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우리치오 카텔란 |
현실과 픽션 사이에 존재하는 예측 불가능한 유머전법
통상 작가로 인정되는 절차는 정규미술교육 코스를 밟아 갤러리 혹은 미술관, 비엔날레를 포함한 대형기획전 등 제도화된 관행을 통해 데뷔전을 치르는 것이 기본이다. 아트페어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거나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된다면, 혹은 권위 있는 미술상을 받는다면 남보다 빨리 스타덤에 오를 수 있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한 수순을 따르는 예가 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은 이 모든 ‘유효하고 가능한 조건’에서 제외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미술교육은커녕 28세가 되도록 미술관과 갤러리 문턱을 밟아본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사회의 권력자도 아닌, 그저 평범하게 트럭운전사인 아버지와 청소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시체공시소에서 일하거나 간호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 가구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미술을 접하였고 베니스비엔날레 단골 작가로 성공한 케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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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그 흔한 작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에 부응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3년 뉴욕 소호 다니엘뉴버그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 이유는 고상한 샹들리에가 달린 공간에 살아 있는 당나귀를 감금시킴으로써 전시공간의 폐쇄적인 면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던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불평과 결국 동물애호가협회의 반대로 단 하루 만에 전시를 접어야 했기 때문이다. 샹들리에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미술계를 의미하고 당나귀는 그 안에 갇힌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작가로서 당연히 제시할 수 있는 우의적인 창작방식이었지만 관객들과 평자들의 입장에선 단지 불온(?)하고 불편하며 불쾌한 작품으로 비춰졌다. 결국 나름 열심히 준비한 첫 개인전은 그렇게 도루묵이 되어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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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이쯤에서 관심 있게 들여다봐야할 부분은 작품 그 자체보다 어떤 유무형의 화두가 작가에 의해 제시된 시점부터 이에 반응하는 불특정 다수의 행동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카텔란식 유머에 있다. 그래야 그의 작품들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러한 내러티브들을 읽는 것은 동시대 미술의 한 방향에 견줘 매우 흥미롭고 쏠쏠한 재미까지 더한다. 높아지는 카텔란의 유명세와 달리 액션에서 오는 가시적 충격효과로 인해 작품들은 줄곧 아트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일례로 <Another Fucking Ready-made>, <교수형에 처하는 아이들(Hanging Kids)>과 <9번째 계시(The Ninth Hour)> 등은 주어진 공간과 상황에서 이미지들과 상상력을 교환하는 와중에 만들어낸 전혀 예기치 못한 작품으로 작가 특유의 유머전법이 십분 발휘된 작품들이랄 수 있다.
이중 <Another Fucking Ready-made>는 작품이지만 사회적 관점에선 아이러니하게도 절도의 증거물이다. 카텔란은 네덜란드의 데 아펠 재단(De Appel Foundation)의 그룹전에 출품할 작품을 근처 갤러리에서 훔쳐와 전시했고 결국 경찰이 개입하며 일단락되었으나 예술적 소재의 허용 범주에 대해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에 카텔란은 “절도가 아니다. 작가는 깡통 쓰레기를 포함해 모든 것을 소재로 택하며 그것은 역발상의 비평인 레디메이드식 논리를 펼친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응수했다. 뒤샹이 오래전 일반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고선 ‘예술’이라 했다면 이미 예술이 된 작품을 미술관에서 도로 꺼내와 전시하는 것도 엄연히 레드메이드가 아니겠느냐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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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에 해당한다. 1999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의 <9번째 계시(The Ninth Hour)>(퍼블릭아트 9월호 표지)는 우주 저편에서 온 운석이 창문을 뚫고 날아와 요한 바오로 2세를 덮쳤다는 설정으로 폴란드의회와 가톨릭계를 비분강개하게 만들었다. 원래 이 조각은 영국 왕립 아카데미 미술원에서의 <계시 : 현대미술의 미와 공포>전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실제 사이즈와 똑같이 만든 극사실적인 교황 조각이 붉은 융단 위 돌에 깔린 채 누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외롭고 버림받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교황도 인간일 뿐임을, 그리고 평등주의 기념비로 비춰졌다. 하지만 폴란드의회는 ‘믿음에 대한 무례함’ 혹은 ‘욕지기나는 미술’이라며 열을 냈고 의원 2명이 발에 떨어진 운석이라도 ‘치워드리겠다’며 직접적인 물리적 행사를 가하려 하기도 했다. 이러한 거센 반응에 작가는 “가톨릭과 신교도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두 종교에 존재하는 희생이란 항목에 대해 자신의 희생과 일치시켰을 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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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후일담 탓인지 이 작품의 두 번째 버전은 맨해튼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02억 원(886,000달러)에 낙찰되었다. 