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 <因緣說話調> II
며칠 전 오래된 책을 뒤적이다 박인환, 서정주, 박목월의 시에 대한 평론을 읽게 되었다.
김상욱의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친구, 1995; 개정증보판, 푸른나무, 1998)』라는 책이었다.
1. 박인환
읽게 된 이유는 책을 넘기자마자 한때 너무 좋아했던 「목마와 숙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난 해에 돌아가신 박인환(朴寅煥, 1926~1956, 강원도 인제)의 시다.
목마와 숙녀(木馬와 淑女)
- 박인환朴寅煥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眞理)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歲月)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이 시는 박인환(향년 29세)이 운명하기 5개월 전에 남긴 유작이자, 1955년 발행된 박인환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朴寅煥詩集, 木馬와 淑女』에 실린 시다. 영화와 문학에 빠져,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드나들다 경기중학을 중퇴하기도 하고, 서양을 동경하여 미국을 여행하기도 하고, ‘버니지아 울프’ 같은 외국 작가를 들먹이고.... '이상하게 살다 간' 시인 이상李箱을 좋아했다.
저자 김성욱은 책에서 ‘사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이 시를 깡그리 외고 있었다.’라고 쓰면서도, ‘전쟁이 마악 끝난 시점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할 만큼 절망 만을 부추겼다’는 약간은 비판적인 평을 붙였다.
시집 '자서(自序)'에서, 박인환은,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한 불안정한 연대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 라고 토로하였다.
시인의 아픔이 묻어난다. 시는 한없이 아름답고, 순수하며, 한 마리 매가 허공을 가르듯 시원하게 읽히는데......
나도 그렇지만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이 시의 앞 부분 몇 줄은 아직도 흥얼흥얼 외우고 있다. 라디오 방송에서 이 시가 종종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노래처럼...... 가수 박인희의 앨범에 실려 있어서다.
가수 박인희가 불러 더욱 유명해진, 박인환의 시에 곡을 붙인〈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도 있다. '세월이 가면' 역시 박인환이 작고하기 일주일 전에 쓴 시다. 노래 말로 탄생한, 첫사랑에 대한 그의 유언 같은 유작이다.
지금은 ‘세월이 가면’ 간판을 내건 카페. 이곳이 전후 명동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 싸롱.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 계단을 내려와 맞은편 대폿집으로 향했다. 6·25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1956년 3월 14일, 명동 한 모퉁이 단골주점, ‘은성銀星’. 그날은 박인환이, 첫사랑이었던 여인의 묘소에, 그것도 10년 만에 다녀온 날이기도 하였다.
박인환, 송지영, 이진섭, 김광주, 김규동 등등 문인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다, 취기가 돌자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한다. 나애심은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청을 거절하는데, 이때 박인환은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첫사랑 묘소에 다녀온 회상回想을 즉석에서 써 내려갔다. 이어 이진섭은 그 시에 단숨에 악보를 그려 나갔고. 그리고 나애심은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세월이 가면
朴寅煥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인 3월 17일 박인환은, 시인 이상의 기일을 맞아 오후부터 문우들과 술을 마신다. 이어 3일 동안 폭주를 하였고, 만취상태로 귀가, 1956년 3월 20일 밤 9시경 집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심장마비로.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를 좋아했던 시인은 그렇게 떠났다. (이상이 실제로 죽은 날은 1937년 4월 17일이고, 시각은 새벽 4시 어름이다.)
다시 '목마와 숙녀'로 돌아가자.
진짜 세월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일까? 문득문득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나는 몇십 년을, 이 구절을 주절거려 왔다. 다만 ‘두려워’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무서워서’였다. '두려워'가 더 극적이다. ‘무서워서’는 무심하고. 감성感性과 이성理性 ?
또 하나, 이 글을 쓰려고 검색하는 도중, 이 구절이 박인환 시인의 시비에 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용마산~망우산~아차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만날 수 있는 시비다. 이렇게 된 마당에 지근 거리에 있는 박인환의 묘비명을 검색해 보니, 묘비에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로 되어 있었다. 그가 쓴 한 문장 한 문장이...... 지금도 마음을 쥐락펴락한다. 우리 세대 만이 갖는 향수鄕愁일까.
2. 서정주
김상욱의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책은 이어 서정주의 시를 소개한다.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명제命題아래. 그리고 다음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伍長頌歌]'다.
