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의 낮잠 외 4편
김미정
손가락 끝에도 길이 있을까
손톱이 길어졌다
기억나지 않던 기억이 살아났다
새벽이 오기 전에 깨어나는 새의 심장처럼
손금이 요동친다
제때 깍지 못한 손톱
어제 자라 난 길이보다 오늘 자라는 길이가
더 긴 사연을 찾아
내일을 자극한다
내 속에서 걸어 나온 손톱이
내 것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떠 있는
낮달
물컹했던 통증의 내부
그때마다 만나는 눈물의 염도
길보다 더 길게 자라나 하늘을 단단하게 포장하는 시간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뛴다
천천히 당신이 보인다.
분실물 보관함
억새꽃은 눈은 있지만 입술이 없다. 주인을 찾아주세요. 안내데스크에 맡기며 시락국밥집 앞에서 주웠다고 한다.
단축키 일 번을 꾸욱 눌렀다. 저장된 연락처가 없습니다.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이 가을 강처럼 깊어 간다. 접혀있는 시간을 열어본다. 시들어 버린 빈 하늘과 마른 햇볕에 닳아버린 애기동백 한 송이가 들어 있다.
소리가 들린다. 단풍나무 속에서 허리가 푹 꺾인 할머니가 걸어 나온다. 꽃 진 살구나무처럼 서있다.
누런 이를 보이며, 스러진 청춘이 숫자처럼 박혀있는 폰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온다. 사라진 기억보다 돌아온 기억 쪽으로 가까워 지려는 모습이다.
어진이
그러니까 그는 어진이가 태어나는 줄도 몰랐다 그날 금줄에는 숯과 솔가지가 달려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질어라 어질어라 어진이라 불렀다 태어날 때부터 울음보를 가지고 태어난 어진이는 항상 옆구리가 시렸다 업히기를 좋아했고 기우뚱 기울어져 어딘가에 기대어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은 허약한 곁을 쓰다듬고 지켜 주어야 했다
첫울음을 안아주지 못한 그는 호인댁 집 앞에는 금줄에 고추까지 달렸더라며 되려 성난 목소리로 마당을 쩌렁쩌렁 채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혼자서 아이를 낳느라 하늘이 노래지는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자식이 태어나는 줄도 모르고 동네 개울에 빠진 처녀를 건져내고 있었다 사람들로 빙 둘러싸인 채 싸늘해진 시신을 수습하느라 땀을 줄줄 흘리며 산고 아닌 산고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딸 생일이 다가오면 추월골 용지방에는 처녀의 혼을 구하는 굿판이 출렁거렸다
늦은 그 날, 아버지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어진이의 발 도장을 둥글게 찍고 또 찍고 늙은 주름 사이로 뜨거움은 흐르고 흐르고
결빙의 습관
길을 잃었다
천장을 뚫고 흘러나왔다
열선은 싸늘해지고
통과하지 못한 예감은 멍이 들었다
바람의 나부낌도 무게로 다가와
눈물의 흔적을 씻어 내려야 하는
폭포가 생겼다
흥건한 바닥에 물고기는 아직 오지않았다
일단 잠그기로 하자
틈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젖은 가슴을 닦는다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서로를 관통하지 못하고 얼어버린
검은 공터가 넓어져 간다
오로지 너를 통해서만 읽혔던 세상일들이
깊이와 길이를 잴 수 없는
흐르지 않는 물의 길
조용히 다문 결빙은 습관으로 변질되었다
동파된 가슴을 동여맨다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잃어버렸던 표정을 하나씩 찾아 나서기로 하자
너의 혈관 안에
나의 맥박이 숨 쉴 수 있도록
얼음장 물꼬를 튼다
그의 공구 통에서 겨울이 부서진다
건반 속으로
해안도로를 끼고 그녀를 향해 달린다
법성포에서 따라온 파도가 팔십 여덟 번의
숨을 고르는 동안
모래미 횟집에서 나온
벌거숭이 갯벌이 길가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
시폰원피스 살랑거릴 때 웃음소리 맞춰
건반을 두드리면
바닐라바람은 사구를 따라 흘러가고
모래는 소금을 굽는다
섬을 떠나온 사람을 실은 작은 배가 점점 작아지고
절벽이 벽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전의 마음으로
단정해지기 시작하는 구름의 화음
붉어지려고 하는 피아노 소리에
가만히 눈길을 기대면
노을을 두 손에 옮겨 담은 그가
나를 켜기 시작한다
먼데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하는
<2020. 시현실 신인상 당선 소감>
곁과 결
날씨가 화창했다. 베란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쏟아지는 햇살을 다 받아들이기에는 두 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온몸으로 봄빛을 받고 싶어 목욕재계하는 심정으로 원피스로 정갈하게 갈아입고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거북공원은 이미 매화가 벙글고 있었다. 찰박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영화도 봤다. <작은 아씨들>을 보며 우리집 네 자매가 오버랩되고 특히 작가 지망생 ‘조 마치’가 방안 가득 원고지를 빼곡히 채우는 장면에서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의지와 열정에 부러움과 응원으로 박수를 보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백을 만났다. 뚝뚝 떨어진 동백꽃 송이들을 주워 모아 하트를 만들었다.
