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987년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면담하는 정주영 전경련 회장. |
또 사업구조 다각화를 위해 뛰어든 금융업과 무역업에서 정주영은 두각을 보였다. 동방화재보험(현대화재해상의 전신)은 자동차보험업계에서 정상을 달렸고, 뒤늦게 출범한 현대증권도 서서히 뿌리를 내리며 업계에서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정주영은 무역업에도 진출, 현대종합상사를 창업하면서 1990년 이전까지 ‘6년 연속 업계 1위’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현대종합상사가 1989년 인도네시아 베카시공단 개발사업을 수주한 것은 국내 최초의 해외공단 개발사업 수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정주영은 사업다각화에 주력하면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열사 60개, 근로자 21만명을 거느린 거대한 ‘현대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정주영은 ‘노동자’를 사투리로 ‘뇌동자’라고 발음했다. 스스로를 항상 ‘뇌동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들의 작업복에서 배어나오는 땀 냄새를 사랑했고, 그들의 진지한 눈빛과 질박한 웃음을 사랑했다. 햇볕에 그을리고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에 깃든 그들의 열정과 패기를 사랑했다. 정주영은 재계 인사들과 어울릴 때보다 회사 노동자들과 어울릴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과 있을 때 그의 꾸밈 없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고, 그들과 운동을 할 때나 여흥을 즐길 때 그의 객기 또한 한껏 발휘되었다.
그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직원수련회 등에서 20대 젊은 직원들과 씨름이나 팔씨름을 하기도 하고 테니스나 야구장에서 그들과 몸을 부딪치고 땀 흘리면서 행복해 했다. 그럴 때면 그의 얼굴은 소년처럼 붉게 상기되곤 했다. 평생 그가 노동자에게 가졌던 애정과 동료의식은 그의 인성에 깊이 뿌리박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채 뼈가 굳기도 전인 어린 시절에 아버지 밑에서 허리가 휘는 농사일을 해봤고 고향을 떠나 하루 세끼 벌이를 위해서 인천부두에서 뱃짐을 날랐으며, 고려대학교 본관 공사장에서 돌짐 지고 숨이 턱에 차도록 사다리를 오르는 강도 높은 중노동을 해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지 고통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땀 흘려 성실히 일하는 노동 자체에 항상 삶의 귀중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본디 돈을 벌고 큰 사업가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다. 늘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부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재벌이 아니고 “부유한 뇌동자”라고 말했다. 대기업 총수가 된 그가 스스로를 ‘노동자’로 분류한 데는 그만큼 진지한 내면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1987년 이른바 6·29선언, 봇물처럼 전국을 휩쓴 노동쟁의는 그동안의 제도적 억압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 폭력화하였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신군부정권은 노동자들의 표를 의식해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었고, 한국의 주요 수출시장인 선진 각국에서는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노동자들과 연기로 휩싸인 생산시설들을 날마다 보도하고 있었다.
그동안 땀 흘려 쌓은 한국의 경제기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사용자 주체인 전경련에서는 재계 대표들이 연일 심각한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입장에 있던 정주영은 그러한 사태에서도 노동자들을 매도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노동자들에게 기업과 경제의 실상을 솔직히 이해시키고, 서로 인내하고 양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우리 ‘뇌동자’들의 땀과 희생이었음을 늘 상기시켰다.
세계의 기업가들뿐 아니라 세계의 정세를 주도하는 정치가들에게도 한국의 현대 정주영은 대단히 익숙한 이름이다. 그들에게 정주영은 극히 열악한 조건에서도 자동차·조선·중동건설 등 기적 같은 대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한국의 눈부신 성장을 견인한 경이롭기 그지없는 기업인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들은 그런 정주영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 때문에 민간경제인 자격으로 한국의 대통령을 수행하여 유럽이나 동남아 등 외국을 순방할 때면, 방문국들의 정치인들이나 기업계는 대통령에게는 의전상 의례적인 예우를 할 뿐 정주영에게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서, 정부수행원이나 정주영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정부에서 각별히 신경을 쓰는 순방국 언론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막상 대통령의 방문 의미나 일정은 통상적인 언급 정도에 그치는 반면, 정주영의 성공 이야기나 그가 제시하는 자국과의 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기사를 대서특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그를 ‘한국 경제의 나폴레옹’이라고 평했다.
