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임자에서 파타야선교센타팀과 친선게임이 있습니다.
점암에서 10시배를 타고 들어갑니다.
유니폼은 노랑색을 입겠습니다.
회비는 여전히 1만원입니다.
오필환 선교사님은 1983년 프로축구 할렐루야팀 FW16 번 선수로 활동하시다가, 아내의 병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시다가 아내의 병도 고치고, 그 때 서원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다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좋은 환경과 여건을 모두 내려놓고, 태국으로 달려가서 그 곳을 열방 가운데 변화 시키시며, 하나님의 사역자로 크게 쓰임 받고 계시는 분입니다.
방센 축구단 감독-태국 오필환
불교와 축구의 나라, 태국. 부산 아시안게임의 축구에서 동남아 국가 중 유일하게 8강에 진출하는 동안 태국 현지에서도 전국 고교 축구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지난 10월 2일, 열대 특유의 스콜이 몰아치는 날씨에도 전국 고교 대회의 준결승전이 열렸다. 치열한 접전 끝에 3위를 차지한 쎈쑥 고등학교팀을 이끈 감독은 다름 아닌 한국인 오필환씨다. 92년부터 수도 방콕에서 80km 떨어진 방센에서 청소년 축구단을 이끌고 있는 오필환씨는 그간 태국의 4개 전국 대회 우승을 따내고 청소년 국가 대표를 배출하였다. 요즘 그의 '방센 축구단'은 매년 초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20여명을 선발하는데 수십명이 지원할 만큼 인기가 높다.
한때는 나도 축구선수
태국으로 건너오기 전 오필환씨의 직업은 축구선수였다. 10년간의 선수 생활을 접고 그가 택한 것은 후진양성. 그의 태국행은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어린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고자 했던 바램에서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 덜 체계적인 태국의 축구 환경은 오필환씨에게 단지 낯설고 물설은 이국 땅의 어려움이 아니었다. 자식을 축구 선수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지원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자비를 들여 산간 지역에 축구공을 나눠주고, 축구 교실을 열기도 하며 이민 초기에는 아이를 돌보기에도 너무나 바쁜 나날들을 보냈었다. 오필환씨 부부의 이런 노력 끝에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총 100여명이 모여있는 축구 클럽의 기숙사는 가난한 태국 학생들의 꿈의 집합소가 되었다.
축구공으로 전하는 희망
태국의 고등학교나 대학교엔 정식 축구부가 거의 없다. 열대 기후의 특성상 잔디 구장을 찾는 것은 쉽지만 선수들을 육성하는 지도력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상설 축구부가 없는 대신 오필환씨의 방센 축구단 선수들이 경기 때마다 각 학교의 팀에 선발되어 출전한다. 출전한 선수들은 학비를 면제받으며 학교를 다닐 수 있다. 돈이 없어도 축구 수업과 학업을 다 받으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전력을 쏟는 방센 축구단의 선수들은 지난 10년간 오필환씨가 쏟아 부은 열정의 증거가 됐다. 축구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오필환씨는 내년 1월부터 라오스의 국가 대표 감독직을 맡아 또 한번의 축구 인생을 펴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성악을 전공한 아내 조명숙씨 역시 자처했던 축구 클럽의 보모 역할을 계속 할 생각이다. 이들 부부에겐 가난과 무관심속에 방치된 제3국의 청소년들에게 축구를 통해 꿈을 꾸게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이자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2002년 kbs 한미족리포트의 나레이션 텍스트입니다. 길어도 한번 읽어보시면 오필환선교사님을 잘 알게되리라 생각됩니다.
편집을 하다가 힘들어서 뒤는 그냥 텍스트만 발췌해서 올립니다.
프로그램 : 한민족리포트 원고
부 제 : 꿈꾸는 축구단 -태국 오필환
방 송 일 : 2002년 10월 14일(월) 밤 12시
연 출 : 이동훈
글, 구성 : 장영미
조 연 출 : 김민정
태국 북부 고산지대는 소수민족의 땅이다. 말과 핏줄을 지키며 골짜기마다 고집스럽게 둥지를 틀었다. 구름과 안개속에 숨어산다는 조용한 민족, 몽족-그러나 작은 인기척에도 모여든다. 사람을 반길 줄 안다
몽족마을에 축구경기가 열린다.
