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단오제
이보형 / 문화재 전문위원
1. 머리말
설 명절 다음으로 큰 명절을 꼽자면 8월 추석을 크게 치는 고장이 있고 5월 단오를 크게 치는 고장이 있었다. 지금은 단오 명절을 치는 고장이 거의 없어져가고 있으나 단오를 명절로 꼽는 고장에서는 준치국을 끓이고 쑥떡이나 수리떡을 장만하여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아낙네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도 감고 창포뿌리를 머리에 장식하고 그네 터에 모여 「외그네」나「쌍그네」를 타며 서로 솜씨를 겨루며 즐기었고 남정네들은 모래사장이나 잔디밭에 모여 씨름판을 벌이고 배지기, 발걸이, 나꿔치기 등 갖가지 장기로 힘을 겨루며 즐겼다. 거기다가 장원에 황소를 거는 큰 씨름판을 붙이고 광대나 풍물잽이들을 불러들여 놀이판을 벌인다치면 수천, 수만명의 구경꾼이 몰리고 술장수 떡장수 엿장수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풍성한 난장판이 되는 것이다.
요새 단오놀이가 없어진지 오래이고 다만 지방의 문화제행사로 몇 가지 민속놀이가 공연되고 있는 정도이지만 아직까지 옛 단오놀이판이 변함없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강릉이다. 현재 행해지는 단오놀이 가운데 강릉단오놀이를 첫 손으로 꼽는 까닭은 이 놀이가 벌어지는 동안에 강릉, 삼척, 평창, 정선, 양양, 울진 등 이른바 영동육군이라는 이웃 고을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구경꾼이 매일 수만 명씩 모여 연인원 수십만에 이른다는 놀이판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두고 이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옛날부터 이 고을사람들의 깊은 민간신앙의 뿌리가 되는 대관령국사성황제를 중심으로 갖가지 민속놀이를 벌인다는 깊은 문화적 전통성을 두고 이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강릉단오놀이의 짙은 향토적 특성을 두고 강릉사람들은 긍지가 대단하다. 어느 외지인사가 「강릉단오제가 올해 몇 회가 되느냐」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가 망신을 당했다든가 어느 방송국에서 단오제를 공동 주최하자고 제의했던 것을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든가 강릉단오제가 국풍 81을 본딴 것이라는 말을 꺼냈다가「무슨 소리냐 강릉단오제는 태고적부터 이렇게 전승되고 있다. 국풍81이 강릉단오제를 본딴 것이다」하고 면박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두고 주민들이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강릉사람들이 강릉단오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조사자는 영동지방에 단오를 중심한 민속조사를 목적으로 단오제에 참여한 것이나 이 단오놀이가 무형문화재 제 13호 강릉단오제의 공연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의 전수실태를 조사하여 두고자 한다. 또 해마다 향토민속놀이가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전문적인 기록이 없이 그대로 넘겨 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1983년에 벌어진 강릉단오제를 간단하게나마 기록해두는 것이다.
2. 강릉단오굿
강릉단오제는 강릉에서 5월 단오를 전후하여 며칠을 두고 대관령국사성황님을 모시고 강릉 남대천 모랫벌에서 벌이는데 굿과 제사와 굿판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지는 갖가지 놀음을 일컬어 강릉지방에서는 단오제, 단오굿, 단오놀이라 불러오고 있고 때로는 단양제, 단양굿, 단양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로 부터 강릉단오굿에는 호장, 부사색, 수노 등 구실아치들과 많은 일반 주민들이 참여하여 관민이 모두 나셨던 것인 만큼 지금도 이를 이어서 강릉시가 주최하고 각 기관과 군민이 모두 합심하여 나서고 있다. 강릉단오제대회장은 시장이 당연직으로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릉시장과 명주군수와 각 기관장들이 직접 제관으로 참석하고 있고 단오제장과 민속놀이판의 각 분야마다 따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집행하고 있다.
굿과 제사는 강릉단오제 대회장 밑에 구성된 제전위원회에서 맡아 일하고 있는 바 위원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13호 제의식 보유자 김진덕이 맡고 있다.
각 관계장이 맡고 있는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등 제관을 지명하고 동원하는 일, 집례 대복 판진설 봉향 봉순 안인 등 제의식의 제집사와 종사원을 지명 동원하는일. 제물 제기 제복을 챙기는 일은 김진덕이 맡았고 무당과 양중을 지정하고 동원하는 일, 굿청에 비치할 무구, 지화, 의물 따위를 챙기는 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13호 강릉단오제 무의식 보유자인 박용녀(여. 71세)가 맡고 있다.
