奇事續出
기사(奇事),
천하에 홀연 네 가지 기사가 발생했다.
네 가지 일은 모두가 세인들을 경악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대사건(大事件)들이었다.
그 첫 번째...
혈살귀화(血殺鬼花)의 재출현(再出現)이었다.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천하제패(天下制覇)의 신화(神話)를 이룩했던
암흑마천(暗黑魔天),
그 암흑마천의 죽음의 신표(信表)로
한때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한 송이 핏빛 혈매화(血梅花)!
바로 그 혈살귀화가 삼백 년만에 다시 출현한 것이다.
천하는 혈살귀화가 어느 곳에 나타나 무슨 짓을 했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혈살귀화가 재출현했다는 사실 하나만을 주목했다.
혈살귀화의 재출현!
그것은 곧 암흑마천이 다시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욕(野慾)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두 번째...
그것은 하나의 소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동백산(桐柏山) 천도암(天道庵)의 암주(庵主) 부운선사(浮雲禪師)가
환영경(幻影鏡)을 얻었다!
그 소문이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허나 그로 인해 천도암은
그날 밤으로 수천 명에 달하는 무림고수(武林高手)들의 공격을 받고 말았다.
헌데 기이한 것은,
천도암주 부운선사는 힘의 역부족을 느꼈음인지 단지 잠시 동안만 대항했을 뿐
곧 환영경을 포기하고 환영경을 노리는 무리들 틈에
환영경을 던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환영경이 던져지자 천도암도(天道庵徒)들을 공격하던 무리들은
서로 환영경을 탈취하고자 처절한 상잔(相殘)을 벌였으며,
그 틈을 이용해 부운선사는 제자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리고 부운선사가 던진 환영경 두 쪽 중 한 쪽은
마력신도(魔力神刀) 뇌공령(雷公靈)이,
다른 한 쪽은 만검방주(萬劍幇主) 냉천기(冷天起)가
치열한 사투(死鬪) 끝에 차지했으나..
그 다음 날로 마력신도 뇌공령의 삼족(三族)이 멸살지화(滅殺之禍)를 당하고
만검방 역시 멸문(滅門)을 당하며 환영경의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환영경은 오송학이 지니고 있음을...
그렇다면 환영경은 본래 두 개이기라도 했었단 말인가?
세 번째 기사..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신비살수(神秘殺手)의
너무도 엄청난 살행(殺行)에 관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사신도혼(死神盜魂),
혼(魂)을 훔치는 죽음의 신(死神)이라 불리우는 인물,
그는 서른 세 명의 혼을 앗아갔다.
서른 셋.
따지고 보면 역대(歷代)의 기라성같은 대살수(大殺手)들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한 숫자이다.
팔백 년 전의 고혼유찰(孤魂幽刹)같은 경우는
무려 이천사백오십육(二千四百五十六)명을 살해했다고
무림사(武林史)는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허나 살수를 펼친 기간을 따져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고혼유찰은 오십여 년에 걸쳐 이천 사백 오십 육 명을 살해한 것이다.
사신도혼은 단 사흘만에 서른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이다.
그러하니 만약 사신도혼이 계속 그러한 추세로 살업(殺業)을 자행한다면
그는 일 년(一年)도 못되어 고혼유찰이 오십여 년에 걸쳐 살해한 숫자를
능가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더구나 사신도혼이 살해한 삼십 삼인(三十三人),
그들은 하나같이 천하를 진동시키던 절정의 고수들이었으니..
일례로 그는 당금의 십오대절세고수(十五大絶世高手) 중
사혼(四魂)의 일인(一人)인 무적패혼(無敵覇魂) 형무명(刑無明)을
단 일도(一刀)에 쓰러뜨렸을 정도였다.
사신도혼!
그는 명실상부한 이 시대 최고의 살수로 무섭게 부각되고 있었다.
기사(奇事)의 마지막 네 번째..
한옥비차(寒玉飛叉)가 혈혈무방(血血霧幇)의 여제자(女弟子)에 의해
혈무봉(血霧峯)으로 옮겨지고 있다!
한옥비차(寒玉飛叉)라면 환영경과 더불어 이 땅에 전해져 온
또 하나의 신비스런 전설이다.
형산(衡山) 혈무봉의 혈지(血池)가 그 신비를 푸는 날,
천하는 진정한 무(武)의 실체(實體)를 보게 되리라!
이 전설은 또한 이미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인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죽어 버린 전설이었다.
혈지(血池),
그곳은 형산 혈무봉에 자리한 핏빛의 거대한 연못으로서
무엇이든 닿는 순간 그대로 녹여 버리는
가공할 용해력(鎔解力)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니..
아무리 보물에 눈이 어두운 자라 한들
누가 감히 죽음을 불사하고 혈지의 신비를 풀려 하겠는가?
단, 한옥비차를 몸에 지니면 혈지의 해(害)를 피할 수 있다 전해지고 있었으나
한옥비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헌데 바로 그 한옥비차가 마침내 존재를 드러낸 것이니..
대추적(大追跡)!
한 달 전에 하남성(河南省)으로부터 시작된 추적의 행렬은
남(南)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 *
"으아악!"
비명,
한줄기 처절한 비명 소리가 산중(山中)을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아니 그것은 이미 지난 며칠 전부터 줄을 잇듯 이어져 온 비명 소리였다.
이곳 무공산(武蚣山)은 온통 역한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날씨는 화창했다.
그것도 수목(樹木)들에 파릇한 새순이 돋고
온갖 기화요초(璂花搖草)가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는 춘삼월(春三月) 호시절일진대..
