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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지리산 [ 하동바위 & 창암능선 & 칠선계곡 & 하봉 & 중봉 &
천왕봉 & 중산리계곡 ]
산행코스: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백무동-하동바위-참샘-창암능선-칠선폭포-
대륙폭포-하봉-중봉-천왕봉-법계사-망바위-칼바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식당 및 민박 지구]
날씨 : 오전에는 구름이 짙게 끼었으나 오후 들어 맑아진 날씨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15시간2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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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백무동으로 이동 (차량 이동시간 : 3시간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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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지계곡과 칠선계곡의 합수점 부근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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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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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돼지 삼겹살 5인분에 동동주를 곁들여 저녁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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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원을 시주하고
서울 관음사 불교신자 임차 대형버스에 승차하여
(차량 이동시간 : 4시간20분)
메모 : 위 산행기는 아래에 게재한 산행사진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이성수가 진행한 산행코스에 입각한 산행기록임을 밝혀둡니다.
이 날 이성수가 중도에 길을 잘못 들어서 다른 4명의 더불어 회원님들과
이산가족이 되는 바람에
칠선폭포에서부터 중봉까지의 산행코스가 더불어님들과 다르게 되었습니다.
이성수는 칠선계곡의 지계곡 중 대륙폭포골을 거슬러 오르다가 하봉으로 치고 올랐고,
4명의 더불어 회원님들은 칠선계곡의 지계곡 중 마폭포골을 따라서
천왕봉으로 올랐습니다.
4명의 더불어 회원님들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백무동-하동바위-참샘-
창암능선-칠선폭포-마폭포골-천왕봉-중봉-대륙폭포골 진입부-중봉-천왕봉-
법계사-망바위-칼바위-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식당 및 민박 지구] 의 코스로
산행을 진행하셨습니다.
(갈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이성수와 다른 코스이고,
나머지 부분은 이산가족 상봉을 통하여 같은 코스로 진행하였습니다.)
추신 : 이 날 중도에 제가 길을 잘 못 드는 바람에
중봉에서 대륙폭포골 진입부까지 왕복하는 알바를 하게 되신
4분의 더불어님들에게 죄송하다는 뜻을 이 지면을 통하여 전합니다. 꾸벅.
창암능선의 칠선폭포 방향 지계곡과 칠선계곡의 합수지점
칠선폭포
칠선폭포
[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수량이 풍부했다.]
칠선폭포
칠선계곡의 지계곡 중 하나인
대륙폭포골을 대표하는 폭포인
대륙폭포
칠선계곡의 지계곡 중 하나인
대륙폭포골을 대표하는 폭포인
대륙폭포
칠선계곡의 지계곡 중 하나인
대륙폭포골을 대표하는 폭포인
대륙폭포
칠선계곡의 지계곡 중 하나인
대륙폭포골을 대표하는 폭포인
대륙폭포
[ 이 폭포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보았을 때
우측의 급사면을 타고 올라야 한다.]
정면에서 대륙폭포를 볼 경우
우측에 보이는 급사면을 오르면서 바라본
대륙폭포
대륙폭포 상류의
대륙폭포골 풍경
대륙폭포 상류의
대륙폭포골 풍경
대륙폭포 상류의
대륙폭포골 풍경
대륙폭포 상류의
대륙폭포골 풍경
대륙폭포 상류의
대륙폭포골 풍경
대륙폭포 상류의
대륙폭포골 풍경
지리산 이야기
( 칠선계곡. 국골. 왕등재. 웅석봉. 경호강. )
칠선계곡. (지리산 제 10 경)
............................................................쑥밭재.....
..........................................................................↖
................................................* 국골~~~~~~~~>하봉...........무재치기 폭포.
............................................................................./.....치밭목 산장.. 대원사.조개골.
......................................↙..................................중봉
.................................↖......................................./~~~~~*마야계곡(중봉골)
~~~~*선녀탕~~~~~*칠선계곡~~~~~~~.......천왕봉..................청소년 수련장.
........................................↖................↙.........
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 산장....산희샘.......중산리 계곡.
..............*한신(백무동)계곡↙.........................연하봉.
.......................................↖.........................../
.....................,,,..................↖............. ........촛대봉 ........도장골..길상사.
..................... ........................↖................세석 산장...음양샘~~.......거림
................................................................영신봉....한벗샘...........↗..삼신봉.............청학동.
지리산 최대의 아름다운 계곡미를 자랑하는 칠선계곡.
설악산 천불동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3대 계곡.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면서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펼치는 선경이 마천면 의탄마을에서 천왕봉까지 장장 16km에 이른다.
계곡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골은 더욱 깊고 날카로워,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들을 앗아간 "죽음의 골짜기"
칠선계곡은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천왕봉까지 9.4km
위험성 때문에 상당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진 등산로.
발길을 둘 곳 없을 정도의 계곡은 험한 산세의 연속.
추성리를 출발하여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에서부터 두지터, 망바위,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포를 거쳐 천왕봉에 이른다.
자연휴식년제로 출입 통제함.
(
칠선계곡 (비선담~천왕봉 구간)
.........................찾아가는 길.........................................
추성리 매표소 -0.5Km- 두지터(두지농장) -2Km- 선녀탕. 옥녀탕.비선담 -3.5Km- 칠선폭포 -0.5Km- 대륙폭포 -4Km- 마폭포 -3Km- 천왕봉
(총 !4 Km, 등반할 때는 7시간, 하산할 때는 5시간 도보거리)
경남 함양읍을 떠나 칠선계곡의 벽송사 서암을 찾아 가는 길
'지안치' 라는 지그재그 고갯길은 추성리 가는 길이기도 하다.
함양읍∼24번국도(마천 방향)∼1023번 지방도∼지안치∼
의탄에서 계곡따라 오르면 18 Km,
칠선계곡은 산세가 험해 위험하다.
추성리에 벽송사가 볼만하고, 옛 가락국의 식량창고였던 두지터.
가락국 구형왕이 신라군에게 쫓겨 최후의 항전을 벌렸다는 국골.
그당시 가락국 군사들의 식량창고였다는 칠선계곡 초입의 두지터
용소 선녀탕 청춘홀 칠선폭포 합수(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 볼만.
초암릉 국골과 칠선계곡 사이 암릉은 바위봉우리 연속으로 위험하다.
의탄마을은 계곡따라 올라가는 들머리.
........................................................
이조시대 칠선계곡 들머리는 의탄마을.
그곳부터 출발해야 계곡미 진수를 감상.
...............이륙의 유두류록 속의 의탄마을................
1471년 함양 원님 김종직은 이듬해 음력 4월 지리산 등반.
제자 유호인 조위 한인효과 휴천계곡을 거쳐 의탄마을 당도
'서너 모퉁이 돌아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은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담쟁이 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은 아래 개울이 바위에 부딪치며 꺾여 힘찬 소리.
그야말로 동산(東山: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 성 싶다.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살면 바로 무릉도원이 될 듯.'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
김종직이 동행한 제자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은 칠선계곡 청정계류가 흐르는 명소.
김종직 일행은 의탄마을에 도착하기 앞서 용류담을 지나친다.
김종직 보다 17년 후 두류산에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
'못은 남에서 북으로 깊이 패어 아득하고 바윗돌이 기이
인간 세상에서 멀리 천리나 떠나온 듯 했다... 못가의 돌들
고기 비늘무늬를 새긴듯 반질반질하고 독처럼 움푹 파이고
솥모양을 닮아 보이기도 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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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선계곡은 7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의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
7은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상징하며, 한반도 민족에겐 행운의 숫자.
불교 단체에서 중요한 행사는 대부분 7의 배수 날자로 정하고 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은 전국체전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이다.
군수가 제천을 올린뒤 7선녀에 의해 태양열 화경으로 인화한다.
