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준대표님의 카톡에서]
🌄 참 된 삶 🌻
조금 손해 본 듯 살아야
관계가 좋아지고,
조금 져주는 듯 살아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조금 모자란 듯 살아야
삶이 활기차지고,
조금 부족한 듯 살아야
인생이 깊어집니다.
조금 부족하고
모자란 듯 살아야
좋은 것들이 채워져
인생이 풍성해 집니다.
삭막한 인생길에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
조금 부족한 듯
조금 모자란 듯
여유를 두는 삶을
영위하십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와
함께 행복을 엮어
즐길 수 있는 삶이 지속되시기를 빕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이 되세요.^^♡
👍종교와 상관없이
좋은 내용!
멋진 글 입니다.
💞내것은 하나도 없다
꼭~ 읽어 보세요
http://m.blog.naver.com/kgb815/220089473483
🌠🎇 🌇🌆 ✨🎆
======================
💕하늘이 내린 천사🌋
'백영심' 간호사'
“상금 4억원은 아프리카에···
내 옷값은 1달러짜리 구호품... ″
1990년 9월, 김포국제공항 출국장. 당시 28세이던 백영심 간호사가
아프리카 케냐로 의료 선교를 떠나던 날이었다.
돌아올 날은 정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항 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백 간호사는 2남 4녀 중 셋째 딸, 제주 조천읍 함덕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제주에서 마쳤다. 자식을 육지로 내놓는 일만 해도 조마조마했는데, 그 귀한 셋째 딸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프리카로 간다니···.
백 간호사를 아프리카로 파송했던 한국 교회조차도 그가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 처음엔 정식 선교사 월급 대신, 교회 청년들이 모아준 300달러(약 36만원)와 병원 퇴직금을 가지고 떠났다.
하지만 백 간호사는 아프리카에서 30년을 ‘시스터 백’으로 살았다. 시스터 백은 현지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 그는 케냐에서 4년, 나머지 세월은 아프리카 중에서도 최빈국이라는 말라위에서 보냈다.
자기 월급을 쪼개고 아껴 말라위에 유치원·초등학교·진료소를 지었고, 200병상 규모의 최신식 종합병원인 대양누가병원과 간호대학 설립도 주도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백 간호사는 2012년 이태석상, 2013년 나이팅게일 기장, 2015년 호암상, 지난 8월 성천상을 받았다.
국내외에서 굵직한 사회봉사·의료인상을 두루 받았지만, 언론 인터뷰는 손에 꼽을 정도. 지난달 17일, 성천상 수상을 위해 서울에 온 백 간호사를 만났을 때도, 첫 인사는 ‘저는 인터뷰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였다.
지난달 18일 성천상을 받은 백영심 간호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이날 입은 원피스는 후배가 시상식 날 입으라고 선물해 준 것이다. 하루 전 인터뷰에서 백 간호사는 국제 구호품 시장에서 1달러 주고 샀다는 남방과 면바지를 입고 왔다.
그는 “옷과 가방이 크게 필요 없다”며 “나에게 필요한 건 이미 넘치도록 받고 있다”고 했다. 벽에 걸린 장식용 천은 말라위 특산품으로, 백 간호사가 현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사랑 실천’이 삶의 소명
성천상은 JW중외제약 창업자인 고 성천 이기석 선생의 생명존중 정신을 기려, 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통해 의료복지 증진에 기여하면서 사회적인 귀감이 되는 참 의료인을 발굴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상을 사양하신 적도 많으시다고요. 인터뷰 거절당한 기자도 많고요(웃음).
“다른 사람들이 다 각자 주어진 길을 가는 것처럼 저도 제 길을 가는 것뿐이지, 언론에 나올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어쩌다 보니 제 일이 조금 알려져서 (인터뷰를) 하지만(웃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을 ‘내가 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선교사로 조용히 숨어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주변에 개인 정보도 잘 드러내지 않았어요.”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인 안필영 등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 재외 동포 42명을 ‘건국 60주년 재외 동포 명예위원’으로 위촉했다. 백 간호사도 여기 포함되면서 처음 언론에 이름이 알려졌다.
–명예위원은 어떻게 되셨나요.
“당시 짐바브웨·말라위 겸임 대사님이 대양누가병원 기공식에 참석하시면서, 제가 일했던 진료소에도 오셨어요. 이후 한국에서 명예위원이 됐다는 연락이 왔어요.