무슨 일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만물(萬物)이 약동(躍動)하는 이 좋은 시절에
피어린 살상(殺傷)이 계속 이어지고 있단 말인가?
"크아악!"
또 한줄기의 단말마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무공산중의 어느 숲속 공터,
아름드리 노송(老松)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공터다.
그곳에선 지금 한 명의 백의소녀(白衣少女)와 세 명의 황의장한(黃衣長漢)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차차창!
퍼펑!
그들의 주위엔 십여 구의 황의인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삼 인의 황의장한들은 전신에 입은 무수한 검상(劍傷)으로 인해
피를 땀 삼아 흘리고 있었다.
허나 백의소녀를 쏘아보는 그들의 눈빛은
맹수의 그것인 양 흉폭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백의소녀의 몰골은 참담할 지경이었다.
일신에 걸친 백의는 아예 혈의(血衣)로 변해 버렸으며,
전신 곳곳에선 시뻘건 선형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부러진 검(劍)을 의지해 겨우 몸을 버티고 서 있었다.
이미 탈진한 듯 그녀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이때 정면의 덥석부리 황의장한이 음산한 괴소를 흘러 냈다.
"크흐흣.. 계집, 어서 물건을 내 놓아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백의소녀의 창백한 안색이 비장하게 굳어 들었다.
"꿈도 꾸지 말아라!"
쐐애애액!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부상당한 소녀가 펼쳐 낸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가공할 검광(劍光)이 허공을 새파랗게 덮었다.
'헛!'
황의장한은 예상치도 못한 그녀의 공격에
다급히 수중(手中)의 날이 시퍼런 반달형 월아산(月牙傘)을 번쩍 치켜들었다.
허나,
백의소녀는 왼쪽 어깨로 황의장한의 월아산을 그대로 받으며
황의장한의 머리 위 정수리로 맹렬히 검광을 폭사시켰다.
"크아악!"
황의장한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머리에서 시뻘건 피분수를 뿜어 올리며 썩은 고목(枯木)처럼 쓰러졌다.
백의소녀가 황의장한을 공격하던 여세를 몰아
왼쪽 어깨로부터 한줄기 선혈을 길게 뿜어내며
전면 숲속을 향해 쏘아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목적은 싸움이 아니라 필사적인 도주였던 듯 싶었다.
헌데 그녀의 신형이 막 숲속으로 쏘아져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계집, 돌아가라!"
슈슈슈!
퍼펑!
숲속으로부터 한 소리 냉랭한 폭갈과 함께 강맹한 장력(掌力)이 뻗쳐 나와
그대로 백의소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헉!"
백의소녀는 혓바람을 토해 내는 듯한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삼 장여 높이의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이내 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그녀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녀의 입에서 한 모금의 검붉은 핏덩이가 울컥 토해졌다.
휙! 휙!
숲속으로부터 다섯 줄기의 흑영(黑影)이 섬전처럼 쏘아져 나온건 거의 동시였다.
그들이 채 지면으로 내려서기도 전에 두 명의 황의장한은 황망히 허리를 숙였다.
"순찰오당주(巡察五堂主)를 뵈옵니다!"
"이곳은 우리가 맡을 테니 너희들은 방(幇)과 연락을 취하라!"
"복명(復命)!"
두 명의 황의장한은 지체없이 몸을 날려 그곳을 떠났다.
백의소녀는 이내 다섯 명의 흑의인(黑衣人)에게 포위되었다.
그들은 모두가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中年人)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차림새는 물론이고 생김새까지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그렇다.
그들은 믿을 수 없게도 다섯 쌍둥이였던 것이다.
천하무림인 중 다섯 쌍둥이는 오직 하나 하나 뿐이다.
창조오신원(創造五神猿). 흑의인들은 창조오신원이라 불리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임씨(林氏) 성(姓)을 갖고 있으며,
위로부터 일추(一醜), 이추(二醜), 삼추(三醜),사추(사醜), 오추(五醜)라 이름하고 있었다.
타고난 성격이 포악하고 우둔한 그들은 본래 녹림(綠林)의 무리들이었으나,
우연한 기연으로 인해 상승무공(上乘武功)을 익혀
전격적으로 호북(湖北)의 제일방파(第一幇派)인
천산방(天山幇)의 순찰당주(巡察堂主)로 기용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간신히 몸을 일으킨 백의소녀를 바라보며 득의 어린 괴소를 흘려 냈다.
"흐흐흐.. 결국 우리 창조오신원이 공(功)을 세우는구나."
"클클...다른 놈들이 미련하게도 서로 죽이고 죽는 살상(殺傷)을 벌이고 있을 때
우리는 조용히 숨어서 이때만을 기다려 왔지."
"이런 경우를 문자(文字)로 써서 어부지리(漁父之利)라고 하는 것이다."
"흐흐... 형님은 날이 갈수록 유식해지는구료. 역시 큰형님 자격이 있소."
"흠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우둔한 너희들을 이끌 수 있겠느냐?
어쨌든 이번 일로 방주님께선 우리 다섯 형제를
총순찰(總巡察)로 승격시켜 주실 것이다.
이는 우리 임씨 가문(家門)의 최대 영광이지.
막내야, 어서 저 계집에게서 물건을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큰형님!"
맨 왼쪽에 서 있던 창조오신원의 다섯째 임오추가 우렁차게 대답하고 나서
지체없이 백의소녀를 덮쳐 갔다.
그는 백의소녀에게 다가가자
반항할 기력도 없는 그녀의 뺨을 거칠게 한 대 철썩 갈기고는
느닷없이 그녀의 품속에 오른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아악!"
