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삼학도가 임자도로 간 까닭
2012. 9. 금계
(나주 금성산 선산)
이제까지 내 글을 읽은 사람은 어째서 당신 글이 맨날 술 마시는 이야기, 먹는 이야기밖에 없느냐고 놀려대지만 돌이켜보면 평생 술 취해서 뒤뚱거리고 음식 탐하다가 배불뚝이 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기억이 없는 걸 어떠하겠는가. 그래도 난 별 불만이 없다. 옛날 같으면 진시황도 네로 황제도 구경하지 못했을 산해진미를 한 세상 실컷 맛보는 호강을 했으니 더 이상 무슨 원이 있겠는가.
내가 존경하여 마지않는, 내가 우리 시대의 마지막 교사로 우러르는 고 선생님도 자유시장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장에서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서 좋다고 하지 않으셨던가. 인생 살아가는 재미의 절반 이상이 먹는 재미라 하지 않으셨던가.
여름이면 목포에서 가장 자주 먹는 회가 민어회다. 자꾸 소주에 민어회를 먹다 보니 자연히 민어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리 없다. 민어 이야기를 자주 하다 보니 술자리에서 중언부언 길게 늘어놓을 게 아니라 한 번은 체계적으로 글로 정리를 해 놓고 넘어가는 것이 나을 성 싶었다. 그래서 먹는 이야기만 한다는 조롱을 무릅쓰고 지금부터는 또 민어 이야기를 시작해볼 심산이다.
서울에서는 잘 모르지만 목포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음식이 몇 가지 있다. 무화과, 비파, 매생이, 전어, 민어.
무화과는 목포 인근에서만 자란다. 건강에는 굉장히 좋은 과일로 알려져 있지만 보관성이 떨어져서 멀리 운반하여 먹기가 어렵다. 그러나 요즘에는 교통이 발달하여 서울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무화과를 먹을 수 있다.
목포시의 시목(市木)이 비파다. 비파는 역시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이 거의 구경하지 못하는 나무다. 무화과만큼 몸에 좋은 과일이라지만 쉽게 짓물러져서 보관성이 낮은데 요즘은 빨리 운반한다면 서울 사람들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다만 열매 익는 시기가 한정되었으므로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매생이는 주로 고흥 장흥 완도에서 생산되는데 김 파래와 사촌간이다. 옛말에 ‘사위 미우면 매생이국 끓여준다“는 속담이 있는데 매생이로 국을 끓이면 아무리 뜨거워도 김이 오르지 않아 멋모르고 먹었다가는 입을 데기 십상이다.
“서울 사람들은 이 맛 모를 것이여.”
옛날에는 남도 사람들만 킬킬대면서 석화를 넣은 걸쭉한 매생이국을 살짝살짝 즐겼는데 교통 통신이 발달한 요즘에는 서울에도 많이 알려지면서 갑자기 유명세를 탔다. 귀하신 몸이 되면 값이 뛰고 남도 사람들이 싸게 먹을 수 없으니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전에는 흔해 빠진 생선이 전어였다. 술집에 가면 전어 무침이 기본 안주로 나왔다. 물론 무료였다.
“전어는 깨가 서 말이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
방송에서 어찌나 주문을 외워쌓던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유명세를 타면서 당연히 전어회도 가격이 다른 생선회와 똑같은 반열에 올라앉아 버렸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서운한 것이 거북손이다. 따기는 어렵고 먹잘 것도 별로 없지만 나는 진도 조도에서 먹던 그 간간하고 짭조름하면서도 쫄깃한 감칠맛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1박2일의 강호동이 만재도를 다녀온 후부터는 서울 사람들이 직접 만재도로 전화를 해서 택배로 가져다 먹는다지 뭔가. 허허, 고것 참. 항의할 수도 없고.
