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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자료실 - 종교간대화와 그리스도인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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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한국) 스크랩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4 (서울)
대화일치 추천 0 조회 49 09.09.19 20: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무어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한국명 : 牟三悅, 毛三栗) 선교사는 1860년 9월 15일 미국 일리노이 그랜드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 아들로 출생했다. 1889년 몬타나 (Montana)대학을 마치고,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1892)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무디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감동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선교사를 지망했다. 무어 선교사도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1892년 8월 16일 부인 로즈 엘리(Rose Ely Moore)와 함께 한국을 향하여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배편으로 호놀룰루와 일본의 요코하마, 부산-인천을 경유하여 목선으로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다. 1892년 9월 21이었다. 여자들은 가마를 타고 남자들은 걸어서 성안으로 갔다. 남대문에 도착해보니 이미 성문은 닫혀 있어 성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성벽 아래쪽에 개구멍이 있어 브라운 아들은 거기로 기어 성안으로 들어갔으나 어른들은 체구와 체통 때문에 시도조차 못했다. 하는 수 없이 6m 되는 높은 성벽에 로프를 걸어 벽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한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어를 배우는 일부터 착수했다. 한국어 선생을 두어 매일 방문하도록 하여 공부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 이외에 마펫(Moffett)선교사의 성경공부 반을 도왔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경을 장과 절까지 말하며 척척 외우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그들이 각 처로 흩어져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자로 일할 것이므로 신학반 인도는 더욱 기대를 부풀게 하는 일이었다. 어서 빨리 한국어에 능통하여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얼마 후 그의 한국어 실력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급속히 늘었다. 약 반년이 지난 1893년 3월 19일 주일에는 한국인들과 쉬운 말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예배순서에서 한국말 기도를 담당했다. 1893년 6월, 곤당골 높직한 곳에 2층집을 지어 터를 잡았다. 무어 부인은 집 구경하러 온 이웃 아낙네들에게 재봉틀도 보여 주어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환심을 샀다. 약 9m 깊이로 판 우물에서는 다른 집보다도 수질이 좋아 이웃사람들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선교활동을 하면서 어느 해에는 100명에게 세례를 집례 하기도 했다. 특히 서울에서 백장(白丁)을 대상으로 많은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양반과 천민이 함께 예배하도록 하는데 전력하였다. 1896년 에비슨 선교사와 협력하여 신분 철폐와, 천민의 권익 보장을 위해 고종 임금에게 탄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복장제한(服裝制限) 제도를 철폐하여 양반과 천민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데 기여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으로 인하여 그를 가리켜 “백장 해방운동의 지도자”라 칭호가 붙여졌으며, 사랑의 사도라는 또 다른 호칭으로 천민 층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1893년 3월 19일 승동(곤당골)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대현교회, 동막교회 등 25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1906년 7월 12일에는 그리스도 신문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장티푸스로 인하여제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15년간의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1906년 12월 22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부인 로즈 엘리(Rose Ely)선교사는 남편이 별세한 뒤 얼마동안 한국에 머물다가 1907년 11월 18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무어 부부는 3남 1녀의 자녀가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추모비 (승동교회, 동막교회 일동)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묘비 전면

 

묘비에는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Devoted servant of Jesus Christ Beautiful in character and spirit, unselfish in his love for the Korean people)'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문이 6·25 전쟁 때 총탄으로 파손되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후면

 

묘비에는 우리말로“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었다.

 

 

<죠지 H. 루, 류제한>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안식교 선교사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안식교 선교사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한국명: 劉濟漢, 1889-1993)는 1889년 6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 오크랜드에서 출생했다. 1924년 로마린다 의대를 졸업하고, 워싱턴주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다가 1929년 5월 7일 안식교 선교사로 부인(May Belle Ames)과 함께 내한했다.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순안병원(평남) 의료선교사로 시작하여,1931년 6월 서울(소공동)에 2층집 두 칸을 세로 얻어 클리닉을 개설하고, 회기동 출장소를 개소하여 왕진했다. 1932년 11월 인사동에 침상 8개의 '경성요양병원'을 개원하고, 1933년 3월, 휘경동에 땅 1만2천평을 1만 2천원에 매입, 병원을 신축하여 1936년 2월부터 진료했다. 1936년 부인과 사별한 뒤 1938년 서울의료요양원을 설립하고, 1941년 2월 16일 일시 귀국했다. 1947년 그레이스와 재혼하고 4월에 내한, 병원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5월 11일 서울위생병원으로 개칭했다. '그의 시술(施術)은 크게 명성을 얻어 환자는 경향 각지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1948년 이승만 대통령 주치의로 위촉받았다'고 김재신 목사(전 삼육간호대학장)는 증언했다. 6·25 전쟁 직전에 미국 총회에 참석하였다가 그해 10월 이승만 대통령 요청으로 한국에 돌아와 병원 진료에 전념했다.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남하하여, 미쳐 피난하지 못한 수 백 명을 미군 수송선(LST)으로 제주도로 운송하는데 기여했다. 성산포에 임시병원을 개설하고, 부산지역에도 1951년 3월 15일 대통령부인(프란체스카) 주선으로 용봉동 창고를 진료소로 개조하고 위생병원 부산 분원을 개설했다. 그는 1967년 7월 1일 서울위생병원장을 은퇴한 뒤, 8월 3일 귀국했다. 이 병원은 현재 450여 개의 침상이 있는 서울 위생병원으로 발전했다. 1968년 이후 6차례나 왕래하며 병원사업에 협력하다가 1993년 11월 18일 미국 노드랜드에서 94세로 별세하였다. "나는 한국에 구경 삼아 온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왔다. '이리'가 한국 백성을 해치려 온다면 도망가는 목자가 아니라, 그 양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온 선교사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승만)을 치료할 때나, 시골 아낙네를 치료할 때나 똑같이 나의 최선의 노력을 바쳤습니다."라는 어록을 남겼을 만큼 의료선교사로 한국인을 위해 헌신한 고마운 은인이다.  한민국 문화훈장(1954), 중앙대 명예박사(1963), 서울시 명예시민증(1965)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안식교 선교사 약력