“작은 아이가 가운데 있어서 보이지도 않겠다”
축구골대는 아이들이 벗어던진 신발이다
“선생님이 골키퍼 해줄게”
공이 발에 붙어다닌다. 발길질이 보통 매운 것이 아니다.
“야 골인이다!”
드문드문 고물차나 경운기가 지나갈 때 쉰다.
그렇게 후반전이 시작된다.
이 작은 몽족 아이들과 거인처럼 큰 한국인 오필환은닮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이다.
방콕은 ‘강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말그대로 방콕을 가로지르는 차오 프라야강은 어머니처럼 태국사람들을 품고 산다. 방콕의 수상가옥들은 이제 한국인에게 익숙한 관광지가 됐다.
“빵 물고기 밥 한국돈 천원”
“야자 콜라 맥주...”
수도 방콕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4번의 아시안게임을 개최한 도시다. 방콕에서 1시간거리인 이곳 방센엔 한국과 태국이 축구장 전경 스포츠로 맺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이들은 방센축구단이다. 그런데 유니포옴이 이상하다. 한국 대표팀의 유니폼에 히딩크의 나라 네델란드 오렌지군단도 있다. 그리고 독일에 이태리까지- 유니포옴으로만 친다면 각국 대표팀에 프로팀까지 막라한 세계 최강의 다국적팀이다.
유니포옴은 얻어입은 것이다. 방센축구단은 상관하지 않는다. 단지 뛸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한국 사람들이 왔다가 조기축구회 옷을 벗어놓고 연습 때는 유니포옴 필요 없어 아군과 적군 구별 쟤들은 이렇게 살아서 마음아파하지 않아 그것에 대한 불편함은 없고”
골키퍼의 장갑은 공을 막는데 도움이 안될 것 같고, 14살아래 초등학교 선수들은 축구화도 신지 않은 맨발이다. 실제로 태국의 초등학교축구대회는 맨발로 뛴다.
심지어 골대조차 하나다. 반대쪽 골대는 철책으로 막혀있다. 공이 넘어갈 때마다 방센축구단 선수들은 조심스럽게 철책을 넘는다. 겨우 마련한 전용연습장인데, 땅주인이 갑자기 땅을 사야한다며 철책을 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구김살하나없는 어린 선수들이다.
“이쪽에서 연습한다. 게임은 못하고 아쉬운대로 쓰고 있다.”
“땡! 일루와 자 이 두사람은 다 돌았으니까 공차기부터/ 18세팀! 자 여기 모여봐.”
그나마 반쪽짜리 운동장을 세팀이 나눠쓴다.
지금은 고교선수들의 연습시간 방센축구단엔 14세이하 초등학교팀과 16세,18세 중고등학교팀이 있다.
특별하기 그지없는 축구단 방센의 감독은 한국인 오필환씨다.
1982년 한국최초의 프로축구단인 할레루야팀의 선수였던 그가 가족을 이끌고 태국에 온 것은 정확히 10년전였다. 축구를 통한 선교 그것이 그의 제2의 인생였다.
방센축구단은 한국인 선교사 오필환씨가 운영하는 축구팀이다.
아이들을 학교를 마친후 이곳 (교회)에 와서 축구를 배우고 숙식을 제공받는다.
현재 이곳 방센축구단에서 생활하는 태국선수들은 모두 100명에 달한다. 선수들의 락커룸또한 여유있을리 없다. 몇몇은 드럼통을 개조한 사물함이다. 그러나 100여명의 소박한 사물함엔 세계적인 선수가 되겠다는 100개의 원대한 꿈이 숨어 있다.
실제로 이들의 성과에 태국전체가 놀랐다. 예닐곱살 코흘리개들로 시작했던 방센축구단이 불과 10년만에 전국대회우승컵을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축구 선수요. 태국 대표 선수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 축구 선수하고 싶어요.”
“프로축구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제 형도 축구를 합니다. 그래서 저도 하게 되었습니다.”
축구하면 뭐가 좋아?
“경험도 쌓이고 시합할 때 기술하는 것도 재밌구요.”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커가는 100여명 선수들의 배를 채우는 것또한 만만치않다.
