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民 俗 部 門
崔 承 洵
1) 槪 要
東海市(舊 北坪)가 工業團地로 發展함에 따라 이에 隨伴한 工業用水와 生活用水의 急增 이 豫見됨으로 現在의 北坪 前川의 水量으로는 이룰 감당할 수 없게 되어 分水嶺 西쪽 臨溪 에 땜을 만들어 이물을 嶺東으로 逆流시켜 이 地域의 各種 用水를 充當시키려는 計劃이 樹 立되었다. 이에 따라 땜이 完成되면 旌善郡 臨溪面의 面所在地를 비롯한 臨溪面의 主要 聚落과 農耕地가 水沒豫定地로 되어 있음으로 本 調査는 이 地帶의 여러 分野의 調査 中 民 俗調査를 한 것이다.
ㄱ. 沿 革
臨溪面은 新羅 때에는 凕州에 屬하였다가 高麗時代에 凕州가 江陵이 된 뒤부터는 江陵郡 에 屬하게 되었고 1906年 高宗 43年에 實施한 行政區域 改編 때에 지금의 旌善郡에 屬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江陵에 屬하고 있다가 旌善郡으로 移管된지가 一世紀도 되지 아니함으로 地理的으로는 嶺西라 할지라도 文化的으로는 完全히 江陵圈에 屬하고 있다. 水系로 보아서 는 南漢江의 最上流인 松溪川과 骨只川이 漢江의 源流를 이루고 있으나 舟便에 의한 交易 이 全無하였으므로, 嶺西에 있으면서 嶺西文化圈과는 關係가 없이 嶺東文化의 影響을 받고 있다.
이 地方이 嶺西에 있으면서도 文化的으로는 嶺東의 影響을 받고 있는 것은
첫째 高宗 年間의 行政區域 改編 以前에는 江陵에 屬하고 있었다는 것
둘째 河川이 있기는 하나 舟便을 利用한 嶺西의 다른 地方과의 交易이 없었다는 것
셋째 舊時代의 交易品目 中 가장 重要한 것이 소금인데 소금交易을 嶺東海岸地方인 江陵 三陟 玉溪 等地에서 했다는 것
넷째 소금의 產地인 上記 地域이 步行으로 하루 길이였다는 것
等이 臨溪가 地理的으로는 嶺西에 있으면서 文化的으로는 嶺東圈에 속하게 된 重要한 原因 이다. 이 以外에도 氏族別로 보았을 때 現在 臨溪面內에 다음과 같은 宗親會 또는 花樹會 가 있다.
延安金氏臨溪宗親會
江陵金氏臨溪宗親會
江陵崔氏臨溪宗親會
原州邊氏臨溪花樹會
德水李氏臨溪宗親會
三陟金氏臨溪宗親會
六氏族 宗親會 또는 花樹會가 있으나 이것을 本貫別로 보면 2分之1이 嶺東으로 되어 있고 江原道 嶺西에 本貫을 둔 氏族은 하나뿐이며 나머지는 江原道 外에 本貫을 두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 할지라도 이 地域이 嶺東文化圈에 들 수 있는 與件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高宗 年間의 行政區域 改編前에 臨溪面이 嶺西에 있으면서 江陵에 屬하고 있었던 것은 이 時期의 行政區域이 地理的面보다는 文化的面에 置重했던데 緣由하고 있다고 하겠고 이러한 緣由로 臨溪는 江陵에 屬하고 있었다.
이러한 歷史的 背景때문에 通過儀禮를 비롯하여 歲時風俗 信仰 等이 江陵과 恰似하고 다 만 農俗에 있어 嶺東地方 野地農俗과는 差異가 있음이 發見된다. 本 調査에 있어 口述하여 준 사람은 本 地方의 古老 李種厚氏(守孤堂 主人) 崔德集氏(郡諮問委員) 金大中氏(前面長) 現面長 其他 敬老堂 老人들이다.
2) 通過儀禮
(1) 產 俗
ㄱ. 祈 子
男系家統으르 되어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祈子의 風俗이 있듯이 臨溪 水沒豫定地區에도 祈子의 習俗이 있다. 祈子의 當處는 佛宇와 巨岩, 巨木, 山神堂, 城隍堂 等이 一般的이나 臨溪는 由緖깊은 寺刹이 없어 佛宇에서 祈子하는 風俗은 거의 없고 大槪는 城隍堂이나 巨岩에서 하고 있다. 祈子하는 方法은 一定한 方法은 없고 祈子當處에 가사 촛불을 켜고 정화수를 떠놓고 祈子를 위한 致誠을 한다고 한다.
ㄴ. 産前禁忌
胎中에는 喪家出入을 삼길 뿐만 아니라 喪家에서 가지고 온 飮食은 먹지 아니하며 遠行 을 하지 아니한다. 可及的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出入을 삼가고 飮食物은 문어 等 属과 같은 뼈없는 魚物은 먹지 않고 닭고기도 먹지 아니한다. 개나 닭 같은 家畜을 집에서 잡지 않고 家庭內에서 기둥이나 壁에 못을 함부로 박지 아니한다. 胎中에 있는 姙婦는 勿 論 家內에 姙婦가 있으면 집안사람들도 殺生을 禁하게 한다. 初產일 경우에는 大槪 親家에 가서 하는 사람이 많으나 萬一 이때 親家에도 姙婦가 있으면 一年에 한 집에서 두 번 出產하면 不吉하다 하여 이를 忌한다.
ㄷ. 出 產
難產인 경우에는 집사람들이 祈子處에 가서 順產을 祈願하기도 하고 혹은 食刀로 마당에 十字를 그어 그 中心에 꽂아 놓고 北向하여 順產을 祈求하는 風俗도 있다. 出產하면 胎줄 을 近年에는 가위로 끊으나 竹刀로 많이 끊었고 男子를 出產했을 때는 禁繩에 솔잎과 붉은 고추를 꽂아 大門간 사람이 잘 보이는 곳에 쳐놓고 女子인 경우에는 고추 대신에 검은 숯 을 쓰고 있다. 禁繩은 왼새끼로 꼬되 30cm 간격으로 20cm程度의 짚이 나오게 꼰다.
出產이 있으면 집안에서 殺生을 하지 않고 家人이 外出 中에 不淨한 것을 보았을 때에는 집에 와서 淸水에 숯을 넣어 그 물을 마신 뒤에 집안에 들어 온다. 禁繩이 있을 때에는 喪人의 出入은 禁하고 家人들도 喪家에 問喪을 가지 않고 喪家飲食은 먹지 아니한다. 出產後 產母가 처음 먹은 食事를「첫국밥」이라 하고 이 「첫국밥」은 白飯과 미역국을 먹되 다른 반찬은 먹지 아니한다. 禁繩은 「삼치레」까지 쳐놓으나 女子를 낳았을 때는 이 보다 빨리 걷기도 하고 바라던 아들을 낳았을 때는 삼치레에 禁繩을 걷되 아주 떼어 버리지 않고 오른쪽만 풀어서 왼쪽 大門설주에 서리서리하여 며칠을 더 걸어 놓는 수도 있다. 助產은 親家에서 出產할 경우는 親庭어머니가 하나 親庭어머니가 服中일 때는 外人에게 부탁을 하되 福 있는 婦人율 골라서 부탁한다. 이때 禁忌로 되어 있는 것은 과부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이나 부정을 當한 사람은 忌한다.
