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신라 석(昔)씨족의 기원과 이동 연구
이재환
서론 - 석(昔) 씨족의 기원과 이동 경로를 밝혀낼 필요성
신라의 상대(上代)인 서기 184년 벌휴이사금이 정권을 잡고 즉위한 뒤부터 내물이사금이 즉위해 정권이 바뀔 때까지 173년 동안 신라를 다스린 석(昔)씨족의 시조 탈해이사금은, 그 동안 신화와 역사 사이에서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상고사에 있어서 영성(零星)한 사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한국 학계가『삼국사기』의 초기 글을 믿지 않은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최근에는『삼국사기』초기 글의 신빙성을 밝혀 서기 4세기 이전의 신라사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나, 아직도 박씨족의 역사는 뒷날에 창작, 채록됐을 가능성을 없앨 수 없다는 주장이나 석씨족의 시조 탈해 이사금을 다룬 글이 장황한 설화라는 주장이 남아 있으며 두 무리의 시조를 다룬 글이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신화와 역사 사이에서 정확히 자리매김되지 않고 어중간하게 자리잡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사기』초기 글에서 달이 행성을 가렸다는 글은 도합 19회 있는데, 이 가운데 17회는 모두 독자기록임이 밝혀져 백제와 신라가 적어도 서기 205년부터는 행성과 달의 움직임을 스스로 관측하고 있었으며, 그 관측 결과를 적어 남겼거나 구전하였다는 사실과 만약『삼국사기』 초기 글에 나오는 태백주현(太白晝見) 현상을 아무 시기에나 적어 넣었다면 금성이 실제로 밝아진 시기와 우연히 들어맞을 기록 수는 0.14 X 8 = 1.1개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삼국사기』삼국의 본기 중 기원 전후한 때에서 600년 사이의 글을 조사한 결과, 기후 시수(示數)를 보면 151년에서 250년까지의 기후는 차가운 골짜기를 이루고, 4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따뜻한 언덕(嶺)으로 회복하는 현상을 찾아내 실제 극동 기후와 부합하는 법칙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면 초기 글에 나오는 기후 관계 글의 내용이 다른 지역의 기후와 맞는 것은,『삼국사기』초기 글에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뜻하므로 어중간한 태도를 버리고 초기 글을 비판적으로라도 믿어야 할 텐데도 『삼국사기』초기 글을 안 믿는 것은 여전히 굳건하다.
이런 상황은 신라 상고사의 정확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며 나라가 세워지고 발전하는 과정을 풀이하는 일을 방해한다. 따라서 두 무리의 초기 역사를 뚜렷하게 밝히지 않을 경우, 신라사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 전반의 이해체계에 왜곡을 가져올 위험성마저 있다.
신라의 초기 역사를 바르게 알자면 신라의 지배층이 된 박(朴)씨, 석(昔)씨와 6부의 뿌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주민일 경우 신라사는 경상북도라는 무대를 중심으로 인간활동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연구하지 않고, 박씨족 ․ 석씨족 ․ 6부 ․ 낙랑국/대방국 유민이라는 인간 집단의 이동과 정착, 융합이라는 과정을 중심으로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태국의 역사를 배울 때 타이족이 서기 13세기 말 몽고군에게 쫓겨 지금의 땅으로 내려오기 앞서 살던 곳인 중국 운남성부터 먼저 살펴보고, 터키의 역사를 배울 때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오기 앞서 살던 몽골 초원과 중앙아시아부터 살펴봐야 하는 것과도 같다. 신라의 지배층이 이주민이라면 그들이 경상북도로 오기 앞서 살았던 곳이나 경상북도로 온 길을 살펴 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 학계는 초기국가들은 이주민들이 세웠고, 그러한 이주민들이 최고의 신분집단이 되어 그 밑의 신분집단 성권들과는 피가 다르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문헌자료와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자료를 참고하여 보면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서는 기원 수세기 전 대륙으로부터 금속문화가 전래되면서 빠른 사회변화가 초래되고 정치세력집단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여 사실상 박씨와 석씨가 외부인임을 인정하나, 정작 그들이 살던 곳과 온 길을 똑똑히 밝히고 있지 않아 혼란과 물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박씨족의 경우 서기 2세기 끝쯤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새로이 남하한 한족 유이민이나 서기전 2세기 말에서 서기전 1세기초에 들어온 고조선계(위만조선계), 또는 금속문화를 가지고 북방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부족이라고 추정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북방민족이었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석씨족의 경우 철기문화를 가진 북방유목민이나 흉노계 문화와 깊은 관련을 가진 북방계의 야장왕이 이끄는 무리, 예(濊) 계통의 고대 한국인, 경주 부근에 살던 낙랑군의 주민, 산동 낭야에서 발해를 건너온 탈해를 따라 백제에 귀부했다가 나중에 백제를 탈출한 세력 등 그 기원지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나왔으나, 필자가 검토한 결과 가설 자체에 무리가 있거나 연대를 지나치게 깎아내린 점이 드러나 석씨족의 뿌리를 똑똑히 풀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들어온 무리의 뿌리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한다면 그 무리가 움직인 까닭이나 모(母) 집단에서 지니고 들어왔을 문물, 무리의 문화, 기질을 알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집단이 고대국가에 끼친 영향이나 기여도, 다른 문화와의 충돌, 융합, 변화 과정을 푸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무리가 만든 고대국가의 성격을 밝히려면 그 무리의 뿌리와 온 길, 온 까닭을 밝히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석씨족의 뿌리에 대해 극단적으로 견해가 다른 학설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 상대(上代), 나아가 신라사 전체를 정확히 살피는 길을 막는 걸림돌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위에서 말한 문제점을 풀려고 초기의 두 왕족(王族) 무리 가운데 탈해이사금이 시조인 석(昔)씨족의 뿌리와 옮김, 옮긴 까닭, 온 길, 토박이들과의 접촉, 경주 정착을 - 유물과 유적, 신화학 이론, 인류학 이론,『삼국사기』․『삼국유사』와 중국 역사서의「신라전」,『삼국사기』초기 글을 다룬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 펼칠 것이며, 그럼으로써 신라상고 석씨집단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문제를 아래와 같은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것인데,
1) 신화와 역사의 다른 점을 간단히 밝힌 뒤 탈해이사금의 건국기록을 신화로 보는 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석씨족을 다룬『삼국사기』「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이 역사임을 입증할 것이며,
2) 석씨족의 기원과 이동, 정착을 다룬 기존 학설의 약점을 지적할 것이다.
3) 필자가 쫓은 석씨족의 근원지와 이동, 정착, 그리고 그 원인을 짚고 넘어가고,
4) 끝부분에서는 석씨족의 정착이 신라사에 어떤 뜻이 있는지를 간단히 논평할 것이다.
특히 기존의 연구자들이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해류나 계절풍, 해상 운송, 국가가 위치한 방위, 나라의 이름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할 것이며 신라의 전승기록이 전해져 사서로 완성된 계승왕조의 사서인『三國史記』나 『三國遺事』의 글을 받아들이되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도 보다 현실적으로 서술한『수서(隋書)』「신라전(新羅傳)」과 견주어 사건의 성격을 풀이할 것임을 밝힌다.
부디 이 논문이 한국 안에서 사실상 잊혀진 신라의 초기 역사를 되살리고 마립간 시대나 화랑, 골품제, 청해진 등 신라 중기와 후기에 집중된 연구 경향을 바꾸어 후학(後學)들이 신라 초기의 국가 형성과정과 해양사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신호탄이 되기를 빌며, 논문에 문제점이 있으면 ― 이 문제를 연구한 선학(先學)이 말했듯이 ― 선학 제현들의 질정을 바랄 뿐이다.
제 1장 ‘신화설’의 문제점
1)석탈해 건국을 신화로 보는 학설들
석씨족의 시조인 탈해이사금을 다룬 글은 현재까지도 신화 내지는 반(半) 신화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김열규(金烈圭)는『韓國의 神話』에서
"알지(閼智)를 기아(棄兒)상태에 있는 유아로 보려는 추정을 뒷받침해 줄 사례가 달리 있다. 탈해(脫解)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탈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 큰 궤짝에 담겨져서는 바다를 떠돌다가 드디어 가락을 지나 신라에 이르는 것이다. … 궤짝 속에 유기된 유아로서 그는 발견된 것이다. … 궤짝에 담겨진 기아(棄兒)가 물 위를 떠도는 모티브는 이른바 ‘표류함(漂流函)’의 모티브로 불려지고 있다. … 굳이 떠도는 상자 속에 버려진 유아가 아니라도 좋다. 탄생 직후 유기(遺棄)됨으로써 그 영웅적인, 혹은 왕자적인 생(生)의 첫발을 내딛는 주인공들이 있다. … 저 비극의 주인공 외디푸스가 바로 그 같은 인물이다. 누리의 첫 서사시의 주인공인 길가메슈 또한 그렇다. … 이들은 유아로 버려짐으로써 그들의 영웅적인 또는 왕자(王者)다운 삶을 시작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얘기는 한결같이 버려진 유아가 왕자(王者)가 되고 영웅이 되고 혹은 신격화(神格化)되는 얘기다. 이런 곳에 신화의 범(汎)세계성이 있다."
고 적어 탈해의 건국기록을 신화라고 주장했고, 나아가 기아(棄兒)라는 신화의 모티브는 기아(棄兒)풍습이라는 사회적 제도와 관련지어져 설명되어야 할 것이며 경주 산청군 유평(油坪)마을에서 어린 아이가 태어난 직후 일시적으로나마 작은 광주리 같은 데 넣어서 바깥에 내둔다는풍습을 들었다면서 탈해도 이런 ‘액(厄)땜의 주술’을 겪었다고 치자고 덧붙였다.
또 서대석은『한국의 신화』에서
"「김알지신화」나 「석탈해신화」등도 건국신화에 준하는 성격을 가진다. "
며 탈해신화에서는 탈해의 출생 과정이 간접 서술되고 결혼과 즉위, 동악신으로서의 성립과정이 상술되고 있다고 덧붙여 탈해 이사금을 다룬 기록이 ‘건국신화’라고 주장했다.
