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이 많으니 자연히 계곡도 많고 강도 많은 우리 강산을 두고 삼천리금수강산이라 히지요. 온 산하가 이러니 지천으로 생겨난 것은 다리입니다. 서울이라고 다를 수 있겠습니까 서울은 인왕산, 백악산, 낙산, 남산, 삼각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등에 둘려싸여 골짜기가 많고 따라서 물도 많습니다. 자하문골짜기, 백운동골짜기, 삼청동골짜기, 남산골짜기, 정능골짜기, 성북동골짜기, 안암골, 우이동골짜기 등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은 청계천으로 모이고 다시 중랑천과 합류되어 살꽂이다리를 거쳐 한강으로 합수됩니다. 도성 가운데로 질러가는 청계천, 그래서 서울에 다리도 많습니다, 이외에도 도성 밖 외곽에도 산이 많아 자연 골짜기를 이루고 내가 흐릅니다. 서쪽의 미리내, 정릉골짜기의 정릉천, 안암골의 성북천, 북한산의 우이천,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은 중랑천을 이룹니다. 서울을 감싸고 흐르는 한강이 있어 무수한 다리가 생겼고 생기고 있습니다. 옛 한성지도에서도 물길과 도로가 교차하는 곳에는 다리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수선전도> 에 보면 약 190여개의 다리가 표시되어 있으며, 이 중에 명칭과 위치가 확인되는 것만 약 80개 정도입니다. 1760년 영조 임금이 준천당시 청계천 본류에 9개의 다리가 있었습니다.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문, 영도교가 그것입니다.
경복궁을 끼고 동,서의 삼청동과 백운동 두 골짜기에서 내려온 계류溪流와 남산에서 충무로를 거쳐 들어오는 계류가 합수되는 위치에 지금의 청계천이 시작되는 곳인 청계천 광장의 모습입니다.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기념으로 설치된 시설물들이 아직 그대로 있어 봉축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① 모전교( 毛廛橋)
이 다리 이름인 毛廛은 이 다리 모통이에 과일을 팔던 과일가게(果廛 또는 毛廛이라고 함 )가 모여 있었으므로 모전다리라고 부르게 된 것에 연유하며 달리 모퉁이가게다리라 하여 한자명으로 우전(遇廛)다리라고도 불렀는데 일명 무교동과 연관해서 무교(武橋)라고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중구 무교동 3번지로 서린동과 무교동으로 통하는 사거리 지점으로 백운동천(지금은 복개된 청와대 앞 효자동 일대)과 삼청동천(경복궁 동쪽 담 옆으로 지금은 복개된 삼청동길)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조금 아래쪽으로 추정되는 청계전에 있던 다리입니다. 史料에는 신화방동입구교(神化坊洞入口橋)로 나와 있는데 이 다리는 1412년(태종 12년)에 세워졌으며 복개되었던 것을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놓았습니다.
②광통교 (廣通橋)
종로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 위에 놓여 있던 이 다리는 경복궁-육조거리-운종가-광통교-숭례문 등 도성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심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임금이 陵行을 하거나 성 밖으로 행차할 때 이 광통교로 오갔으며 중국의 사신들이 오고 갈 때도 가까이 있는 돈의문을 이용하지 않고 빙 둘러 숭례문을 통과하여 이 광통교를 건너서 궁궐로 들어 갔습니다. 광통교는 어가행렬이나 사신행렬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도성 안에서 가장 큰 다리였습니다. 광통교는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광통교 또는 광교라고 불렀으며 소광통교와 구분하여 대광통교 또는 큰 광통교로도 불렀습니다. 또한 정월 대보름이 되면 수표교와 더불어 도성의 많은 남여가 다리밟기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현재의 광통교 상판 모습.>
(광통교 측면 모습)
세종실록지리지에 북광통교北廣通橋로, 승정원일기에는 광충교廣沖橋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조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長 약 12 m, 폭幅 15 m로 길이 보다 폭이 더 넓은 다리였습니다.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흙으로 조성하였으나 태종 14년(1410년) 큰비로 다리가 유실되어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비 강씨의 능陵인 중구 정동에 있던 정릉貞陵을 지금의 성북구 정릉으로 옮기면서 옛터(중구 정동)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12개의 신장神將이 각조刻彫되어 있는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1760년 경진준천(庚辰濬川)을 한지 2년 후인 영조 38년(1762) 다리의 기초 부분 개축과 난간을 보수하였습니다. 이후 1899년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의 전차가 가설되면서 광통교 동쪽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어 일부 훼손되었고, 1910년 8월에는 광통교 동쪽에 놓여 있던 전차선로를 복선화하면서 광통교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되어 철근콘크리트교로 확장됨에 따라 다리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으며, 1958년 청계천복개공사로 광통교의 난간만 창경궁 . 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본체는 그대로 묻혔던 것을 이후 2003년 7월 시작된 청계천복원공사의 일원으로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광통교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대광통교가 원래 있던 자리에 광교가 새롭게 놓였고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 m쯤에 대광통교를 복원한 광통교가 놓여있습니다. 사람만 다닐 수 있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차량의 교통 흐름을 막지 않기 위해 원래 위치보다 상류에 배치하였습니다. 광통교에 놓여진 정릉의 석물이었던 신장석神將石과 우석隅石 등에 새겨진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큽니다. 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다동을 잇습니다.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 도성건설 때로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410년(태종 10) 8월 큰 비가 와서 다리가 떠내려가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피해가 발생하자
옛 정릉(貞陵)의 무덤 돌 등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만들었습니다.
