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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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초기 기독교의용대의 창설과정(上)
1. 김병섭의 증언
* 이 녹취록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기독교 청년들로 구성된 부대(기독교의용대)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김병섭과의 인터뷰 중 의용대와 관련된 부분만을 정리한 것이다. 이 녹취록은 기독교의용대 창설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독교의용대는 1950년 7월 4일 한경직 목사 등 교회 지도자들이 대전제일장로교회에서 결성한 대한기독교구국회의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김병섭은 기독교의용대 대장을 맡았는데 부대 창설이 여의치 않자 대원 모집 두 달 만에 의용대를 해산하고 대원들을 미군부대와 육군통신부대에 연결시켜 주었다. 6·25전쟁에 기독교의용대가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원들이 의용대 해산 후 다른 부대에 입대해서 참전한 것이므로 기독교의용대가 참전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용대는 정식 부대로 조직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한국군의 역사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인터뷰는 미국 시애틀의 김병섭 자택에서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2003년 8월 15일 1회, 8월 16일 1회) 인터뷰에는 당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한성대 윤경로 교수)과 임원들(목원대 김흥수 교수/연세대 서정민 교수/서강대 최기영 교수)이 참여했다. 김병섭은 1916년생으로 인터뷰 당시 87세의 고령이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녹취록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은 일부 생략했다. 김병섭은 인터뷰가 있은 후 9월 21일 시애틀에서 서거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이 인터뷰를 위해 여비 일부를 지원했다.
이 녹취록은 목원대학교 신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신학과 현장」 제26집(2016): 215-240에 실린 것인데, 학술논문 웹사이트에서 검색되지 않아 여기에 요약 게재한다.-편집자
서정민 워싱턴주 시애틀 김병섭 장로님 자택에서 윤경로 교수님, 김흥수 교수님, 최기영 교수님, 그리고 저 서정민이 함께 증언을 듣겠습니다. 날짜는 2003년 8월 15일 오후입니다.
윤경로 장로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참 영광이고 반갑습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의미 있는 날, 이렇게 멀리 시애틀에 계신 장로님을 서울에서 찾아와서, 저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역사 증언을 할 수 있는 이런 귀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을 하나님과 그리고 장로님께 감사드리면서 이제 좀 여러 가지 역사적인 증언들, 이런 것들을 아주 솔직하고 좀 역사화할 수 있는 그런 바른 증언을 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저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는 윤경로 교수라고 합니다. 저희가 장로님께 여러 가지를 여쭤보고 싶은데, 우선 장로님이 올해 여든일곱 되시죠? 그러니까 1916년생이 되시네요.
김병섭 10월 10일, 예.
윤경로 그 생애가 한국 100년의 질곡과 형극의 시대를 다 살아오셨는데, 아마 장로님의 증언을 잘 정리하면 바로 한국의 현대사가 정리되고,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한 번,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번 기회에 털어놓으시고 잘 정리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흥수 장로님, 47년 8월에 월남하시고 나서 서울에 계셨던 거죠? 서울에 계셨다가 6·25 전쟁은 어디서 겪으셨어요?
김병섭 서울서. 피난 갔는데, 우선 수원 간 거예요. 수원 가서 하루 있다가 대전을 간 거지. 대전 가서 한경직 목사 중심으로 ‘기독구국회’를 만들었습니다.
김흥수 7월 초순경이겠네요. 대전 가신 게. 7월 초순에 어디를 가서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셨어요?
김병섭 제일장로교회, 그때 김만제 목사가 했지요.
김흥수 그 교회에 가셨더니 한경직 목사님도 계셨다고요?
김병섭 우리가 모여 가지고 그래서 만들자.
김흥수 서울에서 내려오신 목사님들 하고 해서 그때 만든 게 대한기독교구국회죠?
김병섭 만들었는데, 또 밀고 내려오니까 대구 가서 완전히 결속한 거예요.
김흥수 대구 가기 전에 대전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만들자는 말을 누가 먼저 하셨나요?
김병섭 한경직 목사님.
김흥수 기독교구국회를 만들어서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까?
김병섭 예, 있었어요. 우리가 이제 전쟁을 돕자. 무슨 일이든지 돕자. 그러고 피난민 자꾸 내려오니까 구호사업을 했어. 또 선무공작, 나가서 강연도 하고 그랬죠.
김흥수 무슨 강연을 하셨나요?
김병섭 선무 강연.
김흥수 그러니까 전쟁을 돕자?
김병섭 돕고, 이제 거 UN군은 경찰군이다, 공산당은 도둑놈이다.[경찰은 법이나 질서를 어겼거나 어긴 혐의를 받는 사람을 상대한다. 미국과 유엔은 유엔의 군사작전을 경찰행동(police action)이나 경찰조치(police measure)로 보았는데, 이것은 북한의 남침이 국제질서의 위반이라는 것을 전제한 것이었다. 김병섭은 이 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김흥수 주]
김흥수 도둑놈을 잡기 위해서,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UN이 들어왔다는 말이죠?
김병섭 예, 예.
김흥수 그러니까 군사작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하러 왔다.
김병섭 그렇게 한 거예요.