이와 같은 카텔란의 사이코적 재치는 실물처럼 만든 아이들 인형 3개의 목을 고목(밀란의 마지오 24 광장에 있는 가장 오래된 나무)에 매단 설치작품 <교수형에 처하는 아이들>에서 더욱 반짝인다. 2004년 이탈리아 니콜라 투르사르디(Fondazione Nicola Trussardi) 재단이 의뢰한 이 작품이 내걸리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아이들의 눈과 형상을 통해 현실의 분열적인 모습, 즉 유실되고 손상된, 그리고 희생된 모습으로 재현하여 공포와 긴장에서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 작가의 의도였지만 극화된 작품을 둘러싸고 대중들은 물론 미술계 내부에서조차 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잔혹동화나 전설 혹은 오래된 종교의식, 전쟁 등 제각각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관객들도 없진 않았지만 이 작품에 불만을 품은 한 행동주의자에 의해 두 개의 조형물이 잘라나가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더구나 작품을 철거(?)하는 도중 떨어져 다치는 사고가 일어나 결국 해당 작품이 철거되는 슬픈 역사를 간직해야 했다. 이외에도 자신의 딜러를 십자가에 못 박힌 자세로 갤러리 벽에 다량의 테이프로 부착시켜 놓곤 방치해 기절한 딜러가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간 경우도 있는 등 카텔란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논란거리를 몰고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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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에는 이처럼 제도화된 미술을 전복시키는 행위들도 적지 않았고 이는 언제나 파격이었다. 베니스비엔날레에 다섯 번이나 초대될 만큼 역량을 인정받는 카텔란이지만 특유의 작업방식(?)엔 변함이 없었다. 1993년 열린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그는 자신에게 허용된 전시공간을 이탈리아 향수 회사의 광고 에이전트에게 팔아넘겨 ‘스키아 파렐리’라는 새 향수 제품을 선전하는 장소로 쓰게 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정보와 광고의 가치를 논평으로 판단하였다.”며 “관중 앞에서 나의 실패를 인정함에 대한 더 많은 것이 있었다.”고 말하곤 낄낄거렸다. 1999년 개막식에선 지면 위로 불쑥 나와 있는 두 손을 제외하고는 수도승을 땅속에 묻는 작업을 3시간여 동안 펼치고 끝내, 관람자들은 전시 기간 내내 수도승이 떠난 흔적만을 상상해야 했으며, 다시 2년 뒤 야외 프로젝트로 팔레르모(Palermo) 쓰레기 더미 정상에 ‘허리우드’ 간판을 재창조하는 마지막으로 강제퇴위 당하는 권력의 상징으로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 작업으로 비틀린 권위와 제도에 대한 도전을 감행했다. 그리고 약 150명 이상이 전세비행기를 빌려 이 작품을 보러왔다.
카텔란은 단지 유머일 뿐, 하고 싶어서 했을 뿐 특별한 사회적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어떤 일련의 사건이 연상되는 작품들도 더러 있음이 사실이어서 ‘사회적인 무관계성’이라는 그의 발언마저 또 하나의 역설로 읽혀지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여러 작품들은 사회적 관계성이 깊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전시장 벽을 따라 뒤집혀진 상태로 세워진 경찰관 왁스조각<Frank and Jamie>은 1999년 디알로(Amadou Diallo) 사건(경찰관들이 우범지대에 사는 무고한 서아프리카 이주민을 우발적으로 죽였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과 911테러, 뉴욕경찰들을 연상시키는 작품이 그렇고, 토론토 ‘Ydessa Hendeles Art Foundation’에서의 작품은 히틀러가 10살짜리 꼬마로 변신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고 있거나 나치 친위대의 인사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오른팔들은 벽을 뚫고 치켜들고 있었다. 그밖에도 잡지를 출판하거나 가상의 재단을 만들어 상을 수여하는 행위, (이름도 코믹한)캐리비안 비엔날레를 창설해 참여 작가들을 모두 캐리비안해안에 휴가를 보내는 등의 행위에서 보이듯 그의 작품들은 창작에 있어 역발상의 강렬한 수법과 사회적 관계성을 한껏 뽐내기도 했다.
![]() <Ave Maria>, 폴리에탄, 금속, 옷, 페인트, 2007, Tate Modern, London Courtesy of the artist Photo by Attilio Maranzano |
이러한 카텔란을 두고 어떤 이는 네오개념미술가로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그가 “삶은 규제와 규정들에 의해 이해되는 것이며 경계를 없애거나 변화시키지도, 전복하거나 애매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다.”라고 밝혔듯, 작품이 다분히 전위임에도 치유가 아닌 단지 증상, 징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웃음 뒤에 진지함을 담고 있다. 때문에 다종 다기한 방법으로 펼쳐내는 방대한 작품세계를 어느 한 가지로 묶는 일은 어쩌면 얄팍한 지식으로, 어쭙잖은 잣대로 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여 본 글을 쓰는 기자는 줏대 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대표적인 작품 개개를 나열하며 약간의 해석을 섞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작품을 묶을 수 있는 고리를 찾으려고 삽질만 수십 번 했다. 또한 국내에 많은 정보가 없는 그에 대해 좀 더 쉽게 알리고자 하는 측면도 컸다.) 그러나 그 와중에 발견한 중요한 단서는 그가 현재에도 의미가 있으며 더 먼 미래에도 분명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 보석 같은 작가임에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다. 제도와 시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미술판의 세태에 정곡을 콕콕 찌르는 진보에서 출발해 여러 미술관 혹은 갤러리에서 섭외하려고 안달할 뿐만 아니라 작품가 역시 푼돈에서 거한 목돈을 내놓아야만 살 수 있는 작가가 되었음에도 보수로 귀결되지 않고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입장도 수용하지 않은 채 여전히 곁길로만 탈선하고 있는 특별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카텔란의 작품세계를 ‘똑 부러지게’ 정의하긴 어렵지만 ‘킹왕짱(정말로 최고)’인 것만은 확실하다.
서정임 퍼블릭 아트 기자 |
첫댓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