“뚱냥 빠통이다 호박과 돼지고기 향료의 풀.. 아이들이 좋아한다. 아이들이 많으니까 이렇게 큰 후라이팬을 쓴다.”
태국인이 매끼마다 즐기는 돼지고기 100여명 선수들이 먹기에는 그다지 충분하지 않다.
양을 늘리는 묘안은 덩치에 비해 값이싼 야채 파파야다. 이렇게 해도 하루평균 쌀한가마, 며칠이면 반트럭의 야채를 먹어치우는 100여명 선수들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워낙 많아서 돼지고기를 많이 못넣는다.
“7시 정각에 저녁식사 할 테니 오세요. 지금 한 8-9분 남았어요. 모두들 준비하세요”
강철이라도 갉아먹을 나이다. 밥을 뜨고 7 늘 배고픈 100명 선수들의 저녁시간이다.
축구선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그러나 넉넉지 못한 살림으로 방센축구단의 선수들은 다른팀보다 체격이 작다. 기술은 앞서지만 몸이 작은 아이들- 때문에 청장년 선수로 성장할수록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 학교와 직장이 끝나는 저녁시간이면 태국 각지의 운동장에선 축구시합이 벌어진다. 태국의 축구열기는 대단하다. 주민들이 4,50명 되는 마을이면 반드시 축구장을 먼저 만든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의 아이들도 유명팀의 축구복과 축구화를 끼고 자란다/
언제 어디서고 벌어지는 길거리 축구 열살남짓한 아이들의 개인기는 놀라울 정도다.
지난 6월, 한국의 2002월드컵기간 태국정부는 비상을 선포했다. 축구경기를 보려는 꾀병조퇴에 축구도박까지- 월드컵 참가국이 아닌데도 태국엔 월드컵 광풍이 불었다.
한국과 이탈리아경기등은 동이 난지 오래다. 월드컵당시엔 8만의 태국인이 경기장에 모여 아시아의 한국을 응원했었다.
태국에 축구를 소개한 것은 100년전 유럽인들, 태국인의 축구사랑이 남다른 것은 전통과 관계깊다.
방센축구단이 쉬는시간에 즐기는 것은 한국의 아시안게임때 관심을 끈 세팍타크로- 600년 역사의 전통놀이다. 세팍타크로는 공을 차다라는 뜻 여러모로 축구와 유사하다.
“얘들이 어렸을때부터 해서 몸에 익어 한국의 축구선수들도 동네에서 따끌하는 선수를 이길
수 없어 공중회전과 스파이크가 거의 선수수준이다. 한국선수들이 대표선수들도 질거다.”
9월말, 태국학교의 여름방학이다. 방센축구단 선수들의 귀향길이 이어진다.
융라이가 고향을 떠나 방센 축구단에 들어간 것은 10살때였다. 그후 8년동안 이렇게 일년에 두 번 정도 집에 갔을 뿐이다. 5개월만에 만나는 엄마다. 그새 융라이의 키가 엄마를 훌쩍 넘어버렸다. 융하이의 엄마는 섬유공장에서 성실하기로 소문난 직공이다
모처럼 온 아들 엄마는 조퇴를 결심했다.
융라이의 집은 태국의 평범한 서민층이다. 할머니는 농사를 지으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융라이의 엄마는 야자를 따기 시작했다. 먼길 온 아들을 먹이려는 것이다. 땡볕에 축구공만 차고 노는 아들 고집을 꺽을 수 없어 8살 어린 나이에 유학을 보냈다. 까까머리 아이가 객지에서 고생하며 철이 들었다.
“달고 맛있네”
태국의 보통 부모들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따로 투자를 하지 않는 편이다. 융라이에겐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밀어주는 특별한 부모다.
“아들이 축구를 하고 싶어해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깐 저야 좋죠. 가까이 없으니까 자주 가기도 힘들어 그렇죠, 일하고 있으니까 못 가고 일하고 멀리 있고 그러니까 보고 싶어도 못 가지 뭐. 돈도 넉넉지 않으니까 멀리 있어서 가기 힘들고...”
