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5년 10월 5일 포스코 비리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이상득 전 의원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
여든의 6선(選) 정치인인 이상득(李相得) 전 의원이 다시 검찰에 불려갔다. 2013년 9월 만기 출소 후 2년1개월 만에 법적 심판대에 올랐다. 측근의 부축을 받고 걸어가는 얼굴은 지치고 병들어 보였다. 그는 “포스코 협력사의 돈이 지역구 사무소로 흘러들어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왜 여기서 조사받아야 하는지 모르고 왔다”고 말했다.
검찰에 따르면 정준양 전 포스코그룹 회장 선임에 그가 개입했고, 그 대가로 그와 직간접 관련이 있는 포스코 협력사들에 각종 특혜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은 자신에게 또다시 닥친 비극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했지만 모를 리가 없다. 얼마나 권력이 비정한지는 권력을 향유한 자들만 아는 영역이다. 그래서 권력의 역설이란 말이 존재한다. 퇴임 후 영어(囹圄)의 몸이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던진 전직 대통령들을 보며 권력의 비정함을 이미 느꼈는지 모른다.
권력의 가장 높은 정점에서 내려오는 순간, 자신에게 닥칠 비극을 알기에 권력을 계속 잡고 싶어 한다. 기자가 아는 한, 6선의 전직 국회부의장인 그는 그토록 7선을 꿈꾸었고 국회의장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권력 유지의 욕망이 발목을 잡았고, 자신과 측근들의 비리 속에 빠져버렸다.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을 거치며 지난한 권력투쟁에서 획득된 촘촘한 인맥군(群)은 어디에 숨었는지 안 보인다.
한때 그는 청와대·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기무사 등 내로라하는 권력기관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정보를 입수했겠지만 이제는 그의 가혹한 운명을 두고 권력기관이 또 다른 권력자에게 정보보고를 하는 처지가 됐다.
검찰에 따르면 정준양 전 포스코그룹 회장 선임에 그가 개입했고, 그 대가로 그와 직간접 관련이 있는 포스코 협력사들에 각종 특혜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은 자신에게 또다시 닥친 비극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했지만 모를 리가 없다. 얼마나 권력이 비정한지는 권력을 향유한 자들만 아는 영역이다. 그래서 권력의 역설이란 말이 존재한다. 퇴임 후 영어(囹圄)의 몸이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던진 전직 대통령들을 보며 권력의 비정함을 이미 느꼈는지 모른다.
권력의 가장 높은 정점에서 내려오는 순간, 자신에게 닥칠 비극을 알기에 권력을 계속 잡고 싶어 한다. 기자가 아는 한, 6선의 전직 국회부의장인 그는 그토록 7선을 꿈꾸었고 국회의장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권력 유지의 욕망이 발목을 잡았고, 자신과 측근들의 비리 속에 빠져버렸다.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을 거치며 지난한 권력투쟁에서 획득된 촘촘한 인맥군(群)은 어디에 숨었는지 안 보인다.
한때 그는 청와대·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기무사 등 내로라하는 권력기관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정보를 입수했겠지만 이제는 그의 가혹한 운명을 두고 권력기관이 또 다른 권력자에게 정보보고를 하는 처지가 됐다.
항상 권력 편에 서는 검찰은, 이 전 의원과 정준양 전 회장을 동시 구속할지 여론을 저울질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역전은 이명박(李明博) 정부 초기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6·17대 국회에서 이 전 의원과 의정활동을 같이한 경제관료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은 이런 말을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형님 정치’라는 말이 회자했잖아요. ‘보스 정치’가 가신(家臣) 패거리로 뭉쳤다면 ‘형님 정치’는 독특했어요. 같은 선상에서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를 ‘봉하대군’이라 부르며 ‘형님 정치’를 비꼬았으나 감히 이 전 의원과 경중(輕重)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6선의 경륜과 권력 엘리트끼리 종적 횡적으로 얽힌 관계망에서 (노건평은) 상대가 안 됐던 것이죠.”
지난 정권에서 회자한 ‘형님 인사’ ‘형님 예산’ ‘형님 공천’이라는 조어(造語)는 그를 둘러싼 현실 정치의 우월함을 방증하는 말이었다.
전직 국회의원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만약 그분이 동생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대통령의 기대대로) 정계를 떠났더라면 상황이 지금과 달라졌을까요? 어쩌면 지금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요. 권력이란, ‘우리 편에게는 무한한 관용과 아량을, 다른 편에게는 추상같은 엄격과 편협한’ 법이니까요.”
어쩌면 권력의 부나비들이 그를 가만 놔뒀을 리가 없다. 부나비들의 등쌀에 쫓겨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까.
포항의 3대 권력
“몇 년 전만 해도 ‘형님 정치’라는 말이 회자했잖아요. ‘보스 정치’가 가신(家臣) 패거리로 뭉쳤다면 ‘형님 정치’는 독특했어요. 같은 선상에서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를 ‘봉하대군’이라 부르며 ‘형님 정치’를 비꼬았으나 감히 이 전 의원과 경중(輕重)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6선의 경륜과 권력 엘리트끼리 종적 횡적으로 얽힌 관계망에서 (노건평은) 상대가 안 됐던 것이죠.”
지난 정권에서 회자한 ‘형님 인사’ ‘형님 예산’ ‘형님 공천’이라는 조어(造語)는 그를 둘러싼 현실 정치의 우월함을 방증하는 말이었다.
전직 국회의원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만약 그분이 동생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대통령의 기대대로) 정계를 떠났더라면 상황이 지금과 달라졌을까요? 어쩌면 지금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요. 권력이란, ‘우리 편에게는 무한한 관용과 아량을, 다른 편에게는 추상같은 엄격과 편협한’ 법이니까요.”
어쩌면 권력의 부나비들이 그를 가만 놔뒀을 리가 없다. 부나비들의 등쌀에 쫓겨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까.
포항의 3대 권력
![]() |
한나라당 사무총장 시절의 이상득 의원. 2004년 3월 25일 주요당직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포스코 비리 의혹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검찰수사에 상상력을 보태면 이 전 의원은 포항을, 그리고 포스코를 사유화(私有化)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고(故) 박태준(朴泰俊) 포스코 명예회장이 떠나간 마당에 ‘포스트 박태준’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세계적인 철강회사인 포스코가 한국 경제에 차지하는 위상, 포스코 본사가 포항이라는 점, 6선의 포항 국회의원, 대통령의 형이란 사실을 떠올리면 이명박 정권 초기 그 꿈은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전 의원은 “측근들이 먹고살게 외주업체를 하도록 도와줬을 뿐 직접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닌데 검찰이 억지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반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력가인 이 전 의원이 뭐가 아쉬워 이권을 탐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측근들의 자력갱생을 위해 잠시 비리를 눈감아줬던 것일까.
