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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찌 모르랴 황해집의 교훈을...
연중 행사인 1월 셋째 주말(이번은 17일)의 한라산 백록담 등반이
올해(2009년)로 27번째다.
그 전에 평해대로를 마칠 작정은 이미 답사 계획단계에서 한 터라
남은 일정이 빠듯했다.
13일 아침 양평행 무궁화호가 평해대로에서는 마지막 열차다.
국수리까지 전철이 운행중이니까.
지금은 양평을 지나 용문까지 연장됐지만 그 때는 그랬다.
양근(楊根)과 10리길 덕곡(德谷)은 오빈리 덕구실로 현존한다.
양근군이던 때 읍내면 지역으로 오빈역(梧濱驛)이 있었단다.
그래서 오빈리를 역말이라고도 불렀다는데 덕곡의 다른 이름일까.
개통 예정인 현대의 전철역, 오빈역과의 위치와 관계 등이 곧 규명
또는 정리될 것으로 기대한다.
옥천교차로의 옥천냉면집이 성업중이다.
6번국도로변으로 진출하기 오래 전인 1970년대 초, 개업 직후부터
옥천리 마을 한가운데 있던 '황해집'이 내 단골집이었다.
한 때는 내 차에 가득 태우고 좁은 먼지길을 달려가기를 거의 격주
말로 했는데 냉면은 별무관심이고 기름뺀 돼지고기가 일미였다.
예외 없이 초로의 주인녀 손을 거쳐 나오는 고기와 무김치 안주에
약주 몇주전자를 비우면 거나해지곤 했다.
인기 절정인(당시에는) 프로권투 타이틀 매치(title match)가 있는
날에는 TV 중계를 특별안주로 하여 더 마셨다.
우리의 단골종업원은 막판에 반주전자만 주문해도 가득히 담아와
우리를 더욱 취하게 했다.
통금(子正후)이 문제일 뿐 음주운전 단속이 없던 때라 편했다.
호구책으로 시작한 영업으로 주말에 이웃 군부대장병과 면회객이
주고객일 뿐 평일에는 거의 개점휴업상태였다.
그러나,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기독교구약
성서(욥기8:7)의 격려처럼 날로 번창해 갔다.
주인의 억척 외에도 입소문과 도로의 확포장, 자가용 차량의 증가
등이 일등공신이었다.
어느 날, 카메라를 놓고 왔는데 청량리 고층아파트에서 받았다.
그 새, 부자가 된 것이다.
한데, 필연적인 분열이 찾아왔다.
친족간에 서로 40년 전통의 종가라고 주장한다.
병든 꼬부랑 노파가 된 그녀는 제대로 써보기는 커녕 거금과 함께
반목과 분란을 유산으로 남긴 셈이다.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실은, 남길 것이 없건만) 다 쓰고 가세요"
유사한 경우가 하도 많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귓전을 맴도는 막내딸의 말 뜻을 내 어찌 모르랴.
옥처럼 맑은 우물이 곳곳에 있다는 옥천리(玉泉)는 이즘은 냉면촌
으로 인식되지만 양근군 관아와 사창(社倉)이 있던 곳이다.
이조21대 영조23년(1747년)에 갈산(양근리)으로 옮길 때까지는.
교촌마을에 문화재자료 제19호 양근향교가 있지 않은가.
고산자가 걸어보기나 했을까?
아신교차로에서 6번국도를 떠나 남한강을 끼고 걸었다.
양동면과 대칭되는 양서면이다.
겨울 강바람이 날카롭기는 하나 얇으나마 햇살을 받아 무던한데다
차없는 호반을 산책하는 기분이라 더없이 평안했다.
연합신학대학원과 복포2리 새마을회관을 지날 때까지도 그랬지만
고개를 넘나드는 요란한 차량들의 매연과 기세에 주눅드는 형국이
된 데다 음지인 복포리고개는 빨리 넘어야 했다.
신원1리마을회관 앞에는 옛 월계점(月溪店)이 있었던 월계마을의
'신원리성터' 안내석이 서있다.
부용산(芙蓉:366m)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라때 성으로 규모로
보아 봉화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그런데, 부용산에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 전설이 있단다.