광통교를 이 정릉의 무덤 돌을 가져다가 만든 데는 역사적으로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즉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깊은 원한관계가 상당히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1392년(태조 1년) 계비(繼妃)
강씨는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이방원을 물리치고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에 옹립하였습니다. 이 일로 계비 강씨는 이방원의 깊은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계비 강씨는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채 1396년(태조 5) 3월 세상을 떠남으로써, 세자가
된 아들 방석 또한 1398년 (태조 7) 정도전 등과 함께 이방원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습니다(1차 왕자의 난). 한편 계비 강씨를 무척
총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강씨가 죽자 자주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중부 취현방(聚賢坊, 지금의 중구 정동일대)북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태조는 이 능을 조성할 때 특별히 제주목사 여의손(呂義孫)으로 하여금 일류석공을 동원하여 당대 최고 수준의 석물(石物)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완성된 이후에도 수 차례 행차하여 강씨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409년(태종 9)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성북동 정릉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 1410년 큰 비가 내려 흙다리인 광통교가 유실되자 가까운 중부 취현방(聚賢坊, 지금의 중구
정동일대)북쪽 언덕 정릉 옛 터에 남아 뒹굴던 신덕왕후의 능침에 썼었던 돌을 사용하여 이 돌다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광통교 옆 모습)
《구름 위 보살》
임금이 되신 태종 이방원은 강씨의 무덤돌로 다리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강씨에게 맺힌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고 도 전합니다. 그러나 광통교는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어가행렬과 사신행렬이 지나다니는 도성 제일의 다리로서 영광을 누렸습니다. 태종의 의도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는 생각하기 나름이겠습니다.
아무튼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유적을 보면 옛 광통교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남북 양측 교대에 있는 정릉의 부재로 사용되었던 신장석神將石, 구름문양과 당초문양이 새겨진 능침석물들의 뛰어난 석공기술로 정성을 다한 것임을 볼 때 태조가 정릉을 조성할 때 얼마나 공을 들였으며 참으로 계비 강씨를 사랑했음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명석한 두뇌와 용맹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임금이 한 가지 깨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에 기울어 개국에 공을 세운 영민하고 응집력 뒤어난 조강지처가 낳은 아들 이방원을 제치고 계비 태생의 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계비 강씨가 이방원의 인물임을 익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심으로 어린 자신의 소생을 세자로 앉히기 보다는 한 발 물러서 욕심을 버리고 이방원을 세자에 올렸다면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방석도 죽음이 아닌 大君으로 자손 대대 영화로웠을 것이고 왕자의 난이란 선례를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생각 접었다면 정말 그랬으면, 구름과 보살상이 새겨진 고운 문양처럼 평화롭고 아름답지 않았을까...
그래서였을까,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령대군의 友愛가 남달랐음이... 양녕대군은 이미 세자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충령대군의 출중함에 아버지 태종의 마음이 기울자 스스로 기이한 행동을 일삼아 세자에서 폐위되었고, 이에 둘째 효령대군이 세자에 뜻을 두자,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을 조용히 불러 아버지의 마음이 충령대군에 있다고 귀띔을 하자 그 길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니 무난하게 충령대군이 세자가 되고 만고에 없을 성군 세종대왕이 되셨으며 두 형님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극진히 모셨고 친누이 4공주와 이복동생 8형제 그리고 이복누이 13명의 옹주를 보듬고 사랑하셨던 것일까.. (세종의 친 동생 성녕대군은 14세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금강저)
중구 정동 정능 옛 터에 있던 신덕왕후 능침을 장식하였던 석재입니다.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 쯤의 이 자리에 복원되었습니다. 다리의 원형복원을 위하여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부분과 창덕궁 및 탑골공원에 흩어져 있던 부분을 찾아내 활용하여 조선기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현재는 사람만 건너다닐 수 있습니다.
《광교/廣橋》
현재의 광교입니다. 원래 이 자리는 광통교가 있던 자리인데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 본래의 광통교 석재로 복원 하기에는 불가하여 서쪽 150m 지점으로 옮겨 복원하고 '작은 광통교'로 불리던 광교를 이 자리에 준설한 것입니다.
2003년 7월 시작된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놓은 다리로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광통교와 달리 차량통행이 빈번한 다리입니다. 현재는 안국동삼거리에서 종로1가, 청계천, 을지로입구, 한국은행 앞, 퇴계로를 잇는 큰 다리가 되었습니다.
③ 장통교/長通橋
중구 장교동長橋洞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11번지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조선시대 1480년 이전에 축조된 다리로 장통방이 있던 자리라 하여 장통교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다고 하여 長倉橋, 또 '장찻골다리' 로도 불렸던 것을 줄여 長橋라고도 불렀으며 <경도오부북한산성부도>에는 長楸橋라고 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청계천을 복개하기 전 다리 서쪽 기둥에 '辛未改造'.'己亥改造'라고 8字가 각조 되어있어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교각은 없었고 1929년 큰물로 인해 붕괴되어 복구되기도 하였습니다.
서울지명사전에 의하면 장통방은 조선시대 한성부 5부 52방 으로 나뉜 행정구역 가운데 중부(조선시대 한성부 행정구역) 8방 중 그 하나 입니다. 그 중 長通坊은 정만석계:광교,동곡,혜전후동,정자동,청포후동,염동. 서천수계:동곡,장교동,염동,철물교,입동,관자동, 관자동계:관자동. 유자익계:소립동, 표교계:대립동, 입동계:소립동,포병동,모곡병, 입전계:피마동 일부, 의성정계:피마동,중부동,하판교,판전동,대립동,하교,중곡 일부, 중곡계:묘전동, 광주주인계:중부동,상판교,모곡동,비파동 등으로 지금의 행정구역 남대문로1가,관철동, 종로1,2.3가,서린동,장사동,묘동,봉익동,관수동 각 일부에 해당합니다.
남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倉洞川과 중구 會賢洞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小廣通橋에서 만난 뒤 다시 남산동천의 물줄기와 합해져 청계천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이 장통교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중앙과 지방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보던 京在人들의 본거지이기도 하였으며 19세기 개화파 선각자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가 장통방 내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습니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대림산업과 삼성건설에 의해 종로구 관철동71번지와 중구 수하동 37번지 사이 청계천에 폭 11.8m 길이 22m 의 다리를 만들고 옛 이름을 따서 장통교라 하였습니다.
