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갑자기 물으니까 당황스럽다.”
“그럴 거야. 하지만 내 말을 하기 전에 너의 생각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실은 이 말을 몇 번이나 너에게 할러다 미루곤 했어.
근 15년이 넘도록 너의 생각을 몰라서, 그리고 그 말로 너를 당황하게 하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까 봐.
하지만 지금은 해야겠어. 너를 당황하게 하고 내가 비참해지더라도. ”
보영은 마른 침을 삼키며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이 말을 들은 영섭은 보영이 태만에게 보인 영섭의 태도에 불편해 하는 줄알고
“좋아! 15년이 넘도록 네가 참아왔다면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인 것 같은데, 지금 무슨 말을 네가 하려는지 몰라도 네가 그렇게 물으니 솔직히 말하지, 말로는 우리 사이가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공언하고 또 그렇게 행동해 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너를 이성으로 어쩜 아니 연인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야. 특히 희수가 현영이하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고 절망했던 내가 이렇게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너를 이성으로 대하고픈 감정이 더 많아진 것이 사실이고. 지난번 태만씨와 말할 때 너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도 사실이야. 그러고 나서 후회했어. 내가 너에게 창피한 것은 둘째치고 너희의 좋은 관계를 망쳐놓은 것이 안닌가 해서. 그러니까 이제는 나로 해서 네가 태만씨한테 오해를 받게 됐다면 우리 같이 만나서 풀도록 하자. 이제 정말 너를 초등학교 동창으로 대하도록 노력할 테니.”라고 영섭이 말했다.
“너를 그것이 노력으로 된다고 생각하니?”
보영의 이 말에는 원망이 배어 있다.
“어렵겠지.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아니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하도록 할 거야.”
“됐어! 그리고 태만씨와 나의 관계는 먼저 말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몰라, 태만씨는 나를 좋아하는지. 그러나 나는 아니야. 그리고 이제부터 내 말을 들어줘.”
이렇게 말을 꺼내고,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한 보영이 다음 말을 잇는다.
“너를 만나서 철이 들고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도 나는 너를 초등학교 동창이 아닌 연인으로 생각해왔어. 말로는 너를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가볍게 떨려 나오는 보영의 이 말을 들으며 다소 놀란 영섭은 그동안의 보영이 행동에서 때로 친구 이상의 표현이 있었던 것이 그런 까닭이었던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감정과 또 한편으로는 당황스런 감정을 누르며 보영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동안 나 혼자 가슴에 담고 있으면서 여러 번 너에게 말하려다 어떤 때는 친구로 대하는 너에게 부담이 될까 봐 어떤 때는 네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가 있어 망서려져 못했던 이 이야기를 지금은 네가 내게 초등학교 동창이 아닌 이성으로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겠어. 그래야 답답하게 쌓여 있는 내 마음의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아.”
이런 말을 들으며 영섭은 보영이 얼마나 심각한 말을 하려고 미리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으나 눈을 들어 상기된 보영을 보며 계속하라고 머리를 끄덕였다.
“너는 너희 아버지한테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못 들었다고 했지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아버지한테서 네 이야기를 들었어. 우리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업을 접으시고 할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맡아 하시려고 적성으로 내려오신 지 1년 만이야.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를 왔으니까.”
이 말에 영섭은 2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 온 귀엽고 또랑또랑한 여자애 이였던 보영이 생각났다.
“3학년이었던 어느 날 아버지가 네 이야기를 하시며 사이좋게 지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셔서 그렇지 않아도 키도 크고 잘생긴 너에게 관심이 있던 나는 금방 너를 좋아해서 아버지의 말씀처럼 친하게 지내려고 했고 그렇게 지냈어.
너도 그것은 알거야, 초등학교 때를 생각하면. 5학년 초에 혜숙이가 전학을 왔어, 혜숙이와 나는 생각보다 급속도로 가까워졌어. 나중에 알고 보니 혜숙이가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야. 반에서 내가 제일 너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알고 너와 친해지려고, 그리곤 어느 날 나에게 너를 무척 좋아한다고 자기와 네가 친하게 지내게 도와 달라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자존심 때문에 나도 너를 좋아한다는 말을 못했지. 속으로만 너 보다는 내가 더 영섭이를 좋아해 하면서. 여자애들의 조금만 자존심과 시새움 때문이었을 거야. 아니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혼자 간직하고 너 아닌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는지 모르지.