松井伍長頌歌
- 徐廷柱 -
아아 레이테灣은 어데런가。
언덕도
山도
뵈이지안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멧千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灣은
여기서 멧萬里런가·····。
귀 기우리면 들려오는
아득한 波濤ㅅ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波濤ㅅ소리·····。
✕
얼골에 붉은 紅潮를 띄우고
『갓다가 오겟습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가튼飛行機가 날라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도라오진 안는다。
✕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伍長。우리의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
印氏의 둘째아들 스물한살 먹은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神風特別攻擊隊員。
靖國隊員。
靖國隊員의 푸른 靈魂은
살아서 벌서 우리게로 왓느니,
우리 숨쉬는 이나라의 하늘 우에
조용히 조용히 도라 왓느니
✕
우리의 同胞들이 밤과 낫으로 정성껏 만드러보낸 飛行機한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엇다간 네리는 곳,
소리잇시 네리는 고흔 꼿처럼
오히려 기쁜 몸즛하며 네리는 곳,
쪼각 쪼각 부서지는 山덤이 가튼 米國軍艦!
수백척의 飛行機와,
大砲와, 爆發彈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가튼 兵丁을실코
우리의 땅과 목숨을 빼스러 온
원수英米國의 航空母艦을,
그대
몸둥이로 네려쳐서 깨엿는가?
깨트리며 깨트리며 자네도 깨젓는가!
✕
장하도다
우리의 陸軍航空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하여 香기로운 三千里의 山川이여。
한결 더 짓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
아아 레이테灣은 어데런가
멧千길의 바다런가。
귀 기우리면
여기서도, 력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波濤ㅅ소리·····。
레이테灣의 波濤ㅅ소리·····。
그리고 저자는 신랄하게 비판을 가한다.
사실 서정주는 우리나라의 가장 유능한 시인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스무살 남짓 되어 시를 쓴 이래 고희를 이미 넘긴 오늘날까지 쉬임없이 시를 써내고 있는 놀라운 힘을 지닌 시인입니다. 거진 오십 몇 년 간을 시에 매달리고 몰두하여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시는 일정한 예술적인 성취와 함께 많은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읽혀지는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식단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의 시는 하나같이 땀 흘리고, 싸우고, 사랑하는 삶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언제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으로 보지 않고 그저 풍경처럼 내려다볼 뿐입니다.
(중략)
서정주는 식민지시대 말기에 앞장서 친일을 한 시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를 통해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일본제국주의의 총알받이로 내보내고자 기를 썼습니다. 물론 그는 ‘마음으로 간음하지 않은 자만이 이 서정주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예수처럼 말하고 싶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간음한 여자가 고통스럽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해방이 되자 그는 뉘우치기는커녕, 미처 씻지도 않은 뒤를 보던 손으로
잔치상을 움켜쥠으로써 손을 깨끗이 씻고 늦게 들어선 주인까지 못 먹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친일 대신에 순수라는 장식이 요란한 가게를 다시 열었으며,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겨레의 목덜미를 총칼로 윽박지르고 권력을 거머쥔 대머리 아저씨에게 ‘단군 이래 최대의 미소’라는 화려한 헌사를 바쳤습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라는 구절이 그러한 인간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라면, 우리도 서정주에게 그러한 헌사를 바쳐야 마땅할 것입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고. 세월이 가면 어린 아이가 ‘대통령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하듯이 사람들은 ‘나는 우리나라 최대의 시인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 서정주의 시」 pp. 75~82.)
미술평론가 김종근은 한국현대화가 70명에 대한 에세이집『마음에 품는 현대 미술』에서, 화가 김기창 화백을 평하면서 미당 서정주를 잠깐 언급한다.
그에게도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니고 씻을 수 없는 상처도 있다. 늘 훌륭한 예술가가 그랬듯이 미당 서정주처럼 그도 친일화가들과 같이 하면서 군국주의를 찬양 · 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 앞장섰던 일이다.
(중략)
젊은 나이에 ‘선전’의 추천작가가 된 연예와 기량으로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기자와의 대담에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물론 의지가 강한 자기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요.” (경향신문, 1991. 8.3)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내 살 속의 과거를 깎아 내며 민족적인 것에 이르고자 신체적 장애를 딛고 끊임없이 정진해 왔다”는 자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것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나 예술적인 성찰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미당이 그의 시를 통하여 후회하고 반성한 것과는 달리.)
