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들이 아름다운 신안
≪ 연 혁 ≫
- 상고시대 : 마한에 속함
- 백제시대 : 아차산군, 거지산현, 고록지현으로 분포
- 통일신라 : 압해군에속해 갈도현 안파현, 염해현으로 분포
- 고려시대 : 나주목에 속해 장산현, 육창현, 임치현, 압해현으로 분포
- 조선시대 : 나주목, 광주목, 지도군, 영광군, 해남현으로 분포
- 일제강점기 : 무안군에 속함
- 1969.1.1 신안군으로 분군
≪ 소 개 ≫
신안군은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1004개의 크고 작은 다도해의 아름다운 섬들로 이루어진 도서군입니다.
게르마늄이 함유된 국내최대의 광활한 갯벌과 전국 천일염의 65%를 생산하는 드넓은 염전, 풍부한 해산물 등 수많은 자원과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과 사시사철 많은 볼거리와 때묻지 않은 자연의 풍경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한 고장입니다.
수려한 노송과 기암괴석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천연기념물 제 170호인 홍도를 비롯하여 람사협약에 등록된 장도 습지와 홍어로 유명한 흑산도, 중국의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최서남단 가거도, 울창한 송림과 12km(명사삼십리)의 은빛 백사장을 자랑하는 관광지 임자 대광해수욕장, 해안선이 원을 그리듯 아름다운 도초 시목, 자은 백길해수욕장 등은 옛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낭만이 깃든 곳입니다.
또한, 근대추상화가인 수화 김환기 선생의 생가가 있는 안좌면, 300여년의 토지탈환역사를 가지고 있는 하의도에는 토지역사기념관과 해양문화체험공원(소금박물관) 등 많은 문화유적과 시설들이 있으며 각 섬마다의 독특한 문화와 볼거리가 있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세계의 이묵을 집중시켰던 중국 송.원대 청자, 백자등 진귀한 유물들이 증도면 방축리 해역에서 대량으로 발굴 인양된바 있는 역사 유적지이며, 연근해 풍부한 어장 자원으로 홍어,우럭, 돔 등의 어류를 비롯하여 맛과 질이 뛰어난 미역과 돌김, 임자도의 국내최대 새우젓생산지(70%),병어,민어, 비금도의 시금치(섬초) 등 많은 특산물이 생산되는 고장입니다.
≪ 천연기념물 제 170호 홍도 ≫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즘 가보고 싶어하는 섬 홍도 신안이라는 이름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홍도는 해마다 수십만의 관광객이 찾아오는아름다운 섬이다. 홍도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 섬으로 목포항에서 서남쪽 115km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의 길이가 6.7km 동서의 길이가 2.4km의 누에 모양을 한 홍도는 섬의 2/3를 차지하는 북쪽과 1/3을 차지하는 남쪽이 대목이라는 좁은 바닥으로 있으며 1965년 홍도천연보호구역(천영기념물 제170호)으로 지정되었으며 1981년에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섬 주위에 펼펴진 크고 작은 무인도와 까아지른 듯한 절벽들은 오랜 세월의 풍파로 말로 표현할수 없는 아름다운 절결을 이루고 있다. 또한 물이 맑고 투명하여 바람이 없는 날에는 바다 속10m가 넘게 들여다 보이는데 바다속의 신비로운 경관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유명한 풍란의 자생지인 홍도에는 아름드리 동백숲과 후박나무 식나무 등 희귀식물 5백40여종과 2백31종의 동물 및 곤충이 서식하고 있다.
홍도에는 1구와 2구 두개의 마을이 있는데 1구에는 해수욕장이 있고 2구에는 해안의 전망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등대가 있다. 두 마을에서 모두 숙박할수 있는데 마을 사이의 왕래는 배를 이용한다.
홍도 관광은 주로 유람선을 이용하는데 남문바위,실금리굴, 석화굴,탑섬,일곱남매바위,수중자연부부탑 등 홍도10경 외에도 섬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답다.
기암괴석으로 이루러진 절결 뿐 아니라 바위틈에 빽빽이 자라는 나무들 또한 마치 정성스럽게 분재를 해놓은 양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여름철이면 섬을 노랗게 수놓는 원추리 꽃과 이름 봄 붉게 섬을 뒤덥는 동백꽃 또한 홍도에서 볼수 있는 장관이다.
