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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야기 스크랩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 이기철[나의 삶 나의 문학]
더밝은미소 추천 0 조회 54 14.12.26 04: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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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 이기철

 

이기철 시인은……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 영남대 문과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시집 《청산행》 《열하를 향하여》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무, 나의 모국어》와 시선집 《노래마다 눈물이 묻어 있다》 등이 있다.

●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대구시문화상 등 수상.

● 자유시 동인. 영남대 교수 등 역임.

● 현재 영남대 명예교수.

 

 

 

 

역마살의 인생

 

‘시인이 되어 암소를 타고’ 가면 보인다. 태어나 그 동네밖엔 아무 데도 못 가 본 나비가, 세상 바깥은 알려고도 않는 도랑물의 송사리가, 제 날개 닿는 하늘만 세상 전부인 줄 아는 잠자리 떼가. ‘암소를 타고 짚신을 신고’ 가면 보인다. 아직도 옛날 옷 그대로 입고 봄 마중 나온 꽃다지가, 엉덩이에 똥을 묻히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암소가, 이제는 서 있기도 힘겨워 그만 누워도 괜찮을 나이인 뒷동산 소나무의 생애가…….

 

자연의 이름

 

미루나무와 버드나무를 확실히 구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후박나무와 마로니에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 백양나무와 자작나무, 억새꽃과 갈대꽃의 구별을 확실히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나생이와 꽃다지, 씀바귀와 냉이의 구별 역시 그렇다. 흙에서 자란 사람이면 비교적 이런 이름들에 익숙하겠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이런 이름들의 구별은 더욱 어렵다.

 

그들은 나무를 만지면서 자란 사람들이 아니라 책 속에서 나무를 만난 사람들이고 풀꽃의 향기를 맡으면서 자란 사람들이 아니라 글자로만 풀꽃을 익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푸레나무, 은사시나무의 이름은 아름답다.

백리향, 미나리아재비, 구름송이풀의 이름은 예쁘다. 두루미냉이, 애기똥풀의 이름은 또한 얼마나 앙증스러운가. 나는 산과 강, 길과 마을, 교량과 언덕에 이름을 붙인 사람들에게 찬탄을 보낸다. 그 사람의 마음이 무구했기에 그토록 예쁜 이름을 길과 마을에 붙였을 것이기에.

 

우리는 매일매일을 사람의 이름 속에서 산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람의 이름보다 나무의 이름이 더욱 아름답고 신선할 때가 있다. 부르면 부를수록 입안에 초록이 고이는 것은 풀꽃의 이름 아닌가. 짐승과 새, 구름과 바람의 이름 또한 무엇이 다른가! 구름할미새, 눈썹새, 각시붕어라는 이름은 도감에도 없다. 그런 새와 그런 물고기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런 이름은 시인의 마음속에, 내 시의 문맥 속에 있다.

 

슬프기 위해 태어난 두 사람

 

삼순이는 달리기를 잘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근 가는 아버질 따라 진준가 사천인가로 이사를 갔다. 깔매놀이(공깃돌놀이)를 잘했고 쇠꼴도 잘 뜯었다. 가난했고 신발은 늘 검정 고무신이었고 양말을 신은 적 없는 맨발은 늘 살갗이 튼 채였다. 여름 치마는 늘 삼베치마, 가을 들면 언제나 검정 물 들인 무명치마였다.

나는 그때 5학년이었다. 삼순이가 이사 가는 날은 입춘 지난 2월이었고 산기슭에는 아직도 얼었다 녹는 눈이 멧부리를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나는 아버질 따라 고무신을 끌며 떠나는 삼순이를 멀리서 바라보며 ‘삼순아, 잘 가.’ 하고 불러 보지도 못했다. 혼자 언덕에 올라가 아버지를 따라가는 삼순이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30년이 지났을까? 나는 어쭙잖은 대학 선생이 되었다. 학교는 영남대학교, 내 연구실은 종합강의동 4층에 있었다. 나는 강의를 마치고 분필 묻은 손을 씻지도 못한 채 연구실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때, 한 중년 아줌마가 밀대를 들고 계단 청소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나를 의식했던지, 그녀는 그만 얼굴을 돌리면서 황급히 위층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에게는 틀림없이 그 청소원 아줌마가 삼순이었다.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온 내 시가 30년 전에 쓴 〈월동엽서〉다.

