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환연연구회 조재형 회장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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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만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초기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문서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Nag Hammadi Library)는 사해사본과 함께 20세기 고고학 발견의 최대 성과 중 하나이다. 통상 한국 학계에서 ‘나그함마디 문서(서고)’로 불리는 이 문서는 1945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595km 떨어진 자발 알-타리프(Jabal al-Tarif) 절벽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이 절벽은 파코미우스(Pachomius) 수도원에서 약 8km 떨어져 있어 이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묻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근처의 ‘나그함마디’라는 지명을 따서 나그함마디 문서라고 불린다.1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근처에서 천연비료를 구하기 위해서(또는 고대의 보물을 도굴하기 위해) 땅을 팠던 이집트 농부 ‘무하마드 알리’에 의해 거의 1,600여 년 만에 발견된 것이다. 만약 이 문서가,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 국가 종교로서 모든 이단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4세기 말이나, 마녀사냥이 한창이던 중세에 발견되었다면, 그 즉시 불태워졌을 것이다. 서구 그리스도교가 중세시대에 행사했던 막강한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이제 신앙의 자리 대신 이성이 더 높은 위치에서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시기에 이 문서가 발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도교는 나사렛 출신 예수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근거하여 탄생했다. 로마가 지중해 전 지역을 지배하는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가 제의(특히 황제 숭배 제의) 참여를 거부하여 로마의 박해를 받다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합법적인 종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후 성장을 거듭한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성서의 정경화 작업이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4세기 말 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 목록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확고한 교리체계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학자들은 1세기 말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 현재의 사복음서를 포함하여 약 80여 개의 복음서가 회람되고 있었다고 한다. 1945년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는 13개의 코덱스에 52개의 문서가 포함되어 있는데(중복을 제외하면 46개), 이 문서들도 현재의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다가 4세기에 교리 논쟁이 치열해지고(삼위일체 등) 정경 목록이 확정되면서 그 목록에서 제외된 많은 문서가 파괴되었다. 월터 바우어(Walter Bauer)는 『정통과 이단』에서 4세기 말 이후 이단으로 몰린 그리스도교 종파는 한때는 정통교회(Orthodox Church)와 똑같은 권위를 가졌으며, 그 종파에서 사용된 문서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과 영성을 위해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2 4세기 말 나그함마디 근처에 있던 파코미우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정경을 제외한 모든 이단 문서를 불태우라는 지시를 받고 큰 고민에 빠졌던 것 같다. 그들 중 일부는 정통교회의 방침을 따르는 대신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서들을 땅속에 묻기로 하였을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신앙생활을 위해서 귀중하게 사용해 오던 문서들을 굳이 파괴하기보다는 땅에 묻어서 정통교회의 검열을 피하고자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필자가 공부했던 클레어몬트대학교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고대 그리스도교 연구소’(IAC) 내에 나그함마디 문서 국제 번역팀을 꾸려 콥트어로 기록된 나그함마디 문서 전체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첫 영문판이 1977년에 출판되었다. 그 후 2007년에 채프먼대학교의 마빈 메어의 주도로 1977년 영문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문장을 보다 읽기 쉽게 고친 영어판 개정본이 발간되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우리말 번역본이 재작년에 작고한 재야 신학자 이규호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규호 선생이 번역을 끝낸 지 20년 만에 책으로 정식 출판된 것이다. 비록 늦긴 하였지만, 나그함마디 문서 자체의 중요성뿐 아니라 한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우리말 번역본의 의미는 매우 크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과 영지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그함마디 문서를 산출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역설적으로 영지주의 역사에서 영지주의가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시기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태동하고 성장하여 로마의 국교가 된 시기까지였다. 