ㄹ. 燒 胎
燒胎는 地方에 따라서는 胎를 태우지 않고 물에 흘려버리기도 하나 臨溪地方에서는 거의 燒胎를 하고 있다. 燒胎도 吉方을 골라 方位를 찾아 하는 집이 간혹 있다고 하나 大部分은 마당 구석 후미진 곳에 땅을 파고 왕겨를 깔고 그 속에 胎를 넣고 다시 왕겨를 덮어 태운 다. 왕겨에 燒胎하는 탓으로 짧은 時間內에 燒胎되는 것이 아니고 하루나 이틀 걸려 燒胎 가 된다. 燒胎가 끝나면 탄 자리를 그대로 흙으로 메우기도 하고 탄 재를 모아 물에 띄우기도 한다.
ㅁ. 삼신할머니
產俗信仰으로 삼신할머니가 있다. 삼신할머니는 안방 귀퉁이에 대까지를 걸고 길이 1m 幅 20cm 가량의 자루를 만들어 이 자루의 中央部를 대까지에 걸고 양쪽에 各各 한 되 가량 의 쌀을 넣은 것이다. 삼신할머니는 產俗信仰 보다는 育兒信仰으로 產前에는 여기에 對한 信俗行事는 없고 產後 育兒課程의 信俗이 있다. 出產이 있으면 그 집 老主婦가 미역국과 흰밥을 소반에 받친 삼신상을 차려 삼신할머니 앞에 놓는다. 그러고는 이남박에 물을 담고 이 물에 몇 덩이의 숯을 넣어 이남박을 흔들면서 이미 있었던 모든 不淨을 씻어달라고 祝願 文을 외우면서 祝願을 한다. 이 行爲를 이곳에서는 不淨을 가랜다고 한다. 이렇게 세 번을 한 뒤 主宰者는 이 물을 세 모금 마시는 것으로 不淨을 다 가래고 다음은 삼신할머니 앞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가 잘 자라도록 해달라고 祝願을 한다. 祝願 前에 숟가락을 멧밥에 꽂아 놓고 祝願이 끝나면 숟가락을 제자리에 놓고 再拜하는 것으로 끝난다. 祝願文의 內容은 固定된 辭說이 있는 것이 아니고 口述하되 內容은 大槪 無病하고 탈 없이 잘 자라게 해달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나고 나면 이 밥과 국은 產母가 꼭 먹게 되어 있다. 삼신할머니는 지금은 臨溪市街地內에서는 찾을 수 없고 窮僻한 山村에는 아직도 혹 있다고 한다.
이 삼신할머니祭는 產後에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초삼일 초칠일 삼칠일 等 產俗과 關 係되는 날에는 꼭 하고 이 外에도 아이가 病이 있으면 나이든 뒤에도 行하고 있다. 따라서 삼신할머니는 產故가 있을 때만 設置하는 것이 아니고 年中 設置하여 두며 혹 이사를 가게 되어도 반드시 가지고 가서 다시 설치한다. 家門에 따라서 오래된 것은 여러代를 承繼하고 있고 分家하여 出產을 하면 새로 만든다. 다만 주머니에 들어 있는 쌀만은 一年에 한 번씩 갈아서 넣게 되어 있다.
(2) 돐
돐은 出生 一周年이지마는 돐 前에 百日을 한다. 百日은 生後 百日되는 날 隣近과 親戚 이 모이여 치르는 行事로 特別한 行事는 없고 이 地方에서는 백설기라고 이르는 떡을 해서 나누어 먹는다.
돐은 돐床을 차린다. 돐床에는 백설기 수수떡과 그때 나는 과일을 놓는 外에 붓, 연필, 태실, 돈 等을 놓고 돐을 맞이한 아이에게 집게 한다. 이때 그 아이가 돈을 집으면 富者가 된다하고 붓이나 연필을 집으면 커서 글 잘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고 실태를 집으면 長壽한 다고 한다. 家勢가 넉넉한 집에서 長子로 태어나면 그 돐床은 호화롭고 아이의 命이 길라 고 돐床 앞에 광목이나 옥양목을 필채로 접어놓고 그 위에 앉게 한다.
이곳 風俗에 돐 飮食은 그저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代價로 돈을 보내게 되어 있다.
(3) 入 學
舊敎育의 入學은 오늘의 學校入學과는 달리 洞里에 있는 私設書裳의 入學을 말한다. 舊 時代의 教育機關으로 官學으로는 鄕校가 있고 私學으로는 書院이 있으나 幼年期의 初入學 은 鄕校나 書院에 入學하는 것이 아니고 書堂에 入學한다. 臨溪面에도 數年前에는 私設書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書堂에서는 課程을 달리한 여러 사람의 學生이 한 先生 밑 에서 工夫하고 그 初學入門은 千字文으로 되어 있다. 教科內容은 課程에 따라 다르나 아침부터 시작하여 日沒時까지를 四等分하여 四教時로 한 곳이 많고 課程에 關係없이 方法은 暗誦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침에 書堂에 가면 먼저 先生에게 절을 하고 책을 덮어 놓은 채 前日 배운 것을 暗誦한다. 萬ᅳ 暗誦을 못하면 叱責을 받고 暗誦을 해야 當日의 課程을 배운다. 能力에 따라 暗誦이 빠르면 하루에도 몇 課씩 배우나 大概는 하루 課程을 終日 읽고 저녁 때 先生 앞에서 暗誦하여야 歸家한다.
書堂에서는 글씨 工夫도 한다. 글씨는 종이에 쓰는 것이 아니고 粉板에 쓴다. 粉板은 幅 40cm 길이 100cm 程度의 板子에 기름을 메겨 글씨를 쓴 뒤에 걸레로 지우면 다시 쓸 수 있는 永久 習字板이다. 이 粉板 右側에 先生이 教本을 써 주면 學生은 그 옆에 臨書를 하여 板面이 다 차면은 教本은 남기고 學生의 글씨만을 걸레로 지워 다시 쓴다.
暗誦과 習字 外에 作文도 한다. 作文은 처음부터 行文을 하는 것이 아니고 五言이나 七 言의 詩句를 짓고 作文은 先生이 考課한다. 休暇는 名節 以外에는 日櫂日이 없이 年中 無 休이고 年末과 歲初에 數日間의 休暇가 있다.
書堂에서 의 教科內容은 千字를 비롯한 基礎科目과 上极班이 되면 經書, 史類, 文學類를 배운다. 入學은 있으되 卒業은 없고 先生의 教導없이도 홀로 漢文文典을 讀解할 수 있을 程度가 되면 書堂生活은 끝이다. 책을 한 권 다 배워 暗誦할 수 있게 되면 다음 課程의 책에 들어가는데 이때는 책을 띠었다는 祝賀式으로 책거리라는 것을 한다. 책거리는 책을 띤 學生의 집에서 시루떡을 하여 書堂에 가져와서 學童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어 있다.
