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려타곤(懶驢 坤) 35-4
왕질악과 방수련이 불산에 있는 백초당에 도착한 것은 소구가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었고, 상거지 꼴을 하고 도착한 방수련은 몸을 씻을 새도 없이 생명이 경각에 달한 아버지가 있는 침실로 달려가야 했다.
"내가 살면서---난 하고 싶은 일은 거의 다 할 수 있었지만--, 아직 내가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면 널 시집 보내는 일이다."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힘없는 두 손을 잡고 흐느껴 우는 방수련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방종대는 울고 있는 딸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에 서 있는 왕질악을 바라보며 물었다.
"개봉에서 이곳까지 질악이와 같이 온 것이냐?"
"네."
방수련은 울면서 짧게 대답하고 죽어 가는 방종대는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미혼의 남녀가 단 둘이서 그 먼 거리를 함께 왔는데 아무 일도 없을 리는 없을 테지. 거지에게 시집 보낸다고 했더니 진짜 거지에게 시집가게 되었구나.'
"개봉에서 둘이 함께 움직였다면---, 네가 선택한 신랑감이냐?"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방수련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방종대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계속 이어 말했다. 지금의 상태에서 딸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죽기 전에 인연을 맺어주지 않는다면 비구니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낼 수 있겠구나."
방종대는 옆에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왕질악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손을 이리 다오."
왕질악과 방수련의 손을 포개 놓고 방종대는 입을 열었다.
"같이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서로에게서 모자라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계속 보게 될게다. 그 때마다 화를 내고 다툼을 벌인다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뿐이지. 부디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감싸주고 도우면서 행복을 만들도록 노력하거라. 그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이고 부부가 부부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알겠지?"
방종대의 말에 방수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꼼짝없이 방수련의 남편이 되어버린 왕질악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종대는 조용히 머리맡을 지키고 있는 아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자식들에게 해줄 말은 이제 다한 것이다.
"이제 너희들은 모두 물러나거라. 둘만 있고 싶으니."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싶은 자식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밖으로 나오고 머리맡에 서 있던 장봉화는 남편이 누워 있는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아서, 힘없는 남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말없이 남편을 바라보았다.
"너무 슬퍼하지 말구려. 지금 난 죽어도 결코 죽는 것이 아니오. 세상살이가 한바탕의 꿈과 같은 것이라---, 난 이제 하나의 꿈을 끝내고 다시 새로운 꿈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이오. 그 동안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소. 이 다음의 꿈에서도 당신과 다시 만날 수---."
아내를 향해 말을 하던 방종대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깊이 잠들었고, 장봉화는 끝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남편의 손을 붙잡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러내릴 뿐이었다.
백초당에서 방종대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전쟁은 끝이 나고 세상은 여진족이 지배하는 땅이 되었다. 그로서 혼란은 가라앉고 모두가 다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된 상태였지만, 백초당에서 방종대가 사라진 빈자리는 무척이나 큰 것이었다.
"어머니, 꼭 가셔야겠어요?"
"이곳엔 너희들의 아버지와의 추억이 너무 많아. 난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이제 돌아가겠다."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지만 장봉화는 남편이 없는 지금 중원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북쪽으로 몸을 날리는 장봉화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불산의 백초당에서 가장 먼저 떠난 것이 어머니였고, 그 다음에 떠난 것은 매형인 칠호 백철군과 방화련이었다.
"이제 세상도 안정되었고, 개봉으로 돌아가서 다시 표국을 열어야겠다. 언제까지 내가 백초당에 얹혀 살수는 없는 노릇이니--."
첫 번째 매형인 칠호가 그 말을 남기고 떠난 지 며칠 안되어, 수련 누나가 매형이 되어버린 개방의 왕질악과 함께 떠나게 되었다.
"개봉으로 가서 방주님에게 말을 하고 개방을 탈퇴해야겠다. 나도 아내가 생겼는데 계속 거지로 지낼 수는 없게 되었으니--."
미래의 개방을 이끌 후개(後 )란 신분을 지니고 있는 개방의 소방주 왕질악이 개방을 탈퇴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심각한 얼굴로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두 사람이 떠나면서, 불산의 백초당 건물에 남은 것은 백초당의 장남인 방종구 부부와 막내인 방소구 부부뿐이었다.
"소구야, 이곳은 원래 아버지가 너에게 물려주려고 마련해 놓은 집이다. 내가 물려받은 재산과 가업이 있는 곳은 개봉이니 나 또한 이제 떠나야 할 것 같구나."
형 방종구마저 그 말을 남기고 떠나려 하는 순간, 소구는 반드시 형을 붙잡을 필요를 느꼈다.
"형, 나보고 굶어죽으란 소리야?"
소구의 뚱딴지같은 말에 그대로 불산을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는 방종구는 어이없는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냐?"
"집만 있으면 내가 어떻게 두 마누라와 먹고살아?"
"그게 무슨 소리냐? 이곳에 네 소유로 된 점포가 몇인데---?"
"무슨 점포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있으면 뭐 해? 내가 장사를 해 본 적이 있어야지, 형이 이대로 떠나면 돈을 벌 사람이 없어지잖아?!"
지금까지 무공만 배우고 익히는 삶을 살아온 소구였다. 장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소구의 말에 방종구는 시선을 돌려 이삿짐 옆에 붙어 서 있는 신기서생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이, 정옥!"
