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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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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 선조님 자료실 스크랩 정씨의 내력
나주.정종섭 추천 0 조회 216 11.05.28 21:4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본관은 옛 문헌에 210본 또는 247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동래(東萊)·연일(延日)·해주(海州)·진주(晉州)·하동(河東)·초계(草溪)·온양(溫陽)·경주(慶州)·청주(淸州)·봉화(奉化)·광주(光州)·나주(羅州)·서산(瑞山)·김포(金浦)·야성(野城)·함평(咸平)·청산(靑山)·장기(長)·영덕(盈德)·곤양(昆陽)·서경(西京) 등 30여 본이다. 역사적으로 명벌(名閥)로서의 지위를 누려왔으며 특히 조선시대에 동래정씨(東萊鄭氏)를 으뜸으로 연일·청주·온양·진주·하동정씨 등이 상당한 세력을 폈다.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6촌(六村) 중 자산(山)진지촌(珍支村:本彼部)의 촌장인 지백호(智伯虎:佐命功臣)이다.

본피부락은 현재의 경주시 중심부에 있었으므로 정씨는 일찍부터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고 살던 선주민(先住民)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정씨의 각 본관별 시조들은 모두 지백호의 원손(遠孫)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 혈연적 계보(系譜)를 가려낼 방도는 없다. 일반적으로 정씨는 한 혈손이며 그 중 경주정씨가 큰 집이 된다는 데에는 별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 다만 동성이족(同姓異族)으로서 서산정씨가 있는데 그 시조 신보(臣保)는 원래 중국의 저장[浙江] 사람으로 송(宋)나라의 원외부(員外部) 벼슬에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망명해 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로는 의종 때 명신 습명(襲明), 그의 6대 손인 몽주(夢周), 의종 때 무신정변을 주동한 중부(仲夫), 예종 때 학자·문인이었던 항(沆)과 그의 아들인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저자 서(敍), 고려 당대의 시객(詩客) 지상(知常) 등이 두드러졌으며, 그 위세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활짝 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31명의 상신(相臣)과 75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75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29만 8291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4.4%로 249성 중 제5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42만 2220가구, 178만 648명으로 성별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5위였다. 본관별 내력과 주요 인물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래정씨】 시조는 신라 때의 안일호장(安逸戶長) 회문(繪文)이고, 그 후손이 고려 초 호장을 지낸 지원(之遠)이다. 지원의 아들 목(穆)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목의 아들 항(沆)은 문종·인종 때 우사간·충청도안찰사 등을 지냈으며, 항의 아들이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서이다. 조선시대에 정승 17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했는데 상신(相臣) 17명은 왕손인 전주이씨의 22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동래정씨는 지원의 6세에서 교서랑(校書郞:輔)파와 첨사공(詹事公:弼)파의 2파로 대별된다. 이들 2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분화하는데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파(大護軍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직제학공파의 파조(派祖) 사(賜:세종 때 예문관직제학)는 아들 5명, 손자
10명을 두었으며 그중 셋째 아들 난종(蘭宗)은 동래정씨 중흥의 조(祖)라 할 수 있다. 난종은 세조~성종 때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이조판서·우참찬을 역임하였고,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광필(光弼)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그 밖에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사룡(士龍), 선조 때 우의정 지연(芝衍), 숙종 때 우의정 재숭(載嵩), 헌종 때 영의정 원용(元容), 정조 때 우의정 홍순(弘淳) 등이 있으며, 대호군파는 여립(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몰락하였다.

【연일정씨】 시조는 신라 때 간관(諫官) 종은(宗殷)이며 그 후손인 습명(襲明)을 중조(中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극유(克儒)를 중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이 양파는 시조를 같이 하면서도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지주사공파에서는 몽주(夢周)가, 감무공파에서는 철(澈)이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배출한 상신(相臣) 5명과 대제학(大提學) 3명 가운데 유성(維成:현종 때의 우의정)만이 몽주의 후손일 뿐, 홍명(弘溟:인조 때 대제학)·호(澔:영조 때 영의정)·우량(羽良:영조 때 우의정) 등은 모두 철의 집안이다. 이 밖에 지주사공파로는 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제두(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대임(大任), 효종 때 학자 극후(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문승(文升) 등이 있고, 감무공파로는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사도(思道) 등을 들 수 있다.

【해주정씨】 시조는 고려 신종 때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낸 숙(肅)이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인물로는 무신정변을 일으켜 8년 동안 무단정치를 폈던 중부(仲夫)를 들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종·세종 때 호조판서 등을 지낸 역(易), 그의 아들로 세종 때 형조참판을 지낸 충경(忠敬), 그의 손자로 단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종(悰) 등이 있다. 또 연산군 때 난세(亂世)를 예견하고 종적을 감추어 버린 일화의 주인공 희량(希良)은 역의 현손으로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도 정통했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으로 활약하고 영흥부사·길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부(文孚)는 역의 5대 손인 부사 신(愼)의 아들이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는 60명에 달했다.