날씨 흐리면 부싯돌로 점화하는 7선녀는 단군신화에서 비롯되었다.
단군이 제천할때 7선녀가 합그릇을 받들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래.
우리 민족은 옛부터 7 선녀를 왕 또는 신선을 모시는 선녀로 여겼다.
천왕봉에서 내려다보면 중산리 반대 방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계곡.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 대 계곡.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품고 있는 칠선계곡은 7개 폭포수와 33개의 소.
천왕봉 일대에서 마천면 의탄까지 18km 에 걸쳐 길게 이어진 계곡.
지리산에서 유독, 여성을 상징한 지명일 만큼 깊고 까탈스러운 계곡.
칠선계곡은 조난사고가 많이 발생해 일명 '죽음의 골짜기'라고도 한다.
지리산은 자락이 넓어 '아버지의 품' 이라고 비유하지만 이곳만은 예외.
칠선계곡은 전문 산악인들이 해외원정 동계훈련을 할 만큼 험준한 지형.
여름철 우중산행할 때 칠선계곡에서 천왕봉 위험구간은 피하는 것이 안전.
칠선계곡 코스는 추성동에서 천왕봉까지 14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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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경찰서 소속의 마천 산악구조대의 구조활동 주무대.
칠선계곡 들머리 의탄, 한신계곡과 백무동 들머리 강청리,
벽소령 들머리 삼정리를 활동 지역으로 산악 인명구조를 한다.
구조대가 가장 바쁜 때는 방학과 휴가철이 맞물리는 7, 8월.
해마다 이 때면 하루 24시간 비상근무로 숨돌릴 틈조차 없다.
구조대 창설 초기에 비해 요즘은 산악사고가 감소 추세에 있다.
94년 1월 칠선계곡 동계훈련 특전사 군인 척추부상 사고
95년 한신계곡의 급류에 갇힌 등산객 3명을 밤새도록 구조.
칠선계곡 일대는 구조대가 상주할 만큼 조난사고 다발지역.
칠선계곡은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지대.
지난 7년간 자연 휴식년제로 묶여있던 곳.
2006년부터 단계적으로 등산로 개방할 예정.
지방 지자단체와 환경단체 등이 첨예하게 대립.
이곳은 야생곰, 노루,삵 등 야생 포유류의 서식처.
다양한 우리나라의 고산 희귀 동식물 씨앗 저장고.
추성리 30여 가구 주민들은 칠선계곡 등산로의 전면적인 개방을 강력히 요구한다.
"주말에 등산객 한 명도 없을 때도 있고,
주로 벽송사 관광객들이 주 수입원이지요.
하루 속히 천왕봉까지 등산로를 개방했으면.."
그러나, 반달가슴곰 관리팀의
“치밭목에 방사한 연해주산 반달곰 6 마리 중 일부가 내년쯤 칠선계곡으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하여, 칠선계곡 상류를 개방하면 안될 것." -2005년 12월-
........
두지터.
.........
수직에 가까운 골짜기가 깊고도 깊은 칠선계곡.
국내 3대 계곡 중 하나인 함양 마천의 칠선계곡.
칠선계곡에서는 마지막 산마을..두지터
2.5km 아래에 있는 추성동마을 느티나무 점방. 두지터 주민에게 온 우편물은 그곳까지만 배달. 우편물은 먼저 본 사람이 주민들에게 배달한다.
1970년 대에 전기가 들어왔고
1990년 대에 전화가 가설됐지만
아직까지 도로는 뚫리지 않은 때문.
하여, 두지터 5가구 주민 운송수단은 지계.
자동차 대신 집집마다 두 세개 지계가 있다.
원래, 두지터는 이헌상 남부군 사령부가 있던 곳.
백무동의 인민군 사령부
벽송사 인민군 야전병원
그 중간에 위치한 두지터.
그 씨앗이 퍼져 해당화 자생지.
아무튼 해당화가 지천에 널린 곳.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두지터.'
가락국 식량창고인 뒤주가 있었다는 전설의 고향.
19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이곳에 지어진 집 한채
부엌 2개 딸린 주택에 이주시켰던 지리산 화전민들.
현재, 두지터 주민은 5가구에 10명.
................두지농장............
1980년대 은퇴 후 내려온 여균호씨,
1만 2천평 농원에는 1천구루 호두나무.
1/3은 야생동물들의 먹이감이고, 1/3은 오가는 등산객들의 몫이라.
1/3은 그의 몫은 오육십 만(?)원.
호두 수확이 한창이던 2006년 9월 중순에
현장답사 겸 여균호씨 집에서 하룻밤 민박.
순박한 부부의 넉넉한 인심이.. 느껴지는 곳.
이젠 하룻밤 묶어가도 후회없을 규모의 사설 산장.
멧돼지가 농사지은 수확물을 다 먹어치울까봐 걱정.
한겨울엔 아무리 감춰 놓아도 밤새 다 찾아 먹는단다.
등에서 지계를 내려놓을 틈이 없는 여균호씨.
그 바쁜 틈에도 찐고구마 접시를 내미는 부인.
.................................................
.................허정 씨................
연하천 옛 산장지기 허정씨 칠순부부.
산나물 반찬이 별미인 두지터.. 민박집
약초꾼
...............................................
................약초꾼
추운 겨울에는 산바람이 매우 거센 곳.
장작때는 불편 탓에 외지에서 겨울내기.
지난 겨울에는 문씨 혼자 마을을 지켰다.
올해는 두어 명이 더 남아 외롭지 않다단다.
문씨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다인(茶人)이었다.
진주 경상대 시절(1981년) 진주에 다람 전통찻집
1983년 화개 다우당 찻집에서 차와 다구를 생산.
지금 화개골 찻집이 80곳이지만 당시 세곳에 불과.
차주걱과 다포(찌꺼기를 거르는 체)는 그가 처음 개발.
서울 인사동 다구들도 거의 대부분 그의 작품.
198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다구 전시회도 개최.
전국에 차와 관련된 지명(897개)을 조사
그의 대학 졸업 논문 ‘한국 야생차의 연구'
한동안 다도를 즐기는 이들의 지침서로 통했다.
지리산과 차에 미쳐 대학을 9년만에 졸업한 그.
한때 쌍계사에서 출가해 내원암에서 3년간 스님.
그가 두지터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는 1993년 경.
중국차가 몰려오자 미련없이 화개골을 떠난 그.
칠선계곡 두지터에서 약초차를 만들고 싶은 마음
이 일대는
“칠선계곡엔 한국의 약초들이 거의 다 있어요.
헛깨나무가 지천인 이곳 약초의 약성은 강한 편.”
흙으로 지은 담배막 ‘흙내’라는 나무간판
그곳에서 차 연구에만 몰두해왔던
다구 깎는 조각칼도 버리고 심마니가 된 그.
그렇게 꼬박 4년 연구 끝에 개발한 차..‘초향’
둥굴레, 오가피, 두충, 산작약, 당귀, 산다래,
구지뽕, 의성초, 오미자, 솔잎, 감잎, 칡순 등
봄에 나는 100가지 안팎 약초 새순으로 만든 차.
양이 많지 않고 찾는 이가 많아
봄이면 만들자마자 동이 난단다.
요즘‘백초정’이란 효소를 연구.
“약초찾는 사람 중에는 사형선고 환자가 많아요.
아무리 귀한 약초라도 돈 욕심을 낸 적은 없어요.
귀한 약초는 연이 닿아야 하고 주인이 따로 있는 법.”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팀들도 그를 많이 찾는다.
몇해 전 지리산 반달곰을 카메라에 담은 MBC 제작팀
‘반달곰은 살아있다’ 제작팀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문씨는 요즘 금낭화, 개불알꽃 등 야생화를 재배.
