는 바알 종교의 원산지인 시돈에 살고 있는 여인이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심오한 섭리가 담겨진 곳으로, 약한 것을 선택하셔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느님의 능력(1코린1,27-31)과 이방 세계에 대한 구원 계획을 보여준다(루카4,24-26).
또한 본문은 다른 각도로 보면, 아합왕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쳐 북부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와 아쎄라 숭배를 만연시킨 '시돈의 공주' 이제벨을 물리치시기 위해서 '시돈의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를 돕게 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당시 사렙타의 과부가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워 맹세한 것은 그녀가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교류가 많던 페니키아의 한 여인으로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말에 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신인 하느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이 여인이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이나 '우리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어르신의 하느님'(당신의 하느님)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렙타 여인이 가지고 있던 음식 재료의 전부였다. '한 줌'에 해당하는 '멜로 카프'(mello kaph)는 '채우다'라는 동사 '말레'(malle)에서 파생된 명사'멜로'(mello)와 '손바닥'을 뜻하는 명사 '카프'(kaph)가 연결된 것으로, 손바닥을 채울 정도의 소량을 뜻한다.
따라서 '단지'(큰 도기 항아리)를 뜻하는 '카드'(kad)에 겨우 이 정도의 가루가 있었다는 것은 과부의 극심한 빈곤 상태를 대변해 보여준다.
또한 '병'을 뜻하는 명사 '찹파하트'(tsappahath)는 병사가 전쟁터에 나갈 때 휴대할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용기를 지칭한다(1사무26,11). 이 작은 병에 들어있는 소량의 기름 역시 과부의 빈곤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본문에 묘사된 과부의 극심한 빈곤 상태는 후에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풍성함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본문은 12절에 나오는 사렙타 과부의 절박한 대답에 이어 엘리야가 낙심과 절망에 빠진 여인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두려워'에 해당하는 '티르이'(thiri)의 원형 '야레'(yare)는 '두려워하다'(창세20,11),'경외하다'(2역대19,9)라는 뜻으로 두려움 뿐만 아니라 존경이나 경외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와 같이 '두려워하지 말고'라는 의미의 부정(否定) 명령으로 사용될 때에는 위로나 인사의 말이 된다(창세50,19).
사렙타 과부는 너무나 암울한 미래에 대하여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미 모든 식량이 바닥이 나고 더 이상 삶을 지탱할 만한 물질이나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기대할 것이라고는 죽음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러한 과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확고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한편, 원문에 나타난 '야레'(yare)동사를 통하여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 밀어닥치는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차원의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극적으로 불확실한 인생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존하신 주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느님만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적인 두려움들을 온전히 제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큰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여기서 엘리야는 마지막 남은 식량으로 빵을 만들어 누구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인 자신에게로 가져오라고 명하고 있다.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두려워하지 말고'라고 권면하면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행동원리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향한 의지적 결단과 그에 다른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걱정이나 염려나 두려움을 하느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방법 뿐이다(필리4,6).
한편, 엘리야는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먼저' 자신에게로 가져오라고 말한 후,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라'고 말한다.
인간적으로 판단할 때에는 참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과부는 분명히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지극히 적은 양으로 겨우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 밖에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렙타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전혀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주님께서 그 집에 식량이 떨어지지 않게 할 것(14절)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한다.
이러한 순종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그녀의 심령을 감동시키신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의 결과 그녀와 그 아들은 육신적인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24절; 루카4,24~26).
연중 제32주일 복음 (마르코12,38-4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43ㄴ~44)
마르코 복음 12장 38절~4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성주간 화요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신 마지막 설교 말씀이며, 12장 41절~44절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날 일어난 마지막 에피소드요 활동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과 수차례 논쟁을 마치시고, 이제 마지막으로 군중들을 상대로 위선적인 유다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계 및 그들에게 내릴 화를 선포하시는 것이다(마태23,1~36; 루카20,45~47 참조).
특히 마르코 복음 12장 40절에 나오는 '과부'에 해당하는 '케라'(chera; widow)는 가부장적 사회였던 유다 사회에서 가장을 여윈 자로서, 고아와 더불어 경제력을 잃어버린 대표적 부류이며, 사회적으로 가장 보호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다(탈출22,21; 신명24,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율법을 잘 지키고 남들보다 더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도와주어야 할 율법학자들이 그러한 과부들의 가산을 강제적으로 혹은 교묘하게 착복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며, 반율법적인 행위이다.
