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행 야간 침대열차는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영화에서나 본 럭셔리한 침대열차를 상상했더라면 실망할 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인도에서 경험했던 ‘델리 ~바라나시’ 구간의 3단 침대열차에 비해 독립된 캐빈의 문이 있을 뿐 아니라 침대도 2단이어서 하드웨어 측면에서 훨씬 나은 감이 있었고 담당 웨이터의 서빙으로 저녁과 아침 식사도 정기적으로 제공되는 등, (특히 우리 담당 웨이터는 먹통이 되어버린 우리 캐빈 충전시스템을 대체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장로님과 나의 카메라 충전을 해결해 주는 친절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기본적인 서비스는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곡각진 코스를 주행하며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야간 열차의 소음은 그날따라 부쩍 심해진 나그네의 불면증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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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고난도 묘기에 버금가는 사다리타기를 하며 2층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덜컹거리는 복도를 지나 겨우 문을 열고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줌줄기가 흔들리는지 화장실이 흔들리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느덧 차창 밖으로 먼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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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Giza) 역의 아침은 숱한 여행객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역전에 대기한 버스에 올라 피라밋으로 향하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은 다시 거대도시 카이로의 서부 쪽 분위기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약 20분 쯤 달리니 드디어 창 밖으로 피라밋이 모습을 드러낸다.
카이로 남남서쪽 약 23Km, 나일강 서안의 이 곳 기자에는 모두 3개의 피라밋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2차대전 후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역사적인 카이로 회담의 접견장을 지나 언덕을 휘돌아 오르니 거대한 돌덩이의 위용이 눈 앞을 가로막는다. 3 피라밋 중 가장 큰 쿠푸 왕의 大피라밋이다. 고왕국 4왕조(BC 2613경~2494경)의 2번째 왕으로 알려진 쿠푸 왕(그리스어로 케오프스)의 피라밋은 각 밑변 길이 238m, 원래 높이 146m의 웅장함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번개로 꼭대기 윗벽이 약 7m 가량 떨어져 나간 모습이 육안으로 확인된다. 인류 최대의 단일 건축물인 이 피라밋에는 1개당 평균 2.5t 무게의 돌 230만 개가 사용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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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위치한 中피라밋은 4왕조 4번째의 카우프라 왕(그리스어로 케프렌)의 것으로, 각 밑변 길이는 216m, 원래 높이는 143m에 이른다. 현존하는 86기의 이집트 피라밋 중, 가장 아름다운 기하학적 구도를 자랑하는 고깔콘 모양의 이 피라밋은 바로 동쪽의 저지대에 위치한 이집트 최초 최대의 스핑크스(길이 약 70m, 높이 약 20m, 폭 약 4m)와 앙상블을 이루며 가히 기자 피라밋 단지의 하이라이트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코가 떨어져 나갔지만(망실된 코는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근엄한 표정의 카리스마가 카우프라 왕의 생전 모습과 닮았대서 화제가 되고 있는 스핑크스의 바로 뒤편에는 계곡 신전이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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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사후, 고왕국 당시의 수도였던 멤피스로부터 나일강을 타고 이곳으로 후송된 왕의 시신이 미이라로 만들어지던 계곡 신전에는 死者를 목욕시키고 장기를 적출하던 해부대와 제단 등이 부속되어 있었다.