어쩌면 로마제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까지 영지주의 그리스도교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그리스도교 운동 중에서 로마제국의 지원을 받은 정통교회와 영지주의 교회는 함께 경쟁하면서 신학적 다툼을 하다가, 한쪽이 철저하게 패배하여 그리스도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나그함마디 문서로 대표되는 영지주의 문서들이 불태워지고 영지주의자들이 핍박을 받는 가운데 5세기 이후 영지주의는 정통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서양 문명과 역사 안에서 영지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살아남았다. 예를 들면 마니교는 영지주의를 기반으로 탄생한 가장 세계적인 종교였다. 영지주의는 중세 성전 기사단과 프리메이슨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18세기에 발굴된 영지주의 문헌의 영향을 받은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그것을 자신의 정신분석학에 적용하여 프로이트로부터 독립하였다.4 무엇보다 영지주의 종교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만다교를 믿는 약 1만 5,000명의 만다교 신도를 통해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영지주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입관은 영지주의가 뉴에이지 운동과 이단 사상의 온상이라는 것이다. 학자 대부분은 적어도 이런 선입관을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이후에는 더는 가지지 않는다. 물론 한국의 보수적인 학자 중 이런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류도 있지만, 영지주의에 관한 중립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오롯이 나그함마디 문서의 역할이 컸다. 그동안 2-4세기의 영지주의 연구에 대한 자료들은 고대 교부들의 글과 몇몇 단편적인 자료들에 의존하여 영지주의를 그리스도교의 이단 사상이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했는데, 나그함마디 문서를 통해 영지주의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성장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5 또한 나그함마디 문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마복음』과 『요한 비밀서』를 통해 일반인들도 영지주의에 관한 호의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즉, 18세기부터 간헐적으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아스큐 사본, 브루스 사본, 베를린 사본 등)로 싹을 틔운 영지주의에 관한 관심이 다량의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연히 새로운 자료가 발견될 때마다 과거의 영지주의에 대해서 더 잘 알고자 하는 대중적인 호기심이 학문적 관심과 함께 증가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과 번역과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클레어몬트대학교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이 문서가 발견되어 현재의 형태로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이 문서를 처음 발견한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농사에 사용할 퇴비를 찾다가 땅속에서 항아리들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는 그 안에 ‘영마’(Jinn)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손을 대지 못하다가, 혹시 그 안에 금과 같은 보물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아리를 막대기로 깨뜨렸다. 햇빛에 산란하는 먼지는 신비스러운 금빛을 발했지만 실망스럽게도 그 안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파피루스 다발들만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다가 동물의 사료를 보관하는 곳에 쌓아 놓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중에서 최소한 한 개 이상의 파피루스 책(코덱스)을 빵을 굽는 불쏘시개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즈음에 무하마드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을 찾아내 죽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무하마드는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경찰들이 그의 집을 자주 수색하러 왔기 때문에 그는 그 책 중의 일부를 콥트 교회 사제에게 맡겼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 파피루스들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6 이런 드라마 같은 발견 이야기는 나그함마디 문서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살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위의 유명한 발견 이야기는 최근에 학자들에 의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80년 전의 이야기에 대해 진실공방이 벌어진 이유는 나그함마디 문서를 처음 발견했던 무하마드 알리가 완전한 문맹자였고, 그가 처음 발견 장소를 나중에 다른 곳으로 바꿨으며, 제임스 로빈슨의 기록도 발견자를 무하마드 알리와 그의 동생으로 기록했다가(1977년) 나중에는 7명(1979년), 또는 8명(1981년)으로 바꿔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빈슨이 주장했던 파코미우스 수도원과 나그함마디 문서의 관계성 대신에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장소가 무덤이었고, 이 문서는 죽은 자와 함께 파묻혔다가 다시 발견된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7
발견 장소에 대한 논쟁은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지만, 그렇다고 나그함마디 문서 자체의 중요성이 감소하지는 않는다. 정통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문서에 대한 파괴가 일어나는 가운데 그 문서를 땅속에 파묻어 감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나그함마디 문서를 대하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서론적인 문제와 주요 내용
나그함마디 문서는 원래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가 2-4세기에 콥트어로 번역된 것이다. 콥트어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했던 언어인데, 7-8세기 이후에는 콥트 교회 예배에만 주로 사용되는 사어(死語)가 되었다. 현재 우리는 콥트어로 된 문서만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스어 원본이 산출된 정확한 연대는 모른다.