 

 

순이, 손을 몇 번 불어서 그 겨울은 지나갔나

미나리 잎새 얼어서 얼음 밑에 묻혀 있던 그 겨울

장작개비 책보에 앉고 가던 등굣길

소백산맥 끝 웅크린 골짜기

너는 전근 가는 아버질 따라 진주ㄴ가 사천인가로

닳은 고무신을 끌며 떠났지만

얼음이 얼다 녹던 축축한 멧부리에 앉아

마른 잔디만 집어 뜯던 나는 지금

허언을 괴로워하는 삐걱이는 강의실 계단을 오르내린다

스물이 지나 서른이 되어서 너의 검정치마도

세상 따라 모양이 달라졌겠지만

진주ㄴ가 사천인가의 조그만 마을에서 너는 이제 두 번째 아이를 낳고

들길에 나가 너의 아이들에게

새로 핀 꽃 이름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겨울에 난로 꺼지면 나는 양말을 갈아 신고

저 죽은 풀빛의 들판이나 밟으면서

겨울의 가장 따뜻한 곳으로 걸어가야겠다

눈이 내리면 다시 시린 손을 불며

 

? 〈월동엽서〉(1980)

 

 

시골 중학은 남녀공학이었다.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중학은 개교 3년째밖에 안 되는 신설학교였다. 내가 그 중학엘 입학했을 땐 그 학교는 임시교사에 바람벽만 해놓은 교실 5칸, 돌멩이 많은 운동장엔 울도 담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교정에는 그 흔한 플라타너스 한 그루, 느티나무 한 둥치도 없는, 철봉과 평행봉 두어 개만 서 있는 개활지였다. 나는 거기를 3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다녀 3년 개근을 했다. 도산리에는 제법 큰 시내가 있었는데 그 냇물을 건널 때마다 신발을 벗었다가 발을 닦은 뒤 다시 신발을 신고 학교로 가는 나날을 견뎌야 했다.

 

“신발을 벗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내를 건너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불과 열 집 안팎의 촌락은/

봄이면 화사했다/

복숭아꽃이 떨어져도 아무도 알은 체를 안 했다/

아쉽다든지 안타깝다든지”

(〈고향〉 부분)는 그러한 배경에서 태어난 내 시다.

 

 

 

그 길 양편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었다. 중3 때의 어느 날, 영어단어를 외며 집으로 오는 내 발 앞에 정갈하게 개켜진 손수건 하나를 발견했다. 길가, 풀밭에 얌전히 놓여 있는 그 손수건은 알 수 없는 인력(引力)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손수건 안에 깨끗이 접혀 있는 한 통의 편지, 그 편지가 십수 년 전 ‘모아드림’에서 낸 내 에세이집 《손수건에 싼 편지》이다. 이 편지는 남녀공학인 이 신설학교의, 2년 아래인 여학생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풀숲에 놓아둔 ‘손수건에 싼 편지’였다.

그로부터 그 여학생과의 긴 여정은 시작되었지만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어 서울 한일병원에 근무하다가 파독(派獨) 간호사가 되어 한국을 떠났다.

그가 떠날 땐 나는 강원도 원주와 횡성서 M1 소총을 어깨에 메고 밤마다 보초를 서야 하는 육군 상병이었다.

 

요즘처럼, 그 흔한 공항의 이별도 못한 채 홀로 떠나고 홀로 남은 이별이었다. 그는 그 후 서독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가 영국으로 가서, 영국 생활을 하다가 미국 뉴저지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세월은 저 혼자 흘러 지금은 생사도 알지 못하는 세월로 바뀌고 말았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비련의 한 토막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작(詩作) 배경을 말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내 초기 시 〈이향(離鄕)〉은 그래서 나왔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어떤 자리에서나 자주 받는 질문인 시 〈이향〉의 배경이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할 수 없어 그저 얼버무리고 만, 나의 숨겨놓은 이야기의 첫 개봉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 인생의 첫 고배(苦杯)다.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산란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 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뒤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릴 듣는 2급 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놀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무섭게 나를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눈에 익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들 불러 모으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몇 권의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홀로 누운 할아버지의 산소를 한 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 〈이향〉(1981)

