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69)
봄 /박 철
그 향기 아직 뜨거운
저 꽃의 마음을 안다
순대며 떡볶이 명잣빛 섬김을 뒤로 하고
구석에 등 돌려 오뎅 고치를 삼키는 목멘 외로움
그 외로움 혹여 세상이 알아챌까
유리창 밖으로 얼굴 들지 못하고
없는 고향 흰 눈이나 뿌리며
행여 누군가 알아볼까 숨죽여 뜨건 국물 넘기는
병든 노구의 기울지 않는 향기
그게 꽃이 아니고 무에냐
봄 날 /이일영李逸永
봄은 바삐
세상의 둘레를 열어젖히면서
만물 모두 움추린 어깨를 피고
생명을 숨쉬라도 손 짓한다
소파에 누워 하품하며
느리게 묵은 해 돌아보는데
가슴 풀어헤친 눈 부신 햇살
들판 가득한 시냇물 소리가
어서 나와 꽃구경하라고
어린 손녀처럼 재잘거린다
오, 생기 넘치는
이 봄날 아침 나는
말할 수없는 기꺼움으로
유리창 활짝 열어 젖히고
가득 가득 해맑은 봄기운
쓸어 담는다
봄을 선물합니다 /김설하
일상을 알리는 알람소리
간밤 헤매던 꿈 지우면
눈두덩 비비며 느리게 일어나
창밖 서서히 밝아오는 세상을 맞이합니다
사랑표시 그려진 종이컵
오랜만에 먹빛 커피 채우곤
살가운 봄바람 걸치러 나서는 길
새벽운동 나온 부지런한 사람들
싱그러운 미소 얻을까요
텃밭 북데기 속 봄동 파랗게 웃으면
유년의 아득한 추억 건질까요
안개 휘감긴 강 쪽 거기께
은근한 그리움 드리워도 좋겠어요
붉게 피어오르는 동녘
골목 저 끝까지 어둠 달아나고
걸음마다 따라붙는 기척
옆구리 간질이는 이 기척 무엇인가요
그래요, 봄이랬어요
자꾸만 머리칼 쓰다듬고 목덜미 더듬잖아요
앙큼하게 허리 휘감으며 말을 거네요
줄어드는 커피 대신
살랑살랑 봄바람 담기는 소리
폭삭해진 흙 살찌는 소리
만물 소생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
당신께 선물합니다
쉿,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살짜기 열어보세요
난 부끄럼 타는 봄이랍니다
봄을 낳는 나무들 /우당 김지향
후미진 골짜기
흰 보선 신은 채
볼록볼록 배를 안고
기도하는 나무들
남녘땅 익은 바람이 건너와
톡, 톡, 건드릴 때 마다
꽃송이 하나씩 낳는다
아프고도 괴로운 겨울을
만석의 몸으로 버티더니
아직도 머리엔 흰 비녀 꽂은 채
줄줄이 꽃송이 낳기 바쁜 나무들
(산기슭마다 나무들의 아픔이
빨갛게 피었네)
저 터진 꽃송이에서
우리는 깨어있는 삶을 꺼내보며
가슴에 햇덩이 하나씩 품어
꽃송이의 삶에게 열기를 보낸다
후미진 골짜기
산꿩이 홰를 치며
목청을 뽑는 긴 봄날
창 열고 내다보면
아직은 맵싸한 산이마
절반은 안개에 싸여있네
봄 /심홍섭
봄은 왔는데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자들
들을지어다
들판의 새순의 합창의 소리를
불임자들은 일어나라
대자연과 함께
생명을 낳고
봄산 /권달웅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산에 들어서면
잃어버린 날이 떠오른다.
봄 산에 들어서면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미운 사람의 마음까지
점점 따뜻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산 꿩이 알을 낳는
봄 산에 들어서면
진달래 여린 눈망울에
쓰라렸던 지난 날
눈물이 어린다.
그리운 사람아,
이 분홍빛 바람 속에서는
얼었던 눈도 사랑도
절로 녹을 수밖에는 없다.
절로 타오를 수밖에는 없다.
도화 아래서 봄 /손성태
이사 온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베어 버린다는 게 그만,
대추나무를 베고야 말았다
집주인은 붉으락 푸르락
10만 원으로 애틋하게 달래면서
속으론 웃었다
대추나무 잘못이다
마당 가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가 석류든 보리수든
잿빛 겨울은 복숭아나무로 둔갑시켰고 나는,
거슬리는 기억을 시원하게 캐 팽개치듯
둥치를 자르고 뿌리째 뽑아버렸다
덕분에 나무는 매화, 산수유, 개나리, 살구꽃 뒤로
벚꽃과 더불어 도도하게 피었다
어떻게 죽임을 피하고 살아남았을까
귀신도 눈을 피한다는 복숭아
나무가 틔우는 도화
아래에서 쳐다보는 연분홍
꽃잎 속의 선홍빛 핏방울
절정의 향긋한 내음에 봄이 비틀거린다
삶은 늘 열매에 취해 갈증이 일지만
이렇게 대추를 자르고 도화를 보게 된 것은
내 생의 마당 가에서 썩 잘했던 일이고
부푼 종기에 고약을 붙여 뿌리째
뽑아내는 일이었다
간 봄 /천상병
한때는 우주 끝까지 갔단다.