위에 열거한 것들은 비교적 최근에야 서울 사람들한테 알려졌지만 민어의 경우는 좀 다르다. 민어는 예전부터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생선이지만 비싸서 쉽게 먹을 수 없었다. 지금도 비싸기는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연근해 생선치고는 한 마리가 10킬로 20킬로 나가는 헤비급인지라 쉽게 식탁에 올리기 어렵다.
우리 할머님의 친정은 꽤 형편이 좋았던가 보았다. 남정네들이 나주 시장에 가서 커다란 민어를 사서 지게에 지고 오면 시원한 처마 밑에 갈고리로 걸어두고 조금씩 떼어내서 요리해 먹었다 한다.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서민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냉장 시설이 없던 때인지라 민어 농어 조기 따위는 꾸덕꾸덕 잘 말려서 보리쌀이 담긴 쌀독에 묻어 놓았다가 먹었다. 오래 묻어놓으면 살에서 노란 기름이 배어나왔다. 그걸 굽거나 맨입으로 좍좍 찢어서 간장이나 고추장에 찍어먹으면 쫄깃한 맛이 썩 괜찮았다. 기억이 자세치 않지만 나도 어렸을 적에 몇 번 먹어봤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옛 어른들처럼 말린 생선을 좋아한다.
말리기에는 큰 민어보다 작은 민어가 훨씬 간편하고 제격이다. 건어물 상회에 가면 지금도 구할 수 있다. 말린 민어에 물을 붓고 자글자글 끓이면 국물 맛이 아주 그냥 죽여준다. 육수 맛으로 쳐도 민어와 어깨를 겨눌 수 있는 음식이 많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꽤 일찍 민어회를 팔기 시작한 목포예식장 근처의 횟집은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냉동실에서 꺼낸 민어를 해동시켜서 회로 썰어 팔았는데 특히 비브리오 균이 무서운 여름철에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냉동 민어로 손님들이 몰리면서 떼돈을 벌었다. 식사를 하려면 탕 값은 따로 받았다. 순식간에 그 유명 민어 횟집 부근에 다른 횟집들이 스무 군데쯤 생겼다. 그 식당은 부근의 땅을 사서 주차장까지 넓히고 손님을 받았다.
나도 거기에서 처음으로 민어회를 맛보았다. 그 후로도 계속 그 집이나 그 이웃 식당에서 민어회를 먹었다. 지금도 전국적인 맛 집으로 알려진 그 식당에는 꽤 많은 손님들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집에서 민어회를 먹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 집에 드나든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 거리 말고 요즘에는 목포에도 곳곳에 민어 횟집이 많이 생겨났다. 새로 생긴 횟집들에서는 냉동 민어를 쓰지 않는다. 냉장실에 신선하게 보관했다가 부드러운 살을 썰어 내놓는다. 냉동실에 들어갔다가 해동시킨 민어하고 냉장실에서 나온 민어는 그 육질의 신선감이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냉동실이 아닌 냉장실에는 오래 보관하기도 어렵고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보잘 것 없는 교직 생활 40년 동안 그래도 가장 인상 깊은 사건은 전교조였다. 전교조 때문에 4년 반 동안 해직까지 당했으니 어찌 꿈엔들 잊힐 리 있으리오. 1994년 나와 함께 해남군으로 복직했던 김 선생은 몇 년 후 임자고등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임자도는 민어의 명산지였다. 김 선생 덕분에 우리도 슬금슬금 민어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해직 시절 내가 전교조 목포지회장을 맡았을 때 김 선생과 문 선생이 초등 담당이었다. 아무리 탄압이 심해도 목포 시내의 중고등학교들은 그런대로 전교조 활동이 활발했지만 초등은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대부분의 초등학교들은 교장들의 작은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교사들이 전교조에 마음이 있어도 그 뜻을 ‘시러 펴디 못할’ 사정이 많았다. 아무도 반기지 않고 대접도 해주지 않고 슬리퍼도 내주지 않는 왕국의 복도를 맨발로 돌아다니면서 소식지를 돌리고 전교조 조직을 일구어 내는 것이 김 선생과 문 선생의 임무였다. 그 엄혹한 시대 분위기를 과감히 뚫고 몇몇 초등학교의 몇몇 교사들이 음으로 양으로 전교조를 도왔다. 정말 가뭄에 콩 나기였지만 그만큼 더욱 고마운 교사들이었다. 거의 생사를 함께 하는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복직 후 나와 김 선생 문 선생은 고마운 그 때 그 시절의 초등 선생들과 ‘삼학도회’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은 여태까지 스무 해 동안 끄떡없이 이어지고 있다.
