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애 시인>>
<<강신애 시인의 양력>>
* 1961년 경기 강화 출생.
* 1996년 《문학사상》 등단.
* 시집 :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불타는 기린』,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 현재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 교수.
<<강신애 시인의 시>>
오래된 서랍/강신애
나는 맨 아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더 이상 보탤 추억도 사랑도 없이
내 생의 중세가 조용히 청동녹 슬어가는
긴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서랍을 연다
노끈으로 묶어둔 편지뭉치, 유원지에서 공기총 쏘아 맞춘
신랑 각시 인형, 건넨 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코 깨진 돌거북, 몇 권의 쓰다 만 일기장들……
絃처럼 팽팽히 드리운 추억이
느닷없는 햇살에 놀라 튕겨나온다
실로 이런 사태를 나는 두려워한다
누렇게 바랜 편지봉투 이름 석 자가
그 위에 나방 분가루같이 살포시 얹힌 먼지가
먹이 앞에 난폭해지는 숫사자처럼
사정없이 살을 잡아채고, 순식간에 마음을
텅 비게 하는 때가 있다
겁 많은 짐승처럼 감각을 추스르며
나는 가만히 서랍을 닫는다
통증을 누르고 앉은 나머지 서랍처럼
내 삶 수시로 열어보고 어지럽혀왔지만
낡은 오동나무 책상 맨 아래 잘 정돈해둔 추억
포도주처럼 익어가길 얼마나 바라왔던가
닫힌 서랍을 나는 오래오래 바라본다
어떤 숨결이 배어나올 때까지
숲속의 보물찾기/강신애
바이올린 하나 들고 숲속 보물찾기에 나섰네
숲의 메트로놈, 새의 목젖은 갈참나무 잎사귀를 똑똑 끊어
한낮의 햇살 속으로 던지고 있었네
내 점심은 버섯, 새알, 흰꽃은 후식이라네
숲은 번식을 준비하는 야생동물의 활기로 가득 차고
나는 나무 밑동을 뒤지거나 딱따구리가 파놓은 구멍에
손을 넣어보며 덤불 헤쳐나갔네
이따금 곰을 만나거나 낙엽의 그물에 걸려
꼼짝할 수 없을 때면 바이올린을 켰네
신기하게도, 내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들려
숲의 다른 곳으로 옮겨졌네
햇살 꺾여 세공 안된 다이아몬드처럼 거친 빛을 발하던 숲은
짝을 찾은 짐승들의 벅찬 숨결로 부풀어올랐네
그는 늘 감추고 달아나고, 나는 무작정 찾아나서야 하는
이 불공평한 게임의 끝은 어딘지 따위의 의문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네
혹, 이 숲에 감춘 보물 따윈 없는 게 아닐까?
바이올린 현에 내 슬픔과 격정을 조율하다 보면
몸이 가문비나무 울림통처럼 가벼워져
우거진 숲에 가리운 늪과, 무서운 짐승을 피해갈 수 있음을 가르치려
나를 이 숲으로 이끈 게 아닐까?
한 숲이 끝나고 또다른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는 그가 숨긴 것이 무엇인지 알았네
두 겹의 방/강신애
나는 그 숲의 불가사의한 어둠을 사랑하였습니다
밤이면 습관적으로 음란해져
숲으로 들어가면, 숲은 내게로 기울어
귓속 차고 슬픈 전설이 흘러나와 발가락을 적십니다
나는 노루처럼 순한 눈망울로
숲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며칠 가지 않으면 숲은
일없이 가랑잎이나 발등에 쌓아놓고
종일토록 심심해합니다
내가 길에 뜻없이 굴러다니던
옹이투성이 통나무들을 주워다
이 숲에 방을 들인 건 언제부터일까요
마지막 망치질로 문패를 달고
이름 석 자 적어놓습니다
길 위에서 방을 구할 때
방은 달아나고 찢겨,
내 잠은 줄줄 샜습니다
따뜻한 뿌리 베고 나는 나뭇결 고운 잠을 잡니다
가수가 몇 옥타브 고음을 위해
영혼을 수천 미터 상공 어느 한 지점에 띄우듯
나는 이 방에서 어떤 출생을 꿈꿉니다
신이 땅을 만드시고 숲으로 기름지게 하신 것처럼
숲은 내 방으로 그 특이한 어둠을 한 겹 벗을 것입니다
까막까치 울음소리로 장작 타들어가고
아침밥 지을 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이 숲을 밥냄새 가득한 인간의 방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나는 두 겹의 방에서 삽니다
막을 파내려가 거기/강신애-
종일 흰 무덤 목련꽃이 실수로 印畵한
저쪽