최진원(崔珍源)은『韓國神話考釋』에서
"용왕(龍王)의 아들이며 용(龍)이 그를 호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신화주인공, 즉 수로(首露), 혁거세(赫居世), 알지(閼智)와 마찬가지로 알로 태어났다는 점에서 탈해(脫解)는 신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
고 주장했고,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명석(椧石)을 ‘홈바위’라 부르고 옛날 탈해가 탄 배가 그 홈으로 밀려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 배를 끌어 올렸다고 말하는 데 착안해 탈해의 홈바위는 허황옥의 석주(石舟)나 연오(延烏), 세오(細烏)의 수중암(水中岩)과 마찬가지로 신격(神格)의 내림(來臨)상징으로서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 탈해의 상륙을 신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탈해이사금이 ‘돌무덤’에서 머문 기간을 ‘기칠일(忌七日)’로 불러 ‘가거지지(可居之地)’를 복정(卜定)할 수 있는 초능력을 얻게 된다고 풀이했고 탈해가 복정한 곳이「三日月 모양의 봉(峰)」인데 이 봉의 신화적 뜻은 ‘제의장(祭儀場)’일 것이며 ‘제의의 신성장소’의 뜻은 후세에 오면 ‘可居之地’의 뜻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여 탈해이사금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신화의 흔적으로 받아들였다.
김*재*용, 이종주는 탈해이사금이 물에서 직접 생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물과 관련하여 탄생한 신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며, 그가 경주 토함산에 올라간 뒤 ‘무덤’을 짓고 그 안에서 7일 동안 머무른 일을 신이 일부러 죽는 경우이자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끝내고 이제 신라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과 재탄생의 제의적 행위라고 풀이했다.
大林太良 교수는『神話學入門』에서
"인간, 특히 인류의 시조가 알, 혹은 알 모양의 물건에서 나오는 모티프의 난생신화는 … 동아시아에서는 … 海南島의 여(黎)족, 중국 동해안의 서(徐) 언왕(偃王) 전설, 古代 朝鮮의 가야, 新羅, 高句麗 및 일본의『죽취물어(竹取物語)』의 이전(異傳)에도 나타나고 있다. "
고 적어 탈해이사금 관련 글이 난생신화라고 주장했다.
2)기아(棄兒)설의 문제점
이런 견해들을 따르면 탈해이사금은 신화상의 인물이며, 그의 행적도 실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신화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문제점을 지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선 김규열(金圭烈)의 견해부터 살펴보면, 그의 풀이대로라면 기아 풍습이 있는 한국/조선의 모든 지방에서 탈해이사금의 이야기와 똑같은 글이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자에 담긴 채 버려진 아이가 나라를 세운다는 이야기가 경주시와 김해시에만 전해 내려오는 까닭을 풀이하기 힘들고 또 경남 산청군이나 지리산의 실상사(實相寺)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근래에까지 잔존(殘存)한 풍습이 어떻게 신화의 특이한 모티브가 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김규열은 가까운 마을에서 애를 낳되 명(命)을 길게 하려면 광주리에 담아 일시(一時) 벅수 앞에 내려놓는다는 실상사의 풍습이 무속(巫俗)에서 영아(嬰兒)의 기명(祈命)을 할 때 활용되는 ‘神아들, 딸’의 관념도 보아낼 수 있을 듯하다고 말하면서 탈해이사금도 그와 마찬가지로 예상된 재난과 변(變)을 이기고 무사하게 다시 수용되는 영아이자 신(神)의 아이로서 수용된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원전을 읽으면 그런 설명과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탈해는 본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난 사람이다 … 처음에 그 나라 임금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 한 개를 낳았다. 왕은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버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차마 버리지 못해 비단에다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서 가는 대로 맡겨두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탈해이사금 조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 … 우리 부왕(父王)이신 함달파(含達婆)께서 적녀국(積女國) 왕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왕비를 삼으셨으나, 자리를 이을 아들이 없었소이다. 자식을 얻고자 기도드리기 7년 뒤 큰 알 하나를 낳았소. 이에 왕께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한 결과, 사람이면서 알을 낳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 상서롭지 못하다 하였소. 그래서 궤짝을 만들어 저와 일곱 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을 넣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닿는 땅에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일으켜라.’라고 비셨소." ―『삼국유사』권 1「기이」탈해왕 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뜻밖에 잉태하였는데, 달이 차서는 알을 낳았다. 이 알이 바뀌어 사람이 되었으니 그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 그가 바닷길을 따라와 거침없이 대궐로 가서 왕(:金首露王)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가락국기』
만약 탈해이사금이 버려진 다음 다시 거둬지는 아기였다면 본인이 굳이 부왕(父王)이 - 고국인 용성국(龍城國)에 돌아오지 말고 멀리 떠나서 새 나라를 세우라고 빌었다는 말을 할 까닭이 없고,「신라본기」에서건『삼국유사』나『가락국기』에서건 탈해이사금이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단순한 ‘액땜 주술’이었다면 이렇게 멀리 나갈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스럽다.
오히려 내용상으로는 탈해이사금은 실존 인물이며 고국에서 쫓겨나거나 달아났고, 새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사실이 후대에 압축되어 전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기아설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밝힌다.
3)건국 신화설의 문제점
두 번째로, 서대석 설은 탈해이사금의 이야기가 ‘건국신화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는 설의 내용이나 구조가 아니라 “건국신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알맞은지가 문제가 된다. 다시말해서 “건국신화”라는 말을 써도 되는지, 아니라면 무슨 말을 써야 하는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신화학자인 헤르만 ․ 바우만 교수의 말에 따르면, 신화는
1. 사물의 기원, 원초의 생물, 신들의 행위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듯이 이야기된 보고(報告)이다.
2.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보고(報告)이고, 그것은 그 민족의 세계관의 확정된 여러 요소로 되어 있다 ….
3. 신화에 나오는 인물은 인간사회를 초월한 존재이며 그들 등장 인물은 원초(原初)시대에 기초를 두어 행하여진 것이다. 즉 신들, 부족의 선조, 태초의 영웅, 문화영웅(태초에 인류에게 문화를 가져온 영웅) 그리고 인간의 원형이나 인간적인 사물, 인간의 환경을 창조하고 야기한 사람들이다. 행위하는 사실이나 식물, 동물등도 적어도 행위와 의도에 있어서는 완전히 인간화되어 나타난다.
4. 행위의 시간은 만물이 형성되는 태초이고, 이때에 세상의 모든 본질적인 것들이 마련되는 것이다.
5. 행위의 장소는 유달리 원초(原初)에는 지상이지만 그 다음에는 하늘 아니면 지하이다.
6. 신화의 결정적인 기능은 풀이하는 기능과 증명하는 기능이다. 신화는 있는 것을 풀이하고 알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회적인 원초적 사건에 기초를 두고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의 행동은 신화가 기초가 되어 엄숙한 것이 된다. 설명하고 증명하는 기능은 환경의 여러 현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 문화의 창조에도 관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해이사금의 글은 이런 조건에 얼마나 잘 맞아떨어질까? 4.와 5.는 아님을 알 수 있다. 탈해이사금은 만물이 형성되는 태초에 나타난 사람이 아니고 이미 세상이 만들어진 다음에 나온 군주이기 때문이다.
그가 오는 통로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나 해모수와는 달리 하늘이 아니고 바다 위이며 죽어서 동악(東岳)에 안치되기는 하지만 끝까지 “하늘”이나 “지하”는 나오지 않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1.과 2.도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탈해 이사금을 다룬 글은 “사물의 기원”이나 “원초적 생물”에 대해서는 풀이하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용성국이라는 ‘국가의 성격’과 자신이 아진포로 흘러온 사연만을 간단하게 말할 뿐이다.
탈해가 무덤을 짓거나 호공의 집을 빼앗는 일, 나라를 일으킨 일도 ‘인간’으로서 한 일이지 신이 된 다음 한 일은 아니며,『삼국유사』탈해왕 조에 나오는 탈해 이야기에서는 신라인의 “세계관에서 확정된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인 조류 숭배 신앙과 용 숭배 신앙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보다 구체적인 세계관을 확인하기는 힘든 것이다.
3.의 경우 탈해가 “원초 시대에 기초를” 둔 인물도 아니거니와 처음에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 나타나고 “ 조상은 원래 야장(冶匠)”임에도 불구하고 “고기잡이를 직업으로 삼았으며” 그가 지닌 제철 기술이나 지세(地勢)를 살피는 힘으로 사람들을 도왔다는 글은 없기 때문에 해당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다만 석씨족이라는 씨족의 “선조”이자 ‘시조’고 바다에서 나타나 탈해가 탄 배를 호위하였다는 “붉은 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행위하는 사실이나 식물, 동물 등도 적어도 행위와 의도에 있어서는” 불완전하게나마 “ 인간화되어 나타나”므로 어느 정도는 해당된다고 하겠다.