김종근, 한국현대화가 70명에 대한 에세이 『마음에 품는 현대 미술, (아트블루, 2009) p. 45』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은 스스로 말했다.
그야말로 눈 뜬 장님처럼 예술 관념을 인식치 못한 제작을 했고, 그 작품에서 예술의 대명사의 대접을 받아 떳떳이 내놓을 무엇이 있었던가. 결국 환경적으로 왜놈의 탈을 쓰고 그들의 유행성을 모방만 하느라고 급급했기 때문이었으니, 일종의 고질적인 우리들의 비예술관념과 깊이 뿌리박힌 일본적인 습관을 현재에 있어서 여하히 처리할 것인가.
단지 지금 와서 일본적인 것을 이탈하려고 성급한 초조를 하더라도 안 될 것이니, 차라리 그것이 일본적이라 하더라도 서서히 이탈하도록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자기 실력을 가다듬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광복기분으로 가뜩이나 어리뻥뻥한 모호한 제작태도를 지닌 우리들이 '조선적, 조선적' 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게 될 것이요, 그 작품이란 죽도 밥도 아닌 엉터리 작품이 될 것이니, 우리는 그런 태도를 청산하고 제일 먼저 화안(畵眼)의 양성, 즉 그림을 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교양을 쌓을 것이오…….
(김기창,「해방과 동양화의 진로」『조형예술』1호, 1946).
“…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었어. 당시 뽑힌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받는 것처럼 나는 지금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
3. 박목월
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는 다음 「순 진짜 원조 마포갈비 본점, 박목월의 시」로 이어진다. 박목월朴木月하면 떠오르는 시가 ‘나그네’다. 교과서에 있었으니까......
이 시는 조지훈 시인이 박목월 시인에게 보낸 시 ‘완화삼玩花杉’에 대한 답시다. 완화삼은 '꽃무늬 적삼을 즐긴다'는 뜻으로, '선비의 소매적삼에 꽃잎이 젖어든 것을 감상한다'는 의미란다.
완화삼玩花杉
- 조지훈趙芝薰 -
목월(木月)에게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우름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 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나그네
- 박목월朴木月 -
술익 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에게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1942년 봄, 조지훈은 박목월을 만나러 경주로 간다. 처음 만난 그들은 보름 동안 함께 지내며 회포를 푼다. 그리고 돌아온 조지훈은 그 느낌을 ‘완화삼‘이란 시로 순화해 써 보낸다. 그 시를 보고 탄생한 시가 박목월의 ‘나그네’다. 보다 정리되고 매끈해진 느낌이다. 허기야 생각해서 처음 쓰는 것보다 보고 쓰는 것이니 그랬을까?
일제 치하에서 우리 말로 시를 써야하는 시인의 마음을 어찌 알랴마는, 술술 읽히는 맛이 옷을 홀랑 벗고 풀밭을 뒹구는 느낌이다. 찬란한 황혼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감상은 어느 덧 사라지고, 그의 시어만 떠오르니 참 마약 같은 시다.
이렇게 두 시를 나란히 두고 보면 그 시대를 살아낸 두 시인이 잠시 풍류를 즐기며 노래한 시로 보인다. 당시 두 시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저자 김상옥은 박목월의 시는 ‘그저 나그네’로, '구경꾼'으로 이 땅 민중의 고통을 바라 보고만 있다고 썼다.
4. 다시 서정주
이제 다시 서정주로 돌아가자. 그렇다, 난 서정주 시인이 친일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교과서로부터 배워 온 그의 시를 두고 친일을 왈가불가할 처지는 아니었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열심히 서정주의 시를 읽었고.
그러나 김상옥의 평을 보고 나서 내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몇 년 전 쓴 서정주 시에 대한 <因緣說話調>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그 뒤에 붙여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시인들, 박인환도, 서정주도, 박목월도, 그들의 삶을 보면 그냥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박목월의 시, '윤사월閏四月'에 나오는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가 떠올랐다. 서정주의 시로 끝나지 않고 박목월까지 온 이유다. 어떤 이는 마음 아파하고, 어떤 이는 그 한가운데 있었고, 어떤 이는 그것을 보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을 엿듣고. 몇 년 전 내가 쓴 '서정주 시 <因緣說話調>'에 대한 보완補完이다.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朴木月 -
송화(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