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박 재일본 한국문협회 회장 글입니다. 김이박님은 2007년 8월에 우리 강서문협에서 윤동주를 찾아 일본여행을 할때 우리를 안내해 주었고, 오사카 호텔에서 함께 세미나 발표와 시낭송에도 동참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윤동주의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해서 그의 탄신 90년을 맞아 윤동주시인을 <강서문단> 특집으로 꾸미는 데 이 글이 딱 들어 맞는 글이기에 여기 올립니다. 이 글은 김이박님의 장편 서사시집 "봄의 비가"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이 시에 대해서 김지하 시인이 그 머릿글에서 극찬을 했습니다. 여기 그 한 대목만 옮깁니다.
""(중략)오랫 동안의 궁핍, 정신적인 방황과 분열의 체험, 정체성 문제 등 재일 한국인의 깊고 깊은 한을형성했다고 생각한다. 한이 깊은 곳에 문화의 창조적인 영양이 있다. 여기 그 증거가 될 장편시 한편이 나타났으니, 바로 교토의 한국인 시인 김리박의 <봄의 비가>다. 근 .현대 한국의 정신적 지표였던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노래한 <봄의 비가>는 그 폭과 깊이가 파천황의 것으로 아마도 한국과 일본 문단을 뒤 흔들기 족할 것 같다. 그 주제가 갖는 박진의 힘과 역사성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재일 동포들 속에서 희미하게 잊혀져 가는 한국어를 백분 살려 내는 한국어에 의한 한국의 이미지 환기력은 놀랄만 하다.
한자음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는 순수한 한국어들은 그 이미지의 해맑음과 함께 기표와 기의간의 역동적상관 등으로 인해 길고 긴 이 장편 시를 몇편의 서정적 연작시로 읽히게 한다. (이하약)
윤동주 노래 글지이
김이박(재일본 한국문인협회회장)
날나라 옛 서울 교토
“동지사 큰 배움집” 터전 안의 한 곳
꾸밈새 없는 자그마한 노래글 돌이
참하게 하나 서 있다.
가끔 가다가 보면
누군가가 바친 꽃다발이
하나 둘 꽂혀 있거나 놓여져 있다.
노래글 돌엔
한글과
날나라 글로 옮겨진
노래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 노래 글인즉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로 돼 있다.
오늘은 널리 알려진
책이 덜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한 묶음만 남기고 광복 앞 여섯달
예수 1945 해 2째달 16 날
젊디젊은 28 살 나이로
이른바 “치안 유지법”을
어겼다는 트집으로 잡혀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주사약을 맞아 죽은,
끝까지 예수 가르치심을 믿은 겨레
윤동주 노래 글지이의 “서시”이다.
어째서, 날나라 땅 이곳에
그의 노래 글 돌이 서 있는지?
그 까닭을 다 말하려면
긴긴 줄 노래 글이 될 것이다-
예수 1917 해, 만주 땅 북간도 명동!
노래 글 지이는
남 나라서 태어난 첫소리를 올렸고
어릴 때 “어린이 세례”를 받았고
죽어도 주 예수 ․ 그리스도를 맑게 믿었고
빼앗긴 믿나라를 아프게 맘 그리면서
꿈과
주 예수 ․ 그리스도의 사랑을 돋구었다.-
아침 해 맑게 돋는
한어버이의 메 백두뫼 줄기 넘은
저 새쪽 바다 함경북도 종성!
그곳이 노래 글 지이의 믿고장이다. -
노래 글 지이가 용정 땅을 떠나
백두뫼 줄기를 넘고 두만 가람을 건너
난생 처음으로 그리운 믿나라 땅을 밟고
평양 숭실 중학교로 들어간 것은
18 살 때었고
연희 전문학교에 든 것은 21 살 때였다.