‘정준양의 5년’을 지내며 포스코는 재무구조가 극도로 약화돼 계열사 41곳 중 44%(18곳)가 자본잠식 상태고, 주가는 작년의 반 토막인 16만원대로 내려앉았다. 10여 년 전인 2004년에 거래되던 수준이다.
이번 사건을 잠시 들여다보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포스코 정 전 회장의 선임 과정에 이 전 의원의 개입 정황을 포착했으며, 포스코가 1조4000억원짜리 신제강 공장을 짓다가 2009년 군부대의 제지로 중단되자 이 전 의원이 직접 나서 도와준 정황 등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은 “측근들이 먹고살게 외주업체를 하도록 도와줬을 뿐 직접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닌데 검찰이 억지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반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력가인 이 전 의원이 뭐가 아쉬워 이권을 탐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측근들의 자력갱생을 위해 잠시 비리를 눈감아줬던 것일까.
‘정준양의 5년’을 지내며 포스코는 재무구조가 극도로 약화돼 계열사 41곳 중 44%(18곳)가 자본잠식 상태고, 주가는 작년의 반 토막인 16만원대로 내려앉았다. 10여 년 전인 2004년에 거래되던 수준이다.
이번 사건을 잠시 들여다보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포스코 정 전 회장의 선임 과정에 이 전 의원의 개입 정황을 포착했으며, 포스코가 1조4000억원짜리 신제강 공장을 짓다가 2009년 군부대의 제지로 중단되자 이 전 의원이 직접 나서 도와준 정황 등을 찾아냈다고 한다.
검찰은 “정 전 회장을 개인적으로 도와주고 그 대가로 일감 특혜를 받은 만큼 뇌물죄 적용이 가능해 보인다”고 했다. 이 전 의원은 측근들을 통해 포스코에서 일감을 특혜 수주해 30여억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 전 의원의 측근인 박모(58)씨가 포스코 정 전 회장의 특혜로 외주업체를 따낸 뒤 받은 15억여원의 수익을 이 전 의원의 지역구 관리 비용으로 쓴 정황을 확보했다. 박씨는 이 전 의원이 6선을 하는 내내 지역구인 포항사무소 사무국장 등을 맡은 인물. 박씨는 포스코의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15억여원의 이익을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고 왜 이 전 의원의 포항사무소 운영비로 썼을까. 자기 돈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대구 《매일신문》 박병선 기자에 따르면, 포항에는 3대 권력이 있다고 한다. 이상득, 포스코, 교회를 말한다. 포항에 거주하는 월급쟁이 상당수는 포스코와 계열사, 협력사에 근무하고 있다.
검찰은 이 전 의원의 측근인 박모(58)씨가 포스코 정 전 회장의 특혜로 외주업체를 따낸 뒤 받은 15억여원의 수익을 이 전 의원의 지역구 관리 비용으로 쓴 정황을 확보했다. 박씨는 이 전 의원이 6선을 하는 내내 지역구인 포항사무소 사무국장 등을 맡은 인물. 박씨는 포스코의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15억여원의 이익을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고 왜 이 전 의원의 포항사무소 운영비로 썼을까. 자기 돈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대구 《매일신문》 박병선 기자에 따르면, 포항에는 3대 권력이 있다고 한다. 이상득, 포스코, 교회를 말한다. 포항에 거주하는 월급쟁이 상당수는 포스코와 계열사, 협력사에 근무하고 있다.
포항은 또 도시 규모에 비해 대형교회가 많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의 영향력은 포스코는 물론, 포항의 재계와 교계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는 3대 포항 권력의 몸통이자 종점이었다.
6선의 24년을 통해 형성된 이 전 의원과 측근들의 인맥은 이 지역 법조환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포항 출신 법조인을 통해 사법적 헤게모니를 장악해 법망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면식 있는 법조인과의 주관적 의리를 중시하고, 지역 내 법조 엘리트들과 배타적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을 수도 있다.
현재 포항은 2012년 이 전 의원의 정계은퇴로 권력의 축이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빈자리를, 갑작스런 권력의 공동화(空洞化)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빠져나가면 채워지기 마련인 것이 인간사회다.
6선의 24년을 통해 형성된 이 전 의원과 측근들의 인맥은 이 지역 법조환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포항 출신 법조인을 통해 사법적 헤게모니를 장악해 법망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면식 있는 법조인과의 주관적 의리를 중시하고, 지역 내 법조 엘리트들과 배타적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을 수도 있다.
현재 포항은 2012년 이 전 의원의 정계은퇴로 권력의 축이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빈자리를, 갑작스런 권력의 공동화(空洞化)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빠져나가면 채워지기 마련인 것이 인간사회다.
포항은 최근 10년 사이 지역사회에서 익명의 존재였던 외지 출신 지식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부상하고, 젊고 지연·학연에 초연한 사법 엘리트들이 새롭게 유입되면서 토착·토호 세력의 입김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 결과, 포항이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인사 청탁과 ‘이력서 1000통’ 話法
인사 청탁과 ‘이력서 1000통’ 話法
![]() |
당3역만 5번 거친 이상득 전 의원. 원내총무 시절인 1998년 4월 당시 사무총장인 서청원 의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기자는 야당 시절부터 이 전 의원을 가까이에서 취재해 왔다. 그는 자수성가한 기업인 출신답게 자기 주관이 뚜렷했고 검소했다. 기자들에게 가끔 밥도 사곤 했지만 정도를 넘어서는 법이 없었다. 농담이나 빈말을 건네는 경우도 드물어 정치인답지 않게 가볍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 기자들도 어려워하고 조심스러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자가 이상득의 페르소나(가면)만을 봤다고 해도, 오래전 그에게 가졌던 호감마저 뭉개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언젠가 ‘형님 인사’ 논란이 있을 때였다. ‘만사형통’이니 ‘영포라인’이니 하는 말들이 회자할 때다. 그는 연일 야당과 언론의 십자포화를 받고 있었다. 포항~울산 고속도로 예산을 두고 ‘형님 예산’이라 공격받자 경북도청이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공격받는 ‘형님’을 보호하려는 대구·경북 의원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권력의 정점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골치가 아파서인지 자원외교를 한답시고 자주 국회를 비웠다.
그 무렵 기자는 그와 접촉을 시도했다. 여러 경로로 만나자는 청을 넣었으나 뜻밖에도 성사되지 않았다. “만나지 않겠다”는 거절의 답신도 못 받았다. 일종의 무대응 내지 무시였다. 그의 보좌관은 “정치 현안이나 대통령과의 관계를 물을 게 뻔해서”라며 “많은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만 했다.