김흥수 그런 말씀을 가두, 길거리에서 강연을 하고, 목사님들이?
김병섭 그게 선무공작이라. 그다음에 지금 말한 기독교 십자군을 만들자.
김흥수 그 얘기도 대전에서부터 나왔다고 하셨죠?
김병섭 아, 네, 그렇습니다. 구국회 목적이 선무공작과 십자군, 병사를 모집해서 우리가 싸우자 이거지.
김흥수 우리가, 지금 기독교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서 싸우자 그런 얘기일 덴데, 어느 분이 그런 말씀을 먼저 하셨어요?
김병섭 한경직 목사님하고 저하고 둘이서. 그때 내가 (장로교청년회)전국연합회 회장이니까. 또 한경직 목사와 가깝고, 둘이 한 거지.
김흥수 그때는 청년들이 군대에, 막 전쟁이 났으니까 들어가야 될 텐데.
김병섭 밤에 차출해 나가는 거예요. 밤에 와서 다 데리고 나가고.
김흥수 데리고 나가고, 안 가려고 하니까 잡아도 가고?
김병섭 그런데 그때 급하니까 한 주일 정도 (훈련)하고 나간 거지. 나갔는데 소모품이야, 소모품. 뭐 신병들이니까. 그래서 이제 한경직 목사님하고 의논해 가지고 우리도 나가자. 그래가지고 군대 조직하자. 그래서 십자군, 이름이 십자군이야. 그래서 의논해 가지고 한경직 목사님하고 나하고 그때 국방부 차관 장경근 씨가 있었어요.
김흥수 그럼 장경근 씨를 대전에서 만났다는 말씀이십니까?
김병섭 아니, 대구서.
김흥수 아, 그러니까 대전에서는 기독교의용대를 만들자 얘기만 하고 일단 후퇴를 대구로 하셨다고요? 그때 대구에 가서 기독교의용대 만드는 작업을 구체적으로 하시는데요, 대구에 가서 장경근 차관을 만나셨다는 거지요? 근데 왜 그분을 만나셨나요? 사전에 그분을 알고 있었나요?
김병섭 사전에 알고 있었지. 그분이 신의주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한경직 목사님 잘 아니까. 그래서 둘이 갔지요. 가니까 장경근 차관이 명함을 써줬어요. 이제 한경직 목사님과 김병섭 소개합니다. 누군고 하니 그때 작전 교육국장이 강문봉 대령이야. 그분이 나중에 육군 중장까지 했지요. 교육과장이 임용재 소령인데 그 사람 육군 소장까지 했습니다. 찾아가서 명함을 주니까 장 차관이니까, 육군 대령인데, 강 대령이 보더니 “우리 십자군 합시다. 십자군 합시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도 말했지만, 우리 말하기 전에 강 대령이, 작전교육국장이 “십자군 합시다” 한 거예요. “합시다.”
김흥수 강문봉 대령을 만났더니, 한경직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십자군 만들잔 얘기도 안 했는데, 강 대령이 먼저 “십자군 만듭시다”는 얘기 하셨단 말이죠?
김병섭 네네. 우리는 군대 만들라고 했으니까. 돌아와서 준비할라고 했는데 또 오라는 연락이 왔어요. 강문봉 대령이. 하는 말이 “지금 육군이 있다. 육군이 있는데 십자군 하면 군이 둘이 된다. 하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기독의용대로 하라.”
김흥수 십자군이란 용어를 쓰지 말고 기독의용대라는 이름으로 병사들을 모집하라고 했단 말이죠?
김병섭 네네. 그래 가지고서 삼천 명, 증명서를 교부했어요. 그거 가진 사람은 못잡아 가니까.
김흥수 그러면 삼천 장 정도의 의용대 신분증을 발행하셨단 말이죠? 그때 크기는 얼마나 했어요? 명함만 했어요?
김병섭 명함보다 조금 커요.
김흥수 그럼 기억나세요? 기독교의용대 뭐라고 썼을 거 아니에요?
김병섭 아, 예, 당연하죠. 이름 쓰고 “위 사람은 기독교의용대원임”이라 그래 쓴 거예요.
김흥수 그렇게 하고 도장 하나 찍고요?
김병섭 도장, 육군대령 강문봉.
김흥수 왜 삼천 명을 기준으로 하셨나요?
김병섭 그때 제가 볼 때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에 청년들이 전국적으로 한 삼천 명이 될 것이다. 그걸 기준한 거예요.
김흥수 당시 군대 조직도 연대가 되려면 삼천 명이었다고 하던데요?
김병섭 그래서 연대를 만들어야겠는데, 그래 삼천 명을 받은 거예요.
김흥수 그러니까 강문봉 대령이 장로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보자고 그래서 하신 말씀이 이미 군이 있으니까 십자군은 적절한 용어가 아니니까 기독교의용대라는 이름으로 모집을 좀 하는 것이 좋겠다. 또 다른 뭐가 있었습니까? 군대를 만드는데 또 뭐가 필요하다거나?
