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려타곤(懶驢 坤) 35-2
청나라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칼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던 한 쌍의 남녀 중, 여자가 갑자기 몸을 멈추고 멍하니 한쪽을 바라보았다. 여진족의 무리 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한 남자 역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둘러 쌓여서 말 위에 앉아서 싸움터를 바라만 보고 있던 남자가 손을 위로 들어올리면서 싸움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한쌍의 남녀는 등을 맞대고 주위를 포위한 청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말이 병사들을 헤치고 두 사람의 앞쪽으로 나왔고, 그 위에 앉아 있는 남자가 방화련을 바라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당신이구려."
남자의 입에서 낮고 잔잔한 그러면서도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남자를 보는 순간 방화련 역시 온 몸이 떨려왔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 위에 앉아 있는 남자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요?"
"제 남편이에요."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방화련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남자, 청의 황제 순치제는 방화련의 대답을 듣고 나서 탄식을 토해냈다. 조금만 더 일찍 이곳에 올 수 있었다면 꿈을 현실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고개를 흔들면서 머리 속에 떠오른 헛된 생각을 지우고, 한자루의 칼을 들고 수백의 병사들이 포위한 상태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여자의 남편을 바라보며 그는 한 마디를 흘렸다.
"그대는 대장부구려."
지위가 높아 보이는 여진족의 남자가 칭찬하는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칠호의 마음속에는 말 위에 앉아 있는 여진족의 남자를 당장 죽여버리고 싶은 살심(殺心)만이 들끓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가 말 위의 여진족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칠호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아는 눈치였고, 맹렬한 질투와 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어서 이 혼란한 개봉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길을 열어주어라!"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을 향해 말 위의 남자가 소리치기가 무섭게, 빈틈없이 둘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폐하! 저자의 손에 수십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대로 저들을 보내주자는 말씀입니까?!"
여진의 병사들 중에서 누군가가 불평이 가득한 어조로 그렇게 소리쳤고, 칠호는 성난 얼굴로 소리친 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손에 들린 검에서 붉은 빛의 기둥이 석자 정도 뿜어져 나왔다.
"검강(劍綱)!"
여진족의 장수들 중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놀라 소리쳤다. 형체가 없는 기(氣)가 유형화되면 만들어진다는 강기(綱氣)는 오직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여진족의 병사들과 장수들 사이로 빠르게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대들의 행운에 감사하라! 아내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대들은 모조리 내 칼 아래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검강(劍綱)을 일으키고 외치는 칠호의 말에 칠호의 말에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정을 봐준 것은 여진인들이 아니라 칠호 백철군과 방화련이었던 것이다. 도망치기 시작한 여진족의 군대들의 등을 바라보며 칠호는 계속 소리쳤다.
"그대들이 내 아내를 넘보는 일이 없었다면, 나 또한 그대들과 싸울 일이 없었다!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 또한 그대들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칠호의 외침이 터지는 동안에 여진족의 군대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개봉의 서쪽에 나 있는 관도 위에 서 있는 것은 그들 부부뿐이었다. 검강을 거두고 칠호는 아내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왜 말린 것이오? 당신과 내가 힘을 합한다면 비록 수백의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죽일 수도 있었소."
남편의 말에 방화련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개인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해도 수천 수만의 병사들과 싸워 이길 수는 없어요. 여기서 저들을 모조리 죽인다면 우리는 평생 쫓겨다니면서 숨어살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무엇이오?"
방화련은 침묵한 채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의 그 남자---."
아내의 말에 칠호 역시 아까부터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된 거요? 둘이 아는 눈치던데---, 당신이 어떻게 그 여진인을 알고 있는 거요?"
방화련은 대답하기가 망설여졌지만 남편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너무나 황당했지만 남편은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을 계속 보내고---.
"꿈속에서 그 남자가 제 남편이었어요."
아내의 황당한 대답에 칠호는 한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황당한 얼굴로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던 칠호는 간신히 한 마디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갑시다. 모두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요."
