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안씨묘역 왕릉급 후궁묘 동작릉
국립서울현충원 안에 왕릉급 후궁묘, '동작릉'이 있다.
조선 왕들을 모계로 보면 태조, 이성계의 첫 부인인 원신택주 안변 한씨의 소생인 정종 (이방과), 태종(이방원)이 왕이되고 , 이는 고종과 순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명종(13대, 이환李峘)이 후사 없이 사거하자 중종과 후궁 안씨 사이에서 난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岹)의 아들, 하성군(河城君) 이연(李昖)이 임금이 되었다, 선조(14대, 재위 : 41년)다. 이로서 선조, 이후 모계로 보아, 고종, 순종까지 14대에 이르도록,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후손들이 조선 왕위에 올랐다.
이에 신의왕후 한씨 사후와 창빈 안씨의 생애를 정리하고, 현재 지하철 동작역에서 내려 접근할 수 있는, 서울국립현충원 경내 창빈의 묘역을 보고자 한다.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 ~ 1391)는 조선개국 1년 전 원신택주(元信宅主, 종1품, 안변(安邊) 한씨) 지병으로 55세 때 숨졌다. 조선이 개국한 다음날(태조 1년 7월 17일) 한씨의 시호를 절비(節妃)라 추존하였다. 능호는 제릉으로,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있다. 능을 개풍에 정한 것은 조선 건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1398년(태조 재위 : 1392 ~ 1398) 정종이 즉위하자 11월 절비 한씨를 신의왕후라 올리고, 1408년(태종 8)에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 후에 承仁順聖神懿王后)로 시호를 높였다.또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된다.
조선 중종의 후궁이며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의 신도비(神道碑)와 묘소이다. 창빈 안씨는 중종 2년(1507) 9살의 나이에 궁녀로 들어갔으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하였다. 20세에 중종의 총애를 입게 되어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과 덕흥대원군, 정신옹주를 두었다. 묘는 처음에 양주 장흥 땅에 있었으나 다음해에 현재의 자리인 동작동 국립묘지 안으로 옮겨졌다. 묘 왼쪽으로는 숙종 9년(1683)에 세운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이 썼으며 머리전서(頭篆)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창빈 안씨(昌嬪 安氏1499∼1549)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년생)의 후궁, 선조(1552년생)의 할머니
아버지 안탄대(安坦大) 창빈안씨의 세계(世系)는 안산(安山)에서 나왔는데, 아버지 안탄대(安坦大)는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적순부위(迪順副尉, 정7품 )가 되고 나중에 우의정(정1품)에 추존 증직되었고, 어머니 황씨(黃氏)도 정경부인에 추존 증직되었다.
연산군 5년(1499) 7월 9일 출생으로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 궁녀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각별한 후의로 중종 13년(1518) 왕의 총애를 받았고, 22세에 상궁(尙宮), 31세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마침내 42세에 숙용(淑容, 혹은 昭容, 종3품)에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이고, 둘째는 나중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된 이초(李岹) 이며,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특명으로 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명종 4년(1549)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1567년 덕흥군(후에 선조가 덕흥대원군으로 추존)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제1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선조 10년(1577)에 창빈(昌嬪)으로 추존하였고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제향되었다. 후궁의 묘는 '릉(陵)'이라 호칭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묘소는 예외로 '동작릉'이라고 하였다. 선조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왕위계승 (14명)을 창빈안씨 후손들이 독점한다. 창빈의 손자 하성군, 이연(선조)이 임금이 된 것은, 이 昌嬪 安氏의 묘소인, 이 동작릉이 공작포란형 (공작이 알을 품은 모양)의 명당이라 그리 되었다고들 한다.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숙종 9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묘소의 서쪽 비탈10여 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했다. 대좌(臺座)·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구성되는데, 정사각형의 2단 대좌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비신도 사각기둥 모양이며, 개석 또한 4각 지붕 모양으로 꼭대기에 연꽃봉우리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묘소는 원래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으나,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동작리(銅雀里, 국립서울현충원)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렸다고 한다. 묘소에는 담장이 둘려져 있고 묘 앞에는 묘갈ㆍ석등ㆍ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다.
호석(둘레석), 묘표, 상석, 고석, 향로석 모두 옛것 그대로이다. 향로석이 네모진 것이 특이하다.
국립서울현충원 경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는 원래 통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갈궁사(葛弓寺)가 시초로 이후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원찰로 지정되어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을 고쳤고, 다시 1983년에는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바꾸게 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 14대 왕 선조의 할머니 창빈 안씨는 중종의 아홉 부인 중 여섯번 째 후궁이다. 그의 손자인 선조가 왕에 오름으로써 조선의 왕 가운데 적손이 아닌 서손(庶孫)이 대통을 이은 첫 번째 왕이 된다. 이 산줄기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등 세분 대통령의 내외가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묘역은 같은 서울현충원에 있으나 산줄기는 다르다.) 이 터는 청룡보다 백호의 세가 더 강한 것으로 풍수가들은 본다. 지자(支子, 장자가 아닌 아들)출신인 대통령 세분 그리고 영부인 세분 모두가 후실이란 점도 이 터와 관련해서 눈에 드는 대목이다.
산의 봉우리와 능선길이 수림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군봉에서 내려다보이는 확트인 한강 물줄기의 유유한 흐름은 "이곳이 명당이구나!" 하고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지리적 위치와 산세가 훌륭하다. 공작봉을 중심으로 좌우의 산이 군인들이 모여 아침 조회를 하는 현충원의 지형이다. 또 지하의 여러 갈래 물줄기가 교류하여 생기가 넘치는 명당자리로 꼽히고 있다.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다정하게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모양이다. 한강물은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들어 마치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러 내려가고 있는 명당이라고 한다.
중종의 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