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지 ② 함주군 운남면·덕산면
사촌(沙村)의 정상파는 위문에서 널리 알려진 명문 집안이다. 후손이 많아서가 아니라 특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신흥군을 떠난 후 이 파의 기착지는 두 곳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운남면이고, 다른 하나는 덕산면이다.
운남면은 경(璟․1658~1725)·태래(1679~1772)·영조(1697~1719)의 3대이다. 이들은 정상파 중에서도 일찌감치 신흥군을 떠났는데 경이 운남의 입향조이다. 묘는 운남면 축전에 있다. 영조는 숙종 43년(1717)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주서(注書․정7품)에 이르렀다.
덕산면은 창조(1703~1759)와 홍조(1719~1779) 형제이다. 창조는 영조 7년(173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좌부승지(정3품 당하관)에 이르고,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의 저술로 유명하다. 홍조는 영조 22년(1746)에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종4품)를 지냈다. 형제의 묘가 덕산면 대동리에 있으니 창조는 정상파 덕산의 입향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처음에는 운남과 덕산으로 갈라지나 후대에 와서는 사람들이 운남쪽으로 많이 유입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만 후손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사촌 정상파의 주류는 홍조계이며 후손도 많다. 이들의 원자항(源字行)부터의 묘는 운남면 구탄리(舊灘里)에 집중돼 있다.
갑신보(甲申譜․1824)에 서문을 붙인 33세 적철(1766~1838)은 바로 홍조의 손자인데 순조 9년(1809)에 진보현감(眞寶縣監)에 제수됐다. 또 보의설로 유명한 만암공(萬庵公) 광조(光肇․1747~1820)는 창조의 아들이다. 그는 정조 19년(1795)에 문과에 급제, 관이 형조좌랑(정6품)에 이르렀다.
(14) 정상파(定相派)
관북파는 월명산 삼룡으로 불리는 정상파 형제의 활약이 뛰어나셨네요. 의외로 함경남도의 우상리나 신흥군에서 여러 세거지로 이거가 많았군요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 옛발자취와 관북파(상층파.원성파. 정상파.)세거지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