홍도주민들의 생업은 주로 관광수입에 의존하는 편인데 이러한 관광수입외에 어업에서 생기는 수입도 만만치 않다. 홍도의 특산물로는 전복,돌미역,돌김 등 청정해역에서만 맛볼수 있는 것으로 맛이 일품이다.
≪ 홍어의 섬 흑산도 ≫
흑산도는 섬다운 섬이다.신안군의 다른 섬들이 농업을 주된 생업으로 하는 반면 흑산도 사람들의 생업은 대부분 바다를 무대로 한 어업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진정으로 섬다운 섬, 어촌다운 어촌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흑산도가 제격이다.
영산팔경으로 유명한 섬 주위의 영산도를 비롯하여 국민적인 관광지로 자리잡은 홍도,태도군도,가거도,만재도 등 수많은 섬을 넓은 오지랖으로 껴안고 있는 흑산도 이 흑산도는 두개의 풍경을 가지고 있다. 어업전진기지인 예리항의 풍경이 유흥업소와 숙박시설로 흥청대는 분위기라면 면소재지인 진리는 흑산도의 풍경과 바닷가에 고즈넉이 서있는 성당과 교회의 명상적인 풍경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흑산도에 오면 밤늦도록 불야성을 이루는 흑산도의 풍경과 바닷가에 고즈넉이 서있는 성당과 교회의 명상적인 풍경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흑산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847년 당나라를 여행한 일본스님 원인이 쓴 당구법순례여행기에 흑도로 등장하는가 하면 828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 섬을 거쳐 당나라와 교역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거리상 중국과 가까운 탓에 징검다리를 삼았을 만 하다. 그도 그럴것이 흑산도는 목포에서 자그마치 93km 떨어진 섬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었기 때문에 흑산도는 유배의 섬이기도 했다. 흑산도가 유배지였던 이유는 거리도 거리지만 뱃길이 험했던 까닭이다.지금이야 쾌속선으로 두시간 거리지만 과거 쾌속선이 없던 시절은 목포에서 새벽밥먹고 출발하면 한밤중에 흑산도에 닿았다. 거리로 보면 제주도보다 가깝지만 물길이 험해서 돛단배 시절에는 일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형에서 감형된 중죄인을 섬으로 귀양보낼때 으레 감사도배(減死島配)라 하여 흑산도로 보냈다고 한다.
흑산도가 유배의 섬이었기에 유배지에서 꽃피운 학자들의 고고한 삶으 자취를 찾아볼수 있다. 면암 최익현과 손암 정약전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손암 정약전은 순조1년(1801년)신유사화때 흑산도로 유배되었다.손암은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출생한 남인계통의 학자로 서학에 뜻을 두어 천주교에 입교한 포교에 몰두했다. 다산 정약용의 친형이기도 한 손암은 벼슬도 버리고 전도에 힘쓸만큼 천주교에 열중했는데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내려져 결국 손암도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손암은 15년간의 귀양살이 동안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155여종을 채집하여 명칭,형태,분포상황들을 기록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고 이는 우리나라 어족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그 당시에 보기드문 자연과학서적이기도 하다. 외딴섬으로 유배되어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귀양살이에서도 심리적인 동요가 없이 자연을 관찰하고 해양문학을 집필하는 등 손암의 의연하고 꿋꿋한 선비정신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또 면암 최익현은 1876년에 대원군의 폭정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고종임금께 올렸다가 죄인으로 몰려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면암은 경기도 포천군 태생으로 1876녕에 왜선이 강도에 들어와 강화수호조약을 강요하자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가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신의 목을 베라‘고 엎드려 상소한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疏)사건으로 3년여 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면암은 이 유배생활 동안 진리마을에 큰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고 천촌리로 옮긴 뒤로는 일심당(一心堂)이란 서당을 건립하여 마을사람들의 교육과 애국애족이 정신을 심어주었다.면암이 손바닥바위(指掌岩)에 친필로 쓴 기봉강산홍무일월(箕封江山洪武日月)이라는 글귀는 우리나라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독립된 국가임을 강조하는 뜻으로 면암의 우국충정을 나타낸 유명한 표현이다.