백의소녀의 안색이 수치와 분노로 새파랗게 질렸다.
임오추가 손을 집어넣은 곳은 그녀의 옷속 가슴 부위였던 것이다.
"이 악적! 어디다 더러운 손을 집어넣느냐!"
"흐흐...거참 풍만한 젓가슴이로군."
임오추는 이미 찾고자 하는 물건을 취했으면서도
그녀의 풍만한 수밀도를 짓궂게 마구 더듬었다.
창조오신원의 첫째 임일추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막내야, 아직도 못 찾았느냐?"
임오추는 짐짓 정색을 하며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이 계집이 대체 어디다 숨겨 놓았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큰형님. 아마 밑에 숨겨 놓은 모양이오."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머지 한 손을 백의소녀의 치마 속으로 밀어 넣었다.
'흐흐흐..기가 막히구나!'
"이 파렴치한 놈!"
백의소녀는 수치심으로 몸을 파르르 떨더니
돌연 있는 힘을 다해 임오추의 왼팔을 덥석 물었다.
순간,
"아이고!"
임오추의 몸이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과 함께 펄쩍 튀어 올랐다.
기묘한 것은 그 순간 그의 다른 네 형제들도 마치 함께팔을 물리기라도 한 듯
일제히 왼팔을 잡은채 펄쩍 뛰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쌍둥이 형제가 아니라 할까 걱정이라도 했던것일까.
임오추는 얼굴을 험상ㄱ게 일그러뜨리며
백의소녀의 두 뺨을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계집애! 다 죽어 가는 처지에 좋게 끝내 주려 했거늘
뭐가 그리 잘났다고 내 성의를 무시하느냐?"
철썩! 철썩!
백의소녀는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임오추의 무자비한 손찌검을 맞아야만 했다.
그녀의 눈빛이 풀린 걸로 보아 이미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 듯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창조오신원이 서 있는 맞은편 숲속으로부터 고막이 터질 듯한 호통이 터져나왔다.
"멈추지 못할까?"
백의소녀의 따귀를 때리고 있던 임오추를 비롯한 창조오신원은
동시에 흠칫하며 일제히 숲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장내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치렁치렁한 긴 흑발(黑髮)을 아무렇게나 뒤로 묶고,
풀잎으로 만든 옷을 걸친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준수한 용모는
은연중 상대를 압도하는 기품을 발했다.
나이는 대략 십 칠팔 세쯤 되었으리라.
소녀는 양쪽으로 갈라 묶은 댕기머리에 풀잎으로 만든 옷을 걸친 모습으로
매우 앙증맞고 귀여운 용모였으며 십 삼사 세쯤 되어 보였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
그들은 다름아닌 오송학과 녹상아였다.
한편, 창조오신은 오송학을 보고는 일제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우렁찬 호통에 놀라 내심 긴장하고 있었거늘 알고 보니 새파란 애송이들이 아닌가.
첫째인 임일추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소리친 놈이... 바로 네놈이냐?"
그말에 오송학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천하에 둘도 없을 추물(醜物)들이로군
. 어찌 생긴 것들이 하나같이 원숭이를 닮았을꼬...?"
"추... 추물...!"
"거참 분명히 원숭이들은 아닌것 같은데...?"
"이놈! 우리들로 말할 것 같으면
대천산방의 오대당주(五大堂主)직을 맡고 있는 창조오신원이시다.
어린놈이 어디다 대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창조오신원? 도대체 그 별호는 누가 지어 준 것이오?"
"그건..."
임일추는 왠지 선뜻 대꾸를 못하고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버럭 외쳤다.
"우리들 스스로가 지었다면 어쩔 테냐?"
"그렇다면 당신들은 큰 실수를 한 것이오.
무릇 별호란 남이 지어주는 것...
당신들은 아마도 그런 기회가 없었던 듯 하니
내 오늘 당신들을 만난 기념으로 당신들에게 특별히 별호를 하나 지어주겠소."
오송학은 창조오신원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창조오신원보다는
절대오추원(絶代五醜猿)이라 하는게 접합할 듯 하오.
좀더 토를 달아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창세(創世)이래 전무후무(前無後無)하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다섯 마리의 못생긴 원숭이들..
어떻소? 마음에 드오?"
"너...이놈! 어떻게...죽고 싶으냐?"
임일추는 아예 화가 극에 이른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오송학은 더욱 더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우리 아가씨와 상의를 해보겠소."
이어 그는 녹상아의 귀에 입을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녹상아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주위에 널려 있는 돌맹이를 한움큼 주워들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임일추의 입에서
살기에 찬 노갈이 터져나왔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하느냐,
네놈이 죽을 방법을 선택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알아서 죽여주마!"
그는 말을 하며 우수를 번쩍 쳐들었다.
오송학이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잠깐!"
그의 음성은 몹시도 컸던지라 임일추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칫했다.
오송학은 빙그레 웃으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은근한 음성을 흘려 냈다.
"내 혹시나 해서 물어 보는 것이오만...
당신은 천년설연실(千年雪蓮實)이라는 것을 먹어 본 적이 있소?"
실로 느닷없는 질문인데...
임일추는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돌연 안색을 대변시켰다.
그것은 그의 네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하나같이 탐욕의 빛이다.
'천...천년설연실이라고..?'
'설마 저 어린놈이 그것을..'
그들은 오송학의 질문을 오송학이 천년설연실을 먹었다는 말로 해석한 것이었다.
천년설연실-천하에 누가 있어 그것을 먹어 보았겠는가?
