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암(鐘岩)이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축하하며 감사한다. 나는 종암 제20회 졸업생 김윤권(金允權)이고
내자(內子)도 제26회 졸업생이다. 졸업한지 어연 7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종암은 언제나 어머니 품속과 같다.
따뜻함을 느낀다. 그래서 교가(校歌)의 일부인 ‘아, 종암이여 쇠북의 바위’를 글 해드라인으로 삼았다.
물론 내가 다닐 때도 교가가 있었다. 그때도 종암, 종암이 많이 들어가는 교가였는데 개사(改辭)한 지금의 교가를
보니 아주 멋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다. 7~8번 변했으니 무언들 변하지 아니한 것이 있겠는가.
내가 입학할 당시 종암의 위치는 종암동(鐘岩洞 23번지)에 있었다. 안암동에 살 때이다. 8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애기능을 지나 종암에 입학하러 갔다. 가다가 고려대학교, 당시 보성전문 본관과 도서관, 운동장이 있는 것을 봤다.
아버지께서 이곳으로 들어가시지 않고 좀 더 걸어서 1층 목조건물로 데리고 가신다. 그땐 시험이 있었다.
형식적인 절차지만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데나 어쨌다나 나는 이미 심통이 나 있었다. 가다 본 멀쩡한 학교를 두고
하필 왜 일 층 목조 작으만한 학교에 다니라고 하시나... 심통을 부리는 나를 달래시느냐고 귀가(歸家)길에 중국집
호떡을 사주시러 들어갔는데 그만 여기서 또 탈이 나버렸다. 주인이 달아주는 컵 물에 혓바닥을 데운 것이다.
주문한 호떡도 아니 먹고 하루종일 심술부리고 일언지하 (一言之下)에 학교 아니 다닌다고 했다.
이런 일들이 엊그제 일 같은데 하마 7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심술부리고 가겠다는 석조건물학교는 나중에 기어이 입학하고 졸업을 했다.
그 당시 서울 4대 문안에 들어서야 진짜 서울이다. 문밖 지역은 시골과 비슷해서 사람 인적이 드물고 논밭이 즐비했다.
내가 살던 안암동은 물론 용두동 제기동 종암동은 초가집이 많았고 학교 바로 앞길 건너도 논이었다.
홍능(洪陵)은 큰 소나무가 울창하고 현재 경동시장에서 홍릉까지 전부 논밭이었다. 밭은 시민의 채소를 공급하는 배추,
무밭이었는데 인분(人糞)을 쓰던 시절이다. 용두동 전차 정류장 앞에 성동역이 있었고 역사(驛舍)앞 광장(廣場)이 있었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가는 유일한 기동차 철도길이다. 학교 입학하기 전 아버님이 기동차 내부를 구경시켜준 기억이 난다.
1945년 8·15해방 당시 5학년이었고 서울 인구가 80만명이었다.
내가 입학하던 1941년도 학기 초는 4월 1일이다. 그해 11월에 새로 건축한 현재의 위치로 이사를 했다.
이사할 때 걸상 하나씩 머리에 이고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책상은 무거워서 상급생이 날아다 주었다.
이사 후에 알았지만, 2개 반을 창신국민학교에 위탁하다가 새로 이사한 교사(校舍)로 와서 1학년 2반(남자)
1학년 4반(여자)로 공부를 했다. 그땐 학급 인원수가 60~70명이었다. 딱딱한 유교 사상이 팽배하던 시절이라 지금같이
한 반에 남녀공학이 없었다. 남녀 7세 부동석(不同席)이 철저하다. 학교에서는 일본말, 집에서는 조선말, 동네 아이들과
조선말을 하고 놀았다.
1939년도에 제2차대전이 발발했다. 우린 고작 8살~9살인 아주 어린 나이라 전쟁의 분위기를 몰랐다.
일본이 전쟁 초기엔 하와이를 습격하고 필리핀을 점령하며 싱가포르를 함락하며 중국을 공략할 땐 어려움이 없는 줄 알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세(情勢)가 역전되어 간다. 그렇게 사수(死守)하려던 오키나와를 미군에 뺏기고 일본 본토 대도시
폭격을 연일 당한다.
4학년 때 일이다. 체육 시간에 행진 훈련을 받았다. 발목에 각반을 차고 행군을 하는데 분열 사열 모두 다했다.
나는 4학년 1반이고 일본사람 오무라(大村)선생님이 담임이다. 2반은 조선사람인 다가야마(高山)선생이 담임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담임 오무라 선생은 학습 교육은 잘하는데 교실 밖에서 하는 운동이라든지, 교련 등은 소질이 없다.
그래서 다가야마 선생에게 위탁하는 것이다. 다가야마 선생은 자기 눈에 거슬리면 가차 없이 때리고 손찌검을 하는 선생이다.
교련 시간만 되면 도살장에 들어가는 것 같아 싫었다. 왜냐하면 계모 전처 자식 학대하듯 그날 운수 나쁘면 얻어 맞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분도 한국 사람으로 일정시대 고생하는 마당에 왜 어린 학생인 우리를 몹시 때렸는지 지금도 이해가
불가(不可)하다. 학교 교육은 의당 매를 맞고 배우는 건지 알았다. 학부모도 일절 항의하는 일이 없었다.