書堂에서는 철따라 천렵, 소풍도 가고 夏節에는 林間授業도 한다. 林間授業은 夏節 나무 그늘에서 朗讀을 함으로 글 읽는 소리만 듣고도 書堂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4) 成 人 式
成人式은 四禮義式中의 冠禮에 該當되는 것으로 男子는 冠禮라 하고 女子의 成人式은 筓禮라 하나 全國的으로 冠, 婚, 喪, 祭의 四禮中 完全히 자취를 감춘 것은 成人式인 冠禮이 다.
臨溪地方에는 古老들의 口述에 의하면 約 50年前만 하여도 冠禮를 行하였는데 冠禮가 없 어진지가 近半世紀나 된다고 한다. 다만 士大夫의 冠禮에 該當되는 農夫나 머슴들의 成人 式은 近年까지도 行하여지고 있었다 한다.
이 農夫나 머슴들의 成人式은 農耕社會에 있어서는 꼭 겪어야 할 義式의 하나로, 共同作 業의 품앗이와 關係를 가지고 있다. 農耕은 本來 地綠的으로 協業의 形態를 取하여 왔음으로, 共同作業을 하여 왔고 이러한 作業形態는 勞力의 授受關係가 이루어진다. 이곳에서는 成人式을 擧行하지 아니한 未成人은 原則的으로 成人農夫와 一對一의 勞力의 授受를 할 수 없음으로 成人의 隊列에 끼이지 못하게 되어 있고 不得己하여 끼일 경우에는 그 能力과 年 齡에 따라 成人의 2分之1 或은 3分之2의 代價 밖에 받지 못한다. 成人式을 마치고 나면 成 人으로 認定되어 完全한 成人 몫은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旣成人 對接을 받아 成人과 一對ᅳ의 勞力의 授受를 하게 된다. 士大夫의 冠禮가 成人式이기는 하지마는 이것은 儀禮面에 置重된 것이라고 한다면 農夫나 머슴들의 成人式은 經濟的 効用을 지니고 있다.
農夫나 머슴들의 成人式은 머슴의 경우에는 主人이,自家農인 경우에는 親權者가 成人式 을 할 사람의 나이 20歲가 되면 擇日을 하여 저녁에 품앗이를 서로 하는 地緣內의 모든 農 夫를 집으로 招請하여 술과 飮食을 마련하고 當事者를 會衆앞에 내 세워「일은 제대로 成 人 한몫을 하지 못하지마는 나이 차서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成人禮를 올리니 앞으로 품앗이에 같이 끼워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의 말을 하고 當事者에게 會衆各人에게 술을 한 잔씩 올리는 것으로 禮를 끝내고 나서는 飮食을 먹으면서 하루 저녁을 지낸다. 冠禮는 없어진지 오래 되었으나 臨溪地方은 農業이 生業으로 되어 있음으로, 農夫들의 이 成人禮만 은 最近까지 行하여 지고 있었다.
(5) 結 婚
舊式婚禮는 거의 없어졌고 臨溪에서도 公共機關을 利用한 新式婚禮가 盛行하고 있으나 禮式自體는 新式으로 하면서도 禮式에 附隨한 一部節次는 아직도 舊習대로 行하고 있는 것 이 많다고 한다. 이 地方에서 지금도 行하여지고 있는 舊習節次를 살펴보면
ㄱ) 納 来
自由婚이 아니고 仲媒婚일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自由婚으로 本人까지 이미 結婚의 約束을 하였을 경우에도 兩家父母에게 알려 形式上으로나마 定婚과 許婚은 아직도 納来形 式을 밟고 있는 집이 많다고 한다.
ㄴ) 擇 日
近來 休日을 利用하여 擧式을 하기도 하나 이 地方에서는 아직도 거의가 擇日하여 吉日大通日을 擇하여 擧式한다. 擇日은 日官에게 부탁하여 擇日하되 擧式의 時間까지를 規制하고 있으나 禮式場의 事情으로 時間만은 제대로 지켜지지 아니하는 수가 많다고 한다.
ㄷ) 四 柱
四柱는 지금도 꼭 보내고 있다. 男子의 生年月日時 例「甲子二月十一日午時生」이라고 종 이에 붓으로 쓴다. 이때 四柱紙는 장지를 쓰고 四柱紙를 五等分하여 中央部에 쓴다. 이 地 方에서는 或 이 四柱에 男子의 貫鄕과 姓名을 쓰기도 하고 女子 집에서 四柱를 받으면 그 左便에 女子의 生年月日時를 써서 놓기도 하는데 이것을 合單이라고 한다. 그러나 合單은 하지 않고 男子의 四柱를 받는 것으로 그대로 끝이는 데가 많다. 四柱는 紅綠色의 겹보에 싸서 대나 싸리를 半을 뽀개 이 보에 끼우고 靑실 紅실로 감아서 보내고 받는 집에서는 소반을 놓고 소반 위에 받는다.
ㄹ) 禮 狀
男子집에서 女子집에 婚前에 보내는 要式으로 지금도 舊式대로 漢字로 쓴 禮狀을 보내나 지금은 禮狀만을 따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거의가 凾을 보낼 때 함께 보낸다.
新式으로 擧式을 하면서도 以上의 節次는 舊式대로 지키고 있다 한다. 式後의 節次로 오늘도 行하고 있는 것은
ㅁ) 幣 帛
新郞과 新婦가 媤父母에게 謁見하는 禮로 新式 擧式에서도 舊禮服차림으로 新郞 新婦가 함께 新郞의 父母에게 幣帛을 올리나 이곳에서는 式後 新婦가 新郞 집에 가서 新婦만이 禮 服차림으로 媤父母에게 禮를 한다, 幣帛 前에 謁廟를 하는 家門도 있고 幣帛 後에 하는 家 門도 있다고 이 고을 古老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一定치는 아니한 듯하나 祖上의 神位를 拜謁하는 節次가 있다. 이것도 이곳 古老들에 의하면 新婦와 新郞이 함께 謁廟를 한다고 한다. 謁廟에는
維歲次干支月朔日干支 某 敢昭告于
四代祖父母神位列記
某之子 某之婦 某封 某氏 敢見
이라는 祝文을 읽는데 요즈음은 謁廟再拜만 하고 祝文은 읽지 아니하는 家門도 있다고 한 다.
(6) 喪 禮
冠婚喪祭의 四禮中 冠禮는 이미 없어졌고 남은 儀禮中 舊俗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 喪禮라고 이곳 古老들은 말하고 있다. 이 地方에는 靈柩車가 없어 或 트럭을 靈柩車로 代 用하는 수가 있기는 하나 아직도 거의가 喪輿를 舊式대로 쓰고 있다. 喪輿는 部落單位로 契를 組織하여 各 家口 마다 出資하여 만든 것으로 契員은 喪故가 있으면 無償으로 喪輿를 쓰고 그 管理는 有司를 두어 有司가 管理하게 되어 있다. 한 地綠 속에 살고 있으면서 이 契에 들지 아니한 사람이 喪故를 當하여 喪輿를 쓰려면 相應한 세를 내고 쓴다. 喪군은 井數에 의하여 그 數가 다르기는 하나 臨溪에서는 七井 即 14名의 상여군에 魂粮 2名 선소리군 1名이 通常이라 한다. 墓所가 遠距離로 교대하여 가면서 運柩를 해야 할 때에는 상여군의 數는 倍가 된다. 상여군은 장사 전날 저녁에 喪家에서 問喪하고 그날 저녁에 대접을 받고 喪家의 家勢에 따라 신발, 수건, 담배, 장갑 등을 받는다.