전설, 그것은 전설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일년 내내 눈으로만 뒤덮여 있는 대설산(大雪山)의 깊은 산중에서만 난다 하며
음양(陰陽)의 조화(造化)에 의해
천년(千年)만에 단 하나의 열매를 맺는다는 천년설연실,
보통 사람이 그것을 복용하면 만병통치(萬病通治)는 물론이고
영생불멸(永生不滅)을 할 수 있으며...
무림인이 그것을 복용하면 헤아릴 수 없는 무한정의 공력을 얻음과 동시에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룰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천년설연실은 광세의 기약(奇藥)이요, 희대의 영약(靈藥)인 것이다.
창조오신원이 아무리 우둔하다 한들 천년설연실을 모를 리는 만무한 터
, 그런 그들의 놀람이 채 가실 새도 없이
오송학의 입에서 또다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만년하수오(萬年荷首烏)라면 먹어 보았소?"
"만년... 하수오..."
"역시 못 먹어 본 모양이구료. 쯧쯧... 그것도 아직 먹어 보지 못했다니..
그럼 만년태양화리(萬年太陽火鯉)의 내단은 어떻소?
그 정도는 먹어 보았으리라 믿소만.."
"만... 만년태양.. 화리라고.."
"어...어찌 그런 것들을..!"
점입가경이라더니..
저 새파란 애송이 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자신들로서는 꿈속에서조차 먹어 본적이 없는
천고(千古)의 영약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저 어린놈은 별 대수로운 것도 못된다는 듯 가볍게 말하고 있으니...
오송학은 이제 웃음 대신 애석하다는 기색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럼 결국 구엽영지초(九葉靈芝草)나
금왕독각(金王毒角)같은 것도 못 먹어 보았을 것이고,
공청석유(空淸石乳)에 목욕을 못해 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겠구료."
당연한 얘기이다.
천하에 오송학의 얘기대로 모두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창조오신원은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오송학은 싸늘한 호통성을 내질렀다.
"왜 대답이 없소? 그렇소, 안그렇소?"
순간,
오송학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창조오신원의 안색이 일제히 험악하게 변했다.
"저 어린놈이 이제보니 우릴 놀리고 있다!"
"놈! 당장 죽여주마!"
허나 그들은 너무 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오송학을 공격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괴변(怪變)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촤아아..
쏴아아아!
그것은 바다(海)였다.
믿을수 없게도 갑자기 주위 경물이 변하며
망망대해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듯 하더니,
이내 그들은 거센 물살위에 떠있는 자신들을 발견해야만 했다.
"헉!"
"어.. 이게 도대체 웬일이냐?"
"아이고-! 어푸, 어푸!"
그들은 기절초풍한채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허나 정작 불과 오장 밖 거리에 있는 오송학 등의 눈에는
실로 우수꽝스러운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다.
창조오신원은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리린채로
마치 헤엄을 치듯 일제히 두 손을 마구 휘저어 대고 있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는데..
녹상아의 교소가 허공을 짤랑짤랑 울린 것은 이때였다.
"호호..! 오빠, 저 아저씨들 좀 봐
. 내가 펼쳐 놓은 팔괘수문진(八卦水門陣)속에서 정말로 헤엄치고 있어. 호호호..!"
"후후.."
오송학은 빙그레 웃으며 창조오신원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녹상아의 말대로 창조오신원의 주위엔 하나의 진(陣)이 펼쳐져 있었다.
오송학이 각종의 영약을 읊어 대며 그들의 혼을 빼놓는 사이
녹상아가 암암리에 조약돌을 던져 천외기환록(天外奇幻錄)에서 익힌
팔괘수문진이라는 진식(陣式)을 펼쳐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창조오신원은 자신들이 진세에 갇혔다고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파도와 사투를 벌이기에도 바쁜 처지인 것이다.
쏴아아..
"어푸! 대체 이게 무슨 조화냐?"
"저기 섬이다!"
열심히 헤엄치던 그들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하나를 발견했다.
그 섬은 실로 작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건 섬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가까스로 파도를 헤치고 그 섬위에 올라서 보니
서로 몸을 맞붙이고 겨우 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한 평(坪)도 채 안될 듯한 소섬(小島)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진속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나,
그때는 이미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상황에 처해진 후였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그 섬에 서 있을 수밖에
. 본래 그들은 본래 진법(陣法)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안다 해도 팔괘수문진은 진법(陣法)의 달인이라 해도
쉽게 풀 수 없는 극히 난해한 절진(絶陣)이었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젠장! 꼬마놈아! 당장 이 진법을 풀지 못하겠느냐!"
허나 오송학과 녹상아는 아우성치는 그들을 아랑곳 하지 않은채
백의소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오송학은 그녀의 상세를 한눈에 살피고는 결코 살아날 수 없음을 알아보았다.
이미 안색은 잿빛이었으며
눈을 뜨고 있었으나 초점이 풀린데다 사색(死色)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너무 늦었구나."
오송학은 가볍게 탄식했다.
그때 백의소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오빠야, 이 언니 무슨 할 말이 있나 봐."
녹상아가 말과 함께 재빨리 백의소녀의 몇 군데 혈도(血道)를 두드려 주었다.
이윽고 잿빛으로 죽어 있던 백의소녀의 얼굴에
흐릿하게나마 혈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녹상아가 물었다.
"이제 얘기할 수 있겠어요?"
"당... 당신들은 누구죠?"
"우리는 이곳을 지나다 우연히 언니의 곤경을 목격하고 달려온 사람들이예요."
"그...그랬군요..."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봐요.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께요."