그리곤 내가 중간에 들어 너와 혜숙이와 나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지. 지금 생각하면 어리고 어리석은 내가 그런 건, 어쩜 그러면서 내가 너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어. 그리고 실제로 너와 만나는 시간은 많아졌지 혜숙이로 해서. 혜숙이는 나와 같이 너를 만나러 가거나 너를 만나고 오면서 내 앞에서 공공연히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하고 내가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했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남이 탐내면 그것이 점점 더 귀해지고 소중해지는 것처럼 혜숙이가 그러면 그럴수록 네가 점점 더 좋아지는 나는 속으로 속앓이만 했고 혜숙이가 너를 좋아한다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울고 싶도록 슬퍼하며 그러면서도 한 가닥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어. 혜숙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이사를 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그 후에는 너와 나 사이에 방해하는 사람이 없이 만날 수 있고 그래서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또 그래서 혜숙이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는지 몰라.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혜숙은 나와 같이 파주 여자 중학교에 입학하더군. 같은 학교에 입학한 우리는 낮 선 학생들 가운데서 자연히 초등학교 때와 같이 단짝이 되었지. 중학교에서도 우리의 화제 중 제일 많은 것이 너에 관한 것이었어. 주로 혜숙이가 꺼냈지만, 혜숙이는 너에 대해 거의 모두를 알고 있었어. 나중에 알고 보니 현영이를 통해 알아낸 거야. 중3 때 응개폭포에서 너를 만났을 때도 처음에는 너희들이 주선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혜숙이가 꾸민 거였어. 그날 이후 혜숙이는 내 앞에서 더욱 너에 대한 감정표현을 심하게 했어.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사귀는 사이로 알고 있었어. 혜숙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으니까
그때도 혜숙이네가 이사 간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도 그런 소문이 뜬소문이 되고 만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어떻게 될지 몰라 현영이한테서 사귀자는 제의가 왔을 때 나는 거절하지 못 했어. 네가 혜숙이와 사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현영을 만났지.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그런 심정으로. 그리고 현영을 만나면 혜숙이 모르는 너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듣는 것에 나는 위로를 삼았지.
그런데 혜숙이네가 정말 이사를 간다는 거야. 나는 내 행동이 경솔했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나 몰라. 나와 현영이가 사귀는 것을 알고 있는 너에게는 다시는 다가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리곤 슬퍼서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이사 가기 전 혜숙이 불러 찾아갔던 나는 황당한 일을 당했어.
헤숙이 그동안 비밀을 밝힌다며 자기도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어쩌면 자기보다 내가 더 너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래서 내 앞에서는 더욱 자기가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고 또 현영에게 나하고 사귀라고 부탁하고 도와주었다는 거야. 내가 너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실은 처음 현영을 만난 것이 혜숙이 때문이었어. 혜숙이와 같이 나간 빵집에서 현영이 나와 있었고 혜숙이 둘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소리와 사귀어 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고 그 후에 현영과 만남이 계속되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이사 가게 되어 앞으로는 우리를 만나기 어려워지게 되고 또 그동안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기도 괴로웠다며 이제는 이사 가게 된 자기는 물러나는 것이 아니 물러날 수뿐이 없으니 나보고 잘해보라는 거야. 황당하고 화가 나더군. 혜숙이 우리를 갖고 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하던지아니면 처음부터 시작을 말던지 하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졌어. 그랬더니 혜숙의 대답이 더 황당했어. 자기는 자기의 감정에 충실했다는 거야. 좋으니까 너와 사귀고 싶었고. 누구와 공유하기도 양보하기도 싫고 뺏기기는 더욱 싫어서 자기감정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철저하던 그 감정이 지금은 왜 변했냐고 물었더니.
이사를 하여 멀리 헤어져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게 되는 것 아니냐며 자기가 멀리 가면 내가 너와 더 가까워질 것이고 그러면 너를 두고 하는 나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으니까 일찍이 물러나는 것이라더군. 그 하는 말이 황당하고 화가 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나에게 혜숙은 두툼한 봉투를 내 놓으며 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어. 마지막 부탁이라며.