앞에서도 言及한 바와 같이 四禮中 가장 變하지 아니한 것이 喪祭禮인 탓으로 初終에서 시작하여 卒哭까지의 節次는 거의 舊儀式에서 變한 것이 없음으로 四禮便覽 그대로 施行하 고 있는 탓으로 여기서는 그 節次는 略하기로 한다. 四禮便覽 喪禮篇을 이 고을 敬老堂의 古老들과 議論하였던바 여기서 벗어남이 없음을 알았다. 다만 近年 달라진 것이 있다면 舊 禮는 葬日을 擇日하여 지냈는데 요즈음은 거의가 3日葬으로 지내고 늦어야 5日葬을 지내는 것이 달라지고 있다.
요즈음 와서 變한 것의 또 한 가지는 喪服이다. 喪主라 할지라도 屈巾 祭服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그 理由로 이제는 屈巾 祭服을 제 格式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 첫째 理由이고 家庭儀禮의 變更으로 그럴 必要가 없게 되었고 여기에 家庭經濟的 理由까지 곁들여 舊儀式에 의한 典型的 喪主服飾은 臨溪에서는 없어졌다고 한다. 다만 有 服親이 巾을 쓴다거나 중단만은 아직도 입는 家門이 있다.
喪幕은 100日 脫喪의 儀禮에 의하여 100日만 모시고 三年喪을 지내는 집은 없고 喪幕에 도 魂魄이나 位牌 대신에 寫眞을 奉安한다고 한다.
(7) 祭 禮
祭禮도 喪禮와 같이 服飾 등 時代的 狀況에 따라 不可避한 것 外의 節次는 四禮에 依據 하고 있어 전혀 變하지 아니하였음으로 여기 거론할 必要가 없고 다만 變한 部分에 對하여서만 言及키로 한다.
臨溪의 宗家로서 神主를 奉安하고 있는 집이 드물다. 그 理由를 물었더니 6.25事變中에 避亂하느라고 神主를 奉安하고 있던 宗家에서도 다 神主를 埋安하였고 그 後 다시 再造치 않고 紙榜으로 忌祭를 지내고 있다
宗家로서 四代 奉祭를 아직도 하는 집이 혹 있으나 合祭를 지내는 宗家가 많고 合祭는 家門에 따라 各各 다르다. 年 二回 春秋合祭를 지내는 家門도 있고 父母의 祭紀만은 忌日에 지내고 祖父 以上 高祖父까지를 合祭하는 家門도 있어 그 樣態가 一定치 아니하다. 祭祀의 時間도 舊儀禮를 지켜 子正에 享祀하는 家門이 아직도 더러 있고 生活의 便宜를 조차 忌日 초저녁에 지내는 집도 있다. 考妣位 單設祭를 지내는 家門은 없고 이곳은 全部가 合設祭를 지내고 있다.
(8) 茶 禮
祖上이 있는 집에서는 節日이나 祖上 生辰에 茶禮를 行한다. 從來의 茶禮는 除夕, 歲首 正月보름, 寒食, 端午, 秋夕, 冬至, 薦新 生辰에 行하였으나 現在 이 地方에서 從來의 茶禮를 그대로 行하는 집안은 없다고 한다. 除夕茶禮는 거의 없어졌고 生辰茶禮도 行하는 家門이 없다고 古老들은 말한다. 寒食과 端午 冬至茶禮는 아직 行하는 집이 있기는 하나 그 數가 極히 적고 薦新은 秋夕茶禮로 겸하여 지고 있다. 從來의 節日茶禮中 現在까지 지켜지고 있는 것은 설茶禮와 秋夕茶禮 뿐이다. 설茶禮는 만두나 떡국을 쓰고 秋夕茶禮는 新穀으로 송편을 만들어서 쓰고 있다.
(9) 無緣故者祭
臨溪面에는 無緣故者祭라고 하는 다른 고을에서는 볼 수 없는 祭享이 있다. 現在 面內에 서 無緣故者祭의 祭享을 받고 있는 神位는 13位이고 이中 1位는 女子로 되어 있다.
이 祭의 始發은 한 마을에 居住하고 있던 사람이 多少의 資產은 있으나 家族이나 後孫이 없어 죽기 前에 洞里의 古老들에 게 나는 後孫은 없으나 資產은 있으니 내가 죽거던 내 資 產은 洞里의 共同資產으로 하고 그 대신 내 葬事를 洞里에서 맡아서 치려 줄 것을 당부한 데서 비롯하였다. 그 遺言에 따라 洞里에서 葬事를 지내고 忌日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으니 洞里에서 墓祭를 지내주자고 議論하여 每年 忌日에는 故人의 遺產에서 祭物을 만들어 忌祭를 지내고 있다. 忌祭 뿐만 아니라 一年에 한번 墓의 伐草도 꼭 하여 왔다.
처음에는 이렇게 洞里單位로 하던 것이 面內에 같은 事情의 無緣故者가 十三位나 있게 되자 이것을 各自의 忌日에 洞里單位로 지낼 것이 아니라 面이 主管하여 合同으로 지내자는 發議가 있어 近年에는 合同으로 面에서 10月 15日에 合同祭를 지내고 있고 그 13位의 位牌 紙榜을 面에서 保管하고 있다. 故人이 寄贈하였던 遺產은 洞里의 共同資產에서 面으로 移 管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郡이 地方自治團體로 되어 現在는 郡資產으로 되어 있고 費用은 每年 郡에서 補助한다.
無緣故者祭祀를 現在는 面會議室에서 지내고 있는데 獻官은 面內의 年長有志와 面單位機 關長이 되며 參祭者는 面內居住者면은 制限이 없고 이날 祭後에 臨溪面 敬老잔치를 例年하 게 되어 있음으로 老人들이 많이 參祀한다고 한다. 祭禮儀式은 面에서 만든 紙榜을 祭床에 奉安하고 神位마다에 술잔을 올리고 祭儀를 奉行한다. 祝文은 1980年부터 家庭儀禮準則에 따라 奉讀하고 있다.
洞에서 管掌하고 있을 때에는 伐草를 洞里사람들이 했으나 面으로 移管된 뒤부터는 사람 을 사서 伐草를 한다. 面에서 無緣故者의 墓所의 點檢責任은 面의 傭人이 지게 됨으로 傭 人이 갈리게 되면 前任 傭人은 退任할 때 後任 傭人을 데리고 13位의 墓所를 案內하여 그 所在地를 밝혀 둔다. 墓所가 여러 곳에 分散되어 있는 탓으로, 이 墓所 案內에만도 數日이 걸린다고 한다. 伐草때에는 簡單한 酒果脯와 술을 가지고 가서 伐草前에 伐草者가 省墓禮 를 하고 伐草를 한다.