흑산도 진리에 당제로 처녀신을 모시는 아름다운 처녀당이 있는데 처녀신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진리에는 또한 천연기념물 369호로 지정된 희귀수 초령목이 있고 고려말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석등과 석탑이 있다.
진리2구 뒷산에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의 것으로 보이는 반달모양의 반월성이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 장보고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흑산도 하면 빼놓을수 없는게 바로 홍어다.매년 추위가 몰아치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어장이 형성된 까닭에 위험이 따르고 많은 양이 잡히지 않아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흑산도의 또다른 특산물로는 가리비, 전복, 성게, 돌김 등이 있다.
신안군의 향토문화유적
≪ 김대중대통령 생가 ≫
김대중대통령은 1925년 하의면 후광리 원후광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수금)사이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초암서당에서 김연(金鍊)선생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하의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12세에 목포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다섯 번에 걸친 죽을 고비와 6년간의 감옥살이, 55차례의 연금, 10년의 망명생활 등 고통의 세월을 견디어 ‘인동초’라 불리는 섬마을 소년은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그의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을 향한 노력과 삶이 인정되어 2000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생가는 목조초가 2동으로 1999년 종친들이 복원하여 신안군에 기증하였다.
≪ 흑산면 진리석탑 및 석등 ≫
읍동마을 뒤편의 속칭 ‘탑산골’ 골짜기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라산 북쪽 능선의 동쪽 끝자락에 해당된다. 이곳을 통해 흑산도 서부지역으로 연결되며 상라산성과는 약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까지 사찰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채 삼층석탑과 석등, 건물지의 축대 일부만이 전해져 오고 있던 절터였다. 최근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무심사선원(无心寺禪院)’이라 새겨진 숫키와편 4점이 발견됨으로서 선종(禪宗)계통의 사찰로 밝혀지게 되었다.
읍동마을 주민들은 이 석탑과 석등을 각각 ‘수탑’ ‘암탑’ 이라 부른다. 석탑의 현재 높이는 1.5m로 팽나무로 인해 10°정도 기울어져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본래는 지금보다 약간 남쪽에 있었다 하며, 붕괴 위험 때문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한다. 붕괴를 막기 위해 상대갑석 아래 부분은 시멘트로 보강되어 있다. 팽나무 뿌리 밑둥에는 면석형의 석재가 깔려 있어 본래는 2층 기단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층의 비율이 일정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층수도 현재보다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迹調査資料)에 4층 석탑으로 보고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본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이다.
≪ 진리 초령목 자생지 ≫
초령목(학명 Michelia compressa)은 목련과 초령목속이며 아시아 1종 1속의 희귀종으로 흑산면 진리마을 당산 내에 약 300년 수령의 노거수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와 흑산도에서만 서식하는 수목으로 거의 멸종된 희귀수목이다. 초령목(招靈木)이란 이름은 이 나무가지를 불전(佛前)에 꽂아 귀신(鬼神)을 부른다는 설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 하여 일명 ‘귀신(鬼神)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1992년 10월 22일 천연기념물 제369호로 지정되었으나, 1994년 초령목이 고사(枯死; 수고: 20m, 직경: 2.4m)함에 따라 2001년 9월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고사한 고목은 98년부터 방부처리하여 보호하고 있다. 주변에 어린 초령목 43그루가 자생하고 있는데, 자생하고 있는 어린 초령목은 관목층과 초본층에 수고 30cm~250cm 크기로 확인되고, 그 중 큰 것은 수고 약 5m, 흉고 직경 12cm~14cm의 것도 확인된다.
고사된 초령목 인근에는 진리 당집과 당숲이 있고 산의 외곽으로 보호책이 설치되어 있고, 남동쪽으로는 도로와 바다가 인접해 있다. 주변 상층 식생으로는 홍송, 해송, 동백, 후박나무, 담팔수, 서어나무, 시누대, 둥글레 등이 있고, 하층 식생으로는 이대, 바랭이, 강아지풀, 염초 등이 자라고 있다.