 

부인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부인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1900-1936 )는 미국에서 아버지(J. J. Ames, 장로)와 어머니(전도부인)에게서 1900년 10월 30일 태어났다. 태평양 유니온대학 재학 중 루(George Henry, Rue)를 만나 1921년 6월 19일 결혼했다. 그들은 1923년 큰딸 베티(Betty, 주:한국에서 수년간 간호사로 봉사함. 그 남편 밋첼은 삼육대학을 건축함.)와 1925년 아들 죠지(George H Rue)의 남매를 낳았다. 1928년 11월, 남편과 함께 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 선교사로 내한하여, 1936년 4월 간호원 양성소를 설립하는 등 많은 활동과 남편의 선교사업을 성실히 내조하고, 전도와 의료선교사로 공헌했다. 1936년 12월 16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안식교 선교사 최초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1948년 12월 18일 서울에 “메이 벨 기념교회”가 남편에 의하여 헌당되었다.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 약력

 

그레이스 루 (Rue, Grace 한국명: 柳恩惠) 선교사


1947년 루의 두 번째 부인으로 미국에서 결혼했다. 같은 해 남편의 뒤를 따라 안식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 위생병원 수간호원으로 활동했다. 6·25 전쟁 기간 중 부산에 병원 설립을 주도했다. 서울로 복귀하여 위생병원 안에 전쟁고아를 수용하며 고아원을 개설하고 환자와 어린이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입양사업도 병행하여 미국, 노르웨이, 호주 및 스웨덴 등에 수많은 고아들을 입양시켰다. 서울 상봉동 200번지 땅 9,800평과 건물 164평을 매입하여 ‘성육원’을 설립 주도하고 초대 원장으로 사회봉사와 구제사업에 헌신했다. 1967년 귀국, 워싱턴주 매로우스톤섬(Nordland)에서 개인성경교수와 사회봉사를 계속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찰스 알렌 클라크, 곽안련 선교사>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郭安連) 선교사 가족 묘지


다섯 자녀 중 알렌 D. 클라크(Clark, Allen D. 郭安全)와 캐더린(Clark, Katherine Edith, 郭佳全)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또한 손자 도날드(Clark, Donald N. )는 양화진에 관한 책자를 발간하여 자료 제공에 크게 기여했다.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郭安連) 선교사 가족 묘지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郭安連) 선교사 가족 묘지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선교사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郭安連, 1878-1961)는 미국 미네소타에서 1878년 11월 17일 출생했다. 미네소타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1902)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2년 9월 22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뉴욕 출신의 부인(Mabel Craft)과 함께 내한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승동교회 제2대 교역자로 교회당을 건축(1905)했다. 청년면려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계급 관념과 남녀의 차별 제도를 개선하고 교회를 부흥시켰다. 이 무렵 어린 세 자녀를 잃게되어 양화진 등에 안장했다. 그 후 평양신학교 교수(1916)로 활동하며 실천신학을 강의하고, 한국 교계의 목회자를 양성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의 회계(1916), 부회장(1917), 경충노회장 등으로 봉직했다. 1930년 1월부터 기독교 교육과 아동을 위한《종교 교육》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욥기, 시편의 주석을 편찬하고, 잠언, 전도서, 아가서,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의 순서로 계속하여 성경의 주석서를 발행했다. 한편 경기 양평의 고읍, 상십리, 묘곡, 고송, 용문동, 마배교회(1913-1915)와, 광주의 신사리교회(1912) 등에서 동사목사로 시무했다. 신사 참배를 거절(1940)하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세계평화기도문 사건(1941)으로 강제 추방될 때까지 40년 동안 젊음과 인생의 황금기를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힘써 일한 고마운 선교사이다. 그 후 부인 마벨은 1946년 미국에서 별세하였으며, 자신은 1961년 5월 26일 오클라호마에서 별세했다. 