마당에서 얘기하고 있는 형제들의 대화를 멀리서나마 듣게 된 정옥은 우거지상을 하고 옆으로 다가왔다.
"내 동생이 하는 말 들었지?"
정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널 백초당의 광동성 총 책임자로 임명할 테니까, 내 동생의 점포도 네가 같이 관리해."
"명령입니까?"
"싫어?!"
약간 성난 표정으로 방종구가 그렇게 물어오자, 정옥은 얼굴을 활짝 피고 두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방 대형이 명하신 일인데 해야지요, 해야 할구 말고요."
그런 정옥의 모습을 바라보다 소구에게로 시선을 돌린 방종구가 말했다.
"됐지?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모두 정옥에게 말해. 다른 건 몰라도 돈을 관리하는 일은 정옥이 엄청 잘해.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백초당은 엄청 큰 기업이야.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이 거대한 기업을 관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도 아버지가 만든 백초당이 망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겠지?"
형 방종구의 장황한 말에 소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그럼 난 간다."
그 말을 하고 손을 흔들면서 형이 떠난 뒤에 불산의 백초당에 남은 것은 소구와 소구의 두 아내인 취하와 취앵 그리고 신기서생 정옥이었다.
멍한 얼굴로 형이 사라진 대문에서 시선을 돌린 소구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모두 가 버렸네."
"끄응--, 이봐. 소구야. 먼저 네 소유의 점포가 무엇 무엇이 있는 지부터 확인해 보자고. 개봉에 있는 백초당에 있으면 천하를 모두 살펴 볼 수 있는데--, 광동 한 지역만을 담당하게 되다니---."
신기서생은 앓는 소리를 내뱉으면서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늘 북적거리던 집안은 너무나 고요해지고 이제 아내들과만 있게 된 소구는 취하와 취앵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린 뭐할까?"
"지금은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쉬자고요. 그 동안 잠시도 쉬지 못했다고요."
소구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취하였고 취앵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당신은 벌써 한달 동안 잠도 거의 못 잤잖아요? 일단 들어가서 눈부터 붙이세요." 그녀들의 말처럼 불산에 도착하고 나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식과 떠나는 형제들의 일로 계속 눈을 붙이지 못한 소구였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소구는 아내들을 향해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군. 좀 졸려, 피곤하기도 하고--."
"당신도 사람인데 이제 좀 쉬어 야죠."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이제 이곳에서는 우리끼리 조용히 살 수 있을 거예요."
두 아내의 부축을 받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소구는 흘낏 흐릿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 꿈에서 난 잠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이 벌어졌지. 졸려도 너무 많이 자면 안돼.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어떤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침상에 몸을 누이게 된 소구는 정말로 깊이 잠들어 버렸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기 시작했다.
계절은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구는 한여름이 되었지만, 소구는 그날도 변함없이 잠자는 시간과 식사하는 시간을 빼고는 언제나 검은 쇠몽둥이를 들고 쓰다듬는 것이 일이었다.
후원의 연못가에 있는 정자에 앉아서 하루종일 검은 쇠몽둥이를 쓰다듬기만 하는 소구를 멀리서 지켜보는 한 남자와 두 여자는 한숨을 푹 푹 흘렸다.
"미친 거 아닐까?"
"다른 일을 할 때 보면 전혀 미친 것 같이 보이지는 않던데?"
"언제까지 저 짓만 하려는 걸까?"
"그렇게 좋아하던 잠도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자는 것을 못 보았다고---."
"식사도 하루에 한끼 이상 먹지 않아."
"정말 미쳤나? 왜 저러는 거야?"
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점점 소구를 미치광이로 몰고 가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구는 열심히 극악봉을 검으로 만드는 작업에 계속 매달렸다.
'조금씩 깎여 나가고 있어. 이게 검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쯤이면 나의 무공도 혼천경에 이르지 않을까?'
소구는 조금은 모습이 변한 극악봉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하다 흘낏 자신을 두고 쑥덕거리는 세 사람을 흘낏 쳐다보았다.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지나친 잠과 식탐이라고--. 식사는 허기만 면할 정도면 되고, 잠도 하루 두 시간이면 나에겐 충분한 수면시간이야. 십년 남았어, 형제들이 혼천경이란 마물 때문에 죽어나갈 시간이---. 그 전에 이걸 어떻게든 검으로 만들어서 거울을 깨야 하니까--, 그 때까지는 난 쉴 시간 없다고!'
쑥덕거리고 있는 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마음속으로 그런 고함을 터트리며, 소구는 다시 극악봉을 검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매달렸다.
"사람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 진 거라는 말이 있던데---."
"이봐요?! 말 같은 소리를 해요! 말 같은 소리를!"
"정 서생,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하는 거예요?! 우리 남편이 그래서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거예요?!"
눈에 쌍심지를 키고 손톱을 들이대며 소리치는 두 여자를 피해 정옥은 밖으로 도망치면서 소리쳤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그렇데?!
"약한 서생이라고 봐주니까, 이젠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다하네?!"
"거기 서요!"
두 여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신기서생을 쫓아서 달려가고, 소구는 여전히 극악봉을 검으로 만드는 일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날을 보내고 있는 소구의 집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한 여름의 더위가 한풀꺾인 초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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