아아, 그립고 그리웠던 믿나라 땅인데도
노래글 지이는 그 곳에서
나라 앗긴 백성의 설음,
남 고장 살이의 슬픔을
가슴 아프게 느꼈고
남 모르게
나라 광복의 맑고 센 뜻과
뜨거운 배울 센 뜻과
뜨거운 배울 뜻과 꽃나이 때를
더욱 불태웠다-
몇 해 뒤
노래 글 지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바다를 건너야 했었다.
예수 1942 해 늦봄의 어느 날
고요하고 푸른 현해너울을
갈매기 한 마리가
외롭게 빙빙 돌고 있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제 뜻이 맞아
왜의 서울 도쿄로 가는 뱃길
(꼭 돌아오리! 돌아 와서 하느님의 뜻대로
믿나라를 위해, 겨레를 위해 몸 바치리…)
검은 연기 뱉으며 가는 “부관 연락선”이
첫째 닿을 곳은 “이놈의 새끼” (하관) 여라-
오고 싶어서 온거냐? 도쿄
원수들이 도사리고, 악마들이 우글대는
왜 나라 서울 도쿄!
그러나 그곳으로 꼭 가야만 하는데
가닿기 위해서는
왜 꼴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으니
아픈 가슴 더 아팠고 분한 맘 더 분해
몇 며칠을 알았고 괴로웠다.
어느 날 면사무소에 나가
‘ 암만 해도 왜 꼴 이름으로는
못 바꾸겠다.’ 하니
왜 경찰이 부랴부랴 찾아와
“비국민”으로 불도장 찍고는
다짜고짜로 두들겨, 반 주검으로 만들었고
“불령선인(못된 조선놈)” 이라
끝끝내 도항 증(배표 구입 증)을 내주지 않았다.
때는 좇고 좇아
드디어
애끓는 슬픔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노래 글 지이는
윤씨 성을
“히라누마”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래서 도깨비 같은
“히라누마 도츄”가 이승에 생겼다.-
그래 그것이
노래 글 지이의 왜 땅 때 이름이요
억울하게도
주검 된 마지막 이름이기도 했다.
광복을 찾기까지는
망국노는 살아도 망국노요
죽어도 망국노임을
보여 준 뼈아픈 일이었다.-
배우고 노닐던 교토의 아홉 달…
가을 10 째 달의 교토는 단풍이 한창일 때고
봄 4 째달은 벚꽃 아름다운 철이다.
“도시샤 대학교”서
경치 좋은 난산까지는 20 리
묵고 있는 방에서 경도 제국대학이 있는
길전 언덕까지는 5 리
단풍 타는 대문자뫼까지는 10 리
물 맑은 압천 가람가까지는 한 숨 거리-
큰 배움집을 다니면서, 길거리를 오가면서
뫼가람, 아름다운 왜 옛 서울을 노니면서
노래글지이는 자나 깨나
멀고 먼
연희가 생각났고 숭실이 떠올랐고
용정이 솟아났다-
그래, 그 때는 “대일본 제국”의 어디를 가든
깜깜하고 무겁고 숨 막히고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입 다물지 않으면
미치광이나 천치가 되어버리는
이승에 둘 없는 무서운 때였다.
나라사랑 배울이이던
어머니 쪽 언니 송몽규와
“성경 책”과 주일마다 다니던 교내 예배당과
상냥하고 착한 왜 예수교인이 없었더라면
노래글 지이는 어떻게 살고
또한 어떻게 외로움을 이겨냈을까?
이제 그것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앞에 두고
물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함박눈이 싱싱 내리는 어느 해 이른 봄 대낮
노래글 돌 앞에 선 암사람 하나이
장갑 벗은 두 손으로 흰 눈을 긁어내리고는
꽃다발을 꽂고
눈 감아 숨죽이고 조용히 고개 수그린다…
이 노래 글 돌이 빛을 보기까지는
많은 때와
날나라 사람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가슴알이가 있었고
“재일조선류학생동맹(류학동)”과
“재일한국유학생동맹(한학동)” 졸업생들의
사상과 자리와 모임을 넘은
믿음과 고운 겨레사랑이 있었고
도시샤 대학교의 큰 마음돌림이 있었다.