위에서 살펴 보았거니와 탈해 이야기는 신화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무대가 대거 확정된 주지(周知)의 장소이고, 사건이 일어났던 때도 태초에 창조가 되던 시대가 아닌 그보다 뒤의 일정한 과거시대이며 나오는 인물도 역사적으로 있었던 인물로 생각되고 있는, 전설에 가깝다. 글에도 그가 나타난 때와 곳이 구체적이지 추상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남해왕 때의 일로(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임인년이라면 노례왕이 즉위한 초년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양위하는 것을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혁거세 때의 일일 것이니 임인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락국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임금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며 나아가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했으나 배는 쏜살같이 달아나서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之村) 아진포(阿珍浦) 앞바다에 이르렀다.… 배 안에는 궤 하나가 놓여져 있는데 … 궤를 열어 보았더니 단정한 사내 아이와 칠보(七寶 : 금 ․ 은 ․ 유리 ․ 마노 ․ 호박[琥珀] ․ 산호 ․ 차거)와 노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 석(昔)으로 성을 삼고, …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권1「기이」탈해왕 조
왕은 즉위 2년 계묘(서기 43년) 정월에 “내 이제 도읍을 정하려 한다.”고 하고, … 1천 5백 보 주위의 성과 궁궐과 전당 및 여러 관청과 무기 창고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잡은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 궁궐과 집들은 농한기를 틈타서 공사를 진행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서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의 부인이 태기가 있어 달이 차자 알 하나를 낳았고 그 알이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름은 탈해(脫解)로서 바다를 건너 이 나라에 왔다. 그는 … 기꺼이 나가서 왕(:김수로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라고 했다. 왕은 대답하기를 “ … 감히 천명을 어겨서 왕위를 양보할 수 없고, 또 감히 내 나라와 내 백성들을 너에게 맡길 수 없다.”고 했다. … 탈해가 매로 둔갑하자 왕은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로 바뀌자 왕은 새매가 되었는데 그 변하는 것이 일순도 걸리지 않았다. … 탈해가 엎드려 항복하기를 “제가 …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 성인이 살생을 싫어하는 어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왕위를 노리는 일은 실로 안 될 일입니다.”하고, 탈해는 왕께 절하여 하직하고 나서 … 나루터에 나가 중국에서 온 배를 대는 수로(水路)를 따라서 갔다. 왕은 … 급히 수군(水軍) 5백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는 계림 땅 안으로 내빼므로 수군은 그대로 돌아왔다. ―『가락국기』
탈해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그때 나이가 예순두 살이었다. … 탈해는 본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난 사람이다. … 그 나라 임금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 큰 알 한 개를 낳았다. … 왕은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일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왕비는 차마 (알을) 버리지 못해 알을 비단에 싸서 보물과 함께 궤 속에 넣은 뒤, 바다에 띄워서 가는 대로 맡겨두었다. 처음에는 금관국(金官國 : 금관가야)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닿으니, 때는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탈해이사금 조
따라서 필자는 탈해의 글을 ‘신화’에 끼워넣은 건국 신화설은, 역사적인 사실을 - 비록 역사적인 사실은 들어있지만 역사 그 자체는 아닌 - 신화로 바꾼 주장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탈해신화’로 불렀던 이야기는 ‘탈해의 건국전설’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4)신격 상징물 설의 문제점
최진원의 풀이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탈해와 관련된 모든 상징을 신화적인 것으로 풀었지만, 그 가운데는 신화로 보기 어렵고 오히려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점을 지나쳤기 때문이다.
경주 양남면 나아리 주민들이 말하는 홈바위가 장아리(長兒里) 앞 갯가에 놓여있고 바닷물이 그 홈으로 드나들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가? 나아리(장아리) 주민들의 전설에 따르면 탈해가 탄 배가 그 홈으로 밀려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 배를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홈바위는 김해시의 용원리 앞바다의 망산도(望山島) 앞쪽에 있는 석주(石舟)와는 달리, 홈바위는 진짜 배가 들어오는 선착장이나 나루터 구실을 한 바위였고 탈해가 이끌던 용성국 사람들은 개울로 들어와 홈바위에 배를 대고 뭍에 올랐음을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추측은『삼국사기』․『삼국유사』․『가락국기』․『수서(隋書)』「신라전」에 석씨족이 배를 타고 신라로 들어왔다고 적혀있는 구절과 들어맞아 석씨족이 신라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해상집단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홈바위는 추상적인 신성물(神性物)이 아니라, 원래는 역사속의 인물이 배를 타고 들어올 때 배를 댄 곳이었는데 후대에 그 인물이 시조로 모셔지면서 덩달아 신성물로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인 셈이다.
탈해가 ‘可居之地’를 복정(卜定)할 수 있는 능력을 설명한 구절을 초능력을 얻은 구절로 설명한 견해는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실제로는 풍수지리 이론으로 자리잡기 좋은 곳을 찾은 사실을 적은 구절이라고 봐야 하는데도 이 부분을 신이(神異)한 능력으로 본 것이므로 명백한 오류다. 초능력을 지니지 않은 도선도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개성 왕씨들에게 송악이라는 터를 잡아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만약 신격(神格) 상징물 설이 설명하듯이 ‘제의의 신성장소’가 후세에 ‘가거지지’로 바뀌었다면 탈해가 반월성 터를 호공에게서 빼앗은 뒤 신전을 세우거나 망제를 지냈어야 하는데, 어느 역사서에도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그 설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견해를 덧붙이는 바이다. 탈해가 ‘可居之地’인 반월성(:경주) 터를 차지한 사실은 군사정복으로 풀이해야지 신화적인 사건으로 풀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 ‘제의의 신성장소’를 찾아야 한다면, 그가 죽은 뒤 시신을 동악(東岳)에 봉안했다는 글이 나오고 탈해가 재위할 때 토함산에서 우산처럼 생긴 검은 구름이 나타나 왕의 머리 위에 떠 있다가 흩어진 일이 일어났다는 글도 있으니 경주가 아니라 토함산을 ‘제의의 신성장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신격 상징물 설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가설의 오류는 역사를 신화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실제 역사로 봐야 할 상징까지 신화적으로만 풀이하려고 했던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재생(再生)설의 문제점
그렇다면 김*재*용 ․ 이종주의 설은 어떨까? 그들의 설 가운데 앞에서 설명한 설들과 겹치는 부분은 생략하고, 탈해가 무덤을 지어 그 안에 들어가는 사실을 설명한 부분만 살펴보자. 그들은 탈해가 돌무덤을 만들어 7일 동안 머무른 일이 상징적인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삼국유사』「탈해왕 조」만 보면 올바른 것처럼 여겨지지만,『삼국지』「한(韓)전」에 마한 사람들이 무덤처럼 생긴 집을 짓고 산다는 구절을 살펴보면 『삼국유사』의 탈해 이야기는 마한인이 배를 타고 진한 땅으로 옮겨와 고향에서 집을 짓던 대로 집을 짓고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았던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토함산에서 경주를 바라본 뒤 호공의 집을 뺏고 자리잡은 행위가 나오므로, 돌무덤은 단순한 돌무덤이 아니라 돌무덤처럼 생긴 집이며 그 집은 정복전쟁을 벌이기 위한 전초기지, 즉 산성(山城)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재생(再生)설을 주장하는 두 학자도 다른 신화학자들처럼 탈해 이야기를 신화로 봄으로써 정복전쟁을 신화의 의례로 파악하는 오류를 저질렀으며, 따라서 재생설도 잘못된 것이라는 작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탈해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라 - 신화학자인 훌트크란츠 교수의 말대로 - 어떤 집단이 현재 행하고 있는 종교적 신앙이나 행위를 선조의 종교적 세계와 연속시켜 유지하게 함으로써, 집단의 연대성이나 집단의 가치를 강화시키는 것인 전설이며, 아울러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사건에 의해서 집단의 과거와 현재가 연속성을 유지하고, 그것에 의하여 집단의 연대성, 특히 집단과 특정지역의 결합을 강화시키는 세속적인 전설이라고 말할 수 다는 뜻이다. 탈해 이야기는 전설이 된 역사로 보아야지, 신화로 볼 수는 없다. 탈해를 분석한 신화학자들은 이 사실을 지나쳤기 때문에 글을 잘못 풀이한 것이며, 필자는 그런 점에서 기존의 탈해 관련 학설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2장 석씨족의 기원을 다룬 기존 학설의 문제점
1)흉노족 기원설과 그 문제점
탈해 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면, 탈해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 석씨족의 기원을 풀이한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화의 사건으로 알았던 사건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를 담은 전설임이 밝혀진 만큼, 신화학자가 아닌 역사학자가 문제의 핵심을 파헤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학자들이 세운 기존 학설은 석씨족의 기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일단 석(昔)씨족이 경상북도의 토착민이 아니라 외부인이라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어보인다.