김병섭 필요한 건 군대는 훈련이 필요하잖아요? 군수품, 식량이라든지 또는 뭐 무기, 그걸 다 받아야 되잖아요? 그걸 육군본부에서 대주기로 한 거지. 식량도 대주고 무기도 공급한다.
김흥수 모집을 하면 그런 식량, 복장, 무기 같은 것을 군에서 책임을.
김병섭 책임지고 교육은 자기네가 하겠다.
김흥수 그 정도 얘기를 다시 하신 거죠?
김병섭 네, 지원 문제만 뭐 얘기가 된 거지.
김흥수 대구에 내려가셨잖아요? 대구에 내려가서 장 차관이나 강 대령 만나기 전에 어디로 가셨어요? 대구YMCA로 먼저 가셨나요?
김병섭 그럼!
김흥수 YMCA 가서 대전에서 만든 대한기독교구국회 사무실을 거기다 차린 건가요?
김병섭 예, 예, 맞습니다.
김흥수 그러면 대구에 오시자마자 대구YMCA에 찾아갔는데 거기 아는 분이 있었어요?
김병섭 YMCA 총무가 이원우 목사라고 있었어요. 그분이 내 본교회, 장수원 평양 본교회 전도사로 있었어요. 신학하면서 그땐 조사야. 전도사, 조사로 있었어요.
김흥수 그럼 장로님이 아셨군요. 찾아가셔서 방 하나 달라?
김병섭 아니, 이 사무실 쓰려고 왔다.
김흥수 사무실 하나가 필요하다.
김병섭 이층으로, 아래위 층으로 있었거든. 하니까 쾌히 승낙하고, 또 나도 나지만은 인간적인 면에서 한경직 목사도 중요한 분이니까 구국회도 거기서 다 하자, 그렇게 된 거예요.
김흥수 대구YMCA에다가 구국회 사무실을 하나 얻어서 일을 시작하기로 하고 맨 먼저 장 차관을 만나러 갔고 그렇게 해서 강 대령을 만나게 된 거구먼요?
김병섭 네네.
김흥수 강 대령을 만나서 그런 얘기를 하고 난 다음에 기독교의용대를 만들기로 했는데 어떻게 광고를 하셨어요?
김병섭 에, 벽보 붙였지요. 벽보를 각 교회마다 또 거리에 붙였어요.
김흥수 그 포스터를 만들고 교회에 붙이는 것은 어느 분들이 하셨어요?
김병섭 청년들이 하지, 있으니까.
김흥수 도와주는 청년들이 있어서? 그러면 그 벽보를 그러니까 포스터죠? 그걸 주로 어디에 붙이셨어요? 어느 교회? 대구 시내의 교회만?
김병섭 대구 시내의 교회하고 거리에다가.
김흥수 제가 지난번 대구에 가서 기독교의용대 출신 분들 말씀을 듣다 보니까 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피난을 갔는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광고하시기를 기독교의용대를 모집한다고 하더라 대구 서문교회에서, 그래서 왔다고 해요.
김병섭 물론, 그러니까 YMCA에 피난 목사도 오셨지만은 또 시골 목사님 많이 왔으니까. 영남지방에 있는 목사들이 많이 왔으니까.
김흥수 대구YMCA 사무실에, 구국회 사무실에? 그분들이 기독교의용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자 교회에 가서 광고를 하신 거로군요?
김병섭 그렇습니다.
김흥수 그럼 광고를 하니까 젊은 청년들이 모였을 텐데 어디로 모이라고 하셨을 거 아니에요? 서문교회로 모이라고 하셨습니까?
김병섭 아니, YMCA 와가지고 그다음에 조직적으로 병사, 병영이지. 병영을 대구 제일교회, 남산교회, 서문교회, 세 교회 지하, 지하실을 병영으로 쓰기로 허락받고.
김흥수 그러면 기독교의용대 지원생들이 대구YMCA 사무실로 먼저 왔구먼요?
김병섭 그렇습니다.
김흥수 와서 지원서를 썼습니까? 아니면 그냥?
김병섭 아니, 즉석에서,
김흥수 아, 아, 즉석에서 지원서를 썼습니까?
김병섭 신분증 받지.
김흥수 그럼 직접 그 자리에서 기독교 의용대증을 그 자리에서 만들어 주고 너는 어디로 가라고 하셨군요?
김병섭 으응.
김흥수 대구에 가서 기독교의용대를 모집하기 시작한 날짜가 언제쯤 될까요?
김병섭 7월 중순께.
김흥수 7월 중순부터 언제까지 이 의용대 분들을 모집하셨어요?
김병섭 한 보름 동안 했어요. 그래가지고 이제 식량은 육군본부에서 배급해 주고 우리가 그 예비역 우리 기독청년 가운데 예비역 장성이 있었으니까, 그분들이 도수훈련, 도수훈련 하게 됐어요. 연병장은 계성학교 교정이에요. 거 아침 기상해가지고, 그래가지고 거기에서 이제 우리 군가 의용대가를 찬송가 “십자가 군병들아” 그걸 군가로 제정했어요. “십자가 군병들아” 그래가지고 이제 그거 부르고 기도하고 훈련 착수했어요.