 

 

세월은 물처럼

 

 

 

나는 중학 시절부터 김소월과 워즈워스를 좋아했다.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와 릴케의 〈가을날〉도 함께 좋아했다. 내가 시를 알고 시를 동무로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김소월의 시로부터였다. 좋은 시를 보면 무작정 외웠다. 외우면 그것이 나의 것이 되었다. 시를 외기 시작하면서부터 수학이 싫어졌다. 수학문제도 시를 외우듯 외워서 풀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4·19가 일어나고 그해 5월 아림예술제(아림은 거창의 옛 이름)가 열려 〈새〉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아림예술상을 받았다. “낮달이 흘리고 간 비명이/ 피가 되어 흐르는 지역에서도/ 상처 진 나래를 펴고 새는 날아야 했다”라는 중간 부분만이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시, 그것이 아마도, 어쩌면 운명적으로 나를 시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국문학과를 택한 이유도 그런 데 있었을 것이다. 대학 2학년 시절, 《사상계》에 연재하던 송욱 선생의 평론 〈시학평전〉을 읽고 나서 송 선생의 김소월에 대한 혹평에 가슴이 아파 《사상계》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가 ‘독자란’에 실렸는데, 그것이 공인된 책에 실린 첫 글이었다. 기뻤다.

〈경희대학보〉 261호(1965년)에 조태일 시인의 평론 〈한국 현대시의 갈 길〉을 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반박문을 써서 그다음 호 학보에 발표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조태일의 글은, 시는 고발과 저항으로 이루어진 성서이며 한국 현대시는 창녀시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면서 나는 차츰 시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내 시의 기호는 엘리엇과 발레리, 폴 클로델, 쥘 쉬페르비엘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워즈워스나 김소월의 시만을 외며 그 길을 걸었어야 했는데, 20대의 나의 지적 호기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생경한 외국 시와 외국 이론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것은 필요악이었다. 내 시가 차츰 주지성을 띠게 되는 것도 그로 인해서였던 것 같다. 이성대 교수의 영시강독, 이재선 교수의 문학이론 강의에 매료되었던 것도 그런 나를 부추겼다. 대학 2학년 때 경북대학교 학보 지령 300호 기념 전국대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응모한 〈여백시초〉라는 63행의 긴 시가 김춘수 선생의 선으로 당선한 것도 그러한 시작(詩作)의 일환이었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던진 시 〈트라클의 병동〉이 오탁번의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에 밀려 낙선하기까지 내 고행의 역정이 모두 그렇다.

 

나는 그 뒤, 1972년 11월호 《현대문학》에 〈오월에 들른 고향〉 〈향가시(鄕歌詩)〉 등으로 2회 추천을 완료했다. 지금도 내 고향 친구 윤충묵은 술이 거나해지면 내 추천작 〈오월에 들른 고향〉을 흥얼거리며 “그것은 너 혼자만의 시가 아니야, 그것은 우리 모두의 청춘의 고백록이야.” 하고 내 어깨를 친다.

 

 

오월에 들른 고향은

아카샤꽃이 피고 있었고

한 잎 두 잎 지다 남은 복숭아꽃이 지고 있었다

비둘기 울음이

뚜깔잎의 저녁 이슬을 떨고 있었고

서풍이 풀잎의 이른 잠을 깨우며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고개를 저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멀리 석양의 붉은 그늘 아래서

천 년 전에 들었던

청동기가 깨지는 소리로

개가 짖고 있었고

마을 앞에는

포플라만이 키 큰 서양 사람처럼

활짝 만개하고 있었다

 

오월에 들른 고향

거기엔 서툰 걸음마가 쓰러지기 잘하던

내 아이 적의 고통과

비 오면 자주 끊어지던

학교 길의 도랑이 걸레처럼 구겨져

흐르고 있었다

 

? 〈오월에 들른 고향〉(1972)

 

 

아라모도 사진관

 

