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의 능력 - 정성진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
찬송의 능력
정성진 목사 (거룩한빛광성교회)
사도행전 16장 19-34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생략)”
설교 한눈에 보기
1. 고난 중에도 찬송합시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힌 고난 중에도 찬송하였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찬송할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2. 찬송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때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렸다.
찬송의 능력은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킨다.
3. 찬송을 부를 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찬송은 용기를 북돋아주고 믿음과 희망을 전해준다.
찬송을 부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 ● ● 핵심 메시지
고난 중에 찬송할 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 ● ● 청중의 적용 포인트
‘나는 고난 중에도 찬송하고 있는가?’
기독교의 특징은 찬송에 있습니다. 찬송은 말씀과 기도와 함께 기독교의 중요한 3대 요소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가르침이 있고,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도 기독교와 같이 찬송이 보편화되어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제의 속에 조금 노래가 불리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찬송은 말씀과 기도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기도보다 오히려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시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 22: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찬송 받기를 좋아하시며 찬송하는 무리와 그들의 삶속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찬송은 창세기 때로 그 기원이 올라갑니다. 창세기 4장의 라멕의 노래, 9장의 노아의 노래,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한 후 부른 노래 그리고 미리암의 노래 이후 수많은 노래가 기록되어 있으며 시편에 와서 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시편은 한 편 한 편이 모두 곡조가 붙은 찬송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을 표시했던 기호를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그 흔적으로 약간 남아 있는 부분이 이런 것입니다. ‘셀라’(음을 올리라는 지시어, 시 71편); ‘식가욘’(열광적으로 부르라는 뜻, 시 7편); ‘현악에 맞춘 노래’(시 4편); ‘관악에 맞춘 노래’(시 5편)
이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감정, 즉 희노애락애오욕(喜怒愛樂哀惡慾)의 감정을 모두 노래에 담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찬송의 종교가 되었고, 말씀과 기도와 찬송 이 세 가지가 기독교의 3대 요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찬송을 소홀히 하고, 이해가 부족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조미료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시간에 쫓긴다든지, 힘이 든다든지 하면 찬송을 생략하기도 하고 1절만 부르기도 하는 그런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찬송은 곡조가 붙어있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다가 중지한다든지 설교를 하다가 그만 둔다면 큰일날 줄 알면서 찬송은 전혀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들도 말씀의 귀중함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압니다. 생명의 양식이며, 하늘의 만나이고, 송이꿀보다 꿀송이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기도 또한 영혼의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기도하는 자는 능력을 받고 환난 중에도 도움을 받으며, 기도의 능력은 산을 옮길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찬송의 능력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찬송에 대한 이해를 갖고 날마다 찬송하며 찬송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찬송으로 영광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고난 중에도 찬송합시다(19-24절)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제2차 전도여행길에 오른 사도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디모데라는 신실한 청년을 만나 제자를 삼고 아시아 쪽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는데 성령님께서 그 길을 자꾸 막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봅니다. 코가 크고, 얼굴이 흰 유럽 사람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간청합니다. 이 환상을 본 바울은 즉시 마게도냐로 행했습니다. 드디어 마게도냐의 첫 성읍인 빌립보 성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안식일이 되어 기도처를 찾다가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났고, 믿음 좋은 루디아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빌립보 거리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 하나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일행이 지나가기만 하면 소리를 지르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면서 난리를 피웁니다.
며칠은 그냥 지나쳤는데 지나갈 때마다 똑같이 소리를 지르는 이 여종을 향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외치자 귀신이 즉시 나와 달아났습니다. 이 여종은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여종을 이용해 점을 치고 돈벌이를 하던 주인이 큰 돈줄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들렸을 때에는 족집게 점을 치던 이 여종이 귀신이 나간 후 영 점을 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자기 수입을 잃어버린 이 주인이 바울의 일행을 관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 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 16:19-24)
관가에 끌려간 사도 바울에게 소란 죄에다 민심을 흉흉케 한다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옷을 벗긴 채, 모진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둔 후에 발에는 차꼬를 든든히 채웠습니다. 도망갈 수 없도록 쇠고랑을 발에 채웠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주고 오히려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이 있습니까? 원망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불평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더욱 기도하시고 오히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흑인영가를 아시지요. 우리 찬송가에 3곡이 담겨 있습니다.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372장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미국에 잡혀와 노예살이 하던 흑인들이 목화밭에서 하루 종일 남부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혹사 당하면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부르던 노래입니다. 채찍과 고난, 온갖 수모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던 노래이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노래를 들을 때, 그 노래를 부를 때 가슴에 진한 감동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시 34:1-2)
시편 기자는 항상 찬송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곤고한 자가 이 노래를 들을 때 힘을 얻고 기쁨을 회복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고난 중에 더욱더 찬송을 부르고 기적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찬송은 변화를 일으킵니다(25-26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5)
깊은 감옥에서 심한 매를 맞고 차꼬에 매인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속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죄수들이 듣도록 크게 찬송했습니다.