바라보다 퇴근한다
자곡동 성남 분당 몇갈래로 흩어지던 마음 모아
탑성마을에 내리면
깊은 숨 몰아쉬는 숲 위로
잠언처럼, 떠오르는, 방
후들거리는 서른
눈 깊은 숲과 살림 차려
이사온 후로 내 어깨 양쪽은 늘 숲에 젖어 있다
호주머니 속,
치사량의 신기루는 어디론가 새버리고
백열등 보얀 내 방으로
두근두근 돌아간다
사막을 파내려가 거기
꽃뱀으로 또아리 튼 숲과 나는
목련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모래바람 속, 줄줄이 불려나온 진눈깨비 목련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강신애
여관 강변장은 성당 같다
입구의 청동 인어상을 나는 마리아라고 부른다
묵주 대신 커다란 소라를 쥔 한 손은 하늘로 뻗치고
한 손은 자신의 음부를 가린
半神半魚의 마리아
헤드라이트 불빛이 터진다, 찔린 듯 경련하는 조각상
비늘이 꽃처럼 떨어진다
녹색의 개가 비늘을 뒤적거리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취객 하나,
난산의 안개가 연인의 긴 그림자를 끌고 강변장으로 스며든다
나직하고 끊길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낸 이 누굴까
이 밤, 조각상 앞으로
내가 해 떨어진 아스팔트 길 위에서 중생대의 숲을 그리워할 때
상처를 따라가듯 아무도 모르게 성호를 그어보일 때
강변장 입구를 뭇시선으로부터 차단한 나무들이
이파리를 동그랗게 모으고 속삭인다
널 환영해, 여기부터 古典이야
늦은 영업집에서 전자오르간 소리는 적막을 포장하고
네온이 조각상의 봉긋한 가슴에 순교의 푸른 물을 들일 때
인어가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가만히 소라 하나를 건넨다
나는 굶주림과 파도와 싸우다 지친 선원처럼
허겁지겁 소라에 귀를 기울인다
검고 요요한 음향의 회오리……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팬데믹 / 강신애
닿을 수 없는 차가운 침상에
봄이 숨결을 다 쓴다
마스크 쓴 구름이 홀로 간 자들을 조문하는 동안
창궐한 전염병이
수백만 생명을 구했다고도 한다
바이러스와 테러리스트와 이산화질소 중
어느 것이 견딜 만한가
어디에 산소호흡기를 댈까
우리는 오랫동안 독을 먹고 살아왔는데
기침 소리에 소스라치는 어두운 골목
하얀 얼굴이 라일락 향기를 휘젓는다
나는 숙주고
너는 에어로졸이야
익사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꽃가루야
늙은 뒤에서 임신한 고양이로 불안을 숨기고
뿔뿔이 흩어진 동굴을 봉쇄하니
푸른 하늘이 열렸다
서로 다가가지 말라는 계시처럼
교회에서 극장에서 터미널에서
시취(屍臭)가 빈 의자를 징검다리 건넌다
인류의 대멸종인 듯
쌓이고 쌓이는 시체들
맨땅에 묻혀가는 자들은 영혼의 행방이 묘연하다
사람 없는 길을 간다 나만 밟으며
재가 정지된 시간 위에 뿌려지고
매연과 무증상이 이어지면
벚꽃을 놓친 모퉁이를 오물거리는 개미들의 그늘에서
다시 기침을 해도 될까
쓸어엎고 생겨나는 우주의 주술을 해석할 수 없으니
타인의 죽음으로 연명해야지
여름 달/강신애
카페에서 나오니
끓는 도시였다
긴 햇살 타오르던 능소화는
반쯤 목이 잘렸다
어디서 이글거리는 삼복염천을 넘을까
보름달
요제프 보이스의 레몬빛이다
내 안의 늘어진 필라멘트 일으켜
저 달에 소켓을 꽂으면
파르르 환한 피가 흐르겠지
배터리 교체할 일 달님이 이르시기를
차갑게 저장된 빛줄기들을 두르고 붉은 땅
무풍의 슬픔을 견디어라
우주의 얼음 조각들이 예서 녹아 흐를 테니
필경사/강신애
악보 베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 루소
한 권의 책을 읽고
평생 그 책을 베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스탄불의 사내
빗방울 음표들, 고독한 받침들, 빠짐없이
손으로 만들어낸 밤과 낮
극단처럼, 마침표처럼 아름답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북극으로 갈 필요는 없어요
오로라 잎사귀 끝은 핏빛으로 불타고
가는 줄기들 커튼을 휘감으며 핑크빛 향연을 펼친다
애틋한 손금 위로 갈라지고 피어오르며
낯선 생의 온도를 나누어주는 가지들
피와 초록의 온도, 머지않아 피어날 흰 꽃의 온도
하나의 인생을 읽고
평생 그 생을 베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몰입한 눈, 익명의 의지, 빠짐없이