나는 현재 절대 금지하고 있는 학생체벌에 대하여 선생님의 사랑을 전제로 ‘사랑의 매’는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 일정시대 종암 학교에서 생각나는 것은 운동장 동쪽(포도밭이 있었음)에 루스벨트와 처칠의 초상화를 널빤지에 그려놓고 일정 선에서 돌과 막대기를 던져서 맞히는 것이다. 증오심(憎惡心)을 심어주는 것이다.
잘 맞이는 학생은 선생님이 칭찬해 주었다. 그림도 망측하게 그려났지만, 사람이 아니고 짐승인 줄 알았다. 만약 미국이
패전국이 되었다면 아직도 내 뇌리에는 이분들이 짐승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어린 학생 백지상태의 뇌리에 가치관을 심어주고 각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사랑과 열정으로 학생들의 성장을
도와주시는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이다. 이렇게 막중한 일을 맡아 하시는 선생님께 고마움과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일본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어린 학생 뇌리에 각인시켜 주기 위함이 아닌가.
그때 기억나는 것 또 하나는 운동회와 학예회(學藝會)이다. 운동회는 좁은 학교 마당에서 치렀다. 학예회는 강당이 없다.
지금은 없어지고 자취가 없지만, 선농단(先農壇) 밑에 서울부속고등학교 교사와 기숙사가 있었다. 이 학교를 나온 여학생은
바로 초등학교 선생 자격이 있었다. 이 학교 강단을 빌려 학예회를 실시했다. 내자 할멈의 말을 들으면 학예회 때마다 단골로 독창(獨唱) 발표를 했다고 한다. 인터넷 카카오맵으로 선농단 모습을 보니 상전벽해(桑田碧海)도 이런 상전벽해가 없다.
주변이 온통 주택이 들어서고 선농단역사공원이라고 향나무가 보이는데 외롭기 짝이 없다.
이 향나무는 100년이 넘게 서 있는 것 같다.
또 하나. 일정시대 종암 다닐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산 신사참배이다. 토요일 선생님이 남산 신사참배를 숙제로 내준다.
월요일 갔다 온 학생 손들어 봐 첵크를 하신다. 아니 갈 수가 없다. 남대문 전차 정류장에서 비탈길을 올라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힘들다. 힘들게 올라가면 약수물이 있다. 대나무 통을 연결하여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고 큰 석조물통에 물이 철철 넘쳐
흘렀다, 신사에서 쓰는 조그만 목조 바가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편히 목을 추길 수 있게 만들었다.
아마 산 위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던 까닭에 약수물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약수물 한 목금 마시고 신사(神社) 쪽으로 가서 두 손 모아 경배하는데 나는 이번 시험 잘 보게 해달라는 주문을 한 것 같다.
주문하기 전 동전 1전(錢)짜리를 던진다. 신사 앞에1전, 5전짜리 동전이 하얗게 깔려있다. 신사에 벚꽃 나무가 많이 심어저
있다. 봄철 사꾸라 하나비(櫻 花見=벗꽃구경)한 생각이 난다.
동전(銅錢) 이야기가 나와서 유머어 한 마디. 당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교가 유일했고 동숭동에 법대, 물리대. 음대, 미술대,
길 건너 의대가 있었다. 공대는 공릉동, 농대는 수원쪽에 있었다. 그 외 전문학교로는 보성전문, 연희전문, 이화전문이 있다.
행사 때 검은 사각모와 망또를 두르고 길에 나서게 되면 이 양반들 위세(威勢)가 대단하다.
들은 이야긴데 그때도 법엔 길에 방뇨(放尿)하면 벌금 5전이다. 복장 그대로 파출소 앞에 가서 방뇨를 한다.
그리고 동전 5전을 던진다. 파출소 앞에 보초 근무하던 순경은 긴 칼을 차고 있다. 긴 칼에 전혀 굴(屈)하지 않고 당당히 자기 볼 일 다 보는 것다. 순경이 왜 방뇨하느냐 물으면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오줌을 쌀 수는 없지않느냐. 또 벌금을 내지 않했느냐.'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한 것 마냥 유유히 가버린다. 지금의 어느 누가 파출소 앞에서 오줌을 눌 수 있을까.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너무 위축되고 패기(覇氣)가 없다. 항상 당당하고 뱃심이 있었으면 좋겠다.
종암인이라면 기백(氣魄)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쥐었다 폈다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아이들의 놀이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나 어릴 적에는 동네 친구와 어울려 집 밖에서 주로 놀았다. 놀이감이 없어 땅바닥에서 하는 놀이를 했다. 자치기를 많이 한 기억이 난다.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넘기를 했다. 지금은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보기
어렵다. 밖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학원에 가 있거나 집 안에서 공부하거나 전자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과외 수업을 2~3개 받는 것이 보통이다.