버튼(Burton)과 고든(Gordon) 2세


버튼 W. 클라크(Clark, Burton winthrop, 1903-1904)는 C. A. 클라크와 마벨 사이에서 큰아들로 1903년 4월 3일 출생했다. 1904년 12월 21일 홍역으로 서울에서 2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고든 N. 클라크(Clark, Gordon Neil, 1905-1905)


클라크(곽안련)의 둘째 아들로 1905년 4월 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출생한지 6개월만에 소화기 질환으로 1905년 10월 29일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Allen)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C. A. 클라크의 딸 캐더린 (Clark, Katherine Edith, 郭佳全)


1919년 출생했다. 1947년 10월 28일 북장로회 여선교사로 내한하여 안동 지방에서 구제사업 등 선교활동과 대구 선교부에서 계명학원 설립에 참여하고 이사로 선임(1954)되었다. 1968년 본국으로 귀국했다.


장신대 교수 알렌 D. 클라크(郭安全, 1908-1990) 2세


알렌 D. 클라크(Clark, Allen D.)는 클라크(郭安連)의 아들로 서울에서 1908년 11월 6일 출생했다. 미국에서 미네소타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1933)하고, 1933년 8월 2일 부인 유지니아(Eugenia Roberts, 전 평양외국인학교 동창생)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1936년 청주로 옮겨 1940년까지 농촌 선교에 몰두하였다. 일제 말기에 강제 추방되었다가 1953년 11월에 다시 내한하여 1973년까지 청주에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하여 노력했다. 장신대 교수(1954-1965)와 피어선 성경학교 교장과 대한성서공회 번역위원 등으로 헌신하였으며, 1990년 미국에서 별세했다. 저서로는《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1972》가 있다. 이들 부부의 자녀로서 로버트(Robert)는 평양에서, 도로시(Dorothy)와 캐더린(Kathleen)은 청주에서, 넷째 도날드(Donald N. Clark)는 콜럼비아에서 출생했다. 특히 도날드는 부인 린다(Linda)와 함께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서 봉사했다. 그리고 텍사스의 트리니티(Trinity) 대학에서 역사 교수로서 한국교회 역사에 관한 연구와 양화진 묘역에 관한 저서(1984, 1997)를 발간하여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필자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프릭 사관>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 사관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1886-1912)은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 제1진인 프릭(Frick, Sofia), 코흘러(Kohler, Magda), 우을선(Olsson, Verna) 등 3인가운데 한 1인으로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이 중 프릭 사관은 한국에 파송된 구세군 선교사 중 최초(1912)로 양화진에 묻혔으며 코흘러는 다음해(1913) 안장된 독신 여성 선교사이다. 프릭 사관은 1886년 8월 16일 스웨덴 텔례북에서 출생하였다.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11월 20일 참위 직분을 받았으며, 곧바로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선임되어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스웨덴의 연대장 뷔버는 프릭을 한국에 파송하면서, 프릭이 한국으로 갈 수 있음이 무한히 기쁘다고 말했다. 그 사유는 “본래 프릭은 성령이 충만한 젊은 여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위하여 좋은 사업을 크게 이룩할 수 있는 선교사로 여기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프릭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서울 평동에 머물면서 한국말을 익혀 빠른 기간에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들에게 “자기는 도저히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갖지 아니하며, 오직 한국에서 살다가 한국인을 위하여 죽을 줄로 믿는다.”고 했다. 그는 쪽 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누어주며 문서전도와 노방전도에 힘썼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기도와 성경 공부를 한 뒤, 7시에는 뒷산에 올라가 한국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한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4) 그는 선교사로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던 프릭이 1912년 4월 18일 급성 뇌염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의사의 극진한 진료와 호가드 사령관 부인 등 여러 사관들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1912년 4월 29일 오전 4시 45분 순직하였다. 그와 함께 생활하던 본영 총무서기관 크리스핀(Crispin, Jhon, 한국명 : 길수빈)은 프릭 선교사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프릭 사관과 한 대문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오전 일곱 시쯤이면 성경을 들고 집 뜰 주변을 거닐었다. 궁금하여 그에게 하루의 생활을 물었더니 그는 매일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으므로 이를 실천한다고 했다. 또한 이른 아침에 자주 높은 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한국을 위하여 기도한다고도 했다. 한국인을 구원하여 주님의 빛을 발하도록 하려는 생각만 간절하다고 했다. 한국말은 잘 하지 못하지만, 구세 신문과 마가복음을 자기 돈으로 사서 여러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므로 칭송이 그치지 아니한다.”고 했다. 크리스핀은 “프릭 사관은 비록 별세하였으나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며 모든 선교사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아름다운 삶과 열성은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주님의 사업을 잘 행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장례식은 구세군 본영에서 호가드(R. Hoggard, 許嘉斗) 사령관에 의하여 집례되었고 유해는 양화진에 운구되어 호가드 부부와 여러 조문객들이 모여 5월 2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이때 사관학생 김병도는 추도사를 통하여 “그는 4만리 먼 곳에서 한국인이 죄악 가운데 빠져있음을 전해 듣고 성신의 인도하심으로 대장의 명을 받아 일가친척과 고국을 이별하고 바다를 배편으로 건너고 육지를 기차로 횡단하면서 여러 나라를 지나 언어와 풍속이 다른 한국 땅에 왔다. 그는 육신을 한국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한국어와 성경을 열심히 익히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죽음을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통곡할 일이나 영혼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찬송할 것이다.”라고 했다. 프릭 선교사는 한국 체류 활동 기간이 4개월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간 선교사였다. 그의 장례식 때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진심으로 슬퍼하였으며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최초로 순직한 구세군 선교사였다. 묘비에는 “1886년 8월 10일 출생하여 1912년 4월 29일 승천”이라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 사관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 사관  