맑은 잉크로 총총 헌화가를 뿌리며
바스락 바스락, 필사의 손이 상한 날개를 연주하는 일 년
방 안 가득 흩어진 열망이 압축된
푸른 페이지 붉은 페이지
푸른 수염/강신애
근심 없이 빛나는 바다를 보여주는 당신
영원의 비릿한 혀 속에
허리가 잠깁니다
늑대를 사랑하면
밤새워 늑대의 생애를,
새를 사랑하면
깃털에 얼굴을 파묻습니다
매순간 환희의 미각을 선사하는 당신
가슴 시린 물빛 수염 빛깔에 허물어지던 나는
당신이 주고 간 숱한 열쇠 중
금지된, 단 하나의 방을 열어젖힙니다
피의 지하실
거기 처형당한 당신의 세월들이
살과 뼈 찐득하게
못에 걸려 차곡차곡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야 맙니다
어느 순간, 돌아온 당신 칼에 쫓겨
나는 층계를 달립니다
높이 더 높이
긴 잠에서 깨어난 해골여인이
푸른 아수라의 피에 물든 반지와 구두를 벗어던지고 외칩니다
여기 사라진 영혼들이 있어요
15세기 잔혹 실화의 한 토막을 타고
뚱뚱한 나비 여인 마리포사*의 야성으로
나는 지붕에서 뛰어내립니다
해골여인의 들썩이는 뼈가 무너질 듯 나를 안아줍니다
저 컴컴한 성벽 위
하현은 손에 쥔 칼에 산란하고
녹슨 실핏줄 같은 수염은 외롭게 바람에 휘날립니다
————
* 뉴멕시코의 암석지역 ‘푸예’에서 나비춤을 추는 무희.
액자 속의 방 / 강신애
대흥동 가파른 계단 끝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걸린 방
알고 보니 시든 종이꽃이었다
키작은 주인 여자가 방문을 열자
잡다한 생활의 때가 모자이크 된 벽지와
싱크대의 퀴퀴한 냄새
비좁은 복도를 마주하고 세든 세 가구가
공동 화장실을 가다 마주치면
서로 스며야 한다
하루치의 숨을 부려놓고
햇빛 한 줄기에도
보증금이 필요한 세상
모든 희망의 문짝이 떨어져나간 대문을
허둥지둥 나서니
거리의 그 많은 사람들 모두 방이 있다니!
아니야, 방은
액자 그림 속에나 있는 것
노숙, 가망 없음
그게 우리 지상의 방이야
생활정보지를 펼쳐 아홉번째 X표를 그리면서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걸어다닌
일생의 거리를 생각해본다
목 부러진 해바라기들이
투둑 발에 밟힌다
※ 2002년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
최초의 性/강신애
눈을 떴을 때
까치와 거리 엔진소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몸의 굴곡을 더듬어본다
부푼 젖
그 아름다운 열매가 포실하게 안기고
유연하게 허리께로 미끄러지는 손
수줍은 물봉선을 건드린다
칼과 불의 사다리를 타고
죽음 끝
사과 끼앗을
항성 깊이 심어 넣은 지옥의 시간들
호르몬이 호르몬을
본질이 본질을 바꾸는 고통을
신조차 알 수 없었으리
거울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다가
모순의 입술에 담겨 운반된
그녀
흩어진 소설책과
고양이가 그려진 물 컵도 그대로
갈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제 속에서 쪼그리고 울던 여자를
비로소 꺼내놓았을 뿐
초록과 먼지가 반복되는 세상
침대에서
불안한 아름다움 속으로
발끝을 세우고 내려오는
첫
아침
파내온 나무 그림자/강신애
그 나무는 브니엘교회 입구
가지밭 모퉁이에 서 있었다
먼 세상을 내다보는 자세로
산책에서 돌아오는 어느 날 나는
꽃삽으로 나무 그림자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토막 난 그림자를 날라
내 방에 장판처럼 드리웠다
어둔 물관으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쪼그려 앉아 나는
습자지 같은 잎새에 혀를 대보거나 갈색 차를 마셨다
그림자는 조금씩 자라났다
가지밭 모퉁이 나무가 그러하듯
제 나무가 그리울 땐
시선을 옆구리 깊숙이 파묻거나
바람도 없는데 나를 떨어뜨릴 듯
가지를 흔들어대기도 했다
길모퉁이 나무는 없어진 제 그림자를 탓하듯
산책길의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 나무 밑에 서본다
그러면 가느다란 가지를 활갯짓하며
내 발치로 고속 촬영하듯 빠르게
나무 그림자가 생겨났다
가로등 환한 밤, 우리는 이렇게 만나곤 했다
여행의 추억/강신애
저 사과를 부수어 삼키던 입술은 어디로 갔나
주루루 모래가 쏟아질 듯한 술병을 기울여
한 잔의 술을 맛보았던가
책을 펼쳐
‘기억은 깨진 제비꽃
깨져 위 아래
왼편 오른편으로 자라나는 종유석’
이런 문장을 읽었던가?