現在 面에서 保管中인 無緣故者의 合同 神位는
學生 ○○○ 府君 神位
라고 쓰여 있고 한지에 이 神立를 列記하고 있으며 無緣故者 名簿臺帳이 따로 있다.
3) 通過儀禮
(1) 正 月
ㄱ. 설
설에는 親戚끼리 모여 祖上의 茶禮를 지낸다. 茶禮의 單位는 同高祖를 單位로 한 堂內가 모여 堂內에서 祖上이 있는 집 마다 다니며 合同으로 茶禮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宗家에 모여 宗家茶禮를 지내고는 거기서 堂內 歲拜를 한다. 설 음식은 節食으로 떡국을 끓이고, 떡 · 술 · 감주 등 설 음식을 準備한다. 年下者가 年長者에게 歲拜를 하면 年長者는 年下者의 새해의 所願이 이룩되도록 德談을 한다. 德談은 未婚者에게는 장가를 들라든가 旣婚者에게는 아들을 낳으라는 等의 말을 한다.
正初에는 설부터 十日까지 日辰에 따라 俗習이 있다.
子日은 쥐의 날이라 하여 쥐주둥이를 볶는다는 뜻에서 콩을 볶고 寅日은 音相似로 人日이라 하여 조심하며 이 날은 또 虎頭를 깬다고 널을 뛴다. 널과 윷, 연날리기는 年初의 代表的 놀이지마는 特히 年初 寅日에는 널을 뛴다.
正初에 歲拜를 하지 아니한 어른을 만나면 꼭 절을 한다. 歲拜를 미처 가지 못하였다고 謝罪를 하고 절을 한다. 樂川里에서 調査한 바에 의하면 近年에는 家門單位의 歲拜는 없어지고 茶禮가 끝나고 나면 家門을 不問하고 全洞民이 里長집에 男女老少 없이 다 모여 歲拜를 한다고 한다. 이때 洞里의 年長者에게는 面長이나 支署長이 歲草로 담배를 보낸다고 한다.
ㄴ. 대 보 름
이 地方에서 한 民俗議査에 의하면 年中 禁忌나 祈福民俗이 가장 많은 節日이 正月 대보름이다. 年中 12回 있는 15日을 다「보름」이라 부르나 正月 15日 만은 「대보름」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은 대보름 茶禮를 지내는 집이 많이 없어졌으나 전에는 보름 茶禮를 행했다. 보름의 節食은 藥食으로 지금도 古家에서는 보름에 해먹고 藥食으로 茶禮를 지낸다.
燈明 - 보름은 맑게 쇠면 一年이 無災하다 하여 14日 밤에는 방마다 불을 밝혀 놓는다.
눈섭세기 - 14日 밤에 잠을 자면 눈섭이 희여진다고 하여 잠을 자지 아니 한다고 한다.
달불름 - 1年間의 水旱을 점치는 俗習으로 수수대공에 콩을 12개 끼워 14日 저녁에 물에 넣었다가 15日에 건져서 그 乾濕의 度로 그 달의 水旱을 점친다. 例를 들면 1月이 많이 불었으면 1月은 비가 많이 온다하고 5月이 불지 아니하였으면 5月은 가문다고 한다. 이 달불 름은 숯으로도 한다고 한다. 14日 저녁에 藥食을 만들려고 지핀 장작이 타고 나면 그 장작모닥불을 부뚜막에 12個를 나란히 놓고 그 불이 꺼져가는 상태를 通하여 水旱을 점친다. 즉 1月달 불이 까맣게 되면 그 달은 비가 많이 오고 희게 되면 가문다는 것이다.
귀밝이 술 - 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술을 마시면 귀가 잠아진다고 한다.
부스럼 씹기 - 보름날 일어나자마자 生栗이나 胡桃, 栢子 等을「부스럼 씹는다」라고 하고는 소리가 나도록 깨물면 그 해에는 종기를 앓지 아니한다고 한다. 이때 남하고 이야기를 한 뒤에 씹으면 効果가 없다하여 開口初聲으로「부스럼 씹는다」라고 하여야 한다.
더위팔기 - 대보름날 아침에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이름을 불러 對答하면 「내 더위 사라」하며 이것을 더위 판다고 한다. 더위는 午前中에만 팔고 午後에는 팔지 아니하는 것이 俗習으로 되어 있다.
魚付食 - 厄막이의 一種으로 白紙에 姓名과 生年月日을 써서 白飯을 세 접시를 담아 江물에 띄우면 고기가 이것을 먹고 한해의 厄을 막아 준다는 俗信이다. 白紙에 本人이 입던 옷의 고름이나 동정을 떼어 넣기도 한다. 正月 대보름에는 魚付食 말고도 年中 가장 많은 厄막이를 한다. 연에 生年月日을 써서 멀리 떠보내기도 하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달을 向하여 세워놓고 세 접시의 밥을 그 앞에 떠놓고 절을 하는 액막이도 正月 대보름에 한다.
盜泉 - 正月 대보름 밤에 水源이 不足한 우물을 가지고 있는 집에서 물맛이 좋고 水源이 넉넉한 우물에 가서 主人 몰래 물을 훔쳐다가 自己집 우물에 넣으면 물맛도 좋고 水源도 넉넉해진다는 俗信이 있어 이를 行한다. 이때 훔친 물은 오는 途中에 繼續하여 조금씩 흘리면서 와야 물줄이 따라 온다고 한다.
望月 - 陰曆 正月望에 望月을 한다. 望은 15日 일수도 있고 혹 16日일 수도 있다. 횃불을 들고 望月하기 좋은 山에 올라 「望月이여」를 외치면서 달이 뜨는 것을 본다. 群衆 속에서 가장 먼저 달을 發見하면 吉兆로 그 해에는 반드시 吉事가 있다고 한다. 달의 뜨는 위치 달 색깔에 따라 그 해의 農事의 凶豊을 점친다. 달 색깔이 붉으면 그 해는 가물고 달 색깔이 희면 그 해는 장마가 진다고 하며 例年 보다 北쪽에서 뜨면 凶年이 들고 南쪽에서 뜨면 豊年이 든다고 한다.
귀신 달굽 - 正月 十六을 귀신날이라고 하여 이 날은 귀신이 발동함으로 귀신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俗習을 行한다. 日沒이 되면 大門 앞에 머리카락을 위시하여 냄새가 甚할 毒草를 태워 귀신을 막고 문간에 채를 걸어 놓는다. 문간에 채를 걸어 놓는 것은 귀신이 오다가 그 數많은 채구멍을 헤아리다 보면 어느덧 닭이 울게 되고 닭이 울면 귀신은 돌아간다는데서 緣由하여 채를 걸어 놓는다. 이날 저녁은 家族들의 신을 엎어 놓거나 감추어 놓는다. 귀신이 와서 신발을 신어보고 발에 맞아 신고 가면 그 신의 主人은 그 해에 죽는다는 俗信이 있다.
立春 - 立春은 빠르면 12月에 들고 늦으면 正月에 든다. 立春은 새봄 새해를 맞는 序幕으로 迎福의 行事가 있다. 立春에는 立春을 써서 기둥에 붙였으나 지금은 立春을 쓰는 집이 없다고 한다. 立春에 쓰이는 글귀는
「建陽多慶」「開門萬福來」「掃地黃金出」「春光先到吉人家」
等의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인다.