나에게는 소년 시절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사연인즉 이렇다. 이 이야기를 하는 나는 가슴부터 아파 온다. 아픈 기억은 씻어도 씻어도 씻기지 않는다. 시 〈이향〉에서 썼던 그 후배 여학생이 어느 날 나의 시골집으로 놀러 왔다. 우리는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며 산과 들을 하염없이 헤맸다. 나는 산길을 걸으며 원추리꽃을 꺾어 후배의 교복에 꽂아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어미소의 꽁무니를 따라 송아지들이 마구간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후배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산과 들을 쏘다니다 늦어서 돌아온 나를 형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형은 본래 부산수산고등학교를 다니며 이등항해사를 꿈꾸었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형이 고1, 내가 중1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11마지기 논농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그가 학교를 중퇴하고 귀향해서 농사를 짓고 있던 터였다. 서툰 농사꾼이 된 형은 자연 불만이 잉걸불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의 대학 진학을 허락지 않았다. 형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해를 반거충이가 되어 떠돌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희망은 그 후배와의 만남뿐이었다. 형은 술에 취해 있었다. 나에게 어디를 돌아다니다 이제 왔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마당귀에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형은 더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쓰던 원고 나부랭이와 책과 사진첩을 들고 나와 모조리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태웠다. 나는 만류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긁적거리던 시 원고들이 아궁이에 들어가는 것이 아까웠지만, 아궁이에 들어간 원고를 꺼낼 수가 없었다.

 

나의 소년 시절의 사진은 주로 고향의 면사무소 앞에 있는 아라모도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다. 아라모도 사진관의 추억은 그리하여 쓰디쓴 추억을 안고 내 등 뒤로 사라졌다. 형은 나의 오래고 힘겨운 짐이었다. 지금도 가끔 신문이나 잡지에서 나의 소년 시절의 사진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에게는 잃어버린 소년 시절의 상처만 독버섯처럼 되살아날 뿐이다. 나에게는 옛날 추억은 있어도 옛날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앞에 실린 사진은 그나마도 그림을 그리는 친구 임영준에게서 빌린 것이다.

 

창가에 앉아 1분

 

외람되게도 당신에게, 우리 집에 와 보신 적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 집은 도심에서 팔십 리는 떨어진 산골인데요, 제가 이 집으로 이사 온 지는 한 구 년쯤 되었습니다. 한 번 더 외람되게도 당신에게, 그 집을 누가 설계했는지 아시느냐고 묻습니다. 이 집은 제가 순전히 주먹구구로 얼개를 꾸린 집이지요. 설계라고 했습니까? 설계라니요, 제가 무슨 공법을 알아 설계를 했겠습니까? 상상의 주춧돌과 생각의 서까래를 이리저리 이어 소목장이 둘의 손을 빌려 지은 집입니다.

 

저는 소년 시절부터, 장차 커서 어른이 되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꼭 이것 하나는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앉고 내가 서고 내가 눕고 나 혼자 뒹굴며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내 맘대로 공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 한 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조그만 오두막일지라도 책 두 권 크기의 창이 달린 집이었지요. 그 창을 바라보며 저는 한겨울 저녁 어두워 가는 겨울 풍경과 일찍 뜬 개밥바라기별과 소식도 없이 내리는 눈발이 갑자기 목화송이가 되어 마당을 하이얗게 덮는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빨갛게 익은 떼찔레 열매가 눈에 안 덮이려고 머리를 살래살래 흔드는 광경을 본 일이 있다면 좋겠네요. 놀러 갔다 돌아온 털북숭이 강아지 귀에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참 가난했다고 말한들 당신이 그 가난의 스란치마 끝자락이 땅에 닿는 소리를 짐작이라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꿈은 내가 마지막 직장에서 퇴임하기 아홉 해 전쯤에야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에 오두막보단 좀 큰 집 한 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럭저럭 이 집에는 책 두 권보단 좀 크고 담요 두 장보단 좀 작은 창이 네 개는 달렸습니다. 이 창가에 앉아 저는 세상 사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생각의 구름장들을 공중으로 날려 보내면서 햇살에 반짝이는 공상의 파편들을 손바닥에 얹어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들이 어언 저의 취미가 되어버렸네요.

