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편지에 관한 시모음 1)
꽃편지 /우심 안국훈
별빛 하도 고와서
이유 없어도 편지 쓴다
꽃향기 그윽하듯
그냥 그대 그리우니까 쓴다
그동안 꼭꼭 숨기고 사느냐고
참 긴 여정이었지만
가슴속 품은 새 풀어놓으니
푸른 하늘을 날 듯 속 시원하여라
찬란한 빛의 끝은 어둠이 되고
그 어둠의 끝은 다시 새벽 맞이하듯
지새워 쓰고 또 쓴 편지
그대 향한 마음 따라가는 길을 찾는다
봄날 오후 따사로운 햇살 같고
가을 영롱한 아침이슬처럼
그대 만나는 순간이여
내게는 영원토록 특별한 날 되리라
들꽃편지 /소양 김길자
씨앗 심었다
불빛 없는 긴 터널 지나
새벽이슬 살고 있는 들에
묶어둔 꿈
마음껏 펼치고 싶어
때론 갈증으로 하늘 보며
원망도 하였지만
참고 인내하는 것도
배웠다
삶의 고독 머문 파란 향같이
두근거리는 풀잎에 숨어
나비처럼 날갯짓할거나
이렇게 오래 살고파도
멧부리에서 가을 내려오면
풀벌레 울음 속으로
흐린 나처럼 가야겠지
친구야
화사하게 살진 못했어도
이슬 젖은 풀잎으로
꽃망울 비밀스럽게 터트리는
푸른 들이 있어
못다 핀 마음
보내 본다.
봄 꽃 편지 /고두현
날마다 네 안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듯
그렇게 봄 산이
부풀었다 가라앉듯
오늘도 네 속에서
먼저 피고 먼저 지는
꽃 소식 듣는다.
꽃편지 /홍수희
꽃 피더니 꽃이 집니다
산에도 마을에도 꽃이 집니다
강가에도 철길에도 꽃이 집니다
그리운 내 맘에도 꽃이 집니다
사람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다고
보지 않으면 잊혀지다가
불현듯 또 그렇게 생각나다가
잊어지다가 쓸쓸히 지워지다가
다시 또 잠 못 드는 날 있겠거니
꽃 진 자리에 꽃 피겠거니
보고픈 정 어찌 다 지워지겠는지요
지는 꽃 내 마음에 거두지 않고
오셨던 그대로 놓아둡니다
오셨던 그대로...
조팝꽃 편지 /성은주
마른 꽃대궁으로 대륙 구석구석 태양 닿는 곳마다, 조팝꽃을 벗으로 키우며
작은 꽃잎 하나와 살결 나눈 당신에게
조팝나무 이파리 사이로 안녕, 이라는 시간이 비워질 때 실핏줄 같은 뿌리로 안녕, 했지
그때 우리가 새겨진 구름도 움직이지 않았다네 모두 그늘로 들어가 깊이 누웠지
꿈으로 난 자주 하늘을 보았어
흐린 터키색이 매일매일 사라질 때마다 별사탕을 처방해주었거든
내가 처음 세상을 만난 건 배꼽을 통해서였다는데
왜 우린 서럽장 구석에서 책을 읽다가 이별했을까
쓰러지는 담벼락을 껴안고 기다림을 내려놓았는데
당신은 뭉클뭉클 벽면을 흝으며 하얗게 흔들리고 있었어
마른 침 삼키며 까슬한 가지로 써 내린 문장들
이제 그만 찾으라고, 아프지 말라고,
더흐드러지게 써내려갔다네
그 많은 문자가 작아질수록 미치게 피상적이라 생각했지 더 이상 당신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보호색을 준비하고 있었나 혹은 입술에서 기분을 보여주고 있었나 얼마나 더 숨어야
만날 수 있을까 감상적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웃어주면서 화려한 말투로 질탕히 안부를 묻자
편지 쓴 날짜는 생략할께 건넬 때 당황스럽지 않도록.
그리운 꽃편지 1 /김용택
봄이어요.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 데 없이 나를 가둡니다.
숨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지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산 보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에서 제 생각에 머무셔요.
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그리운 꽃편지 2 /김용택
꽃이 핍니다
꽃이 피면 기쁩니다
꽃이 집니다
꽃이 지면 슬픕니다
꽃이 피면
당신이 금방 올 것 같고
꽃이 지면
당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꽃 피고 지는 것에 따라 변하는 것은
꽃 피고 지는 그 사이에
당신의 반짝이는 여러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꽃 피고 지는
그대와 나의 멀고 먼 거리
이 한반도의 허리는
어디나 밟으면 터질
지뢰밭 길입니다.