『도마복음』과 몇몇 문서들의 신학과 문학 양식을 살펴본 학자들은, 어떤 문서들은 정경 복음서보다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신약성서의 기록 시기를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서학자 대부분은 기원후 70년경에 마가복음이 처음으로 저작되었고, 나머지 복음서들은 70년에서 2세기 초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처음 기록된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그 후에 필사된 사본만 가지고 있다. 복음서의 중요한 사본들의 필사 시기는 주로 4-5세기에 걸쳐 있다. 가장 이른 연대의 복음서 사본들(P4, P64, P67 등)이 2-3세기에 필사되었고, 가장 빠른 마가복음의 사본은 4세기로 추정된다.8 바울서신의 경우에도 약 200년에 필사된 ‘파피루스 46’(P46)이 이른 연대의 사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어 원본 복음서의 연대와 필사된 바울서신과의 시대 차이는 최소 100년 정도가 되고, 대부분의 중요한 사본들(바티칸, 시내산, 베자 등)이 4-5세기에 필사된 것을 고려하면 원본과 최소한 300-400년의 연대 차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나그함마디 문서의 콥트어 저작 시기는 2-4세기로 추정되지만, 그리스어 원본은 이것보다 이전 시기일 가능성이 크고, 심지어 복음서나 바울서신과 동시대에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문서의 저자들은 대부분 익명 혹은 가명의 인물들이다. 요한, 빌립, 베드로 등의 이름이 본문에 나오지만, 그 당시 관습에 따르면 유명한 그리스도교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기록한 문학 양식을 따르고 있다. 유명한 영지주의 교사 발렌티누스와 바실리데스가 기록했다고 주장되는 것들도 있지만, 정확한 저자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총 13권으로 이루어진 나그함마디 문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1권『사도 바울의 기도』, 『야고보의 비밀서』, 『진리의 복음』, 『부활에 관한 논고』, 『세 편의 논고』
•제2권『요한 비밀서』(긴 본문), 『도마복음』, 『빌립복음』, 『아르콘들의 실체』, 『세상의 기원』, 『영혼에 관한 주석』, 『용사 도마의 책』
•제3권『요한 비밀서』(짧은 본문), 『이집트인들의 복음』, 『복된 자 유그노스토스』, 『예수 그리스도의 소피아』, 『구세주와의 대화』
•제4권『요한 비밀서』(긴 본문), 『이집트인들의 복음』(3권의 것과 같음)
•제5권『복된 자 유그노스토스』(3권의 것과 같음), 『바울 묵시록』, 『야고보의 첫째 묵시록』, 『야고보의 둘째 묵시록』, 『아담 묵시록』
•제6권『베드로와 열두 사도의 행전』, 『천둥-완전한 지성』, 『권위 있는 가르침』, 『우리의 위대한 권능의 사색』, 『플라톤 공화국』, 『제8위와 9위에 관한 강화』, 『감사기도』, 『아스클레피우스』
•제7권『셈의 풀이』, 『위대한 셋의 둘째 논고』, 『베드로 묵시록』, 『실바노스의 가르침』, 『셋의 삼석비』
•제8권『조스트리아누스』, 『빌립에게 보내는 베드로의 편지』
•제9권『멜기세덱』, 『노레아의 사색』, 『진리의 증언』
•제10권『마르사네스』
•제11권『지식의 해석』, 『발렌티누스파의 설명: 도유-세례-성찬에 관한 단편들』, 『외방인』, 『지극히 높은 사색을 하는 여성 실체』
•제12권『섹스투스의 금언들』, 『진리의 복음』(1권의 것과 같음), 『단편들』
•제13권『프로텐노이아』, 『세상의 기원』
나그함마디 문서를 산출했던 영지주의 종파를 분류할 때 가장 중요한 종파는 고전적 영지주의라고도 불리는 셋파 영지주의이다. 이 종파는 아담의 아들 셋과 셋의 후손이 구원사에서 영지주의 계시자의 역할을 중요하게 수행한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플라톤 사상으로 구약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한다. 셋파에 속하는 문서들은 『요한 비밀서』, 『아르콘들의 실체』, 『이집트인들의 복음』, 『아담 묵시록』, 『셋의 삼석비』, 『조스트리아누스』, 『노레아의 사색』, 『마르사네스』, 『외방인』 등이다.9 나그함마디 문서 전체에서 『요한 비밀서』는 셋파를 대표하는 문서이면서 동시에 영지주의 신화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서이다.10
두 번째 분류는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발렌티누스 영지주의이다. 셋파가 고전적인 영지주의에 속한다면, 발렌티누스파 영지주의는 개혁파에 속한다. 셋파를 개혁한 발렌티누스파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많이 따르고, 구원자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셋파는 인간을 영에 속한 인간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육에 속한다고 보아 깨달음을 얻어 구원을 받는 사람의 숫자를 적게 산정하지만, 발렌티누스파는 인간을 영에 속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정통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을 혼에 속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이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11 『진리의 복음』, 『사도 바울의 기도』, 『부활에 관한 논고』, 『세 편의 논고』, 『빌립복음』, 『지식의 해석』, 『발렌티누스파의 설명』, 『야고보의 첫째 묵시록』, 『야고보의 둘째 묵시록』, 『빌립에게 보내는 베드로의 편지』, 『진리의 증언』, 『야고보의 비밀서』 등이 이 종파에 속한다.12