90년대 어느 여름방학에 ‘삼학도회’가 부부동반으로 임자도에 갔다. 김 선생의 안내로 ‘털보네 민박집’에 묵었다. 민박집 평상에 앉아 민어회를 먹었다. 구레나룻이 텁수룩한 털보 주인이 우리 곁에 앉아 잘 드는 회칼로 민어를 썰면서 여기는 어떤 부위이고 어떤 맛이 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때부터 ‘삼학도회’는 10여년쯤 부부동반으로 여름방학이면 어김없이 임자도에 놀러가서 민어회를 즐겼다. 지금은 또 사정이 여러 가지로 바뀌어 임자도 출입이 뜸해졌지만 돌이켜보면 임자도로 민어회 먹으러 다닐 때보다 더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삼학도회’를 따라 임자도를 방문해보기로 하자. 위 사진이 무안군 점암면 임자도 배 타고 들어가는 포구다. 8월 초순이면 임자도 대광리 해수욕장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그맘때쯤이면 포구로 들어가는 길목에 기다란 차량 행렬이 끝도 갓도 없이 이어진다.
점암 포구에서 임자도까지 차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철부도선이다. 대략 30분쯤 걸리던가. 차량들 일부는 점암에 세워두고 일부는 배에 싣고 간다.
배에서 내리면 임자도 포구다. 요즘에는 섬에도 관광객들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근사한 눈요깃감 아치를 설치해 놓았다. 활짝 웃고 있는 내외의 다정한 모습이 보기 좋다. 다들 금슬이 좋지만 ‘삼학도회’에서 가장 금슬이 좋은 부부교사다.
오른쪽 신 선생은 모임 초창기에 여러 해 동안 총무를 맡느라 수고가 많았다. 전교조를 하면 승진을 못할까? 아니다. 다 자기 하기 나름이다. 신 선생은 교감 장학사를 거쳐 승승장구를 계속했다. ‘삼학도회’에서는 신 선생 말고도 교장이 둘이나 된다.
임자도 포구에서 차로 조금 들어가면 대광리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민어를 맛나게 먹고 술이 얼큰해지면 해수욕장으로 나가 헤엄도 치고 족구도 하면서 여름의 낭만을 충분히 즐긴다. 한번은 술 취한 ‘삼학도회’ 남정네들이 우리 부인을 떠메고 가서 바다에 내동댕이쳐버렸다. 그 바람에 조금 헐거웠던지 부인이 끼고 있던 금반지가 빠져나와서 바다로 사라져버렸다. 거 참, 입맛을 쩝쩝 다셨지만 물어내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밤바다 백사장 특설무대에서 벌어진 가요무대는 숱한 구경꾼들에 에워싸여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노래가 끝나고 무대에 불이 꺼지자 바로 머리 위에서 수백 발의 폭죽이 터졌다. 불꽃놀이 불꽃놀이 해도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펑펑 터지는 폭음은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요지경처럼 환상적이고 황홀 찬란했다.
“어야, 요즘은 환갑잔치 안 허니까 지금부터 부지런히 적금 들었다가 나 칠순잔치 할 때에는 이렇게 웅장한 폭죽 몇 발 터뜨려주소.”