산은 사람에게 쉽사리 품을 열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독 자신은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가 받은만큼 산을 지키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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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녀탕.
추성리에서 등산로를 따라서 곧장 가면, 계곡에서 처음 만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에 용소 가는 길을 표기했지만, 안전을 고려, 등산로와 동떨어져 있다.
계곡 따라 5백m를 오르면 만나는 용소.
산신제 때 산 돼지를 집어 넣는 곳이다.
그곳에서 2 km 더 오르면 두지동(두지터).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 두지동은 화전민들의 마을이다.
현재 담배건조장과 농막만 남은 등산객 휴게소
담배 건조장은 찻집으로 변해 있고, 창암능선 넘으면 백무동으로 가는 길.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에서 들릴 듯 말듯 전망 좋은 쉼터 추성망.
여기서부터는 험난한 계곡 길의 연속.
추성동에서 4km 지점, 선녀탕부터 험로.
선녀탕 전설에는 칠선계곡의 유래가 담겨있다.
7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
돌과 모래로 메워져 선녀 목욕장소로는 초라한 듯.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7선녀가 목욕할만한 곳.
선녀탕 바로 위에 선녀들이 몸씻기 적당한 너럭바위.
옥녀탕에서 샤워처럼 너럭바위로 쏟아지는 두 줄기 폭포.
그 앞 너럭바위는 선녀가 샤워하기 알맞는 장소.
선녀탕에서는 선 바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곳.
선바위와 두 줄기 폭포 사이에 있는 너럭바위 공간.
선녀들이 몸을 숨기고 목욕하기에 적당한 장소.
그 아래 선녀탕은 선녀들이 뛰어놀기에 안성맞춤.
아득한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오늘날 등산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선녀탕 목욕처.
7선녀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듯한 선녀탕 인근 등산로.
그렇다면, 이곳이 선녀탕이라 불리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단, 선녀탕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 이곳 풍경을 음미해보자
.................. 칠선계곡 선녀탕의 전설............................
7 선녀가 목욕 중 잃어버렸던 옷을 되찾아 준... 사향 노루.
그 옷을 훔쳐 바위 틈 나무가지에 숨기고 몰래 훔쳐 본... 곰.
(오늘날 등산로로 이용되는 그곳 나무숲 사이의 너덜바위 지대)
목욕을 마친 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옷을 찾아 헤멘 선녀들.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 있던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었다.
곰이 바위 틈 나무가지에 옷을 숨긴 곳이 우연히 잠든 노루의 뿔.
그 후 선녀들은 사향 노루를 그곳에서 살게 했고 곰은 국골로 추방.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메는 모습을 숲속에 숨어 엉큼하게 엿본 죄값.
선녀에게 옷을 돌려 준 착한 노루는 칠선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단다.
.................................................................................................
<노각나무>는 나무가지가 노루의 뿔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
매끄러운 연갈색 표피에 여름철엔 향기가 짙은 커다란 흰꽃.
간염, 간경화증, 지방간, 간질환, 손발마비, 관절염, 약재 원료.
노각나무 껍질은 삐끗한 발목 붓기를 가라 앉히는 응급 치료제.
'선녀탕의 곰은 사향노루 뿔을 노각나무로 착각한 듯.'
...........설악산 7선녀에 얽힌 선녀탕 전설.............
병풍바위로 둘러싸인 선녀탕에서 목욕하는 일곱 선녀.
몰래 따라온 선관이 가장 예쁜 두 선녀의 옷을 숨겼다.
옷을 잃어버린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두 선녀.
애닲게도 한 선녀는 그곳에서 옥녀폭포가 되었고, 다른 한 선녀는그 인근 여신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선관은 사라진 두 선녀를 찾으러 올라갔던 대청봉
올라가다 지쳐 그곳에 주저앉아 폭포가 되었는데
그 곳을 독주골, 폭포는 독주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 선관이 감추었던 선녀들의 옷은 폭포수에 떠내려와 치마폭포로….선관의 상투와 감투는 상투바위와 감투바위
옥녀폭포와 여신폭포에서 약수터까지 흘러내린 물을 음수,
선관이 변한 독주폭포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양수라 하여
그 양수와 음수의 조화로 <오색약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칠선계곡에 7명 선녀가 살았다는 유래를 뒷받침 해주는 선녀탕.
선녀탕 위에는 수십 평 소와 매끈한 암반으로 둘러싸인 '옥녀탕'
자연의 빚은 '오줌싸개 소녀'인듯 곧게 쏟아져 내리는 힘찬 물줄기.
'그 물줄기가 흘러내려 이루어진 옥녀탕.'
남자 여럿이 희희낙낙 목욕을 해도 좋을 만한 옥녀탕.
가장자리는 얕지만 그 가운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
마치, 여성의 성기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이 담겨진 옥녀탕.'
옥녀탕 위로 선녀들이 하늘을 날아다닐듯한 비경의 극치 '비선담'.
선녀가 하늘로 날아서 올라갈 것만 같은 곳이라 붙여진 이름 같다.
비선담에서 한시간 거리인 <칠선폭포>는 칠선계곡을 대표할 비경.
비선담 지나 목기막터가 있는 산죽밭 지나 오른편 계곡 건너 바위굴.
과거 목기를 만들던 인부들이 지내던 곳으로 알려졌기에... '청춘 홀'.
..........................'청춘홀 위치.............................
선녀탕 0.5km 전 지점에 좌측 <탐방로 아님>표지판.
그 옆 희미한 길이 있고 옛날 마을터 같은 초암 능선
단풍나무 드리워진 옥녀탕 우측으로 가면 일반 등산로.
청춘홀 가려면 비선담 통과후 좌측 계곡을 건너야 한다.
두지터를 지날 경우에 다리를 통해 계곡을 두 번 건넌다.
칠선폭포 못미쳐 계곡 우측으로 우뚝 솟아오른 검은 바위.
' 흰색 페인트 글씨 - '청춘홀. 지리산악회.'
일반 등산로와 동떨어져 찾기 어려운 곳이다.
................................................................
암반 위로 흐르다가 물이 고이면,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이고
물줄기가 떨어지면, 칠선폭포, 대륙폭포, 마폭 이름이 붙었지만
이름 없는 소와 폭포가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칠선계곡.
마폭 - 천왕봉 거리는 1.6km이고 표고차 700m 급경사 오르막.
오르막 곳곳마다 주목, 야생화, 고사목, 제석봉, 중봉이 보인다.
이 계곡 곳곳의 지명을 보면, 개척시기가 짧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선녀탕을 제외하고 나면, 전설이 뒤따르지 않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명에 유래나 전설이 없는 곳은 곧 역사적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하여,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보고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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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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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선계곡 등산로는 1964년 11월 하순과 12월 초순에 개척되었다.
부산 산악인, 학계인사들인
이곳 담과 폭포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굳어져 있다.
6개 중 높이 10m 쯤 폭포는 부산일보의 이름을 본 따 부일폭포.
그 다음 폭포는 대륙 산악회의 이름을 본 따 '대륙폭포'라고 명명.
자일산악회, 동아대 산악회 단체 명칭을 본 따 자일폭포, 동아폭포.
개척단은 목기 제작자들이 토벌한 세아름 300 년생 고목도 발견.
해발 1,500m 원시림에서 함지박이 쌓여 있는 목기 제작소도 발견.
스무개 정도 함지박이 초벌갈이가 된 채 돌담 안에 포개져 있을 뿐,
아무 기구도 눈에 띄지 않았고 목기꾼들은 연장을 챙겨 도망친 모양.
개척단이 들어갔을 때, 마을주민들은 이미 그곳을 자유롭게 왕래했다.
청춘홀부터는 점차 경사가 심하고, 길바닥은 험악한 돌밭의 연속이다.