<왕비가 가례일(嘉禮日) 밤에 왕 면전에서 방귀를 뀌고 말았다.
진노한 왕명으로 이곳에 유배온 왕비는 신고중에 왕자를 낳았다.
모후의 사연을 알게 된 왕자는 도성으로 가서 "저녁에 심어 아침에
따먹을 수 있는 오이씨를 사라"고 외치고 다녔다.
왕 앞에 불려간 소년의"밤새 방귀를 뀌지 않아야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먹을 수 있다"는 말에 각성한 왕이 왕비를 불렀다.
그러나 왕비는 돌아가지 않고 끝끝내 여기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 무덤이 산정에 있는 고분이란다.
시쳇말로 좀 썰렁하긴 해도 뉘앙스(nuance)가 담긴 전설이다.
신원리성터 안내석
긴 용담대교 덕에 편도의 보행이 다소 편하다.
기두원(起頭院)도 옛 원터라는데 월계와 용진의 중간쯤이다.
용담리 기두원교 반도의 '육콩이네순두부'에서 첫 식사를 했다.
전철의 연장운행 덕을 보는 집이라 할 수 있겠다.
전철 주변 산들의 인기가 수직 상승해 부용산, 청계산 등을 다녀온
등산객들이 들르는 듯 하니까.
용진(龍津)나루는 애매하다.
양서면 양수1리 골용진과 남양주 조안면 송촌리 배나무용진 간의
북한강 도강나루라 하나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합리하다.
게다가, 대홍수(1925년乙丑)때 모두 유실돼 흔적이 거의 없단다.
조안면 진중리에 배나무가 많아 나루이름을 배용진이라 했다는데
골용진과는 송촌리 배나무용진, 진중리 배용진 모두가 어긋난다.
더구나 조안면 능내리 봉안역~고랑진(高浪津:고랭이나루)간 3리,
고랑진~월계 12리의 첩로를 주(註) 달면서 용진 도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는 대동지지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실은 고랑진에서 북한강을 건너는 ‘돌데미(石墻)길’,체육공원에서
남한강을 건너는 ‘마루고리길’, 두물머리~고랑진의 ‘고랭이길’ 등
이 있었으며 갈수기에는 모두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길이었다는데
고산자가 이 길을 걸어보기나 했을까?
특히, 평해대로에서는 수시로 그런 의문이 든다.
평해대로 스케치9(남양주)
양수교를 건너 남양주시에 들어선 후 걸음을 재촉했다.
양주군에서 분가한 이 고을은 남북한강(兩水)의 합수점(두물머리)
이고 근대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의 태생지다.
다산로(옛 6번국도) 따라 고랭이마을(高浪)을 지나고, 조안사거리
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다산유적지로 향했다.
삼남대로와 다산의 유배지인 강진에서 이미 많이 살폈다.
복원, 정비되기 전에도 더러 방문했으므로 가는 길에 다만 들르는
것일 뿐이었다.
봉안역터(奉安驛:봉안마을), 팔당댐 앞까지 살같이 진행했다.
팔당역에서 마치기에는 아직 해가 용납하지 않았다.
하팔당삼거리, 동막골입구삼거리를 지나 한강변 레스토랑'푸른꽃'
옆에서 요란한 쇼를 펼치며 사라져가는 해를 볼 수 있었다.
백두대간과 9정맥, 산들에서 물리도록 지켜본 뜨는해와 지는해다.
그러나 강과 고층아파트 단지(하남과 강동), 그리고 먼 산에 한 줄
파문을 남기며 사라져 가는 해를 보기는 아주 드문 일이다.
널따란 강물에 띄우는 모자이크(mosaic) 파문이 백남준아트쇼를
연상케 했다.
한강(덕소) 일몰
어제 마감한 도심역(陶深)에서 평해대로 마지막 날을 시작했다.
원래의 지명 도곡리(陶谷)를 두고 왜 인근지명을 땄을까.
한자표기는 다르나 3호선과 분당선의 환승역인 도곡역(道谷)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 그랬단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
서울 강남의 도곡역과 남양주의 도곡리역을 혼동할까 보아서?
5호선 광화문과 광희문 두 역의 유사발음에 따른 혼동을 염려하여
'광희문'을 '청구'로 바꾼 것은 불과 4역 사이임이 고려됐던 건데.