≪ 암태 송곡리 매향비 ≫
암태 송곡리 매향비는 조선시대 초기인 1405년(태종 5, 永樂 3)에 세워진 매향비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섬에서 발견된 것으로, 당시의 불교문화와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높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
매향(埋香)이란 향나무[香木]를 묻는 민간불교 신앙의례이다. 향나무를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역에 오래 묻었다가 약재나 불교 의식용 등으로 썼으며, 그 매향의 시기와 장소, 관련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또는 암각)이다. 매향이란 미래 구복적인 성향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이다. 매침(埋沈)한 향(香)을 매개로 발원자와 하생(下生)한 미륵이 연결되기를 기원한 것이다. 매향은 말단 지방사회를 단위로 해서 구현되며, 특히 발원자(發願者)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위기감을 바탕으로 한 순수한 민간신앙 형태라 할 수 있다.
매향비는 정제되지 않은 자연석의 평평한 면에 7행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제1행에 '매향처반사도(埋香處伴巳島)'라 하여 매향의 위치와 방위가 명시되었다. 아울러 사방기준지, 매향시기, 주도집단, 매향과 비석을 세운 경위, 참여자, 시주자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매향의 주도층으로 '향도(香徒)'가 명시된 점과 '매향처(埋香處)'를 명확하게 기록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도초 고란리 석장승 ≫
도초 고란리 석장승은 본래 목장승으로 당제를 지내오던 고란마을 민속공동체의 신앙물이며, 1938년 목장승에서 석장승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른다. 장승은 마을 입구 ‘장석거리’ 또는 ‘삼거리’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다.
장승의 유래는 옛날 마을에 괴병이 번져 수많은 주민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마을을 지나던 한 선비가 ‘마을 앞에 장승을 세우면 화를 막을 수 있으리라’ 는 충고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그 말을 듣고 목장승을 세우고 당제를 지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석장승으로 세워졌다.
석장승은 화강석 재질로 머리에 약 30cm 높이의 모자를 쓰고 몸에 도포형의 긴 옷을 걸친 모습이다. 어깨부터 내린 소맷자락 아래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펼쳐져 있다. 80cm 길이의 얼굴은 290cm의 장승 전체 크기에 비해 다소 긴 편이다. 커다란 타원형의 눈이 튀어 나와 있고, 좁은 양 미간에서 길게 내려 온 삼각형 코는 두툼하여 투박하지만, 석장승의 전체적인 인상은 오히려 포근하고 익살스러운 느낌을 준다.
≪ 비금면 서산사 ≫
서산사는 비금면 고서리 985-1번지에 위치한다. 서산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1390년(고려 우왕 1) 내월리 선왕산 뒷편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위축되었던 포교활동이 1898년 목포개항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으나 큰 성과가 없게되자, 1920년에 절터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면서 신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3차례에 걸쳐 중창이 되었으며, 현재의 법당은 1989년에 개축한 것이다.
서산사는 불교의 미타신앙과 용왕신 혹은 산신 등 토착신앙이 복합되었는데, 이는 고대 이래 해양교역과 전통어업의 측면에서 비금도의 지정학적인 위상에서 비롯되어 섬 주민들 사이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 압해면 금산사 ≫
금산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금산사서(金山寺序)에 갑술년(1904년 추정)에 압해도 분매리에 거주하는 강성규(姜成奎), 목포의 강영옥(姜永玉)씨와 부인 배씨 등이 이곳에 들러 산수가 좋고 경치가 수려하여 불심을 널리 전파하고자 사찰을 창건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1981년 사찰이 보수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3년 신도들에 의해 중창된 것이다. 사찰의 건물은 대웅전, 관음전, 자명당 등이 있다. 1988년 7월 27일 전통사찰 제50호로 등록되었다.
≪ 내월리 석장승 ≫
내월리 월포마을 어귀에 ‘사장거리’ 또는 ‘사장’이라 불리는 공터가 있는데, 이 공터의 한쪽에 화강암을 깍아 세운 장승 1기가 있다. 장승 전면 기단에는 ‘大將軍(대장군)’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3m 크기의 대형 장승으로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1.5m의 장검을 거머 쥐고 눈을 위로 치켜 떠 앞의 숭애봉을 주시하고 있다.
숭애봉의 세찬 기 때문에 마을에 액운이 겹치자 주민들이 큰 바위돌을 구해 세웠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목장승이었으나 나중에 석장승으로 바꿔 세웠다고 하며, 관련된 의례로는 매년 정월 보름에 ‘산제’ 또는 ‘당제’라 불리는 마을제사가 있을 때 상당에서 상당제를 지내고 이곳에서 하당제를 모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장승제’라 한다.