돌밭길을 지나 칠선폭포를 거쳐 10분 후 왼쪽 계곡을 건너면, 중봉과 하봉에서 흘러온 개울이 칠선계곡 본류가 만나는 합수골.
폭포가 무려 3 개나 몰려 있어 폭포수골인 합수골은 도벌꾼들 초막.
이곳은 산장설립을 추진했다가 반대에 부딪쳐 흐지부지된 곳.
칠선계곡은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칠선계곡은 험하고 깊어 다른 곳보다 등산로 개척이 늦어졌다.
'칠선계곡은 등산로 개척 이전부터 도피자들이 은둔처.'
일제시대엔 징병, 징용을 피한 젊은이와 지식인 수백명이 은신.
남한유격대 총책임자로 최후의 빨치산으로 불린 남도부(南道富).
본명 '하 준수' 그는 일제의 만행에 맞서 민족 자주운동을 펼쳤지만,
해방 후 월북하여 강동 정치학원 교관을 거쳐 빨치산 수괴가 되었다.
칠선계곡은 세석고원을 지켰던 우천
그는 평소늘 흔적없이 칠선계곡으로 사라지겠다고 말했다.
법계교 옆 추모비에도 평소 그가 한 말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륙폭포, 3층 폭포 이정표를 지나면 평범한 길이 계속되다가
마지막으로 통천문 쪽의 중봉, 천왕봉 계곡이 합쳐지는 마 폭포.
마폭에서 계곡과 동떨어진 급경사 등산로는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마폭포 - 천왕봉 3㎞는 거의 일직선형의 산길에 표고차 500m
60∼70 도 바위 틈새로 길이 이어뎠고 원시림 고산식물의 연속.
침엽수림엔 주목도 많고 음습한 토양 탓에 강렬한 고산식물 냄새.
쓰러진 고목이 길을 가로막고, 산사태 난 곳이 많아 가슴 아팠다.
이 길은 서두르지 말고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안배할 필요가 있다.
64년 개척단은 이곳에서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비에 봉착했다.
정글 숲, 한 길 넘는 눈속을 피해 때론 산사태 지역을 올라가야 했다.
표고 1,700m 쯤 올랐을 때 바람이 일고, 사태난 절벽에서 낙석(落石)
천왕봉 바로 밑인 것 같은데, 작은 봉우리들이 쭈볏쭈볏 앞을 막았다.
눈비로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 여러군데라 목표를 제석봉으로 바꿨다.
눈과 낙엽, 구상나무 군락, 잡목 숲에서 베낭이 걸리고 옷이 찢어졌다.
잠깐 멈취 쉬면 등산화가 꽁꽁 얼어붙어 부득이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이 가까와진 것 같아 한숨 놓으려 했지만 능선은 보이지도 않았다.
1, 2 팀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무전기에 아무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중 략......
절벽에 둘러쌓여 있어, 선녀가 날아 올라갈듯 하면..,비선담.
소가 넓고 깊어, 그곳에 잘못 빠져 죽을 듯 싶으면..,옥녀탕
선녀가 목욕하기 적당할 만큼, 경관이 아름다우면..,선녀탕.
우리나라 어느 계곡을 가도 흔히 붙이는 이름..,세 가지.
칠선계곡에 붙어있는 세 이름은 1964년 개척단에서 명명.
'선녀탕의 전설'은 1964년 등산로 개척 이전부터의 구전.
전설 내용은 곰이 선녀의 아름다움을 엿본 곳이라 하여., 선녀탕.
선녀탕 이름은 그곳 목욕하는 선녀 모습이 아름답다는 의미인 듯.
즉, 선녀 같은 아름다운 여성들이 그곳에서 목욕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선담 위 옛 목기막터 동굴 이름은' 청춘홀
청춘홀이란 동굴의 이름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
이곳 전설 속의 여주인공 선녀는 아름다운 여성을 비유한 듯.
곰도 흑심을 품고 옷을 감출 만큼.., 7 여성의 아름다운 자태.
곰이 국골로 추방당할 정도라면, 7 선녀같은 여성들은 높은 신분.
'선녀 같은 여성들의 목욕 광경을 즐길 신분은 누구일까?'
한 두명도 아니고 7 선녀같은 여성들의 목욕 광경을 볼만한 신분.
한두 명이면 몰라도 7명이라면 높은 신분이라도 꿈도 꿀수 없는 일.
최소한 한 나라를 통치할 정도인 왕의 신분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경희루에서 흥청들의 목욕 광경을 즐긴 연산군.'
이조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1476-1506, 재위12년)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31세로 사망후 그곳에 매장했다.
훗날 중종에 의해 도봉구 방학4동으로 이전된 연산군지묘
그곳 쌍분에 연산군은 부인 폐비 윤씨와 나란히 묻혀 있다.
중종이 윤씨의 청을 받아들여 연산군을 왕자로 예우한 덕분.
연산군은 집권 초기에 선정을 베풀었지만, 말기엔 폭정을 거듭.
연산군은 경복궁 뒤 북한산 일대에서 말타고 사냥하기를 즐겼다.
북한산 수십리 일대 민가를 철거해 백성들 원성이 높았던, 연산군.
그 덕분에 북한산 국립공원은 현재 모습을 유지하게 된걸까?
여염집 규수까지 흥청제도로 강제 동원해 수치심까지 탐닉.
경회루의 주흥을 돋구려 연못에서 목욕하게 해 원성 높았다.
채홍사가 전국에서 뽑아 온 흥청들과 주색에 빠져 '흥청망청'.
흥청망청은 주색에 빠진 연산군이 나라를 망쳤다는 고사숙어.
연산군은 자색이 빼어난 신하의 부인까지도 강제로 겁탈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 신하에 대한 복수극.
'선녀탕의 전설'은 어느 왕조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곰을 천덕꾸러기로는 여기지 않는다.
농업국가에서 '초식동물의 왕' 곰은 토탬 신앙의 대상.
'선녀탕의 전설'에서 곰을 구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은 토종농가 꿀통을 박살낼 만큼, 꿀을 즐기는 정력의 상징.
꿀은 향긋한 달콤함과 알딸딸한 맛 탓에 '여성 샘'의 상징이다
동녀의 순결한 정기를 회춘 비방으로 알고 꿀처럼 여긴 양반들.
오늘날까지 전통적 악습으로 대대로 이어져 온 원조교제의 뿌리.
의학적 근거 조차 없는 풍습이지만, 이조 말기의 질퍽한 성풍속도
이조 말기에 유교 가치관을 세우려했지만, 성 윤리관은 무너졌었다.
'이조 후반에 성풍속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임진왜란,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의 전란을 겪었던 탓이다.
무례한 침략군들은 이조의 어염집 부인들까지 전리품 취급.
금품을 요구하며 인질 삼은 부녀자들을 청나라까지 끌고갔다.
결국, 이조가 은 2500 냥 속전을 물자 풀어준 인질이 환향녀.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의 치욕적 사건이던 삼전도의 수모.
환향녀는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갈곳이 없어 방황했다.
침략자에게 수모를 겪고 가문과 가족에게 눈총을 받았다.
하여, 비극의 여인들 일부는 스스로 청나라로 돌아갔었다.
가정이 있는 환향녀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이 많았다.
남편들 이혼 요구로 비극의 여인들은 두번 죽는 결과를 초래.
이조시대에 가정파탄이 빈번하여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갈곳이 없는 환향녀들은 몸을 팔아서도 연명했다.
그당시
곰에 대한 경계심이 이유라면, '선녀탕의 전설' 배경은 이조.
'선녀탕의 전설'은 지리적 여건 上 가락국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조의 왕실은 천리 밖에 있고 이곳은 지리산의 칠선계곡인 때문.
'사향노루가 <선녀탕의 전설>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 이 전설 속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쇄.
사향노루는 강한 동물성 냄새로 멀리 떨어진 이성을 유혹한다.
