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 터져 나오는 “야호~”…발 아랜 멋진 호수 풍경이 한가득,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천 개의 계단 길도 ‘짜릿짜릿’
<지난 글에 이어>
여독을 대충 풀고 주방으로 갔다. 등산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는 배낭 안에서 음식을 꺼냈다. 누룽지와 김치, 김 가루 그리고 참치 볶음을 식탁에 올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홀로 여행자는 나밖에 없어 보였다. 내 시린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시원한 누룽지 국물이 텁텁한 내 속을 달래줬다.
올레길 산장 식당은 다목적으로 쓰인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주방 역할이 제일 크지만 낯선 등산객끼리 대화를 주고받는 공간이나 카드놀이를 하는 사교장으로도 쓰인다. 또 어떤 등산객들에겐 책을 꺼내 놓고 있는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유별난 용도는 ‘독(獨 홀로) 숙소’가 아닐까 싶다. 코골이가 심한 사람은 침상 대신 식당 한구석을 차지하고 밤새도록 자신의 운율을 뽐내며 ‘독창’을 즐긴다.
주방에는 환갑이 갓 넘어 보이는 남성 등산객 대여섯 사람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오클랜드에서 산행을 즐기기 위해 함께 내려온 친구들이라고 했다. 산을 타며 멋진 우정을 나누는 그들이 내심 부러웠다. 내 대학 친구들도 한 번은 내가 사는 뉴질랜드를 온다고 하긴 했는데 그게 이 깊은 산 속으로까지 현실화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산장 창 너머로 키아 두 마리가 훨훨 날아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내 침낭으로 들어갔다.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고 있는데 창 너머로 새 두 마리가 훨훨 창공을 나는 것이 보였다. 전 세계적으로 뉴질랜드 남섬 고원(alpine) 지역에만 산다는 키아(kea)였다. 창밖 베란다로 나갔다. 그중 한 마리가 난간에 앉았다.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순간 키아의 눈과 내 카메라 눈이 마주쳤다.
“찰칵(안녕). 찰칵(안녕).”
나는 그렇게 케플러 트랙의 또 다른 주인인 키아와 인사를 했다. 하늘길은 사람의 길이 아닌 새들의 길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상업용 드론이나 개인용 하늘 비행기를 걱정해 하는 말이다.)
산장 게시판에는 등산객을 위한 좀 색다른 공고물이 붙어 있었다. 산장 밖에 놔둬야 하는 등산화 끈을 반드시 꽉 묶어 놓으라는 것이었다. 머리 좋은(그리고 심술 궂기도 한) 키아가 종종 신발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기도 한다는 주의였다. 남섬 고원 지대를 다녀온 등산객들에겐 키아에 얽힌 에피소드가 한두 가지는 꼭 있다. 먹던 점심을 뺏겼다는 얘기는 가장 흔한 일. 그 밖에도 내가 들은 ‘웃픈’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지만 지면상 이 정도로 한다.
산행 땐 ‘운칠기삼’(運七氣三) 아닌 기칠인삼(氣七人三)
저녁이 깊어지자 빗방울이 창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사람의 일생을 두고 하는 말 가운데 ‘운칠기삼’(運七氣三)이라는 것이 있다. ‘운이 7이고 능력은 3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난 등산할 때는 이걸 ‘기칠인삼’(氣七人三)으로 바꿔 말하고 싶다. ‘기후(날씨)가 등산의 7이고 사람의 능력은 3에 불과하다’는, 내 나름의 주장이다. 특히 나 같은 초보 여행자에게 날씨가 좋고 나쁨은 산행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바로미터가 아닐 수 없다.
피요로드랜드국립공원에는 한 해 200일가량 비가 온다. 눈 오는 날까지 합치면 산행 중 적어도 하루나 이틀 정도는 비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D.O.C는 날씨가 나쁠 경우 트레킹을 포기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라고 권한다. 실제로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트레킹을 마쳤다면 그건 대복이 터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오고 걱정이 깊어졌다. 케플러 트랙에서 가장 힘든 과정을 넘어왔는데 비 때문에 다음 일정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산등성이 사진은 대충 찍어도 ‘예술’로 승화
다음 날 아침, 해님이 반짝 인사를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다행히 밤새 내린 비는 잦아들었다. 가랑비가 조금 오긴 했지만 산행을 그만둘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배낭을 짊어졌다.
둘째 날 럭스모어 산장부터 이리스 번 산장까지 14.6km, 5~6시간 구간은 케플러 트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수정 같은 테 아나우 호수를 저 멀리 아래로 두고 끝없이 펼쳐지는 산길은 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해진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로 채워진 이 넓은 산을 단 몇십 명만이 즐길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내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다행히 첫걸음을 뗀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가랑비마저 그쳤다. 그제야 수줍은 듯 해맑은 해님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야호!!!”
