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습작초고
# 비닐하우스 주방안 수업시간
고물 컴퓨터옆의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램이 살며는 몇백년 사나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ㅡ
분위기에 녹아 눈을 감고 감동을 주체 못하는 허사장이
손으로 탁자를 치며 박자까지 맞추더니..직접 따라 불렀다.
"--소리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그러더니 막걸리를 불쑥 꺼내어 대접에 따르는 걸 보고 호규의 눈이 커졌다.
"캬아..그 얼마나 환상이냐..역시 진도아리랑은 우리나라 불후의 민요랑게"
"못잖은 민요도 한둘이 아닌 걸로 아는디요"
"--가버렸네 정들었던 내사랑 기러기떼 따라서 아주 가부럿네--"
"김명곤이가 시나리오를 썼다지만 원작에선 누나와 남동생이 아니라 오빠와 여동생으로 나온거 아냐?"
"그런가요..뭐 스토리가 좀더 근사해지리라 생각"
"--금자동이냐 옥자동이냐 둥둥둥 내딸 부지런히 소리배워 명창이 되거라--"
"글고 어떤늠은 주워온 자식이라 맹인 맹글었다고 욕하지만 원작은 친자식이였어"
"그깟 소리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허사장이 눈을 부릅떴다.
"너가 소리를, 노래를 배운다는 넘이냐?"
"전 민요 배운다고는 안했거든요? 그래서 현대의 유봉인 날자누나를 저리 불행케 만들었나요?"
"이..이기 얼척읎는 나..나가 유봉이락고?"
"누가 볼땐 그리 볼 수도...성함마저 모음 뒤집어붙이면 딱 유봉이구만..여병유뵹..."
"너너너참 황당맹랑...날자와 송화랑은 어케 끌어다붙일건데?"
"멀쩡한 딸이름 함부로 바꿔부르는 것도..맹인 만드는 것보다 더큰 비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태..태후는 내 작명이 아니라 미친 예펜네가 붙인거여!"
"그러도록 옆에서 구경만 한건가요. 노래에 미쳐 다녀서 몰랐었나요?"
"야늠아!!"
"제말이 과했지만...다 좋은데 술끊은 지가 며칠 되었다고 또 술인가요"
"마마마막걸리도 술이라는 거냐?"
"술이 아니면요?"
"이..이늠이 어디 가서 칼맞을 소릴 하네? 마 막걸리는 우리 조상들의 허기를 채워준 천하의 영양불로수여..그음덕"
"예. 칼맞고 싶지 않으니 취소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즐겨드시니까... 소주아닌 것만 해도"
"호규야"
"예. 선생님"
"나도 앞뒤 안맞고 대책이 읎다는 것은 잘안다"
"예. 좀 지나쳤어요. 제가 한잔 따라드릴테니 화푸세요"
"화낼 일도 아니고..인생이란 그런겨...그래 운명..유봉이든 송화든 임권택이든 이청준이든 인연이 얽히고 설켜서..한...한을 소리로 토하는 거시 서편젠겨"
따라준 막걸리 잔을 들어 길게 단숨에 마시고 내려놓는 허사장이었다.
"그래..날자..도 가수에 재능이 보였담 나도 어케했을지 모르지...근디 난 유봉이가 아녀. 유봉이같은 한도 없거니와..그쪽편도 아니고.."
"정말 원고향이 어디세요?"
"안산..."
"아..안산.."
"딱 어중간한 땅이지. 이도 저도 아니고 신통한 구석이 한개도 없는 그저그런 어물쩡한 동네..정거장.."
"안산 사람들에게 욕먹을 말일랑..아산이라고 뭐가 특별하겠나요. 그러고 보니 니은자 받침 하나만 다르네."
"그래서! 중편제란 거시 필요하단 말이다!"
"...좀은 일리가 있긴 해도 너무 막막하고 황당"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 거래처 갈시간여"
"막걸리까지는 봐드릴테니까 소줄랑 드시지 마세요"
"그러니까 너도 똑같단 말이다. 봐주다니? 왜 봐줘? 너도 끝내 독기는 없는겨"
비척거리며 걸어가는 허사장을 호규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독기란 건 도대체 뭐지? 한이랑은 다른가? 말그대로 독한 마음? 좋은쪽의 집중? 나쁜 쪽의 집착?'