《삼일교/三一橋》
삼일교는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길이 22.6m, 폭 43.2m,로 대림산업과 삼성건설에 의해 준공되었습니다. 이름은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분이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탑압에 항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벌인 시발지에 인접한 연유를 들어 다리 이름을 삼일교라 하였습니다. 종로구 관철동 85번지에서 중구 장교동 86번지 사이 청계천 삼일로에 놓인 다리로 가까운 인사동과 명동성당 등 근대 건축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④ 수표교.마전교/水標橋.馬廛橋
<장충단에 설치보존되고 있는 수표교>
이 수표교는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로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입니다. 세종2년(1420년)에 축조된 이 다리는 큰 화강암으로 육각형으로 다듬어 세운 다리 기둥 위에 길게 모난 횃대를 걸치고 돌을 깐 매우 진기한 수법의 다리입니다. 다리 아래에 ‘在長通橋東橋西中央立石標刻尺寸之數 凡雨水以知深淺(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수표교가 있던 곳에 마구를 파는 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로 불렀으나 세종 23년(1441년)에 다리 서쪽 중앙 물속에 구멍을 뚫은 장대석을 놓고 그 구멍에 눈금을 새긴 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워 청계천의 水位를 측정할 수 있는 水標를 세우면서 다리 이름도 수표교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로 만든 수표는 쉽게 망가져 15세기 조선 제 9대 성종 임금 때 돌로 만들어 세웠고, 돌기둥 양면에는 1척尺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으며, 다시 3,6,9척에는 ㅇ표를 파서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습니다. 즉 6척 안팎의 물이 흐르면 보통의 수위水位였으며, 9척 이상이 되면 위험 수위로 개천의 범람을 미리 헤아릴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청계천은 건천乾川으로 평상시에는 물이 조금 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도성 안으로 흐르는 모든 지천支川의 물이 청계가 조금만 와도 물이 급속히 불어 유량流量의 변화가 매우 심했습니다. 수표에 표시된 1척은 대략 20.3cm 정도로 위험수위인 9척의 경우 183cm 정도이나 여름철 장맛비가 올 때 개천 물이 이 정도까지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을 것입니다. 수표교 옆에 수표가 설치된 이후 수표교는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담당 관청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임금께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수표교 상판 모습>
영조 36년(1760년) 대대적인 개천 준설 후에 따로 수표석(水標石)을 세워 장마철에 물이 불어나는 상황을 수시로 적어 홍수에 대비하였으며, 영조 임금님은 준천 이후 수표교 교각에 높이의 간격을 두고 새긴 庚 . 辰 . 地 . 平의 水位標로 물의 깊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였습니다. 다시 영조44년(1768년)과 고종24년(1887년)에 개수하고 다리 난간에 '戊子禁營改造'와 '丁亥改築'이라는 글을 새겼습니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가 27.5m, 폭 7.5m, 높이가 4m 이며 9개씩 5줄로 세워진 교각橋脚은 네모와 육모 기둥 의 큰 석재를 2단으로 받치고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위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마름모꼴로 교각을 배치하고, 그 위에 길이 4.5m나 되는 장대석을 걸쳐 놓았습니다. 좌우에 설치된 돌난간에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고 바닥은 청판석 을 4줄로 깔았습니다. 다리밑 橋脚은 거대한 화강석으로 절묘하게 가설을 하였으며 교각기둥에는 주척 1자로 그 길이는 평균 21.5㎝의 간격으로 눈금을 새겨 놓았습니다. 또한 수표교는 서울의 풍속 가운데 정월 대보름날 서울 사람들이 밤을 새워 즐겨하였던 답교놀이(踏橋:다리밟기) 때는 이곳이 가장 성황을 이룬 곳 중의 하나였고, 정월 대보름 전 2·3일은 이 수표교를 중심으로 청계천 위·아래에 연날리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쭉 늘어서 구경하였다고도 합니다. 광복 후에도 이 다리는 수표석과 함께 장안의 명물로 남아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 되면서 1959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으며 서울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같이 놓여 있던 수표석주(手標石柱)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어 청량리 세종기념회관 뜰 안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2005년 청계전 복원할 때 원래의 자리에 다시 놓으려 하였으나 복원돤 청계천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겨지지 못하였고 대신 그 자리에 지금의 다리가 놓였습니다. 지난날 수표교가 있던 곳은 수표동(手標洞)과 관수동(觀水洞)이라는 동명과 수표공원이라는 어린이공원이 있어 그 이름만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표교 건너에
왕의 영정을 모셔 놓았던 영희전(永禧殿)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들이 설날·한식·단오·추석·동짓날·섣달그믐 등 여러 차례 이 교량을 건너 왕래하곤
하였습니다. 오늘날 장충동에 옮겨져 있는 수표교를 보면 매끈한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엮어 놓았고, 돌난간도 아름답게 꾸며 놓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교량이며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자연재해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던 도성 사람들에게 강수량의 정도를 미리 알아 대피하도록 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한 교량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이 교량과 얽힌 이야기로는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장통방에 있던 여염집에서 문 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으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희대에 주먹으로 이름을 날린 김두환이
어렸을 때 거지생활을 한 곳이 바로 수표교 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본래의 수표교가 있던 자리에 청계천 복원과 함께 새로 놓은 현재의 수표교 모습 )
1890년 수표교 인근의 청계천 모습입니다. 빨래하는 아낙네와 물놀이 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고즈넉한 기와집들의 서정적 다감한 모습이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백년 세월에 변화야 없지 않았겠지만, 이런 서울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면, 일제의 강점기만 없었다면... 지금쯤 세계 어느 도시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는 한국 고유의 풍취를 만끽할 관광 자원이 되었으리..
<수표교가 있던 자리에 청계천 복원과 아울러 새로 놓은 나무로 된 지금의 수표교 모습>
⑤《관수교》(하랑교/河浪尉橋)
중구 입정동 5번지와 종로구 장사동 20번지 청계천 사이에 놓였던 다리입니다. <한경지략>에 다리 부근에 河浪尉(임금의 사위:부마)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하랑교 또는 하랑위교라고 불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새로 놓은 다리라고 하여 新橋로 표기하고 있어 1481년 이전에 놓여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새다리'로도 불렸습니다. 또한 이 다리 부근에는 자작나무나 석류나무 등으로 화류장을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장롱집이 있었기 때문에 樺榴橋라고도 하였던 연유에서 하랑교, 하교(河橋-花橋), 하릿교, 화랑교 등으로도 불렀습니다. 현재 청계3가 센츄럴 호텔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⑥《효경교.영풍교.세운교/孝經橋.永豊橋.世運橋》
중구 장사동 153번지와 주교동 125번지, 산림동 30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여있던 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풍교(永豊橋)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고문헌과 고지도 등에도 영풍교와 효경교가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부근에 눈먼 장님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속칭 소경다리 · 맹교(盲橋)라고 했고, 음이 변하여 새경다리, 효경다리라고도 불렀으며, 줄여서 효교 라고도 불렀습니다. 다리의 서쪽 기둥에 ‘정사금영개조(丁巳禁營改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금위영 군사들이 한 차례 보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콘크리트다리로 개축되었던 것이 청계천 복개사업 때 없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지금의 다리는 효경교가 있던 자리에 2003년7월에 시작된 청계천 복원사업에 따라 세운 청계천 다리들 중 하나로 2005년 완공되었으며 종로3가 세운전자상가 옆에 위치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세운교로 이름하였습니다.