이것은 노래글지이 윤동주가
믿나라와 겨레를 끝없이 사랑했고
주 예수 ․ 그리스도를 뜨겁게 믿어
이웃과 맑게 살았고 또 꿋꿋이 싸웠고
스스로
왜사람 벗들과 깨끗하게 사귄 까닭이다.
사람은 참된 예수를 지니고 있을 때
꿋꿋하고, 상냥해질 뿐 아니라
맑아지고, 뜨거워지고
앞을 내다볼 수 있고
맑은 땀이 돋아나고
고운 눈물이 솟아나는 것이다-
맑게 개인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손에 들고
멀고 먼 갈쪽 미리내를 쳐다보라.
그러면 어디선가에서
노래 글 지이 윤동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 때
늙은이는 한창이 때에 되돌아가고
한창이는 꽃나이 때에 되돌아가고
꽃 나이이는 어린이 때에 되돌아가고
그래서 어린이는 앞날 꿈을 꾸고
모든 사람들의
흐려진 생각은 맑아지고
무거운 가슴을 가벼워지고
외로움을 기쁨으로 바꾸어질 것이다-
아아, 올해도 도시샤 큰 배움 집 노래 글 돌 앞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2 째달 16 날이 오고 노래 글 꾼이 내려온다.-
지은이: 김이박 해적이(약력)
1942년 경남 창원군 동면에서 태어남,
1942년 징용으로 끌려간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감
1970년 일본 조선대학교 이학부 졸업
1977년 한양사 문예상 입상
1990년 민족시보사 논설위원
1992년 재일본 한국문인협회결성 회장 취임
잡지 “한흙”편집장 취임
현: 긴키대학교 및 루코쿠 대학교 교수
한글학회 및 대한민국 문화관광부 홍보대사
저서: 일본 단가집 재상,
장편 서사시: 삼도의 비가, 견적비가, 봄의 비가
소년소설: 소년 김 4.24의 때. 외 다수
그렇습니다. 법륭사가 아니라 동대사인것 같습니다. 91명이나 되는 우리 회원들이 한꺼번에 안으로 몰려드니까 일본인 승려 대표가 막아섰습니다. 그러니까 김이박 회장님이 유창한 일본어로 감히 한국에서 오신 귀한 손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따지니까 그 승려 대표는 머쓱해서 금방 사과하고 물러난 것입니다. 김이박 회장님은 대단한 배짱과 실력을 겸비한 자랑스런 우리의 핏줄입니다. 일본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한글로 된 명함을 전해주는 멋쟁이 우리 한글지킴이 이기도 합니다.
첫댓글 의미 깊고 귀한 글을 보내주신 재일본 한국문인협회장이신 김이박님의 장시에 지난 그날들을 되새기며 그속에 들어가 있게 됩니다 강서문협으로서는 행운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끈끈이 맺어 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두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법륭사지요? 대웅전 앞에서 그곳을 지키는 일본인에게 호통을 치시던 결기가 생각납니다. 참 아름다운 분이시지요.
그렇습니다. 법륭사가 아니라 동대사인것 같습니다. 91명이나 되는 우리 회원들이 한꺼번에 안으로 몰려드니까 일본인 승려 대표가 막아섰습니다. 그러니까 김이박 회장님이 유창한 일본어로 감히 한국에서 오신 귀한 손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따지니까 그 승려 대표는 머쓱해서 금방 사과하고 물러난 것입니다. 김이박 회장님은 대단한 배짱과 실력을 겸비한 자랑스런 우리의 핏줄입니다. 일본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한글로 된 명함을 전해주는 멋쟁이 우리 한글지킴이 이기도 합니다.
고운글에 머물다 갑니다.
뜨거운 일본열도에서 뵌 그 분은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진정한 한국인 이었죠.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일본에서 한글에 대한 애정이 가슴을 뜨겁게 해 주었습니다. 귀한 글 감사 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