사랑했던 여인
한봄의 산 나무뿌리에서
뜻 아니한 십 센티쯤의 뱀 새끼같이
사랑했던 여인.
그러나 이젠
나는 좀 잠자야겠다.
운명의 봄 /이원문
긴 머리에
깡통치마
여엔일곱의 봄이었나
그 열여덟
열아홉에
보리 눕혔고
찔레꽃 피던 날
소쩍새의 밤
그날 밤 운명 따라
뒷산 길로 떠났다네
그 봄이 오면 /박인걸
계절이 흘러도 계절 밖에서 사는 사람은
가슴에 만년설이 쌓인다.
봄을 느껴본 것은 아득한 신화의 모서리였고
겨울과 겨울 사이는 언제나 나에게서 삭제되었다.
내가 기댈 언덕은 하늘뿐이었고
내게서 도망치는 운명을 붙잡지 못했다.
삶은 조화를 잘 이룬 인체 비례의 카논이 아니다.
해독(解讀)이 까다로운 파블로 피카소의 화판이다.
이항대립의 모순구조는 원시부터 존재하고
무차별적 무한경쟁은 약자가 먹잇감이다.
기회, 자본, 재능, 지식의 불균형은
없는 자가 있는 것까지 빼앗겨야 했다.
계층상승의 사다리가 없는 사회는
풍족(豐足)한 자만 언제나 살이 찐다.
겨울만 사는 사람은 항상 빈털터리다.
부여잡을 것 없는 축축한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가라앉는 암사슴이다.
하지만 하나도 서럽지 않다.
추운 계절도 잘 적응하면 여름이 되고
자족(自足)의 비결은 빈주머니도 채우며 산다.
가슴깊이 동상(凍傷)자국이 몇 개 있지만
그 봄이 오면 새살처럼 치유될 것이다.
침몰하는 봄 /강재남
봄이 월장했다
어린개나리 안고 저 봄 노랗게 미쳤다
뒤꿈치 들고 살폿 내려앉던 어둠을 틈타 초경도 않은 어린것 안고 밤사이 무슨 지랄 떨었는
지 담장에 개나리 초죽음이다 방싯방싯 연분홍 단장한 진달래나 하늘 높이 한껏 뽐내는 자목
련, 혹은 잎 사이 새초롬 여인의 자태 품은 동백이나 범할 것이지
출근하자마자 신문을 펼쳤다
어젯밤 여중생이 비닐하우스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로 우울한 아침이다
또래 남학생들에게 윤간 당했단다 썩을 세상, 자식 키우기가 만만찮다
긴 한숨 토하며 커피를 마신다 목구멍으로 검은 물이 차오른다 내 몸도 검게 변한다
온몸은 검은 꽃을 피우고 낮은 꿈이 발자국도 없이 땅속으로 곤두박질친다
봄, 너는 뭘 했지?
그렇군 너는 참, 소녀가 오는 것을 보았지 저 건너서 저녁이슬 몇 방울로 발바닥 적시는 소
녀를 쯔쯧, 참새 떼에게 꽃송이를 두드리라 해놓고 그 건방지고 도도한 풍경으로 소녀를 홀렸
던 게야 달빛 모가지 비틀어 창백한 언어로 소녀를 홀렸던 게야
소녀야 너는 죽었다
월장하는 봄에 목 졸려 피살되었다
꽃 속에 새를 보았니 발아래 피었었던 유령 같은 꽃을 보았니
찢진 네 심장을 밤새 기우던 개나리 그 초췌한 낯빛을 보았니
신음하는 달빛아래 지지거리며 침몰하는
아아 봄,
저 빌어먹을
봄 나무의 기억 /이은유
햇빛은 남쪽으로 기울고 바람은 북방으로 불었지요.
햇빛이 기우는 동안 그곳에는 꽃이 피었다지요.
꽃소식이 들리는데도 이곳에는 땅의 기운이 서늘했답니다.
봄 나무 아래에 앉아 꽃이 피기를 기다렸습니다.
남쪽과 북방 사이의 거리는 새들이 날아간 자리,
나비의 날개와 새의 젖은 깃털처럼 햇빛과 바람 사이는 멀기만 한데
꽃은 피지 않았으므로 일부러 불을 놓았었지요.
봄꽃이 피어나도록 불꽃을 피워 올렸지요.
불길에 북방의 날씨는 따뜻해졌을까요.
불꽃과 봄꽃 사이 남쪽과 북방의 거리는 가까워졌을까요.
꽃나무는 기억합니다.