(서울지명사전, 2009.2.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배오개다리》
이 다리를 건너면 종로4가에서 중구청을 거쳐 동국대학교에 이르는 종로구 인의동 나즈막한 고갯길로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던 대서 배나무고개, 배고개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배오개가 되었는데 배오개와 연결된 다리로 인하여 비롯된 이름입니다. 인의동112번지와 48번지 일대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이현궁梨峴宮이 있었는데 이현궁은 이현본궁이라고도 하였으며 이일대 지명을 한자명으로 이현梨峴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예지동, 인의동에서 종로 5.6가에 이르는 배오개시장은 종루 앞 시전상가,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현재 배오개다리 옆 광장시장은 그 뿌리를 배오개 시장에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배오개에 숲이 울창하여 짐승과 도깨비가 많아 도깨비고개라고도 불렀으며, 대낮에도 혼자 넘기가 무서워 백 명을 모아야만 넘는다하여 백고개, 백재百嶺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백채라 하다가 배고개가 되었으며 다시 배오개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새벽다리》
새벽다리는 인근에 광장시장, 중부시장, 평화시장 등 많은 시장이 있어 꼭두새벽부터 상인들이 개점을 하거나 지방의 소상들이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분주하게 하루를 연다는 의미를 주어 지은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⑦《마전교 /馬廛橋》
다리 부근에 우마를 팔고 사는 마전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재 청계천 5가 사거리 동쪽 방산시장 앞으로 추정됩니다.
《나래교》
청계천 복원으로 종로구 종로5가 321번지와 중구 당산동 19번지 사이 청계천에 현대산업과 GS건설에 의해 폭 6m, 길이 22.8m로 준설한 다리입니다. 나래교는 3차원 아치와 케이블로 나비의 힘찬 나래짓을 이미지화 하여 날개를 활짝 편 형상으로 동대문 의류 상권이 세계 패션 1번지로 비상하고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버들다리/전태일다리》
이 다리 일대에는 왕버들이 많이 자라던 곳이었습니다. 그 역사성과 정체성을 살리고 상업지대인 이곳 유연성을 버들의 상징성으로 명명한 버들다리, 그 다리 중간에 주변에 위치해 있는 평화시장 내 봉제공장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노동자 전태일을 기념하여 2005년 9월 '전태일 흉상과 현판이 설치되면서 자연스럽게 전태일 다리로 부르게 되면서 이 다리 이름을 전태일교로 이름해 달라는 요구가 있어 이에 서울지명위원회의 표결을 통과 함에 따라 이 다리 이름은 '버들다리'와 '전태일 다리'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버들다리와 전태일 흉상과 평화시장)
(다리 중간에 세워진 전태일 흉상)
(청계천 물고기 떼의 遊泳)
동대문 인근 청계천 이 일대는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이루어 질 때까지 헌책방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당시 중학교에 갓 입학하여 형편상 새 교과서를 살 수 없던 나는 학교에서 채택한 각 교과서 목록과 지은이를 적은 쪽지를 들고 헌책방을 돌며 구입하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힘들었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인위적으로 잘 다듬어 놓은 듯한 지금의 청계천보다 낭만과 정이 흐르고 도심과 자연스럽게 조화롭던 방죽이 있던 당시의 청계천이 너무 그립고 아쉽습니다.
《가산.조산.방산/假山. 造山.芳山》
본디 가산을 만드는 이유는 자연경관이 부족하거나 없는 곳에 자연경관을 일상 생활공간 주변에 가까이 두고 즐기자는 옛 사람들의 바램에서 비롯되었으며 궁궐이나 도성 안에 큰 연못이나 하천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을 그 가운데 쌓거나 연못 옆에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것으로 경복궁 교태전 뒷산인 아미산峨嵋山이나 경회루 연못 가운데 있는 섬, 그리고 건청궁 앞 연못 가운데 향원정을 세운 섬도 그런 보기입니다.
또 풍수학적으로는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땅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하여 가산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398년 종묘 앞쪽의 지세가 허하다고 하여서 흙으로 산을 쌓은 것도 그 예입니다.