사향은 사향노루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에서 축출한 약재이다.
역사상 사향을 최초로 사용한 문명은 중국인들로 알려지고 있다.
사향은 고대로부터 흥분제, 취음제, 약용 용도로 널리 사용.
그 효능은 평소보다 약 30 % 이상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효과.
클레오파트라, 양귀비, 황진이, 나폴레옹의 연인 조세핀이 애용.
'조세핀의 방에서는 무려 사후 60년간 사향 냄새.'
황진이는 남자를 사로잡을 미모는 아니였다고도 한다.
격조 높은 시 이외에도 남자를 사로잡는 숨겨진 매력.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 사로잡히고 마는 이조 사대부들
'마치, 동물이 짝을 부르는 듯., 애틋한 야성미.'
최근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북한 작가 홍 석충씨 소설 황진이.
폐쇄된 북한사회에서 거침없는 성애표현 대목이 눈길을 끈다.
'쓰다듬으며 점점 아래로..진이는 "아!~.." 하는 비명 소리를..
늙은 손이 그 젖가슴을 사정없이 움켜잡았다.'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황진이에 대해 지나치게 미화시킨 것 같다.
북한에서 황진이가 천하일색으로 칭송된 비결은 사향 덕택이라 한다.
갓 설흔 나이에 죽은 그녀의 방에서는 야릇한 사향 냄새가 났다는 구전.
황진이는 조선중기의 개성 기생이므로 북한의 자료가 사실에 가까울 듯.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알려진 그녀에 관한 매력은 많이 다른 듯 하다.
그녀는 품격 높은 지성말고도 원초적 야성을 자극하는 매력도 갖춘 듯.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사향은 취음제로 귀하게 쓰이는 약재이다.
'사향은 어떠한 성분이기에 원초적인 야성을 자극할까?'
'사향을 희석시키지 않은 상태의 냄새'..사향으로 매력을 돋보이게 한 듯.
옛날 중국의 신분높은 여성들은 깊은 우물식 측간으로 배설물을 낙하했다.
우물 속에 새의 깃털을 깔아 소음을 줄였고 사향을 복용해 냄새를 제거했다.
사향의 효과는 얼음 위에 대나무 잎 잠자리를 깔 만큼 열렬할 정도라고 한다.
신라인들은 사향을 패용하고 서기 5백년 이전에 아랍지역 수출까지 했었으며,
신라인들이 사향을 복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시기는 서기 792년 이전이라 한다.
그당시 사양을 수출한 역사기록은 신라에 합병된 해상왕국 가락국을 칭하는 듯.
선녀탕의 전설은 사향노루를 귀하게 여기는 시대적 배경이 있는 듯 싶다.
전설 속에는 '곰에 얽힌 구혼'과 '곰의 식성에 관한 경계심'이 있는 듯 싶다.
칠선계곡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전인 미답의 신비를 품고 있는 계곡 같다.
하여, 선녀탕에서 쫓겨난 곰이 산다는 <국골의 유래>를 좀 더 알아봐야 할 듯.
국골
지리산 계곡과 봉우리들 중 '나라 國' 자 쓰는 유일한 지명.
이곳 지명에 나라 국(國)을 써야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애환이 깃든 지리산의 숨은 계곡.
가락국은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김해평야에 터전 잡았던 나라.
기원전 108년에 한(漢)에게 멸망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후예들.
가락국은 국가 형성 이전부터 '고구려'와는 구혼이 많은 듯 보인다.
가락국은 역사 상 기록을 보면, 친 신라의 노선을 걸었던 나라이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의 뿌리는 고조선이고 고조선은 단군환웅의 자손.
가락국은 기원 전 108년에 한(漢)에 멸망 당한 위만조선 후예라지만, 가락국 조상은 양자강 남쪽 인도 또는 아랍에 가까운 고대중국 같다.
가락국은 단군신화와는 전혀 다른 김수로왕 탄생 신화의 나라.
가락국은 곰을 천시하고 호랑이를 토템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
'하여, 칠선계곡의 선녀탕에서 곰이 국골로 쫓겨난 것은 아닐까?'
'국골은 칠선계곡에서 쫓겨난 곰이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가락국의 10대 '마지막 구형 왕이 추성산성을 축조했다는 곳.
국골에서 신라 침공에 대비 군마를 이끌고 훈련 시켰다는 구전.
국골은 가락국 구형왕의 마지막 피난처였다는 설에서 유래된 지명.
'추성산성 축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국골.'
국골의 험한 산세가 천연적인 산성 역활을 한 것은 아닐까?
군사들과 군마를 훈련시킨 장소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국골.
가락국이 군마를 훈련시켰다면 그 비밀 장소는 어느 곳일까?
혹시, 군사훈련장은 세석평전 아닐까?
국골과 추성산성은 가락국 구형왕의 방어 기지.
훗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
하여, 신라 진골 귀족이 된 구형왕의 증손자
전란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이끌고
신라에게 나라를 넘겨준 비운의 왕.
가락국 영토를 식읍으로 받은 구형왕
나라는 잃었지만 통치권은 유지했던 듯
지리산 동부 권역인 산청군 일대에는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유적지들이 많다.
추성 산성터 주변의 두지 터(식량 저장고), 얼음 터,
국골을 포함하여 왕등재 토성과 산청군 금서면 왕산
그 곳에 있는 구형왕릉과 그 왕릉 입구에 있는 덕양전
덕양전은 구형왕 증손자
아울러, 이 일대는 2400 종류 약초 자생지이고
'
하여, 옛날부터 한의학 의술이 발달되었던 곳이다..
유서 깊은 유물과 풍습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문화수준이 높았던 가락국의 유적지가 많은 고장.
개국 과정부터 베일에 가려진 역사가 정립되지 못한 가락국
구형 왕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신비감을 갖게 하는...국골.
구형 왕은 국골요새에 추성산성을 쌓아 백제와 항전했다는 <학설>.
왕등재에 토성을 쌓고 백제에 항전한
하봉과 중봉 사이 천연적인 요새 국골.
지리산은 1,500 년 전후에는 가락국 영역.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532년)에게 양왕 칭호를 받았던 인물.
백제와의 전쟁에서 구형왕의 마지막 항전처는 국골인 것 같다.
국골은 가락국의 군사요충지이자, 선녀탕 전설 속에 등장하는 곳.
선녀들의 노여움을 샀던 칠선계곡의 곰.
칠선계곡에서 쫓겨나 살게 된 곳이 국골.
국골은 그렇게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골짜기.
칠선계곡 지류 국골은 중봉과 하봉 사이에 있다
칠선계곡은 추성동에서 오르는 3 계곡 중 가운데.
혹시 선녀탕은 구형왕 후궁들의 목욕 장소 아닐까?'
사향은 왕의 관심을 끌려는 후궁들이 몸에 지녔던 취음제.
사향 노루를 가까이 둔 선녀들은 '왕의 여자'로 짐작된다.
선녀탕은 인적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적 드문 위치.
'왕의 여자'들은 7선녀 처럼 목욕을 즐겼을 듯.
왕의 여자들 목욕을 엿보면 국골로 추방했을 듯 추정된다.
곰은 잘 참다가도 충동을 못 참는 젊은 병사를 뜻하는 듯.
선녀탕의 전설에서 사향노루는 왕과 후궁들의 측극을 의미.
하지만, 이러한 짐작들은 어디까지나 추측.
좀 더 가락국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하자.
하봉 능선 깊숙하게 이어진 국골
등반객 인적이 거의 끊어진 골짜기.
국골은 깊은 골짜기에 원시림이 가득.
체력과 등반기술 및 장비가 필요한 곳.
국골은 천왕봉- 하봉 - 쑥밭재- 왕등재 - 유령계곡 또는 오봉리 하산 코스가 안전.
