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래잡이가 또 문제로 대두 된 것 같다. 정부가 과학적 연구조사용 포경을 허가할 예정임을 발표한 것에 대하여 제주 출신 국회비례대표의원의 반대로 문제가 불거졌다. 아무리 요즘 고래 개체수가 회복되었다고 하나 고의로 포경하여 상업적 유통까지 가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정부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서 최종 결정을 해야 마땅하다.
고래잡이 하면 미국의 19세기 가장 유명한 작가 허만 멜빌 < Herman Melville >의 < 모비딕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헤밍웨이가 약 100년 후에 유명한 < 노인과 바다 >를 쓰고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생각하면 멜빌이 가엽다는 생각이 든다. 멜빌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엔 시대를 너무 앞서 살았기 때문에 살아생전 상대적으로 제대로 평가를 못 받은 것 같다. 그의 작품을 인정 받는데 7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상당한 기간 동안 유럽문학에 대한 짝사랑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걸로 생각된다. < 모비딕 >의 서언에 나오는 고래에 대한 80여개의 발취문과 본문에 나오는 방대한 량의 성경을 비롯한 수많은 신화와 고전들의 인용은 그당시 대다수 비평가들이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폄하했거나 상업적으로만 평가하지 않았겠나 생각된다. 작가의 실제 경험도 유효했겠지만 대다수 자료를 독서에 의존하던 그 시대에 그렇게 많은 자료를 입수하고 적재적소에 인용하기 위해서 멜빌이 읽었을 독서량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어찌 뱁새가 황새의 뜻을 쉬이 이해했겠나.
우수한 모조품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경제적이다. 그럴수록 진품은 빛을 발하기 더욱 어렵다. 보통사람들은 항상 진품을 이해하는데 한 발 늦기 마련이다. 소설의 말미 부분에서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직전 작중 화자의 예기는 작가 자신의 예기일 수도 있다. “ 나는 태양에 등을 돌린다. --- 고독한 삶의 고독한 죽음 ---- 내 최고의 위대함은 내 최고의 슬픔 속에 있다는 것을 지금 나는 느낀다. 지나간 생애의 거센 파도여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또한 성경 욥기와 영국시인 존 드라이던 < John Dryden >의 [기적의 연대]에 나오는 영생의 괴물 리바이어던 < Liviathan >을 인용한 것은 멜빌도 고래를 단순히 거대한 괴물에 비유한 건지 아니면 전제군주제를 옹호했던 토마스 홉스 < Thomas Hobbes > 나 존 드라아이던과 같이 국가에 비유한 건지 그리고 그 거대국가에 저항하고 싶었는지 지금은 멜빌에게 물어볼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