"고..고마워요. 하지만...이젠 늦었어요. 물건을... 빼앗겨 버렸거든요."
"아직 아니예요. 언니 물건을 빼앗은 사람들은 내가 저기 저렇게 붙잡아 놓았어요."
녹상아는 자랑스럽게 진속에 갇혀 있는 창조오신원을 가리켰다.
백의소녀는 녹상아가 가리킨 방향을 힘겹게 돌아보더니 갑자기 생기를 되찾았다.
"아...됐어요. 소...소협.. 정말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
오송학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녹상아가 오송학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해? 들어주겠다고 빨리 대답하지 않고...?'
'이 계집애가 무슨 부탁인지도 모르고..'
그러나 녹상아가 계속 그의 옆구리를 찔러 대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 내 힘이 닿는 일이라면 성심껏 도와 드리리다."
"아.. 고마워요."
백의소녀는 안도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소녀에게 빼앗은 물건을 되찾아...
형산(衡山) 혈무봉(血霧峯)의 혈혈무방(血血霧幇)에 전해 주세요."
그 말을 빠르게 마친 그녀는 과도한 기력을 소모한 듯
세 모금의 핏덩이를 계속해서 토해 냈다.
그녀의 안색은 이내 다시 잿빛으로 돌변했다.
"언니..!"
녹상아가 재빨리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다시 두드려 주었다.
백의소녀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틀렸어요. 혈혈무방은 소녀의 사문(師門)..
제자(弟子) 초난향(焦蘭香)은..끝까지 노력을..다했다고..전...... 전해.."
그녀의 말은 다 맺지를 못하고 끊겼다.
말이 끊기자 그녀의 모든 동작도 끊겼다.
한순간 죽음의 침묵이 사위를 감돌았다.
오송학은 안타까운 눈길로 잠시 시신(屍身)을 내려다보다
창조오신원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입에서 일성노갈이 터져나왔다.
"절대오추원은 듣거라!
살고 싶으면 이 낭자에게서 빼앗은 물건을 이쪽으로 던져라!"
그러자 창조오신원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타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리 오래 고민할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촤아아..
쏴아아아!
그들이 겨우 발을 딛고선 소섬이
돌연 바닷물에 의해 빠른 속도로 잠식해 들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 막내 임오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큰...큰형님, 어떻게 하지요?"
그의 말이 떨어질 새도 없이 임일추가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임오추의 뺨을 냅다 내갈겼다.
"이 바보같은 놈아, 우선 살고 봐야 할 것 아니냐?
어서 던지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하지만...이것만 갖고 가면 우리는 총순찰이 될 수 있는데.."
"어...이런 미친 놈! 죽어 귀신이 되어도 총순찰이냐?"
"아..알았소."
임오추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내는 물건은 시리도록 맑은 청광(靑光)을 발하는
벽옥(碧玉)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비녀였다.
대략 사오 촌(寸)쯤 되는 크기였는데...
어찌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비녀 끝에 양각(陽刻)된 나비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생생했다.
임오추는 그것을 던지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헌데 큰형님, 이게 뭐라 했지요?"
"뭐라더라...? 한.. 한옥...무어라 했는데..?"
셋째 임삼추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어 참견했다.
"한옥비차(寒玉飛叉)라는 것이오
. 그리고 방주께선 이번에 새로 얻은 일곱째 마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것을 뺏아 오라고 했던 것이오. 자, 이제 알았으면 어서 주어 버립시다."
똑똑한 척 입을 열었으나 그 역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
창조오신원,
그들은 정녕 몰라도 너무 몰랐다.
설마하니 그들은 너무 우둔한 나머지 귀라도 먹었단 말인가?
한옥비차(寒玉飛叉)!
그것은 혈지(血池)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로써,
혈혈무방의 여제자에 의해 혈무봉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소문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간에 그들은 총순찰의 직위보다는
목숨을 살리고 보자는 결정을 내리고
한옥비차를 오송학의 음성이 들려 온 방향으로 힘껏 던졌다.
휘익!
한옥비차는 오송학의 일장여 앞에 떨어졌다.
오송학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한옥비차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때, 풀잎을 대충 엮어 만든 옷을 걸친 그의 몸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떨어져 땅바닥을 또르르 굴렀다.
환영경(幻影鏡).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바로 환영경 한쌍 중 반쪽이었다.
그것은 땅바닥을 또르르 구르더니 바닥의 경사를 타고 저만치로 떼꿀떼굴 굴러갔다.
오송학은 일단 한옥비차를 주워들고 나서 환영경이 굴러간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어 그가 막 환영경을 집어들려는 순간이었다.
휘이익!
돌연 한 줄기 파공성이 이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환영경을 번개처럼 낚아채는게 아닌가?
'이.. 이런..!'
오송학은 안색이 일변해 파공성이 이어져 간 방향으로 재빨리 시선을 던졌다.
"클클클...이건 진짜 환영경이로구나!"
홀연히 바람처럼 나타나 환영경을 채간 인물은
왜소한 체격에 수천번도 더 기웠을 법한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친 거지노인이었다.
그는 십여 장 밖 고목(古木)의 손가락 굵기도 채 안될 듯한 나뭇가지에 턱하니 걸터앉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환영경을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노부는 오늘 한옥비차도 취하고 싶다만 주위가 어수선하니 이걸로 만족하겠다.
네가 굳이 이것을 찾고 싶다면 남해(南海) 탈혼도(奪魂島)로 오너라."
"어림없는 소리! 물건을 내놓지 못할까?"
오송학은 일성 노갈과 함께 광덕별부에서 익힌
불영신보(佛影身步)를 펼쳐 거지노인을 덮쳐 갔다.