그러고 보면 기자가 기억하는 한, 6선을 거치며 이렇다 할 프라이버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럴까. 그는 정치적 상상력이나 정치적 수사(修辭)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항상 직설적이며 내지르듯 말하고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단적인 예가 ‘이력서 1000통’ 청탁 논란이다.
지난 2008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 하나 소개했으면 사람이 아니다. (동생이) 대통령 되면서 (내게) 들어온 부탁이 1000건은 된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소망)교회를 못 간다. 이력서가 들어와서”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말은 후폭풍을 낳았다. 인사 개입의 무관함을 항변하는 말이었지만 ‘이력서 1000통’은 그가 대통령 다음 가는 권력자임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언젠가 ‘형님 인사’ 논란이 있을 때였다. ‘만사형통’이니 ‘영포라인’이니 하는 말들이 회자할 때다. 그는 연일 야당과 언론의 십자포화를 받고 있었다. 포항~울산 고속도로 예산을 두고 ‘형님 예산’이라 공격받자 경북도청이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공격받는 ‘형님’을 보호하려는 대구·경북 의원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권력의 정점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골치가 아파서인지 자원외교를 한답시고 자주 국회를 비웠다.
그 무렵 기자는 그와 접촉을 시도했다. 여러 경로로 만나자는 청을 넣었으나 뜻밖에도 성사되지 않았다. “만나지 않겠다”는 거절의 답신도 못 받았다. 일종의 무대응 내지 무시였다. 그의 보좌관은 “정치 현안이나 대통령과의 관계를 물을 게 뻔해서”라며 “많은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만 했다.
그러고 보면 기자가 기억하는 한, 6선을 거치며 이렇다 할 프라이버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럴까. 그는 정치적 상상력이나 정치적 수사(修辭)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항상 직설적이며 내지르듯 말하고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단적인 예가 ‘이력서 1000통’ 청탁 논란이다.
지난 2008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 하나 소개했으면 사람이 아니다. (동생이) 대통령 되면서 (내게) 들어온 부탁이 1000건은 된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소망)교회를 못 간다. 이력서가 들어와서”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말은 후폭풍을 낳았다. 인사 개입의 무관함을 항변하는 말이었지만 ‘이력서 1000통’은 그가 대통령 다음 가는 권력자임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이 전 의원이 한나라당 당3역으로 있을 때 그를 지근에서 보좌했던 A씨를 만났다. 그에게 ‘이력서 1000통’ 얘기를 꺼냈더니 “틀림없이 그만큼의 이력서를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력서를 건네는 이의 면전에서 면박을 주고 되돌려줄 스타일이 아니다”는 얘기였다.
“그분은 자신의 권력을 ‘만능’으로 이용할 만큼 경직된 권력주의자가 아니었어요. 아랫사람에게 설령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면전에서 잘 참는 편입니다. 대범하다기보다 소심한 성격에 가까워 자기 나름대로 크로스 체크하고 천거했을 겁니다.”
그는 ‘인사 청탁’과 관련된 오래된 기억을 들려줬다.
“1998년쯤의 일로 기억이 됩니다. 한나라당이 여당에서 야당이 된 뒤 당에 파견된 전문위원이 7명이 있었습니다. 보통 정부부처에서 파견된 전문위원들은 당에서 일정 기간 ‘노역(勞役)’을 한 뒤 다시 정부로 승진해 되돌아가는 자리지요.
산자부 장관 출신의 윤진식 전 의원이나 윤증현 기획재정부 전 장관도 YS정부 때 재무부에서 당 전문위원으로 파견됐다가 승진해 재무부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두 사람 역시 당 전문위원 시절, 이 전 의원과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죠.
그러나 정권이 DJ로 넘어간 뒤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됐어요. 그때 그분이 원내총무직을 맡았는데 전문위원 뒤를 끝까지 챙기려고 노력했어요. 당시 카운터 파트너였던 민주당 한화갑 총무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결국 7명 모두 정부부처로 되돌아갈 수 있었지요.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드시 챙겨야 할 인사는 직접 나서서 어떤 방식으로든 관철시킨다는 얘기였다.
그는 6선을 거치며 고위당직에 오래 머물러서인지 그를 기억하는 이가 많았다. 또 다른 전직 당료 B씨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언젠가 이 전 의원이 정부부처 고위관료에게 거는 인사청탁 전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볼 때, 이런 사람이다. 또 주위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러니 써볼 만한 사람이다. 그가 일할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식이었어요. 일종의 다면평가 방식으로, 자신의 평가와 주위의 평을 모두 언급한 뒤 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는데, 결국 정부부처 산하 공기업에 취업했고 그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고위직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가 불문곡직하고 단칼에 모든 인사 청탁을 끊었을 리 만무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동생이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대선 과정에서 고생한 이들을 매몰차게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챙겨도 다 챙길 수 없는 게 인사고,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형님 인사’는 비극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한 번에 휴지 두 장을 쓰지 말라”
이 전 의원은 2012년 7월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과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각각 3억원씩 모두 6억원을 받은 혐의와 코오롱 그룹으로부터 1억5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그분은 자신의 권력을 ‘만능’으로 이용할 만큼 경직된 권력주의자가 아니었어요. 아랫사람에게 설령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면전에서 잘 참는 편입니다. 대범하다기보다 소심한 성격에 가까워 자기 나름대로 크로스 체크하고 천거했을 겁니다.”
그는 ‘인사 청탁’과 관련된 오래된 기억을 들려줬다.
“1998년쯤의 일로 기억이 됩니다. 한나라당이 여당에서 야당이 된 뒤 당에 파견된 전문위원이 7명이 있었습니다. 보통 정부부처에서 파견된 전문위원들은 당에서 일정 기간 ‘노역(勞役)’을 한 뒤 다시 정부로 승진해 되돌아가는 자리지요.
산자부 장관 출신의 윤진식 전 의원이나 윤증현 기획재정부 전 장관도 YS정부 때 재무부에서 당 전문위원으로 파견됐다가 승진해 재무부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두 사람 역시 당 전문위원 시절, 이 전 의원과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죠.
그러나 정권이 DJ로 넘어간 뒤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됐어요. 그때 그분이 원내총무직을 맡았는데 전문위원 뒤를 끝까지 챙기려고 노력했어요. 당시 카운터 파트너였던 민주당 한화갑 총무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결국 7명 모두 정부부처로 되돌아갈 수 있었지요.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드시 챙겨야 할 인사는 직접 나서서 어떤 방식으로든 관철시킨다는 얘기였다.