김흥수 그러니까 제식훈련 정도를 하신 거죠? 무기도 아직 지급받지 못하고 복장도 못하고 평상시에 입었던 옷 입고 제식훈련도 좀 하고 달리기도 하고 기도회도 좀 하고, 그렇게 하셨구먼요. 그 당시 의용대에 오는 사람들이 나이가 어느 정도?
김병섭 나이가 뭐 고등학생도 있고 중학생도 있고 암만 많아도 30 이후로는 없고, 다 미만.
김흥수 그래서 대구에서 모집한 의용대가 숫자가 어느 정도 됐나요?
김병섭 삼천 명 가까이 됐어요.
김흥수 삼천 명 가까이. 그럼 그게 서문교회, 남산교회 이런 교회에서 삼천 명이 다 수용이 되나요?
김병섭 아니, 저 대구 제일교회.
김흥수 대구에 있는 사람들은 집에서 왔다 갔다 했을 테고.
김병섭 그렇지.
김흥수 객지에서 온 사람들은 교회에서 자면서 숙식을 하고.
김병섭 응 그렇지.
김흥수 그럼 삼천 명을 한 2주 동안 모집을 하셔가지고 그때 국방부에서는, 우리가 이 정도 모집했는데, 뭐 어떻게 해라 하는 말이 없었어요?
김병섭 식량만 주고, 그때 제식훈련을 20일은 해야 한다, 최소한도. 그거 해라. 그거 마치면은 우리가 장교로 나가서 집총훈련 시키겠다. 그거 열심히 했는데, 하루아침에, 제가 아까 말씀한대로 포탄이, 박격 포탄이 영천에 떨어지고 하니까 미군도 다 후퇴하고 흑인부대만 남았어요. 그러고 우리와 연락 없이 육군 국방부가 다 부산으로 후퇴를 한 거예요. 하루아침에, 하룻밤 사이에, 다 가버렸어요. 육군본부. 그때 국민학교에 있었는데, 갔는데 가니까 그때 내무장관 조병욱 박사가 왔어요. 내무장관인데, 내가 마침 가고 조 박사가 거기로 온 거라. 나는 섰는데 조 박사가 그, 저… 연락병보고 “장관 어디 가셨냐?” 그때 국방부 장관이 신성모야. “어디 가셨냐?” “어제 후퇴했습니다.” “어디로?” “부산으로.” “그래? 갔어?” “뭐요? 갔어요?” 하루아침에 다 간 거라. 밤새 다 갔어요. 갔는데, 근데 이제, 그 이틀 아침에 갔다 와가지고 거 허탈하지 않아요? 제일교회 뒤에 여관이 있었는데 한경직 목사님이 거기 계셨거든요. 가실 때 가신 줄 알았어. “목사님, 왜 안 가셨습니까?” “내가 어디로 가? 내가 어딜 가. 같이 죽자.” 죽을려고 한 거지. 그때 (기독교의용대) 고문이 한경직 목사고.
김흥수 대구에서 조직도 만드신 거죠?
김병섭 네. 완전히 연대 조직을 한 거죠. 대대장, 소대장, 연대장. 고문은 한경직 목사. 대장은 내가 됐고 부대장이 황금찬 목사, 부대장이고, 그다음에 이제 훈련은 필요일 목사라고, 볼티모어에서 목사님으로 계시는 함경도 분이에요. 또 부관에 안병국 목사하고 또 우리 맏처남 홍성민. 그다음에 박치순 목사하고 또 손주환 목사가 군종과.
김흥수 삼천 명 가까이 모이는데 이렇게 불과 십여 명 내외로 어떻게 그걸 조직을.
김병섭 아, 그런데 학생들 중에 대대장, 연대장, 중대장까지 다 했으니까.
김흥수 학생들도 다 조직을 했단 말이죠?
김병섭 예, 그러니까 대장이 있고, 대대장, 중대장, 분대장까지 임명을 했으니까. 학생들.
김흥수 그때 지금 기억하시기에 삼천 명 모인 사람들 중에 지금 기억에 남는 분도 있나요? 나중에 목사가 됐다거나? 한국교회 지도자가 된 분.(한국YMCA전국연맹 전 총무 강문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 총무 김소영도 기독교의용대 출신이다.-김흥수)
김병섭 다 기억이 안 나고, 여기에 정연발 목사라고 있어. 정연발, 그분이 나하고 한 번 만나서 “저 모르시겠습니까? 저 십자군입니다” 말씀하는 거예요.
다 부산으로 갔고, 이제 그 계성학교 훈련장에다가 다 (대원을) 모아놓은 거지. 전부를. 다 모았지. 육군본부 작전교육부 한 소령이 나와 얘기하고 마지막 기도를 한경직 목사님이 마지막 기도를 하신 거예요. 비장함이 있었지. 내가 이제 대장으로서 훈시지. 이제부터는 다 갔다. 육본도 가고, 또 군본도 갔다. 우리만 남았다. 우리는 여기서 사수하자. 그래서 다 흩어져서 제각기 도끼, 창, 죽창, 낫, 전부 가지고 오너라. 우리가 여기서 참호 파가지고 여기서 죽자. 그래서 이제 다 흩어져가지고 다 한거라. 오후에 육군 작전교육국장이 특별열차를 차출해 버렸어. 특별열차 3량을 보낸 거야. 거기에 다 분승하고, 분승해서 부산 서면으로 후퇴한 거지.
