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학교-고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야구를 보면 늘 적군과 아군을 구분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보다 훨씬 더 <승리와 패배>에 집착(?)하며 경기를 봤다는 얘깁니다. 마치 전쟁을 치루듯 말이에요. 무조건 이겨야 장땡이고 이글스와 싸우는 다른 팀 선수들은 무조건 못해야 직성이 풀렸어요. 야구를 잘해서 우리한테 이기면 그건 재수없고 나쁜 놈이었죠. 아마 철없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때는 분명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까 손발이 오글거리는 기억들이 많은데 야구를 보는 시야와 관점도 그래요.
무릎팍도사-이종범편 재방송을 봤어요. 참 재밌더라고요. 구수한 사투리에 정감가는 말투, 야구센스 만큼이나 예능감도 뛰어나서 몇몇 멘트에서는 정말 빵빵 터졌네요. 젊은시절 동영상을 보여줄 때는 "아이고, 아저씨도 많이 늙었네... 저때는 정말 풋풋했는데" 뭐 그런 생각도 하면서 봤지요. 왠지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고, 그라운드를 제집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던 바람의 아들 전성기가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르더군요. 그 동영상은 대략 94~96년 즈음에 촬영된 화면이었거든요.
그 시절 이종범이 어땠는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죠. 90년대 중반에 야구를 보신 분들이면 또렷이 기억을 하실테고, 최근에 팬이 되신 분들이면 그냥 마구마구 속 <94이종범>의 포스로만 기억하시겠지만...아무튼 참 대단한 선수였어요.
이종범, 하면 흔히 1994년을 최고로 쳐주죠. 2점대 방어율 투수들이 팀마다 넘쳐나던 그 투고타저 시즌에 타율 .393을 찍었잖아요. 그러면서 홈런 19개에 도루는 84개. 진짜 대단한 기록이죠. 참고로 올해 김현수 타율이 .357이에요. 최정과 김동주가 홈런 19개, 도루 1위 이대형 기록은 64개네요.
이해하기 쉽게 얘기해볼께요. 올 시즌으로 치면, 김현수보다 안타를 훨씬 잘 치고 이대형보다 도루를 20개 더 하는데 홈런을 김동주만큼 치는거에요. 어떻게 옛날이랑 지금이랑 똑같이 비교 하냐고요? 타고투저 2009년과 투고타저 1994년의 비교라 저는 오히려 그때 이종범한테 더 가중치를 줘야 된다고 봐요. 홈런이 좀 적어서 아쉽다고요? 96년에는 .332에 25홈런도 쳤고 97년엔 .324에 30홈런도 쳤으니까 뻥야구에도 일가견이 있죠. 2008년 김태균이 .324-31홈런이니까 그 기록이랑 비슷하잖아요. 단, 차이가 있다면 그 시즌에 이종범은 도루가 64개였다는거. 그리고 유격수 심지어 1번타자였다는 거. 그러니까 라인업짜기 놀이를 할 때
1. 이종범 .324 64도루 / 30홈런.
2. 아무개.....
이런식으로 놀 수 있다는 거. 요즘말로 킹왕짱이죠. 고스톱말로 하면 꽃놀이패.
아무튼, 워낙 대단해서 무섭다 못해 꼴도 보기 싫었어요. 나오면 무조건 안타치지, 나가면 도루하지, 2루주자인데 유격수 땅볼 때 홈인을 해버리지 않나. 그래놓고 다음 타석엔 홈런치고 우리팀 중전안타를 호수비로 걷어내 아웃까지 시키죠.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수비할땐 박진만, 타석에서는 김현수, 1루에 서 있으면 이종욱인거에요. 왜 가끔 우리 배터리 농락하는 이종욱이나, 큰 경기에서 호수비로 공격 흐름 딱딱 끊어버리는 박진만 보면 정말 얄밉잖아요. 그런데 이건 얄미운 걸 넘어 분노+증오의 감정이었어요. 막말로 그냥 확 뼈라도 부러져 몇달 못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거든요.
그랬던 사람인데.....시간이 흘러 저도 철이 들고, 타이거즈에 대한 증오도 사라지고 그러다 보니 이종범을 보는 시각도 180도 달라졌네요. 송진우 정민철처럼 이글스의 영웅은 아니지만, 타이거즈의 레전드고 그들만의 영웅이었지만 그 사람 역시 똑같은 영웅으로 대접해줄 만한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이대진이 한화를 상대로 승리투수가 되면 "에이 졌네~"하면서도 고개 끄덕이며 박수 쳐줄 수 있는 그런 여유요. 그토록 내 가슴을 후벼파던, 나를 화나게 했던 시절 동영상을 보는데도 그저 아련하게 그립고, 그 사람 얼굴에 패인 주름이 괜히 속상하고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마 공감하실 분들도 계시겠죠.