김 선생한테 우스갯소리를 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워메 워메 워따메, 벌써 칠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목포 식당들의 민어회 상차림은 대강 이러하다. 냄비에는 얼큰하고 혀가 짝짝 달라붙는 민어 매운탕이다. 임자도 대광리 해수욕장에서는 이렇게 맵시 나게 먹지 않는다. 그럴 여유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그냥 투박하게 뚜벅뚜벅 썰어서 아무렇게나 된장 초장이나 겨자에 찍어먹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식당보다 훨씬 싱싱하고 맛있다. 바다에서 잡은 지 얼마 안 된 민어를 사오기 때문이다. 생선회는 시간을 다툰다. 산지에서 가까울수록 더 싱싱하다. 그것을 ‘거리의 법칙’이라 부른다.
어떤 이는, 일본 사람들은 주로 갓 잡은 생선보다는 2-3일 숙성시킨 회를 즐겨먹는다고, 오히려 숙성시킨 회가 더 맛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 보기에는 완전히 다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살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어 껍질이나 민어 부레는 확실히 싱싱할 때라야 더 쫀득거리고 싱그러운 식감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사실은 살점도 갓 잡은 고기하고 며칠 지난 고기하고는 탄력이 다르고 씹히는 맛도 미묘한 차이가 난다고 봐야 옳다.
또 임자도에서 배웠는데 민어 쓸개는 죽은 지 하루가 지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잦아들고) 만다는 것이다. 농어나 돔 따위의 다른 생선들은 쓸개가 공 모양인데 민어는 기이하게도 길고 가느다란 창자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민어 쓸개는 신선도의 척도가 된단다. 쓸개는 대개 병 소주에 짜 넣어서 흔들어 씁쓸한 맛을 음미하며 여럿이 나누어 마신다.
민어는 돔이나 농어처럼 수족관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놈들을 보기 어렵다. 몸집이 클수록 빨리 죽을 확률이 높다. 대부분 건져 올리는 즉시 뻐드러지고 작은 놈들은 어찌어찌 살려서 수족관에 넣기도 하지만 그나마 물속에서도 배를 뒤집고 숨을 깔딱거리기 일쑤다. 요컨대 활어를 먹기가 극히 힘든 물고기이다. 그렇더라도 가능하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빨리 먹는 것이 상책이다. 홍어 애는 금방 상하지만 민어 부레도 기름기가 많아 빨리 상하기 쉽다.
1킬로쯤 되는 작은 민어를 ‘통치’라 한다. ‘통치’는 어부들이 민어로 치지도 않는다. 그래도 말려서 먹을 때에는 이 정도 고기면 괜찮다. 민어는 5킬로에서 10킬로까지가 가장 맛있고 먹을 만하다고 한다. 10킬로 넘으면 맛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킬로그램 당 가격도 이 크기 때 가장 비싸다. 암치와 수치도 가격이 다르다. 알을 배기 전에는 암치도 맛있지만 알을 밴 다음에는 수치 가격이 월등히 비싸다. 알도 맛이 좋다. 숭어알을 말려서 어란을 만들지만 원래는 민어 알로 어란을 만들었더란다.
시세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7-8 킬로짜리가 보통 이삼십만 원을 호가하니 개인이 한 마리를 통째로 사서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열 명이나 열다섯 명이 먹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으로 민어가 가장 유리하다. ‘삼학도회’가 여러 해 동안 임자도로 가서 민어를 즐긴 이유 중에 하나도 이 때문이었다.
인터넷을 떠들어 보니 민어는 여름철이 되면 알을 낳으러 제주도 방면에서 임자도 쪽으로 올라온단다. 갓 태어난 민어 새끼들은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기수 지역에서 논단다. 겨울이 되면 따뜻한 제주도 방면으로 다시 내려간단다. 그런데 요즘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바닷물 온도가 상승하여 때 아닌 이른 봄철부터 목포 인근에서 민어가 잡히기도 한단다. 홍어 조기도 서해안을 회유하지만 민어도 서해안을 회유하는 셈이다. 조기도 울지만 민어도 우는 소리가 난다던가.