김흥수 그러면 기차 한 량에 사람이 얼마나 탈 수 있어요?
서정민 한 백 명정도?
김흥수 그렇다면 삼천 명 정도 되는데.
김병섭 계속해서 왔으니까.
김흥수 아, 맨 처음에는 삼량, 또 왔다 갔다 했다?
김병섭 왔다 갔다 했지. 서면 우시장.
김흥수 우시장에, 서면? 우시장이라는 게 뭔가요?
최기영 소시장.
김병섭 그렇지. 다 몰아넣었지.
김흥수 우시장이 굉장히 컸던 것 같네요. 거기 2-3천 명이 들어가려면.
김병섭 네, 컸어요. 아주 컸어요. 그래 뭐, 말이 아니지 말이 아니야.
김흥수 그 사람들이 다 갔습니까? 중간에 뭐 안 간 사람도 있고.
김병섭 도중에 하차한 사람도 있어요. 아마 뭐 몇백 명 될 거예요. 난 안 간다.
김흥수 그렇죠. 그 당시에 통제도 제대로 없을 때니까.
김병섭 그래, 그래.
최기영 그럼 무기를 가져오라. 무기가 될 만한 것을 가져오라 내보낸 다음에.
김병섭 그렇지. 안 온 사람이 많아.
최기영 안 온 사람이 많겠죠. 그러면 아침에 내보냈으면 기차는 어디에 서는 겁니까? 육본에서 보내주는 기차는? 몇 시까지 들어오라고 얘기를 하셨을 거 아니예요?
김병섭 오후까지 다 들어오라고 했지. 작별인사 하고, 가서 다 죽으니까. 빨리 인사해라.
김흥수 그러면 부산으로 가게 되는 시간이, 일시가, 7월 말경?
김병섭 7월 말경, 그때, 예.
김흥수 그럼 대구에 오셔서 대구에 계신 것이 2주 3주 정도 되시네요.
김병섭 그렇지. 3주
김흥수 그때 교회는 어디, 나가신 교회는?
김병섭 제일교회.
서정민 그때 전선은 낙동강 전선 쭉 내려왔죠?
김병섭 내려오고, 예.
김흥수 그때 대구에 명신홍 목사님이 계셨다는데.
김병섭 서문교회.
김흥수 서문교회에 명신홍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당시는 없었죠? 안 계셨죠? 제가 대구에 가서 그 당시 전도사로 일했던 목사님을 뵈었더니 명신홍 목사님이 집안일인가 뭘로 전쟁 나기 직전에 어디 출타를 하셨대요. 서울인지 평양을 가셔서 전쟁이 나는 바람에 못 오시고 그해 가을에 돌아오셨다고.
김병섭 그런 거 같아. 그 주보를 보니까 생각이 나는데, 그 주보를 그 저 김주호 장로가 썼어. 서문교회 주보를. 김주호 장로라고. 김주호 장로가 쓴 게 생각나누먼. 안 계셔서, 담임목사 있었는데, 어디 가셨던 모양이야.
김흥수 그럼 부산에 가서, 우시장에 그 병사들 어떻게 하셨어요?
김병섭 간 다음에 그때 마침 트루먼 대통령의 종교고문 닥터 폴링, 그 사람이 세계CE(기독청년면려회)연맹 총재야. 그분이 이제 트루먼 대통령 종교고문 자격으로 온 거예요. 왔는데 그 폴링 박사가 8군 군종감을 대동하고 우리한테 온 거예요. 와서 이제, 왔는데, 군종감이 그때 대령이야. 대령하고 이제 폴링 박사가 와서, 폴링 박사가 이제 훈시라고 할까? 강연을 하는데 통역을 한(경직) 목사님이 했어요. 그러구 그 길로 나와 한목사를 대동하고 8군 사령관, 워커 사령관을 만난 거야, 폴링 박사가.
김흥수 그때 훈시는 뭐라고 했는지 혹시 기억나세요? 폴링 박사가?
김병섭 폴링 박사가, 훈시가 뭐인가 하니, “당신들은 십자가 정예군이다.” “십자군의 정병이다.” 정예병, 정병이다. 하니까 믿음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을 해라. 몇 마디 했어요. 거 유명한 말이에요. 십자군 너희는 정병이다, 믿음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라.
김흥수 그거 끝난 다음에 한경직 목사님과 장로님을 모시고 워커 사령관에게 갔다는 말이죠?
김병섭 가서 워커 사령관에게 하는 말이 “이거 귀한 청년들이다. 하니까 잘 보전해 달라, 보전해 달라.” 그런 얘기 한 거예요. 하니까 이제 워커가 “That’s all right.” 약속한 거예요. 거기 돌아왔는데, 육군본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연락이 왔는데, 8군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미 8군에서, 이 사람들은 말이야, 이 사람들을 보호해야 되겠는데, 상부의 지시다. 상부의 지시가 삼천포 가라고 그랬다. 그래서 하는 말이 육군본부에 병록처리, 병록처리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생명을 보전하느냐? 그러니까 통신학교, 통신병, 그때 이제 통신감이 육군 준장인데 그 사람이 바로 면려청년회 총무하던 분이야, 평양에서.