(2) 二 月
ㄱ. 風神 - 風神은 漢字로 或 豊神이라고도 쓰나 農耕社會에서 農耕이 바람과 關係가 깊은데서 緣由했다. 二月 一日에 風神이 내렸다가 二月 十五日에 風神이 올라 간다고 한다. 二月 一日 五穀밥을 지어 장독대에 놓고 정화수를 한 동이 그 옆에 떠다 놓고 主婦가 風神 祭를 지낸다. 風神이 一日에 내려왔다가 十五日에 올라감으로 이 期間 동안 정화수는 每日떠다 놓으며 이 期間은 더욱 삼간다.
ㄴ. 좀생날 - 二月 六日은 좀생날이라고 한다. 좀생은 星群의 이름으로 六日 저녁에 좀생과 달과의 거리로 그 해의 凶豊을 占친다. 좀생이 달에서 가까이 있으면 그 해는 凶年이 든다고 하고 좀생이 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해는 豊年이 든다고 한다.
ㄷ. 노내기驅除 - 二月 一日 에 惡臭를 풍기는 害虫인 노내기를 驅除하는 行事를 한다. 「香娘閣氏 速去千里」라는 부적을 써서 집 周圍에 뿌리기도 하고 아침에 집 안팎을 깨끗이 淸掃하고 마른 松葉에 재를 섞어서 처마 밑을 돌아가며 뿌리기도 한다. 草家가 많을 때는 이 行事를 집집마다 했으나 近年 草家가 없어지고 난 뒤에는 이 行事를 거의 하지 아니한 다고 傳한다.
ㄹ. 寒食 - 冬至로부터 百五日 대개는 淸明 다음 날이 寒食이다. 옛날에는 寒食茶禮를 지냈으나 臨溪地方에서 寒食茶禮는 지금은 거의 지내지 않고 있다. 이날에는 先祖의 墓에 沙 草를 만다.
(3) 三 月
ㄱ. 삼진날 三月 三日을 삼진이라 하여 이날 제비가 江南에서 돌아온다고 한다.
ㄴ. 화전놀이 一種의 野遊會로 女子는 화전놀이를 하고 男子들은 천렵을 한다. 男子들 의 천렵에서는 이 고장 河川에 魚種이 많아 고기를 잡는데 그물로 고기를 잡기도 하지마는 가래나무 뿌리와 껍질로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가래나무 뿌리와 껍질을 벗겨서 짓이겨 물 에 풀면 고기가 죽는다고 한다.
(4) 四 月
釋誕日로, 各 寺刹에서는 佛教儀式을 行하고 있으나 家庭에서 釋誕日 行事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5) 五 月
ㄱ. 端午 - 端午는 節日로 先祖의 茶禮를 지내왔으나 지금은 端午茶禮도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端午의 節食으로는 「수리취떡」을 해서 먹었고 名節의 하나였음으로, 端午民俗이 있다. 菖蒲물로 머리를 감고, 창포 뿌리를 머리에 달았다. 女子들은 이날 추천을 뛰었는데 창포로 머리감는 風俗은 없어졌지마는 추천 뛰는 風俗은 아직도 남아 있다.
남자들은 이날 씨름을 했으나 지금은 거의 하지 않고 이 地方에서는 端午 때에는 江陵으 로 端午 구경을 많이 갔다고 한다.
쑥뜯기 - 端午 前後하여 약쑥을 뽑는다. 이 약쑥은 말려서 여름 배앓이 때에도 쓰고 農事 철 들판에서 불씨로도 쓴다고 한다.
(6) 六 月
ㄱ. 복대림 - 伏날에 伏대림이라 하여 개를 잡아먹는다.
(7) 七 月
ㄱ. 七夕 - 七月 七夕을 七夕이라 하나 特別한 民俗行事가 있는 것은 아니고 견우와 직녀 가 이날 만나기 위하여 오작교률 놓는데 地上에서 까치와 까마귀가 天上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ㄴ. 질먹기 - 호미씨씨라고도 하는 것으로 夏節의 김을 다 마치고 自然部落 單位로 농군 들이 모여 하루를 쉬면서 즐긴다. 이때 飮食物은 各 農家에서 형편에 따라 해 온 것을 먹는다.
(8) 八 月
ㄱ. 伐草 - 오늘날도 8月 1日의 伐草는 어김없이 行하여지고 있다. 先祖의 墓所에 가서 여름내 자란 풀을 말끔하게 깎는데 이 때 풀을 깎기 위하여 낫만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省墓를 하기 위하여 酒果脯를 가지고 가기도 한다.
ᄂ. 秋夕 - 지금도 설과 함께 가장 큰 名節로 지켜지고 있다. 아침에 茶禮를 지내고 省墓 도 한다. 節食으로 송편을 해서 먹는데 세월이 빨라 秋夕에 햇곡이 나면 秋夕 飮食은 햇곡으로 한다.
(9) 九 月
ᄀ. 時祀 - 五代祖 以上의 祖上의 墓所에서 지내는 一種의 墓祭로 이 고장에서는 主로 九 月에 많이 한다.
(10) 十 月
ㄱ. 安宅 - 이 고장에서는 十月에 農事을 다 마치고 安宅祈禱를 많이 하고 있다.「성주바지」,「부룻단지」등의 穀物도 이때에 갈아넣고 安宅祈禱를 지낸다. 安宅날짜는 日官에게 물어 吉日을 잡고 家內外를 청결하게 하여 놓고 不淨한 사람이 出入하지 못하게 禁繩를 치 고 門앞에 黃土를 깔아 놓는다. 祭主는 家長이 되나 祈禱方式은 무당을 데려다 하는 方式 도 있고 儒家式으로 讀祝을 하면서 하는 方式도 있고 讀祝도 없이 다만 祭需만을 차려놓고 家長이 절을 하며 祝願하는 方式도 있어 一定치 않다.
(11) 十 一 月
ㄱ. 冬至 - 冬至의 節食은 팥죽이다. 前에는 팥죽으로 冬至茶禮를 지냈으나 요즈음은 冬至茶禮를 지내지 아니하는 집이 많다고 한다.
(12) 十 二 月
ㄱ. 除夕 - 除夕茶禮를 지내고 묵은세배를 除夕에 해왔으나 지금은 除夕茶禮나 묵은세배 는 다 없어 졌다고 한다. 除夕에는 房마다 불을 밝히고 날이 샐 때까지 불을 끄지 아니하면 오는 해가 福된다는 俗信이 있어 불을 밝혀 밤을 샌다.
4) 土神信仰
土神信仰으로 이 地方에 現在하고 있는 것은, 城隍堂, 산치성, 安宅이고 이 地方에 巫覡 은 찾을 수 없다. 이들 中 傳來의 儀式을 지키고 있는 것은 安宅과 산치성이고 城隍祭는 多少變質하고 있는 點이 있다.