요즘 많은 선수들이 유니폼을 벗고 있어요. 그 선수들이 누구냐면, 철부지 중학생 1번선발이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친구랑 <야구선수 이름으로 빙고>같은 유치한 놀이를 할 때 머리를 싸매며 골랐던 그 시절의 히어로들이죠. 그런데 다들 떠나고 이제 몇명 없어요.
요즘 트렌디한 선수들도 참 좋아요. 솔직히 이택근 같은 선수들은 얼마나 '힙' 한가요. 추신수나 정근우 윤석민 김광현...이런 선수들 국제대회 나가면 얼마나 든든해요. 아마 왕년의 스타들 전성기 기량으로 붙어도 지금 아이들이 이길거에요. 그만큼 더 튼튼하고 유능한 선수들이죠. 강정호나 황재균, 안치홍 같은 어린 선수들 보면 앞으로 10년, 20년 그 아이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고 흐뭇해요. 대견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가끔은 영원한 3할타자 윤덕규, 푸근하고 인상 좋아보이던 태평양의 김경기, 노지심 장채근이나 학다리 신경식, 롯데의 타선을 이끌던 자갈치 김민호와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 같은 선수들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빙그레랑 싸울 때 홈런치거나 우리 타자들 삼진 잡으면 TV화면에 대고 고래고래 욕하며 저주하고 증오하던 선수들이지만....사실 따지고 보면 저는 그런 스타들 보면서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했거든요. 송진우 장종훈을 좋아했고 그 사람들은 주로 시기하고 싫어했지만, 어쨌든 그 시절 추억을 공유한 매개체인 것은 분명해요 그게 장종훈이든 장호연이든 말이죠.
올해 송진우 정민철만 떠난 게 아니잖아요. 신바람 엘지의 안방마님 김동수, 92년 롯데 '남두오성' 타순의 돌격대장 전준호도 유니폼을 벗었죠. 사실 그들의 은퇴도 (비록 응원팀 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아파요. 개인적으로는 내 소중했던 학창시절, 평생을 두고 그리워할 그 시절 기억의 조각들이 조금씩 잘려가는 느낌이어서 그렇겠지요.
해서, 지금 남은 노장들이 되도록 오래 뛰어줬으면 좋겠어요. 이종범도 양준혁도, 박경완도..... 어린시절 공포의 대상, 혹은 증오의 대상이던 그 거대한 산들이 그저 친근한 동네 아저씨, 마음 편한 큰형처럼 느껴지는 그런 기분. 아마 20년쯤, 혹은 그 이상 야구를 보신 분들이라면 많이들 공감하실거에요. 요즘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하신 분들도 시간이 지나면 이런 감정을 공유하실 수 있겠죠. 분명히 그럴거에요. 그렇게 욕하던 정근우나 나주환, 이종욱 같은 선수들이 불혹 가까운 나이가 되고 응원팀 팬들에게 "이제 후배한테 길을 터줘라" 이런 얘기 들으면서 힘겹게 운동할 때, 혹은 쓸쓸히 유니폼 벗을 때..... 역시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여러분도 아마 느끼실거예요. 한화 꼴등할때 맨날 번트대고 도루하던 놈, 더티플레이 한다고 그렇게 욕하던 놈한테 짠한 마음을 갖는 그런 기분 말이에요.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기쁨과 좌절이 공존하는 싸움판이지만 그라운드도 결국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서 그런가. 가끔은 감상적이 될 수 밖에 없네요. 무릎팍도사 이종범편. 가능하면 다운하나 받아둬야 겠습니다. 그렇게 꼴도 보기 싫던 얼굴이 오늘은 참 정겹고 또 보고 싶네요. 예전에 양준혁이 나와서 순박하게 웃으며 "승엽아~ 일본에서 잘해라~" 할때도 참 귀여웠는데 말입니다. 우리팀 아저씨든 남의팀 아저씨든 요즘엔 다들 참 좋네요.
PS. 논리보다는 감정을 앞세운 글이라 굳이 글을 고치고 퇴고하지는 않겠습니다. 혹여 맞춤법이 이상하거나 문장이 많이 꼬인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첫댓글 기억나요. 그 땐 해태 과자도 먹지 않고, 티비 보다 해태 광고 나오면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고~ 이종범이랑 선동렬은 정말 세상에서 둘도 없는 원수였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제 덕분에 아마 두 선수는 오래도록 무병장수 할꺼에요.^^;;
ㅎㅎ전 빙그레 아이스크림(투게더)만 먹었는데...ㅋㅋ진짜 옛날이 그립네여...중학교땐 이종범이 슈퍼맨인줄 알았는데...ㅋㅋ
전 장종훈 형님이 CF 찍으신 더위사냥만 먹었어요ㅋㅋㅋ 진짜 그시절엔 TV에 이종범 선동렬 얼굴만 나와도 한숨 나오곤 했었는데... 지금은 정말 친근한 옆집 아저씨같은 느낌이네요^^
잘 기억은 안나지만..(어렸을때라..) 코시로 기억하는데 이종범선수가 9회에 포수 마스크를 쓰고 경기를 이겼던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그때 종범선수를 가장 미워했던 것 같습니다. TV로 중계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맞죠..?