≪ 동서리 선돌 ≫
동서리 도창마을에서 조찬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에 높이 4.8m, 폭 1m, 두께 0.5m, 둘레 2.96m의 대형 입석 1기가 있다. ‘송장수 지팡이’ 불리우고 있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옛날 송장수가 무술을 연마하던 중 휘하의 한 병사가 죽게 되었는데, 송장수는 석곽에 병사의 시신과 무기를 넣고 매장한 뒤 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선돌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 흑산 진리당 ≫
흑산도 진리 마을의 당제는 예로부터 성대한 규모로 이름 높았으며, 당(堂)은 흑산의 본당(本堂)이라고 전해질 만큼 권위가 높았다. 상당(上堂)과 용신당(龍神堂)으로 구성되었으며, 갯가에서 갯제를 지낼 때 임시로 설치하는 제청이 있다.
상당의 형성과 관련해서는 ‘당각시 설화’와 ‘총각화상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상당은 두 겹의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쪽 돌담은 신을 모신 당집을, 바깥 돌담은 제기와 취사도구를 보관하고 있는 문간방 주위로 둘러쳐져 있다. 현재 상당의 당집은 1938년 그 전의 집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상당의 돌담 오른쪽의 숲길을 따라 5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바다의 신인 용왕이 좌정한 용신당이 있다.
진리마을 당제는 제의 기간이나 절차로 보아 상당히 성대했다. 특히 제의 기간이 음력 정초부터 3일간이었던 것, 제관들이 들돌을 들어 보아 가벼우면 신들이 제물을 잘 흠양했다고 여겼던 의례, 그리고 갯제에서 무당을 불러 용왕굿을 성대하게 지내면서 뱃길의 무사와 풍어를 기원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 당제는 전승되지 않고 있으나 상당 앞마당에서는 4월 초파일 경로잔치를 비롯한 각종 마을 잔치과 집회가 열리고 있다.
* 상당 1동(16.53㎡) : 마을에서 정월 초에 제사를 지내는 곳
* 용신당 1동(9.92㎡) : 마을 어민들이 선박의 무사고와 풍어를 비는 고사
를 지내는 곳
≪ 상서 고분군 ≫
* 지정번호 : 신안군 향토자료 제 4호
* 소재지 : 신안군 신의면 상태서리 산 96
* 규 모 : 석실분 50여기
* 시 대 : 백제시대
* 지정연월일 : 2000년 1월 31일
상서4리 마을 뒷산인 안산의 하단부 구릉상에 석실고분의 매장시설구조와 유사한 집단무덤이 자리한다. 반경 150m 이내에 약 50여기로 추정되는 집단무덤은 대부분 봉토가 삭토되어 상석과 하부의 판석만 남아있다. 큰 것들은 남북방향으로 총 길이 3m에 3~4개의 장판형의 자연석 상판이 이어져 있고 하부는 3~4단의 자연석으로 석벽을 구축하였다. 구릉상에 널려 있는 작은 규모의 무덤들은 하부시설이 땅에 묻혀 있고 상판만 노출되어 있다. 인근에는 안산성과 자실리의 석실분 등을 고려해 볼 때 백제시기에 이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장산면 대리 고인돌 ≫
* 지정번호 : 신안군 향토자료 제 5호
* 소재지 : 신안군 장산면 대리 430
* 규 모 : 지석묘 2기
* 시 대 : 청동기시대
* 지정연월일 : 2000년 1월 31일
도창리로부터 장산중학교를 지나 아미산(배미산) 남쪽 언덕을 넘어 해안쪽으로 약 800m쯤 내려가면 평탄지가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이 평탄지에 2기의 지석묘가 남북으로 약 30m 거리를 두고 있다. 북쪽의 것은 남북방향의 상석에 그 크기는 장축 365㎝, 단축 305㎝, 두께 80㎝의 부정원형을 이루고 있다. 남쪽은 땅에 닿고 북쪽은 지상에서 1.4m 높이 위로 들려 있고, 하부에는 지석이 1개 받치고 있다. 남쪽의 것은 상석의 크기가 장축 200㎝, 단축 170㎝, 두께 50㎝이고 형태는 원형에 가깝다.