 

 

<메리 리 로간 선교사>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 선교사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1856-1919)은 1856년 9월 17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장하여 J. V. 로간(Logan, Mrs. J. V.)의 부인이 되었으며, 남편은 켄터키 센트럴대학 학장으로 재직한바 있다. 이 때 그는 같은 대학에서 기독청년회(YMCA)와 여자기독청년회(YWCA)를 육성하였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힘을 썼다. 1908년 남편과 사별한 뒤 한국에 협력선교사로 자원하여 1909년 3월 5일 53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 무렵 선교사들은 대부분 정규선교사(Regular Members)로 임명되어 보수(報酬)와 재정 지원을 받고 활동하였다. 1884년 9월 20일 내한한 알렌(Allen)부터 1962년 9월 12일 내한한 포(Poe)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386명의 선교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로간 선교사의 경우 해외선교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모든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며 활동한 한국 최초의 자비량(Affiliated Members)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주일학교, 성경학교, 주일학교 교사반, 여성 전도반, 여성지도자반 등을 육성하면서 충북지역의 선교와 여성교육에 커다란 공을 세운 여성 선교사였다. 자기 집에서도 매주 15시간 씩 여러 성경 공부 반을 인도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5-60여명에 이른다. 이 무렵 그가 살던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에 있는 집(1911년 건립)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5호로 지정되어 “로위(Lowe)기념관”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그는 한국말도 잘 구사하고 충북과 청주를 사랑했으며, 언제나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준비된 자애로운 어머니”로 밀러(Miller)의 부인 도티(Doty)여사와 함께 청주지역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며, 여성의 근대화 의식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병으로 1919년 12월 7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 양화진 제2묘역(가-6)에 안장되었다. 한편 1921년 6월 청주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청주시 남문로 1가 154번지(청주제일교회)에 화강석으로 가로 0.4m, 세로 0.4m, 높이 1m 규격의 기념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충북기독교100년사>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첫째, 충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기념비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둘째, 한문을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 봉승(奉承) 진출갈력(盡忠竭力) 등 한문 용어까지도 한글로 기록하여, 일제 강점기에도 교회가 앞장서 우리글과 말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기독교와 한글운동-민족운동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귀중한 사료이다. 셋째, 이 비석은 여전도회 중심으로 건립되고 여성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 192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남·여석을 구분했던 휘장을 제거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로간 선교사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며 충북지역 여성교육에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직하여 양화진에 외롭게 묻혔다. 앞으로 그의 위대한 선교정신과 삶을 뒤돌아보며 기억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 선교사 

 

청주제일교회 로간부인기념비

 

청주제일교회 로간부인기념비 (1921.6.1 화강석으로 추모비 세움)

 

청주제일교회 로간부인기념비  

 

그러나 이 한글 기념비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기독교 역사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장로교 선교사를 천주교 신부(神父)로 잘못 소개한 사례도 있었다. 비문 첫 줄의 “아메리가나신부인” 부분을 천주교 순교지와 유적지를 소개하기 위하여 간행된 <한국의 성지, 순교자의 발자취> 책에서 “아메리카 나 신부”로 해석하여 미국의 나씨 성을 가진 신부의 선교비로 전해진 사실이 있다. 결국 한글에 띄어쓰기를 하지 아니하여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를 사실과 다르게 천주교 신부로 오인한 사연의 한 토막이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되어야하지만 정확하게 전해져야 한다. 문장의 작성에 띄어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링콘 프렌치>