그는 6선을 거치며 고위당직에 오래 머물러서인지 그를 기억하는 이가 많았다. 또 다른 전직 당료 B씨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언젠가 이 전 의원이 정부부처 고위관료에게 거는 인사청탁 전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볼 때, 이런 사람이다. 또 주위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러니 써볼 만한 사람이다. 그가 일할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식이었어요. 일종의 다면평가 방식으로, 자신의 평가와 주위의 평을 모두 언급한 뒤 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는데, 결국 정부부처 산하 공기업에 취업했고 그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고위직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가 불문곡직하고 단칼에 모든 인사 청탁을 끊었을 리 만무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동생이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대선 과정에서 고생한 이들을 매몰차게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챙겨도 다 챙길 수 없는 게 인사고,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형님 인사’는 비극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한 번에 휴지 두 장을 쓰지 말라”
이 전 의원은 2012년 7월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과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각각 3억원씩 모두 6억원을 받은 혐의와 코오롱 그룹으로부터 1억5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혐의가 모두 인정돼 징역 2년(추징금 7억5750만원)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김찬경 회장 수수 건은 무죄가 인정돼 징역 1년2개월(추징금 4억5750만원)로 감형된 뒤 대법원에 상고했었다.
그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정치권 누구도, 여권 내부, 그가 오래 몸담았던 대구·경북 정치인들조차 저축은행의 집요한 이권청탁 공세를 거절했을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당장 동생을 대통령에 당선시켜야 하는 과업을 당시 떠맡고 있었다. 사정당국의 한 고위 인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코오롱 사장 출신의 수십 억대 재력가지만 속된 말로 정치인은 자기 돈을 쓰지 않는 법이죠. 돈 안 쓰는 정치를 해서가 아니라 돈을 쓰지 않아도 줄을 대고 싶어 하는 기업인들이 돈을 싸들고 찾아왔을 겁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돈을 건네는 사람은 대개가 채권자의 위치에 서게 마련이죠.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돈을 받으면 채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정치의 굴레입니다.”
하지만 기자가 아는 ‘과거의’ 이상득은 이권에 개입하며 금력과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니다. 그는 빈손으로 성공한 이답게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으며 자신의 사치와 안위에 있어서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그가 걸어온 삶을 잠시 되짚어보자. 경북 포항에서 목부(牧夫)의 아들로 태어난 이 전 의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앞에서 풀빵 장사를 해야 할 만큼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렸지만 낮에는 과일 장사나 봉투 접기로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고교는 야간의 동지상고를 다녔다.
그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정치권 누구도, 여권 내부, 그가 오래 몸담았던 대구·경북 정치인들조차 저축은행의 집요한 이권청탁 공세를 거절했을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당장 동생을 대통령에 당선시켜야 하는 과업을 당시 떠맡고 있었다. 사정당국의 한 고위 인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코오롱 사장 출신의 수십 억대 재력가지만 속된 말로 정치인은 자기 돈을 쓰지 않는 법이죠. 돈 안 쓰는 정치를 해서가 아니라 돈을 쓰지 않아도 줄을 대고 싶어 하는 기업인들이 돈을 싸들고 찾아왔을 겁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돈을 건네는 사람은 대개가 채권자의 위치에 서게 마련이죠.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돈을 받으면 채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정치의 굴레입니다.”
하지만 기자가 아는 ‘과거의’ 이상득은 이권에 개입하며 금력과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니다. 그는 빈손으로 성공한 이답게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으며 자신의 사치와 안위에 있어서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그가 걸어온 삶을 잠시 되짚어보자. 경북 포항에서 목부(牧夫)의 아들로 태어난 이 전 의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앞에서 풀빵 장사를 해야 할 만큼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렸지만 낮에는 과일 장사나 봉투 접기로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고교는 야간의 동지상고를 다녔다.
육사를 중도 포기한 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뒤에는 4년 내내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를 버는 등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다. 코오롱에 공채 1기로 입사했지만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아 밤에는 학생을 가르치는 입주 가정교사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정치인보다는 기업가라는 이미지가 더 강해”
“정치인보다는 기업가라는 이미지가 더 강해”
![]() |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시절의 이상득 당시 국회부의장. 설을 맞아 고향인 포항시 흥해읍 덕실마을을 방문, 주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코오롱에서 처음 발령을 받은 곳은 부산 영업소였는데 영업에서 탁월함을 보여 입사한 지 18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영업이사에 오른 뒤에는 1년마다 승진했다.
형이 입사한 코오롱과 동생이 입사한 현대건설을 1960년대 시각에서 비교하면, 코오롱이 훨씬 큰 기업인지 모른다. 신소재 섬유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섬유산업이 크게 각광받던 시기다. 나중 기업 규모가 역전됐지만 전문경영인으로 그의 위치는 확고했다. 그는 동생보다 먼저 13대 때 민정당에 입당해 정치의 길에 들어섰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14대 때 민자당 전국구로 배지를 달았다.
이 전 의원 주변에는 잘나가는 ‘육사 14기’ 동기들이 병풍처럼 포진해 있었다. 그의 정치 입문도 육사 동기인 이춘구(李春九) 민자당 대표가 견인한 것이다. 그러나 기업가 출신인 만큼 정치를 잘 몰랐고 정치적 감각도 세련되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뿌리인 대구·경북에서도 비주류에 가까웠다. 한나라당 당3역 시절, 그를 지근에서 보좌했다는 A씨의 이야기다.
“정치인보다는 기업가라는 이미지가 더 강했어요. 당직을 맡았을 때, 당 사무처 직원들에게 한 번에 휴지 두 장을 쓰지 말라고 했고, 직접 사무실 소등(消燈) 여부를 챙길 정도로 철두철미했어요. 그러나 정치는 거의 몰랐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주요당직자회의를 하면, 기자들 앞에서 보좌관(박영준 전 지경부 차관)이나 당 사무처 보좌역이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읽어 내려갔어요.
형이 입사한 코오롱과 동생이 입사한 현대건설을 1960년대 시각에서 비교하면, 코오롱이 훨씬 큰 기업인지 모른다. 신소재 섬유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섬유산업이 크게 각광받던 시기다. 나중 기업 규모가 역전됐지만 전문경영인으로 그의 위치는 확고했다. 그는 동생보다 먼저 13대 때 민정당에 입당해 정치의 길에 들어섰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14대 때 민자당 전국구로 배지를 달았다.