오간수문 안쪽에도 가산假山 또는 造山, 또는 芳山이라고 부르던 두 개의 가산이 있었는데 하나는 청계천 남쪽에 다른 하나는 청계천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산은 자연경관을 조성하고자 만든 것이 아니라 1760년 영조 임금 때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곳에 모아 놓은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산은 그 이름처럼, 만든 산, 거짓 산, 꽃 산이라고 하였듯이 자연적으로 생긴 산이 아닌 조성된 것으로 큰물에 쓸려온 토사가 청계천 바닥에 쌓여 장마철 큰 비에 물이 불어나면 하천이 넘쳐 서울 시내가 침수되어 그 재난으로 백성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당하였으므로 이에 영조 임금이 친히 독려하여 청계천에 쌓인 토사를 퍼내어 쌓은 것이 산을 이뤄 붙여진 이름입니다. 1760년 2월 청계천 바닥을 준설 할 때 양 제방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토사가 하천바닥에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천바닥에서 파낸 토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양이 하도 엄청나 멀리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퍼낸 흙은 부근의 낮은 가로에 쌓거나 질퍽한 큰 도로를 메우기도 하였으며 빈터나 폐가를 매입하여 쌓기도 하는 등 형편에 따라 적당히 처리하는 정도였는데 준설이 끝날 무렵인 1760년 4월 영조 임금은 당시 원로대신 유척기(兪拓基1691~1767)에게 개천 준설공사의 성과를 묻게 되었습니다. 이 때 유척기는 준설로 생긴 토사를 그냥 하천의 양안兩岸에 방치해 두면 비가 올 때마다 쓸려 내려와 다시 하천을 메우게 되어, 모처럼 실시한 대역사가 헛되이 되어 버리므로 거액을 들여서라도 이 토사를 다른 곳으로 운반해야 된다고 諫하였습니다. 이에 영조 임금은 청계천에서 준설한 수백만 석의 토사를 오간수문 부근 양안으로 옮겨서 쌓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청계천 양안에 엄청 큰 흙더미가 생겼는데 이것이 바로 방산이라고도 불렸던 가산입니다. 조그마한 꽃섬이었던 난지도가 1970년대 말부터 서울의 모든 쓰레기들을 받아들이면서 높이 90m, 넓이 53만평의 커다란 산이 되었던 것에 비견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난지도 규모만은 못하였겠지만 당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는 상당히 컸습니다. 1770년 이후 발행된 고지도에 오간수문 안쪽 청계천 양편에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산은 청계천 변에 살고 있는 거지들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거지들은 가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였으며 그곳에서 우두머리를 선출하였는데 그 우두머리를 '꼭지딴'이라 불렀습니다. 영조는 거지乞人 범죄조직에 빠질 것을 예방책으로 그들에게 뱀과 두꺼비 지네 등을 잡아 파는 권리를 주어 생계를 해결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뱀 잡이를 땅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들이 가산에 땅굴을 파고 살았던 것에서 연유된 말입니다. 가산은 특별히 기초를 다져서 쌓은 것이 아니라 그냥 흙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비가 오면 조금씩 깎여 내려가기도 하였고 반대로 개천을 다시 준설할 때마다 다시 쌓이기를 반복하여 완만한 언덕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 가산에 언제부터인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화초를 심게 되었는데 짐작컨대 1910년도 일제강점 초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1914년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가산의 꽃향기가 좋아서 이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을 서울시지명기록지에서 확인됩니다. 그런 가산 역시 인구가 늘어나고 근대적인 도시시설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북쪽의 가산은 광무光武2년(1898)에 그 자리에 전차 차고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쪽 가산은 1918년경에 동편에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현 국립의료원)가 들어서고, 1921년에는 그 서편에 경성사범학교가 들어서면서 모두 헐렸으며 그 흙은 종로의 도로 정비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남쪽 가산 터는 청계천 6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이고 북쪽 가산 터는 동대문종합상가가 들어서 있는 곳입니다.
⑧ 오간수문/五間水橋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 (水門)으로 이것이 다섯개 있었으므로 오간수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사람들은 '오간수문'이라는 이름 대신 '오간수교' 또는 '오간수다리' 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맞지 않습니다. 오간수문의 원래 기능은 이름 그대로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이었으며 다리가 아니었기에 명칭 또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오간수문'이라고 불렀지 '오간수교'라고 부른 적은 없었습니다. 오간수문을 오간수교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08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콘크리트로 근대식 다리가 놓여져, 이때부터 오간수교(五間水橋)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오간수문은 시내 전차의 주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간수교 바로 옆 지금의 동대문종합시장 자리에 옛 경성전기주식회사(지금의 한국전력)의 전차차고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1921년 6월 동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오간수교 위에 전차가 다닐 수 있는 철로가 놓이게 되었으며 각 노선으로 연결된 곳이다 보니 다른 어느 곳보다 전차의 왕래가 많았습니다. 1926년 6월 오간수교는 다시 확장되었는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례행렬이 장지인 裕陵 경기도 양주 금곡으로 갈 때 이 오간수교를 건너가게 되어 따라서 장례행렬이 건널 수 있도록 두 간 반 약 4.5m이던 다리를 네 간 반 약 8.2m로 확장하였습니다.
오간수문은 크기가 5척이나 되었으며, 각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이 수문을 통해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명종 때의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이
오간수문을 통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오간수문은 외부사람들이 도성을 몰래 드나들 때 이용하던 주요 통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오간수문은 튼튼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제대로 준설을
하지 않아 쇠창살에 나뭇가지 등 부유물이 걸리고
거기에 토사가 쌓여 수문을 거의 막아 상태였고
언제부터인가 임시 방편으로 2척의 나무문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이것마저도 개폐를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1760년 영조는 개천을 준설하면서 먼저 수문 앞에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었고 나무문도 다시 철문으로 교체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하였으며,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가 쓸려 내려와 다시 수문을 막는 일이 없도록 영구적인 조치를 하였습니다. 영조 임금은 원래 기능을 회복한 오간수문에 여러 차례 행차하여 역군들이 준설하는 것을 독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조가 이 오간수문에 행차하여 개천바닥을 처내는 일꾼들의 모습을 그린
「준천도」(1760년)를 보면 다섯 개의 수문과 수문마다 설치된 철문, 그리고 수문 앞에 놓인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한 모습이
선명합니다. 또 주변에 심어 놓은 버드나무도
무성하게 우거져 있으며 버드나무가 우거진 오간수문은
이후 도성 안에서 이름난 봄놀이 장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오간수문이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1907년 중추원 참의 유맹(劉猛) 토목국장이란 者가 청계천 하천수가
원활하게 소통되고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수문(水門)을 뜯어버렸습니다. 또 다음 해인 1908년 3월에는 훼손되어 방치된 성벽을 처리하고,
시가교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동대문 부근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 (五間水門)의 성벽까지 헐어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근대식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로써 오간수문의 원형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인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입니다.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된 5개의 구멍을
만들어 홍예교 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 다리는 다섯
칸의 수문을 설치했다고 하여 오간수다리 ·
오간수문 등으로
불렀으나 성종 12년(1481)까지만 해도
수문이 3개였고 후에 몇
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수문은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나가거나 혹은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었습니다.
실제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典獄署)를 부수고 도망갈
때에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에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는데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었습니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으며 이 때문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복원하였습니다.