【진주정씨】 동성동본이면서도 족보가 다원화되어 있어서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진주정씨의 본고장인 경남 진주(晉州)에서는 강(姜)·하(河)·정 3성(姓)을 3대 성으로 치고 있지만, 그 중 진주정씨에는 '진주8정(八鄭)'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시조와 계통을 달리하는 8파가 있다.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1명을 포함하여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했으며, 그 대표적 인물은 조선 문종 때 좌찬성을 지낸 분()을 들 수 있으며, 대표적 학자로는 선조 때 경세(經世)가 있고, 세종~세조 때 충청도관찰사와 중추원지사를 지낸 척(陟)은 특히 글씨에 능하였다. 성종 때 효자와 청백리로 유명한 성근(誠謹)은 척의 아들로서, 성근 집안은 대대로 효행이 이름났다. 그 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순사한 사제(思悌), 숙종 때 문신 필달(必達) 등이 있다.

【하동정씨】 고려 명종 때 서북면병마절도사·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세유(世裕)를 시조로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상신(相臣) 1명, 대제학 1명 등 문과 급제자 58명을 배출했다. 조선 전기에는 세종 때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초(招), 세종∼세조 때 학자 인지(麟趾), 세종 때 수충(守忠), 성종 때 여창(汝昌) 등이 특히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중기에는 광해군 때 택뢰(澤雷),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봉수(鳳壽)·기수(麒壽) 형제, 당대의 뛰어난 서예가였던 경흠(慶欽)과 충엽(忠燁), 지리학자로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상기(尙驥) 등이 있다.

【초계정씨】 고려 초의 학자 배걸(倍傑)을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 문(文)도 예종 때 형부상서·정당문학 등을 지내며 문명을 날렸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광해군 때 온(蘊)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스승 인홍(仁弘:瑞山鄭氏)이 대북파(大北派)의 권신(權臣)이 되자 절교하였으나 인홍이 참형을 당하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었다고 한다. 10여 년 동안의 제주도 유배생활 중에 지은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는 잘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중종 때 윤겸(允謙), 선조 때 청백리 종영(宗榮), 영조 때 훈련대장을 역임한 여직(汝稷)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57명을 배출하였다.

【온양정씨】 고려시대 호부상서를 역임한 보천(普天)을 시조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순붕(順朋:명종 때 우의정)·만석(晩錫:순조 때 우의정) 등 2명의 상신과 문과 급제자 43명을 배출하였다. 그 밖에 정조 때 시파(時派)의 거두였던 민시(民始)는 순붕의 9대 손이며, 현종 때 학자로 시문과 서예에 뛰어났던 두경(斗卿)은 현손이고, 정조 때 예조판서 등을 지낸 창순(昌順)은 8대 손이다.

【경주정씨】 정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 초기 6부 가운데 본피부(本彼部:山 珍支村)의 촌장이던 지백호(智伯虎)라는 것이 통설이며 이른바 범정씨(汎鄭氏)의 '큰 집'격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씨상계세보(鄭氏上系世譜)》에 따르면 경주정씨의 시조(중시조) 진후(珍厚:고려 平章事)는 지백호의 40대 손이 된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는데, 그중 희계(熙啓)가 잘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전사한 발(撥)은 희계의 5대 손인 군수 명선(明善)의 아들이다. 이 밖에 세종 때 좌찬성이 추증된 지년(知年), 명종 때 성리학의 대가 지운(之雲)을 들 수 있다.

【청주정씨】 시조는 고려시대 보승별장(保勝別將) 극경(克卿)이다. 조선시대 역대 인물로는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탁(擢), 선조 때 좌찬성을 지낸 곤수(崑壽),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탁(琢),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구(逑) 등 당대의 거유(巨儒)·명신이 있다. 탁은 조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어 도전(道傳)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하였으며, 곤수는 대명(對明) 외교의 1인자로 청백리에도 올랐고, 구는 예학자(禮學者)·문장가로 산수·병진(兵陣)·의약·풍수에 능통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심지택(沈之澤)·허목(許穆) 등이 그의 제자였다. 탁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이순신(李舜臣)·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발탁하였고, 이순신을 감옥에서 구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9명을 배출하였다.

【봉화정씨】 시조는 고려 말 밀직부사를 지낸 영찬(英粲)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태조 때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도전(道傳)과 그의 증손으로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문형(文炯)을 들 수 있다. 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전·궁문에서부터 도성의 8대문, 성내(城內) 48방(坊)의 이름을 짓고 《고려사》를 편찬하였으며 성곽의 수축, 역참(驛站)의 설치 등 여러 가지 규모와 시설과 정책이 그의 머리에서 나와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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