매년 봄이 되면 강릉에서는 강릉단오제임원회를 조직하고 제전위원장은 도가를 정하여 제물을 장만하게 한다. 근래에는 마땅한 도가를 정하기 어려워 제의식의 보유자 자택에 맡기기도 하고 음식점에 맡기기도 했는 바 금년에는 최두길(남 40세)이 도가를 맡았고 보유자택과 분담하여 모든 것을 주선하는 것 같았다. 옛날에는 단오 25일 전날인 음력 3월20일에 도가에서 깨끗한 쌀을 준비하여 대관령국사성황당 마루 밑에 독을 묻고 제주를 담궈 놓았다가 서낭제 지낼 때 걸러서 제주로 썼다하나 이것이 번거로워 그 뒤에는 도가에서 담궜다. 근래에는 제주를 금하기 때문에 당일 시중에서 술을 사다가 제주로 쓴다고 한다.
강릉단오굿은 본디 「초단오」라 하여 음력 4월초하룻날과 「재단오」라 하여 음력 4월8일에 대성황사에서 호장, 부사색, 도비 등 등 관속이 헌주로 제를 지내고 무당이 산유가를 부르며 굿을 한다 하였으나 지금은 초재단오굿이 없어진 지 오래이다,
아마 일제때 서성황사가 없어지면서 초. 재단오굿도 약해져 버린 것 같다. 지금 단오굿은 음력 4월 보름날 대관령 서낭님을 모셔노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옛날에는 서낭님을 모셔오는 전날인 4월14일 저녁무렵에 서낭님을 모시는 굿패들이 대관령으로 떠났다 한다. 저녁을 먹고 태평소, 나발, 육각잽이 등 악수가 앞장서고 이어서 호장, 부사색, 도노, 도사령 등 관속이 나가고 무당과 양중들 수십명이 뒤따랐다고 하는데 모두 말을 타고 풍악을 울리면서 가는 행렬이 더없는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뒤에는 수백명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지고 뒤따랐다한다. 이렇게 많은 굿패들이 풍악을 울리며 대관령을 향해 오르다가 중간에 구산역에 이르러 밤참을 먹고 근처 송정에서 굿패들이 야숙하며 밤을 지샜다한다. 송정에서 밤을 지샌 굿패들이 새벽에 흐르는 시냇물에 쌀을 씻어 아침밥을 지어두었다가 4월15일 새벽닭이 울면 출발하여 허공다리에서 아침밥을 먹고 다시 출발하여 파시쯤에 대관령성황사에 도착하였다 한다.
지금은 이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제관과 굿패들이 4월 15일 차로 떠난다. 시에서 제물차와 제관차를 마련한다. 제물차는 먼저 문화원에 들려 제기고에서 위패 담을 주속과 제문과 제복을 싣고 다시 도가에 들러 제물을 싣고 시청마당에 당도한다. 시청마창에서는 주소의 속압(뚜껑)를 열고 주면에 대관령국사성황위신, 대관령국사여성황신위라고 쓴 지방을 분이고 위패를 만들고 이것을 다시 주속에 넣고 주속을 위패 모시는 이에게 안기운다 위패는 정해진 이가 단오제동안 모시고 다니는데 금년에는 최돈제(남. 60세)가 이 일을 맡아 했다. 제물차에는 위패를 든 이와 신목을 들고 올 신장부와 제사종사원과 무당과 양중이 타고 앞장서 떠나면 제관차에 강릉시장, 명주군수, 각 기관장 등으로 구성된 제관들과 제의식을 집행할 제집사들이 타고 뒤따른다.
9시30분쯤에 대관령국사성황사에 이르면 제물차에 탔던 위패든 이가 내려 성황사에 가서 서낭당에 올라가 위패을 모셔 놓는다. 10시쯤 되면 산신제부터 모신다. 이 서낭당이 명주군 땅이기 때문에 명주군수가 산신제의 초헌관이 되고 영림서장이 아헌관을 했다. 제물을 차리고 역기를 부르며 헌순과 독축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향교의 문조제형과 같이 유교식 제사를 올린다.
산신제를 마치고 11시쯤되면 대관령국사 서낭제를 모신다. 산신제와 같이 헌순. 독축으로 제사를 올리는 바 이번에는 강릉시장이 초헌관을 맡고 강릉시 상공회의소장이 아헌관을, 강릉문화원장이 종헌관을 맡았다. 제관이 음복을 하고 물러나면 무당과 양중이 앞에 나서서 굿을 한다. 먼저 부정굿을 하고 나서 서낭굿을 하는데 부정굿은 굿의식 보유자인 박용녀가 맡아 했다.