그 후 1907년(융희 1) 일제의 사주를 받았을 중추원 참의 유맹(劉猛) 토목국장이란 者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는 명목으로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하였고 후에 그 위의 성곽이 훼손되어 아취만 유지되어 오다가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 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재현하였습니다.
《경성전기주식회사》
1898년 1월 'H-Collbran콜브란,과 H.R Bostwick 보스윅,' 두 미국 사람이 황실과 합자로 서울에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를 세워 1890년 4월 최초로 민간 전등을 가정에 보급하였고 1899년 4월 처음으로 서대문 -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개통하여 운행하였습니다. 1904년 7월 한미전기주식회사로 개칭하였고, 1915년 9월 다시 회사 이름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개칭하여 1961년 7월1일 한국전력주식회사에 흡수되어 1968년 11월30일 폐지되기까지 일제 강점기와 6.25전란 등 애환도 많았습니다.
이 사진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15일 해방 1주년을 기념으로 태극기와 꽃을 장식하여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것을 축하하는 뜻으로 꾸민 전차 입니다. 장소는 동대문차고지 입니다. 여기의 주유동무란 酒遊 친구란 뜻으로 당시 대한청년단 경전특별단 부원들의 모임을 다르게 별칭 한 것으로 봅니다.
단장 신성모(1891~1960)는 경남 의령 사람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이승만 대통령 정부 때 1948~50년 2대 내무장관, 2대 국방장관, 국무총리서리를 지낸 인물입니다. 보성普成법률상업학교를 나와 상하이 우쑹吳淞상선학교, 난징南京해군군관학교 졸업 중국 해군사관으로 있다가 베이징北京무선전신학교를 거쳐 무선전신국에서 일하다 1921년 4월 朴容萬 등이 주도하여 베이징에서 열린 '군사통일회의'에 통일당 일원으로 참여해 서무를 맡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하다 영국으로 유학 1922년 런던에 있는 킹 에드워드 7세 해양대학에 입학하여 졸업 후 일등항해사로서 영국 상선회사의 선장으로 일하다 1948년 11월 귀국하여 대한청년단 단장이 되고 이어 내무장관에 임명 되고 1949년 제 2대 국방장관에 임명된 인물입니다.
정대천(1909~1991)은 파주 사람으로 교하보통학교를 나와 제 3 . 4대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입니다.
이 증서는 단기 4282년-2333=서기1949년도에 발행한 것으로 크기는 (세로25cm × 가로32.5cm)입니다.
電車차고지로는 '영등포, 삼각지, 마포, 동대문 4곳에 있었고 그 중 동대문 차고지는 지금의 북쪽 옛 가산이 있던 자리이자 현재 동대문종합시장 일대였습니다. 노선은 9개 노선으로 운영되었는데 본선 :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효자동선 : 효자동-세종로. 서대문 마포선 : 세종로-서대문-마포. 의주로선 : 남대문로5가-서대문-영천. 을지로선 : 을지로6가-을지로입구-남대문. 왕십리선 : 을지로6가-왕십리. 창경원, 돈암동선 : 종로4가-창경원-돈암동. 신용산, 구용산선 : 남대문-남영동-신용산, 남영동-원효로. 노량진, 영등포선 : 신용산-노량진-영등포. 등 이었습니다.
《6.25전쟁 이후 노선(1957~1968)》
《해방 전.후 전차노선 (1945~1951)》
이 노선도는 지명을 표기한 방식과 글씨가 다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해방 후 전차가 폐쇄되기 까지 새로운 노선이 개통될 때 마다 지명을 덧붙여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바탕의 틀이 같은 타원형이라도 흰 바탕에 검은 색의 한자 또는 한글로 표시 한 것이 있고 연갈색 바탕에 흰 글씨를 써 넣은 것, 그리고 직사각형틀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인왕산의 '왕'字가 지금의 잘못된 旺자가 아닌 "王"자로 표기 된 점과 독립문이 표기된 점은 일제강점기 후에 표기한 것이며 남산에 표기된 '朝鮮神宮, 京城神社, 第一高女(경기여고전신), 第二高女(수도여고전신), 등은 그 명칭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표시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오간수다리 윗 모습입니다. 동대문과 그 뒤로 옛 돈화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있는 전 이대부속병원이었던 흰 건물과 낙산駱山 동쪽 기슭과 숭인동 주택들이 보입니다. 좌측 건물은 동대문 종합시장으로 옛 전차차고지였습니다.
1960년도만 해도 이 청계천 변에는 헌책방이 즐비하던 곳이었습니다.
동대문종합시장 건너편 창신동 지금의 이스턴 호텔자리에는 시내를 운행하는 전차와 다르게 청계천 제방 위에 설치된 철길 따라 뚝섬과 광나루를 운행하던 기동차시발역사가 있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어렵던 시절 청계천 뚝 길 따라 사과상자나 종이상자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2층집을 짓고 살던 곳에 기동차 철길 따라 빨래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영자누나의 빨강팬티도 아주머니의 고쟁이도 아이들의 깁고 꿰맨 양말도 비록 조각보처럼 꿰맨 옷이지만 눈부시도록 하얀 옥양목저고리에 검정물들인 광목으로 지은 일 바지(もんぺ monpe)도 청계천 바람에 너풀너풀 춤을 추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그 땐 참 그랬지...
《청계천 방죽 안쪽 계천에 나무기둥을 버팀목으로 괴고 지은 판자집들이 틈도 없이 끝없이 이어진 모습.》
《맑은 내 다리》
淸溪川을 순수한 우리말로 풀이하여 붙인 '맑은 내 다리'는 폭 13.5m, 길이 26.3m이며 동대문구 창신동 430번지와 중구 신당동 213번지를 잇는 다리입니다. 쌍 다리에 두 개의 아취형 틀과 케이불로 나비의 힘찬 비상을 형상화 하여 패션 중심지역으로 힘찬 도약의 상징성을 담았다고 합니다.
전통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서울사람들의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으며,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도성의 다른 곳에 놓여 있던 다리보다 비교적 크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던 곳이었던 만큼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청계천의 중요한 문화적 유산이었습니다.
(맑은내다리 아래 물속을 유영하는 모래무지와 피라미 )
('불거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피라미 수컷입니다.)