이 전 의원 주변에는 잘나가는 ‘육사 14기’ 동기들이 병풍처럼 포진해 있었다. 그의 정치 입문도 육사 동기인 이춘구(李春九) 민자당 대표가 견인한 것이다. 그러나 기업가 출신인 만큼 정치를 잘 몰랐고 정치적 감각도 세련되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뿌리인 대구·경북에서도 비주류에 가까웠다. 한나라당 당3역 시절, 그를 지근에서 보좌했다는 A씨의 이야기다.
“정치인보다는 기업가라는 이미지가 더 강했어요. 당직을 맡았을 때, 당 사무처 직원들에게 한 번에 휴지 두 장을 쓰지 말라고 했고, 직접 사무실 소등(消燈) 여부를 챙길 정도로 철두철미했어요. 그러나 정치는 거의 몰랐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주요당직자회의를 하면, 기자들 앞에서 보좌관(박영준 전 지경부 차관)이나 당 사무처 보좌역이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읽어 내려갔어요.
자신의 생각을 보탤 수도 있지만 거의 써준 원고대로 대독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때그때의 즉흥적 정치 감각이 무디다고 할까요? 어찌 보면 보통의 정치인과 달랐습니다. 서로 잘 뭉치는 대구·경북 정치인 사이에서도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TK 출신 중에 군사정부 시절, 잘나가던 정통 관료 출신이 많잖아요. 기업가는 관료와 비교할 때 영원한 ‘을(乙)’의 관계잖아요.”
한나라당 중앙당과 서울시당에서 조직 담당을 오래 맡았던 C씨는 이 전 의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 사무처 직원이 그분께 보고하러 가면, 보고서가 이면지인지 확인부터 했어요. 그 시절, 일부러 이면지를 만들어 보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한나라당이 ‘차떼기 당’으로 전락했던 시절, 천안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자며 당내 반발을 물리치고 성사시켰던 분이 이 전 의원입니다. 그러나 ‘돈은 취하되, 쓰는 것은 인색하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장사꾼이라는 이미지도 있고….”
그의 정치적 무기는 성실이었다. 180cm에 가까운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여기다 체력까지 갖춰 남보다 두 배의 일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음을 터놓는 이들에게 그는 “남자가 밤 12시 전에 집에 들어가면 남자가 아니다”고 말했다곤 한다. 저녁 약속이 없거나 일찍 마치면 곧바로 퇴근하기보다 보좌진과 여의도 포장마차에서 독주를 즐겼고 단골인 롯데호텔 바에서 잔을 기울이곤 했다고 한다.
전날 아무리 취해도 출근 시간은 어김없었다. 당3역을 맡을 당시 오전 7시가 되면 당사(黨舍)로 출근했고 그날그날의 정치 현안과 경제연구소에서 보내준 경제지표를 꼬박꼬박 챙겼다고 한다.
불행의 씨앗 - 형의 공천을 못 막은 동생의 ‘심리적 자리’
한나라당 중앙당과 서울시당에서 조직 담당을 오래 맡았던 C씨는 이 전 의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 사무처 직원이 그분께 보고하러 가면, 보고서가 이면지인지 확인부터 했어요. 그 시절, 일부러 이면지를 만들어 보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한나라당이 ‘차떼기 당’으로 전락했던 시절, 천안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자며 당내 반발을 물리치고 성사시켰던 분이 이 전 의원입니다. 그러나 ‘돈은 취하되, 쓰는 것은 인색하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장사꾼이라는 이미지도 있고….”
그의 정치적 무기는 성실이었다. 180cm에 가까운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여기다 체력까지 갖춰 남보다 두 배의 일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음을 터놓는 이들에게 그는 “남자가 밤 12시 전에 집에 들어가면 남자가 아니다”고 말했다곤 한다. 저녁 약속이 없거나 일찍 마치면 곧바로 퇴근하기보다 보좌진과 여의도 포장마차에서 독주를 즐겼고 단골인 롯데호텔 바에서 잔을 기울이곤 했다고 한다.
전날 아무리 취해도 출근 시간은 어김없었다. 당3역을 맡을 당시 오전 7시가 되면 당사(黨舍)로 출근했고 그날그날의 정치 현안과 경제연구소에서 보내준 경제지표를 꼬박꼬박 챙겼다고 한다.
불행의 씨앗 - 형의 공천을 못 막은 동생의 ‘심리적 자리’
![]() |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리비아를 방문했던 이상득 전 의원이 2010년 7월 13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영포회 의혹과 관련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기자는 《월간조선》 2011년 5월호에 당시 여권 핵심인사의 입을 빌려 ‘MB는 형님 공천에 반대했다!’는 기사를 썼다. 친박(親朴) 인사도 아닌, 친이(親李) 핵심들이 ‘형님 정치’ 청산을 외쳤을 때, 대통령은 형의 공천을 말릴 수 없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아무리 동생이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동생이 형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출마를 강행했고 몇 년 후 형은 사법처리를 받고 말았다.
기자는 이상득·이명박 형제의 ‘심리적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이 전 대통령은 왜 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을까.
사실 권력은 형제간,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하는 법이며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질투는 있는 법이다. ‘인간의 역사와 발전은 형과 아우의 경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저 빈말이 아니다.
형제간 질투는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인류의 집단무의식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흔히 질투에는 두 개의 시선이 있다고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불합리한 질투’, 그리고 형제끼리 자극제가 되어 경쟁하는 ‘합리적인 질투’가 있다. 합리와 불합리한 질투는 서로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 이충우씨와 어머니 채태원씨 사이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손위 누이인 이귀애씨와 남동생 이상필씨는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1930년생인 장녀 이귀선씨는 이 전 대통령(1941년생)과 열 살 이상 터울이 있다. 따라서 아들 3형제(장남은 이상은씨)가 서로 부대끼며 한 공간에서 유년시절을 함께했다.
기자는 2남인 이상득 의원과 3남인 이명박 대통령의 출생순위에 따른 ‘심리적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두 사람은 여섯 살 차이다.
흔히 ‘심리적 둘째’의 성격을 규정짓는 핵심단어는 ‘완벽’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주변 질서가 잘 지켜지기를 바란다. 누군가 튀거나 위계를 거역한다면 용납할 수 없다. 집에 들어갈 때 꼭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사람, 스웨터에서 보푸라기를 손으로 떼는 사람이 ‘심리적 둘째’일 가능성이 크다. 분노에 민감하고 논리적이며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대신 감정을 분출하지 않고 억누르지만 때론 폭발한다.
기자가 2000년대 초·중반 국회 출입 기자 시절 만난 이상득 전 의원은 자기 세계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코오롱 근무 시절, 겪었던 고생담을 곧잘 이야기했다. 고생담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간혹 기자들을 불러 밥을 살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코오롱 시절 이야기를 많이 했다.