서낭굿이 끝나면 제관과 무당과 구경꾼들에게 점심이 제공된다. 옛날에는 당 옆에 큰 솔을 여러개 걸고 말쌀로 밥을 짓고 소머리를 삶아서 구수한 국밥을 나누어 주었다 하나 지금은 구경꾼이 300여명이 넘게 모이기 때문에 번거로워서 그대신 빵을 마련하여 점심으로 제공하고 있다.
점심 식사를 마치면 2시쯤에 신목(서낭대)을 벤다. 신장부가 미리 서낭당 옆 숲 속에 있는 신나무 가운데 키가 서너 길 쯤 되고 가지가 세갈래로 되어있어 마치 양팔을 벌린 모습을 한 나무를 골라 눈여겨 두었다가 서낭을 받아 신목을 벨 때 무당과 함께 올라가서 눈여겨 둔 신나무를 양손으로 쥐고 서서 사낭을 받는다. 신장부는 강신능력이 있고 무거운 신목을 들고 굿당까지 나를 수 있는 기력이 있는 마땅한 남자를 정하는데 옛날에는 용서방이라는 이가 맡아 했다하며 용서방이 죽고나서 20여년전부터 지금까지 심상원(남. 64세)이 신장부를 맡아오고 있다. 신장부가 신목을 손으로 붙잡고 있고 양중들이 치는 악기의 반주로 무당이 축원을 하면 신장부에게 신이 내려 신목이 흔들리게 된다. 신이 내려 신나무가 흔들리게 되면 신장부가 붙들고 있는 채로 옆으로 인부가 도끼나 톱을 들고 있다가 나무 밑둥을 자른다.
강릉단오제 지정보고서(주 : 임동권「강릉단오제」중요무형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66)에는 「무녀가 굿을 하고 하신하면 그 중에서 한 나무가 흔들리니 신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며 또 무녀가<오늘 국사서황님을 모시고저 왔읍니다>하면 나무가 저절로 흔들린다. 신에 힘에 의해서 흔들리는 나무를 도끼로 베어 신목으로 삼는다 고 하여 신장부가 손으로 붙들지 않은 상태에서 신목이 저절로 흔들리는 것으로 신고되고 있으나 무의식에서 신대(신간)는 반드시 사람이 손으로 잡게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강릉단오제에도 본디부터 신장부가 신목을 잡고 서낭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낭이 내려 신목을 베게되면 대관령국사 서낭님에게 가호를 비는 사람들이 저마다 미리 마련해온 예단을 신목에 달아 맨다. 예단은 3척 7촌 길이의 청황색으로 물들인 명주인데 요새는 인조견을 쓴다.
비는 이의 생명과 생년월일을 쓰고 제원, 소원성취, 장수 등 문구를 쓴 것이다. 예단이 많이 걸리게 되면 신목이 무거워서 신장부가 나르기에 애를 쓴다고 한다. 신목에는 헝겊 예단외에도 실타래도 걸고 백지도 걸어 맨다. 신목이 내려오면 신위나르는 이가 서낭당에 모셨던 위패을 다시 주택에 넣어 안고 앞장서 내려오고 신장부가 신목을 들고 뒤따르고 무당과 양중이 좌악을 연주하며 뒤따르고 제관과 제의식 종사원 및 주민들이 뒤따라 내려온다.
주차한 곳에 이르면 위패과 신목과 무당, 양중은 제물차를 타고 내려오고 제관과 제집사는 제관차로 내려온다. 옛날에는 수십명 제관과 무당, 양중은 제물차를 타고 걸어서 제민원성황과 굴면성황을 거쳐 구산성황에 이르렀다 하나 지금은 차를 타고 바로 구산성황사에 다다른다. 구산은 옛날 대관령으로 가는 길목의 역원이 있던 곳이다.
구산성황사에 이르면 차를 세우고 위패 모신 이는 차에서 내려 앞장서서 구산성황사로 가고 신장부는 신목을 들고 뒤따르고 무당과 양중은 악기를 연주하며 뒤따른다. 위패는 구산성황사 안에 영산지신 위패 앞에 놓고 신목은 구산성황사 처마에 걸쳐 세워 놓는다. 촌. 이장이 독축 없이 단잔을 올리며 간단히 제사를 모시고 나면 무당이 굿 한석을 한다.