빈부를 막론하고 태국의 모든 가정에 공통적으로 왕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태국은 지난 200년동안 차크리왕조를 지켜왔다. 서구열강속에서도 독립을 유지한 아시아의 유일한 국가다. 때문에 태국인들은 가난하지만 당당하다.
융라이의 아버지는 오토바이운전수, 우리로 치면 택시운전사다. 낙천적인 웃음의 아버지-태국의 아버지들은 자식에게 강요가 없다. 대신 책임도 지지 않는다.
“안보고 싶어요.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아들이 거기 들어간 것만으로도 기쁘고 아주 만족해요.”
조금도 안 보고 싶다구요?
“보고 싶어도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걱정도 안되고...”
가축들이 부엌에 모여든다. 아들이 오자마자, 음식준비에 나서는 어머니다. 모처럼 집에서 만든 한끼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이 보고싶지 않았다는 아버지가 손수 채소를 구해왔다. 모처럼 먹는 푸짐한 돼지고기요리다. 고된 노동에 소박한 반찬-그러나 장차 한국에 가서 프로축구선수가 되겠다는 아들에 웃음이 절로 나는 아버지다. 아직 태국엔 체계적인
축구교육기관이 없다. 융라이가족에게 한국인 오필환은 꿈을 이루게 해준 반가운 이방인이다.
방센축구단은 그렇게 오직 축구를 하겠다는 꿈하나를 가지고 전국에서 모여든 축구단이다/
오필환선교사가 10년전 처음으로 가르친 아이는 몽족출신 원였다.
몽족은 해발 1200미터이상 고산지대에 사는 태국의 소수민족- 오필환선교사는 10년전, 가르칠 아이를 찾기위해 이 길을 올랐었다.
몽족은 태국전체에 불과 6000여명밖에 없다. 때문에 서로에게 형제자매처럼 각별하다.
주로 북부 산지에 사는 소수민족들은 태국인구의 20%를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몽족은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여성들은 일을 할때도 전통의상에 귀걸이를 했었다.
아직도 대대로 전통의상 만드는 법을 전한다. 직접 재배한 아마포천을 검게 물들여 화려한 자수를 놓는다.
몽족의 아이 하나가 비닐봉지를 공삼아 축구를 한다. 오필환씨가 이곳에 왔을 때 본 풍경이다. 국적도 없고, 이동조차 자유롭지 못한 소수민족 몽족의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옛날에 태어난 곳도 시골 고향도 고등학교 1학년까지 전기가 안들어와 이 마을사람 들을 위해서 뭔가 도와야 자주 오게
한달에 한번씩 방문을 합니다.”
그가 처음 이 집을 찾은 것은 아들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10년이 지났지만 몽족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다.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아이들만 생겨난다. 10년전, 그가 찾아왔을 때 노인은 불을 피우고 있었다. 오필환씨는 열명의 아들중 축구에 재질을 보이는 맏아들 원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아버지로써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산지대의 추위를 막는 불씨뿐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유학을 승낙했다. 자식의 미래를 몽족의 미래를 밝게 하기위해서였다.
“매일 보고 싶죠. 오늘도 이렇게 올 줄 몰랐어요. 그래도 항상 기뻐요. 자식들을 기다리는게”
사촌형이 몽족최초의 태국유학생 원의 귀향을 알린다.
몽족마을에서 축구경기가 열린다. 별미인 아이스크림 내기다.
한수 가르쳐줄 선생님은 몽족출신으로 태국의 세미프로리그까지 진출한 축구선수 원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이국땅 태국까지 와서 축구를 가르친 왕년의 프로축구선수 한국인 오필환이다.
초등학교 5학년나이들인데 덩치는 한국의 예닐곱살에 불과하다. 그러나 끝까지 공을 놓지않는투지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차온다 조심해.”
고산지대 좁디좁은 산기슭 운동장은 몽족의 아이들이 뛰기에 작았다. 몽족과 그 아이들에겐 지금의 삶을 바꿀 더 넓은 세상이 필요하다.
“우리 마을에 와서 애들이랑 같이 놀아주니까 너무 좋아요. 어쩔 땐 애들이 사정이 안 좋 아서 초등학교 졸업 후에 계속 공부를 못하 는데 그런 것을 도와주고 싶어요.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축구는 이 아이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한가지 탈출구다.