‘저 너무 바빠서 못 갈 것 같습니다’ 했더니, ‘그게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된 건데 무슨 말이냐’고 하시더군요(웃음). 너무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할 것 같아, 알겠다고 했어요.”
–그때 비행기 좌석을 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진해서 바꿨다고요.
“나랏돈이고 나는 몸도 작은데 비즈니스석을 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코노미석을 타고 왔어요. 차액을 돌려주셔서, 그걸로 현지에 필요한 약품을 샀습니다.”
–이태석상도 1회 때 수상을 권유받았지만, 사양해서 2회때 받으셨다고요...?
“2회 때는 저희 간호대학이 막 문을 열었어요. 구급차도 필요하고 간호대학 버스도 필요한데, 가만 보니 상금이랑 필요한 금액이 맞아 떨어져서 받겠다고 했어요(웃음).”
백 간호사는 호암상 상금 3억원은 현지에 도서관을 짓는 데 썼다. 성천상 상금 1억은 “현지 중·고등학교를 짓는 데 쓸 예정”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꿈이 간호사였나요?
“큰언니 권유로 간호대학에 입학했지만, 방황을 많이 했어요. ‘나는 왜 사는가’ ‘뭐 때문에 간호 공부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여수에 있는 애양원(한국 최초의 나병원)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제가 많이 깨졌어요.”
–깨졌다니, 무슨 뜻인가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손과 발이 문드러지고 얼굴이 일그러졌는데도, 감사하고 기쁘고 평안해요.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요. 그분들을 보면서 내가 사는 이유는 사랑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가 간호라는 걸 알았습니다. 간호를 공부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내가 쓰임받았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아프리카로 간 건가요?
“졸업 후 대학 병원에서 6년간 일했는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나더군요. 급여나 생활 안정성 면에서 안주해버릴 것 같아서요. 그 무렵 서울의 한 교회를 통해, 아프리카 케냐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제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가족들 반대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요.
“가족들은 가지 않기를 바랐죠. 그때 선도 많이 들어왔거든요(웃음). 결혼해서 평범하게 아기 낳고 살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할 것 같았어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도 대학 때부터 워낙 제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걸 아셨기에, 결국엔 지지해주셨어요.”
–대학 병원 간호사로, 혹은 한국에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요.
“아프리카에 가야만 봉사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를 더 요구하는 곳에서, 더 열악하고 힘든 곳에서 도움이 됐으면 했어요. 그게 아프리카였고요. 한국 대학 병원은 제가 없어도 일할 사람이 많잖아요.”
◇ 말라위의 나이팅게일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미국의 NP(전담 간호사·nurse practitioner)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은 전문의 진료 전, NP가 진단을 내리고 처방전을 쓸 수 있어요. 케냐 간호협회에 등록하고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현지 간호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이동식 진료 차량을 타고 왕진 가방 들고서 각 마을을 돌았어요. 피부 문제 있는 환자부터 말라리아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를 돌봤습니다.”
–케냐에서 4년 일하다, 말라위로 갔습니다.
“케냐만 해도 동부 아프리카 중심 나라입니다. 수도인 나이로비에서는 국제 회의도 많이 열리고, 대형 병원도 있고요. 당시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말라위는 의료진이 인구 대비 가장 부족한 나라였어요.”
–언어도, 음식도 다른데 힘들지 않았나요.
“저는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에는 자신이 있어요. 흙바닥에서도 잘 수 있고, 호텔에서도 잘 수 있고요.”
–성천상 시상식 전, 현지 교민 인터뷰에서 ‘백 간호사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했다’는 얘기가 나와요.
“말라위에 가니, 초기라면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오래 내버려둬서 위험해진 경우가 많았어요. 조기 치료와 추후 관리까지 할 수 있는 진료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당시 한국은 IMF 외환 위기로 많이 어려웠어요. 지인들이 도와줬지만, 제 생활비도 줄여야 했죠. 바나나 하나, 커피 한잔으로 버티는 날이 많았어요. 내가 가진 건 몸 하나, 젊다는 게 전부여서 그거라도 바쳐야겠다는 심정이었어요.”
–진료소 다음은 병원 건립이었습니다.