구산서낭제를 마치면 신목과 무당 양중이 다시 차에 올라 강릉시내로 들어온다. 옛날에는 위패과 신목이 여성황사를 거쳐 당일로 대성황사로 향하기 때문에 많은 구경꾼들이 구산역까지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왔다 하나 지금은 횃불 행렬이 없고 음력 5월3일 대관령국사 서낭님의 위패가 여성황사에서 남대천 굿당으로 행차할 때 햇불행렬 대신 제등행열이 행해지고 있다. 산 밑에 차가 당도하면 위패가 앞에 서고 신목이 뒤따르고 무당과 양중이 풍악을 울리며 따르고 제관과 제집사가 뒤따라 여성황사에 오른다. 여성황사 안에 모신 여서낭님 위패를 한쪽에 비껴 놓고 그 자리에 대관령국사서낭님 위패를 모셔 놓으며 신목은 여성황사 한편에 세워 둔다.
예단을 걸쳐매지 못한 이들은 이때에 예단을 신목에 맨다. 이어서 제관이 헌순를 모시는데 이번에는 제전위원들이 헌관을 맡게 되고 위원장이 초헌관을 맡았다. 헌관이 헌순하고 대축이 독복하고 제사를 마치면 무당과 양중이 나가서 부정굿과 서낭굿을 하고나서 위패와 신목은 여성황사에 그대로 모셔놓은 채 굿패들이 하산한다. 제의식 종사원들은 종사원 도가로 가고 무당과 양중들은 신자 도가로 간다. 신목이 마르면 신장부는 홀로 대관령에 올라가 새로 신목을 베어 온다. 5월 3일에는 대관령국사 서낭과 여서낭을 남대천 굿당으로 모신다. 옛날에는 서낭님을 대관령에서 당일로 대성황사에 모셨으나 지금은 대성황사가 없기 때문에 보름 동안 여성황사에 모셔 두었다가 이날 굿당으로 모시는 것이다. 강릉시에서는 이날 밤에 강릉단오제의 전야제 행사를 벌인다. 오후 5시쯤에 제전위원으로 구성된 제관과 종사원, 무당, 양중이 공택동 여성황사에 가서 제물을 차려 놓고 먼저 당사 헌순 독축으로 영신제를 모신다. 영신제가 끝나면 무당과 양중이 부정굿과 서낭굿을 한다. 서낭굿이 끝나면 서낭님 위패와 신목을 모시고 굿패들이 열지어서 내려 온다. 이 행열의 앞에는 관복을 입은 이가 서낭님 위패을 모시고 앞장 서서 도보로 걸어가고 이어서 신장부가 전복에 전립를 쓰고 신목을 받쳐들고 따르는데 신목에 예단이 많이 걸려있어 무겁기 때문에 이것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백포줄 네 개를 신목 꼭대기에 걸어 네 사람이 사방에서 백포줄을 붙들고 당기며 따라간다. 그 뒤에는 무당과 양중이 꽹과리, 장구, 징, 바라, 호죽 등 악기로 풍악을 울리며 따라 나아가고 이어서 부사가 관복을 입고 가마를 타고가고 사령들이 일산을 받쳐들고 호휘하는 가운데 행차한다. 부사역는 제전위원장이 맡고 있다. 그 뒤에는 농악대들이 풍악을 치며 따르고 뒤에는 제등행열이 뒤따른다. 이 제등행렬은 옛날 횃불행렬을 대신하는 것이다.
서낭님을 모신 행렬은 여서낭의 생가로 전해기는 정씨가에 들른다. 정씨가에는 지금 최씨가 살고 있으나 해마다 서낭님 모시는 행열이 머물면 제사를 지낸다 한다. 최씨는 안대문 밖에 제상를 차려 놓았다가 서낭님 위패와 신목이 당도하면 위패를 제상에 모셔 놓고 신목을 곁에 세우고 주인이 독경없이 단순으로 제사를 지낸다. 이어서 무당이 부정굿과 서낭굿을 한 다음 굿패는 정씨가를 떠나 풍악을 울리며 시가를 누빈다. 옛날에도 4월15일 대관령에서 서낭모신 굿패행렬이 오면 구산역에 까지 수많은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나왔고 위패, 신목, 취악수, 호장, 부사색, 수노, 도사령, 무견 들의 행렬에 끼어 따라 내려와서 시가를 누비고 기병청, 부사, 전세청, 대동청, 사창 등을 순회하며 지덕을 눌러주고 나서 대성황사에 다도하였던 이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하거니와 지금도 이 굿패행렬은 강릉단오제의 큰 구경거리로 꼽히고 있다.