≪ 지도읍 두류단 ≫
지도읍 감정리 백련동 두류산 정상부에는 두류단이라 불리는 5선비가 세워져 있다.
최초의 두류단은 1720년경에 주자, 정여창, 김굉필 세 분을 모시는 정자를 짓고, 제향을 지내왔던 곳이라 전한다. 그 후 1914년 호남지방의 선비들이 전라도 지방의 학문과 사상에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이항로, 기정진, 김평묵 세 분을 단비(가로 33cm, 세로 68cm)로 모시고 ‘삼현단’이라 불렀다. 그리고 5년 뒤에 최익현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사현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복 이후인 1948년 중암 김평묵의 제자였던 지도 출신의 나유영 선생을 단비로 모시게 되면서 ‘오선생단’ 또는 ‘오선비(五善碑)’라 불러지고 있다. 현재 두류단에는 다섯 명의 선현을 추모하는 오선비와 두류산, 두류단의 유래를 기록한 두 개의 비석이 있다.
≪ 상라산성지 ≫
상라산성은 흑산면 진리 읍동마을 뒷산에 위치한 석성으로 형태가 반달모양과 흡사하다 하여 일명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린다. 흑산도가 고려시대 중국 사신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 통과하는 주요 포구였음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도 확인된다.
상라산성은 흑산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상라산(226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으로부터는 2개의 능선이 동쪽을 향해 뻗어있는데, 산성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 상라산의 북쪽 능선상에 있다. 성벽은 대체로 남사면의 6부 능선을 반월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상라산성은 바깥쪽에 비하여 내부가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계곡부에 면한 남사면도 비교적 경사가 심한 가파른 지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길이 280m 정도에 불과한 테뫼식 소형산성으로 순수 석축부만의 길이는 220m이다.
상라산성은 반월형의 평면형태로 우리나라 산성에서는 좀처럼 그 예를 찾기 힘든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면형태는 거의 수직에 가까우며 성벽은 편축법(片築法)으로 쌓았는데 상라산성과 같이 성 안팎의 높이 차이가 심한 지형에 적합한 축성법이다. 규모가 작은 만큼 산성에 딸린 부속시설도 별다른 것이 없다. 현재는 동문지와 건물지 1개소가 확인될 뿐이다. 그러나 동문지는 정확한 규모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거의 원형이 훼손되어 있다. 건물지는 해안과 접하고 있는 북쪽 능선의 중간쯤에 1개소가 남아 있다.
≪ 안산성지 ≫
안산성은 상태서리 안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상서고분군 뒤편으로 오르는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산길을 따라 오르면 산성의 동문지 근처에 이른다. 동문에서 확인되는 성벽의 규모는 높이 4m 내외이고, 20단 내외의 석축단으로 이루어졌다. 성벽의 하부는 60cm 내외의 장대석으로 구축되었고, 위쪽으로는 길이 40~45cm, 높이 25cm 정도의 석재들로 이루어졌다.
산성은 대체적으로 남쪽으로 자실리 고분군과 마주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400m 이고 내부에는 대형 건물지로 추정되는 석축기단이 확인된다. 건물지의 중앙부에는 제단 혹은 당숲으로 추정되는 나무숲이 우거져있다. 안산성에 대한 기록은 『남도진지(南桃鎭誌)』에 라고 기재되어 있어, 안산성이 남도포진(진도 임회면 남동리)의 돈대수비처(墩台守備處)였음을 알 수 있다.
≪ 장산토성지 ≫
장산토성은 배미산에서 대성산과 용골, 공수리, 활목을 연결하는 약8km 정도에 달하는 성터로 추정되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다. 이 토성은 백제시기 거지산현(居知山縣; 장산현)의 고성지(古城址)로 당시에 현 치소(治所)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 치소로 추정되는 대리와 도창리 일대(장산초등학교 뒤편) 주위는 낮은 구릉성 산지가 감싸고 있어 마치 거대한 원형경기장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남쪽에는 높은 대성산과 대성산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배미산에서 대성산까지 이르는 산줄기는 대성산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뻗어나가 공수리에 이른다. 현재 성벽의 잔존을 확인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태이나 削土法에 의해 축성된 성벽의 가장 양호한 부분은 1m 내외, 폭 2.5~3m 정도이다.
