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려타곤(懶驢 坤) 29-4
"우 아 아 아!"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허공에 떠 있는 소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빛의 광채가 수십 줄기로 갈라져 땅위에 서 있는 인간들을 향해 쏘아졌다.
"피해라!"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붉은 강기에 실려 있는 힘을 알아본 모든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고함이 터지고,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는 인간들을 그 붉은 광채는 끝까지 쫓아가서 죽음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호신강기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사방을 살피는 여덟 명의 눈에 붉은 광채에 휩싸인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재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그들 여덟에게는 붉은 강기가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들 이외의 그들이 끌고 왔던 모든 부하들이 한순간에 재로 변한 것이다.
요란한 함성과 비명 그리고 쇠 부딪치는 소리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남아 있는 여덟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늘을 올려 보았다. 아직도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며 붉은 혈광을 몸 전체에 두른 한 인간이 허공에 떠서 그들 여덟을 노려보고 있었다.
'협상하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임지한의 귀로 전음이 들려왔다.
'이대로 우리끼리 싸운다면 저자를 상대할 수 없다. 일단 우리 모두가 협력해야 저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끼리의 일은 저자를 해치운 다음에 결정하자.'
남궁 세가의 가주인 남궁진호의 전음이었다.
소구의 몸은 아주 천천히 허공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그런 소구를 바라보면서 지상에 서 있는 여덟은 조금 전까지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사이답지 않게 재빨리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마침내 두 발을 땅에 디디게 된 소구는 자신을 둥글게 포위하고 있는 여덟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생각이 머리 속에 들어오면서 이 자리에 모인 여덟이 그가 가장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아본 소구였다. 이들을 고통 없이 단숨에 죽이는 일은 결코 성에 차는 일이 아니었다.
온 몸을 가리고 있는 붉은 혈광이 몸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소구의 얼굴이 드러났다.
운룡회의 운룡이라 불리는 자들이 셋에 누나와 매형을 죽게 만든 오대세가의 가주 다섯이 모두 모여 있었다. 소구는 지금의 상황이 아주 맘에 들었다.
'씨익.'
거기 모여 있는 여덟을 차례로 바라보며 소구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게 된 여덟은 다리가 떨려왔다.
소구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가장 먼저 남궁 세가의 가주인 남궁진호를 향해 다가가고, 그 순간 여덟 명은 동시에 소구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녹색, 청색, 황색, 은색--, 각자가 익힌 내공에 따라 각기 다른 색의 빛을 뿜어내는 강기를 머금은 권과 장과 지와 검과 도 그리고 암기 같은 것들이 소구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귀찮다는 듯 소구의 손이 허공에 둥근 원을 그리면서 한 순간 그들 여덟이 뿜어내는 강기의 광채보다 더욱 밝은 빛을 뿜어내는 붉은 광채가 일어나고, 여덟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 아 악!"
여덟 명 모두가 피를 토하면서 뒤로 붕 날아가서 땅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몸에 두르고 있던 호신강기마저 깨졌는지 하루종일 싸우면서도 옷자락 하나 젖지 않았던 그들의 몸은 쏟아지는 폭우에 흠뻑 젖어가고 있었다.
피를 토하면서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올린 그들의 눈에 남궁 세가의 가주 남궁진호가 소구의 손에 멱살이 붙잡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백초당의 적인 운룡회와 싸우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까지 죽이려 드는가?!"
남궁진호가 소구를 바라보며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누나와 매형이 죽었어."
그리고 소구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폭우 소리로 가까이 있지 않으면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여덟 명 모두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고 말 속에 담겨 있는 지독한 살기에 전율했다.
다음 순간 남궁진호가 죽어 가는 광경을 보게 된 그들은 시선을 돌리고 구역질을 해야 했다. 산채로 살과 뼈가 조금씩 조금씩 남궁진호의 몸에서 분리되면서 가장 먼저 그의 몸에서 사라진 것은 팔과 다리였다. 목과 몸뚱이만이 남았지만 그 마저도 다음 순간 살이 벗겨져 빨간 살덩이만이 남았지만 그 상태로도 남궁진호는 살아 있었다.
소구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렇게 망가진 남궁진호를 땅에 누이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은 조금은 더 살아서 고통을 더 겪어야 했다.