파아악!
쏘아낸 살과도 같은 기세,
허나 거지노인은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오송학의 신법을
가상하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기만 할 뿐
피할 생각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급기야 오송학이 거지노인을 덮치려는 순간이다.
쐐애액!
슈파악!
난데없이 어디선가 수십 줄기의 위맹한 장력(掌力)이 뻗쳐 나와
오송학의 전신으로 폭사되었다.
"헛...!"
오송학은 다급한 혓바람을 토해 내며 거지노인을 덮쳐 가던 자세를 바꿔
재빨리 허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거지노인의 장난기 어린 괴소가 허공을 울렸다.
"히힛..! 멋진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이로다.
잘해 보거라. 노부는 이만 가보겠다. 탈혼도를 기억하거라."
그는 말을 마치자 홀연히 신형을 날렸다.
슈우우욱!
거지노인의 경신법은 믿을수 없을만큼 신쾌무비해서
삽시간에 오십여장 밖으로 멀어져갔다.
(빠르다!)
오송학은 상대를 잡으려면
환작의 분광환영표(分光幻影飄)를 시전해야만 한다는것을 알았다.
허나 그는 결코 분광환영표를 펼칠 수가 없었다.
환작이 남겨 놓은 첩지의 내용이 그의 뇌리를 섬전처럼 스친 때문이었다.
<대형(大兄)을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노부의 분광환영표를 사용하지 마라
.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만사(萬事)가 물거품이다.>
'제기랄..'
오송학은 암담한 기분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는 불영신보를 시전해서라도 상대방을 추격하리라 마음먹었다.
허나 그가 미처 몸을 날리기도 전에 등뒤로부터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한옥비차를 내놓거라!"
쐐애애액!
오송학은 노기가 충천하여 뒤로 돌아보지 않고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벼락처럼 떨쳐 냈다.
"네놈들 때문에 그 거지노인을 놓치고 말았다!"
번쩍!
다섯 줄기의 청광(靑光)이 일순간 허공을 번뜩였다.
"으아악!"
"크악!"
그의 등뒤로부터 한꺼번에 비명과 굉음이터져 올랐다.
오송학은 허공중에서 빙글 신형을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경악의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보라!
허공 가득 피분수가 자욱이 뻗쳐오르는 가운데...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이십여 그루나 줄기가 쩍쩍 갈라져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굉...굉장하구나! 내가 펼친 무무탄지신공(無無彈指神功)의 위력이 이토록 엄청날 줄이야!'
무무탄지신공(無無彈指神功)!
바로 환작이 오작제일계(五爵第一計)의 하나로 안배했던 광덕사의 최대절기가 아닌가?
그러나 무무탄지신공의 위력이 어떠하든 오송학이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의 몸에는 환작이 평생 쌓은 공력이 고스란히 전수되어 있음을...
이때,
거목들이 쓰러진 곳으로부터 한 줄기의 창노한 침음성이 들려 왔다.
"잔인한 놈...!"
일단의 무리들이 오송학의 시선을 파고 들어왔다.
한 명의 금의노인(錦衣老人)을 비롯한 삼십여 명의 황의인(黃衣人)들..
오송학의 시선이 금의노인을 향해 못 박혔다
. 순간 그의 두 눈에 미미한 긴장의 기색이 스쳐 지났다.
'대단한 기도(氣度)다! 결코 시계명이나 소소실혼의 아래가 아니다!'
금의노인은 금의노인대로 오송학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으음.. 어린놈이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
. 벌써부터 일신에 현기(玄氣)를 갈무리하고 있다니..'
이때였다.
오송학의 뒤쪽에서부터 다급한 외침이 고래고래 울려 퍼졌다.
"저희들 좀 구해 주십시오! 방주님!"
다름 아닌 창조오신원이었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사력을 다해 허우적대다가
금의노인의 음성을 듣고 구조요청을 보낸 것이었다.
헌데 방주(幇主)라니?
그렇다면 금의노인은 호북제일(湖北第一)의 방파인
천산방(天山幇)을 이끌고 있는 대파일섬혼(大破一閃魂) 좌무기(佐武起)였단 말인가?
겨우 명맥(名脈)만 유지하던 천산방을 약관(弱冠)의 나이에 물려받아
당금의 대파(大破)로 키워 놓은 바로 장본인,
그가 자랑하는 대파삼십육필살도법(大破三十六必殺刀法)은
무림의 일절(一絶)로 꼽힐 정도로 그는 도(刀)의 대가(大家)였다.
이때 창조오신원을 일견한 좌무기는
단번에 그들이 진세(陣勢)에 갇혀 있음을 간파했다.
허나 그런 좌무기로서도 진세를 단번에 파해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한편 창조오신원은 좌무기를 외쳐불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만 다급한 나머지 오송학을 애절하게 외쳐부르기 시작했다.
"노신선님! 제발 우리를 그만 구해 주십시요!"
'노신선?'
오송학은 일시 의아한 심정이었으나 이내 퍼뜩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보니 저들은 진법에 너무 놀란 나머지 나를 노신선으로 착각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어디 늙은이 행세를 한 번 해볼까?'
그는 가느다란 미소를 피워 물며 녹상아의 귀에 입을 대고
무슨 말인가 몇 마디 나직이 속삭였다.
"어머..!"
녹상아의 귀여운 얼굴이 노을빛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오송학은 그녀를 향해 눈을 한 번 찡긋해 보인 후 창조오신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절대오추원, 나는 약속대로 너희들을 살려주겠다."