 

링콘 프렌치(French, Lincoln, 1898-1923)


양화진 성지에는 구세군선교사 묘역이 특별히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9월 ‘구세군순교성지기념사업회’가 양화진 제2묘역 서쪽 언덕을 대상으로 대구와 충북(영동)에 묻혔던 구세군 선교사까지 이곳에 이장하여 집단화하며 성역화 사업을 시행했다. 한국에서 구세군 소속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헌신하다가 순직하여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는 8명에 이른다. 프릭(Frick), 코흘러, 리처드, 에이커홈, 힐, 토프트, 위더슨(Widdowson), 홉스(Hobbs) 선교사 등이다. 그리고 선교사 가족도 7명에 이른다. 실베스터 선교사의 두 아들(Douglas, Goldon)을 비롯하여 힐의 아들(W. O. Hill), 프랜치의 아들(Lincoln), 스미스의 딸(Dolleen), 폭스의 아들(Norman), 본윅의 딸Cathie)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을 국적별로 구분하면 영국인이 9명으로 가장 많고, 스웨덴 3명, 미국, 호주, 남아공이 각 1명으로 모두 15명에 달한다. 구세군 선교사 가족 가운데 링컨 프렌치(French, Lincoln)의 삶은 특별하다. 1898년 3월 1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청년기가 시작되는 18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한국 사령관으로 전임(轉任)되었을 때, 여동생 등 4명의 가족이 1916년 10월 2일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아버지 조지 프렌치가 1919년 11월 인도의 서 군국 사령관으로 전임하게 되어 한국을 떠난 후에도 그는 한국에 계속 머물러 독립생활을 하면서 한국인을 일깨워 주는 어학선생으로 봉사하였다. 결국 한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 생활 7년 만에 25세의 나이로 1923년 4월 18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정동교회에서 스티븐스(Stevens, William, 한국명: 신태빈) 구세군 사령관 인도로 집례 되었으며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 건립된 그의 묘비에는 ‘평안히 잠드소서(Rest in Peace)’라고 기록되어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조지 프렌치 구세군 사령관의 아들 링콘 프렌치(French, Lincoln, 1898-1923)  

 

조지 프렌치(French, George) 구세군 사령관


조지 프렌치(French, George, 한국명: 부래지)는 영국 브리스톨 출신으로 1882년에 임관되었으며, 미국 서부 군국 서기 장관으로 봉직하다가 허가두(Hoggard)의 후임으로 1916년 6월 30일 제2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 10월 2일 밤 9시 부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 추수감사 예배와 10월 8일 주일 예배에 설교하고 10월 13일부터 3회에 걸쳐 지방을 순회하였다. 첫 일정은 충남의 공주(유구)였다. 그는 서울과 지방 순회를 통하여 신실한 사관과 교우들이 힘써 일하고 희생한 결과로 이루어 놓은 훌륭한 선교 업적을 확인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수 백 만 한국인이 요망하는 바를 깨닫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간절한 뜻과 생각이 마음 가운데 가득하다고 했다. 많은 무리를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능력이 생기리라고도 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지만 오직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만 의지하고 나아가면 성공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힘써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구원 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자고 하였다. 그는 3년간 제2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봉직하다가 1919년 11월 5일 인도 서부 군국 사령관으로 전보(轉補)되어 한국을 떠났으나 교회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 1919년의 교회 수는 3,279개였고 교인 수는 355,114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의 임기 중 신설된 구세군 교회는 1916년에 교하, 옥천, 부토리를 비롯하여 1917년 건주리, 천흥, 안성, 김천, 광평, 연안 진남포, 낙평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서울 3영, 맹해리, 수원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특히 사회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육아원 개설에 공로가 있다. 그는 성결을 주장하며 “성결의 길(이사야 35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여기에는 첫째, “정결(淨潔)의 대로(大路)”를 통하여 사상과 언어와 행동이 정결하면 언행이 변화되어 선행(善行)을 한다고 했다. 둘째, 분명한 탄탄대로(坦坦大路)를 걷게 되면 곤란이 없을 것이며,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 명령을 잘 복종하는 사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다고 했다. 셋째, 안전대로(安全大路)처럼 우리 마음의 중심이 정결하여야 안전하다고 했다. 이밖에 희락이 충만한 영광(榮光) 스러운 길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자고 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베어드 가족>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 1862-1931) 가족 묘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 1862-1931) 기념비와 가족묘

 