덕소(德沼) '신앙촌'(信仰村) 앞을 지날 때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6. 25동란의 참화가 가져온 부산물들중 하나가 기도원이다.(백두
대간.....11회 글 참조)
기독교 열광주의자들의 집단으로 여기 신앙촌도 그중 하나다.
소위, 박태선 장로의 '천부교'(天父敎)는 1950년대 중엽에 경기도
소사에서'전도관'으로 시작했다.
덕소와 부산 기장 등지에 차례로 확장하면서 '신앙촌'이라는 특수
공동체로 발전하더니 그는 마침내 천부교 교주가 되었다.
그런데, 신앙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신앙촌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가 높은 것은 어떤(사회학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덕소 신앙촌교회
덕소IC에서 삼패사거리까지는 몹시 혼란스럽다.
서울~춘천고속국도 때문만이 아니다.(당시에는 공사중)
신6번국도와 구도로의 이합이 무상해 안정감을 주지 못해서다.
삼패사거리에서 삼패2동(三牌) 평구마을 경로당을 찾아갔다.
향토사의 보고(寶庫)니까.
마지막으로 한양길 40리의 평구역터를 확인하여 보려고 그랬는데
토박이 꼬부랑 노옹이 모른다는데 어쩌랴.
전남산(産)으로 이 마을 27년째라는 67세 영감이 구전(口傳)으로
알고 있다는 내용은 별로였다.
평구마을을 지나는 옛길이 삼패IC때문에 지리멸렬됐다는 정도뿐.
한데, 이조17대 효종때의 상신(相臣)인 청풍인(淸風人) 잠곡 김육
(潛谷金堉)의 묘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는 대동법과 시헌력(時憲曆)의 시행을 비롯해 양수용 수차제작,
상평통보 주조 유통시도 등 혁혁한 족적을 남긴 명신이다.
그럼에도 그는 두 아들의 과공으로 전대미문의, 유사 이래 최초의
호화분묘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쟁을 더욱 격화시킨 '김육 묘수도사건'(墓隨道事件)이다.
평구마을(상)과 김육의 묘(하)
삼패사거리를 조금 지나면 역말(驛村)이 옛이름을 지니고 있다.
역말 서쪽 아랫말이 옛 평구역터(平邱驛址)란다.
여기에서 경강로(6번국도)를 버리고 역촌길을 택했다.
평구역과 7리간으로 왕숙천(王宿川)에 있는 옛 왕산탄(王山灘:대
동지지의 玉山灘은誤植)은 어느 길로나 비슷한 거리다.
다만, 차량행렬을 피해 한가로이 걸으려면 후자를 택해야 한다.
홍릉천(석실교)을 건너 토평교에서 왕숙천으로 내려섰다.
마침내 한양 코앞에 당도한 것.
왕숙천은 이태조가 자고 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함흥발 한양길에 철마산 자락 왕숙천변에서 8일을 묵어 팔야리(八
夜:榛接邑)라 했다잖은가.
한북정맥인 포천의 수원산에서 발원해 남양주시 수석동과 구리시
토평동 경계에서 한강에 투신하는 40여km의 하천이다.
한북정맥 종주때 수원산을 넘다가 들은 설화가 문득 떠올랐다.
<수원에서는 자기네 이름을 차용했다며 해마다 세금을 받아갔다.
기지(寄智)있는 신임 포천군수는 산이 더는 필요치 않으므로 빨리
되가져가라며 세금을 징수해 가지 못하게 했다.>는....
6번국도가 통과하는 왕숙천이 다리(橋)들로 어지럽다.
나란한 왕숙교, 왕숙철교 위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달린다.
둔치 공사를 비롯해 여러 공사로 인해 어수선하다.
당장에는 그렇다 해도 곧 일신된 모습일 것 걑다.
백로가 군거하는 자연생태계의 보고인 왕숙천을 살리자는 캠페인
(campign)을 펼치는가 하면 생태습지로 거듭나는 중이란다.
한강변인 남양주시와 구리시의 또 하나의 보물인데 그래야겠지.