순간 창조오신원은 일제히 오송학 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노신선, 저희들 창조오신..아니, 절대오추원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빨리 좀 살려 주십시오! 이러다 물에 빠져 죽겠습니다!"
마를대로 마른 맨 땅바닥을 물에 빠져 죽겠다 하며 허우적대는 그들의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오송학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몇 차례 손을 휘저어 팔괘수문진을 풀어 주었다.
창조오신원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이때 대파일섬혼 좌무기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우둔한 놈들, 어린놈에게 당해도 철저히 당했군!'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들을 향해 냉엄한 노갈을 터뜨렸다.
"순찰오당주, 이 어린 꼬마 놈이 너희들이 말한 노신선이냐?"
그의 노갈에 창조오신원은 일제히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임일추가 그와 오송학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며 쩔쩔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방주님..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이분 노신선께선 공청석유에 목욕하셨을 뿐만 아니라 천년설연실을 식사 삼아 잡수셨으며.."
임일추는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오송학이 한 말을 살까지 붙여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좌무기는 아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천하의 못난 놈들! 이런 것들을 무공만 믿고 보냈으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창조오신원의 얘기를 듣고 있던 그의 입에서
돌연 싸늘한 호통성이 터져나왔다.
"잔소리 말고 어서 저놈을 포위해라!"
순간 창조오신원의 안색이 창백하게 돌변했다.
"방.. 방주님! 아니됩니다!"
"저...저분들이 노하셨다가는 큰일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 천산방이 망할지도 모릅니다."
좌무기의 입에서 버럭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 나서기 싫으면 그만 입다물고 구경이나 하고 있거라!"
창조오신원은 좌무기의 노화가 극에 달한 느끼고는
찔끔하여 슬금슬금 한 옆으로 물러섰다.
좌무기가 다시 황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저들을 포위해라!"
"복명!"
황의인들이 일제히 우렁찬 외침을 터뜨리며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이다.
"흐흐. 천산방주, 보물을 혼자 독차지하겠다는 말이오?
우리 해룡방(海龍幇)도 한몫 끼워 주시구료."
휙! 휙!
한 줄기 음산한 음성과 함께 한 무리의 청영(靑影)이
북쪽 숲으로부터 솟구쳐 나왔다.
오른손에 족히 천근(千斤)은 됨직한 묵직한 방천화극(榜天火戟)을 거머쥔
사십대 묵의중년인(墨衣中年人)을 중심으로 한 이십여 명의 청의인(靑衣人)들이었다.
그들의 앞가슴엔 하나같이 적색(赤色) 문양(文樣)의 용(龍)이 한 마리씩 수놓아져 있었는데..
청의인들은 물 속에서 쓰는 병기인 호미 모양의 분수자(分水 )를 어깨에 하나씩 메고 있었다.
좌무기의 얼굴에 당혹의 기색이 스쳤다.
'으음..골치 아픈 놈들이 나타났구나!'
그렇다.
해룡방은 녹림(綠林)의 한 방파로써,
비록 세력은 녹림수로연맹(綠林水路聯盟)의
백분지일(百分之一)도 채 안되는 규모이나
녹림수로연맹조차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단체였다.
자신들이 일단 피해를 받았다 하면
최후의 일인(一人)이 남을 때까지 죽음을 불사하고 보복을 하고야 마는
피(血)로써 단결된 방파였던 것이다.
그리고 묵의중년인은 바로 독심흑룡(毒心黑龍) 여금홍(余金虹)이라는 자였다.
그는 해룡방 내의 서열(序列) 삼위(三位)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서,
한 번 마음먹은 일 중 성사되지 않은 일이 없고
그의 눈 밖에 난 사람 중 살아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잔혹한 독심(毒心)의 소유자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허헛..그렇다면 우리 개방도 한 몫 끼워 주시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마의(麻衣) 차림의 늙은 거지를 선두로
일단의 거지떼가 우르르 장내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렇다.
스스로 천하제일방파(天下第一幇派)라 저처하는 개방의 출현이었다.
'으음.. 개방장로 백결신개까지 한옥비차를 노리고 있었다니..'
대파일섬혼 좌무기가 내심 침음성을 발했다
. 허나 그의 안색은 채 일각도 지나기 전에 다시 일변했다.
슈슉! 슉!
일진의 거센 파공성을 몰고 또 다시 삼인(三人)의 인물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 때문이었다.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헉! 저...저들은...?"
"사혼(四魂) 중 삼혼(三魂)이다!"
나타난 삼인 중에 두 사람은 바로 시계명과 소소실혼이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시체를 보듯 밀납처럼 창백한 안색에 뼈만 남은 듯
몰골이 앙상한 흑의인(黑衣人)이었다.
흑의인은 다름 아닌 구지추혼(九指追魂) 반강(潘岡)이었다.
무적패혼 형무명이 신비살수 사신도혼(死神盜魂)에게 목숨을 잃음으로 하여
이제는 사혼이 아닌 삼혼이 되어버린 그들,
그들이 한꺼번에 이자리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한편,
오송학은 시계명과 소소실혼까지 나타나자 내심 기막힌 심정이었다.
'저 자들을 여기서 또 만나는군
. 하여간에 이 많은 인물들이 다 보물에 미친 자들이라니 기막힐 노릇이다.
그나저나 저 자들이 나를 몰라봐야 할텐데...'
삼혼이 사람들 사이를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걷듯 헤집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인 행동이었다.
'제기랄...저 두 노괴(老怪)가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힘으로 이 난국을 모면하기란 불가능한 일..계획대로 밀도 나갈 수밖에 없다!'