『삼국사기』「신라본기」탈해 이사금 조(條)에는,
"탈해는 본디 多婆那國에서 난 사람이다. … 그 나라 임금이 女國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 한 개를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려야 한다.”고 말했으나, 그녀(여국왕의 공주)는 차마 그러지 못해 비단에다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서 가는 대로 맡겨두었다. …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귀에 닿으니, 때는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
라고 적혀있고『삼국유사』〈탈해왕〉조(條) 에는 탈해 본인이 아진의선에게,
"부왕父王이신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 임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그 분을) 왕비로 삼으셨으나, 자리를 이을 아들이 없었소. 자식을 얻으려고 비신 지 일곱 해가 흐른 뒤 큰 알 하나를 낳으셨소이다. 이에 임금님께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사, 사람이면서 알을 낳은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 상서롭지 못하다 하였소. 그래서 궤짝을 만들어 저를 비롯한 일곱 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을 넣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닿는 땅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일으켜라.’라고 비셨는데, 이 때 문득 붉은 미르(:龍)가 나타나 배를 지켜주어 이곳에 이르렀소. "
라고 말하며 『수서(隋書)』「신라전」은
"그 왕은 본래 백제인이며 바다로 달아난 뒤 신라로 들어가서 드디어 그 나라(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
고 적고 있어 세 글 모두 석씨족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들어온 무리라고 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해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서 왔는지를 밝히는 단계에서는 의견이 하나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몽골 초원지대라는 설, 경주 일대라는 설, 강원도라는 설, 황해도라는 설이 나와 그렇지 않아도 인간 군주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탈해의 출자(出自)를 밝히는 일이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온 석씨족 연구가 지닌 문젯점이 무엇인지를 - 석씨족이 이주민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천관우는
"『사기』흉노전에는 歲正月에 諸長이 單于의 庭祠에서 小會하고, 정월에 다시「龍城」에서 大會하여 하여 그 선조와 천지귀신을 祭하고, 秋馬肥에는 대림(蹛林)에서 大會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흉노에는 제2대 單于인 모돈 당시부터「凡 二十四長」이 있었다는 기록은『삼국유사』의「二十八龍王」과는 완전히 같지는 않으나 비슷한 점을 느낀다 하고, 또 흉노는 제 7대 詹師盧, 제 9대 且鞮候, 제 11대 壹衎鞮 등이 모두 어려,『삼국유사』의「5세, 6세에 繼登」하였다는 것과 上通되는 점을 보이고 있다고 하고, 용성국에서는 「8품(品) 姓骨이 있으나 간택함이 없이 모두 大位에 오른다」고 하였는데, 남흉노(南匈奴)의 呼韓邪 2세 (A D 48 ~ ?)는「8부(部) 大人의 共議」로 單于位에 올랐다고 한다. 이 8부 대인이 만일 왕족, 왕비족의 長을 뜻한다면,『삼국유사』의 「8품 성골」과 같은 셈이니 탈해는 흉노계 문화와 깊은 관련을 가진 북방계의 冶匠王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 말해 사실상 탈해가 몽골초원에 살던 흉노족이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이 주장은〈탈해왕〉조에 탈해가 자신의 신분이 야장(冶匠)임을 力說하는 부분이 나오고〈탈해왕〉조에 나오는 각배(角杯)가 세계적으로 지중해, 근동, 중앙아시아, 북중국, 신라, 가야, 일본에 분포되어 있는 유목민의 그릇이라는 점 때문에 일리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학설대로라면 유목민족이었을 석씨족이 익숙한 운송 수단이었을 말과 낙타를 타고 오지 않고 배를 타고 바다에서 건너온 까닭을 풀기 힘들다. 요서지방이나 중국 대륙에서 배를 띄워 한반도 경주로 향하는 방법은 도상(圖上) 가정은 할 수 있겠지만 기마족이 갑자기 바이킹으로 돌변하지 않고서는 현실적 방안이라고는 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필자는 글을 믿고 유목민족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석씨족이 흉노족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며, 서기 1274년과 1281년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일본을 침공할 때 몽고인으로 이루어진 수군을 만들지 않고 고려의 배를 동원해 몽고의 기마군을 실어나른 사실과, 중앙아시아의 튀르크 부족 출신이자 기마민족인 오스만족은 지중해 연안으로 팽창해 나가면서 해전에 적응해 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전통적으로 해전에는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술탄들은 노략질을 일삼아 이름을 날린 해적들을 해군으로 고용했다는 사실(史實)이 ― 기마민족이 스스로 바다에 적응하지는 않았음을 나타내므로 ― 이 반박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되리라고 믿는다.
게다가 흉노족의 시조 신화와 석씨족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용성국의 시조 신화는 너무 다르다. 전자는『사기(史記)』「흉노전」에 실린 흉노의 선우가 쓴 편지에 따르면 흉노의 왕은 스스로를 '天帝가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大單于'라고 일컬으며 천손(天孫) 의식을 드러내는데 반해, 탈해가 소개하는 용성국의 지배층은 스스로를 “사람의 뱃속”에서 나온 “용왕(龍王)”이라 일컬어 미르를 물이 지닌 생명력의 원천이자 농사의 풍요를 다지는 힘으로 섬겼던 농경민의 믿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만약 탈해가 이끄는 석씨족이 흉노족의 야장(冶匠) 무리였다면 자신들이 떠난 나라를 풀이할 때「흉노전」에 나오는 선우의 편지와 비슷한 내용을 주장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농경민족이나 해양민족이 받드는 미르가 나오기 때문에, 필자는 흉노족 기원설을 흉노가 용성(龍城)이라는 땅을 차지한 사실과 야장 기술에만 주목하고 이동 수단과 무리의 성격, 신앙체계를 살펴보지 않은 데서 비롯된 단견이라고 판단하는 바이다.
<탈해왕조>에 나오는 탈해의 각배(角盃)는 탈해가 유목민이기 때문에 그것을 쓴다기보다, 용성국이 자리잡았던 요서지역은 서북쪽 몽골고원에서 시작해 남쪽 화북평원으로 이어지는 지리대의 중간에 있어 북방 유목문화와 중국 내륙의 농경문화가 일찍부터 부디친 곳으로 양 문화의 접촉이 가장 빨리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에, 이동성(mobility)을 가지고 이동과 교류를 하는 경향이 있는 용성국 사람들이 대능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상류지역에서 곧 만날 수 있는 오환족이나 그 오환족을 다스리던 흉노족의 풍습에 영향을 받은 용성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니, 쇠 뿔이나 물소 뿔 등 동물의 뿔이나 코끼리의 상아로 만든 잔인 각배가 유목민들의 의기(儀器)였다고 해서 그것이 흉노족 기원설을 뒷받침하지는 않음은 명백하다 하겠다.
<탈해왕조>에서 탈해가 설명하는 용성국의 제도와 흉노족이 겪은 역사적 사실이 겹친다고 반론할 수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흉노족은「凡 二十四長」이 있었지 ‘왕(王)’이 스물 네 명이지는 않았으며『삼국유사』의「二十八龍王」은 스스로를 “용왕(龍王)”이라 일컬은 지배층이 스물 여덟 대(代)를 거쳐 다스렸다는 뜻이지 왕 ‘스물 여덟 명’이 한꺼번에 한 나라를 다스렸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에, 필자는「흉노전」이 흉노족 기원설을 인정할 근거는 아니라는 의견을 다시 한번 밝히는 바이다.
비록 흉노족 선우들 가운데 몇 명이 어린 나이에 선우가 되었다곤 해도 이는 성인인 모돈선우가 부왕(父王)인 두만선우를 죽이고 흉노족의 2대 선우가 된 사실이나, 서기 310년, 오랫동안 중국내지에 잡거하면서 한인(漢人)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남흉노가 한(漢)을 세우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흉노족 유연(劉淵)이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흉노족의 관행은 아닌 듯하며, 따라서 이 사실을 용성국과 흉노족의 문화가 닮았다는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다.
아울러 흉노족 기원설이 예를 든 호한아(呼韓邪) 2세 선우가 8부 대인(大人)의 공의(共議)로 왕위에 오른 사실과 용성국에 8품(品)으로 나뉘어진 지배계급이 품계를 가리지 않고 대위(大位)에 오른 사실은, 전자는 어디까지나 왕의 즉위사실을 담은 기사고 후자는 용성국이라는 국가의 정치 체제를 풀이한 기사이니만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말을 덧붙인다.
두 나라에서 ‘8품’과 ‘8부’로 닮은 숫자가 나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문화의 교류 내지는 용성국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흉노 문화를 받아들인 사례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2)시베리아 기원설과 그 문제점
김병모는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석탈해와 김수로왕의 변신 이야기가 시베리아 원주민인 야쿠트족 샤먼들 간의 등급 매기기 작업으로 널리 유행하던 내용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들어 석탈해와 수로의 정신적, 문화적 고향이 시베리아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의 학설대로라면 석탈해는 시베리아의 원주민 출신으로 배를 타고 경주로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설이 인정받으려면 가야의 김수로왕이 이끄는 지배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경상남도 김해시까지 내려왔다는 점을 입증하고, <탈해왕>조나「신라본기」,『가락국기』가 증언하듯이 수로왕과 탈해 이사금의 이동 경로가 적어도 한 군데에서는 겹쳐져야 하는데, 가라계 지명은 압록강 중류의 중지도인 강계군 가라도부터 출현했지만 북한에는 별로 분포하지 않고 한강유역부터 본격화되어 충남과 경북에 가장 많이 밀집되었다가 경남으로 남하한 후 다시 전남으로 서행하여 시베리아 기원설을 따를 경우 시베리아에서 연해주를 거쳐 함경도, 강원도를 지나 경상북도로 왔을 석씨족의 추정 경로와 맞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석씨족은 수로왕에게 쫓겨난 뒤(또는 가야국을 피해 달아난 뒤) 경주에 정착했지 경주에 정착한 다음 수로왕을 찾아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모순을 석씨족의 이동 경로가 왜곡된 것이라고 풀이할 순 없으며
설사 수로왕이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두 제왕(탈해 이사금과의 변신 이야기가 가야의 글인『가락국기』에만 적혀있고「신라본기」나 〈탈해왕〉조,「신라전」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수호신과 연결시켜 표현하는 방법을 물려받은 가야인이 석씨족이 김해에 자리잡은 가야와 싸우다가 지고 쫓겨난 사실을 각색한 것이라고 봐야 하므로 이 이야기가 석씨족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고 하겠다.
비록 시베리아 아무르강(黑龍江) 상류에 살다가 러시아의 압력으로 남쪽으로 내려간 오로첸족의 신화에서 자다우라는 영웅이 세 해 가운데 두 해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고, 그 다음 독수리 가족과 까마귀 가족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로첸족이 독수리를 보면 “조상님”이나 “어른 아저씨”라고 부른다는 내용이 있지만, 이 이야기도 독수리와 오로첸족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점만 설명할 뿐 독수리가 사람으로 변신한다거나 사람이 독수리가 된다는 말은 안 나오므로 이 이야기가 탈해나 김수로왕과 관련있다고 말할 순 없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설도 『가락국기』를 쓴 사람들의 관점과 글의 성격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고 변신이라는 요소에만 매달리는 방법이 낳은 잘못된 학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필자는 이 학설도 받아들일 수 없다.
또 김철준(金哲埈)은『신라국가성립과정연구』에서 석씨족이 동해안지역의 울산, 감포 방면에서 경주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데, 만약 그럴 경우 울산이나 감포에서 왜 ‘용성’이라는 땅 이름이 나오지 않는지, 그리고 동해안지역으로 왔을 경우 서기 1세기에는 김해에 자리잡았을 가야와 부디칠 수 없는데 이를 풀이하지 못해 합리적인 가설이라고 볼 수 없다.