“한번은 새벽에 아이 엄마가 뇌성 말라리아 아이를 품고 진료소에 왔는데, 이미 혼수 상태였습니다. 아이가 손도 못 써보고 제 품에서 죽었어요. 아이를 땅에 묻고 돌아오면서, ‘의료 시설이라도 뒷받침된다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병원을 세워야겠다' 하는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진료소와 달리 병원 건축은 돈이 훨씬 많이 들 텐데요.
“꿈으로만 간직하나 싶었는데, 어느 날 이동 진료를 가는 길에 한국에서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인데 ‘뭐가 필요하냐’고 묻더군요.
저는 1000불로 살림 사는 사람인데, 이분은 도와주시겠다는 규모가 달라요(웃음). 자꾸 필요한 걸 말해보라고 하기에, 병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 평생 현역이 꿈
당시 백 간호사에게 전화한 사람은 해운 회사인 대양상선 정유근 회장(75)이다.
정 회장은 유엔세계식량계획(WFP)과 함께, 기근 국가를 위한 원조 식량 운송을 했다.
가난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국가를 직접 도울 방안을 찾던 정 회장은 WFP를 통해 백 간호사를 소개받았고, 그해 10월 아프리카에 ‘미라클 포 아프리카’ 재단을 세워 병원 건립을 시작했다.
정 회장이 재단 이사장, 백 간호사가 이사를 맡았다. 2년 5개월 만에 200병상 규모의 최신식 장비를 갖춘 ‘대양 누가 병원’이 말라위 수도 릴롱궤에 세워졌다.
–기공식에 말라위 대통령도 왔습니다.
“병원 기공식 날, 대통령이 오신다고 태극기를 가져오래요. 급하게 태극기 100개를 구했어요. 말라위 대통령이 달리는 길 양쪽으로 태극기 수십 개가 펄럭거리는데, 참 감격스럽더군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도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지은 병원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들 조언은, 병원에서 제일 좋은 방을 쓰래요(웃음). 그래야 사람들이 우습게 안 보고, 품위도 지킬 수 있다고요.
제일 좋은 방은 현지인 병원장 주고, 주요 직책도 다 현지인들한테 맡겼어요. 이 병원은 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위한 거니까요."
‘미라클 포 아프리카’는 2010년에는 대양간호대학을, 2012년에는 정보통신기술대학을 세웠다.
–왜 대학을 세웠나요?
“아프리카에 온 지 15년 정도 됐을 때, 변화가 없다는 생각에 회의감에 빠졌어요. 이대로라면 100년을 여기서 살아도 그대로일 것 같았어요. 교육만이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목표는요?
“평생 현역으로 살고 싶어요. 이제 병원은 현지인들이 자리를 잡아서 잘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새로운 지역을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돈에 대한 욕심은 없으신가요?
“살면서 돈이 필요한 건 맞아요. 그렇지만 ‘돈이 제일이다’라고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후에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하는데, 아프리카는 고구마도 많고 호박도 많고 농산물은 되게 싸거든요(웃음). 내 몸 하나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다는 배짱이 있어요. 지금 제가 입은 옷도 국제 구호품 시장에서 1달러 주고 산 거예요. 저한테 필요한 건 넘치도록 받고 있어요. 나눠줘야 할 만큼요.”
–후회 없는 인생인가요?
“네. 한 번 사는 인생, 가장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게 어떤 길인가 선택하고 보니, 그게 이 길이었어요.”
< 남정미 기자 >
=========================
☆"잃은 것", "있는 것"--
독일의 재무부 장관을 지낸
“마티 바덴”(Marty Bad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매사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하여
국가를 위해서도 크게 공헌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하고 있을 때,
한 번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서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밤새 도둑을 맞은 것입니다.
여행 중에 구두를 잃어버렸으니
다시 사야 하고,
다시 사려고 보니 사러 나갈 신발도 없고,
그는 화가 나서
어느 놈이 신발을 훔쳐 갔느냐고 욕하면서,
"하나님도 무심 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다 훔쳐가게 하다니." 하며,
아무 관련도 없는 하나님까지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날은 주일날 이였는데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신발을 꺼내 빌려 주면서
같이 교회를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교회에 끌려 갔습니다.
그러나 남들은 다 찬송하고 기도하는데,
그는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니였고,
신발을 도둑 맞은 것 때문에
계속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니
찬송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하고 있고,
기도를 드릴 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덴은 바로 큰 충격을 받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 보았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전부 잃어 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 없겠구나.