쑥밭재는 일제의 애국지사 석상용 선생 묘가 있는 곳이다.
아울러 이곳은 빨치산과 토벌군들이 저지른 양민학살 현장.
빨치산은 토벌군에 협조한 양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학살.
토벌군은 빨치산에 협조한 양민들을 죽인 후에 매장한 곳.
쑥밭제는 마지막 남부군 활동무대지만 전략상 마을을 폐쇠.
그곳 인근 국골은 지리산 동쪽 끝 북사면 외딴 곳이지만 전략적 요충지.
인적 드문 골짜기이며 지형 자체가 산성이고, 위급할 때 쑥밭제 탈출로.
국골은 구형왕이 신라에 맞서 성을 쌓고 항전했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그러나, 국골은 쇄퇴하는 가락국이라도 도성을 세우기엔 좀 비좁은 느낌.
신라에 쫓긴 가락국 구형왕의 마지막 항전처로 알려진, 왕등재로 가 보자.
왕 등 재
지리산 동쪽 끝자락에 왕등치(王登峙)에서 비롯된 지명.
즉, 왕이 올랐다고 하여 붙여진 고개마루의 우리말 이름.
천왕봉·중봉·하봉에서 웅석봉 사이 정남향에 있는 명당.
해발 1000m급 높이지만 산청과 함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욕의 역사를 안고 도도히 흐르는 경호강이 발 아래 있다.
천왕봉 용틀임 산세가 그대로 뻗어내린 지리산 동쪽 끝자락.
천왕봉과 동쪽 웅석봉 산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
멀리 아스라이 다가오는 다도해의 물결도 한눈에 담겨진다.
지리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가을의 억새 능선
왕등재는 구형왕이 토성을 쌓고 항전하다 왕산으로 쫓겨 최후
그 흔적으로 왕등재와 오른쪽 1030m 고지를 원형으로 싼 토성.
토성은 외성, 내성을 겹으로 쌓았는데 원래 높이는 약 3m일 듯.
'구형왕이 백제 침공을 막으려 쌓았다는 추성산성 터.'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병마를 훈련했다는 흔적들.
얼음터, 두지터, 토성과 성문, 왕등재 남쪽의 935m 깃대봉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이다.
왕등재를 궁으로 삼고 유평계곡을 요새로 삼은 듯 보인다.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에 요새를 구축한 이유는 뭘까?
왕등재는 해발 1000m 지점에 신비하게도 대규모 늪지대
넓이 70m 가량에 2백여m 가량 길게 펼쳐진 왕등재의 늪.
사철 물기가 서려 나무는 한 그루도 자라지 못 하고 풀밭
'왕등재 일원은 늪지대를 중심으로 광활한 분지.'
마치 세석평전과 흡사하고 1030m 고지와 아울러 천연요새.
왕등재 가는 쉬운 길은 승용차로 유평계곡 도로로 외곡마을
그곳에서 걸어서 30분이면 충분히 왕등재에 도착할 수 있다.
왕등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1030m 고지를 거쳐 밤머리재
왼쪽으로 가면 외고개와 새재·쑥밭재를 따라 하봉·천왕봉.
지리산 동쪽 자락에는 유난히도 고개가 많다.
함양군 마천과 유평계곡을 잇는 쑥밭재·새재
금서와 유평을 잇는 외고개·왕등재·밤머리재
왕등재와 외고개는 아직도 그대로 수수한 모습
가락국에 관한 역사나 문화적으로 연구가치가 높은 곳.
옛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함양과 산청을 넘나들던 재.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로 알려진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왕등재와 웅석봉을 연결하는 고개마루인 '밤머리재'도 유명하다.
.............................................
외곡마을에서 왕등재로 오르면 오른쪽 1030m 고지에 원형 토성.
토성 따라 일정 간격으로 자리잡은 남문·서문·북문에 석축 흔적.
국골에는 병마를 훈련했다는 구전을 뒷받침하는 얼음터와·두지터.
왕등재 남쪽 935m 고지의 깃대봉(군대의 깃발을 걸었다는 의미),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등이 남아있다.
왕등재는 구형왕의 도성인듯,
국골은 유평계곡을 잇는 요새.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 두 곳에 요새 구축.
그러나, 이의 실현 가능성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두 곳을 같은 시기에 요새로 구축할 이유가 없다.
하여, 두 곳은 항전처라도 시대적 차이가 있을 듯.
왕등재가 가락국의 항전처였던 사실은 이해가 간다.
왕등재에 펼쳐진 풀밭은 발목까지 질퍽거리는 늪.
광활한 산상과 평원 위에 솟아오른 천왕봉과 중봉.
북쪽에 왕산과 이어진 능선을 두고 있어 신비하다.
...............................................................................................
2004 년 4월 27일 왕등재(935.8m) 중턱에 4가구가 사는 외곡 마을.
이곳은 대원사 계곡으로 유명한 경남 산청군 유평리 맨 꼭대기 마을.
반달곰이 외곡마을 염소 3 마리를 공격, 염소주인은 24 마리라고 주장.
환경부는 지리산에 반달곰을 올해부터 6 마리, 총 30 마리 방사할 계획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밀렵을 우려해 반달곰을 방사한 활동영역을 비밀로!
반달곰은 산딸기, 도토리, 밤 등의 나무열매와 연한 산나물, 풀잎을 먹고 개미, 벌 등의 벌레를 잡아 먹는데 토종벌 농가를 습격하는 경우도 있다.
2003년에는 벌꿀 등에 대한 피해 보상으로 1억원 보험금이 지급됐다.
2001년에 방사한 반달곰 4 중 3 마리는 화엄사 입구 우리에 갇혀 있다.
산청군은 포수를 동원해 농작물을 습격하는 왕등재 멧돼지를 붙잡는다.
2002년 29 마리, 2003년 36 마리, 2004년 23 마리를 포수들이 구제했다.
태극종주 코스 초입 왕등재에서는 산행 중 야생 멧돼지를 조심해야 한다.
왕등재 일대는 가야를 애워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계선이 되는 위치.
가야의 유적지들 대부분은 교통의 중심지가 아니면, 해상무역의 중심지.
가야의 유적지는 전략적 목적보다 경제적인 효용가치가 높은 곳에 있다.
가야국의 발원지 김해에는 가야의 유물들이 많다.
부산 가야동도 가야의 옛터. 즉 가야국의 지명이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편입된 가락동 역시 가야의 옛터.
서부산. 인천. 우포늪. 교통의 중심지. 상권의 중심지.
가야 터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해상 무역항, 선착장들.
우선, 비야 가야의 도읍 창녕 우포늪 일대부터 살펴보자.
..............우포 늪의 공룡 발자국 및 창녕 일대..........................
우포 늪은 1억 1천∼2천만년 전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
빗방울 무늬 화석과 곤충 화석 그리고 약 6,000 년 전에 빙하 흔적.
한반도 육지의 해안선, 낙동강,우포늪은 빙하가 녹아 흘러나간 흔적.
지구가 점점 따뜻해지자 육지의 빙하가 서서히 녹기 시작했던, 당시.
낙동강은 지금보다 좁았고, 화왕산에서 시작된 토평천 규모도 작았다.
빙하는 강바닥을 깎아내리고 그 깎인 돌멩이 모래가 바다로 흘러갔다.
빙하가 녹아 높아진 해수면 역류현상이 일어나자 강주변으로 둑이 형성.
그후 낙동강과 토평천 주변 둑이 오목한 그릇모양을 만들어 고인 우포 늪.
우포는 우포늪 목포늪 지포늪 쪽지벌 4개로 나누어진다.
그중 제일 큰 우포늪 소벌은 '물 마시는 소'라는 의미이다.