어쩌다가 목포에서 고래 고기나 참치를 맛보기도 하지만 고래 참치 다음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부위를 맛볼 수 있는 고기가 민어다. 목포의 식당에서는 기껏해야 살과 부레, 살짝 데친 껍질이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매운탕으로 들어간다. 정성이 지극한 식당이라야 ‘당고’라고 부르는, 부드러운 뼈와 뼈에 붙은 살점들을 잘게 쪼아 다진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임자도는 원산지와 가장 가깝다는 이점 때문에 다양한 부위를 날로 먹을 수 있다. 이것이 ‘삼학도회’가 임자도로 간 가장 중요한 이유다. 임자도에서 날로 먹은 부위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머리뼈-일식 요리에 ‘돔 머리 구이’가 있다. 기름지고 고소해서 안줏감으로 훌륭하다. 민어 머리뼈도 절대로 돔에 뒤지지 않는다. 머리뼈를 절개하면 안의 뇌수는 흐늘흐늘하고 보드라워서 고소한 맛이 미식가들의 혀를 즐겁게 해준다. 보통 식당에서는 ‘당고(뼈다짐)’을 만들기도 하고, 머리를 통째로 매운탕에 집어넣는다. 탕국물은 머리뼈가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제대로 우러나오지 않는다.
눈알-고기가 크니까 눈도 크다. 깨물기 거북할 정도로 입안에 가득 찬다. 잔인하다 싶어서 겁이 날 정도로 당황스러우면서도 형용키 어려운 식감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꼭 맛있다고 하기에도 미안한 맛이다. 안 먹어본 사람은 절대로 그 맛을 알 수 없다. 그래도 미식가들한테는 민어의 여러 부위 가운데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삼학도회’에서는 눈알에 관심이 집중되어서 모일 때마다 나이 순서로 차례를 정해놓고 먹었는데 요즘은 그마저 시들해졌다. 자꾸 사양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내가 먹는 횟수가 많아졌다.
아가미-고기가 크니까 아가미도 한 쪽씩 칼로 떼어내서 참을성 있게 오랫동안 자근자근 깨물어 먹다가 찌꺼기는 뱉어낸다. 다른 부위에서는 절대로 음미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이다. 싱싱할 때라야만 선홍색으로 밝은 빛을 띤다. 거무데데한 빛으로 퇴색하면 날로 먹을 수 없다.
등뼈-완도의 이름난 한식집에서는 회를 뜨고 난 참돔 등뼈를 튀겨서 내놓는다. 바삭바삭해서 먹을 만하다. 민어 등뼈는 튀겨 봤자다. 어른 손가락 두세 배쯤 굵어서 보통 탕 끓일 때에 들어간다. 임자도의 비교적 싱싱한 민어는 등뼈도 날로 깨문다. 한 토막씩 잘라서 입에 넣는다. 옛날 눈깔사탕을 먹을 때처럼 입에 한가득 찬다. 단단해서 잘 깨물려지지도 않는다. 2-3분 동안 침으로 녹여 오물오물하다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싶으면 조심스레 깨물기 시작한다. 2-3분 깨물고 있노라면 바수어진 조직 사이로 척수가 나오기 시작한다. 달착지근하고 꼬소롬하다.
처음 몇 해 동안 임자도에 가면 부인들은 횟감으로 뜬 살코기를 주로 먹었다. 남자들만 회를 뜨고 난 다른 부위들을 먹었다. 보통 민어를 먹고 술을 마실 때에는 시끌벅적 떠들썩하게 마련인데 한 번은 어쩐지 조용해서 낌새가 이상했다. 부인들 쪽을 살펴보니 수대로 입에다 등뼈 한 토막씩을 넣고 오물거리는 바람에 떠들래야 떠들 도리가 없었다. 자기들은 살점만 주고 남자들은 등뼈를 맛나게 먹으니 도대체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먹어본다고 했다. 그 후로는 등뼈에 대한 남자들의 독점권이 사라졌다. 이제 부인들도 이런저런 부위에다 혀를 대기 시작했다.
