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박덕희
국수 외
탱글탱글한 면발이 봄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얼어붙어 에던 가슴 녹이는 봄
매운 달래 몇 뿌리 송송 썰어
영혼 달랠 양념장 만들고 그릇에 담아 비비면
입맛 다시는 한 그릇 새봄
세월호 아이들에게 이태원 청춘들에게
한 그릇 말아 대접하고 싶은 새봄
국경의 밤을 맞는 아들에게
잘 비빈 달래 국수 편지를 쓴다
그릇이 비워질 즈음 달래꽃이 피어나고 씨를 퍼트리겠지
옹골찬 알뿌리 종처럼 울리는 그날이 오면
우리 국수를 말자
한평생 산비탈에서 봄을 맞는 산벚나무에
개울가에 주저앉아 고라니 울음 들어주던
젖은 바위에도 한 그릇 대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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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에 슬픔이 생글
이슬 맺힌 유리창 안의 풍경이 희끄무레하다
간섭할 수 없는 저 내부는
어느 구석진 곳에 벗어 놓은 뱀의 허물 같다
도회지 아들네에서 이틀 밤을 못 지내고 일어선 봉산댁
주인의 온기를 물고 대문만 보고 있을
개 걱정 앞세우며 손주 옆에 눌러앉으려는
무릎을 주섬주섬 챙겨 돌아왔다
떨어져 지낸 거리에 벚꽃이 피고 백일홍이 지는 것을 잊는 것처럼
오랜 시간 떨어져 산다는 것은 서로의 향기를 잊는다는 것
이제 장성한 유복자 아들보다 마당의 개가 더 살가운 봉산댁
낡고 닳아 물컹해진 몸뚱어리 다독이러 병원에서부터 따라온
배가 불룩한 석 달 치 약봉지 옆에는
누룽지로 끓인 죽이 봉산댁 심사처럼 성그렇다
속도 없이 짖는 개소리에 덜컹거리는 새벽잠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그어보는 희미한 슬픔
새벽의 아픔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흐른다
당뇨를 앓는 해가 뜨고
봉산댁은 주삿바늘을 해의 배에 꽂는다
복지관에서 먼저 배우고 싶었던 글자
슬픔이 유리창에 매달려 생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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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희 2020년 《시와사람》 시, 2009년 《아동문학평론》 동시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동시집 『호랑이는 풀을 안 좋아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