"악--마! 너는 칠호의 말대로 정말 악마였구나!"
곤륜파의 장문인인 진하정이 소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꿈에도 소구처럼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아니 거기 모여 있던 모두가 진하정과 똑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내공도 바닥이고 체력도 바닥이지만 그들은 인세에 모습을 드러낸 악마와 싸우기 위해 비틀 거리며 일어서서 다시 각자의 무기를 들어올렸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남궁진호와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죽게 되리란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남궁진호가 고통을 겪고 있던 그 순간에 그들은 내공을 다시 모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이제 다시 소구를 공격할 힘을 얻은 상태였다.
"나를 악마로 만든 것은 당신들이야."
소구의 입에서 다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일곱 명은 다시 소구를 향해 공격을 퍼붓고 또 한번 비로 인해 진흙탕이 되어버린 땅을 뒹굴었다. 일곱 사람은 다시 움직일 힘을 잃고 땅바닥에 누워 있고, 소구가 이번에 다가간 것은 곤륜파의 장문인이자 운룡회의 금룡인 진하정이었다.
진하정은 죽어도 곧게 죽고 싶었다. 남궁진호처럼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고통을 겪고 싶지 않은 그였지만 그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내공을 이용해 심맥을 끊는 방법도 있었지만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그의 몸 안에 내공이라 불리는 기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칠호의 말대로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숨어 있어야 했어. 수면천마를 자극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얼굴 위로 퍼붓고 있는 비를 맞으며 진하정이 최후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여섯 명은 소구가 이번에도 남궁진호와 같은 고통을 진하정에게 안겨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오판이었다.
걸음을 옮기던 소구의 발은 멈추지 않고 진하정의 몸을 온 몸을 지근지근 밟아대면서 진하정의 몸은 납작하게 변하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면서 진하정은 몸만 부들부들 떨어댔다.
반 시진이 흘렀을 때 진하정의 몸은 종잇장처럼 얇게 변하고 소구의 몸이 진하정의 몸에서 떨어졌다.
남겨진 여섯은 그 사이 다시 소실되었던 내공을 회복하고 일어설 수 있었지만 그들은 진저리를 치며 진하정을 바라보았다. 팔도 다리도 몸뚱이도 머리만 남겨놓고 모두가 종이장처럼 얇게 변한 상태였지만 진하정은 살아 있었다. 죽어도 벌써 죽어야 할 남궁진호도 고깃덩어리로 변한 상태로 살아서 고통을 계속 겪고 있었고, 진하정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먹이 감을 노리고 소구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아직 살아 잇던 여섯 중 둘은 도망치기 시작하고 넷은 그대로 자결을 시도했다. 여덟이 덤벼도 일수를 감당하지 못한 상대였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고, 도망을 쳐도 금방 붙잡히게 될 것이라는 아는 오대세가의 살아있는 네 명의 가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결뿐이었다.
소구의 몸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나머지 네 명의 가주들은 한꺼번에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이리 저리 뒤틀어대고, 그때마다 요란하게 맞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펑 펑 하는 북 터지는 소리가 터질 때마다 네 명의 가주들은 뒤로 일장씩 주르륵 미끄러지고, 그 사이 운룡회의 남아 있는 둘은 무사히 군산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악양 외곽의 산 속에서는 그 밤 내내 북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아침이 되어서 날은 밝아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하고 북 터지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만! 그만 하게! 도대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천 당문의 문주인 당백호가 고함을 내지르면서 북 치는 소리가 사라지고 모습이 보이지 않던 소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진호도 진하정도 이제 죽어 있었고, 멍투성이로 변한 몸을 하게 된 네 가주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소구의 눈에는 더 이상 살기가 감돌지 않고 있었다.
밤새 죽는 것보다도 더한 치욕을 맛본 네 가문의 가주들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소구를 바라보았다.
소구는 어제 밤부터 자신이 벌인 일을 떠올렸다. 한 순간 잃어버린 이성은 저기 죽어 있는 진하정의 말대로 자신을 악마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살심과 분노에 몸을 맡긴 결과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소구 자신도 이토록 자신이 잔인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말없이 자신이 죽인 남궁진호와 진하정의 시신을 바라보는 소구의 모습을 보면서 네 가문의 가주들은 어제 저녁에 본 소구와 오늘 아침에 본 소구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구를 바라보았다.