핸폰이 울자 보고는 놀랐다.
"고.공도사!..웬 일로 네가?"
# 시내의 전통 찻집안 풍경. 개량한복 차림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수염도 길게 기른 공영진이었다.
"길동아..다른 것은 몰라도 수염 좀 깎고 다녀라"
"머리감고 세수했으니 냄새만 안나면 되었지. 면도까지 할 이윤 없다"
"냄새뿐 아니라 남들 눈에 폐도 끼치지 말아야지"
"그런가? 면도기가 비싸기도 하지만 여간 성가시지가 않아서..몸에서 나는 나무는 벌초 안하기로 했다. 자연보호가 벨거냐크크큭"
"그래 농한기라 바쁘진 않겠지만 도사가 여기까지 날 찾아오다니 뭔일이냐?"
"내가 엔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지만...넌 특별한 친구잖냐..우연히 올해 운세를 봤는데..네 운수가 심상치 않더라"
"아아..난 그런거 안믿어"
"나도 실은 베랑 안믿어. 사실 운을 미리 안다해도 소용없는겨. 액땜이라든가 모면도 안되고"
"고걸 이제 알었냐? 크큭 모든 건 결과론이여"
"암튼 넌 올해 큰 변화가...본래 복을 타고 났으니까..크게 염려할 것은 없지만 관상에도 벌써 서기가 어렸으니 귀인도 만난 것 같고.."
벌떡 일어서며
"안심하고 갈란다 붙잡지 마라"
"하 이자식 누가 홍길동 아니랄까봐..점심도 안먹고 그런데 귀인말야 남잔지 여잔지 성별도 알 수 있냐?"
"내가 그것까지 알면 진작에 돗자리 폈지 짜샤"
"온김에 석현이 기운좀 북돋아주고 가는 게 좋"
"아 냅둬..갼 좀더 삭혀야 인간노릇 할기여"
미련 없이 가버리는 영진이였다.
'세상에 정말 운명이란 것이 있긴 있을지..'
7. 서편제
# 돌아온 호규가 비닐하우스를 열다가 놀랐다.
날자가 탁자에 앉아 손깍지를 끼고 앉아있었다.
"누나..언제.." 불안하게 두리번
"아부진 수금보냈으니 안심해..앉아 커피나 해"
"참 내 친구 누구처럼 누나도 홍두깨 같다니까"
차분히 포트에서 커피를 따르는 날자였다.
"난 어디에 몰입할수록..한두발 물러서서 크게 보려는 버릇이 있어. 주관을 벗어나 객관을 하려는 건데..과연 내눈은 정상인지 잘못하는 것은 아닌지..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잖아. 대개는 소용없었지만"
"공도사의 운수론과 비슷하네"
"공도사는 또 누구야?"
"공영진이라고 학교때 친구 여러모로 괴짜인데 반도사?공길동 홍길동이라고도 부르는...."
"재미있겠네. 언제 만나게 해줘. 하여간 이번도 마찬가지였어. 아무리 연구하고 고민해도 난 네게 홀랑 빠졌다는 결론..미쳤다고 해야되나..억울해 넌 내게 얼마나 빠져있니?"
"글세..시시각각 생각은 났지만"
"그런데 열흘동안 전화 한번도 못해주니? 난 매일 수백번씩 전화하고픈 유혹과 처절히 싸웠는데.."
"몰라..다른 일도 많았지만 생전 처음이라서 나도 당황했던 것 같아..누나처럼 과연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구경..?"
"글세 내 보기엔 넌 모두 좋지만 열정일지 정열이 좀 부족한 것 같아..사랑에 목숨걸 수 있어?"
"그런 소설..드라마 영화도 많지만 솔직히 잘 실감이.."
"가령, 아버지가 우리 결혼을 반대하신다고 쳐. 넌 그럼 어쩔거니?"
"누구아버지? 우리 아버진 그럴 분이 아니야"
"만약 그런다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야"
"만약이라고 했잖아..어머니도 그럴 분이 아니겠네. 할머니를 데리고 가도 환영해주겠네?"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이지. 그런건 모두 핑계야.."
"그래 넌 날 아직도 사랑하니?"