전국대회를 앞두고 방센축구단의 연습이 시작됐다. 그런데 18세팀의 코치인 몽족출신 원이가 시합에 나가지 못한단다. 코치경력을 주기위해 일부러 맡긴 것였다.
“한 6과목 남았어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한학기 더 남는 거니?
6개월앞둔 졸업시험 때문이다.
“다들 노력해야지, 선생님 생각에는 어쨌든 공부가 우선이니까 공부를 먼저 끝내야지. 시험 통과 못하면 신경 쓰이잖아.”
이제 22살이 된 원이에게 취직을 위해 축구만큼 중요한 것이 대학이라는 것을 오필환은 안다. 길어야 30대초반이면 끝나는
선수생명, 공부에 더 신경을 쓰라고 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결국 오필환씨는 직접 어린 선수들의 코치에 나선다. 선수들의 방에는 지금까지 버티게 해 온 그들의 목표가 걸려있다. 그러나 선수나 감독등 축구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은 소수일 뿐이다.
대학생방에서는 시험준비가 한창이다. 이들은 태국의 3위권대학에 입학하는 영예를 안았다. 전공또한 축구선수에게는 까다로운 법학과다.
“책보는 거 피곤하지 않니? 지겹지? 자신있어? 시험 통과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지 노력해야지”
“예를 들어 학교점수가 떨어진다. 기본점수에서 그러면 운동을 못한다. 자기점수를 회복할때까지 공부만 한다. 점수이상을 늘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운동과 생활을 할 수 있다.”
오늘은 쩍의 시험날이다.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린다. 아직까지 낙제한 아이들은 없다. 대부분 아이들은 오필환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좋은 성적을 유지해오고 있다.
방센축구단의 중고등부아이들이 다니는 곳은 센쑥 중고등학교- 그러면서 이 학교의 축구부로도 활동한다. 그의 지도아래 학교의 이름을 걸고 출전 하는 것이다. 대회를 의논하러 나온길에 언짢은 소리를 듣는 오필환씨다.
“오늘 2박 3일 카오카이(극기 훈련)를 하 는 중이예요. 걔네(축구부원)들은 여기 왔어도 안에 안들어가고 매일 저쪽에서 놀고 있어요.”
때마침 오늘이 방학중 임시소집일인데, 축구부아이들의 학습태도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 과연 수업을 듣지않고 공터에서 놀던 축구부원하나가 그의 눈에 띈다.
오필환 그가 한국의 프로선수로 뛰던 1980년대, 선수의 생명은 25살였다. 그때의 한국보다 취약한 태국 그래서 아이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말해왔었다.
그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딴데 정신이 팔렸다. 혼찌검을 내러온 그도 그만 넋을 빼앗긴다.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2002아시아게임의 축구예선전- 태국과 베트남축구팀이 붙었다. 경기초반, 경기를 리드한 것은 베트남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태국이 선취골을 넣었다. 국가대표를 꿈꾸는 아이들은 신이나 응원한다. 그들처럼 달리고 싶고 이기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어지는 태국의 득점 결국 3대0, 태국의 완승이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월드컵4강 한국을 이기는 것이다.
90년대들어 태국축구가 한국을 누른 것은 단한번 ‘98방콕 아시안게임때였다. 태국인들은 그때의 승리를 추억으로 가지고 있다.
태국하고 한국 팀하고 붙으면 어떨 것 같니?
“제 생각에는 태국이 좀더 못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태국이 이길 것 같아요. 진짜 예요. 진짜 이길 것 같아요.”
선생님 생각에는 태국이 한국하고 붙으면 태국 선수들이 뛰지도 못할 거 같은데. 너무 놀라서 화장실만 자주 가는 거 아니야?
“물론 태국이 이기죠.”
“ 그러나 태국인들이 4년을 기다린 2002아시안게임 한국대 태국전은 3대 0,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
기다리던 전국대회날이다. 새벽부터 방센축구단 아이들이 긴장돼 있다.
태국의 전국대회는 1년에 4번, 방센축구단 아이들이 남의 것이 아닌 아껴둔 그들의 유니포옴을 입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누구 아직도 아픈 사람이 있니? 뻐도 경기할 수 있는 거지?”