(1) 安 宅 祭
祈禱라고도 부르는 家內의 土俗信仰으로 이미 그 槪況은 通過儀禮 十月條에서 言及이 된 바 있지마는 이 行事는 아직도 많은 집에서 行하여 지고 있다. 具體的으로 全住民의 몇%가 安宅祭를 지내고 있느냐는 統計는 나타나 있지 아니하지마는 商街는 商街대로 農村은 農村대로 行하여지고 있다. 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農村에서는 秋收가 끝난 陰曆 十月에 하는 집이 많고 商街에서는 陰曆 正月에 行하는 집이 많다고 한다. 그 理由는 農村은 秋收가 끝나면 農閑期가 됨으로 이 時期를 擇하여 農作에 對한 感謝를 하기 위함이요 商街에서 正月에 지내는 것은 새해의 家運을 祈願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一部 農村에서도 正月에 지내는 집이 있다고 한다. 安宅祭는 黃土를 깔고 禁繩을 처서 不淨을 막는 風習은 그 대로 있다.
安宅祭는 土地之神과 城造之神 竈王之神의 三神을 祭祀하는 것으로 日官에 의하여 擇日 이 되면 家族全員이 謹愼한다. 이 謹愼期間은 길면 十餘日이 되고 짧아도 3~5日까지는 한다. 雜人의 出入을 막기 위하여 大門 앞에 黃土를 놓는데 大門 양쪽에 直徑 30cm程度의 黃土 무지를 2~3m 間隙으로 十餘곳 놓아둔다. 禁繩은 왼새끼를 꼬아 20cm 程度의 白紙를 사이에 4~5個 끼워서 大門에 단다. 大門에 禁繩과 黃土를 깔아 놓은 집은 不淨을 가리는 집이라는 表示이기 때문에 外人은 出入을 삼간다.
上記 三神에게 지내는 安宅祭의 格式은 祭需를 채려 놓고 무당을 불러 巫覡儀式으로 하 기도 하나 이 地方에는 巫堂이 없어 主로 家主가 지낸다. 格式을 제대로 차리는 집에서는 三神의 祭需가 다 다르다. 成造神에게는 백설기와 酒果脯를 쓰고 土地之神에게는 飯羹과 酒果脯, 竈王之神에게는 팥시루떡을 쓴다.
祝文은 巫堂이 할 경우에는 巫詞說을 외우고 儒家式일 때에는 漢文祝文을 읽되 主神에 따라 祝文은 다 다르다.
(2) 城 隍 祭
臨溪面에는 自然部落 單位로 城隍堂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筆者가 直接 調査한 것으로는 臨溪一里, 三里, 蓬山里, 樂川里 等인데 여기에는 아직도 城隍堂이 옛 모습 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城隍祭도 每年 舉行하고 있다. 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筆者가 直接 調査한 上 記 城隍堂 外에도 거의 自然部落마다 城隍堂이 있으며 이곳 城隍祭로는 삽당령 성황당祭가 가장 크고 有名하다. 이 城隍堂은 凕州郡에서 管割하고 있다고 한다.
城隍堂에는 城隍之神位를 奉安하고 있고 堂祭는 部落共同으로 지내며 一種의 契組織으로 되어 있다. 城隍堂祭는 祭機能이 主이기는 하지마는 血緣祭가 아니고 地緣祭인 탓으로 門 會나 宗會가 하지 못하는 血緣的 關係를 떠난 地緣性이 强하여 地域會議도 그 機能의 하나이다. 城隍堂祭에는 家口主가 다 參祀하게 되어 있음으로, 이날은 自然히 洞會가 열리게 되어 洞의 共同問題가 討議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中心이 되어 洞里의 婚·喪器具도 共同으로 만들고, 그 管理도 여기서 하는 곳이 있다.
臨溪面에서 現在 行하여 지고 있는 城隍祭의 類를 몇 개 살펴보면
臨溪里의 경우는 祭需費用은 各 家口 마다 白米 五合을 據出하여 이것으로 백설기를 만들고 술은 지금은 市場에서 사다가 쓰지만은 옛날에는 有司집에서 이 白米로 술을 빚었다. 여기서는 陰曆 正月 初一日 子正에 지내는데, 獻官은 前에는 그 前年 祭祀 때에 미리 定하였지만 近年에는 當日 參集한 사람 中에서 定한다고 한다. 有司나 獻官은 前에는 禁忌가 嚴하였으나 近年에는 當日에 내므로 禁忌의 必要가 없게 되었고 다만 當日에 獻官 指目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最近 不淨한 일이 있은 사람은 辭趣한다고 한다. 이 경우는 傳統的 城隍祭가 크게 變質하고 있는 한 例인데 다만 祝文만은 옛날대로 읽는다고 한다.
樂川里의 경우는 城隍祭의 擇日은 里長이 하되 陰曆 正月中에 하게 되어 있고 擇日이 되 면 獻官을 定하여 有司와 獻官은 집에 禁索을 치고 堂집을 淸掃하고 堂집에도 禁索을 치고 黃土를 깐다. 祭紀에 所要되는 費用은 洞中 家家에서 據出하여 쓰고 獻官은 生氣를 맞추어 탈이 없는 사람을 고른다. 奉祀時間은 새벽時間을 擇하고 祭後에는 里會의 性質을 띈 會議를 開催한다. 蓬山里의 城隍祭도 이와 類似하고 樂川, 蓬山 등 이 地方에 殘存하여 있(?) 城隍堂은 堂집과 神木인 古樹가 堂집 隣接한 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 古樹는 神木이 (?) 하여 어떤 경우에도 가지를 친다거나 뿌리를 건들지 아니하며 사람들은 이 나무에 올라가 지 아니한다.
(3) 산 치 성
家口別 信俗인 安宅, 部落共同信俗인 城隍祭 外에 이 地方에는 산치성이라고 부르는 個人信俗이 있다. 安宅이 家口別 信俗이라고는 하나 每年 定例的으로 한 번씩하게 되어 있는 탓으로 집안에 病者가 있거나 家內에 災厄이 있을 때 다시 安宅祭를 지낼 수는 없음으로 이럴 때에 산치성을 지낸다고 한다.
山치성은 災厄 뿐만 아니라 希求가 있을 때 이를테면 아들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隨時 지내고 있다. 지내는 곳은 一定한 場所가 있는 것이 아니고 主로 이 地方에서는 名山이라 고 이름난 山을 찾아가서 巨木이나 巨岩 앞에서 지낸다. 祭需도 各各이여서 一定치는 아니 하나 飯囊과 酒果脯를 쓰기도 하고 飯羹만 쓰기도 한다. 擇日을 日官에게 하는 것이 아니 라 손이 없는 方位와 날을 골라잡으며 大槪의 경우는 혼자 가서 올린다고 한다. 儀式은 따 로 있는 것이 아니고 祭需를 陳設하고는 그 앞에 절을 하면서 祝願하고 끝나면 燒紙를 하 는 것으로 마친다. 산치성을 祈子와 家患에 많이 하고 있다.
산치성 날짜가 決定되면 本人은 勿論 全家族이 다 謹愼하고 不淨을 가리기 위하여 禁繩 을 하기도 했으나 近年에는 禁繩하는 집은 別로 없고 남몰래 가만히 한다고 한다.