그에 비하면 나는 신발만 잃어 버렸으니,
신발이야 없으면 사서 또 신으면 될 것을
괜스레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까지 원망하였구나!"
그래서 그후로 바덴은 인생관이 달라져서
자기에게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그때부터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모든 일들이 다 잘풀려서
결국 독일의 재무장관까지 지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수시로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어진 삶에 감사 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더 많은 생활이 되고,
불평과 불만이 더 많다보니
하는 일마다 쉽게 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 싫어하게 되어
스스로 고립되어 지옥을 만들지 않나 싶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스스로 초라하고 불행해 지지만,
내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법어(法語)에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림에 따라
맺혔던 원수가 점점 풀어지고,
동시에 복덕이 유여하고 받게 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이는
늘 사은의 도움을,
원망만 하는 이는
늘 미물에게서도 해독을 받으리라" 고 합니다.
오늘 하루도 나에게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고,
불평 불만과 부정의 원망보다는
한 생각을 돌린 긍정의 감사 생활로 일관하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좇는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로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행복하세요.
- 옮긴 글 -
=========================
🍒 누님
가난한 집안에 장녀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남의집 식모로 팔려가
몇푼 되지도 않은 돈을 받고 살다가 조금 머리가 커지자
봉제공장에서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죽어라고 일만 하던 누님이 계셨다.
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하나 사쓰는 것도 아까워 안사고
돈을 버는대로 고향집에 보내서 동생들 뒷바라지 했다
그 많은 먼지를 하얗게 머리에 뒤집어 쓰고
몸은 병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소처럼 일만 해서
"동생 셋을 대학까지 보내서 제대로 키웠다.
이 누나는 시집가는 것도 아까워 사랑하는 남자를 눈물로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감내하며 숙명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늙어 갔다
그러다 몸이 이상해서 약국에서 약으로 버티다 결국은 쓰러져 동료들이 업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위암말기 라는 판정을 듣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술을 해서 위를 잘라내면 살수 있다고 했다
누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
큰 동생에게 전화를 합니다
"동생아.내가 수술을 해야하는데
3,000만원 정도 든단다"
동생이 골프를 치다말고 말합니다
"누나, 내가 3만불이 어딨어" 누나는"알았다, 미안하다"
힘없이 전화를 끊습니다.
둘째 동생에게 전화를 합니다.
둘째 동생은 변호사입니다.
"동생아,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네, 어떡하냐?"
둘째가 말합니다
"누나 요즘 수입이 없어서 많이 힘드네"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막내 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사정얘기를 하자
막일을 하며 힘겹게 사는 동생이 부인과 함께 단숨에 뛰어 왔습니다.
"누나, 집 보증금을 빼왔어, 이걸로 수술 합시다"
누나는 막내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기에 그냥 두 부부를 부둥켜 안고 울기만 합니다.
수술하기 전날 밤
보호자 침대에서 잠이 든 올케를 바라보던 누나는
조심스레 옷을 갈아 입고 안개속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횡당보도에서 있던 누나는 자동차 불빛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렇게 누나는 한많은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맙니다.
꿈속에서 조용히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이는 누나의 손길이 느껴져 놀라 깨어보니...
누나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빈 침대위에 놓여진 편지를 봅니다.
몇 줄의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막내야, 올케야, 고맙다."
"죽어서도 너희들을
지켜주마.
내가 그나마 죽기 전에 보험을 들어 놓아서 이거라도 줄 수 있어서
참 다행 이구나"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누나가 죽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다른 두 동생들은 누나의
사망보험금이
상당하다는 걸 알고
막내를 협박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나누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
"법적인 모든 것을 동원하겠다"
두 형수들과 함께 욕을 하며 막내 부부에게 위협을 가합니다
결국은 법정다툼으로 갔습니다 막내는 그냥 줘버릴까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나의 핏값을 두 형으로 부터 지키고 싶었던 막내는 결국은 소송을 시작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가 변론을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몇 개월의 소송끝에 판결을 받습니다
판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 갑니다.
그리고 누나의 휴대폰에 저장된 문자를 읽어주자 두 형들은 두 말 하지않고
밖으로 나갑니다.