돌들의 중얼거림에 둘러싸여
시간이 사람보다 빨리 늙어가는 이곳에
다녀가긴 다녀갔던가
그림자만 흔들흔들……
숨결 박힌 화석과 줄넘기하고 있는
숲은 고스란히 나를/강신애
쏙독새 따라다니다 길을 잃었다
나무 높은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건너뛰며
나를 숲의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번개 맞은 듯 까맣게 척추가 흰 나무 앞에서
문득 새소리도그치고, 두근거렸다
함석 차양에 빗방울 떠어지는 소리로 가랑잎 굴러다니고
한 발 앞으로 내디뎠을 때
숲은 고스란히 나를
낙엽 도토리 밤송이 껍질 수북한 골짜기로 빠뜨렸다
서걱이는 몸 일으켜 숲이 흘린 꿈,
허파에 하나씩 주워담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쏙독새가 나무에 줄을 매고 빙빙 머리 위를 돌았다
이렇게 한 사흘 숲에 취해 있으면
살갗에서 가지, 이파리가 뻗어나가고
발바닥에 스멀스멀 잔뿌리가 돋아날 것 같았다
온몸으로 밀림이 된 내 팔다리를 타고 오르며
쏙독새가 고립무원 우는 소리를
나는 가만히 취한 듯 듣고 있었다
물의 살/강신애
네가 심연을 뚫고
한 줌의 손에 당도한 것은
보기 위해서,
보아주는 눈이 필요했기 때문
겉으론 냉담한 척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더니
딱하군, 하며
가만히 고여 있다
불가사의한
증발하는 빛의 둥근 어깨
단지 반사할 뿐인 네가 사람처럼
연민의 힘살이 있다니
재빨리
한 모금 삼킨다
미세히 떨며
열린 살 속으로 들어가는 살
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내 깊은 곳에서 마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살
소/강신애
안개 속에서 검은 소를 만났다
구정물과 젖은 풀의 냄새를 풍기며 천천히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이 성스럽도록 멀었다
포근했는데 이상하게도,
소의 등허리에는 어제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춥지 않니?
눈을 털어주려 손을 올려놓았을 때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놀란 나는 뒷걸음질쳤다
소도 놀란 듯 했다
자동차도 뜸한 길가
낡은 속삭임 같은 마을 불빛을
무수한 습기가 운반해왔다
나는 더듬듯 계속 걸었다
안개의 발판마다 젖은 현의 선율이 튀어나왔다
뒤에서 희미한 울음소리를 들은 듯 했지만
모른 척 조금 빨리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안개로 윤곽이 무너진 소를 만났다
흐린 등에는 내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무거운 마침표처럼.
소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
누군가를 기다리듯 거기
우두커니
탈피/강신애
풀숲에서 솟아오른 여인이 피리를 불고 있다
호수 위 달은 희고
이브의 몸은 검다
선율은 흐름을 만들고 흐름은 물관을 열어젖혀
새와 사슴, 뱀들이
토인(土人)의 격렬하고도 부드러운 율(律) 쪽으로 흐른다
옷걸이처럼 구부러진 두상으로
척척 숲을 걸치고
뱀들이 거리를 좁혀온다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뱀들은 율을 삼킨다
식물들도 연둣빛 방광을 쫑긋거리며
이파리마다 비의(秘義)로 반짝이는 비늘들이 자라난다
뱀을 휘감고 침샘을 돋우어
온몸으로 피리를 부는 여인
탈피를 해도 예전의 자신밖에 되지 못하는 뱀을 위하여
동트는 갈잎에 비를 부른다
여덟 개의 구멍에서 끝없이
여덟 개의 칼로 태어나는 뱀들이
긴 머리칼 검은 형체의 곡선을 다듬는다
유령어업/강신애
알바트로스 어미가 새끼에게
병뚜껑을 먹이고 있다
인형 머리가
물고기를 해변에 토해놓는다
우산 손잡이와 무관한
깃털이
라이터와 무관한
아가미가 발치에 흩어져 날린다
나는 숨이 차고
좌표를 잃는다
소보록하게
폐활량을 가득 채운 내장의 출처는
저 바람과 해류에게 물어야한다
로프 모니터 야구장갑 노란 오리 파란 염산통 쪽지가 든 표류병
추락한 비행기 무지개 샌들……
보도블럭과 하수구를 흘러 태평양의 무풍지대에 이른
도시의 부유물들이
잘게 쪼개져
플라스틱 플랑크톤 대륙을 빙빙 돌리고 있다
내가 해를 바로 보지 못하고
그 거대한 환류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은
바닷새와 무관하다
내 방이 볼리스*로 산을 이루었다
몸부림칠수록
그물이 숨통을 조여 온다
*볼리스(bolus) : 소화 안 된 음식을 토해내는 것.