정주영은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 폰 하이에크, 헨리 키신저 등 당대 세계적 석학들과의 만남 기회를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했다. 경제나 기업경영과 같은 주제뿐 아니라 사상·정치·문화 등 사회의 미래·과학기술의 발전 방향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이야기에 심취했으며 그들로부터 거시적 비전에 관한 영감을 얻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들 머릿속에 한국의 저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에 걸쳐 정주영이 전경련 회장이라는 위치를 활용하여 한국의 정치·외교에 크게 공헌한 부분이 있다. 이 시기는 한국이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10월유신, 그리고 박 대통령 시해 이후에 이어진 신군부 독재시대였다. 이를 계기로 악화된 한국에 대한 세계 여론을 활용하여, 북한은 특히 비동맹국을 비롯하여 세계무대에서 그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세계는 냉전체제 아래에서 미국과 소련을 양대 축으로 갈라진 동서 진영과 약 100여개국으로 구성된 비동맹권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적극적인 외교공세가 먹혀 들어간 비동맹권의 여러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비동맹권 리더 격인 인도도 한국과 정식 외교관계는 가지고 있었지만,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외교 현안에서 남한의 입장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는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계속 거부하며 한국대사관도 들어설 수 없게 하고 있었다. 최대 도시 라고스에 겨우 사무실을 유지하고 있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나이지리아 당국의 철수명령을 받았다. 정부 외교 채널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더 이상 주효하지 못했다. 대화 자체가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어느 나라를 가도 정부나 기업계가 관심을 갖고 환영해 주는 정주영을 떠올렸다. 기업 현지 진출이든, 무역이든 경제협력안을 내세워 정주영이 앞장서기로 했다. 국내외로 현대가 벌여 놓은 사업으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게 바쁜 정주영이지만, 그는 나라를 위해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한 번에 2주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을 기꺼이 견디며 인도로, 아프리카로, 동남아로 향했다. 그는 방문국의 국가 원수나 경제 각료들, 기업계 대표들을 만나 그 특유의 순발력과 재치로 경제교류 확대 방안을 제시하고 한국과의 교류가 갖는 장점들을 설파하며 설득해 나갔다. 나이지리아에는 정주영이 방문 2년 뒤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 ▲ 1992년 1월 10일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창당위원장(오른쪽 두 번째)이 서울 평동 서진빌딩에서 창당발기인대회를 마친 뒤 창당준비위원들과 현판식을 갖고 있다. photo 한영희
정주영은 70세이던 1985년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여생의 마지막 소망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경제정책을 소신대로 해보는 자리에서 한 5년간만 일해 봤으면 해요. 한 가정이 일어서는 데는 평생이 걸리지만 한 나라가 일어나는 데는 10년이면 족해요.” 그때 그것이 설마 마음속에 품은 대통령 선거 출마의 뜻을 표현한 것임을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은 광복 이후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일어난 정치·경제·사회의 커다란 소용돌이들을 그 한가운데서 체험해야 했다. 그런 체험 속에서 그는 특히 한국의 정치현실 모순의 뿌리가 무엇이며, 그것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우리 경제와 사회발전에 어떻게 족쇄로 작용하는가를 뼈저리게 느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원래 정주영은 그것을 울타리 밖에서 그대로 관망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일생의 행적이 그랬다. 그 도전의 길이 고난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안 되었다. 중요한 것은 가야 할 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족의 번영을 위한 미래와 역사의 방향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당리당략에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민족의 사활이 걸린 경제나 사회정책도 거기에 맞추어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정치꾼’들에게 계속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정주영은 한국에 자유경제체제를 제대로 뿌리내려 경제력 기반을 굳히고 명실상부하게 선진국으로 진입하도록 해야겠다는 야망을 가졌다. 또한 그는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구체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포부와 야심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여생을 바칠 국가와 민족의 부름이라고 믿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그의 무수한 위대한 업적들이 세인들의 눈에 하나도 순탄하거나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성공적으로 해냈던 것처럼 그는 확신에 넘쳤다.
정주영은 대통령 출마 선언과 함께 1992년 2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국민당은 창당 45일 만에 치른 14대 총선에서 의석 31석을 확보하는 정치폭풍을 일으켰다. 이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식상과 변화 욕구, 그리고 경제발전에 대한 국민의 희망이 표출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한편 정주영의 라이벌들은 그의 대통령 출마 동기를, 그의 많은 나이를 빗대어 ‘노망’ 또는 ‘노욕’으로 비하했다. 또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더니 이제는 권력까지 탐낸다”며 네거티브 공세를 폈다. 무엇보다 뿌리 깊은 지역주의가 정치 아마추어인 그에게는 극복하지 못한 벽이 되고 말았다. 정주영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대통령 선거를 두고 사람들은 나더러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큰 실패자는 그들이 뽑은 대통령 때문에 IMF 외환위기를 맞아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했던 국민들이고, 그 다음은 국가를 부도 낸 대통령으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사람이 실패자입니다. 나는 단지 국민들에게 뽑히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려일실(千慮一失)이었다.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소를 팔아 받은 돈을 쥐고 무작정 집을 나와 서울로 왔습니다. 그 뒤 나는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이제 가출할 때의 소 한 마리가 1000마리가 되어 빚을 갚기 위해 고향으로 갑니다. 이번 방북이 한 개인의 고향 방문 차원을 넘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8년 6월과 10월, 정주영은 소떼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했다. 세계에 마지막 남은 분단과 대치의 벽 한반도의 38선에서 83세의 한국인 기업가 정주영이 연출하고 주역을 맡은 이 희대의 퍼포먼스에 온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이것은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세계 만방에 전파하기 위한 비장한 절규였다. 당시 프랑스의 세계적 문학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했다.