등지느러미 - 등지느러미에 붙은 살도 다른 부위와는 좀 색다른 쫄깃하고 고소하고 오묘한 맛이 난다. 지느러미뼈와 그 부근 살점을 살짝 도려내서 살살 깨문다. 한 번은 임자도 사는 김 선생이 털보네 민박집 말고 색다른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백사장 가까운 곳에 원두막처럼 지어놓은 건물이었다. 하필이면 비가 왔다. 원두막 같은 허술한 건물에서 민어회를 먹고 있는데 빗줄기를 뚫고 식당 주방에서 우리가 올라앉은 원두막으로 음식을 나르는 후줄근한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미안해서 술 한 잔 하고 가시라 했다. 술을 마신 후 아저씨를 생각한다고 민어회를 젓가락으로 집어주며 생색을 냈다. 후줄근한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다. 등지느러미 쪽을 가리켰다. 그 부위를 집어주라 했다. 아마도 그 동네 주민인 듯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맛난 부위를 알 까닭이 없었다.
껍질 - 껍질은 살짝 끓는 물에 데쳐서 먹는다. 기름기가 적어 담백하고 껌처럼 질겅질겅 깨무는 식감이 다른 부위와는 색다른 맛이다. 끓는 물에 짧은 시간 담갔다가 재빨리 알맞은 시간에 꺼내는 것이 요리의 핵심이다. 너무 오래 데치면 부들부들 탄력이 사라져 깨무는 맛이 떨어진다.
부레 - 부레는 물고기가 뜨고 가라앉는 동작을 조정하는 핵심부품이다. 붕어는 부레가 지극히 얇고 작지만 헤비급 민어는 아주 두껍고 크고 기름지다. 옛날에는 끓여서 초강력 본드로 활용했다던가. 다른 물고기에서 맛볼 수 없는 민어 부레의 껌처럼 짝짝 이빨에 달라붙는 독특한 식감은 미식가들을 민어 횟집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의 원천이라 할 만하다.
간 - 내장 가운데 간은 날로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무엇도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토끼 간이 아니더라도 맛이야 간이 맛있지.
완전히 몬도가네 수준이랄까. 혹시 내 글을 혐오스런 기분으로 읽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임자도에서는 이렇게 여러 부위를 남자들뿐 아니라 종당에는 부인들까지도 날로 즐겼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살부터 뼈까지 날로 먹다 보니 내장 조금 빼고는 남아나는 부위가 거의 없었다. 남들은 머리와 뼈와 지느러미와 내장으로 탕을 끓여 먹는데 ‘삼학도회’는 다른 생선을 추가로 주문하여 탕을 끓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왜 살과 부레와 데친 껍질만 나오는 목포의 식당들에 매력을 잃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부인들까지 여러 부위를 즐기다 보니 회로 떠먹는 살이 꽤 많이 남았는데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술안주로 먹으면 훌륭했다. 역시 민어 살은 숙성시켜 먹어도 맛이 좋다. 우리들은 강호동의 1박2일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임자도에서 여름철마다 1박2일로 민어를 즐긴 셈이었다.
듣기 좋은 노래도 석 자리 반이라고 임자도도 십여 년 동안 들락거리니 싫증이 났을까. 하기야 세월이 흐르면서 ‘삼학도회’의 ‘환경 설정’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임자도 대신 지리산 피아골도 가고 보길도도 가고 자은도도 가고 압해도에도 다녀왔다. 그러면 지금은 임자도에 안 가니까 민어와는 담을 쌓았느냐고? 아니지, 아니여. 그 좋은 맛을 잊어버리면 쓰간디?