 

이른 봄, 3월이면 담장 위에 노오란 개나리가 피고, 여름이면 샛바람 따라온 소낙비가 한껏 넓어진 오동잎을 풍금의 건반처럼 두드리고, 시월이면 느티나무가 제 일 년 치의 잎새 구름을 다 벗어던지고 홀몸으로 서는 것을 바라보는 데 이젠 이력이 났습니다. 겨울에는 내 눈이 더 바빠진다고 말하면 당신은 혹시 ‘왜?’라고 묻겠습니까?

얼기 전에 뽑아 들여야 하는 무 배추는 고사하고, 겉 품으로는 추위와 싸울 단단한 채비를 해 보이는 갓나물, 가을상추, 쪽파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익히 부르는 남새인 정구지도 시나나빠도, 아직은 얼지 않은 꼬리머위 잎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손이 모자라 아직도 따 가지 않은 아래 밭 홍시는 또 어쩌겠습니까?

얼기 전에 따야 하는 붉디붉은 능금은 또 어쩌고요. 느티나무 상수리나무가 맘껏 쏟아놓은 이파리들이야 밟히는 소리가 음악이니 그대로 둘 양이지만 어제 보이던 다람쥐와 청설모의 재롱이나 까막까치들의 바쁜 날갯짓도 눈이 내리기 전에 오래 망막에 심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동잎에 찬비 후두기는 걸 보니 날씨가 추워지려는 거군요. 빗속으로 떠나는 저 벽오동 잎새를 오래 바라보고 서 있을 여가가 없습니다. 마음은 바쁘고 몸은 따르지 않는군요. 나는 작년에 넣어둔 내복을 꺼내 입고 덧옷도 하나 어깨에 걸치고, 창 아래 놓인 작고 둥근 나무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봅니다. 몸이 점점 추워 오지만 석윳값이 폭등해 보일러를 펑펑 돌릴 수가 없군요.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시야는 좁아 내외 오 리도 채 안 됩니다만, 저쪽 풍경은 아름답고 이쪽 풍경은 쓸쓸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 풍경이 내 마음의 흑백사진이 되기에 저는 마음 액자에 사진 한 장을 담으려고 창가에 바짝 다가앉습니다. 여기서 저는 시 쓰지 않을 것입니다. 창이 시보다 더 아름다운데 거기서 시를 써서 무얼 하겠습니까? 여기서 시 쓰는 일은 창에게 미안한 일이겠거든요.

 

 

 

마당귀에 자동차를 세워 두었군요. 자동차를 자전거로 바꿔 부르는 일이 조그맣고 앙증스럽게 느껴지는군요. 자동차의 뒤쪽에는 백양 숲이 하이얀 실루엣으로 서 있고 앞쪽은 텅 빈 마당뿐이네요. 창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광경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무심이라니요, 생각이 이렇게 많은데 어찌 무심입니까?

그러나 여기서 제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그저 무심이라고 해 둡시다. 이런 일들도 기실 종이가 피어 너덜너덜해진 문고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스무 번째 읽다가 이 만연체의 문장과 이 글이 갖는 감정의 과잉에 잠시 싫증이 나서 눈을 쉴 참에 생긴 일입니다. 저로서는 생을 두 번 맞아도 이런 훌륭한 문장을 쓸 수는 없으면서 공연히 이 명작을 헐뜯는 말을 해버렸군요. 실로 우리가 밤새워 달려가 빌려 올 문장이야말로 이런 출렁이는 사랑과 분출하는 낭만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글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이 말만은 고백처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누가 창이라고 부른 뒤부터 창은 아름다워졌다는 행과, 누가 시라고 부른 뒤부터 시가 아름다워졌다는 구절은 아무리 당신이 나무란다 해도 고칠 수 없는 저의 믿음입니다.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여 주시는군요. 그렇다면 당신도 이제 한식경만이라도 창 앞에 앉아보십시오. 그러면 그때, 창에는 구름 한 송이와 바람 한 다발 외에는 아무것도 걸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겨울을 맞는 채소가 몸을 사리는군요. 당신도 몸피를 줄이고 겨울 지나 봄 올 때까지 강녕하시길 빕니다. 그래서 쓰인 시가 〈창가에 앉아 1분〉입니다.