삶이 그렇더군요
친구의 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곤궁에 처해 도움의 손길을 비칠때
그 사람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좋은 때 잘하는 것은
짐승이라도 잘 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조금만 손해 간다 싶으면
외면 해버리는 게 인심입니다.
이렇게 불쌍하게
삶을 마감한 그 누님은 성자와 같은
삶을 살다가 그렇게 죽어 갔습니다
살아 있을 때...
효를 다하고
의를 다하고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어려울때 성심으로 대하는 참된 우정과
사랑을 베풀고 나눌 수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60~70년대
산업화를 이끌던 우리의 누나들, 형님들..
그리고 썩어 문드러져 가면서 밑거름이
되어주신 부모님 세대들에게
함부로 '꼰대'라고 불러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극도의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감동을 드리는 좋은글에서-
=======================
아침 단상
♡늙은 남편이 부담스럽다
동물 사회에서 늙은 수컷은 비장하거나 비참하다.
평생 적으로부터 무리를 보호하던 숫사자는
사냥할 힘을 잃으면 젊은 수컷 에게 자리를 내주고
쫓겨나 '마지막 여행' 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간다.
늙은 숫 고양이도 죽을 때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침팬지도 늙은 수컷은 젊은 것들과 암컷에게 애물 단지처럼 왕따 당하며 산다.
어느 나라건'늙은 남편'을 조롱하는 농담은 넘쳐난다.
일본에서는"비 오는 가을날 구두 에 붙은 낙엽"신세로 비유된다.
아무리 떼 내려 해도 달라 붙는 귀찮은 존재라는 뜻이다.
실제 인구조사 결과도 씁쓸하다.몇 년 전 일본 에히메현에서 노인 3,100명을 조사했더니. 여성은 남편 있는 쪽이,
남편 없는 쪽보다 사망 위험이 두 배 높았고, 남성은 그 반대로 부인 있는 쪽이 더 오래 살았다.
"늙은 남편이 아내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높기때문" 이라고 했다.
엊그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여성의 72%가"늙은 남편이 부담스럽다"는 여론 조사를 발표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 그만큼 돌봐야 하는 기간도 늘어날 것 이라는 여성 쪽 걱정이었다.
늘 듣던 말 같은데 남성이 점점 더 내몰리는 느낌이다.
내 주변의 실화 하나를 소개한다.
내 지인 A씨는71세이고 부인 B씨는67세 입니다.
어느날 B씨가 모임에 갔다가 외출 에서 돌아오자 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 가더랍니다.
A씨는 인사말도 없이 들어가는 부인이 이상하여 B씨의 방으로 가서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다정하게 물어 보아도
아무런 말이 없이 엎어져 누어만 있기에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기다리다가 한 참 지난후에.
B가 하는말이"다들 싱글인데 나만 싱글이 아니어서 싱글이 부러워서 그런다"고 울더랍니다.즉 다른 여자들은 혼자 몸 이어서 다 들 밥걱정도 않하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자기만 남편이 있어서 부자유스럽고 불편해서 그런답니다.
이 말을 들은 A 씨는 조용히 방을 나와 자기방에서 혼자 명상에 잠겼답니다.
퇴직 전까지 아이들 먹이고, 가르치고 장가 보내고 하느라 한 평생을 뼈가 빠지도록 일 해오면서 취미 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왔는데...
이젠 아내로부터 실상 버림받게 되는 신세 가 되었구나 하는 처량한 생각에 잠이 오지 않더랍니다.
술을 마시며 자신을 달래보아도 누구에게 배신 당한것 같은 감정이 북바쳐 올라 자살하고 싶은 심정이 들더랍니다.
다음날 아내 B씨를 앉혀 놓고 감정을 달래며 물으니, 형식적으로"잘못 했어요" 라는 대답과는 달리 태도가 이전같지 않더랍니다.
이런 얘기를 술자리에서 괴롭게 털어놓는 A씨는 "어찌하면 좋으냐?"
고 물어도 나 자신도 도저히 이말에 정답을 찾을 수 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부장 문화는 이제 여인들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그 고분고분 하고 순박하며 시어머니, 시누이들을 무서워 하며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던 효부 시대는 머나먼 전설 속에 사라졌습니다.
아~늙은 수컷들이 갈 곳은? ....??
- 글 퍼
=========================
📖 좋은 글들
https://m.blog.naver.com/kgb815/220012453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