어느 핸가 피아골 수련원으로 놀러갔을 때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민어는 먹되 장소를 한 번 바꾸어보자. 피아골로 몰려간 학습목표가 그것이었다. 그 학습목표는 약간의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나름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커다란 민어를 임자도에서 통째로 사다가 얼음상자에 넣어가지고 피아골로 갔다. 시냇물 가에 판을 벌이고 과일도 먹어가면서 압해도 가룡리 출신인 최 선생이 칼을 잡고 슬금슬금 민어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다 민어회 접시를 올려놓고 먹는 통에 자칫 잘못해서 민어접시가 모래바닥으로 떨어졌다. 민어회가 모래를 뒤집어썼다. 그 아까운 민어를 버릴 수는 없었다. 낙지나 조개나 바닷물고기는 민물로 씻으면 맛이 떨어지게 마련이었지만 우리들은 피아골 골짜기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씻어먹었다. 그러나 문 선생만은 끝까지 피아골 위쪽 복작거리는 피서객들이 때를 밀고 오줌을 내갈긴 더러운 물에 씻은 민어는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아 이 사람아.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흘러내려오면서 거품이 일고 산소가 들어가 자연 정화가 잘 되어서 깨끗하단마시.”
“알았당께라우. 깨끗한께 댁들이나 많이 자시랑께라우.”
골짜기에는 평지보다 일찍 산그늘이 내렸다. 주위가 침침해지자 술판이 끝났다. 모두들 주섬주섬 잔치판 정리한 도구들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 선생과 문 선생이 들어가 노는 냇물을 주목해주시라. 빈 그릇이나 상자 따위를 들고 다리가 있는 곳으로 조금 돌아서 숙박지로 건너가면 될 것을 술 취한 몇몇이 부득부득 최 선생 김 선생이 놀던 냇물을 건너가자고 우겼다. 물은 깊고 물살은 세차고 바닥은 미끄러웠다. 얼큰한 술꾼들이 자빠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수대로 쓰러져서 허우적거렸다. 덕분에 식칼도 도마도 그릇들도 순식간에 세찬 물살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날 밤 숙소에서 화투를 치면서 수박을 먹으려는데 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누군가 주먹 태권도로 수박을 격파해서 쪼개어 먹었다. 주먹에 얻어맞아 으깨어진 수박 맛이 어떻더냐고? 안 묵어 본 사람은 말을 말더라고.
민어를 먹던 날이었을까 다음 날이었던가. 우리는 유명한 식당으로 몰려가 참게탕 참게장에 맛난 점심을 먹고 레프팅을 했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레프팅을 했던 험한 계곡 급류에 비하면 잔잔한 섬진강 레프팅은 아이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보트를 조종하는 조교들의 엄포는 발리나 섬진강이나 비슷했다. 물에 빠지면 생명의 위험을 느낄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라. 귀중품은 빼 놓고 가시라. 카메라를 놔두고 가시라. 그런데 보트에 오른 내가 카메라로 여기저기를 찍어대자 허 참, 조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덕분에 기념이 될 만한 사진을 여러 장 건졌다. 선선한 강바람을 맞으며 노를 젓는 레프팅은 술판보다도, 노래방보다도 삼학도 회원들을 신나게 해주었다.
우리가 노화도 어느 대합실에서 배를 기다리며 텔레비전을 보았을 때 박태환이가 수영 400미터에서 금메달을 땄으니까 2008년도였던가 보다. 신 선생이 보길도 초등학교 교감으로 간 덕분에 ‘삼학도회’는 또 보길도까지 몰려가서 세연정을 돌아보고 예송리 해수욕장에 몸을 담가 더위를 식혔다가 다도해로 지는 낙조를 구경하고 신 교감 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저녁식사에는 포구 식당에서 농어회를 먹었다. 보길도는 민어가 없었다. 하기야 어찌 보면 민어와 농어는 사촌 형제간이다.