《다산교/茶山橋》
이 다리는 창신동과 흥인동 사이 흐르는 청계천에 준설한 다리로 창신동 327번지에서 중구 신당동을 거쳐 약수고개 넘어 한남대교로 이어주는 다리로 조선 말 학자 정약용 선생의 호 茶山을 붙여 다산교로 이름지었습니다. 이 다리 일대는 무허가 판자집이 난립하였는데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현대산업개발.GS건설 두 회사에 의하여 2005년 9월 말 준공되었습니다.
⑨ 영도교/永渡橋
이 다리는 '영미다리'로도 불렸으며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로 용두동과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습니다. 고종 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그 후 나무다리를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던 것은 청계천 복개공사 때 헐려 없어졌으며 다시 청계천 복원 당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종로구 崇仁洞과 중구 黃鶴洞 사이 숭신초등학교와 관우의 영정을 모신 동묘(東廟)로 나가는 교차로에 위치한 다리로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고 하여 동대문(흥인지문)을 거쳐 왕십리·뚝섬·광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였기 때문에 통행량이 많았습니다.
성종(成宗) 때 영도사(永導寺:지금의 안암동 개운사)의 비구를 동원해 돌다리를 놓은 뒤, 성종이 직접 영도교라는 어필(御筆)을 내렸는데, 영도교는 이때 붙은 이름입니다. 또 이 다리를 영미동(永尾洞)에서 내려오는 하천 끝에 놓인 다리라는 의미와 창신동에 있던 영미사(永尾寺) 승려들이 다리를 가설하였다고 하여 영미교(永尾橋) 혹은 영미다리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다리에는
단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갈 때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
가 이 다리까지
배웅 나와 이별하였는데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였다고 하여 영이별다리 ·
영영건넌다리라고도
불렀습니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리의 석물을 궁궐에 쓰는 석재로 징발함에 따라 나무다리로 바뀌었는데 이 나무다리들이 장마 때마다 유실되곤 하여
띄엄띄엄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면서 한때는 띄엄다리라는 명칭이 붙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 나무다리를
헐고 콘크리트로 교체공사를 할 때 교각 하부 구중(溝中)에서
관음보살목각좌상이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영도교를 놓았습니다.
<영도교 다리 상판 모습>
영도교 또는 영미교로 불리던 지금의 영도교 위 정경입니다. 다리 兩 건너 동묘 쪽이나 상왕십리 쪽 양 일대는 황학교에 이르기 까지 도깨비시장처럼 온갖 고물을 사고 파는 시장을 이루었습니다.
《황학교黃鶴橋》
중구 황학동762 번지에서 종로구 숭인동1435번지 사이 청계천을 가로질러 잇은 다리입니다. 옛날 이 일대 논에 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전설에 따라 지어진 지명에 따라 지은 이름입니다. 황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묘東廟 북쪽에는 조선 초에 여인들만 모여서 거래하는 채소시장이 섰는데 이를 장거리場巨里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숭인동 72번지 일대에는 싸전이 많이 모여 있어 싸전골이라고 불렸습니다.
《황학동 시장의 추억》
황학동과 중앙시장 미곡상이 들어섰던 그 언저리는 고물상들이 수집한 갖가지 생활폐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생겨나더니 점차 시장을 이루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창신동에서 동묘, 흥인동 일부와 황학동일대에 이르는 거대한 중고품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1960년 어느 여름방학 때 성동공고(성동기계공고)옆에서 군용야전무전기에서 추려 낸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발전기를 하나 구입해서 적당한 송판에 고정한 다음 그 발전기에 두 가닥(+-) 전화선을 잇고 긴 막대기에 전화선을 얼기설기 감아 고정하고 전화선 끝머리 음극에는 철사로 만든 조리채를 연결해 달고 또 다른 막대에 같은 방법으로 고정시킨 양극전화선 끝에는 굵은 구리철사를 송곳처럼 동여맨 것을 정릉천이나 길음동 개울에 잠긴 바위나 돌 밑에 음극선 채를 대고 양극선 구리철사를 반대 편 돌 밑에 갖다 대고 동무에게 발전기 손잡이를 돌리게 하면 전기가 발생하여 물속 돌 틈에 숨었던 돌고기나 피라미 미꾸라지 기름종개 등이 잠시 정신을 잃고 물 위로 떠오르면 철 조리채로 건져 올려 황학동에서 구입한 군용 밥통(Hang Go)에 주변 밭에서 서리한 호박, 고추, 파 등을 썰어 넣고 고추장을 풀어 매운탕을 끓여 먹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컴퓨터게임에 빠진 지금의 아이들은 이런 서정적 즐거움은 모른다 싶으니 우리의 어린 시절이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일요일이면 청계천 황학교 일대 골목 안에 온갖 옛날 물건들을 펼쳐놓은 노점시장이 섭니다. 옛 시절에 젖을 수 있는 추억의 거리입니다. 구입한 물건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를 든 중년의 남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애정어린 눈빛으로 고물들을 살피다가 그 눈동자가 놀라기도 하고 환희에 젖기도 하고 탄식도 합니다. 자신의 지난날과 조우하는 순간이겠지요. 저도 마찬가지로 그리움에 대한 아쉬움으로 애정이 꽃 피던 하루였습니다.
내가 어려서 이 시장에서 구입해 피라미, 돌고기를 천렵하던 군용무전기에서 분리된 발전기는 없지만, 발전기 달린 전화기는 만날 수 있어 그나마 무척 반가웠습니다. 발전기손잡이는 부러져 있습니다.
격동기 시대의 인물을 토대로 쓴 옛 소설 몇 권과 잡다한 몇 가지를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두한의 주제로 한 소설 "장군의 아들", 무리를 이루지 않고 單身으로 주먹들의 영역을 넘나들며 어둠의 세계를 주름잡던 '시라소니', '소설 무풍지대' 등 이 보입니다. 아, 망치도 보이네요.
황학교 아래 모습 교각과 지천支川에서 청계천으로 들어오는 수문이 닫힌 모습이 보입니다.
(소망의벽)
영미교와 바우당교 사이 청계천 벽에 청계천 복원 기념으로 당시 서울특별시장 이명박님과 각 구청장, 시민의 바람을 게시한 기념타일의 일부입니다.