세 번째 범주는 셋파와 발렌티누스파 다음으로 많은 문서가 속하는 헤르메스 영지주의이다. 이것은 가장 헬라화된 영지주의로 분류되며, 헤르메스는 이집트의 신 토트(Thoth)에 대한 그리스 이름이다. 대다수 나그함마디 문서의 자료들이 그리스도교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만(하느님, 그리스도, 구원자 등의 공통된 용어들을 포함해서), 헤르메스 영지주의는 이집트 신화를 그리스적으로 변형한 것으로, 서구 사회에서는 마술이나 연금술과 천문학 연구에서 더욱 중요하게 연구되어 왔다.13 나그함마디 문서에서는 『플라톤 공화국』, 『제8위와 9위에 관한 강화』, 『감사기도』, 『아스클레피우스』가 여기에 속한다.
네 번째 범주는 도마 영지주의에 속하는 『도마복음』과 『용사 도마의 책』이다.14 도마 영지주의는 『도마복음』으로 대표되며, 공통적으로 자신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금욕주의라는 대단히 현실적인 윤리를 발전시켰다. 신으로부터 방출된 인간이 다시 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인간의 영혼에게는 이 땅에서 금욕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바실리데스파 영지주의에 속하는 자료들이 있다. 이 종파의 자료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쓴 논문집에 주로 나타나고, 이레니우스와 히폴리투스가 언급하고 있지만, 나그함마디 문서 자체에서는 『복된 자 유그노스토스』 이외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바실리데스파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적인 세상에 인간의 영혼이 던져져 육체에 감금되어 있다는 매우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깨달음을 받아 구원받는 인간이 천에 한 명, 만에 두 명 정도로 그 숫자가 매우 적다고 본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온통 잿빛투성이이고, 예수가 물질적인 형태로 이 땅에 오지 않았다는 가현설을 정교하게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15
나그함마디 문서의 중요성과 의의
첫째, 나그함마디 문서는 역사적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사복음서 사이사이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부분을 해석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신약성서 본문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심도 있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함으로써 전체 그리스도교 신학을 풍성하게 만든다.
둘째, 나그함마디 문서는 기존 신약성서 연구 방법론에 새로운 도전을 준다. 기존의 신약성서보다 분량이 두 배나 많고 내용과 문학 장르가 다양한 나그함마디 문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역사비평학과 문학비평뿐만 아니라 사상사비평법(History of Ideas)과 다른 인문학적인 방법론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도전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나그함마디 문서를 특정 종교의 문서가 아니라 인문학적, 또는 최소한 비교종교학적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확장한다.
셋째,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량의 콥트어 본문들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콥트어는 본문비평의 신비스러운 차원을 가지고 있어서, 신약학자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에게 잊혔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문서 발견 이후에는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신약성서 연구를 위해서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언어가 되었다. 제임스 로빈슨이 동료들을 격려해서 콥트어를 함께 배웠듯이 나그함마디 문서는 한국의 신학도들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콥트어도 함께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여 새로운 언어 교육에 대한 도전을 준다.