다도해의 안좌도, 팔금도, 암태도, 자은도 네 개의 섬이 드디어 다리로 연결되었다. 목포 압해도 다리가 준공되었다. 목포에서 압해도로 건너가면 서쪽 끝 송공리에서 팔금도로 건너가는 뱃길이 트였다. 송공리에는 뾰족뾰족 몽골 텐트를 닮은 포장마차 횟집이 가지런히 스무 개나 생겼다. 모두 섬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횟집이었다. 나는 압해고등학교 근무하는 고 선생의 소개로 고등학교 운영위원장까지 지냈다는 김 사장을 사귀게 되었다. 횟집 영업을 떠나 친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2011년 여름에는 삼학도회가 송공리로 몰려가서 김 사장네 횟집에서 점심으로 민어를 먹었다. 바로 바닷가인지라 어부들이 살려온 민어가 수족관에서 돌아다녔다. 임자도보다 싱싱한 횟감이었다. 모두들 맛나다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깝게도 송공리 몽골텐트는 여러 사정으로 모조리 문을 닫고 말았다. 나는 이제 또 어느 식당에서 송공리보다 맛있는 민어를 맛볼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민어 점심을 마치자 배를 타고 네 섬으로 건너갔다. 안좌도의 김환기 화백 생가, 암태도의 소작 쟁의 기념탑도 볼 만하지만 특히 자은도의 분계 해수욕장 경치가 평화롭다. 아이들이 주렁주렁 딸린 가족의 피서지로도 ‘강추’할 만큼 조용해서 한갓지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인심 좋은 곳이다. 특히 바다에 떠있는 고래 머리를 닮은 바위섬이 일품이다.
나는 언젠가 철 지난 분계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자은초등학교 동창회를 마치고 뒤풀이 잔치를 하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에게 붙잡혀 갑오징어와 병치를 공짜로 걸게 얻어먹었다. 자은도에서는 임자도가 그리 멀지 않다. 임자도로 회유하는 민어의 길목이라 할 수 있다. 7월 8월은 민어의 계절이지만 4월 5월은 병치와 갑오징어의 계절이다. 임자도 부근 송도 어판장은 민어로도 유명하지만 병치로도 유명하다.
나는 2008년 2월에, 김 선생은 2010년 2월에 정년퇴임하였다. 삼학도 회원들은 멀리 서울에서까지 어김없이 달려와 무사한 퇴임을 축하해주었다. 고맙고도 고마워라. 세월은 무정하게 피아골 거센 물살처럼 씽씽 흐르고 삼학도에 살거나 임자도에 살거나 사람들은 속절없이 늙어간다.
이윽고 70에 다다르면 세상만사가 부질없음을, 헛되고 헛됨을, 아무리 ‘까르페 디엠’를 외치며 오늘을 잘 살자 했어도 지내놓고 보면 몽땅 쥐어짜봐야 한 움큼의 추억으로 뭉뚱그려지고 말았음을 깨닫게 되리라. 학벌도 문벌도 재물도 소용없더라. 나이도 지식도 재능도 소용없더라. 한번 영구차에 오르기만 하면 삼라만상이 빛을 잃더라. 살아 숨 쉬는 날까지 나는 살짝 데쳐서 돌돌 말린 민어 껍질을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기름소금에 찍어 소주를 마시며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를 읊으리라.
- 한 잔 먹세 그녀. 또 한 잔 먹세 그녀. 곶 꺾어 산 놓고 무진 무진 먹세 그녀. -
(끝)
첫댓글 허영만의 식객 한부분을 읽는듯 합니다..
인생의 절반이 먹는재미라고 하신 말씀...공감 또 공감합니다.
무화과의 말랑거리는 달콤한 맛도.거북손의 짤조름한맛.민어.전어의 고소한 맛도
고희에 바라보시는 세상만사는 한움큼의 추억으로 뭉뚱그리신다니..
아직 좀더 살아봐야 깨달을것같은 저희에게 살짝 윗입술에 웃음을 머금케하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새벽에 중간쯤 읽다 자고 출근길에 보고
퇴근길에 마무리 했네요.
민어회맛도 궁금하지만 껍질의
쫄깃한 맛이 더 궁금해지네요.
저녁에 야채넉넉히 넣은 전어회무침으로
민어회땡김을 대신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