김흥수 아, 조?
김병섭 조응천 박사, 통신감이에요, 육군 준장으로.
최기영 조응천 장군은 6·25 전에 육사특위 특별반을 만들어서 사회 유명인사들을 대령, 중령 해서 진급시켰는데?
김병섭 저, 저, 군정 때, 미 군정 때, 조 박사가 통역관(통역감?)을 했어. 경무부에. 그 관계 땜에 된 거야.
최기영 그 사람 전공이 그거니까. 미국에서 그거 공부한 사람이니까.
김병섭 조 박사 평양에서 난 회장이고, 그는 총무니까, “김 장로, 700명 달라”고 그래.
김흥수 삼천 명 중에서.
최기영 그땐 삼천 명이 아니지.
김흥수 좀 떨어졌지.
김병섭 떨어졌으니까 한 이천 명 되지. 그렇게 “달라. 그러면 잘 하겠다” 그러니까 줬지. 그다음에 또 카츄사(카투사), 그것도 한 5, 6백 명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김흥수 카츄사가 이게 지금은 카츄사지만 미군이 관할했으니까 병력을 달라고 했겠지. 한국사람을 미국부대에 쓸 사람을 달라고 하는 거겠지. 지금 말로는 카츄사지만, 그때 당시는.
최기영 그 당시는 카츄사가 아니고,
김병섭 아, 그래. 그래서 준 거예요.
김흥수 그러면 군대를, 누구는 통신부대 보내고 누구는 미군부대 보내고 어떻게 그 기준을 정해서?
김병섭 기준은 뭐, 본인들의 지망에 따라서. 그리고 또 제대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러니까 내가 구제한 것은 아마 천오백 명가량 될 거예요.
김흥수 그러면 강문봉 대령은 대구에서 접촉하시고 부산에 있을 때는 국방부하고 연락하고 뭐 하는데, 강문봉 대령하고는 관련 없이 했어요?
김병섭 뭐 늘 식량 주고.
최기영 강문봉 대령은 그때 작전국장이었는데, 그 사람이 대기 발령 났어요. 미국 유학, 원래는 6월 말에 미국에 유학을 가기로 되어 있었죠. 그러나 전쟁이 나서. 그래서 작전국장을 다시 맡아.
김병섭 부산에 내려와서도 식량, 그건 국방부에서 보조를 받고, 군 본부에서.
김흥수 훈련 같은 건 여전히 제대로 못 받고, 그런 과정인데 한쪽은 미군부대 쪽으로 가고 일부는 통신학교로 가게 됐다고 그러셨죠? 자 그러면 기독교의용대라는 조직이 병사들이 다 이리저리 흩어졌으니까 기독교의용대가 해산이 된 거나 마찬가지지요?
김병섭 그럼.
김흥수 그러면 지금 임원들도 있고 한데 다 부대로 보내고 나서 장로님하고 남아 있던?
김병섭 간부들은 다 자기 갈 길 갔죠. 다 목사가 되고, 이제 안병국도 목사가 됐고, 필요일도.
최기영 아, 그때 목사가 아니셨군요.
김병섭 거의가 목사가 됐지.
김흥수 부산에 남아계신 분도 계시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신 분도 계시겠군요. 그때가 그럼 8월달입니까?
김병섭 8월. 나는 올라올 때 9.28.
서정민 서울이 수복됐죠.
김병섭 서울에서 바로 평양에 갔으니까.
서정민 그 한경직 목사님 가실 때에? 그때?
김흥수 그러면 부산에서 9월경에는, 아, 서울 수복되고 올라오셨겠네요?
김병섭 근데, 하나 알 것은 그 가운데에 이제 지금 말씀한 대로 그 1,500명 가운데는 목사도 많이 있어요. 또 황금찬 목사는 바로 군목으로 들어가서 이제 (예장)총회장까지 하지 않았어요?
서정민 그렇습니다.
김병섭 그러는데, 대개 서울 거리를 가다 보면 내게 경례 붙이는 거야. “제가 십자군이에요.” 존경받아. 서울가면 존경받는데, 개중에는 불평하는 사람도 있어. “왜 우릴 이렇게 했느냐?” 그런데 나는 말이에요. 그 삼천 명 가까운 사람이 그 신분증을 가지고 안나갔드랬어. 전쟁에.
최기영 아, 그때 막 잡아서 데려갈 땐데.
김병섭 그래. 그때 그 사람들 생명보장 했다 그거야. 그런데 거기에 폴링 박사, 미8군 군종감, 우리 한경직 목사 등등이 협력했거든. 그래서 나는 간접적으로 우리 몇 사람이 아까운 청년들을 보존했다. 그러고 다 이제 교회 지도자가 됐어요. 그러니까 만족감을 가지고 있지. 살고 있는데, 그 결과가 말이에요? 한경직 목사님은 아까도 말씀했지만 한 목사님 말이야 기독교백년사에 (기독교의용대 이야기를) 꼭 넣자고 하는 걸, 내 생각에 “뭐 그런 거 하시냐고?”