숭실대학 설립자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 1862-1931) 부부 기념비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는 1891년부터 1931년까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지역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평양에서는 장로교 최초로 숭실대학을 설립하였다.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애나(찰스턴)에서 출생하였고, 1885년 하노버대학을 졸업하고,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1888)했으며, 하노버대학에서 철학박사(1903)와 신학박사(1913)학위를 받았다. 1891년 2월 1일 인천에 도착한 그 해 9월부터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1895년에는 대구로 옮겨 제일교회와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하고, 1896년 서울로 옮겨 경신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97년 10월 10일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에 취임한 후 1906년 9월 감리교와 연합하여 숭실대학으로 발전시켰다. 근로와 자조 정신을 교육 목표로 삼았으며, 네비어스(Neveus) 방법을 한국 실정에 맞게 자립(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 자족(Self-Support)에 기초한 선교 정책을 입안하였다. 숭실대학장을 사임(1916. 3. 31)한 뒤에는 교재 발간등 문서선교에 치중하였다. 1931년 11월 29일 장티푸스로 평양에서 별세하여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하였다. 양화진 자리에는 가족들에 의하여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윌리엄 베어드의 아내 베어드 A. 아담스 (Baird, Annie Laurie Adams, 1864-1916)


1864년 9월 16일 출생하여 1883년 웨스턴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하노버 대학(1884)과 워시번 대학(1885)을 졸업하였다. 1890년 11월 18일 윌리엄 M. 베어드와 결혼하였다. 1891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安愛梨(理)라는 이름으로 부산 대구지방에서 남편의 선교활동을 도왔다. 평양에 있는 숭실학당, 외국인학교, 여자성경학교, 숭의여학교 교사 혹은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5남매의 현모양처로서 찬송가 "440장(멀리 멀리 갔더니)" 창작을 비롯하여 한국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평양에서 1916년 6월 9일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기념비가 있다.


평양성경학교장 베어드, R.피터롤프 (Rose May Fetterolf,1881-1946)


1881년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하여 브룸스버그대학을 졸업하고, 1918년 8월 7일 시카고에서 윌리엄 M. 베어드와 결혼하고 같은 해 선교사로 내한하여 裵路使라는 한국 이름으로 성서 출판위원과 성서번역에 공헌하였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평양 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었다. 1946년 11월 13일 일리노이에서 별세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베어드 2세 (Baird, William M. Jr. 1897-1987),  리처드 H. 베어드 (Richard Hamilton Baird 1898-1995) 묘

 

재령지방 선교사 베어드 2세 (Baird, William M. Jr. 1897-1987)


윌리엄 M. 베어드와 아담스의 아들로 1897년 2월 7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3년 9월 4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裵偉林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 활동하였다. 1929년 라이스트(Reist Anna L.)와 결혼하고, 1939년 건강문제로 평양에 이주하여 1940년 11월 귀국하였다. 1987년 8월 5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 기록되어 있다.


강계성경학교장 리처드 H. 베어드 (Richard Hamilton Baird 1898-1995)


1898년 9월 1일 평양에서 윌리엄 M. 베어드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1923년 9월 8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Golden Stockton)과 함께 내한하였다. 裵偉就이라는 이름으로 강계지방에서 순회 전도하였고, 강계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전도인 양성에 헌신하였다. 1941년 일시귀국 후 1957년 다시 내한하여 미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총무로 봉직하다가 1960년 귀국하였다. 오클랜드에 거주하면서도 한국유학생 생활과 신앙을 지도하였다. 1995년 1월 1일 별세하여 가족들이 양화진 자리에 안장하였다. 묘역에는 잔디 대신 맥문동이라고 약초로 쓰이는 초화가 심어져 있다.

 

 

<홉스 선교사>

 

E. P. 홉스(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 선교사 묘

 

E. P. 홉스(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 선교사, 토마스 홉스의 부인  


엘렌 P. 홉스 (Hobbs, Beatrice Ellen Pugh) 선교사는 1880년 8월 24일 영국에서 출생하였다. 토마스 홉스와 결혼하였으며 1910년 9월 16일 남편과 함께 구세군 간호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남편의 성서공회사업 등 선교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기독교 부인절제연합회 회계(외국인부서)로 봉사하고, 사경회 강사로도 활동했다. 동물학대방지협회 등에서 사회활동도 하였다. 진명여학교 등 2개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육체적 힘을 능가하는 열정을 가진 헌신적인 선교사'로 전해진다. 이질에 걸려 서울에서 치료하다가 해외 치료가 필요하여 1924년 11월 서울을 떠나 1925년 2월 돌아오기도 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1932년 1월 30일 남편과 함께 서울을 떠나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1933년 2월 7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34년 4월 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성서공회 외국인 선교사로는 첫 번째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남편 홉스를 내조하면서 22년간 봉사했던 성서공회와 한국교회의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5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영국성서공회 총무 토마스 홉스( Hobbs, Thomas , 1880- )선교사 