남쪽 끝에 위치한 小피라밋은 4왕조 6번째 왕 멘카우레(그리스어로 미케리노스)의 것으로, 밑변 길이 109m, 원래 높이 66m인데 그 옆으로 다시 형체가 불분명한 3개의 작은 피라밋을 거느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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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권을 판매하는 관리사무소 옆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 뒤, 우리는 먼저 주차장 앞에 버티고 선 대피라밋의 왼쪽을 돌아 내부가 견본공개되는 왕비의 분묘 속까지 둘러보았다. 찌는 듯한 폭염을 뚫고 다시 대피라밋의 정면으로 돌아나와 내부 입구가 있는 13번째 계단까지 올라가 맞은편을 바라보니 일대에 주차된 버스의 장사진과 드문드문 낙타를 타고 大피라밋 주변 경사진 모래둔덕을 오르는 관광객의 실루엣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피라밋만이 위치한 황량한 사막지역이었으나 점차 주거지역화되어가는 주변 경관에서 유네스코의 시름이 깊어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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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버스에 오른 우리는 차창 밖으로 3개의 피라밋이 차례로 출몰하는 사막길을 따라 이들 피라밋의 원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이르렀다. 룩소르에서 접했던 사하라사막, 고센에서 접했던 동부사막과는 또 다른 서부사막의 묘한 분위기가 일렬로 도열한 피라밋의 群舞 속에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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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소음 속에 3개의 피라밋을 등 뒤로 품고 단체사진을 찍은 뒤, 대피라밋 뒤쪽 쿠푸 왕의 선박박물관을 돌아 스핑크스와 계곡신전까지 둘러보고 출구로 나오니 스핑크스와 中피라밋이 마주 보이는 정면에 야간 조명쇼 관람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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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1977년 개봉된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이 곳의 야간 피라밋 조명쇼 현장을 배경으로 007(로저 무어)과 거인 ‘죠스’(리처드 킬)가 격투를 벌이던 장면이 상기되어진다. 그러나 피라밋을 꼭 가봐야겠다는 환상을 심어준 영화 속 그 장면처럼 피라밋 관광이 그렇게 환상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고혹적 조명이 명멸하는 야간이 아닌 혹서에 시달린 대낮에 이곳을 찾아서일까? 조명이 비치는 피라밋 속으로 사라지던 여자 스파이를 쫓던 007의 흔적을 따라 자꾸만 대피라밋 쪽으로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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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를 벗어난 우리는 카이로로 東進해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찾았다. 세계 5대 박물관에 드는 이곳엔 25만 점의 유물이 107개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파피루스꽃이 소담스레 핀 건물 중앙 연못을 지나 1층 현관에 들어서 오른 편으로 발길을 돌리니 그 유명한 ‘로제타 스톤’이 우리를 맞는다. 이건 분명히 대영박물관에서 본 기억이 있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니 진품은 대영박물관에 있고 여기 것은 모조품이란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시금석이 된 로제타 스톤은 나폴레옹 침략시 프랑스군이 발굴했던 것을 영국이 프랑스와의 海戰에서 이긴 후 재탈취해 본국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주로 석상류가 전시된 1층을 둘러본 후, 2층에 오르니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투탕카문 왕의 분묘에서 출토된 각종 부장물이 펼쳐져 있다. 세계 최초의 순금부장물을 포함해 모두 3,000여점에 이르는 투탕카문의 유물은 전세계를 순회하며 연중 전시 중이라 현재 이곳엔 약 1,700여점만이 일반에 공개 중이란다. 저 유명한 투탕카문의 황금마스크를 비롯해 6중으로 이뤄진 각개의 관곽, 왕비의 생리대, 부채, 베개 등 상상을 초월한 유물들은 3,000여년 전 시대를 앞서 간 이들의 고품격 생활과 철학을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1897년 프랑스 고고학자 오기스트에 의해 세워졌던 이 박물관은 그간 몇 차례 중건되며 확장되어 왔으나, 포화상태에 이른 전시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오는 2012년, 기자의 피라밋 근처에 건축 중인 새 건물로 이사할 예정이란다.
카메라를 입구 수위실에 맡겨야 했기에 주옥 같은 전시물을 촬영할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한식 도시락으로 버스 안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사이, 버스는 올드 카이로의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모세 기념교회로 향한다. 아기예수가 헤롯 왕을 피해 애급에서 숨어지낸 곳에 세워진 아기예수 피난교회에선 예수의 웅혼한 숨결과 콥트교도들의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인내가 느껴졌다. 아기예수 가족이 숨어있었던 곳은 교회의 지하에 위치했는데 출입을 못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이어서 지근(至近)의 도보거리에 위치한 모세기념교회로 걸음을 옮겼다. 이 교회는 모세가 물에서 건져진 곳이기도 하고, 모세가 광야로 나갈 때 기도한 곳이기도 한 위치에 지어진 ‘시나고그’ (유대교 회당)이다.