모종의 결심을 굳힌 오송학은 유유자적하는 자세로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던 녹상아의 입가에도 생글생글 미소가 피어올랐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삼혼은 어느덧 삼 장여 앞까지 다가들고 있었다.
이때 돌연,
휘익!
해룡방의 독심흑룡 여금홍이 방천화극을 비껴들고 삼혼의 앞을 불쑥 막아섰다.
순간 사태를 주시하던 천산방주 대파일섬혼과 개방의 백결신개도
번뜩 신형을 날려 삼혼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순 장내의 분위기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팽팽히 고조되었다.
삼혼이 어이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연후 시계명이 경멸의 미소를 베어물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물러서라!"
그러자 독심흑룡이 방천화극을 고쳐 잡으려 안색을 굳혔다.
"본방(本幇)이 이 일에 끼어든 이상은 절대 중도에 포기하지 않소.
아무리 삼혼이라 하나 본방과 불편한 관계를 맺을 의향은 없으리라 믿소만.."
이중의 효과를 노린 말이었다.
삼혼은 물론 천산방주 대파일섬혼과 개방의 백결신개도
이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서 물러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소소실혼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괴소는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크크크크...! 노부들 삼혼은 이 일에 힘을 합치기로 했다.
노부들이 힘을 합친 이상벽라천군 금무천도 노부들을 을 수 없다.
하물며 도적질이나 일삼는 네놈들 해룡방이 감히 노부들을 막겠다는 것이냐?"
독심흑룡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면, 세 분께선 천산방은 물론 개방까지도 안중에 없다 이말이오?"
은연중에 개방과 천산방을 경동시키려는 의도,
가히 독심흑룡다운 심계(心計)였다.
그러한 의도를 알아차린 소소실혼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이다.
구지추혼 반강이 먼저 싸늘한 노갈을 터뜨렸다.
"간사한 놈! 우선 네놈부터 죽이고 볼일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오른손이 독심흑룡을 향해 맹렬히 떨쳐졌다.
슈파악!
순간 독심흑룡은 안색을 일변시키며
자신을 향해 몰아쳐 오는 일진의 장력을 향해 방천화극을 맞받아쳤다.
퍼펑!
"윽.."
한 소리 폭음과 함께 독심흑룡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토해졌다.
그는 아직 구지추혼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재차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구지추혼을 향해 덮쳐갔다.
우우우웅!
때를 같이 해서 천산방주 대파일섬혼과 개방의 백결신개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해 각각 무기를 뽑아 들었다.
스릉!
바로 그때다.
"멈추어라!"
은은한 노기가 서린 한 줄기 낭랑한 호통성이 장내를 진동시켰다.
그 호통성엔 실로 어마어마한 공력이 실려 있었는지라
장내의 인물들 중 공력이 다소 약한 자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털썩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욱!"
"헉!"
막 일전을 벌이려던 삼혼과 독심흑룡, 대파일섬혼, 백결신개 등은 물론
장내의 모든 인물들도 예외없이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호통성이 들려 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파고 든 것은 한 명의 더벅머리 소년이었다.
바로 한옥비차를 갖고 있는 주인공인 오송학이었다.
중인들의 눈에 하나같이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저 어린 녀석의 공력이 이토록 심후할 줄이야!'
의혹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쌍방이 서로 싸우다 보면 그만큼 오송학의 입장에서는
이곳을 벗어나기가 수월하지 않겠는가?
허나 정작 오송학의 생각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한옥비차이지
서로가 죽음을 불사한 싸움을 벌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때 오송학이 옆의 녹상아를 돌아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쯧쯧...여보, 마누라, 모처럼 이백 년만에 세상 구경 좀 하려고 나왔는데
이거 아이들 등살에 어디 구경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소?"
"누가 아니래요. 영감, 이백 년 전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지는 않았지요."
한숨까지 내쉬며 맞장구치는 녹상아의 얼굴빛이 너무나 진지하다.
그 순간 장내는 순식간에 쥐죽은듯이 조용해지고 말았다.
이백 년만이라니..?
하면 저 두 어린 소년 소녀가 기실은 이백살이 넘은
전대(前代)의 절정고인들이란 말인가?
중인들은 놀란 얼굴로 오송학과 녹상아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오송학이 내심의 울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다.
"어이구! 여보, 마누라, 우리 저 똥오줌 못가리는 것들을 아예 싹 쓸어버립시다."
"에이그.. 영감은 참! 그렇게 하면 저 애들과 똑같아지는 거예요.
나이 값을 하셔야지..이백 칠십 살 먹은 나보다도 못하시니.. 언제 철이 드실려우..?"
녹상아는 딱하다는 듯 혀까지 끌끌 찼다.
그때 누가가 작은 소리로 내뱉듯 소리쳤다.
"미쳤군...!"
순간 오송학의 고개가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홱 돌려졌다
. 그런 그의 두 눈에선 살기 어린 노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방금 입을 놀린 놈이 네녀석이렸다!"
그의 시선은 청의를 걸친 해룡방의 한 인물을 향해 던져지고 있었다.
청의인은 오송학의 살기에 찬 시선을 받자 흠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송학은 다시 녹상아를 돌아보며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것 보구료. 마누라, 애들은 본래 지나치게 곱게 다루면 위아래도 못가리는 법이오
. 우선 저놈에게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장유지도(長幼之道)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오."
"그럼 영감..너무 심하게 하지말고 적당히 위엄을 보여주세요."
녹상아의 말이 채 끝나기고 전에 오송학은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머리 위로 가볍게 손을 한 번 흔들어보였다.
순간 장내의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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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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