기자는 이상득·이명박 형제의 ‘심리적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이 전 대통령은 왜 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을까.
사실 권력은 형제간,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하는 법이며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질투는 있는 법이다. ‘인간의 역사와 발전은 형과 아우의 경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저 빈말이 아니다.
형제간 질투는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인류의 집단무의식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흔히 질투에는 두 개의 시선이 있다고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불합리한 질투’, 그리고 형제끼리 자극제가 되어 경쟁하는 ‘합리적인 질투’가 있다. 합리와 불합리한 질투는 서로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 이충우씨와 어머니 채태원씨 사이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손위 누이인 이귀애씨와 남동생 이상필씨는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1930년생인 장녀 이귀선씨는 이 전 대통령(1941년생)과 열 살 이상 터울이 있다. 따라서 아들 3형제(장남은 이상은씨)가 서로 부대끼며 한 공간에서 유년시절을 함께했다.
기자는 2남인 이상득 의원과 3남인 이명박 대통령의 출생순위에 따른 ‘심리적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두 사람은 여섯 살 차이다.
흔히 ‘심리적 둘째’의 성격을 규정짓는 핵심단어는 ‘완벽’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주변 질서가 잘 지켜지기를 바란다. 누군가 튀거나 위계를 거역한다면 용납할 수 없다. 집에 들어갈 때 꼭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사람, 스웨터에서 보푸라기를 손으로 떼는 사람이 ‘심리적 둘째’일 가능성이 크다. 분노에 민감하고 논리적이며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대신 감정을 분출하지 않고 억누르지만 때론 폭발한다.
기자가 2000년대 초·중반 국회 출입 기자 시절 만난 이상득 전 의원은 자기 세계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코오롱 근무 시절, 겪었던 고생담을 곧잘 이야기했다. 고생담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간혹 기자들을 불러 밥을 살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코오롱 시절 이야기를 많이 했다.
소매상이 되어 국내외로 원사(原絲)를 팔러 다닌 이야기를 즐겨 했다. 기자는 밥상머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다 깜빡 잠이 든 일도 있다. 기자와 가까운 몇몇 정치부 기자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자신도 졸았다고 했다. 그만큼 자신의 경험에 가치부여를 하고 싶었던 사람이 그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야기 도중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입을 쓱 닦곤 했다. 그 휴지는 화장실에서나 쓰는 누루틱틱한 두루마리를 접은 것이었다. 그는 “대중목욕탕에 가서도 수건을 1장만 쓴다”는 이야기를 곧잘 했다. 자수성가한 이가 그렇듯 사적 논리(Private logic)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는 정치적 기교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재산이 수십억원대에 이르는 재력가지만, 손님을 접대할 때는 곰탕으로 대신하고 일식집에서 5명이 회합하면 회를 3인분만 시킨다거나 술은 직접 가져가 술값을 아끼는 유(類)의 일화가 그의 주변에 자주 회자한다.
심리적 둘째와 셋째의 차이
그러나 어느 해인가 정부 과천청사의 한 음식점으로 보건복지부 담당 직원들을 불러 “정책 입안에 도움을 달라”며 불갈비를 대접한 일화도 전해진다. 왜 ‘불갈비’가 공무원 사이에 화제가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건대 돈을 쓸 때와 안 쓸 때를 구분해서 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불갈비는 돈을 쓸 시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선택과 집중을 추구하는 ‘심리적 둘째’는 직장에서 조화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앉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가 가진 완벽주의적 성향은 회계와 관련된 직업에서 유리하다. 무질서하게 흩어진 숫자를 분류하는 일은 그에게 신나는 일이다. 실제로 많은 회계사와 은행원들이 둘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야기 도중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입을 쓱 닦곤 했다. 그 휴지는 화장실에서나 쓰는 누루틱틱한 두루마리를 접은 것이었다. 그는 “대중목욕탕에 가서도 수건을 1장만 쓴다”는 이야기를 곧잘 했다. 자수성가한 이가 그렇듯 사적 논리(Private logic)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는 정치적 기교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재산이 수십억원대에 이르는 재력가지만, 손님을 접대할 때는 곰탕으로 대신하고 일식집에서 5명이 회합하면 회를 3인분만 시킨다거나 술은 직접 가져가 술값을 아끼는 유(類)의 일화가 그의 주변에 자주 회자한다.
심리적 둘째와 셋째의 차이
그러나 어느 해인가 정부 과천청사의 한 음식점으로 보건복지부 담당 직원들을 불러 “정책 입안에 도움을 달라”며 불갈비를 대접한 일화도 전해진다. 왜 ‘불갈비’가 공무원 사이에 화제가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건대 돈을 쓸 때와 안 쓸 때를 구분해서 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불갈비는 돈을 쓸 시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선택과 집중을 추구하는 ‘심리적 둘째’는 직장에서 조화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앉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가 가진 완벽주의적 성향은 회계와 관련된 직업에서 유리하다. 무질서하게 흩어진 숫자를 분류하는 일은 그에게 신나는 일이다. 실제로 많은 회계사와 은행원들이 둘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코오롱 사장 출신의 이 의원은 전문경영인답게 당 살림을 꾸리는 사무총장 역을 두 차례나 맡았다. 또 정책위의장 2회, 원내총무 1회 등을 합치면 당3역만 5번 거쳤다. 그 당시, 기자가 알기로,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구설에 오른 적은 없었다.
이 전 대통령이 위치한 ‘심리적 셋째’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무엇이 다가온다며 두려워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경향이 있다. 느긋하지 못하다.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해 다가올 불안에 대처한다. 예정된 일이 지연되면 참을 수 없다.
이 전 대통령이 위치한 ‘심리적 셋째’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무엇이 다가온다며 두려워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경향이 있다. 느긋하지 못하다.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해 다가올 불안에 대처한다. 예정된 일이 지연되면 참을 수 없다.
둘째의 성격을 가진 형은 셋째의 성격을 가진 동생에게 자신의 무력감을 물려주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고 한다. 그래서 셋째는 둘째의 공격에 대한 대응에 취약함을 느낀다. 동생이 형의 권력 욕망을 막을 수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시장 시절, 이명박 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한 인사의 회고다.
“당시 여러 명이 감사패를 받았는데, 몇 분이 늦게 오셨어요. 그때 이 시장께서는 그렇게 불안해하며 비서진에게 전화하라고 거듭 재촉하고 확인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안절부절 못한다고 할까요. 오히려 참석자들이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는 계획된 일이 속도를 내지 못하면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하는 스타일입니다. 섬세하다고 할 수 있는데 주위 사람이 매우 피곤하죠.”