우포는 예전부터 소를 많이 키운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소가 풀을 뜯고 물을 마시기 적당한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목포늪은 한자로 표기하면 木浦가 되는데, 원이름은 나무벌
여름엔 하천을 따라 땔감이 많이 떠내려 와 붙여진 지명이다.
사지포늪을 한자로 표기하면 砂旨浦가 되는데, 목포늪과 동일.
사지포늪은 가장 모래가 많이 있어서 모래늪벌이라 불렀단다.
마지막으로 쪽지벌은 4늪 중 가장 규모가 작아 붙여진 이름.
우포는 행정구역상 경남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 대지면
(동경 128°25′북위 35°33′), 직선거리로 주남 저수지와는 약 36㎞,
을숙도와는 약 70㎞ 정도 떨어져 있고 현재 '자연 생태계 보전지역
전체 면적은 약 8.54 ㎢(약 854 ㏊) 여름엔 약 2.314 ㎢(약 231.4 ㏊)
우포에 물이 가득찬 면적은 서울의 여의도공원과 그 크기가 비슷하다.
습지가 제공해 주는 경제적인 가치는 정확히 평가할 수 없지만,
수자원 확보로 어업 및 수산업의 산실로서 막대한 수입원이 된다.
그 외에 농업, 목재 생산, 이탄과 식물자원 에너지 자원, 야생동물
교통수단, 휴양 및 생태관광을 제공하는 높은 경제적 가치가 있다.
비야 가야의 도읍지였던 창녕군 일대 곳곳은 석기시대 고인돌 유물들.
선사시대에 화산으로 알려진 화왕산(火旺山)억새풀 태우기, 큰줄다리기
그곳 박물관엔 철 무기류와 은과 금으로 만든 말 장식과 여성용 장신구류
창녕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문화재로 돌정승, 20분 거리의 부곡 유황온천
창녕은 낙동강 하류와 '교통의 중심지' 대구를 잇는 중간지점 위치에 있다.
비야 가야가 이곳에 도읍지를 정한 이유는 우포 선착장이 있기 때문 아닐까?
지금은 이곳에 큰 배가 들어올 수 없지만, 옛날에는 가능했을런지도 모른다.
빙하가 뒤덮혀 있었던 6천년 전까지는 좁았을 낙동강과 토평천 강폭.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이후로는 넓어졌을 강폭.
빙하가 녹아 높아진 바닷물의 역류현상이 일어난 후로는 메꿔진 강바닥.
533년전 이조 이륙의 '유두류록'을 보면 지리산은 현재 날씨보다 추웠다.
2000년 대 이후로 한반도는 아열대성 기후에 돌입한 징후가 역력하다.
육,칠천년 전엔 빙하로 덮혔던 한반도! 그후 아시아의 몇 안되는 부동항.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부동항의 가치가 높았던 한반도.
항해술이 발달되면서 한반도는 역사 상에서 강대국의 침략이 빈번했다.
그 옛날 가야국은 부동항을 찾아서 한반도로 민족이동을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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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구형왕은 왕등재에서 신라에게 나라를 넘겨주었다.
신라가 마음 먹기에 따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을 듯.
구형왕은 백성들의 고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명분으로 항복.
신라는 구형왕에게 양왕의 칭호를 주고 준왕의 예우를 했다.
그것은 9 부족과 6 나라인 가야 연합국을 겨냥한 신라의 전략.
가락국을 합병해 남은 가야 세력의 반발을 막으려 했던 것일까?
구형왕은 김해 가락국을 인천 허씨에게 맡기고
금관가야 만 단독으로 신라에 투항했다고 한다.
인천 허씨는 김수로왕의 허황후 성씨를 따랐던 가락국 왕실혈통.
신라는 가락국과 합병 후 선진 철기문명 및 불교문화의 꽃이 핀다.
국골은 가락국의 구형왕이 신라와 마지막 항전처로 각오했던 곳.
구형왕이 왕등재에서 신라에게 패망한 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훗날 구형왕의 증손자
가락국의 마지막 10대 구형왕은 백성들을 아꼈던 인품으로 추정된다.
가락국은 원래 역사상 오랜 세월동안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던 나라이다.
고구려에게 밀려 김해평야에 자리잡은 후에도 신라와 백제에게 시달렸다.
가락국은 백제보다는 신라에 가까운 노선을 걸어왔던 국가.
가락국은 멸망한 후에도 한반도에 가장 많은 계보를 남겼다.
현재 우리나라는 박씨와 이씨 성보다 김씨 성이 훨씬 더 많다.
'가락국은 패망 후에도 후손에게 신뢰받은 왕조라는 뜻일까?'
엄한 국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나라와 통치방법이 달랐던 듯.
가락국 왕조는 무역과 교역으로 축적된 자금으로 왕실을 운영.
무역과 교역을 통한 고용 창출로 농사 외 일감을 만들어 준 듯.
백제 왕실정치는 백성에게 과중하게 조세를 징수한 흔적이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해 군사력 강화 및 전쟁 준비에 몰두했었다.
가락국 왕조는 무역과 교역에 힘쓴 반면 전쟁을 벌린 역사가 없다.
가락국은 상권이 백성보다는 주변국가가 교역의 대상이었던 듯.
가락국은 여러나라 선진문명을 들여와 백성들 삶의 질을 개선한 듯.
가락국 왕조는 패망 후에도 오늘날까지 후손에게 욕을 먹지 않는 듯.
가락국 왕조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역사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왕등재 일대는 가락국의 전략적 요충지 뿐 아니라 경제적 요충지인 듯.
고구려 신라 백제의 국경 지대인 왕등재 일대
3국의 정보를 수집한 교역의 요충지 아니었을까?
웅석봉(1099.3m)
지리산 태극종주를 하려면 천왕봉 중봉 하봉 쑥밭재
외고개 서왕등재 동왕등재 밤머리재 왕재 웅석봉 코스.
경남 산청의 웅석봉은 이름 그대로 '곰바위산' 으로 불린다.
곰이 정상 북쪽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
실제로 그곳은 워낙 낭떠러지라 그 전설이 실감나게 들린다.
산청읍에서 본 웅석봉은 곰처럼 둔중하고 뚝심있게 솟아있다.
천왕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 줄기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에서 동쪽으로 용틀임.
왕등재, 깃대봉 거쳐 웅석봉에서 솟구친 후 경호강
웅석봉은 경호강 남북으로 또 다른 산괴를 이룬다.
남릉은 수양산(502m)을 거쳐 덕천강으로 뻗어간다.
정상 중심으로 뻗어 내린 곰골과 어천계곡, 청계계곡,
닥밭실골 이외에도 남릉에서 발원하는 백운동과 실골
경관이 뛰어나고 물이 맑기로 유명한 청정 계곡들이다.
웅석봉은 빼어난 산세를 지녔지만 비교적 한적한 편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리산 천왕봉으로 인파가 몰리는 탓.
산악인들은 웅석봉에도 지리산 못지않은 애착을 갖고 있다. 천왕봉을 조망할 전망대로서 웅석봉 만한 곳을 드물기 때문.
최근 웅석봉은 백두대간의 시작 또는 끝머리로 조명 받는다.
이제 웅석봉은 백두대간의 일부 구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웅석봉은 산청읍에서 접근해 지곡사에서 오르는 것이 일반적.
하지만 산청읍과 시천면을 잇는 59번 국도가 포장되자 변화
그동안 웅석봉은 험한 산세라 천왕봉보다 오르기 힘들던 산.
산청읍 쪽에서 접근할 경우 1,000m 고도차를 올라야 하는 탓.
하지만, 밤머리재(570m)에서 출발을 하면 운치있는 능선 길
천왕봉 동쪽 사면의 조망도 뛰어나 인기 있는 들머리로 각광.