아이들을 이끌고 갈 오필환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부상당한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에디 어때? 몇 퍼센트나 뛸 수 있겠어?”
발목을 다친 에디까지 뛰겠다며 나선다.
“80퍼센트요. 충분히 뛸 수 있어요.”
한번 경기참가에 500만원- 그 돈이 없어 대회에 나가지 못했던 아이들이 목말라 있다.
“전에 유니포옴 하나가지고 14,16,18 같은 대회 출전 아침에 한 게임 끝나고 방콕 나갈 경비가 없어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어”
대회가 열리는 방콕까지 2시간- 점심값을 아끼고자 준비한 도시락이다. 9인승 승합차에 11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끼어탄다. 출발 ~ 나머지 5명의 선수들은 트럭의 뒷칸 신세다. 지난 경기이후 연습도 제대로 못했다.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 다른 팀보다 작은 아이들-제대로 된 유니포옴에 변변한 연습장하나 없다. 축구하나하겠다고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이 가난한 아이들이 잘 뛰어줄지 걱정이다.
후아마크경기장은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킹스컵대회를 비롯해 한국을 누른 아시안게임등 태국축구의 영광이 서린 곳이다.
상대편이 타고온 버스에 방센축구단이 기가 죽었다.
오감독은 먼저 잔디의 상태부터 확인한다.
유니포옴은 조금이라도 커보이라고 위아래 줄무늬로 만들었다.
상처에 붕대를 감는 손길에서 출전에 임하는 선수들의 다짐이 느껴진다.
욕심에 뛰겠다고는 했지만 아이들 거의가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다.
상태팀 선수는 최적의 25명- 그러나 방센축구단은 단 13명이다.
응원팀은 미용실을 닫고 온 엄마한명- 상대팀은 속속 모여들고 있다.
이번 전국대회는 홈라파 전국축구대회 오늘은 3,4위전이다.
경기시작전 갑자기 내리는 폭우다. 그동안 비 때문에 여러차례 연기됐던 경기다.
빗줄기는 맞으면 통증을 느낄 정도로 강했다.
결국 경기는 시작됐다. 공이 물에 잠겨 나가지 않는다. 헛힘만 들 뿐이다.
무리하게 공격을 펼치던 방센팀의 퉁이 부상을 당했다.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선수들, 작은 충돌에도 큰 부상이 생긴다.
체력이 약하고 기술이 좋은 방센아이들에게 더위보다 비가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술이 먹히지 않으니
무리를 하고 있다.
퉁이 다친 곳은 눈이다. 계속 달리겠다고 고집하는 아이 급하게 흐르는 피만 막는다.
어 들어갔네 박수 동료의 부상에 힘을 낸 방센축구단이 마침내 선취골을 따냈다.
10분이 지나고 패널티킥으로 동점골을 허용했다.
동점골 전반전은 만만치 않은 접전이다. 폭우속에 진행되는 경기는 수중전 파울의 연속이다.
욕심만 앞설뿐, 악천우에다 몸이 풀리지 않아 실수만 연속이다.
마침내 역전골을 먹히는 방센팀이다. 전반전의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 불만에 가득찬 방센팀이다.
“선생님, 쟤네 공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골이래요.” 그 골 들어간거야.
“처음엔 골 안 들어갔었어요. 공이 그 근처에 있었던 거 제가 봤는데...”그럼 네가 심판에게 손짓을 했어야지
함께 마음을 졸이며 뛰었던 오감독, 아이들의 분노를 모르지 않는다.
“다들 경기할 때는 경기에만 집중해.”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야한다.
“아까 푸따신이 한 얘기도 맞지만 너무 기죽지 말고 그동안 우리가 해온 대로 기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하면 돼.”
이제 기회는 25분 뿐이다.
1 대 2 -이제 후반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후반전... 다행히도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이젠 진흙탕속의 몸싸움이다.
골인 ~ 후반 15분, 2대2 -동점골이 터진다. 다친 발목을 감고 나간 에디의 수훈이다.
다른 아이들의 기술도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급해진 상대팀의 선수교체다.
이제 남은 시간 20분이다. 이제 역전골이 목표다.
마침내 터진 역전골 이제 승리다.