“엄마, 지나가는 사람들이 엄마가 만들어 놓은 동백 하트를 보고 좋아하겠다.”
“엄마가 좋아서 만들었는데, 누군가에게 작은 미소라도 줄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지.”
그날의 딸아이처럼 시도 늘 곁에 있었다, 시가 좋아 필사하고 외워서 읊조리며 시를 곁에 두었다. 정작 나의 글을 찾지 못해 밀쳐 놓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시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듯 서서히 다가왔다. 아니 나는 계속 간절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준 시. 이제 나의 결에 맞게 대패질을 해야겠다. 나의 무늬에 맞는 색깔을 입히는 일에 더 치열한 정성을 들여야겠다.
시를 통하여 정확하게 나를 찾아 나서는 길에 발돋움할 수 있도록 호명하고 손 내밀어 주신 계간 [시현실]에 감사드립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용기 주신 영남시동인께도 감사드립니다. 추월 계동에서 함께한 우리 식구들 그리고 지금도 내 곁을 지켜 주고 있는 남편과 딸에게도 고마움 전합니다. 여러 형태로 곁을 함께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동백꽃의 붉은 향기를 가득 담은 당선 소식에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첫걸음의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며 기꺼이 나의 결을 다듬기 위해 게을리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같이 따뜻해지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김미정 -경남 김해 출생. 영남시동인.김해시청 근무
<2020. 시현실 신인상 심사평>
♣ 이 봄에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영화가 있다. ‘기생충parasite’이다. 무엇이 그토록 이 작품의 위대성을 발견하였을까? 시와 연관하여 생각해 본다.
바로 예술의 ‘독창성과 보편성’ 때문이다. 그 속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시적인 이미지image 때문이다. 시각적 이미지는 물론 공감각적 이미지로 점철되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이렇게 모든 예술은 이미지가 중요하다. 시는 이미지가 없으면 시가 아니다.
(중략)
♣ 김미정님의 작품 <분실물 보관함> <손톱의 낮잠> <어진이> <결빙의 습관>등 작품이 모두 수준급이다. 시의 형식도 다양하고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thema의식도 뚜렷하다. 그 주제를 끌고 나가는 힘이 시를 시답게 하고 있다. <분실물 보관함>과 <어진이>는 산문시로 그 의미망을 적절한 메타포와 상상력으로 시적 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가령 <분실물 보관함>에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이 가을 강처럼 깊어간다”라든가 <손톱의 낮잠>에서는 삶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암시되기도 하고 새로운 이미지 형상화로 독창성이 돋보인다.
♣ 시인은 시를 쓰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끊임없는 노력으로 신인다운 좋은 시를 쓰시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영춘(시인)
최문자(시인)
원탁희(본지주간, 시인)
첫댓글 김미정 시인님^^
2020년 새해에 흘린 눈물의 의미가 뭔지 생각해 보게 되네요.
앞으로 더 힘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함께 도반으로 어려움 헤쳐 나가도록 해요.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모두의 덕분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