시가를 누빈 굿패행렬은 남대천 모랫벌에 가설한 제단으로 간다. 옛날에는 굿패행렬이 대성황사에 이르러 여기에 위패과 신목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고 굿을 했으나 대성황사가 없어진뒤로는 매년 남대천에 제선을 가설하고 여기에 위패과 신목을 모셔놓고 삼실과와 포로 간단히 제상을 차려 놓고 단잔을 부어 놓고 굿패 일행이 모두 4배 하고 나서 굿패는 헤어져 도가나 자가로 가느데 밤에는 야간숙직원들이 남아서 밤을 지새며 제단을 지켰다.
음력 5월4일부터 7일까지 4일동안 강릉단오제가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남대천 모랫벌에는 수만의 구경꾼아 들끓는 속에 대관령국사서낭님을 모신 굿판이 벌어졌고 그 주변에는 씨름판, 그네판, 농악경연대회, 관노탈놀이 등 민속놀이가 벌어졌고 서커스, 가무단, 약장수 등 흥행단체가 천막을 치고 놀이를 벌이는가 하면 수많은 장사꾼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를 벌여 문자그대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4일아침 9시30분에 굿당에서는 유교식으로 역기를 부르고 헌순과 독축으로 조존제를 올렸다. 이날 초헌관은 강릉시장이 맡아 했다. 조존제가 끝나면 이어서 무당과 양중이 앞에 나아가 하루 종일 굿을 한다. 먼저 부정굿을 하며 굿당의 부정을 가신 다음 선낭굿을 하여 대관령국사서낭님에게 강릉사람들의 안전과 풍요를 빈다. 이번 단오굿에 나온 무당은 박용녀(여. 74세) 신석남(여. 53세) 사화선(여. 54세) 변연호(여. 56세) 김미향(여. 44세) 송명희(여. 32세) 박금천(여. 30세) 빈순애(여. 32세) 이순덕(여. 18세) 등이었고 양중은 신동해(남. 52세) 안동숙(남. 56세) 김장길(남. 38세) 김명익(남. 37세) 김명대(남. 22세) 등이었다. 이 가운데 안동숙 변연호 김미향 송명희 김장길은 이른바 송동숙 패로 외부에서 불러온 무당과 양중이다. 강릉 사는 무당과 양중은 해마다 변함없이 굿에 나오지만 외부에서 불러 온 무당은 해마다 다르다. 지금까지 불러 들여 온 무당과 양중들은 안동숙패 외에도 김석출패도 있었고 이금옥패도 있었다. 5월 4일에는 부정굿과 서낭굿 외에도 산신굿, 세존굿, 칠성굿을 했다. 굿거리 수와 순서는 옛날부터 일정하지 않았다. 굿판이 끝난 것은 밤 8시쯤이었다.
이 동안에 굿당 밖에서는 농악놀음, 궁중탈놀이, 그네뛰기, 씨름고 같은 민속놀이는 물론이고 곡마단, 가무단, 약장수 등 갖가지 놀음이 벌어졌던 것은 물론이다.
5월5일에도 아침9시30분에도 조정제로 굿판이 시작된다. 이번 조존제에는 명주군수가 초헌관을 했다. 조존제에 이어서 무당과 양중이 들어서 굿을 한다. 이날은 장국굿(놋동이)이라 손님굿을 했고 밤에는 청왕굿을 했다.
5월6일의 조존제도 같은 시각에 시작했다. 이날의 초헌관은 강릉경찰서장이 맡았다. 이어서 심청굿 합심서낭굿과 같은 굿이 벌어졌다.
마지막날인 5월7일에도 조존제로 굿이 시작되었다. 이날 조존제의 초헌관은 강릉교육장이 맡아 했다. 말명굿에 이어서 꽃노래 등노래 초롱가로 군무와 합창으로 화려한 굿판이 벌어져 강릉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신 대관령국사서낭님을 즐겁게 해드린다. 해가 저물면 제전위원들이 유교식 여신제를 올리었고 어두어지자 환우굿을 했다. 굿당의 위패에 붙인 지방, 신목, 지화, 징, 觵대 등물을 남대천 200m상류 대관령 쪽으로 내다 놓고 불을 피워 태우면서 무당은 서낭님도 잘 가시고 잡신도 잘 먹고 물러가라고 축원하였고 주민들도 한 없이 절하며, 떠나는 서낭님 내외를 환송하였다.