햇빛이 스며드는 봄날의 말을 불빛이 스러졌다 일어날 때마다
북방의 바람이 대신 전해주고 있었겠지요.
봄 나무는 기억할 것입니다.
불길이 일어나는 동안 그곳과 이곳 사이
하역의 당신으로부터 여기까지 봄 길이 다가오고 있었을 테지요.
봄 /이용임
겨울, 나의 뱀이 벗어두고 간
은빛 무늬
난잡한 그늘에 들어
꿈을 탐한다
고요한 무릎의 파문에
양 귀를 묻고
이 봄날 저녁 /강세환
이 봄날 저녁
어느 옛 시인의 연인이 살던 집 뒤란을 홀로 거닐었다
뒤란 담장 아래엔 낯선 꽃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서로 함께 모여서 살고 싶었을까
옛 시인의 늙은 연인도 시인이 되었을까
저 꽃은 내가 이 집 주인이 아닌 것도 아는 걸까
또 오늘 저녁 그냥 지나가는 것도 알고 있을까
저 꽃은 누군가 한 시절 거닐었던 뒤란을
또 하염없이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을까
삶은 결국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그곳에 머무는 걸까
나는 왜 남의 집 뒤란을 한번 걷고 싶었을까
저 개울 건너면 빈방 한가운데 누군가 향 한 자루 꽂아놓았더군
한쪽 벽에 기대어 벽면의 초상화를 바라보면
옛 시인의 연인이 차라도 한잔 꺼내놓을까
빈방엔 또 누군가 꽃 한 묶음을 두고 갔더군
저 꽃은 또 어디서 왔을까
저 꽃의 침묵은 이 집의 주인이 떠난 것도 알고 있는 걸까
이 집의 주인이 이 집을 통째 버렸듯이
나도 곧 통째로 다 버려야 할 것 같다
그게 무엇일까? 나의 시?
저 꽃과 침묵과 연인과 슬픔과 물소리도
제 삶을 남에게 맡겨놓고 떠난 것 같은
이 봄날 저녁
봄맞이 /권오범
세월이 갉아먹어 탈 난 속
병원에 입원해
수술받고 돌아와
더 늠름해진 이순신 장군
멀찌감치 뒤에서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오른손 들어 맞이해주던 세종대왕
크레인 샤워기로 목욕해 흐뭇해하던 날
햇볕이 막무가내로
어깨 비집고 들어와
등 근지럽게 미끄러져
나도 발가벗고 뛰어든 목욕탕
이렇게 개운한 날
바람아, 공연히 싸돌아다니지 말고
얼른 마당이나 쓸어라
오늘밤 비만 넉넉히 내려주면 금상첨화일 것 같으니
봄은 희망을 /임영준
바람을 타고 살며시
뒷동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간절한 가슴을 열고
희망 한 톨 심었습니다
해묵은 인내를 털어버리고
초록 주단을 활짝 펼쳤습니다
새봄이 시집 가는 날 /이용일
새봄이 시집 가는 날
벚꽃 닮은 화사한 웨딩드레스
함박웃음 가린 눈빛
가슴에 한아름 목련꽃 부케 안고
따스한 봄볕 밟으며 예식장 들어 선다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복사꽃 싸리꽃 배꽃
신부 친구들의 아릿한 미소에 홀린
선 머슴들
들로 산으로
연둣빛 연서戀書 뿌려대고
짓궂은 마파람은 모래먼지 흔들어 놓는다
뽀얀 달빛 밤새 피는 밤
엿보는 새벽에 꿀밤을 놓으니
이를 어쩌나
새벽이 울고 마네
봄소식 /이풍호李豊鎬
유별나게
비가 오지 않는 로스앤젤레스에
폭풍우가 불어왔다.
오년째 드는 가뭄을 끝내주려나
태평양에서부터 시작한 비가 땅을 적시고
산간에는 서너피트의 눈이 쌓였다.
오지않던 비가 내리고
기적같은 晩雪,
환상의 눈이 쌓여도
늘 푸른 잔디로
새봄을 느끼지 못하는데
동부 펜실배니아의 黃仁淑 시인으로부터
봄소식이 왔다.
... 어제는 진눈깨비까지 내렸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봄이 왔어요.
나뭇가지들도 부드러워졌고요.
오월이 오면 서울에는 벚꽃이 한창이겠지요...
오월이 오면
仁淑 시인이 서울에 가서
어떤 봄소식을 다시 보내올까?
내 젊은 날의 고뇌와 꿈이
아직도 살아 생생하게 남아 있는 땅,
고국의 봄이 그립다.
고향들에 봄비가 내리다가
하늘이 활짝 개이면
느리재(嶺) 고개에 올라
끝 없는 無限川물줄기를 굽어보던 어린 시절
먼 데서 봄이 오듯 가만가만
꽃가마타고 시집오던 색시들도 고왔지.
먼 추억을 새기면서
찾아 온 봄소식은
마음 잘 가꾼 꽃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