이런 취약함은 위협적인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대응하는 법을 배우게 만든다. 셋째는 첫째나 둘째가 하지 못한 일들을 찾아내어 성취하려 애쓴다. 심리적 셋째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자신의 욕망, 목표, 좋아하는 일을 희생한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의 기쁨을 위해 필사적이다. 그들은 바쁜 생활을 즐기며 습관적으로 변화를 추구한다.
많은 심리적 셋째들은 영업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다. 어느 회사의 경영자가 전국에 있는 영업직원을 대상으로 출생순서를 조사한 일이 있었다. 그 결과, 모두 셋째의 성격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회사는 심리적 셋째에게 영업을 맡기면 많은 이익을 얻는다.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했던가? 동생은 형을 모델로 삼기 마련이다. 반면, 형의 부족한 점도 동생의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동생 입장에선 형이 못한 일에 도전해 보람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형의 그늘을 넘어서는 길이다.
동생은 일찌감치 큰 밑그림을 그렸다. 정계에 들어서기 전부터 서울시장의 그림을 그렸고 한 차례 시련(정계은퇴 후 渡美)을 겪은 뒤 재도전, 서울시장 자리를 꿰찼다. 형이 선수(選數)를 쌓으며 중진이 될 때, 동생은 서울시장과 대권을 꿈꾸었다.(참고문헌 《출생순서에 따른 5가지 성격의 비밀》(클리프 아이잭슨 外 著), 《성격심리학》(노안영·강영신 著))
기업과 大選자금, 그리고 ‘플러스 알파’
서울시장 시절, 이명박 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한 인사의 회고다.
“당시 여러 명이 감사패를 받았는데, 몇 분이 늦게 오셨어요. 그때 이 시장께서는 그렇게 불안해하며 비서진에게 전화하라고 거듭 재촉하고 확인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안절부절 못한다고 할까요. 오히려 참석자들이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는 계획된 일이 속도를 내지 못하면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하는 스타일입니다. 섬세하다고 할 수 있는데 주위 사람이 매우 피곤하죠.”
이런 취약함은 위협적인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대응하는 법을 배우게 만든다. 셋째는 첫째나 둘째가 하지 못한 일들을 찾아내어 성취하려 애쓴다. 심리적 셋째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자신의 욕망, 목표, 좋아하는 일을 희생한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의 기쁨을 위해 필사적이다. 그들은 바쁜 생활을 즐기며 습관적으로 변화를 추구한다.
많은 심리적 셋째들은 영업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다. 어느 회사의 경영자가 전국에 있는 영업직원을 대상으로 출생순서를 조사한 일이 있었다. 그 결과, 모두 셋째의 성격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회사는 심리적 셋째에게 영업을 맡기면 많은 이익을 얻는다.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했던가? 동생은 형을 모델로 삼기 마련이다. 반면, 형의 부족한 점도 동생의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동생 입장에선 형이 못한 일에 도전해 보람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형의 그늘을 넘어서는 길이다.
동생은 일찌감치 큰 밑그림을 그렸다. 정계에 들어서기 전부터 서울시장의 그림을 그렸고 한 차례 시련(정계은퇴 후 渡美)을 겪은 뒤 재도전, 서울시장 자리를 꿰찼다. 형이 선수(選數)를 쌓으며 중진이 될 때, 동생은 서울시장과 대권을 꿈꾸었다.(참고문헌 《출생순서에 따른 5가지 성격의 비밀》(클리프 아이잭슨 外 著), 《성격심리학》(노안영·강영신 著))
기업과 大選자금, 그리고 ‘플러스 알파’
![]() |
2012년 7월 3일 저축은행과 기업체로부터 수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상득 전 의원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
기자가 국회에 출입할 2000년대 초, 그의 보좌진 중에 코오롱 출신들이 많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여비서는 이 전 의원이 코오롱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운전기사도 코오롱에서부터 그의 차를 몰았고 구속된 박모 보좌관도 코오롱 출신이었다.
그의 보좌진 중에 박영준 보좌관을 제외하고 정책을 담당한 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머지 보좌진은 대개 정무 기능만 맡았고 무료하게 의원회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지만 그의 방(국회 의원회관)은 언제나 닫혀 있었으며 조용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별로 안 났다. 그래서 기자들이 그의 방에 잘 안 들렀다.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코오롱이라는 기업의 방패막이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든다. 2012년 저축은행 수사에서 드러났지만 이 전 의원은 코오롱에서 퇴사한 1988년 이후 24년간 고문직을 유지하며 돈을 받았다고 한다. 매달 고문료와 고문활동비, 차량과 운전기사 월급 등이었다.
코오롱 계열사의 한 대표는 그해 11월 법정에 출석, “회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이 전 의원에게 매달 수백만원 상당의 고문활동비를 지급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문 요구가 아니라 회사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필요했던 것 아니냐”는 검찰 측 질문에 “그런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 돈 쓰는 정치인이 없다는 말은 빈말이 아닌 셈이다. 《조선일보》 김대중(金大中) 고문이 쓴 칼럼의 한 토막이 생각난다. 그는 ‘한국의 정치를 오랫동안 관찰해 온 기자의 입장에서 감히 증언컨대 돈 없이 정치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며, 돈도 자기 돈을 쓴 사람은 아마도 세상이 알아주는 부자인 정주영씨 등 몇 사람 빼고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2007년 이명박 대선 후보 당시 대선자금과 이 전 의원의 역할에 대해 아직까지 드러난 게 없다. 친이 핵심이었던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은 “대선 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다 SD(이상득)한테 돈을 받으러 갔다. 사람들이 국회부의장실로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는 건 너무나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말했으나 구체적인 정황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 판결문에는 이 전 의원의 저축은행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에 대해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의 진술이 등장한다. 당시 임 회장은 재판부에 “국회부의장실에서 이 전 의원에게 ‘대선을 돕는 차원에서 돈을 가져왔다’고 말했고 그는 ‘대기업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건실한 중소기업의 지원을 받아 선거를 치르려 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진술의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고, 대법원 판결문에도 ‘신빙성을 배척하기 어렵다’고 썼다. 그것뿐이다. ‘부의장실’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 말만 무성할 뿐이다.
기자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2007년 당시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몇몇 전·현직 국회의원과 당 사무처 인사들에게 물어보았으나 한결같이 “모른다”거나 구체적인 얘기는 꺼려 했다. 이회창(李會昌)과 이명박 후보 시절, 대선 캠프에 직간접 관여했던 원외 정치인 D씨는 이런 얘기를 했다.