토마스 홉스( Hobbs, Thomas 한국명: 許曄 )선교사는 1880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영국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9월 16일 구세군 선교사(사관)로 부인(엘렌 P. 홉스)과 함께 내한했다. 1911년 구세군 한국 본영에서 활동하고 개성 지방관으로 전임하였다. 원당 사평 장단 등 지방 군영을 개설하거나 관리와 순회 전도를 하였다. 문맹 퇴치와 사회 계몽 활동에도 힘썼다. 1913년 1월, 저다인(J. L. Gerdine)선교사와 밀러(Miller, Hugh 閔休) 총무의 추천에 의하여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부총무로 선임되었다. 그가 선임된 배경에는 '구세군 사관(정위)으로 2년간 근무한 32세의 기혼자이며, 한국어를 잘하는 동시에 이미 한국인 권서와 함께 전도를 해오고 있고, 권서 사업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으며 그 부인도 권서인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공회 사업을 관장하면서 특히 권서인(勸書人)의 조직과 관리를 주관하였으며, 전도 활동을 지휘하였다. 그의 권서 방식은 '모든 가정, 모든 사람(Every home, and Every man)'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호별 방문 형식의 권서 보급 운동을 장려하여 많은 성경을 보급하였다. 1921년에는 권서인을 위한 잡지 를 편집, 발간하였다. 밀러의 안식년 때(1916.7-1917.8)에는 대리 총무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자 지원 입대 한 후 제대하여 1919년 9월 3일 서울로 돌아왔다. 1937년 10월 제2대 밀러 총무가 정년으로 은퇴하게 되어 후임으로 제3대 영국성서공회 총무가 되었다. 부총무로 25년간 경륜을 쌓은 뒤 57세의 나이로 총무직을 맞게 되었으므로 이미 성서사업에 노련한 전문가로서 한국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 밀러 총무가 추진하던 개역성경 번역작업을 성실하게 마무리하고 신ㆍ구약을 합본하여 <성경 개역>으로 출간하는 등 성서 출판과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8년 '영국성서공회'(BFBS)의 명칭을 '조선성서공회'로 바꾸는 등 대한성서공회 발전에도 기초를 확립하였다. 1941년 3월, BFBS에 속했던 모든 성경 재고와 조성된 자금을 조선성서공회에 기부했다. 그는 1934년 엘렌 부인과 사별한 뒤, 1935년 9월 11일 이화여전 교수 밴플리트(Van Fleet, Edna Marie)와 재혼하였다. 1941년 5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중국 상해에 머물면서 미국 성서공회 임시 총무로 활동하면서 한국 성서사업의 계속 수행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에케르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ret) 묘

 

한국 군악대 창설자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ret)


에케르트는 1852년 4월 5일 독일 실레지아주에서 출생하여 브레스라우 음악학교와 드레스덴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군악대 대원이 되었다가 해군 군악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군악대 조직의 필요성이 논의되기는 1884년 갑신정변 때부터 1894년 갑오경장까지로 볼 수 있다. 1896년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겸하여 영국, 독일, 불란서, 오스트리아, 미국 등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는 귀국하여 서양 문명을 본대로 정부에 보고하면서 새로운 제도인 군악대 설치를 적극 주장하여 1900년 12월 군악대 설치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서 귀국하려던 에케르트를 초청하여 1901년 2월 7일 내한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국 최초의 군악대 조직과 창설 작업에 착수했다. 악기들을 구입하는 동시에 악사들에게 제복을 입혀 훈련을 시작했다. 대한제국 국가의 작곡을 제일 먼저 시도하였다. 고종 임금 제50회 탄신 기념일인 1901년 7월 25일(양력 9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서양 음악으로 연주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 이 연주회에 대하여 코리아 리뷰(1901. 9월호)에는 “고종황제의 제50회 탄신 축하 행사는 적시 적기에 아주 훌륭한 순서로 거행되었다. 이 축하 행사는 한국 발전 역사상 반세기 역사를 앞당긴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그가 작곡한 애국가는 한 번 연주되고 정식 채용되지 않았지만 한국 음악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 제국의 가사는 지금의 애국가보다 간결하다. "샹뎨여 우리 나라를 도우쇼서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영히 번영하야 해돋이 무궁하도록 성디 동방의 문명의 원류가 곤곤히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우쇼서. " 군악대는 27명의 한국인으로 4개월 연습을 하였다. 그러나 악기를 다루는 솜씨나 음악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에케르트의 공로가 컸으며 연주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지휘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그의 제자로 백우용 강흥준 김창희 등이 그의 뒤를 따라 군악대의 지휘봉을 들었다. 늠름한 제복차림, 번쩍거리는 악기들, 정확한 박자, 흐르는 듯한 리듬과 하모니. 이런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상상 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때 한글로 새긴 은(銀) 기념 메달도 하사되었다고 한다. 이 군악대는 1907년 우리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될 때 함께 해산되었다. 에케르트는 이때 일자리를 빼앗겼으나 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그리고 1916년 8월 6일 자택에서 별세하여 8월 8일 3일장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카톨릭 신자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일본 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일본국가 기미가요(君代)의 작곡자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 정부는 태극장 3등을 수여하였다. 그의 부인은 그가 별세한지 5년 후 1920년 독일로 돌아가서 1934년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들은 한국에서 출가하였다. 맏딸(아마리 에케르트)은 프랑스 외교관 마르델(Martel, Emile)과 결혼하였으며, 그는 한국에서 불어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어 교육에 힘썼다. 한국에서 55년(1894-1949) 동안 장기간 활동하다가 마르텔도 양화진에 묻혔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채핀 선교사, 로사 베어>