방센축구단이 오늘 홈라파 전국대회에서 얻은 성과는 3위- 전국대회우승팀치고는 좋은 성적이 아니다.
그러나 이날의 3,4위전은 결승전보다 치열했다. 정직하게 싸워 얻은 구리빛메달은 화려한 금빛보다 찬란하다.
무엇보다 당당하게 자신들의 유니포옴을 입고 세상에서 맘껏 달린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태국의 국경을 넘는 중이다. 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태국, 태국의 북동쪽에 신비의 땅 라오스가 있다.
태국쪽 국경, 농하이 출입국관리소-라오스에 들어갈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1975년 공산화와 계속된 내전, 10년전까지만해도 라오스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위험한 땅였다.
최근 라오스엔 관광객들과 귀국자들의 러시가 계속되고 있다.
90년대 이래 지속된 개방정책 때문이다.
오필환선교사가 라오스로부터 받은 제의도 이와 관계깊다
무기는 버렸지만 아직 라오스의 많은 국민들은 군복을 입은채다.
라오스를 지배한 프랑스가 100년을 내다보고 만들었다는 수도 비엔티엔의 탁트인거리- 곳곳엔 라오스를 지나간 역사가 있다
아직도 프랑스로 망명중인 600년왕조-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독립문 아누사와리- 그러나 독립후에 온 것은 10년간의 내전과 공산화였다.
‘폭탄의 무덤’이라 불렸던 라오스는 평화로워 보였다/
안정된 성장과 해외투자유치로 세계최빈국의 오명을 씻어낸 듯 아이들은 태국식 축구 세팍타크로를 즐긴다.
그러나 아직 자동차가 낯선 소가 비킬 생각을 않는다.
오필환선교사가 라오스로부터 받은 제의는 태국에서처럼 라오스의 아이들을 모아 축구를 가르쳐달라는 것이다.
우선 축구장공사가 시작됐다. 놀랍게도 공사장 인부는 여자군인들 전쟁후 군인을 먹여살릴 수 없게된 정부가 스스로 회사를 차려 자생하라는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오필환씨는 김재양씨와 손잡고 이곳에 약 천평에 달하는 문화센타를 짓고 있다. 영어 컴퓨터등 교육프로그램까지 준비되고 있다. 그러나 중심은 단연 아시아 최강팀으로 인정받은 축구다.
“축구를 아시아에서 한국처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우리에겐 아직 여러 문제가 있습 니다. 아시아에서 한국이 1위이고 2위가 일본 한국이 라오스에 스포츠 지도자를 지원해 준다면 우린 더 많이 발전할 것입니다.”
사회주의 국가 라오스 또한 피파에 가입했다. 피파간판과 운동장 14 204개 회원국중에서 라오스의 랭킹은 162위 -
피파에서는 라오스의 축구를 진흥시키기위해 운동장까지 지어줬지만 가르칠 지도자가 없어 한국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니 접근점이다.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수준도 향상시키니까 한국에 서 도움 축구선수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센타를 나가면 중견이상의 아이 자기 영역을 확보하는 아이들이 되도록”
이른새벽, 방센축구단이 물때를 기다려 바다에 나선다. 처음 만났을 때 태국아이들은 왼발로 공을 차지 못했다.
그후 1년을 가르쳐 아이들이 왼발로 센터링을 올리는 것을 봤다.
한국인 오필환이 이 아이들에게 준 것은 공을 차면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묵묵히 예닐곱 코흘리개인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줬다.
불혹을 넘긴 그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내기를 건다. 아이들에겐 마음속에 품은 것이 있다.
스승은 그것을 꺼내 비춰보게 하는 존재일 뿐이다.
한국인 오필환- 그들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보게 했고 가르쳤고 기다렸다/ 그렇게 아이들은 꿈을 갖게 됐다.
첫댓글 오필환선교사님의 발자취를 잘 알수 있게 되었네요. 선교는 아름다운 감동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 그 선교팀이 국내 순회중에 임자에서 4월 4일부터 6일까지 머뭅니다. 울 사랑방 식구들 함께 태국의 아름다운 감동의 선교 역사에 동참해 줍시다. 제일 큰 후원은 잊지않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
오필환 선교사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