그토록 강해 보이던 정주영도 고향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강했으며,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목이 메곤 했다. 그는 통일의 물꼬를 자기 손으로 마련하겠다는 열망이 대단했으며, 대북사업도 이런 차원에서 추진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사업적 측면에서도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정주영은 중국이 장기간 사회주의를 겪었으나 경제개방 이후 무서운 성장을 기록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북한도 사람들의 의지와 인내력이 뛰어나 개방만 된다면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정주영은 이와 함께 북한이 개방될 경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사회간접자본 확충이며, 미리 기반을 닦아 놓는다면 이에 대한 기득권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정주영은 남북 간의 경제협력이 통일로 가는 가장 주효한 방법임을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쪽 모두 다른 분야보다 정치적인 부담은 적은 반면, 양쪽의 필요가 가장 잘 들어맞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노동력·자원·기술·경험·경제현실 등 모든 면에서 양쪽에서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보탤 수 있는 엄청난 보완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특히 일부 사업추진에 있어 실정법을 위반할 수도 있겠지만, ‘통일’이라는 것은 실정법 체계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잘못이 있다면 역사에 평가받고 책임지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정주영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술회를 했다. “겨울에도 바지저고리를 한 벌만 가지고 입었는데, 그러다 보니 옷 속에 이가 많이 생겨. 할머니가 이를 잡아 주시는데 눈이 나빠서 잘 안 보이시니까 옷을 벗겨 애들을 한 이불 속에 몰아넣고 바지저고리를 밖에 추운 눈 위에다 펼쳐 놓아 이들이 얼어 죽게 하는 거야. 그런 다음 소여물 끓이고 남은 불을 담은 화로에, 옷에 남아 있는 죽은 이들을 툭툭 털어서 입혀주셨지.”
정주영은 가난이 무엇인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에 대한 연민이 그의 심중 깊은 곳에 일생 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업의 본체 격인 현대건설의 기업공개 압력을 언론과 사회로부터 집중적으로 받던 시절 다음과 같이 그의 심경을 말했다. “현대건설을 기업공개 하면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이 그 주식을 사서 땀 안 흘리고 돈을 벌게 될 뿐, 돈 없는 소외계층에는 아무 혜택도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정주영은 주식을 공개하기 전에 총 주식의 반가량을 복지재단에 기증하고, 나머지만을 주식시장에 공개했다. 전국에 종합병원들을 지은 것은 그렇게 해서 설립된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다. 그는 첨단시설과 연구진을 집중할 필요가 있는 서울 아산병원 말고는, 다른 의료재단들이 채산성 때문에 기피하는 오지 지방 도시들에 병원을 설립하거나 지방 병원들과 의료협력을 구축했다. 그렇게 설립된 것이 보성·정읍·영덕·보령·홍천·강릉·금강에 세운 아산병원들이다. 정주영은 이런 의료시설들을 돌아보며, 그리고 그가 만든 재단이 지원하는 불우 어린이 시설들을 방문하여 어린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조선소에서 만든 어마어마하게 큰 배, 출고를 기다리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회와 행복감에 젖은 것이다. 정주영은 마지막까지 대북사업에 온힘을 쏟았다. ‘소떼 방북’을 했고, 3개월 뒤인 1998년 11월 현대그룹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의 역사적 첫 출항이 이루어졌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밟게 된 것이다. 이는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 정주영은 대북사업을 전담할 수 있는 현대아산을 설립했으며, 금강산 개발에 이어 개성공단 개발 등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분단 이후 반세기간 진행된 남북사업 전체보다도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2001년 3월 21일. 검은 구름에 광풍이 몰아쳤던 이날, 한반도에선 큰 별 하나가 사라졌다. 재계의 거목 정주영이 타계했다. 정주영은 대북사업에 열정을 갖고 있던 시기에, 맨주먹으로 이룩한 현대그룹을 영원히 뒤로한 채 결국 생을 마감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eekly.chosun.com%2Fimages%2Fendmark.gif)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