그리고는 인천에서 자리가 잡히는 데로 한 번 찾아와서 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자기감정은 일시적이었고 참으로 너를 좋아한 것은 나라고 하고 자기 때문에 내가 현영이와 사귀게 됐다고 말하고 네가 나를 이해하게 해주겠다고까지 하며 그때까지 우리에 이야기를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어.
혜숙의 부탁이 아니라도 나는 이 이야기를 너에게 할 수는 없었지. 그리곤 순진하게 정말로 혜숙이 찾아와서 그 말을 해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어.
너와 사랑 때문에 서로 알게 모르게 알력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만큼 혜숙이를 친구로 좋아했어, 사오 년을 붙어 다녔으니까 참 나는 헛똑똑이 이였지,
그것이 또 나를 이용하려는 혜숙의 또 다른 술수인지도 모르고 내 손으로 그 편지를 너에게 전했으니.
그렇게 되고 난 후부터는 네가 아는 바와 같이 계속 나에게 다가오는 현영이 때문에 나는 너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지. 그리곤 현영과 보람이 일로 기회가 생겨 너에게 내 사랑을 고백하려고 할 때 네가 희수라는 애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곤 나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내 사랑을 너에게 전해보지도 못하고 끝나게 되었으니까. 너는 그때 몰랐지만, 현영이는 눈치채고 나에게 와서 너에게 고백을 하라고 했지만 이미 나에게서 떠난 너의 마음은 붙잡지 못할 것 갈아 그렇게 하지 못했어. 너와 나의 관계는 이렇게 꼬여만 갔고 이제까지 나는 네 옆에서 내 감정을 숨긴 채 속앓이만 했어.
항상 친구로만 나를 대하는 너를 원망하고 다른 사람에게 간 네 마음으로 너를 야속하게 생각하면서도.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접을 수 없어. 그래서 네가 툭하면 말하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라는 이름을 내세워 네 주위를 맴돌며 떠나지 못하고 있어. 내 마음 속에 타고 있는 꺼지지 않는 너를 향한 사모의 불꽃 때문에
너는 아마 강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우리 아빠에게서 너에 대한 말을 듣고 네게 호감을 가졌다면 내가 왜 현영와 사귀었는지 의문이었을 거야. 그것도 한참 사춘기에, 이제 그 이유를 알았을 거야.”
울음을 삼키며 하는 보영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한참을 지나도록 영섭은 아무 말을 못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에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사실이었고 가끔 때때로 자기가 감지하고 느꼈던 자기에 대한 보영의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고 보영이 보여 주었던 친구 이상의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특히 군대에 입대 전에 등산에서와 논산에서의 일은 그때는 몰랐지만, 확실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동안 가졌을 보영의 괴로움을 특히 영섭이 희수를 좋아한다는 말을 현영으로부터 들었을 때 보영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자기가 희수와 현영의 관계를 들었을 때의 절망감 이상을 보영이 느꼈으리라.
그런 것들을 보영의 말을 들은 이제야 알게 된 영섭은 조금은 바보 같은 생각이 들고 쑥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금방 말이 안 나왔다.
지금 영섭의 마음이 어느 만큼은 자기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확신에 이 말을 한 보영도 그동안 가슴에 맺혀 있던 말을 모두 하여 속이 후련한 것 같으면서도 영섭이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할지 의문이 들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영섭이 그런 감정으로는 너를 볼 수 없으니 이제는 만나지 말자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도 생겨 이 말을 하지 말 것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이젠 업지러진 물. 모든 것을 영섭에게 맡길 뿐.
침묵이 답답하고 긴말을 하느라 목이 마른 보영이 앞에 놓인 술잔을 잡으려고 손을 뻗을 때
영섭이 내미는 보영의 손을 잡았다.
보영은 내심 놀라며 영섭을 바라보았다.
첫댓글 즐~~~~감!
잘보고 갑니다..
말못하고 가슴속에 담아놓은 사랑이지만 멋지다
감사합니다
요즘 애들도 이렇게 답답하게 연애 하나??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무혈님!
이초롱님!
처음으로서님!
다락방님!
히망님!
구리천리향임님!
지키미님!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들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