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고 있는 장면입니다. 43절을 보면 먼저 예수님은 빌립을 부르십니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라는 말은 원어대로 직역하면 “갈릴리로 가시기로 작정하시고”입니다.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을 작정하고 부르기 위해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43절에 “만나고”라는 말은 “발견했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빌립과 나다나엘은 의도적인 만남입니다.
44절을 보면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벳새다”라는 말은 “낚시하는 집(고기 잡는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보면 빌립이 제자의 명단에는 나오지만, 그에 관한 어떤 기사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빌립이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서 세 번이나 소개됩니다(요한복음 6:7, 12:20~22, 14:9).
45절을 보면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서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는데,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이다”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인데 흔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 의 아들 ~”로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나다나엘”은 히브리어로 그 이름의 뜻이“하나님이 주셨다 ”입니다. 명사 형태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입니다. 빌립은 헬라식 이름으로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빌립과 안드레는 헬라식 이름입니다(시몬도 헬라식 이름입니다.). “나사렛”이란 지명은 구약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그만 동네 이름입니다. 나다나엘의 출신지인 가나는 나사렛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동네입니다(요한복음 21:2).
46절을 보면 나다나엘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에 빌립이 말합니다. 즉, “와서 보라”입니다. 이 말은 39절에 이미 예수님께서 한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과 달리 어떤 것을 믿을 때 분명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나다나엘에 대해서 믿음의 이유, 근거가 너에게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47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받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는 간사한 자(사기꾼)입니다. 창세기 27:35절을 보면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속여”(히브리어: “미르마”)라는 말이 “간사함”(헬라어: “돌로스”)입니다. 반면에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인정하십니다.
48절을 보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열왕기상 4:25절의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도다”라는 말은 평안함의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즉, 평안함의 허기와 목마름을 의미합니다.
미가서 4장을 보면 하나님이 역사의 마지막에 왕으로서 이 세상을 평화로 통치하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성전을 회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샬롬을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모든 전쟁 무기를 폐기하고 전쟁이 그치며 모든 사람이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는다고 묘사합니다(스가랴 3:10, 미가서 4:1~4).
그리고 예수님 당시 랍비 문헌을 보면 랍비들은 하나님이 이루실 “샬롬”을 염원하면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연구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이 이루실 “샬롬”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묵상하고 있을 때 주님이 보셨다는 말입니다.
49절을 보면 나다나엘이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신 예수님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50절을 보면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다나엘에게 더 충격적이면서도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러면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51절입니다. 51절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닥다리는 아래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누운 땅을 그와 자손에게 주며 자손들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야곱은 자신이 누웠던 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성전)”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28장과 오늘 본문 말씀을 비교하여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야곱에게는 “하늘이 열리고”가 한 번 일어납니다. 하지만 본문의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은 완료형 분사 형태로서 “늘 열린다”의 의미입니다.
둘째는 이 충격적이고 놀라운 경험을 야곱은 혼자 본 것이지만, 본문은 나다나엘뿐만 아니라 빌립도, 나아가서는 제자들로 본다고 말씀합니다. 대상이 이중적입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은 이인칭 단수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이인칭 복수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집(성전)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성전인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보여주셨던 벧엘의 약속, 즉, 그와 그의 자손들을 축복하고 그들과 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이제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성전을 지으심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야곱에게 주셨던 이 언약이 성전인 예수님에게서 완벽하게 이루어지실 것을 나다나엘뿐만 아니라 빌립과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기 육체로 성전을 지으셨습니다. 그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영원히 그분을 만나며, 그 친밀한 가운데 관계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즉 “샬롬”에 대한 허기와 목마름이 예수님이 성전 되어 주심으로, 그분과의 풍성한 교제를 통하여 영원히 허기지거나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즉 영생을 오늘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