"난 이곳에 오기 전 마성에 빠져 있었소. 일종의 주화입마 같은 상태이지. 내가 다시 이성을 잃기 전 자결하시오."
다음 순간 소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네 사람은 절망했다.
"단숨에 그대들을 죽이지 않고 밤새 두들겨 팬 것은 미안하오. 당신들이 밤새 맞지 않았다면 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보이는 대로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악마가 되었을 것이오. 내 마음속에 쌓인 분노와 살기가 그대들로 인해 정화되었기에 이성을 찾게 된 것이니 자결할 기회를 주겠소."
뒤이어 튀어나온 소구의 말을 들은 네 가문의 가주들은 절망 어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나이 백이 넘은 나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죽기는 싫었고, 이성을 되찾은 소구의 모습을 보면서 잘만 말하면 살아남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백초당에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네가 어릴 적 암천혈혼대를 시켜 너를 죽이려고 한 자는 저기 죽어 있는 남궁 가주이고, 또 이곳에 온 이유는 백초당과 우리 오대세가의 적인 운룡회와 싸우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백초당을 결코 배반한 적이 없어! 그래도 우리가 죽어야 하는가?!"
황보 세가의 가주인 황보진철이 억울하다는 듯 소구를 바라보며 고함을 치고, 소구 역시 다시 살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당신들이 여기 오게 된 데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어진 백초당을 누가 공격해서 잠들어 있는 내 형과, 형을 대신해서 청방과 백초당을 관리하고 있던 매형 신기서생이 죽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오?! 남의 불행을 딛고 이익을 취하려는 당신들로 인해 매형과 누나가 죽었소!"
"뭐? 방수련이 죽었다고?! 세상에 누가 있어 천음마녀(天音魔女)를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우리들 전부가 덤벼들어도 이길 수 없는 방수련이 지키고 있는 백초당이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있다더냐?! 네 말은 억지에 불과하다! 생각은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만, 우리가 없다고 해도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 같은 장소가 백초당이었다! 남궁 가주의 생각이 우리와는 좀 다른 것이었지만 우리는 운룡회를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하고 편하게 지내고 싶었던 것 뿐이야! 네 형인 방종구가 설계한 백초당을 우습게 보지 말아! 너라 해도 그곳에서 살아남기 힘든 장치가 가득한 장소가 바로 백초당이다! 우리가 없다고 해도 백초당은 충분히 안전한 장소야! 운룡회의 천룡인 칠호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 바로 백초당이었어!"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진철이 긴말을 단숨에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 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소구는 한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충격을 맛보았다.
"흥! 신기서생이 죽었다고? 그 약아빠진 놈의 시신은 있었나?"
이번에는 악불범이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소구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없었소. 그는 폭약과 함께 자폭해서 시신도 남기지 못했다고 들었소."
대답을 하는 사이 방소구는 손이 떨려왔다. 그러면서 소구의 머리는 양려군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회오리치면서 이상한 점이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적이 쳐들어 온 것도 아닌데 오대세가가 개봉을 빠져나가자마자 백초당을 비우고 누나 혼자만 남게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오대세가의 가주라 불리는 절정고수들이 빠져나갔다 해도, 백초당 안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고수들이 머물러 있었다. 그들이 누나 방수련과 같이 있었다면 누나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백초당 안에 마련된 수 많은 함정과 기관들은 사용된 적이 없었다. 형이 잠들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마련되어 있는 수 많은 함정들과 기관이 단 하나도 작동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게 된 소구였다. 그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신기서생이---?"
한참을 침묵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소구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올 때,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기로에 선 네 명의 노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머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자, 이제 알겠지? 이제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당백호가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서 소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구는 자신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네 명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위험했고 이들로 인해 누나가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날 깨우치게 한 것은 고맙지만 그래도 자결하시오. 당신들이 스스로 죽기 어렵다면 단숨에 고통 없이 죽여주겠소."
이들은 언제든지 배반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소구는 절대로 네 노인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소구의 입에서는 그들 네 노인이 원하던 것과는 정 반대의 말이 흘러나왔다.
"꼭 우리를 죽여야 속이 풀리겠다는 것인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팽가의 가주 팽철이 소구를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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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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