저녁 7~8시 되어야 겨우 끝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불쌍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다. 공부의 노예가 된 것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상전벽해를 해도 분수가 있지 너무 변하고 달라지는 것 같다. 나 초등학교(국민학교)
다닐 때 월사금(月謝金)이 있었다. 유상교육이다. 극히 적은 숫자지만 아주 극빈자는 월사금 때문에 학교를 못 보내는 가정도 있었다. 지금은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지 않는가. 얼마나 발전하고 좋은 일인가.
나 나름대로 종암 다닐 때 추억을 더듬어 글을 썼다. 장님 코끼리 만져 보듯 한 것 같다. 나보다 선배가 있어 소상하게 당시를
설명해줄 분이 있었으면 좋겠다만, 그럴 어른이 안 계실 것 같아 기대하기 어렵다.
생각건대, 추억할 과거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때가 그립다. 가끔은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끝으로 우렁차게 교가를 불러본다.
서울이라 동역은 맑은 하늘에/ 우 뚝 솟은 배움집 우리 종암은/ 굳세고 아름다운 대한의 꽃이/ 한마당 가득가득 자라납니다/ 아 아, 종암이여 쇠북의 바위/ 세계를 깨우치는 정의의 쇠북/ 종암은 이 쇠북의 근원되오리/ 종암 종암 즐거운 종암/
우리의 어머니 즐거운 종암.
아 아, 종암이여 쇠북의 바위! 영원 하라! 종암 이여!
첫댓글
글을 올린 사유를 좀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서울 종암초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제가 20회 졸업생이고 내자가 26회 졸업생입니다.
100주년을 맞아 ‘행사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다양한 프로크램을 만듭니다.
사진 전시회, 당일(7월 8일) 축하 모임 행사, 100년사 책자 제작 등등.
‘행사추진위원회“에서 제가 ’에세이스트‘카페에 글을 올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의 모습, 그때의 일 등 기억 나는 대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사양했으나 몇 번의 부탁으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100년사 책자를 만드는데 ’에세이스트‘카페가 중간 역할을 한 셈입니다.
종암을 나온 사람이 4만5천명이 됩니다.
우리 카폐 회원 중에 종암 출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참고하시라고 졸필(拙筆)을 올립니다.
뜰앞에 한강물은 언제나 맑고
삼각산 슬기로운 정기를 받아
무궁화 피고 피는 향기로운 곳
그렇다 우리들은 본동어린이~~~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본동국민학교는 1948년에 개교하여 2022년 현재 74회를 달리고 있고
저는 18회 졸업생이며 잊혀지지 않는 교가입니다.
올리신 글에 심쿵하여 회상해 봅니다.
씩씩하던 그 본동어린이가 야들 새들 시들어가고 있는
바람 빠져가는 풍선같음에 심호흡으로나마 뺑뺑하게 부풀려 보며...ㅎㅎㅎ
강건하심보다 더 부러운것은
건전한 사고를 지니시고 도포자락 휘날리듯이, 활기차게 전진하는 모습입니다.
배우며 따르렵니다.
위연실선생님 감사합니다.
누구나 초등학교 생활 과정이 있었을겁니다.
이쯤, 동심으로 돌아가 옛 추억을 한 번쯤 더듬어 보시면 어떨까요? - 강추합니다.
엊그제 종암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가 강남 신사동 소재 ‘보코호텔’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우리 내외가 초대받아 다녀왔습니다. 행사 당일 장맛비가 억수로 쏟아진다는 일기예보가 있어
가기 전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마쳐 입장하니 120여명의 동창이 모였습니다. 우리를 제일 앞줄 중앙 테이블로 안내합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나보다 선배가 계신지 여부(與否)를 물어 봤습니다.
선배가 계시면 우선 그분께 인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안 계시다고 그래요.
20회 졸업생인 제가 26회 졸업생인 내자(內子)가 제일 윗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두 극진한 대접을 우리 내외에 해주어 오히려 송구스러어 했습니다.
우리 내외가 종암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행사 시작 6시부터 9시까지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갖았습니다.
장장 3시간 동안 박수(拍手) 치느랴 손바닥이 아팠습니다.
귀가(歸家)하니 밤 11시경이 되었습니다.
김윤권 선생님.
종암 개교 100주년 축하 올립니다.
기념비적인 글을 쓰셨네요.
저보다 앞서신 선생님의 발자국을 따라 어린날 서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귀한글 정독하였습니다.
종암 백주년 기념행사에 동참한 듯 하네요.
선생님 건강을기원합니다.
네, 노순희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도 행사에 참석해서 알았습니다.
‘鐘岩 100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꿈꾼다’ 슬로건을 내걸고 후배들이 뜁니다.
제가 20회 졸업인데 50회 전후 후배들이 단합하여 행사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후배들이라고 느꼈습니다.
여러 가지 행사 아이템 가운데 100년사 책자를 만든 것이 있습니다.
몇 부나 발행했는지 모르나 439페이지 두툼한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서울 시내 초등학교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합니다.
저도 축하 글을 써주어 책자 제작에 일조(一助)한듯하여 부듯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