산꼭대기를 가로지르는 산행이 한동안 이어졌다. 나보다 앞서간 등산객들을 멀리서 카메라에 담았다. 대충 찍어도 예술 사진이 되었다. 내 사진 실력이 아닌 자연이 빚어낸 멋진 작품이었다. 점심 무렵 간단한 간식을 먹기 위해 배낭을 내려놓았다. 순간 어디서 날아왔는지 키아 두 마리가 내 배낭을 포위했다. 여차하면 배낭이라도 먹어 치울 기세였다. 그렇게 가까이서 키위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 현장은 이 글에 실린 사진을 참고하면 된다. 참고로 키아라는 새의 이름은 목쉰 소리로 ‘키아(keeeaa~)’라고 해서 붙여졌다.
임시 피난처 두 곳…그만큼 ‘위험한 구역’이란 뜻
다음 숙소인 이리스 번 산장까지 가는 동안 두 개의 임시 피난처(emergency shelter)를 만나게 된다. 정말로 비상 상황을 빼고는 잠시 쉬었다가 가야만 하는 곳이다. 4~5km 간격을 두고 임시 피난처가 두 곳이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지대가 위험하다는 방증이다. 거센 비가 오거나 세찬 바람이 불면 이곳에서 쉬었다 갈 수밖에 없다. 자연과 싸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을 굳이 증명할 까닭은 없지 않겠는가. 나 역시 같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임시’로 ‘피난’을 했다. 황홀한 풍경 못지않게 피곤도 황홀해져 갔다.
두 번째 임시 피난처인 행잉 밸리 임시 피난처(Hanging Valley Emergency Shelter. 1,390m)를 지나면 곧바로 나무로 된 계단 길이 나온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위에서 본 아래는 편안했다. 더는 오르막길이 없을 것 같았다. 한 계단 한 계단 발걸음을 내려놓았다. 백 개, 이백 개, 그리고 오백 개쯤 셌다. 그런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리가 간 서양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자주자주 발 뒷굽이 허공을 찼다. 숏다리 소유자의 비애였다.
족히 일천 개쯤의 계단이 있었던 것 같다. 중간중간 굵은 철삿줄로 방어막을 쳐 놓기도 했다. 위험한 길이 포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앞서 케플러 트랙은 꼭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한 이유가 바로 그래서다.(D.O.C도 그렇게 권한다.) 만약 시계 방향으로 걸었다면 이 대목에서 얼마나 기진맥진했을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아~ 그런데 계단 길 저 아래에서 힘들게 위를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옮기는 등산객을 만났다. 나도 모르게 웃음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나왔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가는 발걸음은 정말 고단한 게 분명했다.
《더 로드 오브 더 링스》배경 같은 숲길 볼 수 있어
계단 길이 끝나면 케플러 트랙의 또 다른 진가가 드러난다. 언제 고산 지역의 황량함과 거센 바람이 불기라도 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색색의 실크 로드(비단길)가 앞길을 장식하고 있다. 영화 《더 로드 오브 더 링스》(The Lord of the Rings)의 배경 같은 몽환적인 숲이 등산객들을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해 준다. 사이사이 흐르는 크고 작은 시냇물도 나그네의 땀을 식혀 주기에 충분하다. 힘든 길(인생) 버텨 온 우리에게 건네는 생명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쁜 것 없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윗도리 훌훌 벗고 시원하게 등목이라도 하고 가라는 유혹처럼 다가왔다.
케플러(Kepler)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그 이름의 유래나 뜻을 꼭 찾아본다. 누군가 이름을 지었을 때 이유가 반드시 있었을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이름 ‘성기’(聖器)를 우리 아버지가 호적에 올렸을 때 앞으로 ‘거룩한 그릇’으로 살라는 뜻을 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노파심에서 한 마디. 여러분들이 웃으며 생각하는 야릇한 그 뜻의 ‘성기’는 절대 아님을 이 자리에서 밝힌다.
케플러 트랙은 뉴질랜드 측량관이자 천문학자인 제임스 매케로(James McKerrow, 1834.7.7~1919.6.29)가 가장 존경하는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2.27~1630.11.15)를 기리기 위해 따온 이름이다.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핵심 인물로 널리 알려진 요하네스 케플러는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학자이다. 이 정도면 ‘알쓸신잡’(알아두면 쓸 데 있는 잡학사전) 반열에 들지 않을까?
<뒷편은 일 주일 뒤에 이어집니다.>
첫댓글 때로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온전히 본질의 나로서 존재하는 축복의 시간들.
그것은 누리는 사람의 몫!
여행기를 한 줄 한 줄 읽다 보니 어느덧 전체 여행을 한 기분처럼 즐겁게 읽었습니다.
시원의 햇빛, 바람, 물, 공기.
직접 갔다 오신분의 몸 세포와 영혼은 아름다움의 무늬가 다르겠지요!
'낮은 산도 아름답다.'
스스로 위안 해 봅니다.^^
케플러 코스, 키아 등등의 이야기는 귓등으로 흘려 보내고 갑자기
조선시대에나 만날 법 한 장길산을
끝자락에 만나서 얼마나 웃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