웅석봉은
산청읍, 삼장면, 단성면에 걸쳐있는 지리산을 잘 볼 만한 위치.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으로 이어져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서 다시 한 번 치솟는 산이 웅석봉이다.
산청읍에서 웅석봉을 보면 마치 산청읍을 감싸고 있는 담장같다.
지리산을 막아선 듯 버티고 서서 산청읍을 휘감는 경호강 일대.
웅석봉 들머리는 산청읍 내리에 있는 지곡사에서부터 밤머리재
성심원, 홍계마을, 대한촌, 어천마을, 마근담 마을 등등 산행코스.
원점 회기 산행코스 : 지곡사 - 선녀탕 -웅석봉 정상 - 내리 저수지 .
웅석봉(熊石峰)은 산세가 급하고 곰을 닮아 일명 곰바위산.
<한국 자연 보존협회>에서 선정한 ‘한국 명수 1백선’ 선녀탕.
웅석봉의 선녀탕은 두 계곡이 만나는 지점의 바로 위에 있다.
선녀탕은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어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좋다.
선녀탕에서 두 갈래 중 오른쪽 계곡은 경사가 완만한 코스
왼쪽은 경사가 급해 곰이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의 고향.
정상은 소나무 숲과 헬기장 주변 초원지대에 곰을 그린 표시판.
산행 소요시간은 <3시간 거리, 휴식 1시간, 하산 2시간>, 총 6 시간.
웅석봉은 독립된 산이면서도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33km 코스.
가락국의 전설이 깃든 깃대봉과 왕등재가 주는 신비가 예사롭지 않다.
구형왕릉 뒤 왕산과 더불어 왕등재 늪지대에 아직 옛 성터가 남아있고
가락국과 관련된 이런 저런 전설들이 주민들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다.
현재 웅석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일대는 야생동물의 천국.
야생 멧돼지가 자주 출현하는 곳이고 반달곰을 방사한 지역이다.
그 일대를 고구마 형태의 타원으로 둘러싼 산줄기가 천연 울타리.
옛부터 곰의 자생지라 지리산 일대를 통털어 가장 인적 드문 곳.
웅석봉은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의 첫 들머리인 곳이기도 하다.
경호강
진주에서 승용차로 30~40분 거리에 있는 경호강.
옛부터 경호강은 지리산에 인접한 최고의 휴양지.
유두류록을 보면 영남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
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산청읍, 신안면, 단성면)
예전 심거나루터 언저리인 어천계곡 입구 시멘트 다리
적벽산 아래 단성교까지가 래프팅 장소로 알려져 있다.
굽이치는 물결따라 요동치는 배타고 모험을 즐기는 곳.
산청(山淸)의 경호강은 '거울같이 맑은 호수'라는 의미.
경호강 주변은 산청 선비들의 멋드러진 풍류가 가득하다.
강이 산을 맞아 굽이를 도는 곳마다 선비들이 남긴 싯귀
골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와 정자.
경호강 본류와 엄천강이 만나는 곳의 지명이 강정(江亭).
경호강과 양천강이 만나 합류하는 지점에 엄혜산이 있다.
옛 선비들이 뱃놀이를 하며 시 한수 읊었던 유서깊은 곳.
적벽산과 엄혜산이 달빛에 어울려 일렁이는 경호강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뱃놀이 즐기던 어느 원님이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다 관인을 강물에 빠뜨려 파직당했다는 일화
경호강은 크게 네 곳의 물줄기가 세 번에 걸쳐서 만난다.
본류는 함양군에 속하는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화림동계곡
안의면를 지나 수동면에서 병곡면 백운산에서 시작해 상림
함양읍을 거쳐온 물줄기가 만나는 첫번째 합수지점이 있고,
두번째 만남은 지리산 자락에서 시작해 용유담과 자혜나루,
주상나루를 지나 온 엄천강이 산청군 생초에서 경호강 유입.
세번째는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흘러온 양천강과의 만남이다.
경호강은 본류와 엄천강이 만나는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부터 산청읍을 거쳐 양천강과 만나는 신안 단성면
진주에 있는
본류와 엄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강정은 너른 백사장
낮에는 경호강의 맑은 물에 세상사에 찌든 피로를 씻어내고
밤에는 은빛비늘 눈부신 민물고기를 낚아 달빛 아래 매운탕
달빛 벗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여름철 피서객이 많은 휴양지.
함양에서 시작된 경호강은 강정에서부터 산청의 물과 만난다.
생초면의 계남천, 초곡천, 월곡천, 생초천과 금서면의 대포천,
특리천, 금서천 물이 경호강으로 흘러들며 더 큰 강을 이룬다.
산청읍에 이르러서는
천장암(千丈岩) 낭떠러지가 물길을 가로막고 섰다.
경호강이 산청 읍내로 치닫지 못하게 하는 수문장역
절벽 건너편에는 모래톱이 형성돼 있어 여름철 피서지.
산청읍을 한굽이 돌아나와 둔철산 자락에서는 정곡천,
척지천, 외송천, 안봉천, 갈전천이 흘러들며 웅석봉 자락
내린천, 어천, 방목천, 남사천이 흘러들며 유속이 빨라진다.
경호강은 강폭이 넓은데다 큰 바위가 없고, 굽이마다 모래톱과 잔돌들이 퇴적되어 있어 유속은 빠르면서도 소용돌이 급류가 거의 없다.
예전 심거나루터 언저리인 어천계곡 입구 시멘트 다리
적벽산 아래 단성교까지 래프팅 시즌에는 북적거린다.
래프팅이 끝나는 지점에는 적벽산이 이정표처럼 서 있다.
적벽산을 지나 엄혜산에 이르면 산청 양천강이 경호강으로 유입.
합천군 삼가면 문송천과 학리천에서 시작해, 산청의 생비량에 이르러서 양천강을 이룬다.
경호강이 산청의 중심을 관통한다면, 덕천강과 양천강은 좌우로부터 유입.
특히 황매산과 국사봉, 효염봉에서 발원한 상법천
손항으로 흘러오는 골짜기는 아직 비포장도로이다.
상산(商山) 김(金)씨의 집성촌인 나무례 마을이 있으며,
오부면에서 시작해 차황면과 신등면을 지나는 단계천 자락
솟을대문과 흙담벽 고가촌 및 석조여래좌상 문화제가 있다.
강이라 하기엔 수량이 적지만 분명히 산청의 강이다.
황매산에서 발원한 양천강과 목화시배지 '배양마을.'
배양천은 청계(淸溪)계곡에서 시작해 남사들을 적신다.
남사천이 경호강과 합류하는 묵곡은 풍치가 절경.
특히, 묵곡에서 엄혜산을 감아돌면서 산청과 작별
너른 백사장을 펼쳐놓은 소남까지 강변은 유장하다
경호강이 소남을 지나면 진주 대평들판 거쳐
덕유산에서 시작해 정자계곡 화림동과 상림숲을 지나
강을 빚고 지리산에서 흘러온 엄천강과 만나게 된다.
황매산에서 흘러온 양천강을 만나 큰물을 이룬 경호강.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강물 가득히 담기는 밝은 달빛
그 옛날 역사의 어둠 밝히던 선비정신이 흐르는 듯 하다.
이조시대에는 경호강 일대가 지리산의 명승지였다.
오늘날은 촛대봉과 영신봉을 잇는 광활한 세석평전.
그곳에 얽힌 '음양샘의 전설'은 지리산 종주의 백미.
주변관광지
경호강 래프팅, 황매산 영화 주제공원, 웅석봉, 울곡사,
덕양전, 구형왕릉,
목면시배유지, 성철대종사 생가, 조식유적지, 양수발전소 등등
숙박/식당.
경호강청소년수련원(055-973-1157)
백마장여관(055-973-1661)
좋은날모텔(055-973-3668) /
홍화원 : 홍화특미오곡밥(055-973-9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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