3)예족 기원설과 그 문제점
‘昔’의 우리식 훈독은 ‘예’이며 이는 ‘濊’(예)와 같은 음이므로 탈해의 성을 ‘昔’씨라고 한 것은, 그가 예 계통의 고대 한국인이었음을 시사한 듯 여겨진다고 주장하는 이영희씨의 가설을 살펴보자.
서기 1세기경, 예족은 지금의 함경남도 남부에서 강원도 지역까지 차지하고 살았으므로 만일 석씨족이 예 땅에서 건너왔다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곧장 건너왔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이 가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용성국(완하국)과 관련있는 땅 이름이 함경남도 남부에 남아 있어야 하고 가야가 강원도와 경상북도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데, 얼핏 보면 함경남도 덕원(德源)의 신라 때 이름이 용성(龍城)이고 이곳이 예족이 자리잡은 영역과 겹쳐서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그러나 만약 석씨족이 원산만에서 출발한 예족이라면 도중에 가야와 맞부딫혀야 하는데, - 가야의 이동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 강원도에는 가라계 지명이 없으며 경상북도에 있는 가라계 지명은 석씨족이 만날 수 있는 해안지대가 아니라 모두 내륙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럴 경우 석씨족이 가야와 만날 수가 없다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가설과 글 사이의 모순점을 풀려면 가설이 글을 잘못 받아들였거나, 글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풀이해야 하는데 석씨족과 가야가 만난 사실은 가야를 적은『가락국기』와 신라를 적은「탈해왕 조」, 신라인의 글을 고려인 김부식이 정리한「신라본기」에 한결같이 똑같이 나와 있으므로 글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문제를 전자로 보고 풀어야 한다고 판단되는 바, 용성국이 원산만에 있었다고 보는 가설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석씨족을 원 거주지를 떠나 경상북도에 자리잡은 무리로 보는 시각은 옳았으나, 그들의 기원지와 이동 방향을 잘못 풀이하였던 것이다.
또한 석씨족이 동예 출신이라면 문화가 예족과 비슷해야 하는데, 석씨족은 예족이 지닌 범 숭배 의식이 아닌 미르를 받드는 의식구조를 드러내 둘 사이에 전혀 닮은 점이 없다.
필자는 이 때문에 예족 기원설도 설득력이 떨어지며 정설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석씨 족단의 본거지가 경주와 김해 사이의 어느 곳이라는 강종훈의 견해도 그 두 곳 사이에 용성이라는 땅 이름이 없다는 점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4)낙랑군 유민설과 그 문제점
끝으로 선석열(宣石悅)의 가설을 살펴보겠는데, 그는 서기 6세기쯤 신라의 상황은 梁代(양대)에 신라로부터 직접 채록한 것이 아니라 신라 사신을 대동한 백제로부터 입수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러므로『수서(隋書)』신라전(新羅傳)의 글을 근거로 신라왕실의 기원을 북방유이민으로 규정한 견해 가운데 특히 백제계통의 이주집단으로 상정한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고 믿었다.
나아가〈위지동이전(魏璡夷傳)>에 따르면 대마도(對馬島)에서 김해까지의 거리를 1천여 리로 간주하고 있다면서 ‘왜(倭)’란 바로 대마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대마도에 기준을 두고 방향을 설정할 경우, 김해는 “기북안(其北岸)”이라 하여 대마도에서 북쪽이 되고 다파나국(多婆那國)의 방향은 대마도의 동북쪽이 된다. 즉 왜(倭)의 동북쪽인 다파나국은 김해로부터 동쪽에 위치하게 되는 셈이니 다파나국은 다름아닌 경주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주장해 탈해가 경주 출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석씨집단의 기원에 대해서는 북방 유이민설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昔脫解 자신이 북방에서 이주해 온 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2세기 후반 후한 말(後漢 末)에 본국의 내부 혼란으로 인하여 외방의 낙랑군이 고립되었던 반면에 삼한과 동예의 세력이 강성해진 와중에 낙랑군의 주민이 삼한으로 대거 유입되었는데, 昔脫解의 조부도 이 시기에 진한지역으로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순조로운 해석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탈해가 가야와 만났다는 글이나 아진포에 왔다는 글도 탈해가 조부 때부터 사로국(斯盧國) 지역에 이주 정착하고 있다가 주변 세력과 다투다가 밀려나 외곽에 살다가 사로국으로 들어와 이사금에 오른 것을 적은 것으로 풀이했다. 한마디로 탈해는 낙랑군에서 진한인 경상북도 지역으로 옮겨온 사람의 손자이며, 경주 가까이서 살다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선석열의 주장대로라면 백제와 신라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을 적은『양서(梁書)』「신라전」에는 어째서『수서』「신라전」에 적은 것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 없고, 당시 백제는 여러 번 고구려에게 침략당하였으나 다시 더욱 센 나라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백제 사신이 신라 왕실이 백제에서 왔다고 주장하려면 오히려 양나라 때나 그 이전에『수서』「신라전」에 실린 내용과 같은 내용이 실렸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서기 7세기쯤 신라가 자신의 조상이 대립하는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겨야지 드러낼 리는 없다고 반박할 수 있으나, 서기 1920년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북망산에서 나온 부여융 묘지명에 부여 융이 백제의 신라계 사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같은 시기에 살았던 신라인들도 - 만약 신라 왕실의 선조가 백제 땅이 된 옛 마한 지역에서 살았던 군주일 경우 - 이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말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서기 5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맞설 때에도 백제 사신이 북위에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이 같다고 설명한 사례를 보면 사이가 나쁘다고 해서 다른 나라와의 관계나 국가의 기원을 숨기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수서』「신라전」의 내용은 백제인이 꾸며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신라인 스스로가 말한 내용을 적은 것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사료로 쓰지 못할 까닭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바이다. 즉 다파나국이 경주 근처라는 선석열의 가설은 신라전의 글을 무시하고 세운 가설이니만큼 기본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선석열은 신라왕실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보 수집이 어려웠던 타국의 사서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신라의 전승기록이 전해져 사서로 완성된 계승왕조의 사서인『三國史記』나『三國遺事』에서 찾아야만 보다 정확하게 추구될 것이라고 말해 신라 상대(上代)를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았으면서도 정작『수서(隋書)』같은 다른 나라의 역사서가 신라 왕실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고, 왕족의 계보나 기원을 미화할 까닭이 없기에 오히려 사실을 신화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을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아「신라전」의 내용을 당시의 국제관계와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풀이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것이 필자가 선석열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기존의 학설들을 살펴본 결과, 그것들이 인간 집단의 이동 수단과 신앙체계를 살펴보지 않은 데서 비롯된 단견(흉노족 기원설)이거나, 석씨족의 이동로와 맞지 않으며 『가락국기』를 쓴 사람들의 관점과 글의 성격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고 변신이라는 요소에만 매달리는 방법이 낳은 잘못된 학설(시베리아 기원설)이거나, 반도의 동부 바다를 건너왔다는 석씨족이 - 경주로 가는 도중 - 김해에 자리잡았을 가야와 부디칠 수 없는데 이를 설명하지 못하는 모순된 학설(울산 ․ 감포 기원설)임이 드러났다.
또 새로운 학설도 석씨족을 원 거주지를 떠나 경상북도에 자리잡은 무리로 보는 시각은 옳았으나, 그들의 기원지와 이동 방향을 잘못 설명하였으며(예족 기원설) 석씨족이 출발했을 용성이라는 땅 이름을 찾아내지 못해 설득력이 떨어졌다(경상북도 기원설).
신라 왕실의 기원에 대해서 신라의 전승기록이 전해져 완성된 사서인『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연구하자는 취지는 타당하였으나, 다른 나라의 역사서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아 같은 사실을 더 객관적으로 적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 중국 글인 당시의 국제관계와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풀이해 석씨족의 이동 방향과 기원지를 알 수 있는「신라전」을 부정하는 잘못을 저지른 학설도 있었다(낙랑군 유민설).
결국 지금까지의 탈해 연구는 사료(史料)의 기본 성격과 관점, 인간집단의 속성을 무시한 채 이루어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필자는 이 시점에서 석씨족의 기원을 다룬 기록 자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오류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제 3장 석씨족의 근원지와 이동 ․ 정착
1)석씨족의 출자(出自) 추적
지금까지 신화설과 석씨족의 기원을 다룬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였거니와, 그렇다면 탈해를 시조로 삼는 석씨족의 정확한 출자와 온 까닭, 그리고 온 길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를 위해서는 망명자인 탈해 본인의 말을 우선 분석해야 하므로, 필자는 그의 말이 실린 글을 다시 살펴보려 한다. 우선『삼국유사』를 펼쳐보자.
그들을 7일 동안 대접하자, 사내 아이는 그때서야 비로소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정명국[正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어떤 글에서는 완하[琓夏]를 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적는다. 용성[龍城]은 왜[倭]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다 : 일연[一然]의 주석). 일찍이 우리 나라에는 스물 여덟 용왕(龍王)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사람의 뱃속에서 나왔으며 왕위를 대여섯살부터 이어받아 임금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려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8품(品) 성골(姓骨)이 있으나 가리는 일 없이 모두 대위(大位)에 올랐소. 그때 우리 부왕(父王)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서 아들 얻기를 빌었더니 일곱 해 만에 그만 커다란 알 한 개를 낳고 말았소. 이에 대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古今)에 없었던 일이니 이는 반드시 좋은 징조가 아닐 것이다.’라 하시고 궤를 만들어 나를 칠보(七寶)와 노비들과 함께 궤 속에 넣어 배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고 ‘부디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일가(一家)를 이루도록 하라.’고 비셨는데, 이때 갑자기 붉은 미르(:龍)가 나타나 배를 지켜주어 이곳에 이르렀소.”라고 했다.