그리운 꽃편지 3 /김용택
바람 부는 날은 저물어 강변에 갔습니다.
바람 없는 날도 저물어 강변에 갔습니다.
바람 부는 날은 풀잎처럼 길게 쓰러져 북쪽으로 전부 울고, 바람 없는 날은 풀잎처럼 길게 서서 북쪽으로 전부 울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 사이에 강물은 얼마나 흘러가고 꽃잎은 얼마나 졌는지요.
오늘은 강에 가지 않고 마루에 서서 코피처럼 떨어진 붉은 꽃잎을 실어가는 강물을 보며 그대 있는 북쪽으로 전부 웁니다.
전부 웁니다.
그리운 꽃편지 4 /김용택
봄이 왔습니다
찬바람이 몇 번 지나갔습니다
찬바람이 지날 때마다
겁먹은 풀들은
천지사방으로 몸을 흔들며
바람 속에 숨막혀 꽃잎을 떨구며
핏줄이 터지게 흔들리다가
바람이 지나간 후에
납작하게 누워
붉디붉은 하늘로
붉은 숨을 뿌리며 울었습니다
목이 터지게 울었습니다.
여름이 왔습니다
큰물이 몇 번 지나갔습니다
큰붉덩물이 지나갈 때마다
풀들은 흙탕물 속에서
뿌리와 꽃잎을 뜯기며
숨막혀 흔들리다가
물이 지나간 후에
납작하게 엎드려
풀들은 붉은 흙을 피처럼 토하며 울었습니다
목이 찢어져라 울었습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큰물은 남쪽으로 흘렀고
큰바람은 북쪽으로 불었으므로
풀들은 일어나
꽃을 또 피웠습니다
아이들이 꽃잎을 따다가
가을 바람에 날리어
강물에 실어 보냈습니다
꽃잎들은 떠나가며 울었습니다
물보다 깊이깊이 울었습니다.
겨울이 오고
꽃이 없는 풀들은
자기보다 더 길고 더 멀리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쓰러졌습니다
그 위에 하얀 눈이 내려
이 세상을 다 덮었습니다
그 흰 눈 위에
피 묻은 발자국들이 응달진 산 속으로
수없이 숨어들었습니다
봄이 오면 살아날
진달래, 진달래꽃입니다.
그리운 꽃편지 5 /김용택
밖에 찬바람이 붑니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은
당신이 그리워
찬바람 소리 들리는
겨울 산에 갑니다
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꽃망울들은 맺혀 꽃소식 기다립니다
오셔요
꽃망울 터뜨릴 꽃바람으로 오셔요
꽃바람으로 저 푸르른 산맥을 넘어
그대가 달려오면
나도 꽃망울 터뜨리며 꽃바람으로
저 푸르른 산맥을 넘어
찬바람 속을 뚫고 달려 가겠어요
밖엔 찬바람이 붑니다
이렇게 바람 불어 당신이 그리우면
당신을 찾으러
숨찬 겨울 산을 몇 개 더 넘습니다
그리운 꽃편지 7 /김용택
가을이다
선들바람 부는
길가에
들패랭이꽃 한송이를 따서
너에게 주랴
풀벌레 우는 풀밭 속에 피는
들국 한송이를 꺾어다가
너에게 주랴
이 세상의 모든 그리움들이
길이 되어
이 세상으로 하얗게 뻗는
가을 저녁
꽃을 들고
너에게로 가는 길들은 모두 막힌다
돌아갈 길도 캄캄하게 어두워
풀벌레만 울어대는
이 가을 저녁
이 세상의 모든 그리움들은
별이 되어 반짝인다
내가 지금 너에게 줄
꽃 한송이를 들고 있음을 생각하며
너도
이 남쪽 하늘을 보렴
선들 바람 부는 가을 밤길에서.
그리운 꽃편지.8 /김용택
가을입니다
봄도 그렇지만
가을도 당신 없이
저렇게 꽃이 피니 유난합니다
봄꽃도 그렇지만
가을에 피는 꽃을 보며
꽃이라고 속으로는 쓰지만
꽃이라고 참말로는 못하고
꽃빛에 눈시울만 적십니다
우린 언제나
꽃을 꽃이라 부르며
꽃 앞에 앉아 볼는지요
우린 언제나
꽃을 꽃이라 부르면
꽃이 꽃으로 보일는지요
가을입니다
봄에도 그렇지만
가을에도 강변에 당신 없고
꽃밭이어서
눈시울만 붉힙니다
꽃 편지 /이기인
엄마 밖이 어두워요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요
어서 불을 그려라
어서 불을 그려라
봄날이
너에게도 오리라
씨앗을 벌리고 나온 어린 손이 한 묶음의 불을 가지고 엄마에게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