방화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구는 두 아내와 한 명의 서생과 함께 피난 행렬에 끼어 광동성에 있다는 광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명(明)이라 불리던 한족(漢族)의 땅을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있는 청의 병사들을 피해 움직이는 동안 가족들은 모두 제각각 흩어졌지만 소구는 걱정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곁에는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무공의 고수인 어머니가 있었고, 게다가 사형 양평이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형 방종구는 무공이 없지만 형수인 양려군 또한 병사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이 고강했고, 아버지와 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별 일 없을 것이라는 것이 방소구의 판단이었다. 큰 누나인 방화련의 곁에도 무림에 천하제일인이라 소문난 매형 백철군이 있으니 무사할 것이다. 수련 누나도 가족들의 대열에 합류해서 같이 길을 떠났으니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구였다.
하남에서 호북으로, 호북에서 호남으로 그리고 다시 호남에서 광주가 있는 광동으로 난(亂)을 피해 쉬지 않고 남으로 내려온 소구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가족들이 만나기로 약속한 불산이라 불리는 땅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불산(佛山)에 있다는 백초당에 도착해서 편하게 쉴 수 있으니 힘내라구."
지친 표정이 역력한 두 아내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소구는 등에 상자를 메고 있는 신기서생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먼길을 온 탓에 많이 지친 얼굴이었다.
"옥 형, 그 상자는 이제 내가 들도록 하는 게--"
정옥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아직은 안심 할 수 없으니--, 자네의 두 손은 언제나 자유로운 상태로 있어야 해.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자네 뿐이야. 자네는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자네의 두 아내와 나 그리고 자네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힘은 들더라도 이것은 계속 내가 들고 가는 것이 나아."
눈에 보인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고, 곳곳에서 도적과 강도로 돌변한 사람들과 숱하게 부딪치게 된 그들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 나라를 침략한 여진족의 병사들과 싸우는 일은 거의 없었고, 도적과 강도로 돌변한 같은 한족의 사람들과 식량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이 더 많았다.
정옥의 일리 있는 말에 소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소구의 손에 죽은 자들은 꽤나 많은 편이었다. 아내와 식량 그리고 일행의 목숨을 노리고 덤벼드는 자들 중 소구의 손속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 하루는 더 가야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싸우는 일은 소구의 몫이었고, 신기서생이라 불리는 정옥의 판단은 언제나 정확했다.
개봉에 있는 백초당의 건물 안으로 담장을 넘어 뛰어들어온 방수련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녀 혼자뿐이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청나라의 병사들과 만나 가족과 떨어지게 된 그녀가 쫓겨다니다 이른 곳이 여기였다.
"이제 난 어떡해야 하지?"
그녀는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전란의 시기였고 그녀처럼 젊고 예쁜 여자가 혼자 있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도덕과 양심은 사라지고 혼란을 틈타 살인과 약탈과 강간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이 몸에 쌓은 무공이 있어서 여기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모두가 떠난 집에 그녀를 지키고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백초당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다른 한 장소에서도 그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젠장, 나만 남겨두고 모두 떠나다니---, 백초당도 모두 떠났을까?"
의형제 중 둘째형인 칠호가 백초당의 사위가 되면서 개방의 소문주인 왕질악은 백초당에 자주 들리게 되었고 방씨 일가와 깊은 친분을 맺게 된 상태였다.
'꼬르륵'
이미 몇 끼를 굶게 된 왕질악의 배에서는 배고프다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표국에서 밥이 나올 리 만무했다. 전란(戰亂)이 벌어지기 전의 개봉이라면 북풍표국과 백초당이 있는 한 식사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던 왕질악이었다. 배가 고프면 아무 쪽이나 찾아가면 언제나 푸짐한 식탁이 그를 반겨주었기에 왕질악은 전혀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표국에는 의형제들이 있었고, 백초당에는 비슷한 시기에 무림에 알려진 금룡 양평이 있었다.
"양 형이 아직 남아 있을까?"
양평을 생각하면서 왕질악은 표국을 벗어나 백초당으로 몸을 날렸다. 백초당의 식구들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적어도 굶주림에서 벗어나리라 믿으면서--.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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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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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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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