“상식적 수준에서 말하자면, MB 대선 때도 ‘조금은’ 돈 잔치를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일반적으로 대선을 치르려면 원내·외 위원장에게 3000만원에서 5000만원의 실탄을 줘야 합니다. 싸움이 박빙으로 갈 때, 바닥을 훑으려면 어쩔 수 없이 돈이 필요하고 2002년 대선 당시, 후보에게 읍소를 해 1억원 이상을 받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어떤 원외 위원장은 1억2000만원까지 받아갔는데 후보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천차만별이죠. MB 후보 때도 (돈이) 안 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대선자금은 누가 어떻게 거둡니까.
“후보 주변의 최측근들이 맡게 되는데,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내거나 (캠프 쪽에서)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선자금만 건네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세들 몫으로 ‘플러스 알파’까지 얹어주지 않았을까요? ‘고생하는데 쓰시라’면서 일종의 보험용으로 말이죠.”
끝으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분은 당 사무총장으로 당 살림을 꾸려본 분입니다. 대선을 치르려면 어떻게 자금을 모으고 써야 하는지, 얼마나 돈이 드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절제하며 근검절약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그때 ‘7選의 국회의장’ 꿈을 접었더라면…
이 전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자민련 바람이 불던 15대 총선에서 경북 출마자 중 거의 유일하게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사진을 의정보고서에 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선거운동 전부터 “당이 인기없다는 것 안다. 그러나 당을 바꿔 출마하지는 않겠다”는 일관된 신념을 보였다.
어쩌면 동생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이상득 전 의원은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인색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재력가의 근검절약하는 모습은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권력중독자’의 행보를 걷거나 권력을 향한 과대망상적 신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비록 넉넉한 인간미를 보여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격랑의 고비고비를 넘은 6선의 24년의 정치인생은 성공적이었다. 기자도 그를 올곧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2012년 사법처리를 받으면서(자신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게 되었고, 최근 검찰에 다시 출두하는 모습은 안타까움과 그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한 말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기득권에 안주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게 권력의 냉혹함이다. 미셸 푸코식(式)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광기(狂氣)다. 합리적 이성을 가장한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의 보좌진 중에 박영준 보좌관을 제외하고 정책을 담당한 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머지 보좌진은 대개 정무 기능만 맡았고 무료하게 의원회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지만 그의 방(국회 의원회관)은 언제나 닫혀 있었으며 조용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별로 안 났다. 그래서 기자들이 그의 방에 잘 안 들렀다.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코오롱이라는 기업의 방패막이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든다. 2012년 저축은행 수사에서 드러났지만 이 전 의원은 코오롱에서 퇴사한 1988년 이후 24년간 고문직을 유지하며 돈을 받았다고 한다. 매달 고문료와 고문활동비, 차량과 운전기사 월급 등이었다.
코오롱 계열사의 한 대표는 그해 11월 법정에 출석, “회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이 전 의원에게 매달 수백만원 상당의 고문활동비를 지급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문 요구가 아니라 회사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필요했던 것 아니냐”는 검찰 측 질문에 “그런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 돈 쓰는 정치인이 없다는 말은 빈말이 아닌 셈이다. 《조선일보》 김대중(金大中) 고문이 쓴 칼럼의 한 토막이 생각난다. 그는 ‘한국의 정치를 오랫동안 관찰해 온 기자의 입장에서 감히 증언컨대 돈 없이 정치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며, 돈도 자기 돈을 쓴 사람은 아마도 세상이 알아주는 부자인 정주영씨 등 몇 사람 빼고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2007년 이명박 대선 후보 당시 대선자금과 이 전 의원의 역할에 대해 아직까지 드러난 게 없다. 친이 핵심이었던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은 “대선 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다 SD(이상득)한테 돈을 받으러 갔다. 사람들이 국회부의장실로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는 건 너무나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말했으나 구체적인 정황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 판결문에는 이 전 의원의 저축은행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에 대해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의 진술이 등장한다. 당시 임 회장은 재판부에 “국회부의장실에서 이 전 의원에게 ‘대선을 돕는 차원에서 돈을 가져왔다’고 말했고 그는 ‘대기업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건실한 중소기업의 지원을 받아 선거를 치르려 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진술의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고, 대법원 판결문에도 ‘신빙성을 배척하기 어렵다’고 썼다. 그것뿐이다. ‘부의장실’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 말만 무성할 뿐이다.
기자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2007년 당시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몇몇 전·현직 국회의원과 당 사무처 인사들에게 물어보았으나 한결같이 “모른다”거나 구체적인 얘기는 꺼려 했다. 이회창(李會昌)과 이명박 후보 시절, 대선 캠프에 직간접 관여했던 원외 정치인 D씨는 이런 얘기를 했다.
“상식적 수준에서 말하자면, MB 대선 때도 ‘조금은’ 돈 잔치를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일반적으로 대선을 치르려면 원내·외 위원장에게 3000만원에서 5000만원의 실탄을 줘야 합니다. 싸움이 박빙으로 갈 때, 바닥을 훑으려면 어쩔 수 없이 돈이 필요하고 2002년 대선 당시, 후보에게 읍소를 해 1억원 이상을 받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어떤 원외 위원장은 1억2000만원까지 받아갔는데 후보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천차만별이죠. MB 후보 때도 (돈이) 안 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대선자금은 누가 어떻게 거둡니까.
“후보 주변의 최측근들이 맡게 되는데,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내거나 (캠프 쪽에서)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선자금만 건네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세들 몫으로 ‘플러스 알파’까지 얹어주지 않았을까요? ‘고생하는데 쓰시라’면서 일종의 보험용으로 말이죠.”
끝으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분은 당 사무총장으로 당 살림을 꾸려본 분입니다. 대선을 치르려면 어떻게 자금을 모으고 써야 하는지, 얼마나 돈이 드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절제하며 근검절약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그때 ‘7選의 국회의장’ 꿈을 접었더라면…
이 전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자민련 바람이 불던 15대 총선에서 경북 출마자 중 거의 유일하게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사진을 의정보고서에 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선거운동 전부터 “당이 인기없다는 것 안다. 그러나 당을 바꿔 출마하지는 않겠다”는 일관된 신념을 보였다.
어쩌면 동생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이상득 전 의원은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인색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재력가의 근검절약하는 모습은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권력중독자’의 행보를 걷거나 권력을 향한 과대망상적 신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비록 넉넉한 인간미를 보여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격랑의 고비고비를 넘은 6선의 24년의 정치인생은 성공적이었다. 기자도 그를 올곧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2012년 사법처리를 받으면서(자신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게 되었고, 최근 검찰에 다시 출두하는 모습은 안타까움과 그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한 말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기득권에 안주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게 권력의 냉혹함이다. 미셸 푸코식(式)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광기(狂氣)다. 합리적 이성을 가장한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