5) 農 俗
江原道 嶺西의 山間地가 가지고 있는 農耕의 共通點이 田이 많고 畓이 적은 것인데 이 地方도 이에 例外일 수 없으나 다만 蓬山里만은 畓이 많은 것이 特異한 點이라 하겠다. 農產物로는 옥수수, 콩, 감자, 벼가 主宗을 이루고 있고 臨溪面은 高冷地인 탓으로 近年 高冷地菜蔬로 배추, 무, 당근 등의 재배가 많아지고 있다.
(1) 農 具 器
ㄱ. 가는 연장
①괭이 ②가래 ③극쟁이 ④쟁기 ⑤홀치
ㄴ. 삶는 연장
①번지 ②고무래 ③써래 ④삽재기 ⑤나래
ㄷ. 파종 연장
①종다리끼 ②씨앗망태 ③다리끼
ㄹ. 거름주는 연장
①귀때동이 ②장군 ③삼태기
ㅁ. 매는 연장
①호미
ㅂ. 거두는 연장
①낫 (목낫)
ㅅ. 터는 연장
①도리깨 ②탯돌 ③탯상
ㅇ. 말리는 연장
①멍석 ②맷방석
(2) 품 앗 이
품앗이 風俗은 아직도 남아 있다. 같은 農耕圈內에 있는 사람끼리 成年 一對一로 勞動力 을 交換하는 것으로 一群을 이루어 順次的으로 各 집을 옮겨 다니면서 일하는 것을 품앗이 라고 한다. 自己집 農事를 自己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동리사람들과 함께 하고는 다음날 은 그 다음 順次의 집 일을 한다. 原則的으로 成年 一對一로 하나 不得己한 事情으로 未成 年이 戶主로 되어 있을 때에는 그 나이와 일의 能熟度에 따라 2分之1 또는 10分之7로 評價 하게 된다. 소도 成牛는 一對一로 환산하고 사람과 소의 품은 洞里에 따라 다르나 소를 사람의 2배 또는 3배로 쳐준다.
(3) 두 레
모내기 등 일 손이 바쁠 때에 아직도 두레의 遺風이라고 보이는 것이 남아 있기는 하나 傳統的인 두레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두레의 우두머리를 영좌라하고 同一地域內에서 猫 業으로 모심기나 김매기를 할 때에 두레를 짜서 日程을 영좌가 定하고 이 日程에 따라 일 을 한다. 지금도 이와 비슷한 形態의 協業은 있으나 영좌는 없고 隣近 住民의 便宜에 의하여 形便대로 協業을 하고 있을 뿐이다. 두레의 영좌는 農耕協業의 指導者일 뿐만 아니라 部落內의 綱常 倫理問題까지룰 管掌하고 있었다고 한다.
(4) 운 력
農村에서 行하여지고 있는 農耕俗中의 良俗의 하나로 農土는 있으나 老弱者나 婦女者 밖 에 없어 농사철이 되어도 勞動力이 없는 탓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이웃이 있으면 代價를 받지 아니하고 洞里사람들이 모이여 全日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하루 일을 마친 午後時 間에 勞力을 提供하여 주는 것을 운력이라고 한다. 一定한 規範이 있는 것은 아니라 지금 도 딱한 형편의 이웃이 있으면 이 운력은 하고 있고 이 운력이 끝나면 主人집에서는 感謝 의 表示로 酒食을 대접한다.
(5) 영 갈
節季中 小滿이 四月에 들어 있고 小滿前後하여 모심기를 하는데 이 地方에서는 모심기 前에 논에 갈을 꺾어 넣는다. 이것을 영갈 또는 갈영 이라고 한다. 지금은 時間 나는 대로 갈을 꺾어 넣지마는 영갈을 할 때에는 아무리 갈이 잘되었고 時間이 있다 할지라도 自意로 갈을 꺾지 못하게 되어 있다. 洞里의 長인 영좌가 選出되고 영좌가 갈을 꺾어도 좋다는 令을 내려야 비로소 入山을 하게 된다.
令이 내리기 前에 自意로 꺾으면 앞서 꺾는 사람은 거리도 가깝고 꺾기 쉬운 곳부터 꺾을 것임으로 이렇게 되면 나중 꺾는 사람이 不平이 甚하다 하여 公平하게 꺾기 위하여 생긴 制度가 이 영갈이다. 한 部落에서 農業을 共同協業으로 하면서 갈 때문에 不平이 생겨 이것이 部落協和을 깨칠 念慮가 있다는데서 생겨났으나 지금은 영갈制度가 없어졌다고 한다.
6) 其他 風俗
(1) 선 질 꾼
江原道地方의 嶺東西를 連絡하는 自動車 길이 나기 이전의 嶺東西의 物貨의 交易은 선질 꾼들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 寒溪嶺의 東西를 잇는 交易을 했던 선질꾼의 흔적이 인제 元 通에 있고 이곳 臨溪에도 선질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이곳 古老들이 말하고 있다. 우선 이들의 行裝이 元通에서 調査한 것이나 이곳 臨溪에서 調査한 것이 同一한 것으로 보아 선질꾼은 太白山脈을 中心으로 嶺길이 나 있는 곳에는 다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그런데 元通이나 臨溪에 선질꾼으로 다니던 사람으로 生存者는 한 사람이 없어 그들의 生活習俗을 詳細하게 調査할 수는 없고 다만 이들을 본 일이 있는 古老들의 口述에 依하여 그 대강을 살필 수는 있다.
선질꾼은 오늘 말하는 一種의 장돌뱅이로 血緣的 根源을 밝힐 수 없으므로 社會에서는 賤民 대접을 받았다. 이들은 一家를 꾸릴만한 經濟力이 없는 사람들이였음으로 나이 많아도 장가를 들지 못하여 머리 태를 머리에 휘감은 떠꺼머리총각이 大部分이였고 이들은 群을 이루고 指導者가 있어 그 指導者의 命에 따라 行動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行裝으로는 지게와 통노구가 고작이고 지게는 普通 農家의 지게와 달라 지게다리가 없는 지게를 밧줄로 貨物을 엮어지고 다녔다. 통노구라고 하는 것은 이들의 坎事用具로 작은 오지항아리를 그물로 엮어 지게 목발에 달고 다니다가 끼니 때가 되면 개천에서 이 통노구에 밥을 지어 먹는데 이 밥을 통노구 밥이라 한다.
이 들이 嶺西에서 嶺東으로 가지고 가는 物貨는 콩, 옥수수 등이었고 嶺東에서 嶺西로 가지고 가는 것은 소금과 魚物이였다. 이들의 通路는 생계령을 넘기도 하고 백봉령을 넘기도 하는데 장날을 맞추어 다니며 지고 온 物貨는 장날에 전을 벌려서 팔았다.
선질꾼 宿所로 생계령에 반쟁이 주막이 約 四十年前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이 주막집 主人의 아들이었던 장이수란 老人이 아직 生存하여 있다고 한다. 酒幕에서 선질꾼들이 共同으로 食事를 할 때 어쩌다 숟가락을 빠트릴 때에는 酒母가 숟가락에 밥을 크게 한술 놓아서 가져다주고 이 一行이 길을 갈 때 女子가 그 行列을 잡아 세우고 옷고름 하나를 멘 뒤에 보낸다고 한다. 이것은 이들이 장사하는 사람들이기에 財數와 關聯된 俗信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