넷째, 나그함마디 문서는 학자들에 의해서 재구성된 가상의 복음서인 큐(Q) 복음서의 진실성을 증가시켰다. 일반적으로 큐 복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공통본문에서 마가복음의 내용을 제외한 본문을 누가복음의 순서를 따라 만든 것이다. 큐 복음서의 가장 큰 문제는 사본학적 증거의 부족이었다. 그런데 큐 복음과 내용과 골격이 비슷한 사본들(『진리의 복음』, 『도마복음』, 『빌립복음』, 『이집트인들의 복음』)이 발견됨으로써 큐 복음은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다. 특히 『도마복음』은 큐 복음서와 내용과 문학 형식의 유사성 때문에 더욱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국내 신약학계에서는 큐 복음에 관한 연구가 미진하지만, 거의 1,600여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었듯이 큐 복음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또한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신약학자들이 이 문서를 비롯한 신약 외경(New Testament Apocrypha)에 관심을 두게 만든다.16
다섯째, 무엇보다 나그함마디 문서에 관한 연구는 그리스도교가 잊어버린 고대 영지주의 사상의 긍정적인 전통들을 되살릴 수 있다. 가톨릭과 정교회와 비교해 볼 때, 나그함마디 문서는 개신교가 많이 잃어버린 묵상과 깨달음의 전통을 되살려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에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1세기 전에 카를 융이 시도했듯이 일반인의 영성 생활과 심리치료에도 나그함마디 문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즉, 굳이 불교의 묵상과 선(禪) 수행 전통을 따라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교적 특징이 농후한 나그함마디 문서 내에 있는 영적인 전통을 현대 영성 생활에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영적인 욕구를 가진 현대인들에게 명상과 묵상, 자아를 찾아가는 전통을 자연스럽게 소개하고 또 나그함마디 문서에 나오는 기도문 등을 영성 생활에도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만능주의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종교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그함마디 문서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인문학적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나가는 말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지주의와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기 전, 전후(戰後) 세대에 속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반공사상의 영향으로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의 표지도 열어보지 않고 무작정 공산주의를 반대했다. 마찬가지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지주의자들이 쓴 문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그것을 반대했지만, 이제 우리는 콥트어에서 영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최근에는 영어판과 독일어판을 기반으로 한글로 번역된 『나그함마디 문서』를 손에 가지게 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날 우리가 영지주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는 1-4세기에 영지주의자들이 기록한 나그함마디 문서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직접 기록한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 초기 영지주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학은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영지주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선입견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해준다. 신약성서의 문서들과 동등하게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나그함마디 문서를 통해 이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초기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신앙 전통과 신학을 통해서 깨달음의 영성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몰랐던 문서들의 출현은 당연히 신약성서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게 전해졌는가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와 그리스도교 신학에 관한 연구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귀중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연재글에서는 나그함마디 문서의 주요 내용을 몇 차례 조명할 것이며, 연재를 마무리하는 글에서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나그함마디 문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것이다. 이 질문의 연장선에서 다음 호에서는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한비밀서』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주(註)
1 James M. Robinson, “Introduction: What Is the Nag Hammadi Library?,” The Biblical Archaeologist 42, no.4 (1979): 201.
2 Walter Bauer, Orthodoxy & Heresy in Earliest Christianity, 2nd ed. (Mifflin-town: Sigler Press, 1996), xxi-xxv.
3 송혜경, 『영지주의: 그 민낯과의 만남』(한님성서연구소, 2014), 103-104.
4 Ibid., 92-94.
5 James M. Robinson, “The Discovery of the Nag Hammadi Codices,” The Bi-blical Archaeologist42, no.4 (1979): 202.
6 James M. Robinson, “Nag Hammadi: The First Fifty Years,” Occasional Papers 34 (1995): 3-6.
7 Nicola Denzey Lewis and Justine Ariel Blount, “Rethinking the Origins of the Nag Hammadi Codices,”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33, no.2 (2014): 418.
8 조재형, 『초기 그리스도교와 영지주의』(동연, 2020), 42.
9 Karen L. King, What Is Gnosticism?(Cambridge: Belknap Press, 2003), 157.
10 조재형, 앞의 책, 91-101.
11 Ibid., 111-114.
12 King, 154.
13 Gordon Melton ed., Hermetica, 5th ed., vol.1, Encyclopedia of Occultism and Parapsychology (Detroit, MI: Gale, 2001), 722.
14 King, 162; 나그함마디 문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도마 영지주의에는 『도마행전』도 있다.
15 조재형, 앞의 책, 118-139.
16 Robinson, “Nag Hammadi: The First Fifty Years,” 30-34.
조재형|클레어몬트 대학원대학교(CGU) 종교학과에서 신약성서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This Is My Flesh, 『그리스-로마종교와 신약성서』 등이 있다. 현재 강서(그리스도)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서울장신대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치고 있으며, 영지주의와 나그함마디 서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스톤-캠벨 운동을 연구하는 환연연구회 회장과 요한문헌학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