제가 직장에 다닐 때 수백 명이 들어가서 식사할 수 있는 회사 식당에서 식사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예수 믿는 것 티를 안내려고 아예 생략하는 사람, 하는 듯 마는 듯 눈만 살짝 감았다 뜨는 사람, 어떤 사람은 손을 눈에 대고 잠시 기도합니다. 그런가하면 정식으로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속하십니까? 바울과 실라는 속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큰 소리로 모든 죄수가 듣도록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까지 들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6)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리히터 5.0의 지진이 났는데 왜 하필이면 찬송이 끝나자 일어났을까요?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의 찬송을 들으신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찬송을 부를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오래전에 일본에서 벼의 성장에 음악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습니다. 한쪽 논에는 팝송 같은 시끄러운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한 쪽에는 클래식을 들려주었습니다. 한 쪽에는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이 제일 먼저 자랐을까요? 팝송을 들은 쪽이 제일 먼저 자랐습니다. 그 다음이 클래식, 마지막이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은 쪽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팝송을 들려준 쪽은 먼저 자라기는 했는데 클래식을 들려준 벼보다 훨씬 쭉정이가 많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믿을 만한 소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여 년 전 우리나라 농업진흥청에서 잔잔한 음악이 농작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농작물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생육과 품질이 좋아지고 해충도 줄어든다고 발표했습니다.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음파가 세포를 자극해 원형질 운동을 활발하게 하며 엽록소를 많이 만들게 해 생육을 촉진시킨다고 설명했습니다. 음악을 들려주면서 잎에 비료를 뿌려 주니까 양분을 67%나 더 많이 흡수했으며 생육은 44%까지 증진됐는데 특히 배추, 오이, 알타리 무, 쪽파 등에 효과가 컸습니다. 또 농약을 적게 뿌려도 해충이 적게 발생하기 때문에 수확량이 늘었습니다. 오이의 경우 음악을 안 들려준 나무에서 1,564g의 오이를 땄으나 음악을 들려준 나무에서 2,129g을 수확해서 36%가 증량 됐습니다.
음악의 효과가 이렇게 있다면 영적인 음악인 찬송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찬송으로 질병을 치료합니다. 음악치료사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물러가고 따라서 육신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것은 무식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을 무식하다고 하는 교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위험에 빠집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시 47:1)
손바닥을 칠 때 자연지압이 되면서 질병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가 부모 앞에서 거드름 피고 너무 점잖아도 문제입니다. 손뼉을 치면서 찬양을 하면 부수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머리를 뜯으며 괴로워합니다. 그 때 수금연주의 명인 다윗이 불려나가 수금을 타니 악신이 달아났다고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삼상 16:23)
찬송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질병을 치료합니다. 악신을 쫓아냅니다. 태아교육에 찬송만큼 좋은 교육 방법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심령이 곤고하고 피곤에 지쳐 있을 때에 찬송을 부르십시오. 찬송의 능력은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차꼬가 벗겨질 것이며, 여러분을 막고 있는 감옥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 변화를 맛보고 치유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찬송을 부를 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27-34절)
찬송을 부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행 16:27-34)
빌립보 간수장이 자다가 깨어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법에 사형수를 놓치면 대신 사형을 받게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바울이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칼을 거둬라”라고 외쳤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간수장이 등불을 들고 들어와 보니 죄수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분들이 보통 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과 실라 앞에 절을 하면서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간수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이와 같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에 얼마나 기독교를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10대 군박이라고 해서 10명의 황제가 계속해서 250년 동안 기독교인의 씨를 말렸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지하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것을 ‘카타콤’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잡히면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도록 사자와 싸움을 시켜 놓고 즐기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때려죽이고, 묻어 죽이고, 귀양 보내는 등 갖은 악행을 다했습니다. 나중에 원형경기장에다 십자가를 세우고 그 곳에 기독교도들을 묶고 기름을 뿌린 후 불을 붙여 놓고 사람이 타 죽는 불빛을 보면서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불에 타죽어 가는 기독교도들 입에서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이 찬송이 왕족과 귀족들의 가슴에 비수와 같이 꽂혔습니다. 특히 마음이 여린 여인들의 마음에 꽂혔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저렇게 아름다운 찬송을 하는 저들이 믿는 하나님, 저들이 믿는 천국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이 몰래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드디어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믿음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로 공인 받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찬송은 부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듣는 이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전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악한 영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이 남유다 왕국을 침략해 왔습니다. 이 때 왕은 4대왕 여호사밧이었습니다. 비상시국을 맞아 기도하는데 야하시엘이라는 선지자가 예언을 합니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대하 20:15-17)
이 예언을 듣고 여호사밧 왕은 성가대 가운을 다 입히고 적군을 향해 성가대를 앞세우고 나아갑니다. 이런 무모한 짓이 어디 있습니까? ‘죽으려고 환장했나,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하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대하 20:20-23)
찬송을 불러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골짜기를 ‘브라가 골짜기’, 즉 찬양의 골짜기라고 오늘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 8:10)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든 성도들은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에 힘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고난이 있습니까? 오히려 찬송합시다. 곤고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가정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적군과 같은 큰 문제가 해결되고, 마귀가 쫓겨 나가고,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성진 목사
서울장로회신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행정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금왕교회 담임전도사
광성교회 부목사
현 복지법인 해피월드 이사장
현 광성드림학원 이사장
현 거룩한빛광성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