여기서 '가산'에 해당하는 '오이키아스'(oikias; houses)의 기본형 '오이키아'(oikia)는 일차적으로 '집'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건물로서의 집만이 아니라 집으로 대표되는 모든 재산을 뜻하는 비유법으로 쓰였다.
이제 마르코 복음 12장 41절~44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헌금을 바치는 자들의 태도를 자세히 관찰하시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루카21,1-4 병행).
여기서 '헌금함'은 성전 안의 '여인의 뜰'에 있었다. 이곳은 이방인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남녀 유다인들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이곳은 남자들의 뜰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위치하며, 벽들 따라 일렬로 놋쇠로 된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 놓여 있었다.
이 가운데 9개는 성전세나 희생 제물 대신에 바치는 헌금을 넣는 함이었고, 4개는 성전의 수리와 장식을 위한 헌금을 넣는 함이었다.
마르코 복음 12장 41절의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라고 나오는데, '많은 부자들이'에 해당하는 '폴로이 플루시오이'(polloi plousioi; many rich people)가 '큰돈'에 해당하는 '폴라'(polla; much; in large amounts)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부자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많은 헌금을 했다는 말인데, 그들이 인간적인 과시를 위해 헌금을 했다는 암시를 강하게 주는 것이다.
특히 '넣었다'에 해당하는 '에발론'(eballon; threw; cast in)은 '넣다', '던지다' 라는 뜻의 '발로'(ballo)의 미완료형으로서, 미완료 시제가 행위의 계속과 반복을 나타낸다는 점을 볼 때, 그들이 자신이 부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헌금을 계속해서 헌금함에 넣었음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가난한 과부가 넣은 '렙톤 두 닢'에 해당하는 '렙타 뒤오'(lepta dyo; two very small copper coins)에서 '렙톤'은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작은 화폐였다.
이것은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콰드란스'의 2분의 1 가치를 지녔고, '한 콰드란스'는 참새 두 마리의 가격에 해당하는 '앗사리온'('한 닢'; 마태10,29)의 4분의 1가치를 지녔다.
따라서 '두 렙톤', 즉 '한 콰드란스'라는 말은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적은 액수였는지를 드러내는 말이다. 특히 앞의 부자들의 많은 헌금과 비교하면, 그 액수는 더욱더 초라해진다.
마르코 복음 12장 42절의 '넣었다'에 해당하는 '에발렌'(ebalen; put in; threw in)은 '넣다', '던지다'는 뜻의 '발로'(ballo)의 부정(不定) 과거형인데, 이것은 단순히 어떤 동작이 발생했음을 나타내는 시제이다.
이것은 부자들의 행동과 대조되는데, 과부는 한순간의 동작으로 헌금을 헌금함에 넣는 행동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13장 43절에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신다. '더 많이'에 해당하는 '플레이온'(pleion; more)은 '많은'이란 뜻의 형용사 '폴뤼스'(polys)의 비교급이다.
많은 부자들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두 렙톤을 넣은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계산 방법은 인간의 계산 방법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산술적으로 잘못 평가된 것 같지만, 하느님의 계산법은 신앙적 기준에 의한 것이며, 겉이 아니라 속, 즉 양(量)이 아니라 질(質)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오류가 아니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마르12,44)를 드린 것이었으며,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과부의 헌신과 봉헌의 정도를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생활비'에 해당하는 '비온'(bion; living)의 기본형 '비오스'(bois)는 넓은 의미로 '생'(生), '생명의 기간이나 과정'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처럼 그러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재물'이나 '부'(富)를 뜻하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따라서 '생활비를 모두 다'에 해당하는 '홀론 톤 비온 아우테스'(holon ton bion autes; all she had to live on; even all her living)는 단순히 의식주 문제와 관련된 비용이 아니라 그 과부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 전부를 뜻한다.
이러한 생활비를 하느님께 봉헌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께 맡기는 절대적인 신앙을 드러내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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