―『삼국유사』권 1「기이」1 제4 탈해왕(脫解王) 조(條)
供給七日 迺言曰 我本龍城國人亦云正明國 或云琓夏國 琓夏或作花廈國 龍城在倭東北一千里 我國嘗有二十八龍王 從人胎而生 自五歲六歲 繼登王位 敎萬民修正性命 而有八品姓骨 然無揀擇 皆登大位 時我父王含達婆 娉積女國女爲妃 久無子胤 禱祀求息 七年後 産一大卵 於是大王會問群臣 人而生卵 古今未有殆非吉祥 乃造櫃置我 幷七寶奴婢載於舡中 浮海而祝曰 任到有緣之地 立國成家 便有赤龍 護舡而此矣 ―『三國遺事』卷一「紀異」一 第四〈脫解王> 條
탈해의 말을 따르자면, 그의 고향은 용성국(龍城國)이며 그는 배를 타고 진한(辰韓)의 아진포로 건너온 사람이다. 또 그는<탈해왕조>나, 『가락국기』나「신라본기」에 적힌 대로 아진포로 오기 앞서 수로왕이 다스리는 대가락(大駕洛.김해)를 거쳤다.
가락국 바다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임금인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며 나아가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했으나 배는 쏜살같이 달아나서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삼국유사』권 1「기이」1 제4 <탈해왕> 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태기가 있어 달이 차서 알 하나를 낳았고, 그 알이 사람이 되었는데, 이름은 탈해(脫解)로서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왔다. … 기꺼이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라고 하니 왕은 “…감히 천명(天命)을 어겨서 왕위를 양보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탈해는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싸워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은 좋다고 했다. … 탈해가 매로 둔갑하자 왕은 독수리가 되고, … 탈해가 본 모습으로 돌아오니 왕도 또한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가 엎드려 항복하기를 “제가 이번에 술법으로 겨루는 마당에 …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성인(聖人)이 살생을 싫어하는 어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왕위를 노리는 일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하고, … 왕께 절하여 하직하고 나서 교외(郊外)의 나루터에 나가 중국에서 온 배를 대는 물길을 따라서 갔다. 왕은 … 급히 수군(水軍) 5백 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는 계림(鷄林)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그대로 돌아왔다.
―『가락국기(駕洛國記)』
탈해는 본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난 사람이다 … 그 나라 임금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그녀가) … 큰 알 한 개를 낳았다. … 그녀는 차마 버리지 못해 비단에다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서 가는 대로 맡겨두었다. 처음에는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닿으니, 때는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이때 바닷가에 있던 노파가 줄로 당겨서 바닷가에 매어놓고, 궤를 열어보니 한 작은 아기가 있으므로, 그 노파가 데려다 길렀다. ―『삼국사기』「신라본기」탈해이사금 조(條)
따라서 그는 수로왕이 자리잡은 김해보다 서쪽에 있는 땅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으며, 김해나 경상북도보다 동북쪽에 있는 곳은 이 선별작업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
덧붙여서 만약 용성국이 실제로 있었던 나라의 이름이라면, 부산광역시 가야동이 한때 가야의 땅이었기 때문에 가야라는 이름이 남았고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이 진한(辰韓)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인 이서국(伊西國)이 자리잡았던 곳이기에 이서(伊西)라는 이름이 남았듯이 지금도 어느 곳엔가 용성(龍城)이라는 땅 이름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용성(龍城)이 비록 지금은 쓰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예전에는 있던 땅 이름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용성국의 실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으며 석씨족의 역사도 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용성이라는 이름을 지니거나 한때 용성이라고 불린 땅, 김해나 경상북도보다 동쪽에 있으며 배로 출발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을까? 이 점과 관련하여 요령성(遼寧省) 대릉하(大凌河) 중류에 자리잡은 성곽과 대동강 하구인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龍岡郡),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시의 옛 이름이 용성(龍城)이었다는 사실이 관심을 끈다.
이 세 곳은 각각 대릉하, 대동강, 섬진강이라는 물길을 끼고 있어 쉽게 바다로 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내륙수로와 이어지는 하계망(河系網)이 발달해 중국 동북부의 단동(丹東)시 마가점(馬家店), 요동반도의 황해연안인 대련(大連)시 장해현(長海縣), 여순 등지에선 약 5천년 전의 선박 관계 유적들이 나왔고, 그 중에는 돌닻도 나온 고고학 발굴 결과와 견주어 보았을 때, 황해서안의 해양문화는 일찍부터 매우 발달하여 해상집단 가운데 하나가 요령성에서 대동강 하구로, 대동강 하구에서 다시 섬진강 중류로 옮겨왔을 가능성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들은 모두 김해의 서쪽에 자리잡았으므로 만약 이 지역들 가운데 하나만 용성국으로 인정한다 해도 글이 전하는 용성국 → 가야(:김해) → 진한 아진포(:경상북도)라는 길과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2천년 전의 해상집단이 과연 그런 먼 거리를 갈 수 있느냐는 것인데, 최근 평양에서 발견된 2천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나무곽 무덤에서 나온 방위관측기(方位觀測器)는 천체의 별자리를 통해서 방위를 재도록 만든 것이고 관측기는 기구를 사용해서 위치와 항로를 측정하는 천문항법(天文航法)을 사용할 때 쓰는 기구이므로, 서기전 1세기의 사람들이 원양항해(遠洋航海)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한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직항(直航)하여 한반도 중부 해안에 닿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는 것과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부는 북풍(北風)계열의 바람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중부 혹은 남부해안과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산동반도와 가까운 요령성이나 경기도 바닷가와 가까운 대동강 하구에서 바다를 건너 김해나 경상북도 영일만으로 오는 일이 어렵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철도라는 육지의 대량운송수단이 나오기 전인 고대에는 물길(:강, 운하)이나 바다가 곧 교통로였고 배는 가장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서기 648년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당나라의) 중신들은 많은 군량은 소나 말이 끄는 수레가 아니라 배를 이용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조선왕조의 학자인 이중환도『택리지』에서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므로 … 배에다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것이 더 이익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 로마를 다룬 연구결과도 해상운송이 인간집단과 짐을 한꺼번에, 가장 많이 실어나를 수 있는 수단이었다는 점을 증언한다.
로마 제국 말기에는 … 마차 한 대 분인 밀을 육로로 겨우 480㎞ 떨어진 곳까지 운반하면 가격이 곱절로 뛰었다. 낙타 한 마리에 밀을 싣고 운반하면 600㎞에 가격이 두 배가 되었다. 육상 운송은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들고 비효율적이어서 내륙에서 기근이 생겨도 제대로 식량을 나르지 못할 때가 많았다. … 해상 운송은 위험하고 계절의 제약을 받기는 해도 훨씬 경제적이었다. 가령 곡식을 지중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배로 실어나르는 데 드는 비용은 마차로 120㎞인 거리를 운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맞먹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서기 301년에 고시한 가격 칙령에 따르면 육상 운송비가 해상 운송비보다 28배에서 56배까지 비싸게 먹혔다.
― 조지프 A. 테인터 교수,「평가 : 붕괴하는 사회의 복잡성과 한계 수익」,『문명의 붕괴』, 대원사, 서기 1999년, 232 쪽 ~ 233쪽
이상의 사실을 살펴보았을 때 해상집단인 석씨족이 배를 타고 요령성에서 영일만까지 이동한 사실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여기서 땅 이름과 위치가 기록에 나오는 조건을 만족시킨다고는 하나 용성국이 “왜(倭)의 동북쪽 1천리”에 있다는 구절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倭', '왜국(倭國)’, ‘왜인(倭人)’이라는 어휘를 쓰고 있는 중국이나 조선의 사료를 검토해 보면, 그 기사 내용이 지금의 일본열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倭관계 기사도 적지 않다.따라서 필자는〈탈해왕조〉의 ‘왜(倭)’도 일본열도가 아닌 다른 곳에 살았던 세력으로 의심되는 바, 지금으로서는 요령성 용성국, 대동강 용성국, 섬진강 용성국 가운데 하나가 탈해의 출발지라는 가설을 부정할 까닭이 없다고 여긴다. 용성국 이동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석씨족이 경주에 붙박기 앞의 역사를 되살릴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용성국 이동설이 옳다면『사기』흉노전에 여러 우두머리들이 선우(單于)의 정사(庭祠)에서 모이고, 정월에 다시「용성(龍城)」에서 큰 모임을 연다는 구절이 실린 사실과, 『삼국사기』에 서기 342년 전연(前燕)왕 모용황이 도읍을 용성(龍城)으로 옮겼다는 구절이 실린 사실, 그보다 95년 뒤인 서기 436년에 선비족이 세운 나라 후연(後燕)이 고구려에 투항할 때 용성(龍城)에서 나와 동쪽으로 옮아간다는 구절이 실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데, 필자는 이 기사들이 용성국과 관련있는 기사가 아니라 용성국이 원주지에서 떠난 뒤 용성이라는 땅 이름만 남았고, 그 뒤 유목민족들이 옛 용성국 땅에 자리잡고 나서 용성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나타나는 기사라고 풀이한다.
정복자가 선주민을 밀어내거나 선주민이 사라진 다음 들어와 나라를 세운다 해도, 선주민이 지은 땅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아랍인에게 정복되어 아랍화(化)한 다음에도 이집트라고 불리웠고, 프랑스 땅은 켈트족인 갈리아인(人)이 로마에 정복당하고 로마인의 땅이 된 다음에도 로마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 ‘갈리아’라고 불렸으며 중국 하북성은 연(燕)나라가 사라진 지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연(燕)’이라고 불린 사실이 좋은 예이다.
용성이라는 땅 이름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용성국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경상북도로 흘러들어가 신라를 세웠기 때문에 요령성 용성국이 텅 빈 다음에도, 용성이라는 땅 이름은 남았다고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성이라는 땅 이름이 <탈해왕조>보다 후대에 나오는 유목민을 다룬 기록에 자주 나타난다고 해서 용성국 이동설을 부정하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용성국 이동설을 부정하려면 다른 증거를 들고 나와야 할 것이다.