 

빅터 D. 채핀(Chaffin, Victor D.,), 안나 B. 채핀 부부 묘

 

빅터 D. 채핀(Chaffin, Victor D.,) 선교사


빅터 D. 채핀(Chaffin, Victor D., 蔡彼得, 1881-1916)선교사는 1881년 미국에서 출생했다. 1911년 6월 안나 채핀과 결혼하여, 1913년 4월 23일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부인(안나 채핀)과 딸, 그리고 처제(로사 베어)를 동반하여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1914년 감리회 선교사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1914년 12월 1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기,충청노회의 허락을 받아 서울 서부지역과 경기도의 고양, 김포지역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동사목사(同使牧使)로 활동했다. 새문안교회, 양평동교회 등 여러 교회를 순회 시무(관리)하였으며 노회의 총대로 활동했다. 선교 활동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5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경충노회록에는 “원두우(언더우드) 목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한 채피득(채핀) 목사가 세상을 떠나... 섭섭하고, 슬프고, 막막한 일이며 애도한다”고 기록되었다.


한국 최초의 감리회 여성 목사로 활동한 안나 B. 채핀(1883-1977) 


안나 B. 채핀 (Chaffin, Anna Bair, 蔡富仁)선교사는 1883년 9월 26일 미국 아이오와주 매닝에서 출생했다. 1901년 라도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간 교사로 활동했다. 1906년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1년 간 공부하고 워싱턴 존 플래처 대학 피아노과를 졸업(1911)했다. 빅터 채핀과 결혼하여 딸 모텔을 낳았으며 남편을 따라 선교사로 내한했다. 1916년 남편과 사별하고 감리회 부인성경학원 교사가 되었으며 1918년 앨벗슨(Albertson)의 후임으로 원장이 되었다. 안식년(제1차)때 뉴욕 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1919-1920)했다. 1920년 한국에 돌아와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안식년(제2차) 에는 콜럼비아대학에서 종교교육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우리 집》선교잡지 편집인과, 《절제, The Tempreance News》발행인으로 문서 선교에 힘썼다. 1931년 6월 14일 양주삼 총리사 집례로 개성에서 한국 최초 여성 목사가 되었다. 협성여자신학교와 협성신학교가 통합되면서 부교장으로 여성교역자 양성에 힘썼다. 만주신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38년 경기, 충청지역 여성선교회와 사회복지사업을 관장했다. 친동생 로사 베어 목사가 이곳에서 선교 활동 중 뇌암으로 별세했기에 1940년 강제 귀국하였다가, 1946년 크리스마스 무렵 다시 돌아와 여선교회 사업을 재개했다. 그는 “한국선교 35주년기념 및 회갑연” 과정에서 “내 평생 사업이 여성교역자 양성에 있으므로, 일생을 바쳐 일한 은퇴 여전도사 안식관 설립”이 소원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0월 5일 “채부인 기념 여전도인 안식관”이 개관되었다. 그는 은퇴(1952) 한 뒤에도 감리교해외구제위원회 사업국장으로 봉직하고, 이화유지재단(有夏學園)이사장을 역임(1954-1958)했다. 일평생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오직 선교와 여성교역자 양성에 헌신하고 1962년 미국으로 돌아가 1977년 별세했다. 유해는 양화진 남편 곁에 안장되었으며 묘비에 채핀 부부 생졸 연대가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빅터 D. 채핀(Chaffin, Victor D.,) 선교사  처제  로사 B. 베어

 

여성 사회사업에 헌신한 로사 B. 베어(1888-1938) 선교사


로사 B. 베어(Bair, Blanche Rosa, 裵義禮)선교사는 1888년 미국 디모인에서 출생했다.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했다. 1913년 감리회 선교사로 언니 안나 B. 채핀(Chaffin, Anna Bair, 蔡富仁)을 따라 내한했다. 해주, 공주, 인천지역에서 전도 및 여성 사회사업에 종사했다. YMCA 영어학교 교사로 봉직(1929)했다. 1930년 태화 여자관 관장으로 여성 사회사업을 했다. 그의 언니 안나 채핀과 같은 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천안지방에서 여성사회사업을 위하여 활동(1934-1938)했다. 1938년 3월 10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병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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