서정민 하나만 더 궁금해서 여쭤보면요, 그 십자군에 가담했던 청년들이 그때 분위기상 십자군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예를 들어 징병된다거나 군대에 징집이 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까? 그러니까 청년들 중에는 그렇게 징집되느니 차라리 십자군에 들어오겠다 이렇게 오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김병섭 물론, 물론이요. 그렇습니다. 생명보존책으로, 군대 안 나가니까. 증명서 때문에 안 나가니까.
서정민 그런 면이 있었구나.
김병섭 아, 그럼.
서정민 그리고 아까 황금찬 목사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 그 어간의 기독교 역사에서 한국전쟁 관련해서 굉장히 중요한 항목으로 우리가 다루는 것이 군종제도, 군목제도 거든요? 나중에 박치순 목사님도 군종감을 지내시고 황금찬 목사님도 활약하셨고. 김형도 목사라든가 군목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하고 십자군과의 관계는 개인적인 관계 말고는 특별히 없습니까?
김병섭 저 김형도 목사는 우리 동창이니까.
서정민 아, 그러시군요.
김병섭 그리고 또 누구요?
서정민 그 박치순 목사는 십자군이었고? 황금찬 목사도 그랬고. 그러면 군종하고 아주 깊은 관련이 있네요?
김병섭 내 생각인데, 잘 모르지만은 군종제도를 한경직 목사님이.
서정민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승만 박사에게 건의했고 그게 그렇게 됐구요. 그리고 또 하나가 뵐켈(옥호열) 선교사라고 면려 청년회 운동을 많이 지원하시고, 특히 포로선교, 거제도 활동을 하신 걸 아실 텐데 포로선교하고 십자군하고 연관 같은 것은 없습니까?
김병섭 없습니다.
김흥수 장로님, 십자군에 관련된 사진이나 무슨 문서 같은 거 혹시 남은 거 있습니까?
김병섭 전혀 없어요.
김흥수 누가 그때 사진 찍었을 텐데.
김병섭 찍었죠.
김흥수 그때 천주교에서도 삼천 명을 모아서 기독교의용대 이런 비슷한 것을 만들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했어요. 혹시 그런 얘기 들으셨어요? 천주교에서도 그런 것을 만들려고 했었다.
김병섭 못 들었어요.
김흥수 대전에서부터 기독교의용대를 만들자는 얘기가 시작되어서 부산에서 해산하는 말씀까지 해주셨는데 그러니까 7월 초에 시작됐으니까 거의 두 달 정도 존속을 했는데 지금까지 하신 얘기 말고 더 조금 생각나시는 말씀이나, 더 들려주고 싶은 말씀, 기독교의용대와 관련해서. 저 공식 이름이?
김병섭 기독교의용대.
김흥수 기독교의용대. 십자군이라는 별칭이.
김병섭 별칭이 일명 십자군, 기독교의용대. 지금 말씀한 대로 강문봉 씨가 제안한 겁니다.
김흥수 혹시 강문봉 씨 기록에?
김병섭 없어요.
김흥수 혹시 장로님 그때 이런 생각은 안 하셨어요? 지금 동족 간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이 싸움을 좀 말려야 되는 게 아니냐? 혹시 기독교의용대를 조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나 혹 장로님은 그런 생각 못 하셨어요?
김병섭 그 당시에는 이것은 대천지 원수니까. 생명 걸고 싸우는 거니까. 그건 투쟁이야. 이론 투쟁이 아니고 육탄전해서 죽여야겠다 그거지. 그러니까 끝나고 그 사람들은 일정시대에는 일본 놈들한테 박해받았고, 학생 때, 해방 후에는 공산당에게 박해받았고 … 근본적으로 말이야 사상적으로 60년대에 유신론 아니예요? 그거 원망할 사람 없지? 그런데 그 후에 기독교 반공연맹 만들었어. 만들어 가지고 이제 내가 부회장까지 했지. 회장은 구세군의 황종률, 내가 부회장으로 활동했는데 … 그리고 나는 이제 인간적, 신앙적인 면에서 이제 우리 어머님한테 많이 감명받았고, 존경한 분은 김화식 목사 그분이 이제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로서 정신머리가 있는 분이고, 그러니까 내 평생 한경직 목사와 김화식 목사 두 분 존경하지.
김흥수 어쨌든 전쟁이 나서 이게 지금 북한 사람들을 원수로 생각하고, 적으로만 생각했지 다른 생각이 안 들었다는 말이죠? 싸움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할 경황이 아니었단 말이죠?
김병섭 그렇지.
최기영 그게 그 당시 기독교 국가, 천주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당시로서 마귀와의 전쟁하는 식으로 ‘십자군’ 하는 얘기가 천주교 스펠만 대주교 같은 사람이 와가지고 계속 그 얘기하는 거예요. 스펠만이라는 사람이 미국 교회에서 엄청난 돈을 보냈는데 그 기본이 마귀 추방하는 그런 식의 사고였다고.