2)용성국의 이동과 그 원인
석씨족과 그들의 지도자인 탈해가 용성국 출신이고, 요령성이나 대동강 하구, 섬진강 중류지대 가운데 한 곳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으면 구체적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 떠났느냐는 의문을 풀어야 한다. 세 곳 모두 탈해가 출발한 곳일 가능성이 있지만 탈해는 단 한 사람이니 그의 용성국은 세 곳 가운데 어느 한 곳으로 좁혀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탈해가 떠난 용성국은 어디이며 그는 왜 고국을 떠났을까? 이 사실을 알려면 <탈해왕조>의 글 뿐만 아니라 다른 글들을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우선「신라전」의 글을 살펴보자.「신라전」에는 신라 왕실의 기원이 이렇게 나온다.
그 나라의 임금은 본래 백제인이며 바다로 달아나 신라에 들어와 드디어 그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박 ․ 석 ․ 김 3성 중에서 바다로 이동해 온 집단은 오직 석씨집단이므로 결국 백제인으로서 신라왕이 된 세력은 석씨집단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의 지도자인 탈해가 “본래 백제인”이라고 한 기사(記事)는 그가 백제의 땅이 된 옛 마한(馬韓)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의 군주이거나, 말 그대로 원래 백제인이었다가 내분이나 내전이 일어나 신라로 달아난 사람이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럼 탈해가 떠난 용성국의 후보지는 원래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가 차지한 곳으로 좁혀지는데, 그런 조건과 들어맞는 용성국은 섬진강 용성국밖에 없다.
섬진강 용성국은 옛 마한의 영역에 속하고, 마한이 무너진 다음에는 백제의 땅이 되었으며, 남원에서 섬진강을 통해 밖으로 나가거나 섬진강 하구에서 남원 쪽으로 들어갈 수 있어 해상 세력인 석씨족이 자리잡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대동강 용성국이 있었을 평안남도 용강(龍岡)의 옛 이름이 전라북도 남원과 마찬가지로 ― 용성(龍城)이기는 하나, 만약 탈해가 다스릴 때 용강에서 낙동강 유역(:가야)으로 달아났다면 어째서『수서』가 신라의 왕이 “원래 백제인”인데 달아나 신라로 갔다고 했는지를 설명하기 힘들고, 설령 “백제인”을 진짜 백제의 복속 세력이 아니라 백제가 정복한 지역에서 살던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역사상 백제는 평안도까지 올라간 적이 없다는 점, 용성국과 옛 마한 지역의 집 짓는 풍습이 비슷하다는 점도 탈해가 떠난 용성국이 대동강 용성국이 아니라 섬진강 용성국이라는 방증이 될 수 있다.
또 <탈해왕조>를 따르면, 탈해는 남해왕대에 건너와 서기 57년에 즉위해 나라를 다스리는데, 남해왕은 서기 4년부터 서기 20년까지 서나벌을 다스렸으므로 탈해는 서기 4년에서 20년 사이에 건너왔다고 추산할 수 있다.
서기 9년 마한의 도읍지가 무너졌고 서기 16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백제와 맞서다가 백제군에게 져 마지막 저항 세력도 사라져 버린 시기가 서기 17년부터 20년 사이인 것이다.
만약 탈해의 망명 시기를 서기 20년이나 그 뒤로 잡는다면, 탈해의 망명은 마한의 저항 세력이 무너진 뒤 서서히 마한의 옛 땅을 먹어치우던 백제군을 피해 달아난 일이라고 보아도 어색하지 않으며 당시 온조백제의 왕성은『삼국유사』권 2 남부여 조(條)에 기재되었듯 해(解)씨였다는 학설이 옳다면 “석탈해”란 이름이 뜻하는 바는 “脫解”(탈해) 즉 해(解)로부터 탈출(脫出)했다는 뜻이 되어 탈해는 온조백제를 탈출한 세력이 된다는 결론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게 된다.
결국 탈해는 서기 1세기경 백제군의 압력을 피해 남원에서 섬진강을 통해 남해안으로 내뺀 해상 세력의 우두머리이며, 당시 용성국은 섬진강 중류에 자리잡고 있었고 석씨족은 남원에서 김해로, 다시 김해에서 영일만으로 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위에서 계산한 탈해의 망명 시기는「신라본기」와〈탈해왕조〉,『가락국기』에 나타나는 연대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인데, 필자는 특히『가락국기』가 석씨족의 도착 시기를 끌어올릴 까닭이 없어 가장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 건국 연대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신라 진평왕 등에 대해 제칭(帝稱)을 하고 법흥왕 ․ 진흥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에 대해서도 ‘대제(大帝)’나 ‘제(帝)’라고 칭하며 891년에 세워진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에서 ‘대낭주(大娘主)’라는 표현이 보인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박창화의 위작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화랑세기(花郞世記)』의 기록이 이 의문에 답해줄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여 간략히 소개한다.
당(唐)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은 공(公 : 20世 풍월주 예원공)이 원광의 조카로서 글을 잘 쓴다고 하여 떠받들었다. … 당나라 재상이 … “가야가 그대의 나라를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았다는 말과, 그대의 나라가 가야를 부용(국)으로 삼았다는 말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라고 묻자 공이 “우리 나라는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 (서기전 57년)에 섰고, 가야는 한(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서기 42년)에 섰으니, 누가 옳은지 알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나라의 재상이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화랑세기(花郞世記)』20세(世) 예원공(禮元公) 조(條)
그러니까 서기 542년에 태어나 서기 640년까지 살았던 원광(圓光)법사의 조카인 원광이 당의 궁궐에서 신라가 서기전 57년에, 가야가 서기 42년에 세워졌다고 말했다는 것인데, 이는 고려시대에『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정리되기 전 이미 가야와 신라의 건국 연대가 두 기록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시기로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주며 나아가 이런 전승이 서기 6세기 이전에 굳어졌음을 증언한다. 가야가 서기 1세기에 세워졌다는『가락국기』의 기록은 결과적으로 신라인의 기록인『화랑세기』의 증언 때문에 객관성을 보장받은 셈이다.
필자는 서기전 1세기경 경상도에서 토광목관묘군(土壙木棺廟群)이 집단화되기 시작한다는 점과 이 무렵부터 자체적인 철기제작(鐵器製作)이 시작된다는 점, 가야의 영역으로 알려진 함안(咸安) ․ 창녕분지 내(內) 5세기대 최고위층의 고분군(古墳群)인 도항리(道項里) ․ 말산리(末山里) 고분군은 적어도 A.D 1세기대부터 6세기 전반(前半)까지 지배적(支配的)친족(親族)집단의 묘역(墓域)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조사결과, 1~2세기대 분묘(墳墓)군(群)은 김해분지내 양동리(良洞里)와 대성동(大城洞)에서 발견된다는 발굴 결과는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이사금 시기를 다룬 기록의 연대는 신빙성 있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이제 믿을 수 있음이 밝혀진 연대를 바탕으로 역사를 재구성 해 보자.
대동강 용성국과 요령성 용성국은 탈해의 부왕(父王)인 함달파가 태어나기 전 , 용성국 용왕(龍王)이 다스린 곳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1대를 평균 20년으로 쳤을 경우 용성국은 “28용왕”이 다스리던 약 560여년 동안 한 곳에 자리잡지 않고, 때에 따라 옮겨다녔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용성이라는 땅 이름이 대동강과 요령성에 같이 나타나는 까닭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대릉하(大凌河)에 자리잡았던 요령성 용성국이 맨 처음 세워진 용성국이라고 생각하며, 대동강 용성국은 그보다 후대에 세워졌거나, 요령성 용성국의 사람들이 옮겨 와 만든 ‘피난지’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해류(海流) ․ 조류(潮流) ․ 계절풍(季節風) 등 자연 조건에 영향을 받는, 일정한 거점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 제약성을 지녀 정치 ․ 역학관계에 변동이 없는 한 거의 변동이 없는 해양거점이 왜 세 번이나 바뀌었을까? 이 의문은 당시의 정치 상황과 주변국의 상황을 알 때만 비로소 풀린다.
서기전 195년부터 180년 사이에 기자(箕子) 일족의 망명지였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건국지였던 난하(灤河) 하류 동부유역에서 나라를 세운 위만(衛滿)은, 주변의 토착세력들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했고 그의 나라는 난하(灤河)와 갈석산(碣石山)으로부터 대능하까지로 추정되는 땅을 손에 넣었다. 이 때 대릉하 중류에 자리잡은 요령성 용성국은 크게 타격받은 듯하며 용성국은 이 때 요령성을 떠났거나, 아니면 서기전 114년 전한(:서한)이 동쪽으로 예맥과 조선을 뿌리뽑아 군(郡)을 설치하는 제1차 침공 때 한(漢)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지금의 평안남도 서남단 대동강 하구인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으로 달아나 대동강 용성국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서기전 59년 이전에 낙랑국(樂浪國)이 평안도로 밀려 내려오자 용성국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배를 타고 떠났으며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내려온 끝에 전라북도 남원을 찾아내고 그곳에 뿌리내린 듯하다.
남원과 이어진 섬진강 하구는, 해안선 형태가 매우 복잡하므로 만(灣)과 포(浦), 곶(串) 등이 곳곳에 발달하였고 리아스식 해안과 섬들로 인하여 물길이 매우 복잡하고, 특히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므로 조류의 흐름이 불규칙하다. 또한 무수히 많은 섬들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그 사이를 뚫고 수로를 찾아 항해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해양토착세력이 형성되고, 장기간 웅거하기에 좋은 조건이다. 용성국은 요령성에서 대동강 하구까지 항해할 정도로 원양항해 실력을 갖춘 해상집단이 세운 나라여서, 이런 조건을 뛰어넘어 섬진강을 거슬러올라가 남원이라는, 장기간 웅거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원은 동북쪽으로는 금남호남정맥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과 서북쪽으로는 호남정맥이,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가로막아서 섬진강 하구만 잘 지킨다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점도 용성국이 거처를 대동강 하구에서 남원으로 옮긴 까닭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단, 백제가 북쪽에서 압박하면서 남원도 위험한 곳이 되어갔고, 용성국은 그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섬진강을 떠났을 것이다.