이제 버스는 카이로를 벗어나 동부사막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수에즈 터널을 통과해 척박한 시나이반도의 광야를 내달릴 기세다. 차창 밖으로 땡볕에 불타는 대지의 포효(咆哮)가 전해오는 듯하다. 사막에 핀 관목 무리를 보며 午睡와 다투는 동안, 버스가 휴게소에 멈춰선다. 수에즈 터널 통과 전의 마지막 휴게소인 이름하여 ‘시나이 휴게소’다. 방파트너인 장로님께서 수박을 쏘신다. 熱沙의 땅에서 먹는 중동 수박의 맛은 분명 별다른 감흥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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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수에즈 해저 터널을 통과해 시나이반도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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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홍해 바다를 갈라 건너던 역사의 현장을 버스를 타고 건너는 감회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버스에 몸을 맡겼을 뿐인데 바다 밑을 건너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옮겨온 ‘문명의 조화’에 감사드려야 할지, 홍해 구경을 하지 못한 서운함을 애써 달래야 할지 도대체 어안이 벙벙하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도로 양측에 수직으로 솟아오른 토벽 위에 삼엄한 자세로 경비 중인 이집트 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집트의 황금 젖줄 수에즈 운하에 대한 당국의 집념어린 포즈를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유럽에서 아시아, 태평양을 연결하는 최단거리 코스인 수에즈 운하는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한 이래 운항이 중지되었다 8년만에 복귀된 쓰라린 전력이 있다. 6일 전쟁에서 시나이반도의 민가가 입은 피해는 且置(차치)하고라도 수에즈 운하 불통에 따른 이집트의 경제적 손실은 길이길이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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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던 수에즈운하의 선박들이 홍해로 접어들 무렵, 사막 속 대추야자나무의 무리가 보인다 싶더니 버스가 정차한다. ‘마라의 우물’이란다. 출애급 후 갈증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견한 우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자 모세가 꺽은 나뭇가지를 넣어 달게 한, 바로 그 우물이다. 수에즈운하를 빠져나와 홍해로 들어서는 선박과 우물 주변 사막의 야자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곤 다시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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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에 머리를 박고 침을 흘리며 헛제사를 지내다, 흠칫 놀라 창밖을 보니 온통 돌, 모래,자갈의 황갈색 토양을 을씨년스럽게 암산이 감싸고 있다. 이스라엘이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시나이반도를 반환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척박한 땅이었다. 출애급 후 땡볕과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하느님이 만나와 메추라기 세례를 내렸다는 ‘신광야’(Zin Wilderness)의 여름 직사광선은 더할 나위 없이 매서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였다. 황무지 사막이나 다름 없는 이곳을 광야라 칭하는 이유는 그나마 강수량이 50mm 이상이기 때문이란다. 광야와 사막의 분류기준 (연중 강수량 50mm)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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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어느 나무 아래 버스가 선다. 세계 최대의 싯딤나무(아프리카 가시나무) 아래서 모두들 기념촬영을 하였다. 사방을 둘러보니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족의 가옥이 듬성듬성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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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버스에 올라 광야의 여정을 계속하는데, 차창 밖으로 베두인의 집단주거지로 보이는 개량가옥들과 학교 등 일련의 공용시설들이 지나간다. 르비딤 지역이다. 신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을 친 후, 모세, 여호수아, 아론의 지휘 하에 아멜렉족속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곳 르비딤 골짜기엔 시나이반도 최대의 오아시스가 4Km 남짓 흐르고 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모세가 하느님의 영력을 빌어 아멜렉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한 역사의 현장인 타운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다. 타운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병풍처럼 돌산이 양쪽에서 둘러쳐진 가운데 오아시스를 따라 조성된 종려나무 숲의 푸른 색 물결이 끝 없이 뻗어 있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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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리운 베두인 청년이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산 정상까지 따라와 우리에게 계속 눈빛으로 말을 건다. 모세가 앉았을 자리에서 모세가 취했을, 손을 번쩍 든 포즈로 베두인 청년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자니 서편 하늘에 반달이 수줍게 얼굴을 드러낸다.
그로부터 2시간 30분여를 더 달려 오늘의 숙박지, 누에바의 ‘소네스타(sonesta) 리조트’에 도착했다. 밤이라 홍해의 쪽빛 아름다움은 볼 수 없었지만 수영장에 비친 달 그림자에서 시나이반도의 고단하고 서정적인 역사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여행 중 가장 훌륭하고 착한 숙소에서 맞이하는 안락하고 포근한 밤이었다.
첫댓글 사람의 크기와 비교해 보니 피라밋의 규모가 엄청나군요. 그 많은 돌들을 어떻게 다듬고, 운반하고 잘 쌓아서 지금까지 남아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시나이 광야의 출애굽 광경을 생각해보면, 저런 곳에서 수백만 명이 40 년 동안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 배설물 쓰레기 처리는 어떻게 하였을까 불가사의합니다.
메추라기와 만나 40년동안 먹다보면 지겨워서 투덜거릴만도 하겠다 싶지만 피라밋을 보면 그 노역에서 풀려났으면 감사해야하지 않을련지 사진 글 넘 멋지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