참 81년생인 저로서도 이종범은 이승엽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죠... 특히 한화(빙그레)전에서 살인포수님이 말씀하신 그 경기... 아마 이종범이 친 홈런은.. 좌측으로 넘어갔던거 같아요.. 참 정말 싫었지만.... 해태라는 팀을 이겼으면했죠,,,, ㅎㅎ 워낙 무서운팀이었기에... 그에 한화(빙그레)도 참 좋은 팀이었죠... 그보다 좋은 팀이 있었던거뿐이지만...
꽃놀이패는 바둑용어...퇴고를 거치시지 않으셨으나 괜한 태클입니다 ㅎㅎ...고스톱말에는 있는지 몰라서..
그 당시엔 국제대회 볼일도 없다보니... 잠시나마 적들이 우리편 되는일도 없다보니 싫기만 했죠.. 지금이야 수시로 적들이 우리편 되서 응원하게 되니.. ㅋㅋ
저는 이종범에 대한 기억은...이렇습니다. 정확하게 언제쯤인 기억 못하겠고,, 정민철 일본가기 전 전성기 때였지 않나 생각됩니다. 대전에 7-4로 이기고 있을 때 한점 따라붙은 해태 타선은 이종범이 정민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으로 대역전패 당했던.... 그날 정말 분해서 잠을 못잤던 기억 납니다.
ㅎㅎㅎ 이종범선수 정말 공포였지요. 해태선수로 뛸때는 너무 잘해서 싫었고요. 우리 이글스는 왜 저런 유격수 못뽑나 하며 슬퍼했었죠. 한일 슈퍼게임때였나 하여간 국제대회때 삽뜨는거 보고 "적일때는 잘하다가 응원하니까 못하네 하여간 이종범 너무 싫어"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 글 읽으면서 옛날 생각하는데..자꾸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김소식 해설위원의 그만의 특유한 목소리가 떠오르네요...
이종범 하면 정민철선수 한데 끝내기 만루포 치던 생각이 자꾸 ㅡㅡ; 이종범은 왜캐 한화한데 안좋은 기억만 심어 낳는지;;
만루 홈런이었나요? ㅎㅎ 맞는거 같다..그날 아니라..며칠동안 그 사건으로 잠을 못잤던...팬...
얼마나 꼴보기 싫던지,, 제발 망하라고 해태과자는 절대 안사먹었는데 ,, 어린맘에 홈런볼이 얼마나 먹고싶었나 몰라요 ㅎㅎ 공감200%의 글이네요.. 덕분에 웃고갑니다^-^
ㅋㅋㅋㅋㅋ
저도 김현수,김광현,윤석민,정근우 같은 선수들이 딱 국제대회 때만 정말정말 든든하더군요.... 그러나 리그에선.;;; ㅎㅎ 여튼 참 공감가는 글입니다.
ㅋㅋ 저두 이종범선수와 선동렬 당시 선수 너무 싫어했지여 정말 짜증 지데 ㅋㅋㅋ 지금에 와서 그당시 그선수들의 활약상을 보거나 하면 저절루 박수가 나오네여
정말 대단한 선수지여 ㅋㅋ
1번선발님의 글, 항상 잘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ㅡ^
저두 대학때까지도,, 야구에서 지면 너무 화가나고, 욕하고 그랬는데,, 열정이 식은건지,, 아님 철이든건지 모르겠지만,
질수도 있지,,어떻게 다 이길수가 있냐,,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구여,, 암튼 양준혁도 그렇고 이종범선수도 화이팅입니다.
......글 안에 있는 선수들을... 다알고있는 어린이가 여기하나 있지요... 정말... 잘 읽고 갑니다... 당시 해태하면...이를 갈았죠... 저시키들땜에 1등 못한다고 ㅋㅋ 나름 그립네요...
너무 잘했기 때문에 미운 감정보다는 경외감을 준 선수였었죠. 보다 큰 무대에서도 통할 선수라 믿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진출 실패후 그 모습이 달갑지 않더군요. 전 여러분들과 반대네요. 경외감을 갖고 있다가 비호감(?)이 됐으니.. 아마 더 잘해낼 수 있었는데 그러치 못해서 그런 듯 싶습니다..
ㅎㅎㅎ~~~ 1번선발님 이제 올드팬에 가입하시는 건가요? 아직은 아니예요....좀더 세월이 지나 지금의 선수들이 코치가되고, 유명감독이 되어 팀을 이끌고 하는 모습을 봐야 좀 올드한거죠. 오래전 김경문감독님이 공주고시절 대통령배 우승하고 대전역에서 환영식과 퍼레이드가 있었었답니다. 그때 참 똑똑해보인다고 생각했던선수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않고 유명감독이되어있네요. 참 올드한 얘기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