조 블랙/강신애
이층 긴 복도를 지나 왼쪽 5번 방
거기서 조 블랙을 만났다
생전 처음 사랑 때문에 맺힌 눈물의 질감을
손끝으로 가만히 비벼보는
조 블랙의 눈물은 피넛 버터 맛일까?
조 블랙은
샘 블랙이나 윌리엄 블랙, 찰스 블랙이 될 수 없지만
블랙은 항상 블랙이어서
조 블랙의 꽃다발은 안개 속에 묻힌다
밀폐된 방
소파는 더럽고
환기통은 고장 났지만
나를 위해 거듭 몸을 바꾸어 태어나는
나를 위해 청보라빛 눈동자 속을 열어 보이는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 움직이는 조는
죽음을 복제하는 자, 남의 육체를 뒤집어쓰고
영겁의 옷을 벗기는 자
나올 때
내 몸은 붕 뜨는 느낌이었다
조 블랙이 나의 블랙을 데리고 푸르른 정지 화면 속으로 사라진 것
나는 블랙이 그렇게 큰 부피를 차지하는지 몰랐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나는
블랙, 블랙, 외쳤다
조 블랙이 위례성 방향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광시(光視)/강신애
미간으로 햇빛이 골을 판다
미간으로 낙엽이 굴러든다
나비를 잡으면 회절하는 나비 떼
숲을 거느린 머리카락
오디 입술
수액이 증발하는 너의 배후로
유리체가 녹아 유리 조각을 빚다니
유리체가 녹아 사스레나무 껍질을 날리다니
가뭄을 견딘 망막이 당겨진다
거기, 찌릿찌릿한
네가 서 있고
흑점이 모아져 눈물 난다
번지는 작약, 은색 홀씨
플래시 터뜨리는 이 세계의 빛 부스러기들
이 어지럼증, 칠흑 세계의 잔상들
찡그리며 찡그리며 웃는
이 눈부심
美林山/강신애
휘리릿 휘파람새의 노끈 같은 소리를 따라
불이 능선을 넘어갔다
집 어름, 흰 연기가 환영처럼 일렁여
사내는 고개를 뛰어올랐다
푸걱푸걱 멧돼지가 튀고 뚱딴지가 타고 명아주가 울었다
생가지를 꺾어 불을 때렸다
계란으로 허공치기였다
사이렌 소리가 산과 공중을 요괴처럼 할퀴는 동안
화귀(火鬼)는 숲을 먹고 숯을 토했다
불 지른 이 없는 불
아름드리 사내의 가문 마음이 가문 뿌리에 부딪쳐
화염 덩굴로 피어오른 걸까
아슬아슬
한 채의 오두막 주위로
녹색의 요람에서 쫓겨난 밑동들 잿더미 돌멩이들
누군가 툭, 쳤다
사내의 터벅머리에서 탄내가 났다
각인/강신애
산비탈을 급히 내려가다
샘을 핥던
고라니 새끼의 동그란 눈과 딱 마주쳤다
놈은 펄쩍,
뛰어오르더니 물가에 나동그라졌다
고요한 숲이 쿵! 흔들렸다
애처로운 연노랑 배를 버르적거리다
칡덩굴과 엉겅퀴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새끼는 어디에 가서 울고 있을까
산 중턱에서 꺾인 낙엽송을 밟고 선 짙은 갈색 몸집이
어미인지도 모른다
젖내 나는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
인간의 눈빛과 맞닥뜨린 사태를 낱낱이 고할지도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린 찰나의 공포를
긁힌 털가죽 깊이 심어 넣었겠지
그 씨앗 같은 눈은 더욱 검어지고
내 눈은 더욱 더듬거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