 

 

붉은 자전거의 뒤쪽은 아름답고 앞쪽은 쓸쓸하다고 쓰려면

창 앞으로 바짝 다가가야 한다

안과 밖을 다 보여주는 것은 창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창을 만든 사람보다 창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눈이 창의 안이거나 바깥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입을 옆으로 벌려 창을 길게 발음해 본다

창은 깨지는 소리여서 창이라는 발음은 처음부터 아름답지는 않으나

그가 처음 창이라 부른 뒤부터 창은 아름다워졌다

시 속에 들어가 보면 시는 아름답지 않은 말의 집합이지만

누군가 그것을 시라고 불러서 비로소 아름다워졌다

내가 창가에 앉는 것은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잊기 위해서다

나는 더 많은 돌에 걸려 넘어져 봐야 돌의 생명을 안다고 말하려다가

시에 더 많이 걸려 넘어져 봐야 시의 생명을 안다고 말하려고 창가에 앉는다

이 시간 나처럼 누군가가 창가에 앉아 있다면

그도 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잊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창이 아름답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해서 그것을 창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창은 몸 안에 위도 폐도 간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은 흐린 것까지 잘 보여주므로 흐린 마음들은 창을 믿지 않는다

안과 밖, 앞과 뒤가 없는 저것을 공중에 달아놓고 창, 하고 부른 사람

그는 아마도 시를 버리기가 가장 좋은 곳이 창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창이 받아주지 않아 그 말을 못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입이 하지 않은 것은 절대로 창이 대신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창은 창으로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르면 더 고요하고 만지면 더 차가워지는 창을

처음 창이라 부른 사람, 그의 둥근 입술을 보고 싶다

 

? 〈창가에 앉아 1분〉(2012년 《현대시학》 발표)

 

 

김현승, 서정주, 김춘수

 

1971년에 제대를 하고, 휴학했던 학교를 복학했다. 대구에 집이 없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시를 쓰는 일은 잊지 않고 밤마다 말의 파지를 냈다. 그러다가 얻은 습작 두 편을, 이재선 교수의 주소를 빌려 김현승 선생한테 보냈다. 내심으로는 추천을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열흘쯤 뒤에 이재선 교수가 나에게 편지 한 통을 전달했다.

겉봉에 김현승 선생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큰 기쁨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추천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격려의 편지는 내 문학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나는 그해 여름 김현승 선생의 수색동 집을 방문했다. 서울 지리에 어두운 나는 서울에서 사료회사에 다니던 윤충묵의 지프를 타고 김현승 선생 댁으로 향했다. 새로 지은 깨끗한 반양옥 집, 어느 방에선가 피아노 소리가 번져 나오는 시인의 작은 서재. 다형 선생은 처음 보는 방문객에게 손수 커피를 끓여 주면서 보들레르, 말라르메 이야기를 했고, 대구 강연 왔을 때 대구역 앞의 ‘산장’ 다방 이야기를 길게 했다. “커피 맛을 아는 데는 나만 한 사람도 없을 거요.”라는 말도 곁들였다. 작고 깡마르고 눈빛이 형형했던 다형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등단을 하고 2년 뒤, 나는 멋모르고 대구에서 시집 하날 자비출판을 했다. 뒤에 낸 《청산행》 해설에서 평론가 염무웅이, 이 시집은 ‘이기철의 교양 체험이 빚어낸 시집’이라고 쓴 바로 그 시집 《낱말추적》이다. 나는 《낱말추적》 원고를 뭉쳐 들고 서울 관악구 사당동 예술인마을의 서정주 선생 댁을 찾았다. 아동문학 이론가 이재철, 시인 문덕수와 함께였다.

 

마침 거기에는 이형기 선생이 와 있었다. 나는 그때는 구하기 힘든 경주 법주를 한 병 사 가지고 갔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던지 미당이 맥주 한 상자를 새로 시키고 이웃집에 산다는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을 전화로 불러와 집안에 갑자기 소연(小宴)이 벌어졌다. 나는 시종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자리가 파할 즈음, 시집의 서문을 미당 선생께 부탁하고 마당을 빠져나왔다. 그때, 흰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은 미당이 자리가 파한 뒤에도 떠나는 후배 시인들을 따라오려고 끝내 흰 고무신을 끌고 골목까지 따라나오는 천진한 모습을 보면서 저런 모습이 참시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나중에 받은 미당 선생의 서문은 200자 원고지 여섯 장 정도의 자필이었는데 그 난필을 알아볼 수가 없어 내가 대충 문장을 꿰맞추기까지 했다. 나는 지금도 미당 선생의 〈바다〉 〈풀밭에 누워서〉 등 초기 시를 좋아한다.