이후 탈해는 김해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가야에게 밀려났으며(『가락국기』) 마지막으로 영일만을 찾아 강을 거슬러올라가 토함산에 전진기지를 두고, 그곳에서 내려와 경주 같은 산간벽지에 도읍하게 된다. 이것이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석씨족의 기원과 이동, 정착과정이다.
3)‘왜(倭)’와 용성국
이제 용성국의 위치를 살펴볼 때 가장 문제가 되는 ‘왜(倭)’의 위치와 정체를 살펴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倭’는 일본열도다. 그러나 일본열도의 “동북 1천리”는 태평양으로 그곳에는 나라는커녕 육지조차 없다. 게다가 『산해경(山海經)』,『논형(論衡)』,『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후한서(後漢書)』선비전(鮮卑傳),『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의 한(韓) 및 왜인조(倭人條),『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 등의 왜(倭)관계 기사를 거듭 고찰한 결과, 그곳에 등장하는 왜인의 거주지역이 화북이나 화남, 혹은 조선반도 남부에 조금씩 흩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고,『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도 고구려 왕족인 수성(遂成 : 고구려 차대왕[次大王])이 왜산(倭山)에 나가 사냥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김부식이『삼국사기』「잡지(雜誌)」지리(地理)에 실은 당 장수 이적(李勣 : 이세적)의 편지에서 고구려의 땅 이름 가운데 ‘평왜현(平倭縣)’이 나오므로 <탈해왕조>에 나오는 왜도 일본열도의 왜라고는 부르기 힘들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시사해주는 바가 크는 기록이 있는데,『산해경(山海經)』에 왜(倭)가 지금의 중국 하북성에 자리잡고 있던 연(燕)나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蓋國 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즉 개국(蓋國)이 거연(鉅燕)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으며 왜는 연에 속한다는 내용이다. 『산해경』의 기록에서『한서』「지리지」의 왜보다 이른 시기에 왜가 중국인에게 알려지고 있었으며 또한 왜가 연과의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후한 왕충(王充 : 27 ~ 100)의『논형』권 19 회국편에
주나라 성왕 때 월상(越裳)은 꿩을 헌상하고, 왜인은 창초(暢草)를 바쳤다.
는 기록이 나오고 제2대 주 성왕 대는 BC11세기로서, 이 시기의 일본열도는 아직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때이므로『산해경』의 기록이 다루는 시기가 확실하지 않다고 해서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최근 안휘성 박현(亳縣)의 원보갱촌 제1호분에서 “유왜인이시맹불(有倭人以時盟不)”이라 적힌 명문벽돌이 출토된 것도 중국 내륙지방의 사람들이 “왜인(倭人)”이라 불린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왜가 원래는 중국 내륙과 가까운 곳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명문은『산해경』과『논형』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산해경』에 나오는 연(燕)나라가 연 소왕(BC 311 ~ 279)때라는 풀이가 맞다면, 연나라가 산동까지 내려온 일은 있었지만 주로 산동 북부였고 그 기간도 고작 6년에 불과하여 랑야가 연나라에 속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연에 속한 왜는 산동 랑야가 아니라 연나라 불사약 무역항이던 갈석산 근처의 진번이었을 것이다.
왜가 하북성이나 요령성에 있었다는 학설은 용성국의 위치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던져주는데, 만약 왜인의 중국 기원설이 옳다면 지금까지 ‘전설상의 나라’로 여겨진 용성국의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탈해왕조>의 ‘왜’가 하북성이나 요령성에 있었다면, 지금의 요령성 대능하 중류에 있던 용성(龍城)에서 서남쪽으로 1천여리를 두고 떨어진 곳에 있는 셈이기 때문에, “용성국은 (왜에서 바라보았을 때) 왜(倭)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다.”는 구절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설령 정확하게 1천리는 아니라고 해도 1천이 “많은, 긴, 먼”이라는 관용적인 뜻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1천리를 ‘일정한 먼 거리’라고 풀이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필자는「고구려본기」와「잡지」에 나오는 ‘왜倭’자가 들어간 땅 이름도 왜인의 중국 기원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하는데,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한(漢)에게서 땅을 빼앗고 “요서(遼西) 10성”을 쌓는 등 요령성과 하북성, 중국 북서부를 줄기차게 쳤으므로 만약 그들이 자리잡은 곳에 ‘왜(倭)’라는 땅 이름이 있으면 그곳이 원래는 ‘왜( 倭)’라고 불리던 족속의 땅인데, 왜인들이 침입자한테 공격받은 뒤 다른 곳으로 달아나 땅 이름만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평왜현(平倭縣)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왜를 평정한’ 어떤 사적(事跡)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왜’는 요령성이나 하북성에 있으면서 동북쪽으로는 용성국과 교류했는데, 용성국처럼 흉노나 위만, 또는 고구려에게 밀려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고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탈해왕조>의 왜(倭)는 일본열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무리이며, 요령성 용성국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倭)’를 일본열도에 있던 선주민으로만 보던 기존 관점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제 4장 석(昔)씨족의 정착이 지니는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석씨족의 요령성 기원설과 해상을 통한 이동, 경주 정착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이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그들이 경주에 정착한 것은 우리 역사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말해야 할 것이다.
반도 남부지역(南部地域)의 사회문화변동을 밖의 영향을 배제하고 안의 요인과 자체적인 과정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점,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은 20세기 초에 풍미했던 ‘문화전파론’이 유럽 자본주의 세력이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에 발전된 문명을 세례 준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며 주민의 이동이나 정복보다는 상호 교류를 통해 문화의 유사성이 나타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들어 이에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필자도 그 점은 인정하며 문명은 문화요소를 서로 주고 받는 법이라고 생각하나, 이처럼 역사서에 분명한 사실이 나타나 있고 고고학적인 증거도 나왔다면 ‘이동과 정착’은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현재로서는 석씨족의 이동과 정착, 정복을 공개하지 말아야 할 까닭을 찾을 수 없다.
필자는 다만 종래에는 이 현상이 ‘우수한’ 문화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설명되었다면, 이제는 석씨족이라는 ‘인간집단 자체’가 때에 따라 밖의 압력이나 침입을 피해 옮겨다니면서 마지막에는 경주로 내려와 새 나라를 세우고 정착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고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역사를 ‘문화의 전파’나 ‘토착민의 선천적인 우수성에 따라 스스로 이루어진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사관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은 만큼, 이제는 열국시대(열국시대)의 역사를 ‘인간집단의 이동’과 정착과 정복, 그리고 ‘다양한 무리의 만남과 헤어짐, 갈라짐, 섞임’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특성’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융합은 작은 사회들이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그 구성원들의 행복을 도모하려고 서로 합쳐지기로 결정하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힘센 자가 강제로 정복하거나, 아니면 밖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뭉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석씨족의 정착은 전자(前者)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인류사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며,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사를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를 사랑한 민족이었다는 착각이나 인간집단의 성질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착각, 또는 국가의 영토 확장이나 이동이 위대한 제국을 확장하려는 즐거운 일이었다거나 모험정신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바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박/석/김씨족의 이동과 정복, 그리고 정착을 살펴야 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명은 떠난 지 이미 2천여년이 흐른 영토에 집착하거나, 인간집단 또는 영토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옛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똑바로 밝히고 만약 그 일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다. 부디 이 졸고가 역사에 대한 환상을 깨고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제 5장 : 결론
지금은 월성(月城) 석(昔)씨라는 이름으로 반도에 살고있는 석씨족은 원래 요령성 대능하 유역에 살던 해상집단이었다. 이들은 용성(龍城)이라는 성을 거점으로 강과 바다를 따라 무역하거나 어로활동을 하면서 살았고, 비교적 넓은 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문화와 만났기 때문에 자신들과 사는 방식이 다른 유목민족의 문화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위만(衛滿)이 한(漢)에서 망명해 기자족(箕子族)의 후손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주변을 침략하자, 용성국은 압력을 견디지 못해 대동강 하구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용성국을 다시 세웠다. 이후 한동안은 그곳에서 살았으나 위만이 세운 나라가 한(漢)에 무너지고 한(漢)과 흉노가 정복전쟁을 거듭하자 요서나 하북성에 살던 사람들이 요동반도나 평안도로 밀려들어와 용성국의 입지가 흔들린다.
서기전 2세기경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왕국을 빼앗기고 밀려들어오자, 용성국은 난민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보다 안전하고 난민들이 덜 몰리는 곳을 찾아 떠났다. 그들은 남쪽에서 남원을 찾아냈는데, 그곳은 그들의 활동 무대인 바다와 섬진강이라는 통로로 이어져 있으면서도, 세 방향이 산줄기로 둘러싸인 내륙지역이어서 외부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자리잡고 서기 1세기까지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백제가 서기전 1세기에 세워져 서기 1세기경 마한의 왕실을 무너뜨리고 남쪽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마한의 저항 세력이 백제에 죽임을 당하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하나둘씩 무릎꿇으면서 용성국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용성국은 마지막으로 남원을 떠나 아직 백제군이 닿지 못한 새 땅을 찾는데, 이 과정에서 김해를 정복하려다가 가야를 세운 수로왕 세력에게 밀려 실패하고 반도의 동남쪽 한구석인 영일만으로 가 그곳에서 경주로 쳐들어가 토착민을 정복한 다음 신라라는 나라를 세운다.
이 사실은 우리의 열국시대(列國時代) 역사가 인간집단의 이동과 정복, 그리고 정착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옛 기록과 고고학 유물이 이를 증언하는 이상 우리는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신화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인간집단의 이동과 타 집단과의 섞임으로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진다는 사관은 종래 우리 역사학계를 지배해온 평화주의적 사관이나 인간집단의 형질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사관, 문화 전파설이나 자생적인 발전관이라는 사관에서 벗어나, 신라의 상고사, 나아가 우리의 상고사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이런 연구가 계속 이루어져 국가라는 복잡한 사회나 영토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참고서적목록은 생략함-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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