《바우당교》
청개천이 복개되기 전인 1960년도 까지 영도교 아래 쪽 청계천에 하왕십리 당현동과 용두동을 잇는 '검정다리'란 이름으로 불리던 나무골조에 검정 칠을 하고 흙으로 상판을 덮은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바우당교 쯤 아닐까 싶습니다. 신당동에 살다가 1955년도 흥인초등하교 3학년 때 청계천 검정다리에서 약 300m정도 떨어진 하왕십리693번지 야산처럼 높은 지대의 조선시대에 지은 한옥으로 이사와 살았습니다. 1957년 여름 장마가 시작된 어느 일요일 장대비가 내리는 한 낮 대청마루에 앉아 빗줄기를 구경하다 집 마당 한 가운데 빗물이 모여 흘러가는 곳을 무심코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랐습니다. 세상에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빗물을 타고 요동을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 근처는 개울도 없고 더구나 동산처럼 높은 지대인데 어떻게 미꾸라지가 마당 가운데에서 빗물을 타고 있었을까 너무 신기해서 방에 계신 어머니께 소리쳐 여쭤보니 마루로 나오시며 하시는 말씀이 '미꾸리는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오르기도 한다.'고 말씀 하셨지만 믿을 수가 없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검정다리 건너에는 장안 벌로 이어지는 논밭이 펼쳐진 농경지에 미군군용비행장이 있었던 시절이었고 이 마장동미군비행장에 1960년 6월18일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 전용기가 착륙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비행장이 옮겨가면서 그 비행장 일부에 당시 임흥순 서울시장이 겨울에 무료 공설스케이트장을 설치해 주어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일, 그 후 영미다리 건너에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이 생기고 국내 최초로 실내 스케이트장이 생긴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성북천 합수머리)
(성북천 합수머리/城北川合水止)
(청계천고가도로교각/淸溪川高街道路橋脚)
청계천 복계와 동시 건설되었던 '청계고가도로' 이 역시 청계천 복원과 함께 철거되고 그 일부 교각 세 개를 전시적 기념물로 남겨 놓은 것입니다.
《그리운 한강 백사장》
한강에는 광나루 수영장, 뚝섬 수영장, 압구정 앞 샛강과 금호동 앞 무시막강 사이의 흰 모래섬, 여의도 인근 엄청난 백사장(이 백사장에서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이 백만 군중 앞에서 유세遊說 연설를 하기도 한 곳입니다.) 등에 은빛도 찬란하게 곱고 아름다운 하얀 모래와 둥굴거나 넓적한 강자갈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이 모래와 자갈을 모두 퍼 다가 청계천 복개와 고가를 걸설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 한강 모래 백사장에는 수많은 새끼자라가 놀았고 참재첩, 칼조개, 강소라, 말조개, 두드럭조개 등이 자갈 반 조개 반이었습니다. 자연은 개발을 하더라도 자연과 조화되도록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애초에 청계천을 복개하지 않았다면 한강도 청계천도 애당초 그 모습을 살려 가꾸었다면 지금처럼 어색하고 인위적 냄새나는 청계천이 아닌 참으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서울이 되고 청계천이 되고 한강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오릅니다.
청계 복개천 그 위에 놓였던 고가도로의 교각의 잔해, 이 또한 아련한 역사 속 뒤안길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무학교/無學橋》
길이 43.6m에 폭 34.8m의 이 다리는 복개되었던 청계천을 200년 9월30일 복원할 때 현대건설에 의해 준공되었습니다.
조선 태조임금께서 개경에서 도읍을 서울로 옮기고자 무학 대사에게 吉地를 청하여 도읍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왕십리까지 다녀간 것을 緣由로 무학로가 생겼으며 그로 인하여 동대문구 용두동 255번지와 성동구 하왕십리 596번지 사이를 잇은 다리 이름 또한 無學橋가 되었습니다.
《두물다리》
두 물길이 합치는 의미를 담은 이름입니다. 다리에는 合水의 의미를 담아 남여의 만남을 유도하는 문구와 시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만드세요." 남녀가 다정하게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황금마차도 있고요.
청계천을 따라가다보니 저만치 눈에 익은 건물이 보입니다. 옛 청계천 판잣집을 재현한 전시물 같으니 올라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마장동 527-4 서울청계천문화관 앞 청계천가에 세워진 청계천판잣집을 재현 전시한 세트입니다. 그러나 옛 판잣집 보다는 창문도 멋스럽고 지붕도 서구식이고 판자가 고급스러워 실감이 안 납니다. 당시는 나무로 기둥과 골조를 세운다음 사과궤짝이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나무상자 또는 종이상자(당시는 보루바코ボールばこ로 불렀음) 로 바닥과 벽을 둘러 집을 지었거든요. 아니, 종이상자로 벽을 만들면 비바람에 하루나 견디겠느냐고요! 그러나 몇 해 쯤은 끄떡없습니다. 어째서냐고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박스는 그냥 박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끄러운 종이에 콜타르를 바른 종이를 여러 겹으로 압착한 것에 겉은 기름으로 코팅한 것입니다. 군수품을 담았던 상자이므로 방수처리가 특별한 종이상자였습니다.
《정릉천 합수머리》
정릉 골짜기와 우이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려 길음동과 안암동을 지나 약령시장을 거쳐 내려온 정릉천이 합수되는 곳입니다. 정릉천을 수용한 청계천은 다시 중랑천과 합쳐 이 나라의 심장을 활성 시키는 우리의 생명 아리수의 한 줄기가 될 것입니다.
살꽂이다리까지 진행할 예정입니다.
|
첫댓글 청계천에 역사 잘 보구 갑니다 ...수고 하셧읍니다..^^*
고맙습니다.산에서 뵙겠습니다.
어찌 이렇게 세밀하게 올리셨는지요
안방에서 즐감했습니다
서울가면 평화시장에서만 쳐다보고 오곤 했답니다
감사합니다 ^^
잠시라도 즐거움이 되셨다니 더없이 고맙습니다.
선선한 바람처럼 상쾌한 시간되세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즐거운 나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