김화식 목사 아들 김동진, 그 작곡하는 김동진 선생하고는, 그분도 숭실 나오셨죠?
김병섭 숭실, 나보다는 한 5년은 선배예요.
최기영 5년이나 됐어요? 정정하셔서. 지난번에 숭실동창회 음악회 하는 거 가보니까 나와서 인사하고 그러시더라구요.
김흥수 아직도 살아 계시나요?
최기영 말랐지. 그러긴 한데 하여튼 듣기에는 그분이 해방 뒤에 좌익 쪽의 일을 많이 했다고 그래.
김병섭 많이 했어. 김일성 찬가 작곡을 그 사람이 했어요.
최기영 그래서 그 자술서가 있다구요, 아니 자술서라 뭐라나? 북한 노동당에 입당할 때, 자기들 신상기록을 쓴다고. 자아비판하며 쓴 글이 있는데, 그게 있어요. 그거 좀 보자고 했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서 못 보여준다는 거야. 그게 미군이 평양 점령 시 노획문서로 들어가 있거든.
김흥수 십자군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서정민 장로님 오늘 우리들이 주제를 정했던 말씀을 좀 들었구요. 내일 시간이 괜찮으시면 저희들이 오전 중에 방문해서 그 이후에 장로님 개인적인 활동과 경험, 더구나 또 시애틀에 오셔서 미주 한인사회, 또는 그 신도연맹이나 평신도 운동 하신 거, 또 반공 관련 사회단체 일, 그리고 또 미국에서의 느낌, 그리고 정말 그 전쟁기에는 아까 말씀하신 그런 정의감을 가지시고 그렇게 했는데, 지금 미주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시면서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시면서 지금 와서의 소회라고나 그럴까 지금의 애국애족의 방식, 사상에 대해 내일 좀 듣는 기회를 갖고 싶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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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보기의 편지
* 이 편지는 기독교의용대에 가담했던 경북 청도 출신 이보기가 기독교의용대 대원이었던 이종배에게 보낸 것으로 부산에서의 기독교의용대의 활동과 의용대가 해산된 후 일부 의용대원들이 육군통신학교로 가게 된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이종배는 2002년 2월 15일 이 편지를 받았다.(김흥수 교수 소장)-편집자
이종배 장로님에게
그간 주 안에서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실 것을 믿는다. 월전(月前)에 보낸 편지에는 대구에서 부산까지의 일을 자세하게 인쇄로 해서 잘 되었는데, 잃었으니 아는 대로 대강 적어두마. 대성초등학교에서 서문교회가 주축이 되어 시작돼 계성학교로, 정부 부산 이동으로 함께 부산으로. 당시 강문봉 대령의 기안으로 시작됐다는 소문.
부산 마구간부터는 우리가 경험한 사실. 그 마구간은 일정(日政) 때 한국 소를 일본 가져갈 때 우선 대기시키는 데 사용된 마구간이고(西面), 처음은 3,000명 인원이 되면 독립연대로 UN군으로 편입된다 했는데, 나중에는 2,500명만 돼도 된다 해서 대기했는데, 현재 수가 2천 2-3백 명이 되고, 매 유입되는 인원이 2-3백 명이라는데도, 점검하면 늘 2천 2-3백 명에 그친다고 해서 기다리는데. 당시 통신학교장 조응천 대령(기독교청년면려회 회장)의 요청으로 전원 육군통신학교로. 그래서 전원 운동장으로 소집해서 가부를 물으니, 전원 독립연대가 되어 유엔군 가기를 원해서, 그래서 수일 기다리는 중 한날 갑자기 인솔해서 부산진 어느 골짝 공장에 가서 분류해서. 우리는 그 밤으로 영도공고로 가서 거기서 또 분류. 80명 선발돼서 그 밤에 또 배 태워 도착한 곳이 영도 동산초등학교. 통신문서교육대. 거기서 맨날 교육받다가 육군제2훈련소라 해서 가야초등학교로 도보로. 가서 보니 십자군에 왔던 마구간 동지들이 통신학교로 간 사람들이 한 천여 명 될까. 같이 보병훈련을 한 2주 받고 학교로 전원 복귀하고. 우리 80명은 복귀 후 수일 후 밤중에 기상시켜 전선이 위험해서 너희들을 요구하니 지원하라. 이래서 지원한 인원 중 30명만 골라서 따로 수용. 수일 후 출동했는데, 가서 보니 11사단 창설 통신중대 문서취급대 요원으로. 51년 봄에 군목부(軍牧部)가 생겨서 진중(陣中)교회 생기고 목사가 부임되어 우리 11사단은 전 교인으로 된 문서취급소였으니, 당연 그 곁에 교회가 서게 되고 이 문서취급소에 소장이나 선임하사가 와도 얼마 안 가서 같이 교회 출석하게 되고, 사단 통신부에도 중대본부에 행정요원으로 많은 역할을 담당했음.
다시 적으니 대강 이렇다. 편지가 받을 사람이 없으면 돌아와야 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건강 유의하시고, 댁내 무고하시기를 기원하며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