3. 강릉관노가면극
단오굿 동안에 강릉관노 탈놀이는 농악놀이판에서 농악놀음과 함께 틈틈이 벌어졌다. 이번 탈놀이는 관동대학생들이 놀았다. 옛날에는 강릉여고생들이 놀았고 그 뒤 강릉교대학생들이 놀은 적도 있으나 지금은 관동대학 민속반 학생들이 맡아 놀고 있다.
지정조사보고서에는 장자마리과장, 양반과장, 시딱딱이과장, 화해과장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강릉여고학생들이 놀았던 것은 길놀이(산유가)과장, 백포장과장, 장자마리과장, 양반과장, 시시딱딱이과장, 양반소무고장, 시시딱딱이 훼방과장, 소무 자살과장, 화해과장, 뒷풀이과장으로 꾸미었었다. 강릉관노 탈놀이는 60여 년전에 전승이 끊어졌던 것을 해방 후 복원한 것인데 보유자들이 복원한 것이 아니고 고노들의 말을 듣고 이 놀이와 관련이 없는 이들이 재구성하였기 때문에 탈, 복색, 반주음악, 춤사위에 대한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여러 말이 많았다. 지금 관동대학 민속반에서는 김선풍 교수를 중심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 공연된 것은 길놀이 과장, 장자마리과장, 양반소무과장, 시시딱딱이 과장, 화해과장, 뒷풀이과장으로 꾸며져 원형에 없는 백포장과장을 없앴다. 길놀이에서 산유가는 옛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학산리 민요 영산홍가로 복원한 것은 잘 된일이다. 반주음악을 서울 굿거리나 잦은타령에서 벗어나 영동지방 무악이나 농악가락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은 별 진전이 없고 춤사위도 영동 무무와 농악무를 토대로 재구성하고자하지만 아직도 성과가 없는 상태이다.
4. 보유자와 전수생
중요무형문화재 강릉단오제는 굿의식, 제의식, 관노탈놀이 이렇게 세가지 기술능의 보유자를 인정했다.
관노놀이의 보유자로 차형원과 김동하가 1967년에 인정되었으나 그 뒤 전수생도 기르지 못하였던 것 같고 보유자들은 사망하고 말았다.
제의식의 보유자로 김신묵이 인정되었다. 김신묵은 김진덕에게 제의식을 전수하고 1981년에 사망했다. 김진덕은 1975년 전수생이 되었고 1981년에 전수자로 인정되었다가 보유자 사망후 1982년에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김진덕은 옛날에 궁직에도 있었고 유식하며 향토문화에 열의가 있는 이로 제전위원장으로서 강릉단오제 제의식의 실무를 맡고 있다. 그는 1981년에 김제월(남. 30세)를 전수생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강릉단오제의 역기, 축원, 제기, 제복, 제의절차, 강릉단오제 민속 등을 가르치고 있다. 김제월는 농사꾼으로서 소박하고 성실한 사람이며 제의식의 공부를 영예로 알고 성실히 공부하는 것으로 칭찬을 받고 있다.
무의식의 보유자로 장재인이 1967년에 인정되었으나 그가 누구를 전수생으로 인정하여 전수하였는지 알 길이 없고, 1973년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뒤 1976년에 박용녀(여71세)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박용녀는 강릉 출신 무당으로 10대에 무당이 되었다하며 그의 할아버지에게 무의식의 기예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 강릉단오제에 나가 굿을 했다하나 지금은 굿당에서 무당들을 지휘하고 있으며 실제 굿판은 신석남 등 젊은이에게 맡기고 있다.
그는 신석남을 전수생으로 길러 이수시켰고 조교로 쓰고 있다.
신석남은 어려서 그의 모친에게 무의식을 배워결혼 후에 이미 유명한 무당으로 이름이 났었다.
1978년에 강릉단오제 무의식 전수생이 되었고 1980년에 이수하고 현재 조교로 인정받고 새로운 전수생 박금천을 지도하고 있다. 그의 가족들 가운데 무업에 나설 젊은이를 지도하고 있다.
박금천(여. 30세) 은 박용녀의 조카이며 고교를 졸업하고 1980년에 전수생이 되어 박용녀에게 기예를 배우고 1981년부터는 조교 신석남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이번 단오놀이에 출연하여 간단한 굿을 맡아 해냈다.
첫댓글 아주 예전꺼네여 약13년전에 기록된것이네여.....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