왕숙천(토평교~왕숙교)
평해대로 단상
복잡한 대로를 피해 수택천 복개천길과 이면도를 더듬듯 해 교문
사거리까지 나갔다.
곧, 망우리고개(忘憂里峴) 마루에 도착했다.
수도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이며 경기 동북부지역의 서울
관문이지만 공동묘지 때문에 은어(隱語slang)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옛 고개가 아니다.
대로(大路)라 하나 1950년대 기억으로도 넓잖은 고개가 많이 꼬불
꾸불했으며 현재보다 훨씬 높았다.
여기뿐 아니라 미아리고개, 무악재, 남태령고개 등 도성으로 진입
하는 외곽의 고개들이 모두 그랬다.
어느 날, 이태조가 자신의 무덤터(東九陵內健元陵)를 정한 후 고개
마루에서 "근심을 잊게 되었다.(於斯吾忘憂矣)”고 말했더란다.
그래서, 이후로 망우(忘憂)고개가 되고 일대를 망우리라 했다나.
또는 개국공신 남재(南在)와 묘터를 맞바꾸면서 불망기(不忘記)를
써줌으로서 남재로 하여금 근심을 잊게 해서 망우고개라 했다고도.
그런데, 이같은 유래를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 듯 하다.
유래야 어찌 됐든 나는 겨울길 890리의 평해대로를 걷는 12일동안
늘 배낭과 함께 짊어지고 있던 염려를 망우고개에서 벗어버렸다.
평해대로상의 망우고개가 평해대로 때문에 짊어진 걱정을 말끔히
벗겨줬으니 내게 망우고개의 의미는 종래의 유래로 충분하다.
해남과 동래의 양대로보다 기간을 많이 단축한 것은 염려스러웠던
몸과 날씨가 말썽 피우지 않고 따라주어서 가능했다.
그러나, 텍스트(text)라 할 수 있는 대동지지에 대한 비판의 빈도가
평해대로에 들어 잦고 자꾸 날을 세우지 않을 수 없어 유감스럽다.
그렇다 해도, 평해대로는 푸른 바다와 나란히 하는 낭만의 길이다.
고산 준령이 가로막아 크고 작은 령과 재, 고개가 유난히 많으므로
천(川), 강(江), 첩로(捷路) 또한 덩달아 많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전설과 사연도 가지가지다.
천리 먼 길인데도 강원(이조때는울진이강원도였으니까)과 경기 양
도만 거치는 특별한 대로다.
한데, 대관령 옛길을 지목하며 "길에도 생명이 있다"는 이가 있지만
나는 이미 다른 대로에서 언급했듯이 평해대로의 결론도 No다.
사멸하지 않고 업그레이드를 거듭하거나 오랜 세월 살아남아 있다
해서 역사적 유적으로 보존 운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길은 인간의 도구일 뿐이니까.
필요하면 더욱 우대하겠지만 가차 없이 버림받기 일쑤다.
대부분의 옛 길은 새 길에 흡수되거나 버려지는 양자 택일 상태다.
버려진 옛길은 양계장의 폐계(廢鷄)에 다름 아니다.
대관령, 죽령 등의 옛 길 복원도 지자체들이 투자가치적 차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망우리고개 역시 곧 삭막해지고 말 것이다.
공동묘지 방문 외에는 곧 뚫릴 터널이 흡수해버릴 테니까.
아무튼, 망우리현은 이태조와 특별하게 관련된 고개다.
경흥대로를 두고도 왕숙천을 따라와서 넘기를 거듭했고,
자기 묘소를 정하려고 넘어다녔고,
사후에도 능행길이 연중행사로 이어졌다.
그래서 의전과 경비의 총책인 양주목사에게는 늘 희비가 따랐을 터.
찍히기도(밉보이기도) 하고 돋보이기도 하는 자리였으니까.
동1릉에서 동9릉으로 늘어났으니 오죽했겠는가.
임오군란때 상궁으로 변장, 간신히 궁을 빠져나온 명성황후가 여주,
장호원으로 피신할 때도 이 고개를 넘었고,
태조의 장례행렬이 지나갔던 것처럼 마지막왕 순종의 장례행렬도 이
고개를 넘음으로서 조선왕조와의 관계가 끝이 난 고개다.
<평해대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