"...솔직 나는 사랑이란 것도 몰라..그냥 누나가 내게 잘해줘서 좋고 엉뚱한 것도 좋고..몸매도 좋고 날 좋아해주는게 고마워서 좋고..그런데 지금처럼 화내며 따질 때는 안좋아..."
날자가 정색하며 발끈했다.
"내..내가 지금 화내고 따진다고 생각하니? 차마시며 나누는 진지한 대화를 넌 어떻게!"
"내가 느끼기엔 누나가 날 길들이려는 것 같아. 처음처럼 그때처럼 기분좋게 장난쳐주면 좋겠어.."
"네말이 맞을지도..하지만 나난..여자는 안그래!"
"남자도 결국은 인간일 뿐이야. 여자라고 다를 것 없어"
"호..호규야..넌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있어"
"영문은 모르지만 그렇다면 미안해. 안 힘들려면 어떻게 해줘야 돼?"
"아..안아줘..키스해줘"
"맨 첨부터 그럴려고 했거든?"
# 모두 모여 저녁 식사후, 왠지 어색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는데 허사장이 불렀다.
"태후야"
호규가 집중하고 날자도 놀랐다.
"..이제와서까지 비겁하고 싶지 않다. 애비가 잘못했다. 모두 내탓여"
"아배..술 끊으면 목숨끊을 일밖에 안 남는다더니...어디서 사형선고 받었수?"
"널 함부러 대하고 날자라고 마구 부르고..식모보다 더 부려먹고...너까지 술꾼으로 만들어 희희낙낙 같이 마시고...네 마음 아픈 건 조금도 모른체..용서해다우.."
호규가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 아배..생쇼하지마. 아배도 개그가 낙제라고.."
"호구야, 토끼지 말고 너도 들어!!"
허사장이 고함치자 호규가 멈췄다.
"진짜다. 호구가 굳이 깨우쳐주지 않었어두...나도 진작에 알고 있었단다..물론 서편제 유봉이 유언 장면처럼 너는 용서도 했기에 나와 살았것지만..."
"아..아배..나 우는 건 싫어...울리지마..호규야! 대체 어케 했기에 아배가 이리 상한 거야? 네가 도대체 뭐랬기에 유언처럼 폼잡는 거냐고.."
호규가 묵묵히 소주 세병을 꺼내고 냄비를 덥히더니..
"모두 내탓이야. 내 진단엔 알콜 금단증상같아.."
잔까지 세개 챙겨 술 세병과 같이 날라와 탁자에 늘어놓았다.
"..선생님 역시 제가 너무 무리했네요..눈치 조금도 안 줄테니 다시 술 마음껏 드세요...누난 술 좀 줄였음..."
"그래..맞아. 맹세하는데 나 이제부터 너먹는 량 이상은 안먹겠어. 늙은 것도 서러운데 너보다 오래살려면"
"누군! 나도 마찬가지여. 두잔이상은 절대루!"
"암튼 아배..말이 맞아. 나 오래전에 원망 털었었어"
"조금 손해같지만..아배가 호귤 스카웃해온 공으로 퉁치는 거야. 아배..이젠 빚없어"
"오오늘이 최고의 날인디 나, 난 와이리 불안허냐..지금 이 장면은 맨끝 라스트에 나와야 될 장면 같은디..."
"울내랑 똑같지 뭐. 쾅 터트리고 앞으로 식을 일밖에 없는..."
"재..재수 옴붙는 소리! 그럴순 없어. 호규야 난 무조건 널 믿는다"
"...예..노력하지요.."
"조아따! 술은 그날로 미루마..지금 까짓 술이 문제냐"
"호규..아배 술고문하지 말고 네방에 가서 우리끼리 술 마시자"
"...아니 울내가 먼저야. 신방 치를 때 빼먹은 합환주라면 또 모를까"
벙찌는 부녀를 뒤로 하고 당차게 나가는 호규였다.
한동안 말이 없는 허사장과 날자였는데
"아배..호규..아들 삼고 싶지않아? 정말 구엽잖아"
"....태후야..느이 엄마 어디 사는지 알지? 어매가 찬성만 한다면..."
얼굴을 점점 씰룩이던 날자가 소주병을 거칠게 잡아들었다.
계속
첫댓글 즐~~~~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