 

김춘수 선생의 이야기는 여러 번 쓴 일이 있다. 그는 나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했고, 5공화국 15인 주비위원(籌備委員)이 되어 서울로 가면서 영남대 국문과의 현대시론 강의를 나에게 물려주고 간 사람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매몰찬 사람이었다.

 

1980년대 중반 어느 가을, 나는 전주에서 열리는 시인협회 세미나에 가기 위해 김춘수 선생과 버스의 한자리에 앉았다. 토요일이라 전주까지 장장 7시간을 꾸물거리는 버스에서 선생은 자주 차를 멈추게 했다. 선생은 그때 전립선염을 앓고 있어 소변을 자주 봐야 했다. 그 7시간의 지루함을 이기려고 선생은 많은 이야길 했다. 그때 들은 이야기 한 토막. 그에게는 이탈리아에 가서 조각 공부를 하는, 아직 장가를 들이지 못한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한데 막내의 유학비를 마련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알려진 대로 평생 은행에서 자기 손으로 돈 한 번 찾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이 말도 그의 트릭이 아닌지 모르겠다). 국회의원에서 물러난 뒤 그는 예술원 지원금과 사보 등에 글을 써서 받는 돈으로 생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에 막내며느리를 보았는데 며느리가 의사’라고 하면서, “그놈(막내아들)이 물건이 좋은 모양이야.” 하고 껄껄 웃었다.

 

시는 원쑤인가 사랑인가?

 

내 정의대로라면, 시는 3S다. Salt, Shocking, Shortness다. 시는 짭짤하고, 경이롭고, 짧아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시인은 산문가를 비웃으며 자기 세계를 끝내 고집한다.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시인에게 시는 자기 왕국이며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시인은 절대권력자이자 제왕이다. 누군가가 상소를 올려도 들은 체도 않는다.

시행의 생사여탈권은 시인에게 있다. 그는 시 안에서 군림한다. 이런 시가 있다.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의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사진첩〉이라는 시의 일부다.

삶과 사랑에 대한 반어적 성찰이지만, 앞의 두 행에서 진지했던 진술이 뒤의 한 행 때문에 그만 실소를 터뜨리게 한다. 일하고 사랑하고 사색하고 고뇌하면서 살다가 노년이 된 사람이 결국 일 때문도 아니고 사랑 때문도 아닌, 감기에 걸려 죽다니! 의료보험공단의 전단을 읽는 느낌이다. 재미는 있으나 시적 긴장감이 완전히 해소되어 버린다.

Salt에서도 Shocking에서도 Shortness에서도 낙제다. 적어도 내 의견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끝과 시작》이라는 그의 시집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또 이런 시도 있다.

 

 

이 시대엔 너도 나도 시를 쓴다 지식인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무식한 사람은 무식을 감추기 위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모두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나도 시집을 낸다 대머리도 쓰고 이가 빠진 인간들도 쓰고 병든 늙은이도 방에 앉아 시를 쓴다 손을 떨면서 기침을 하면서 모두 죽어라 하고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 모두 대단한 인간들이다 나도 대단한 인간이다 모두 미친 것 같다 시를 쓰고 부지런히 시집을 내고 상도 받고 아무튼 재미있는 나라다

 

? 이승훈 〈좋아, 웃어라〉 부분

 

 

이 능청, 이 못 말리는 야유, 이 시니시즘도 결국 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시인 권능이다. 물론 3S의 원칙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통쾌하다. 그도 기침을 하다가 이 시 한 편으로 감기가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재밌다. 그의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실 시가 없으면 삶이 무의미해질 거라면 시인에게 있어 시는 원쑤가 아니라 사랑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말을 모은다. 짭짤하고 경이롭고 짧고 여운이 남는 말―베갯모, 십자수, 봄동나물, 종다리, 보시기, 몽당연필, 붓뚜껑, 간장종지, 도롱이, 물레방아, 툇마루, 섬돌, 속치마, 새털구름 같은 말들을…….

 

 

/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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