한편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배미산 뒤편의 두말이 마을 일대가 북문(北門)이었다고 하며, 사장(射場)이 있었던 살장밖이 동문, 통머리 마을 언덕이 남문, 대리 삼베잔등이 서문이 있었다고 한다.
≪ 대성산성지(장산) ≫
장산지역은 백제시기부터 현의 치소가 마련되었으나 고려말기 도서지역의 왜구창궐로 쇠락해 갔다 흑산도와 마찬가지로 장산현의 주민들도 육지의 나주 땅으로 옮겨졌고, 그 이후 해안지역의 안정이 이루어진 조선 세종 이후에 새로운 이주민들이 섬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시기에 축성된 이후 대성산성은 결국 이들의 입보(入保)와 함께 새로운 관방으로서의 의미가 부여되어 조선 숙종10년(1684) 전라감사 이사명(李師命)의 설진(設鎭) 건의 이후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대성산성은 대성산(189m)의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장산도의 남단에 높이 솟아 잇는 대성산은 진도와 해남 화원반도를 지나는 해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해로의 감시 목적으로 축성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성곽의 규모는 돈대(墩臺) 정도의 소규모 산성에 불과하다. 상태가 양호한 남벽이 70m 정도 남아 있는데 그 높이는 3~4m, 폭은 250cm 정도이며 가로 50cm, 세로 20cm 정도의 석재로 물림쌓기 방식에 의해 결구되었다. 내탁법(內托法)에 의해 구축된 성벽은 현재 남․서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축이 파괴된 상태이다.
≪ 송공산성지(압해) ≫
송공산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압해도의 중간 지점에서 다시 서쪽 방면 끄트머리에 위치한 송공산(230m) 정상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일제시기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정상에 소형 석루와 우물 1기가 있고 삼한시대 이전에 축조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송공산성 인근의 대천리 일대에는 58기의 고분이 조사 보고 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압해도의 송공산성은 일찍부터 토착세력의 근거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제시기에 서남해안 및 도서지역은 당시의 중요 해상활동과 연관된 교통의 요지였던 관계로 내륙의 어느 지역 못지않게 많은 군현들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서남지역을 통과하는 해로(海路)를 사이에 둔 당시 여러 섬들의 행정판도는 장산도에 설치되었던 거지산현(居知山縣)과 압해도에 설치되었던 아차산현(阿次山縣)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통일신라말기에 이르러 서남해 도서지역은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쟁패과정에서 후백제의 지지세력이 되었으며, 그 거점으로 압해도의 송공산성이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이후 압해도의 송공산성은 고려시기 몽고의 서남해 공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도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 왕산성지 ≫
왕산성은 고이도 왕산(80m)에 위치한 산성으로 그 축조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 왕건과 관련된 일부 기록과 전설이 전해온다.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은 서남해지역에서 공방전을 벌였는데, 왕건은 후백제를 장악하기 위해 무안반도와 인접한 고이도를 요충지로 삼아 후백제의 영역인 전라도 내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이도성[왕산성]을 점거하였던 것으로 보아 왕산성은 삼국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왕산성은 왕산의 동남쪽 7부 능선상에서 성축이 확인된다. 산성의 형태는 부정형으로 계곡을 포용한 포곡식(包谷式)산성이며, 성벽은 1m내외의 자연석과 50×20cm 정도의 잡석을 이용 협축법에 의해 축성되었다. 남아있는 성축은 높이 1.5m, 너비 3m 내외이며, 길이는 1,000m정도 이나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 ≫
우리나라 소작쟁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8월~1924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서태석의 주도로 소작인들은 '암태소작회'를 결성, 7~8할의 고율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지주가 묵살하자 소작료 불납동맹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소작회는 지주측 부친의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충돌하여 간부13명이 검거 되었다.
이에 박복영과 농민 400여명이 목포경찰서와 재판소에서 집단농성을 벌여 사회문제화 되자 일제 관헌이 개입하여 '소작료 4할로 인하, 구속자 쌍방 고소취하, 비석은 소작회 부담으로 복구한다'는 약정서가 교환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서해안 섬들과 전국적인 소작쟁의가 계기가 되었으며,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1998년 조성면적 95평에 높이 6.74m의 기념탑을 건립하여 암태도의 숭고한 소작인 항쟁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네이버 카페) : 기아문화유산답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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